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달러-금 태환 정지 선언 – 1971년

우리는 현재 역사상 전례가 없는 세계통화제도에서 살고있다. 그리고 이 세계통화제도의 궁극적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불확실하다.

 

현재의 세계통화제도는 세계의 모든 주요 화폐들이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달러라는 하나의 불환지폐본위와 연결되어 있다. 국제 화폐인 달러가 금 등 귀금속의 보장 없이 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체제는 오로지 미국 정부의 신뢰도, 그리고 이 체제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국가와 개인들의 지원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 이론상 미국은 푸른색 종이(지폐)를 찍어냄으로써 세계 도처에서 물질적 부를 획득하게 됐다. 미국은 금융제국이고 ‘달러 패권’의 시대이다.

※ 불환지폐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79050&cid=42085&categoryId=42085

 

1944년에 만들어진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는 미국의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했지만 금태환(금 1온스 – 35달러)을 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금본위제의 전통을 유지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닉슨 쇼크(Nixon shock)’라 불리는 1971년 8월 15일에 발표한 달러와 금의 교환 정지로 금본위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이후 국제통화제도는 현재와 같은 변동환율체계가 등장한다. 이러한 세계화폐질서의 위기는 미국 세계헤게모니의 위기와 더불어 전개되었고, 지오바니 아리기는 이 시기인 1968~1973년에 미국이 실물적 팽창에서 금융적 팽창으로의 교체가 발생하였다고 보았다.

※ 미국체제 위기 (1968년 ~ 1973년) : http://yellow.kr/blog/?p=582

 

이렇게 등장한 변동환율체계를 학자에 따라서 자본주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체계의 상황으로 보기도 하고, 아니면 앞서 존재하던 체계의 위기 때문에 채택된 형태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는 현재의 불투명한 세계경제적 상황에서 관심이 없을 수 없으니 따로 정리해야 할 듯하다.

 

1968년부터 런던 중심의 유로달러시장에 유동성 기금이 급격히 폭발적인 가속도를 붙이며 성장하였는데 이는 브레튼우즈 세계화폐질서를 급격히 불안정하게 만들고 결국 붕괴에 이르게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는 고도금융을 지배해온 고정환율제 체제에 대항해 고조되고 있던 투기 물결을 억제하는 싸움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 및 그와 연합한 중앙은행들이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세계 유동성에 대한 통제권이 다시 공적 수중에서 사적 수중으로, 워싱턴에서 런던과 뉴욕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1971년 8월 이후 미국 달러는 세계 통화의 권력을 갖게 됐다. 이는 미국이 무한대의 예산적자를 편성할 수 있도록 도왔다.  미 경제방송 CNBC에 따르면 2015년 11월 기준 미 정부의 현재 부채수준은 18조6000억달러를 넘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적자 비율은 111%다. 그럼에도 미 정부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는다. 달러패권이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엥달은 “한도가 없는 마이너스통장을 가졌지만 이를 갚을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했다. 최근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 도널드 트럼트도 “달러를 찍어서 정부 부채를 갚겠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미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고 있지만 현재 달러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달러가 전세계의 외환거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7%에 달한다. 세계 외환보유고의 60%, 국경간 채권시장의 62%를 차지한다. 글로벌 뱅킹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신현송 국제결제은행(BIS)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세계 은행시스템은 달러로 굴러 간다”고 말했다.

 

※ 국제통화제도의 변천을 간략히 살펴보면;

– 금본위제도 : 1880 ~ 1914 (영국의 패권)

– 두 세계대전 사이 : 1918 ~ 1939 (국제통화질서의 위기)

– 브레튼우즈 체제 : 1944 ~ 1971 (미국의 패권)

– 1970년대 : 화폐 위기

– 신자유주의 체제(현재) : 미국의 금융적 팽창, 신용화폐의 시대

◎ 금본위제(고정환율) -> 브레턴우즈 체제의 금환본위제(고정환율) -> 현재의 달러본위제(변동환율)

 

※ 관련글

– 브레튼우즈 체제 (Bretton Woods) – 1944년 : http://yellow.kr/blog/?p=1093

– 자본주의 황금기 (1950년 ~ 1973년) : http://yellow.kr/blog/?p=984

– 미국체제 위기 (1968년 ~ 1973년) : http://yellow.kr/blog/?p=582

 

이 당시의 세계사 연표를 살펴본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71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

–  지오바니 아리기, 비벌리 J. 실버 / 최홍주 역 / 모티브북 / 2008.10.17

 

…… 서유럽의 미국의 힘의 네트워크로의 편입은 미국 정부 자체가 맡았다. 일단 미국 기업들이 수익성 있는 현지 법인을 설립할 수 있도록 정부가 이 지역에서 정지 작업을 마치자 수많은 미국 기업들이 유럽에 침입했고 이는 미국 패권의 강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현지 법인은 곧 그것 나름의 역학을 발전시켰고, 이는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에 역작용을 일으켰다.

