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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족주의의 다성적(polyphonic,多聲的) 성격에 관하여 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

작성자
hsy6685
작성일
2019-03-18 16:30
조회
9183
한국국제정치학회주최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학술회의 라운드테이블 발표문
2019년 3월 15일, 프레스센타 19층 기자회견장
한국 민족주의의 다성적(polyphonic/多聲的) 성격에 관하여
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

 

들어가는 말
한국의 민족주의를 주제로 국제정치학회가 주최하는 토론회 라운드테이블에서 말할 수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큰 주제이고, 여기에서 그 문제 전체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최근 년에 이르러 민족주의 문제가 정치의 중심 언술로서 큰 정치적 역할을 하고 있는 현상을 소재로 몇 가지 핵심만을 비판적으로 말하려한다. 시간의 제약도 있고 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네 가지 테제로 나누어 토론코자 한다.

 

1. 역사는 청산될 수 없고, ‘역사 해석의 정치화’는 민주주의 발전을 낳지 못한다.
2017년 촛불시위 이후 문재인 행정부에 들어와 우리는 청산이라는 말을 빈번하게, 아니 거의 일상적으로 듣게 된다. 촛불시위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있어 하나의 큰 전환점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거대한 시민운동을 통해 분출되었던 요구들, 또 그 의미와 함축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에 대응하는 방식과 방향은 크게 다를 것이다. 촛불시위의 결과도 그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거대한 사건 이후 등장한 문재인 행정부는 이른바 ‘적폐 청산’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았다. 촛불시위를 불러일으킨 비(非)/반(反) 민주적 세력과 그 행태, 가치관, 제도 전반이 그 대상이 되었다.

