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게시판

16세기 중반의 왜구(2)

작성자
hsy6685
작성일
2020-07-12 10:23
조회
4366
왜구라는 한자표현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문(414년)의 ‘왜구신라(倭寇新羅)’란 표현이다. 여기서 구(寇)는 ‘떼 지어 침략하다’라는 동사로 쓰였다. 고려사에도 고종10년(1223년) ‘왜가 김해를 침략했다’는 ‘왜구금주(倭寇金州)’를 필두로 주로 동사로 쓰이다가 1300년대가 되면서 ‘왜구’ 자체가 ‘일본 해적’이란 뜻의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고려말 왜구의 침략 횟수는 500회가 넘는다.

역사학계에선 왜구를 전기 왜구(고려말 왜구)와 후기 왜구(조선시대 왜구)로 구분한다. 전기 왜구는 원나라 말기인 14세기 한반도와 중국 산동성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최영과 이성계, 최무선, 정지를 전쟁영웅으로 만들어준 바로 그 왜구다. 후기 왜구는 명나라 중기인 16세기 주로 장쑤성, 저장성, 푸젠성 등 중국 남동부 해안을 무대로 밀무역과 약탈을 벌였다. 거기엔 중국인이 많았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런 둘의 차이에 더 주목했다. 전기 왜구가 주로 식량 약탈에 치중했다면 후기 왜구는 밀무역업자의 성격이 더 강했다. 명나라 조정은 외국과 민간무역을 엄금했는데 당시 동남아 일대를 장악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상인들은 비단과 도자기 같은 중국 공예품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땅이 척박해 농사짓기가 어려웠던 푸젠성 사람들 중심으로 밀무역 종사자들이 늘어났다. 그들 중 명 조정의 추적을 받게 된 일부는 남중국해와 가까운 일본 규슈 지역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규슈 지역의 일본 영주(다이묘)들의 후원을 받아 밀무역과 약탈 수익을 나눠가진 것이다. 그래서 후기 왜구 중 상당수는 중국인이라는 게 정설이다.

실제 일본 규슈에 가면 안휘성 출신이라고 ‘휘왕(徽王)’ 또는 바다를 평정했다 하여 ‘정해왕(淨海王)’을 자처한 왕직(王直)과 ‘천차평해(天差平海)대장군’을 참칭한 서해(徐海) 같은 중국인 해적왕들의 유적이 남아있다. 심지어 명나라 수복운동을 벌여 한족의 영웅으로 꼽히는 정성공(鄭成功·1624~1662년)도 푸젠성 출신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규슈 히라도섬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중국계 왜구의 후손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후기 왜구가 창궐하던 16세기는 해적의 시대였다. 훗날 영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프랜시스 드레이크(1545?~1596)가 신대륙에서 해적으로 맹활약하던 시기도 이때였다. 세계 최대 규모 은광이었던 남아메리카 현재 페루의 포토시에서 식민본국인 스페인으로 실어 나르는 은 수송함대를 노린 네덜란드와 영국의 해적들이 국가적 영웅으로 신분전환이 가능한 시대였다.

그 당시 해적들은 국적과 신분, 종교 같은 정체성에서 자유론 존재였다.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고, 어디에도 충성하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프랑스 사상가 자크 아탈 리가 규정한 ‘호모 노마드’로 규정되기도 한다. 아르헨티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집 ‘불한당들의 세계사’에 등장하는 중국 청나라 때 여해적 칭이나 재패니메이션 ‘원피스’ 역시 이런 낭만적 해적관의 산물이다.

일본에선 이런 낭만적 해적관을 왜구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왜구가 일본이란 특정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낭인집단의 무리였다는 ‘경계인론’이다. 그에 따르면 후기 왜구의 주축이 중국인+일본인이라면 전기 왜구의 주축은 조선인+일본인이 된다. 결국 조선인 중에 토착왜구가 많다는 소리가 되고 만다.

이런 논리의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 나카무라 히데다카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 ‘일선관계사 연구(1966)’에서 고려사에 왜구의 소행으로 기록된 것 중 상당수가 왜구를 가장한 고려사회 하층민의 반란이었으며 일본인들이었다 하더라도 대마도나 규슈 해안가 일대 민간인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이영 교수는 ‘왜구와 고려·일 본관계사’ 및 ‘황국사관과 고려말 왜구’ 같은 저술을 통해 그 허구성을 낱낱이 파헤쳤다. 그에 따르면 전후기 왜구는 모두 일본 내란기에 군량미 아니면 전비 확보를 위한 정규군 활동의 일환이었다. 서구적 개념에 따르면 왜구는 자발적인 ‘비공인 해적’으로서 파이어리츠(pirates)가 아니라 국가나 종교의 지원 아래 활동한 공인해적 코르세어즈(corsairs)였다.

전기 왜구는 일본의 왕실이 남조와 북조로 나뉜 남북조시대(1333~1392) 남조에 충성했던 규슈 지역 사무라이 세력이 군량미 확보를 위해 원나라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한반도와 중국 산둥성 일대 해안가를 약탈한 것이었다. 고려에서 왜구의 노략질이 급증하고 대규모환 시점이 1350년 이후인데 일본 남조와 북조 간 투쟁이 극심해지는 시점과 일치한다. 또 왜구 침략이 격감한 시점 역시 1392년 남조의 몰락 직후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 무려 500척의 함대에 기병 7000까지 대동한 대규모 군사집단을 민간 무력집단으로 호도할 수는 없다.

이는 당시 교토를 장악한 북조와 고려 조정 간에 오간 서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376년 무로마치 막부(북조)가 왜구의 침입을 항의하는 고려사신을 통해 ‘(막부) 조정에서 장수를 보내 (남조가 다스리는) 규슈 일대 진압작전에 나섰으니 진압이 완료되면 더 이상 해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서신을 보냈다.

후기 왜구 역시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진 전국시대(1493~1573) 규슈 일대 다이묘들이 전비 마련을 위해 중국 해적과 손을 잡고 밀무역과 약탈전투를 벌인 것으로 봐야하다. 실제 왕직은 히라도번의 다이묘인 마쓰라 다카노부의 비호를 받았고, 서해는 사쓰마번의 다이묘인 시마즈 가문의 용병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명나라 군대가 이들 왜구와 벌인 전투도를 청나라 때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왜구도권’에 등장하는 왜구의 깃발을 확대해본 결과 1555년에 해당하는 ‘고지(弘治) 4년’이란 일본의 연호가 확인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나카무라는 왜 이런 왜구의 정체를 감추려했을까.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 세력은 1333년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남조의 고다이고(1288~1239) 일왕과 그를 도운 구스노키 마사시게(1294~1336)를 자신들의 역할모델로 삼았습니다. 메이지일왕 역시 혈통 상 북조를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다이고 일왕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천명했습니다. 그런데 노략질을 일삼은 왜구의 배후가 고다이고 혈통이 다스린 남조임이 밝혀지는 것이 곤혹스러웠던 겁니다. 그래서 왜구를 일본 조정과 무관한 민간인집단으로 둔갑시키거나 다국적 연합세력이라고 물타기를 하는 겁니다.”

 

- 발췌 : https://weekly.donga.com/3/all/11/20193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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