우선 첫째로, 미국 기업들의 자회사가 설정한 외국 소득에 대한 권리는 그에 비례하는 미국 거주민의 소득과 미국 정부의 세입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미국 “전쟁-복지 국가”의 재정 위기가 베트남 전쟁의 영향으로 심각해진 바로 그때에 점점 더 높은 비율의, 미국 기업들의 소득과 유동성이 본국으로 보내지는 대신 역외 금융 시장으로 도피했다(Mendelsohn, M. S. 1980. Money on the Move. New York : Praeger). 체이스 맨해튼 은행의 유진 번바움(Eugene Birnbaum)의 말처럼, 결과는 “어느 국가 어느 기관의 규제 권한도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이루어진 거대한 규모의 유동성 자금과 시장의 축적(유로달러 금융계)이었다.” 미국 자본의 역외 금융시장으로의 대규모 도피는, 미국이 지배하는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미국 정부의 재정 위기를 촉진했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미국체제의 위기가 도래했음을 알린 것은 1968년과 1973년 사이 서로 구분되면서도 밀접하게 연관된 세 개의 영역이었다. 군사적으로, 미국은 베트남에서 훨씬 더 심각한 곤경에 처했다. 금융적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브레턴우즈에서 수립된 세계화폐의 생산 및 조절 양식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나아가 그 유지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미국 정부의 반공십자군은 국내와 해외 모두에게 정당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위기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1973년에는 모든 전선에서 미국 정부가 퇴각하였다.

1970년대의 나머지 시기에 미국 국가 전략의 특징은 세계정부 기능을 기본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되었다. 마치 미국 내 통치집단들이 세계가 미국에 의해 지배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관리되도록 내버려 두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 그 결과 이란혁명과 1980년 인질 위기를 겪으면서, 전후 세계질서를 통해 형성된 상태가 불안정화되었고, 미국의 권력과 위신이 급속히 쇠퇴하였다.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현 국면에서 금융적 팽창의 이륙을 한 것은 이런 위기의 필수적이자 초기적 측면이었다. 그 이륙은 1968년 시작되었는데, 이는 런던 중심의 유로달러시장에 확보된 유동성 기금이 급격히 폭발적인 가속도를 붙이며 성장을 경험한 때였다. 이런 폭발적 성장의 결과, 1971년이 되면 미국 정부는 금-달러 교환 본위의 신화를 포기해야 했고, 1973년이 되면,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실물적 팽창 국면 중에 고도금융을 지배해 온 고정환율제 체제에 대항해 고조되고 있던 투기 물결을 억제하는 싸움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 및 그와 연합한 중앙은행들이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시장-즉 주로 유로달러시장-이 각국 통화 간의 그리고 각국 통화와 금 사이의 가격을 고정시키는 과정의 집행자가 되었다.

……

세계화폐의 생산과 조절에서 사적 고도금융이 부흥한 데 대한 미국 정부의 즉각적 반응은 세계 유동성의 공급에서 워싱턴의 중심성을 대대적으로 재확인한 것이었다. 주요 국제 보유통화이자 교환의 매개로서 달러를 대체할 가용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금-달러 본위제의 폐기는 순수한 달러 본위제의 수립으로 귀결되었다. 세계화폐로서 미국 달러의 중요성은 줄어들기보다 늘어났고, 예전에 비공식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이제는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Cohen 1977:232~8).

……

…… 환율의 휘발성은 초국적기업의 금융뿐 아니라 정부 -특히 매우 외향적 국내 경제를 통치하는 정부- 의 금융에도 위험과 불확실성을 늘렸다. 다른 어느 정부보다 제3세계 정부들이 새로운 화폐체제 때문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수전 스트레인지가 주장하듯이(Strange 1986: 13), 휘발성 있는 환율은 “이동성이 큰 초국적기업보다 이들에게” 훨씬 더 위험과 불확실성을 증가시켰다. “적어도 초국적기업들은 다양한 제품, 다양한 나라라는 활동무대, 그리고 문제를 풀 고소득의 잘 훈련된 조세전문가와 재무관리자들이라는 군대를 갖추고 있다.”

미국 달러(수출 대부분의 가격이 매겨지는), 다른 주요 통화들(수입 대부분의 가격이 매겨지는), 그리고 자국 통화들 사이의 환율 변동과 더불어, 제3세계 나라들의 수출 대금, 수입 지급액, 국민소득, 그리고 정부수입의 가치들이 모두 크게 요동쳤다. 사실, 1970년대 초 이래 이런 환율 변동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부가가치 계서제에서 제3세계 나라들의 위상을 결정하는 단일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 나라들은 그런 부침의 위험을 분산시키는 데 필요한 금융 자원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유로통화시장의 “금융 카지노” 성장에 주로 기여한 것은 방정식의 공급항이 아니라 수요항이었다. 즉, 금융 위기를 선점하거나 활용할 목적으로 예치를 늘려서가 아니라, 금융 위기의 황폐화 효과를 상쇄할 기금을 요구함으로써였다.