적폐 청산이라는 말이 설사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문화적이고 이념적인 가치를 강화할 목적으로 개혁자들에 의해 불러들여졌다 하더라도, 본 토론자는 청산을 모토로 하는 개혁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것인지에 대해 극히 부정적이다. 청산이라는 말은 무척이나 과격한 말이다. 거의 혁명적인 정조를 동반하는 말이기도 하다. 청산이라는 목표가 과거사에 대한 평가를 본질로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잘못된 과거와 개혁된 미래 사이의 시간적 구분, 즉 개혁 조치의 전후로 구분될 수 있는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의 경계는 너무나 포괄적일 수밖에 없다. 엄격히 말해 그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이지않기가 어렵다. 설령 시점의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그런 과거사 가운데 잘못된 것과 잘된것, 비정상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을 구분하는 척도 또한 도덕적이고 이념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과거에 대한 청산 작업은 개혁자의 정치적 목적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바, 부정적인 유산을 다음 정권에 넘기는 것 이상으로 그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자는 것은 곧 민족주의적 역사 교육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민족주의의 이념과 가치를 습득하게 하는 역사교육을 통해 과거사를 청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역사 청산의 지적, 정치적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과거 한국민들이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살아온 경험들 사이를 연결하는 인과관계의 그물망 가운데서 청산 대상이 되는 부분과 보존하고 기려야할 부분이 가려져야 할 것이다. 개혁자가 하는 일이란 그들이 목적하는 역사 해석을 위해 그러한 인과관계를 그들이 지향하는 정치적 목적에 걸맞도록 조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청산돼야 할 역사와 귀감이 돼야할 역사를 나누고 분류하는 일이다. 우선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그러한 분류 작업이 끝나 잘못된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청산될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 청산 대상으로 분류된 역사는 다만 그 이전에는 정치적으로 언표화되지 않았을 뿐, 사실로서는 정상적으로 존재한 것들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여러 정치적 소동을 통해 사라진다 해도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의미와 다른 무게를 지니면서 자신의 소리를 내게 되는 일로 이어지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의 가치나 기준에서 단선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다차원적인 수많은 개인과 집단들의 경험, 그것들이 빚어내는 인과관계가 만들어 내는 다차원적이고 다선적인 변화 과정들은 역사 이해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이해와 교육은 정치의 수단으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역사는 관제 교육이 아닌 학계와 시민사회가 누려야 하는 자유의 공간 안에 있어야 한다. 과거 본 토론자는 여러 기회를 통해 박근혜 행정부 시기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했던 적이 있다. 비판의 일차적 논거는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역사적 기여로 강조하려 한 내용에 대한 것보다는 중고등학교 역사교육을 국정화의 방식으로 강행하려 한 데 있었다. 사실 나 자신 박정희식 산업화모델에 대해 완전히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산업화는 박정희의 공적만은 아니다. 1960-70년대 한국의 산업화는 박정희의 리더십 말고도 우리사회의 높은 교육수준, 해방 직후 있었던 토지개혁, 흔히 “초청에 의한 상승”이라 불리는 중심부 국가의 역할, 그리고 일본의 식민통치가 남긴 사회간접자본 등의 여러 요소들이 고려되어야 그 전체 면모가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관주도의 역사교육은 이런 넓은 이해 방법을 진작하기보다는 위축시킬 뿐이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현재 문재인 행정부가 추진하는 역사청산 정책 특히 일제잔재 나아가 친일잔재 청산 정책에 대해서도 같은 이유로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유산의 청산을 목표로 하는 관제 캠페인은 촛불시위가 창출해낸 현 정부와 그 개혁성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를 남북한을 아우르는 한국 전체의 역사적 정통성과 결합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 아닐 수없다. 그러나 본 토론자에게는 그것이 관제 민족주의(official nationalism)의 전형적인모습으로 보인다. 3.1 운동 100주년은 왜 이런 방식으로 기념돼야 하나? 여러 문제들 가운데서 특히 두 가지 특징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그것이 현대 한국의 지극히 갈등적인 문화투쟁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해방이후 최초의 3.1절 기념행사가 좌우로 나뉘어져 행해졌던 과거를 재현하는 듯, 공식 기념식장에서 흔들어지는 태극기와 이른바 “태극기 부대”에서 흔들어지는 태극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은, 같은 역사적 사실이라도 함께 수용하고, 기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3.1 절 기념사에도 언급되듯 결국 친일잔재에 대한 청산이란, 곧 그동안 진보를 “빨갱이”로 공격했던 보수를 향한 다른 표현 이상의 것이 아닌 것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이 호명이 내포하는 것, 한국의 보수층과 친일잔재를 연결시키는 것은, 진정으로 포괄적이고, 사려깊지 못한 표현이자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촛불시위를 통해 구현된 “일종의 좌우합작”에서 우리가 기대했던 방향과는 달리, 한국의 좌우이념갈등이 순화되고 수렴되는 변화가 아니라 더 격렬해지고, 과거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반복할 뿐이다. 수십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이런 정도의 이념적 분열상은, 촛불시위에도 불구하고, 아니 촛불시위를 앞세운 민족주의 동원 때문에 재현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3.1 독립운동은 해방 이후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된 반일 감정과 함께 일본을 나치와 비유하거나 악마화 하고 있는 일각의 현실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침탈의 기억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가까운 현실로 불러들여지고 있다. 이는 정치 공간을 닫아 버리는 결과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보수층들이 과거사를 망각하고 역사의식도 없이 마치 독립운동을 폄훼해왔던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본 발언자의 관점에서 그것은 위선이고 허구이다. 플라톤이나 마키아벨리 같은 대철학자나 이론가들도 정치에서 위선은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의 근본적인 기초가 돼서는 안 된다. 정부가 주관하여 친일 잔재청산을 내걸고 문화투쟁의 형태로 의식화 작업을 추진한다고 할 때, 그것이 가져오는 부정적 결과는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일제식민잔재 청산 문제가 왜 허구이고, 위선인가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겠다.)