……

우리는 우선 1970년대 화폐 위기가 얼마나 심각해졌는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급속하게 감소하는 자본 수익에 직면해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재팽창시키려 한 지속적 노력은, 통용되는 세계화폐로서 미국 달러에 대한 주요한 신뢰성 위기를 촉발시킬 수 있는 위협이 되었다. 1978년이 되면 이런 종류의 위기가 막 실현되리라는 분명한 신호가 있었다. 그런 위기가 실제 그랬던 것보다 더 진척되었더라면, 미국 정부와 미국 사업이 미국의 발권 특권으로부터 얻는 모든 경쟁우위는 사라졌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는 미국 전체 신용구조를 붕괴시키고 미국의 부와 권력이 전보다 더욱 의존하게 된 세계적 자본축적망을 붕괴시켰을 것이다(cf. Aglietta 1979b:831f; Aglietta and Orlean 1982:310~2)

 


화폐 경제학

–  밀턴 프리드먼 / 김병주 역 / 한국경제신문사 / 2009.11.01

 

우리는 2장에서 역사상 전례가 없는 세계통화제도가 나타났다는 것을 보았다. 이는 세계의 모든 주요 화폐들이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하나의 불환지폐본위에 연결되어 있는 제도이다.

……

이 통화제도는 1차대전 이후에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971년까지 세계의 많은 국가들은 사실상 달러본위제를 채택하게 되었으며, 반면 미국의 화폐제도는 (1933~34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표면상으로는 금본위제였지만 실제로는 불환지폐본위제였다. 여기에 정부의 금가격 고정화 계획이 결부되어 있었다. 브레튼우즈협정은 금의 역활에 대한 겉치레 규정과 환율변동 규정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인정하는 것이다.

미국에 있어서 금의 화폐적 역활의 점진적 변화를 드러내는 두 가지 주요 사건은 1)1933년 금의 개인 소유를 금지시킨 조치와, 2)1965년 연방준비은행 예금에 대해 그리고 3)1968년 연방준비은행권에 대해 금의 법정 지불준비제도를 폐지한 조치였다.

금과 달러 사이의 공식적 연결고리뿐만 아니라 미국의 화폐제도가 금본위제도라는 겉치레를 아울러 없애버린 1971년 닉슨의 금 창구 폐쇄조치는, 이미 진행 중이던 사태 흐름을 공식적으로 시인한 것에 불과하다. 중앙은행들의 장부상 남아 있는 금보유고는 미래 언젠가 다시 중요하게 될 가능성이 있지만, 사실상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다. 미국이 금의 개인 소유 금지 조치(1933년)를 철회한 1974년 조치는,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금의 화폐적 역활의 종식을 알리는 것이었다.

닉슨의 조치는 1960년대 미국의 극심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서둘러 단행되었다. 그리고 브레튼우즈협정의 종식은 1970년대에 미국뿐 아니라 다른 많은 국가에 있어서도 인플레이션의 지속과 가속화에 이바지했다.

……

과거 이러한 사례를 평가하면서, 어빙 피셔는 1911년에 이렇게 기술했다. “태환 불가능한 지폐는 그것을 사용한 나라에 거의 어김없이 재앙이 되었다”(1929, p.131). 피셔가 이렇게 글을 쓴 이후 사태는 확실히 그의 명언과 일치했다. 바로 이 기간에 역사상 엄청난 지폐 재앙이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즉, 1차대전과 2차대전 직후의 초인플레이션, 다수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저개발국가를 비롯한 여러 국가들에서의 급속한 인플레이션과 초인플레이션, 가장 최근의 예로 1970년대의 전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을 들 수 있다.

 


변환의 세계정치

–  하영선, 남궁곤 / 을유문화사 / 2007.08.15

 

1960년대 초 벨기에 출신의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Robert Triffin)은 미국의 방만한 재정운용정책이 지속될 경우 금태환이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는 예측을 했다. 달러화가 금보유량 이상으로 발생될 경우 미국 달러의 신뢰성 문제가 발생하는 딜레마를 막기 위해, IMF는 새로운 국제통화인 특별인출권(SDR, Special Drawing Rights)을 제안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말 미국은 베트남전쟁과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라는 복지정책의 결과로 인해 생긴 막대한 재정적자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미국 달러화의 가치하락에 대한 우려 속에서 독일과 일본은 자국통화의 평가절상을 막기 위해, 프랑스는 미국 패권의 견제를 위해 금을 매수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1971년 8월 닉슨 대통령은 금태환정책의 포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다른 선진국들은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 결정을 비판했지만, 스미스소니언협정에서 미국 달러화에 대한 자국통화의 평가절상을 수용했다. 이 결과 1973년 이후 국제금융통화질서는 미국 달러화를 중심으로 한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이행했다.

 

트리핀 딜레마(Triffin Dilemma)와 함께, 자본통제정책의 실효성 약화도 브레턴우즈 국제금융통화질서의 붕괴에 기여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유럽으로 유출된 미국 달러를 거래하는 유로 시장(Euro Market)이 더 이상 자본통제정책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다. 이러한 형태의 역외금융시장은 1970년대 주요 선진국들이 자본계정자유화정책을 채택하면서 더욱 발전했다.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은 국제금융통화질서를 관장해왔던 브레턴우즈 국제기구들 이외의 새로운 조정 메커니즘을 필요로 했다. 1975년부터 시작된 G5회의는 거시경제정책을 조율하기 위해 서방 5대 경제대국의 재무장관들의 모임에서 기원했다. 1980년대 중반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서 비롯된 미국 달러화 재평가 문제를 협의했던 플라자-루브르합의 이후 이 모임의 정치적 중요성이 증가하여, 참가국 수가 8대 경제대국으로 확대되고 참석자들도 재무장관에서 정부 수반으로 격상되었다.