민주주의는 사회가 만들어내는 여러 다원적인 이익과 가치, 열정과 요구들을 정치의 제도화된 틀 안에서 이를 조정하고 타협해서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한 정부의 갈등 해결 방식과 내용은 다음 선거를 통해 다시 결정과 승인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어디까지나 잠정적이다. 민주주의에서 정부 정책이란 정당들 사이의 경쟁에서 누구도 완전한 승자도 완전한 패자도 아닌 타협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점진적이고 누적적인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렇지 않고 한 때의 승자가 기존의 게임 룰, 그것을 움직이는 제도와 규범들을 포함하여 정치경쟁의 지형 자체를 자신에 유리하도록 변화시키려 할 때 민주주의는 위협받게 된다. 청산 정책 목표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대원칙으로부터 이탈돼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정치의 승자로서 개혁자가, 있는 사실과 역사를 포함해 누군가를 청산의 대상으로 규정한다면, 더 강렬한 반작용과 도전을 불러오게 된다. 그것은 사회를 더 깊이 분열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제학자이자 사회철학자였던 앨버트 허시만의 개념을 빌려 이러한 상황을 묘사할 수있다. 청산, 특히 역사청산이라는 말이 동반하는 개혁은 사회경제적 이익 갈등과 같은 “나눌 수 있는 갈등”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그것은 인종, 언어, 종교, 민족문제와 같은 “나눌수 없는 갈등”의 범주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눌 수 없는 것을 두고 갈등하게 되면 타협과 조정의 여지는 줄어든다. 정부의 개혁자들은 적폐청산의 외연을 크게 확대하여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것이 한국사회를 민주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친일잔재청산”, “친일파청산” 등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실제로 그 외연은 크게 확대되었다. 개혁자들은 아마 일제 식민잔재가 전후 한국사회에서 권위주의를 만들어내고, 한국 보수의 사회적 기반이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사 청산을 해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현대 민주주의 이론의 기초를 놓은 로버트 달은 루소의 이론에 연원을 두고 있는 “민중 민주주의”(populist democracy)가 다수결을 결정 원리로 삼는 것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미국의 남북전쟁 사례를 든 바 있다. 노예해방을 둘러싼 북부의 공화당과 남부의 민주당이 격돌했던 때이다.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이 표결로 이 문제를 결정짓고자 했을 때, 그 결과는 곧 내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슈의 성격에 따라, 즉 이슈에 걸린 열정의 강도가 높을 때 그것은 다수결로 결정할 수 없다. 한 사회가 극단적인 갈등으로 대립할 때, 무엇이 좋은 것인가를 가려내는 데는 단순한 다수결이 아니라 절대적인 동의를 필요로 한다. 역사 문제가 그런 이슈가 아닐 수 없다. 정치에서 역사 청산은 목표가 될 수 없다.

 

2. 민족주의를 통한 일제식민지배 역사청산은 사실적이지도, 가능한 일도 아니다.
한국에 대한 일제식민통치를 전면적으로 평가하는 문제는 여기에서 가능하지도 않고 다룰 주제도 아니다. 다만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개혁자들이 일제식민잔재를 이해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토론을 하고자 한다. 문제를 그렇게 한정한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포함된다. 하나는 일제 식민통치는 한국사회에 근대화의 유산을 남겼는가 그렇지 않은가, 남겼다면 그것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나 하는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식민통치 하에서 어떤 것들은 그 유산에 있어 극히 해악적이어서 청산 대상이라고 평가할수 있다고 할 때, 청산은 무엇을 의미하고 또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다.