1980년대 이후 선진국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들도 자본자유화정책을 추진했다.

 


골드(GOLD)

–  네이선 루이스 / 이은주 역 / 에버리치홀딩스 / 2009.04.17

 

그러나 지난 역사를 대충만 살펴봐도 변동환율제 통화에 관한 오늘날의 상환 조건이 매우 새로운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은 변동환율제 통화가 작동하기 시작한 때는 1971년 8월 15일 부터였다. 이 날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달러와 금과의 연결고리를 끊고(달러와 금의 태환 정지) 브레턴우즈 체제하에서 형성된 기존의 세계 통화 체제를 갈아엎은 날이다. 1971년 이전 약 300년 동안은 안정 통화가 주도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1971년 이후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행해진 일련의 사건들 이후 안정 통화의 시절은 막을 내렸다. 산업혁명 이후의 자본주의 경제 그리고 이보다 훨씬 오래전에도 자본주의 경제는 안정 화폐를 근간으로 했다.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안정 통화를 지지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자유방임주의자의 반대편에 섰던 초기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도 안정된 계산 단위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있어서만큼은 이들과 의견을 같이했다. 변동환율제 통화는 자유 시장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기보다는 세계 각국 정부의 끊임없는 통화 조작 시도에 대한 시장의 불가피한 반응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오늘날의 화폐제도는 예외적인 현상이므로 날이면 날마다 우리 인류를 괴롭히는 화폐 관련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찾는 일도 그리 복잡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화의 덫

–  한스페터 마르틴, 하랄트 슈만 / 강수돌 역 / 영림카디널 / 1997.11.10

 

찬찬히 추적해 보면, 돈의 흐름이 민족국가의 통제없이 제멋대로 흘러다닐 수 있게 된 것은 1973년 들어 선진 자본주의 국가 사이에 당시까지 통하던 고정환율제도가 붕괴하면서 부터이다. 이것이 바로 2차대전 후 당시까지 유효했던 브레턴우즈 체제의 몰락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2차대전 후 약 30년 간에 걸쳐 엄청난 속도로 팽창해 온 기업들과 거대은행들은 각국 정부와 국제협약(브레튼우즈 협정)의 관료주의적 통제체제가 아주 부담스러운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음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 서독, 캐나다, 스위스 등에서는 이미 1970년부터 국제적 자본의 흐름을 더 이상 통제하지 않기로 했다. 굳건했던 댐이 이렇게 터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국제 투기꾼들이나 거간꾼들이 아무런 제약없이 자신들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화폐가치를 제멋대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고, 자기들끼리 협상을 벌여 그 화폐의 교환 비율인 환율조차 마음대로 농락하였다. 결국 2차대전 후 30년 정도 지속된 고정환율제도는 붕괴하고 말았다.

 


21세기 자본

–  토마 피케티 / 장경덕 외 역 / 글항아리 / 2014.09.12

 

좀더 보충 설명을 해보자. 무엇보다도 먼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인플레이션이 대체로 20세기 특유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 이전,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인플레이션은 제로이거나 혹은 제로에 가까웠다. 물가는 수년간 혹은 길면 수십 년간 이따금 급상승하거나 급락한 적은 있어도 일반적으로 이 같은 간헐적 물가 변동은 결국 안정을 되찾았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장기간의 물가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더 정확히 말해 1700~1820년 그리고 1820~1913년의 평균 물가상승률을 살펴보면 프랑스, 영국, 미국,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기껏해야 연 0.2~0.3퍼센트로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심지어 가끔은 물가상승률이 소폭의 마이너스를 기록한 적도 있는데, 19세기의 영국과 미국(1820~1913년 두 나라 물가상승률의 평균을 내면 -0.2퍼센트)이 그 예다.

……

 

통화가치가 안정된 세계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영원히 무너졌다. 엄청나게 폭력적이고 강도 높은 전쟁의 비용을 대느라 그리고 군인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갈수록 더 비싸고 복잡해지는 무기의 비용을 조달하느라 정부는 빚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1914년 8월에 이미 주요 참전국들은 자국 통화의 금태환을 끝냈다. 전쟁 후 각국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같이 엄청난 공공부채를 처리하기 위해 지폐를 찍어내는 인쇄기에 의존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 금본위제를 부활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1930년대의 경제위기로 무산되었다. 영국은 1931년, 미국은 1933년, 프랑스는 1936년에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금본위제 역시 조금도 더 강건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체제는 1946년에 시작되어 달러의 금태환이 중지된 1971년에 끝났다.

 


포스트 자본주의 새로운 시작

–  폴 메이슨 / 더퀘스트 / 2017.01.13

 

애초에 신자유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네 가지 요인을 알아보자. 지금은 바로 이 네가지 요인이 신자유주의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1. 명목화폐(Fiat money)

명목화폐가 있어서 경기가 둔화할 때마다 돈을 풀 수 있었고, 모든 선진국이 빚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2. 경제의 금융화(Financialization)

선진국 노동자들의 소득이 늘어나지 않을 때 대출로 이를 메울 수 있었다.