위의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는 두 측면에서 접근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정치적 측면이다. 이는 근대국가를 위한 통치체로서 행정관료체제를 포함하는 국가건설의 하부기반을 제도화하는 문제를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근대국가의 정치체제를 떠받칠 수 있는 경제적 산업적 근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하부기반에 대한 것이다. 한국의 근대화는 이 두 수준 모두에서 일제 식민통치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그것은 일제가 한국을 교두보로 삼아 만주와 중국대륙에서 일본식민 통치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흔히 ‘식민지 근대화’라고 불리는 변화는 이렇듯 일본의 식민통치하에서 이루어졌다. 근대국가를위한 제도적 기반과 산업적 근대화와 관련하여 한국민족주의는 완전히 자기 모순적 양면성을 갖는다. 한국민족주의는 일본의 식민지배과정에서 그에 대한 저항으로 형성된 민족독립사상에서 그 원천을 갖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일본은 한국 근대화의 동력이었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식민지를 통해서였다. 근대화가 긍정적이라 해도, 식민지배는 그것의 타율성때문에 부정적이라고 자기 모순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아시아대륙으로 지배를 확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는, 그들의 통치체제를 통해 피지배 인민들을 문명화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과는 달리, 통치기간 내내 식민지배의 중심부와 피지배 식민 국가를 통합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식민지 사회에서 국가와 사회가 분리되는 식민지 통치체제와 사회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민족주의 이론가들은 그 특징을 일종의 “병행적 사회”(parallel society)의 출현이라고 개념적으로 표현하기도한다. 이는 식민지 통치체제와 식민지 사회가 서로 분리돼 병행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경략 내지 식민지 통치를 위한 행정기구가 피식민지 인민 위에 군림하면서 만들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유럽식 식민지동화(同化) 정책과 같은, 조선에 대한 “內鮮一體” 전략은 헤게모니를 갖기 어려웠다. 식민지조선을통치하기 위해 일본은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관료국가와 아울러 반체제 독립운동을 분쇄할 경찰을 건설했고, 경제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은행, 기업과 같은 근대적인 제도와 기구를 발전시켰다. 하버드대의 한국사 교수 카터 J. 에커트는 지금까지 한국 근대화에 앞장섰던 두 사례에 대한 실로 방대한 연구결과를 각각 두 권의 책으로 발간했다. 하나는 일제하 한국 최초로 자본주의 기업을 창건해 한국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모델을 만든 경성방직과 삼양사를 창건하여 식민지하에서 근대적 자본주의 기업을 일으킨 김성수, 김연수를 주축으로하는 고창김씨 일가에 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박정희식 발전국가” 모델로 불리는 1960-70년대 권위주의 산업화를 이끌었고 일제하 (만주)사관학교에서의 교육과 군 경력을가진 박정희다. 이들 두 사람이 모두 친일 경력이 알려져 비난에 시달렸다는 것은 두루아는 사실이다. 아마도 민족주의적 신념에 확고한 사람들은 인정할 수 없겠지만, 이들은 일제식민통치시기와 냉전시기를 거쳐 분단국가를 건설하는데 앞장서고 또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일제 군국주의-제국주의가 대륙침략을 본격화했던 조선조 말과 특히 189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1930년대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쳐 냉전초기단계에 이르는 시간 동안 한국민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 사실상 아니면 완벽하게 무력했을 뿐이다.

만약 식민지배에 대한 해방투쟁을 한 민족의 성원으로서 해야 할 지상의 과제로 여기는 원리주의적 민족주의자라면 일체의 친일적 행위를 규탄하면서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한 수를 친일파로 분류할지 모른다. 윤리학의 “결과주의”를 믿는 시민이라면, 이가운데 누군가 식민통치를 전략적으로 수용하면서 뒷날 조건이 허용할 때 사회발전에 크게기여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면, 이를 친일파나 친미파 등으로 레이블링하는 것에 대해 다르게 판단할지 모른다. 일제식민지배는 물론 그 뒤 냉전과 분단, 전쟁을 강제 당했을 때 당시 한국민의 선택은 어떤 것일 수 있었을까?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민족해방투쟁과 그 가치가 아주 짧은 동안 표출된 다음, 다시 세계적 차원에서 나타난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라는냉전적 균열축이 가혹하게 부과된, 일종의 “중층결정”(over-determined)적 상황에서 한국민의 선택은 무엇일 수 있었을까? 본 토론자를 포함해 진보적 사학자들이나 정치학자들은 중간파들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설정하면서 좌우합작이 현실화되었다면 분단을 막고, 나아가서는 민족 간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이 반(反)사실적(counter-factual) 가정 이상 그 어떤 현실성을 갖는 가능성이었나? 현재의 시점에서 이 시기를 되돌아 볼 때, 해방 후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서 취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것과 덜 나쁜 것 사이에서 취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었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본 토론자는 그런 접근이 현명한 일일뿐 아니라 훨씬 더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개혁자들이 역사청산, 친일파청산을 실제의 정책으로 추진한다고 할 때, 그것은 왜 가능하지 않은가? 이제 이 문제를 보도록 한다. 냉전이 한반도에서 분단국가를 현실화 했을 때 그것은 미군정의 업무소관이었고, 미군정하에서 국가건설의 인프라는 사실상 일제가 남기고 떠난 행정, 사법, 그리고 군, 경찰과 같은 식민지관료체제였다는 것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그것을 관리했던 공직자들, 그리고 식민지사회에서 형성된 일제하 고등교육을 받은 인사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해 부르주아 엘리트들이 새로운 체제를 운영하는 주역일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말의 민주화 그 이전까지 대부분의 시기 동안 거의 직접적으로 일제의 유산 위에서 국가와 사회가 만들어졌다. 군과 관련하여 볼때, 일제하 일본군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군부의 상층 지휘관으로 등장한 것은 전두환정권 때가 처음이었다. 풀어 말하면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현대사에 있어 절반에 이르는 전반기는 식민지 유산이 인적 요소는 물론 제도와 그 운영의 방식 나아가 정치문화등 여러 면에서 거의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럼으로 한국의 민주화가 아무 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또 우리가 선택한 한 외국으로부터 제도나 운영원리, 그것이 작동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기반 모두를 수입할 수 있는 상황을 가져온 게 아니라면, 앞선 체제에서 만들어진 조건들 속에서 긴 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한다는 말은, 민주화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의 국가와 사회의 몸체를 구성하는 많은 부분을 청산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혁명을 통해 한국사회를 새로운 원리에서 재구성하는 대대적인 해체작업을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혁명으로도 불가능하다. 본 토론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잘 해 나가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과거의 유산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서구 사회가 발전시켜왔던 민주주의의 원리를 굳건히 실현해 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즉 한 개인과 마찬가지로 한 국가와 사회도 양손을 잘 사용할 때 민주주의를 만들어 낼수 있다는 뜻에서, 본 토론자는 “양손잡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해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일제식민잔재 청산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정부가 그렇게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본 토론자는 이를 위선이라고 믿게 된다. 가능하지 않은것을 옳다고 말하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기획일 뿐이기 때문이다.