 

3. 국가 간 불균형

불균형 자체도 문제지만 선진국들의 막대한 부채와 외환보유고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4. 정보기술

지금까지 정보기술은 온갖 일을 가능케 했지만, 앞으로 성장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

1960년대 후반, 장차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이 될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은 달러의 금 태환을 정지하는 계획은 ‘복지국가주의자들’의 음모라고 비난했다. 국민의 돈을 갈취해 정부 지출을 충당하려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얼마 뒤 그린스펀은 미국의 다른 엘리트들과 마찬가지로 금 태환을 정지하면 미국이 다른 나라들의 부를 손쉽게 몰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해서 미국이 30년 동안이나 통화를 조작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진다. 그 결과 2015년 기준으로 미국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무려 6조 달러를 빚지며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

달러의 금 태환과 고정환율제를 폐기하면서 생긴 세 가지 반사작용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막을 가능케 했다. 세 가지 반사작용은 다음과 같다.

1) 은행이 신용을 팽창시킬 수 있게 됐다.

2) 모든 위기는 해소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3) 투기로 얻은 이윤이 영원히 늘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 세 가지 변화는 수백만 대중의 머릿속 깊이 뿌리를 내렸다.

 


G2 전쟁

–  레이쓰하이 / 허유영 역 / 부키 / 2014.11.21

 

…… 1952년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의 러닝메이트로서 부통령으로 당선됐고 1956년 부통령으로 재선된 후 1968년에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 오른 닉슨은 1971년 8월 달러의 금 본위제 폐지를 선포했다. 이른바 ‘닉슨 쇼크’였다. 이 사건은 달러 패권의 첫 번째 위기이자 가장 치명적인 위기였다. 이는 또 서유럽 화폐의 도전에 대한 달러의 패권 방어전이면서 달러 패권의 전환, 즉 금이 보장하는 금 본위제 패권에서 지폐 패권으로의 전환을 위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 달러에 대항할 만한 통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미국은 서유럽의 도전을 가뿐히 막아 낼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서유럽은 군사 대국 소련이 문 앞에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안보를 위해서라도 미국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다.

1972~1973년 서유럽 각국은 계속해서 달러를 팔았다. 그런데 1973년 10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 전쟁은 마치 미국을 위한 맞춤형 전쟁인 것처럼 순식간에 세계정세를 미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돌려놨다. 유가가 1년 사이 3배 폭등해 서유럽 각국의 외환보유고가 고갈되자 유럽은 필요한 원유를 사기 위해 다시 달러를 비축해야 했다. 달러 패권을 향한 서유럽의 도전도 맥없이 꺾였다. 달러를 계속 팔아 치우던 서유럽은 졸지에 원유를 사기 위해 달러를 사들여야 하는 처지가 됐다. 게다가 오른 원유 가격을 감당하기 위해 예전보다 더 많은 달러가 필요했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석유 가격 폭등이 달러 패권 전환에 매우 중요한 역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 이뤄진 두 건의 거래가 관건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달러를 기준으로 석유 가격을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 제4차 중동 전쟁의 막후 조정자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일부 있다.

 


하룻밤에 읽는 경제학

–  마르크 몽투세 /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 중앙 / 2005.07.09

 

< 브레턴우즈 체제의 변화 >

브레턴우즈 체제의 개막 (1944년)

– 미국의 경제력과 달러의 태환성에 기반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 (1960년대)

– 대외원조, 차관의 증가

– 미국기업의 해외 공장이전, 외국에 대한 직접투자

– 무역수지 적자(유럽과 일본의 등장)

– 적자 해결 위한 달러 발행 증가, 유로달러의 팽창

브레턴우즈 체제 신뢰도 하락 (1960 ~ 1970년대)

– 미국외 국가의 달러보유량이 미국의 금비축량을 추월

– 달러의 태환요구 증가, 달러의 신뢰도 하락

– 미국의 강한 달러정책 지속

브레턴우즈 체제 포기 (1970년대)

– 1971년 8월 닉슨 쇼크(달러의 비태환성 선언)

– 1971년 12월 스미소니언 10개국 회의에서 달러 평가 절하(금 1온스당 35달러에서 38달러로)

– 이후 계속된 달러의 신뢰추락으로 각국 달러와 고정환율 포기

– 브레턴우즈 체제의 위기로 IMF의 역활 증가

 


화폐전쟁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옮김 / 코나투스 / 2007.04.13

 

화폐로서의 금의 지위를 배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과정은 세 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첫 단계는 미국 국내에서 유통 및 교환되는 금화를 폐지하고, 두 번째 단계는 세계적으로 황금의 화폐 기능을 없애는 것이다. 1944년에 브레턴우즈 협정에 따른 달러 환전 시스템으로 두 번째 단계를 완성했다. 훗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1년에 가서야 세 번째 단계의 작업을 마무리했다.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윌리엄 엥달 / 서미석 옮김 / 길 / 2007.10.25

 

1971년 8월 15일 발표한 닉슨의 달러화 전략 뒤에 숨어 있는 의도는 2년이 훨씬 지난 1973년 10월이 되어서야 나타났는데, 심지어 그때까지도 소수의 내부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 전후관계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71년 8월 달러화의 본위 화폐 사용 폐지는 런던-뉴욕의 금융계가 귀중한 시간을 벌기 위해 이용한 것이었으나 정책 내부자들은 대담하고도 새로운 통화주의적 구상을 준비했는데 이는 일부 사람들이 명명했듯이 ‘패러다임의 변환’이었다. 막강한 영-미 금융계 특정 인사들은 결정적인 참패에 빠진 것처럼 보인 바로 그때 다시 한 번 강력한 달러를 만들어 내고, 다시 한 번 이 세계에 대한 그들의 상대적인 정치권력을 증강하기 위한 전략을 구상했다.

1973년 5월 달러화의 급격한 하락세가 여전히 뚜렷한 가운데 세계 최고의 금융 및 정치계 내부자들 84명으로 구성된 단체가 스웨덴의 발렌베리 은행 가문의 한적한 섬 휴양지인 살트셰바덴에서 만났다. 베른하르트 왕자의 빌데르베르크 그룹이 주선한 이 모임에서 미국 측 참가자 월터 레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석유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곧 400퍼센트 증가할 것이라는 ‘시나리오’의 개요를 발표했다. 비밀스러운 살트셰바덴 모임의 목적은 예상된 유가 충격을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곧 만들어질 석유달러 홍수를 어떻게 관리할지 계획하는 것이었는데, 미 국무장관 키신저는 후에 이 과정을 일종의 ‘석유달러 흐름의 재순환’이라고 불렀다.

……

빌데르베르크 주변에 모인 권력자들은 세력균형을 영-미 금융세력과 달러화에 유리하게 되돌리기 위해 그해 5월 세계의 산업 성장에 대한 어마어마한 공격을 시작하기로 확고히 결정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세계 석유 흐름 통제라는 가장 귀한 무기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발데르베르크 정책은 세계 유가를 극적으로 인상시키기 위해 세계적으로 석유 수출 공급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1945년 이후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전후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국제 관행상 세계의 석유는 달러화로 값이 매겨졌다. 그러므로 세계 유가가 급격하고도 가파르게 상승하면 그 필요한 석유값을 지불하기 위해 미국 달러화 수요도 그만큼 극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이었다.

런던과 뉴욕에 집중된 그토록 작은 세력집단이 전 세계의 경제적 운명을 상당 부분 그렇게 좌지우지한 적은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 영-미 금융체제는 그 누구도 가능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자신들의 석유권력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틀림없이 매우 그럴싸한 그 계획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생각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욤키푸르 전쟁으로 알려지게 된 사건에 불을 붙였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욤키푸르’ 전쟁은 오판이나 큰 실수 또는 이스라엘 국가를 상대로 군사 공격을 개시하기로 아랍이 결정한 데서 비롯된 단순한 결과가 아니었다. 10월 전쟁의 발발을 둘러싼 사건들의 전체 정황은 닉슨의 국가안보 특별보좌관 키신저가 개발한 강력하고도 은밀한 외교 채널을 이용하여 미 정부와 영 정부가 비밀리에 기획한 것이었다. 키신저는 워싱턴 주재 이스라엘 대사 심차 디니츠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의 정책반응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게다가 키신저는 이집트와 시리아 측과의 외교 통로도 텄다. 그의 방법은 그저 양측에게 각각 상대의 민감한 사안을 거짓 설명해주어 전쟁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아랍의 석유 금수 조처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

석유수출국기구 유가가 지속적으로 400퍼센트나 인상되면서 빚어진 엄청난 결과의 하나는 브리티시석유회사, 로열더치셸과 다른 영-미 석유회사들이 위험스러운 북해의 해저 유전에 쏟아부은 수십억 달러의 투자가 이익을 남기며 석유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들 새로운 북해 유전의 수익성은 석유수출기구의 유가 인상이 있기 전 까지만 해도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기묘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

의미심장하게도 석유 위기는 1973년 말 절정에 달했는데, 그때는 바로 미국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직접 연루되어 결국 키신저가 사실상의 대통령으로 석유 위기 동안 미국의 정책을 지휘하던 시기였다.

……

닉슨의 1971년 8월 치명적인 달러화 정책 추진을 보좌한 인물인 베넷의 지휘 아래 미 재무부는 사우디아라비아 통화국(SAMA)과 비밀협정을 체결했는바, 그 최종 내용은 1975년 베넷 재무장관이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비망록 속에 담겨 있다. 그 협정의 조건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가 횡재한 막대한 석유 수입의 상당 부분은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를 조달하는 데 투자될 것이었다.

……

이미 미국의 정보 평가를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는 전능한 국가안보 특별보좌관으로서 키신저는 또한 미국의 대외정책까지 확실히 장악하여 10월 욤키푸르 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몇 주 전에는 닉슨을 설득하여 국무장관에 임명되었다. 그 일련의 사건에서 그가 한 중심적인 역활을 보여주듯이 키신저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의장이자 국무장관이라는 두 직함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닉슨의 대통령  재임 마지막 몇 달 동안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닉슨의 대통령 재임 마지막 몇 달 동안 어느 누구도 키신저처럼 그렇게 막강한 절대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키신저는 1973년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했다.