 

3. 남북한 평화공존을 위해서는 민족주의 그 이상이 필요하다.
한반도에서 70년도 넘는 냉전은 1민족 2국가 체제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동반했고 다른 어떤 국가 간의 적대관계보다 더 적대적인 남북한 관계를 만들어냈다. 나아가 이들 관계는 상대의 존립을 위협하는 핵무장을 포함하는 군사안보적 대립을 불러왔다. 민족통일 국가의 이름으로 같은 민족의 상대를 절멸시킴이 없이는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고 안정화 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다. 민족주의란 정치적 단위와 국민적/인종적(ethnic) 단위가 일치해야 한다고 믿는 정치 신조를 가리킨다. 즉 1민족1국가의 추구는 민족주의의 본질이다. 그러나 냉전과 분단 하에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민족정통성의 획득 내지 쟁취를 위한 생사투쟁을 그 핵심으로 했다. 이는 냉전하의 한국 민족주의의 자기분열증적 특성이다. 그리하여 한국 민족주의는 민족 내부에서 화해하기 어려운 갈등적이고 이념적인 언어로 전환됐다. 일제하 민족독립 국가를 건설코자했던 역사적 환경에서 민족주의 이념이 창출됐고, 그 이념을 바탕으로 독립된 민족국가를 건설코자했던 프로젝트는 확실히 실패했던 셈이다. 한국민족주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었을까?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가 남북한 각각에서 그 어떤 경쟁적 정치이념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이다. 이 상황은 냉전시기를 통해 불변적으로 그대로 유지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그것이 어떤 불완전한 형태와 내용을 갖는 것이든 간에 한민족은 하나의 민족공동체라는 감정과 열정을 불러오는, 여전히 두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탈냉전, 평화공존을 지향하고 내다보는 전환기적 관점에서 민족주의는 무엇인가?

한국의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는 “분단시대”와 “분단체제”라는 담론이 큰 영향력을갖는다. 냉전하의 분단 상황에서 그 말은 큰 설득력을 지니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본 토론자는 비판적이다. 무엇보다 이 말은 1민족1국가를 전제로 하는 민족주의 이념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분단은 비정상적인 것이고, 특정의 역사적 시기 동안만의 잠정적인 시간이기 때문에, 정상으로의 복원은 우리가 해결해야할 최대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과제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관점에서는 한반도의 통일은 민족의 지상 과제이고 통일을 실현하는 것 없는 미래는 아예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갖는 함의는 한반도의 탈냉전과 남복한간 평화공존은 통일에 이르는 과정이고, 중간 단계일 뿐이다. 그 다음 단계는 이론의 여지없이 민족통일국가의 건설이다. 이 논리를 따른다면 분단이전 상태로의 복원이 미완의 민족 프로젝트를 마감하는 일이 된다. 이런 담론, 이런 논리는 한국의 근현대사는 1민족1국가의 일직선상에서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단선적 역사관에 입각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본 토론자의 관점에서 탈냉전, 평화공존은 분단의 극복과 통일된 민족독립국가의 완성을 위한 수단이나 중간 단계가 아니다.

본 토론자의 생각으로는 데탕트와 평화공존은 1민족2국가체제라는 비정상적인 역사의시간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공존 하에서의 남북한의 지향점은 사실상(de facto)으로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de jure)도 분단된 국가의 존재, 즉 상대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과거의 복원이 아닌,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역사적 경로를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남북한 평화공존의 안정화, 제도화와 일국으로의 통일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3.1절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그 의미를 짚어본 최근 뉴욕 타임스에 실린 한 기고문에서 황경문 남가주대 한국사 교수는 “1919년 봄의 사건들이 뒷날 독립운동과 한국 문화와 정체성을 꽃피우는 계기였던 반면, 또한 그 사건들이 종래는 나라를 분단시키고, 아마도 영원히 그렇게 되는 재난적 힘들을 분출시켰다”라고 쓰고 있다. 마지막 문장 “영원히 그렇게 되는 재난적 힘”이라는 표현이 우리를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현재 한국민들 앞에 있는 것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적대적 두 민족국가의 지속이냐 아니면 통일국가의 목표를 실현하느냐의 선택이 아니어야 한다고 본다. 그보다는 적대적 두 민족국가 사이의 평화공존의 선택을 더 중시해야 할 것이다. 평화공존과 통일국가라는 두 선택을 같은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한반도에서 치러졌으나 내용상으로 세계 전쟁의 내용을 갖는 한국전쟁을 통해 우리가 경험한 바 있듯이, 통일국가는 전쟁으로도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분단은 평화공존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이해되어야 한다.

 

4. ‘민족주의의 상대화’를 통한 현실주의적 접근이 중요하다.
긴 냉전 시기를 경과하면서 데탕트를 맞이한 현재에 이르기까지 분단된 남북한은 각각 그들 자신의 민족주의 이념을 국가의 정당성으로 삼았다. 또한 서로에 대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민족 정통성 경쟁’에서 민족주의는 각각의 존재 이유를 떠받치는 이념이었다. 그러나 이념으로서의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내용이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 간 체제, 즉 국제정치적 조건에서 개별 국가들이 추구하는 목적을 실현하고자 할 때, 그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민족주의만이 아니다. 남북한의 경우 북한이 공산주의였다면, 한국은 자본주의였고, 이것이 두 나라의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내용을 더 많이 규정했다. 이 점에서 민족주의는, 인도 출신 정치학자 파타 차터지의 표현을 빌리면, “부차적인 담론” (derivativediscourse)에 불과하다. 국제정치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시 볼 수 있다. 민족주의의 정통성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수단까지 불사하는 민족 간 투쟁은, 한편으로는 공산주의를,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를 둔 자본주의를 내용으로 삼았던 국가들 간의 전쟁이다. 그것들은 각각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이자 가치이고, 생활방식이고 내용이다. 단순히 민족주의에 의해 이끌린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사회경제적 체제는 다르지만 민족의식의 고양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을훨씬 압도하는 실제의 삶의 실제 내용이자, 이익이고, 가치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국가 간 체계를 통해 조직돼 있고,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고 운영되는 실제의 영역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을 통해 한국민족주의가 두 차원을 갖는다는 사실을 실제로 체험했다. 한 차원은, 다른 정치체제를 지향하는 민족 간 내전이다.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다른 차원은, 개전과 동시에 그것은 국제전으로 전환됐다. 전쟁은 한반도에서 치러졌지만, 더 이상 우리의 전쟁은 아니다. 분단과 전쟁의 원인과 성격 또한 그러했던 것만큼 냉전을 데탕트를 통해 평화공존으로 바꾸는 문제 또한 두 차원을 갖는다. 첫째는 하나의 민족공동체로서의 역사와 의식을 공유하는 남북한 간 관계의 차원이고, 둘째는 국제정치적이고 글로벌적 차원이다. 여기서 강조돼야 할 것은 남북한 간 적대관계를 평화공존의 상태로 바꾸는 문제 또한 한반도 내에서의 남북한 국가 간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이행과정에서 최대문제로 등장한 이슈가 북한의 핵무장화이고, 비핵화라는 것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현재 문재인행정부를 비롯해 한국민들의 압도적 다수는 이러한 이원적 차원에서의 갈등을 잘 인지하지 않으려 하거나 못하고 있다.