 


글로벌 불균형

–  배리 아이켄그린 / 박복영 역 / 미지북스 / 2008.11.05

 

…… 브레튼우즈 국제 통화 체제가 허약하고 단명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 체제는 20년(1950년대와 1960년대) 동안 국제 통화 및 금융 관계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럽이 경상 거래에 대한 통제를 철폐한 1959년 초에야 실제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일본이 경상 계정 태환성을 회복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1962년이었다. 그리고 1960년에 이미 달러는 외환 시장에서 압력에 시달렸다. 달러가 다른 통화에 대해 평가 절하되는 것을 막기위해서는 외국 중앙은행이나 정부의 특별한 지원이 필요했다.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1962년에 만들어진 것이 소위 골드풀이다. 골드풀은 오늘날의 G10의 기원이었는데 이 나라들이 당시 개입 조정에 참가한 주역들이었다. 이 모든 것이 어슴푸레한 역사적 소사小史에 불과해보일지 모르지만 중요한 소사이다. 그런 역사적 경험은, 브레튼우즈 체제하의 중심국의 만성적 적자는 균형의 결과라는 시각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더욱이 1960년대에 ‘주변부’라는 하나의 응집적인 추격 경제 블록이 있었다는 관념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이다. 독일과 같은 몇 나라는 상대적으로 인플레이션을 기피했으며 통화절상을 허용할 의사도 있었다. 반면 영국과 같은 나라는 만성적 흑자는 커녕 만성적 적자를 겪고 있어서 달러에 대해 평가절하를 해야 했다. 프랑스 같은 나라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유지에 필요한 달러 지지에 덜 적극적이었다. 이런 사실 역시 더 어슴푸레한 역사적 소사에 지나지 않지만, 브레튼우즈 체제가 왜 유지되었으며 언제 그리고 어떻게 붕괴되었는지를 이해라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

현대 국제 금융 문헌의 핵심 논지는, 안정성에 대한 위협은 과도기에 가장 고조된다는 것이다. 투자자들은 임박한 체제 변화를 예상하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행동하려고 한다. 국제 통화 부문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들은 새 체제에서 가치 하락이 예상되는 통화는 팔고 상승이 예상되는 통화는 사들인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은 낡은 관계 구조를 유지하려는 것들을 강하게 압박한다. 이윤을 얻겠다는 인센티브 혹은 중앙은행의 경우 단순히 손실을 피하겠다는 인센티브가 심판의 날을 불러오는 것이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취약성을 이해하는 한 방법은 그것을 과도적 체제로 간주하는 것이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금 본위제와 1971년 이후 법정 불환지폐(fiat money) 체제가 절충된 형태이다. 금 본위제 하에서 각국은 금의 국내 가격을 고정시켜 놓고 금의 수출입에 아무런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1971년 이후의 체제에서는 달러나 여타 통화는 발행국이 보유한 부富 그리고 통화 단위의 구매력을 유지하려는 정부의 의지와 능력에 대한 투자자의 신뢰에 의해서만 뒷받침되는, 그래서 처음부터 그 자체가 가치로서 인정된 그런 것이었다. 브레튼우즈 체제 하에서 미국 달러는 금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그 비율은 1935년 이후 줄곧 유지되던 금 1온스당 35달러였다. 미국은 외국의 공적 보유자가 요구하면 달러를 금으로 바꾸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내 투자자든 외국 투자자든 민간 투자자에게는 그런 태환이 허용되지 않았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  드니 로베르, 베로니카 자라쇼비치 /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2.11.18

 

브레턴우즈 협정은 자본의 흐름을 규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날 즈음 영국과 미국이 브레턴우즈 체제를 창설했을 때만 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있었습니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사회민주주의적 이상理想, 달리 말하면 복지국가를 세우기 위한 열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자면 자본의 이동을 규제해야 했습니다. 자본이 국경을 넘어서 제멋대로 이동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언젠가 금융기관과 투자가가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까지 올라서게 될 것이란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융기관과 투자자는 ‘실질적인 의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실체도 없는 그들이 자본을 회수한다거나 그 밖의 다른 금융조작으로 국가를 위협하면서 국가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자본의 흐름을 규제하고 악의적인 투기와 자본 유출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교환율을 조절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이상을 지켜낼 방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체제가 1970년대 초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민간 기업, 특히 금융자본이 대대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업자본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금융자본의 이동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우려했던 현상이 전세계에서 일어났습니다. 공공 서비스의 질이 현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사회보장제도가 왜곡되고, 실질임금이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노동시간은 늘어나고 노동조건도 악화되었습니다 ….

 


매드 머니 Mad Money

–  수잔 스트레인지 / 신근수 옮김 / 푸른길 / 2000.06.01

 

1965년 2월에 드골은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브레턴우즈 협정 하에서 설립된 국제적인 금본위제에 있어서 달러의 ‘무지막지한 특권’을 공격했다. 그는 전통적인 금본위제와 비교하여 이 제도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유럽 공동 전선이 미국과 전능의 달러에 대항한다는 그의 꿈은, 국제 금융 개혁과 관련된 논쟁에서 서독이 프랑스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세 사라져 버렸다.

서독은 소련이라는 적군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안전 보장으로 미국에 의한 핵우산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독은 이에 대해 미국이 몇 번이나 확인한 바와 같이 암묵의 거래로 NATO에의 가맹과 지지, 금융 재정 운영에 있어서의 미국의 이해에 대한 추종이라는 대가를 지불했다.