북한의 핵무장화와 비핵화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북한의 외교와 한국의 외교는 확연히 다르다. 북한이 핵무장화를 시작한 것은 지난 1980년대 말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의 해체가 이끈 냉전의 종결과 때를 같이한다. 1993년 국제정치의 쟁점의 하나로 부상한 1차 북핵위기는 이를 표면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냉전 해체는 북한의 입장에서는 국가 간 체계에서 독립된 국가로서 존립하고, 인정받는 것이 위기에 처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 핵무장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이다. 북한의 핵무장 포기는 국가로서의 존재에 대한 국제적 인정, 즉 미국에 의한 인정 없이는 현실화되기 어렵다. 그것이 지난한 것은 물론이지만, 여기에서 제기되는 또 다른 이슈는 핵무장과 비핵화는 글로벌한 이슈라는 점이다. 북한은 냉전시기 부터 그들의 생존과 자립을 위해 공산진영 내에서 소련과 중국 사이의 균형을 통해 살아남았고, 자립적 공간을 운영하는 외교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이제 냉전이후 시기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과의 외교 또한 같은 원리 위에 서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국가 존립을 위한 최종적인 배후 세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인접 강대국으로부터 자립코자 하는 외교가 그것이다. 요컨대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고립돼 있는 국가였고, 또 현재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고도로 집중적인 외교술을 발전시키는 능력을 발휘해 그들의 생존을 유지해왔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한국은 냉전 시기 전체를 통해 군사 안보와 국제정치 관계에서의 지위는 물론, 경제발전과 교육문화 등 모든 면에서 미국에 의한 전면적 지원과 후원을 받았다. 이 점에서 한국은 북한에 비할 수 없는 이점을 누렸다. 그러나 이러한 한미관계는 양면성을 갖는다. 부정적 효과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냉전의 전 기간에 걸쳐 소련을 압도하는 세계 초강대국이었고, 사회주의 진영의 해체 이후 미국 중심의 단극적(unipolar) 국제정치 체제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국가 간 체제에 있어 한국의 지위는 한미관계를 통해서 만으로도 충분히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역설적으로 국제정치 문제를 이해하는 데서나, 그 본질이 세계적 수준의 국제정치질서의 문제인 남북한 데탕트와 특히 핵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외교의 수준과 역량을 높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미관계라는 보호막 속에서 안주해 온 결과이다.

문재인 행정부가 추구하는 남북한 간 긴장완화와 평화공존 정책 그 자체가 비판의 대상일수는 없다. 그러나 남북한 간 민족문제와 핵문제를 다루는 비전과 내용, 그리고 그 방식에 있어 비판의 여지는 많다. 본 토론자의 관점에서는 국제정치, 또는 국가 간 관계의 본질은 정치를 이해하는 방식과 직결된다. 여기에는 국제정치의 본질을 정치의 자율성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 힘의 정치”(power politics 또는 Realpolitik)로 접근하는 정치적 현실주의를 필요로 한다. 국제정치를 이러한 퍼스펙티브로 접근했던 한스 모겐소(Hans. J.Morgenthau) 만큼 오늘의 국제정치 현실에서 적실성을 갖는 이론가를 발견하기란 어렵다. 국제정치에서 국가 간 힘의 관계는 힘에 의한 견제와 균형을 통해 비로소 제어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늘의 국제정치 질서는, 특히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볼 때, 냉전과 그 이후 미국 단극체제적 특징을 벗어나 그와는 분명히 다른 체제로 변화하고 있는 전환기이다. 이를 “느슨한 양극체제” 또는 “이원적 위계구조” (dual hierarchy) 등 뭐라고 부르든, 미국과 중국이 세계정치를 운영하는 공동운영자로서 역할을 하는 체제이다. 이것은 한반도의 탈냉전을 통한 형화공존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이를 제도화하는 동아시아 국제정치 환경이기도하다. 이 문제에 관련해 한국정부의 비전, 목표, 외교의 방향과 수단들은 어떠해야 하나?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정부가 한반도에서의 평화공존이 남북한관계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적 차원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 전체를 아우르는 글로벌한 이슈라는 점을 인지하는 문제이다. 공존외교, 평화외교가 마치 남북한 냉전관계를 극복하는 민족 내부의 문제인 듯이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으로부터 최근의 미-북한 정상간 하노이 회담에 이르기까지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북한의 경제개방과 발전으로 이어지고, 성장과 고용이 막혀있는 한국경제의 궁경을 해소해 줄 수있는 엄청난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부풀어 오르는 분위기를 조성한 바 있다. 마치 앞선 박근혜 행정부 때의 “통일대박론”이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이다. 평화주의적이고 온정주의적인 정의(情誼)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면서 남북한 간 관계를 낙관적 전망으로 한껏 부풀게 하고 있다. 통일의 여망을 품는 민족주의적 프로젝트가 5년 단임 대통령제가 동반하는 업적주의와 결합하면서 조급성을 나타나는 것은 현실주의적 힘의 정치와 충돌할 수 있다. 핵을 가진 정권과 협상하고 북핵문제를 정리 하는 데는 냉혹한 현실주의의 안목과 외교가 요구된다. 그것은 민족정서를 온정적으로 낙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남북한 관계의 문제이고, 핵문제는 남북한 간 당사자관계를 넘어서는 세계적 차원의 문제라는 인식과는 잘 조화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세계정치에서 독자적인 플레이어가 돼야 한다는 외교적 차원의 문제와 남북한관계를 우호적이고, 정의적일 될 수 있도록만들어 이 힘으로 미국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힘의 정치와 감성의 정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지난날 한반도의 냉전은 남한은 미국, 북한은 중국이라는 후견국가들에 의해 지원되는 구조였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전체가 냉전의 대립구조를 유지했다. 이제 이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요구된다. 한국은 여기에서 과거 분쟁과 대립의 진앙지였던 한반도를 평화공존의 기반으로 하여 역내 국가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남북한 등- 이 평화체제를 형성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외교의 목표로 설정할 수 있다. 동아시아 평화질서를 구축하는데 있어 일본의 적극적 역할이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환경 하에서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요구하는 일본의 역할은, 일본만의 소극적 평화주의가 아닌, 동아시아에서 적극적 평화주의를 구현하고 제도화하는 데 있다. 일본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일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동아시아의 평화체제는 어떻게 동아시아 집단안전 보장과 연관될 수있나? 동아시아의 평화체제는 유럽에서의 북대서양 동맹기구 (NATO) 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유럽에서의 냉전은 동아시아보다 한 세대나 더 빨리 해체됐고, 미소간 협상을 통해 핵군축에서 큰 성과를 거둔 바 있다. 그러나 동구사회주의 해체로 인한 냉전이후 유럽에서의 안전보장체제는 러시아를 잠재적인 평화위험 국가로 설정하는 냉전적 구조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동아시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지역에서는 중국과 북한을 배제하는 것, 즉 냉전적 대립구조가 유지되는 상태에서 평화질서가 유지될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는 평화공존 체제와 집단안전보장 체제라는 두 개의 다른 체제를 중첩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람직하다. 그것은 가능할 수 있나? 본 토론자는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중국과 북한이 평화공존체제를 가능케 하는 다른 한편의 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화공존체제는 곧바로 집단안전보장체제와 중첩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 평화공존의 당사자가 집단안전보장체제의 성원이 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평화와 안보는 동시에 성취될 수 있다. 그 수단은 동아시아지역 평화-안보체제에 참여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유연한 연대, 유연한 동맹을 통해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관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원적위계질서”는 일본을 비롯한 다른 동아시아국가들이 연대하는 유연한 동맹관계를 통해 평화의 실현을 위해 작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게 된다. 한국외교의 기예와 활동공간은 이 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한미관계를 중심축으로 하되, 동아시아 역내의 강대국이자 지정학적으로 상보적 위치에 있는 한일관계의 강화가 여기에 추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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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thought on “옐로우의 게시판

  • 2022년 8월 12일 at 1:1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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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은 뭐하는분인데 이런블로그 하세요? 너무 전문적이어서 개인블로그 아닌것같은데 무튼 사이트 잘 쓰고갑니다 너무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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