 


금융투기의 역사

–  에드워드 챈슬러 / 강남규 역 / 국일증권경제연구소 / 2001.06.25

 

환율이 일정 한계를 넘어 급등락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각국 정부는 자신들의 정책실패 대신 환투기꾼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히틀러는 2차대전 이전 번갈아 발생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의 원인을 환투기꾼 때문이라고 거세게 공격했고, 레닌과 스탈린도 투기꾼들을 소련공화국 경제의 적이라고 선언했다. 투기꾼에 대한 공격에는 이른바 자유진영의 리더들도 동참했다. 1956년 장래 영국 수상이 되는 해럴드 윌슨(Harold Wilson)은 수에즈 운하 사태를 이용해 파운드화 공격에 나선 스위스 은행가들을 ‘취리히의 땅귀신들’ 이라고 부르며 거칠게 몰아붙였다. 취리히의 땅귀신들은 11년 뒤인 1967년 다시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해 자신들에게 독설을 퍼부은 윌슨 내각을, 평가절하를 선언할 수밖에 없는 궁지로 몰아넣는다. 4년 뒤인 1971년 미국 닉슨 대통령도 달러의 금태환 중단을 선언하면서 “투기꾼들은 위기를 먹고살 뿐만 아니라 위기를 조장한다”고 공박했다.

1971년 국제 외환시장이 변동환율제로 변한 이후에도 정치인들은 투기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1992년 9월 파운드화를 평가절하하면서 영국이 유럽의 환율체제에서 탈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전 재무장관 젠킨스 경은 ‘사냥감을 보면 침을 질질 흘리는 원시인 무리’라며 투기꾼들을 공격했다. 프랑스의 미셸 사팽(Michel Sapin)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기에는 소요세력으로 분류해 단두대에서 목을 쳤을 존재’라고 일갈했다.

……

브레턴우즈 시스템의 붕괴 이후 돈은 질량과 본질이 없는 상상의 조각물이 되었다. 화폐의 가치가 끝없이 유동하는 세계에서, 또 로버트 웬델(Robert Wendell)이 말한 ‘한 사회가 가능성을 찾아 끊임없이 자기조절을 벌이는’ 세계에서, 투기는 중요한 역활을 맡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금태환이 정지된 시기에는 투기가 만연했다. 1720년대 프랑스와 1860년대 미국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브레턴우즈 시스템의 붕괴가 낳은 충격에 휘말려 있는 동안, 이 사실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모든 통화가치는 미래가치를 반영하고, 다시 미래가치는 현재의 가치에 의해 영향받는 소용돌이가 벌어진 것이다.종잡을 수 없는 이런 소용돌이의 근원적인 힘은 투기꾼들로부터 발생하고 있다.

 


부의 역사

–  권홍우 / 인물과사상사 / 2008.06.09

 

닉슨의 두 차례 달러 평가절하를 거치며 브레턴우즈 체제가 확인사살까지 받고 미국 경제의 취약성이 더욱 심화했음에도 달러의 국제적 지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경제가 어려워질 때마다 금융 또는 환율을 움직여 다른 나라에 피해를 전가해왔기 때문이다. 일본의 파상적인 수출 공세와 과도한 군비 지출로 레이건 행정부 출범 5년만에 경상 및 재정수지 적자가 이전보다 4배 불어난 3305억 달러에 달하며 위기론이 일었던 1985년의 플라자합의에서도 미국은 일본을 압박해 궁지에서 벗어났다.

플라자합의 직후 의도한 대로 엔화와 마르크화의 가치가 크게 올랐지만 미국의 적자와 일본 · 독일의 흑자는 오히려 더 커졌다. 1987년 미국은 플라자합의를 보완한 루브르합의를 통해 가까스로 적자를 줄일 수 있었던 반면 일본은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 데다 내수 부양책까지 실패해 ‘잃어버린 10년’에 빠져 반쯤 죽다 살아났다.

 


<관련 그림>

 

– 브레튼우즈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

 

 

1

– 미국 소비자 물가지수Consumer Price Index for All Urban Consumers: All Items (CPIAUCSL)

 

 

2

– 미국 연방정부 부채Gross Federal Debt

 

 

3

– 미국의 M2 통화량M2 Money Stock (Monthly, Seasonally Adjusted)

 

 

4

– 미국 연방정부의 지출Federal Net Outlays

 

 

5

– 미국의 소비자 물가지수

 

 

6

– 미국 및 여타 국가의 통화용 금과 달러 보유액(1951~1971년) / 단위 : 10억 달러 / 출처 : IMF

 

 

7

– 브로델의 장기순환 (출처 : http://luxun.greenbee.co.kr/blog/503)

 

 

미국중산층변화

– 미국 중산층의 규모 변화 추이(1971년 ~ 2015년)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브레튼 우즈 체제

네이버 지식백과(경제학사전) : 브레튼우즈체제

http://foundationsofecon.blogspot.kr/2011/08/death-of-gold-standard.html

2016-06-16  [FOMC]자신감 저하의 배경…”美 달러 막강파워에 발목”

2016-02-29  [朝鮮칼럼 The Column] 데드 맨 워킹

2015-12-11  中 군사전략가의 美 금융제국 비판 <上>

2009-11-16   달러몰락 재촉…金의 반격

닉슨, 달러-금 태환 정지 선언 – 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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