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게시판

초기 기독교는 이집트에서 대세를 형성했다

작성자
hsy6685
작성일
2020-08-07 23:17
조회
3934
올드 카이로(Old Cairo) 콥틱박물관(Coptic Museum)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예수피난교회가 있다. 예수 가족이 사용했던 우물이 지금도 남아 있어, 그 우물 위에 이 교회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성화 속에는 예수를 목마 태운 요셉이 부인 마리아를 말에 태우고 3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멀리 보이는 카이로 지역을 지나가고 있다. 이 콥틱교회의 정식 명칭은 성 세르기우스교회(St. Sergius Church)이다. 매년 6월 1일이면 이곳에서 예수 가족 피난을 기념하는 특별한 미사가 열린다.
지금 우리는 아랍문명권과 이스라엘의 적대적 관계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단절된 별도의 두 문명으로서 설정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집트가 아랍문명권의 한 맹주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시 이집트는 아랍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아랍 사람들이 이집트를 점령한 것은 7세기의 사건이었다. 639년에 파로스등대에 상륙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고, 641년에는 카이로 외곽 지역에 신도시 푸스타트(Fustat)를 건설한다. 그러니까 639년 이전의 이집트 역사는 아랍과의 관련성이 전무하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계를 오늘날의 대적적 감정의 색안경으로 들여다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기실 이스라엘의 역사 그 자체가 이집트 문명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출애굽’이라는 사건은 문학적 상상력을 통하여 과대포장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살기 이전의 족장들(Patriarchs)의 역사는 애매한 것이다. 그것은 구전을 통하여 내려온 단군설화와도 같은 문학이며, 어떠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다. 단군신화의 기록이 몽고의 폭압에 유수되어 버린 고려 민중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듯이, ‘출애굽’이라는 사건 자체도 바빌론유치시대(BC 587c.~537c.)의 폭압과 민족정체성 상실의 쓰라린 경험 속에서 더욱 강렬하고 선명하게 신화적으로 재구성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집트에 살던 어떤 소수민족 그룹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과정이 출애굽기라는 문학이 묘사하듯이 그토록 선명한 극적 과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몽(朱蒙)이 부여를 떠나 어별(魚鼈)의 도움을 얻어 엄호수(淹狐水)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러 고구려를 세우는 이야기보다 더 장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소수그룹의 민족 이동과정은 느슨한 시간의 점진적 과정일 수밖에 없다.

야훼신앙의 창시자이며 유대민족 역사의 진정한 개조(開祖)라 할 수 있는 모세도 이스라엘 사람이기 전에 이집트인이었다. 이집트에서 태어나서 이집트 말을 했으며 이집트 문명의 모든 훈도를 받은 이집트 왕족의 한 사람이었다. 출애굽이라는 문학적 사건의 상징적 이미지 때문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적대적인 관계로 파악하기 쉽지만 모세 이후의 역사에 있어서도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끊임없는 교섭의 한 울타리 속에 있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족인 동시에 시내광야의 베두인이기도 했다. 여기 시내산 기슭에서 만난 이 베두인족 소년의 이름이 바로 ‘모세(Moses)’였다.
우리는 ‘나일강의 범람’이라는 그릇된 단어 선택으로 인하여 이집트문명에 대한 오도된 인상을 가지기 쉽다. 범람은 천둥번개가 치는 홍수(flood)가 아니다. 그것은 태양빛이 찬란한 청천백일하의 정확히 예측 가능한 증수(增收, inundation) 현상일 뿐이다. 그것은 나일강 주변의 광범한 농토에 관개와 개토의 역할을 해주는 천혜의 축복이었다. 이 범람의 축복 때문에 나일강 주변에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부의 축적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가뭄과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는 주변의 각박한 지역의 사람들은 무시로 이집트로 이주하게 마련이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아니라 참으로 각박하기 그지없는 땅이었다.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표현한 것은 나일강 주변의 풍요의 꿈을 팔레스타인에 투사한 것뿐이다. 따라서 이집트에는 옛날부터 유대인의 광범한 다이애스포라가 상존해 있었다. 아브라함과 야곱, 그리고 예레미야도 애굽으로 갔고, 바빌론유수에서 풀려난 사람들도 각박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보다는 풍요로운 이집트로 대이동했던 것이다.

마태복음설화에 의하면 예수도 태어나자마자 지금 카이로 지역에 와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가 헤롯의 박해를 피하여 이집트에서 피난살이를 했던 것이다(마 2:13~23). 이러한 설화는 수많은 유대인이 뭔 일만 있으면 이집트로 피신하여 삶을 보전하였던 기나긴 실제 역사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뜻은 ‘기독교의 탄생’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상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통념을 깨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루살렘이나 로마에서 탄생된 것이라고 규정짓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의 리더십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 주류를 가장 적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된다.

최초의 기독교는 물론 유대인공동체의 한 운동이었다. 예루살렘성전멸망 이후, 그 운동이 가장 활발한 곳은 나일강 델타의 알렉산드리아였다. 이 나일강변의 유대인들은 물론 이집트 말을 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상당 부분 이집트 사람들과 동화되어 갔다. 그리고 이들 중 지식인들은 대부분 히브리 말보다는 희랍어에 능통했다. 희랍어는 당시 로마세계에 있어서 가장 대중적이며 보편적인 국제공용어였다. 기독교가 점차 이집트 토착민들에게 전파됨에 따라 이집트 말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풍요로운 희랍어 어휘들을 이집트 말 속으로 차용하면서 이집트 말 자체를 희랍어 문자로 표기하는 일종의 이두문자를 고안하기에 이른다. 이 이두문자를 콥틱(the Coptic language)이라고 부르는데 우리 학계에서는 콥트(Copt)어라고 통용하고 있다. 이 콥트어는 희랍어로 표기되지만 어디까지나 이집트 말이다. 이 콥트어는 함족과 셈족의 혼합언어(Hamito-Semitic language)인 고대이집트어 발달사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언어이다. 콥트어는 이미 AD 1세기 때부터 서서히 발전해 나갔지만 이집트인들이 자신의 언어를 ‘콥트어’라고 부른 것은 아니다.

애굽을 희랍어로는 ‘아이깁티오스(Aigyptios)’라고 불렀는데, 7세기 아랍 사람들이 애굽을 정복했을 때 애굽을 그냥 ‘쿠브트’(qubt)라고 부른 데서 기원한 것이다. 아이깁티오스→애굽부트→쿠브트→콥트로 와전되어 간 것이다. 그러니까 7세기에 이집트인들이 쓰던 언어를 아랍인들이 통칭해서 ‘이집트 말’이라고 규정한 단어가 곧 ‘콥트어’였다. 이집트 역사를 쓸 때에는 서로마제국의 통치가 종료된 395년부터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한 641년까지를 공식적으로 콥틱시대(Coptic period)라고 부른다. 이 시기야말로 이집트의 기독교전성시기(Christian period)였으며 비잔틴시대(Byzantine period)에 해당한다.

앞서 우리가 논의한 안토니우스, 파코미우스, 아타나시우스, 이들 모두가 희랍어와 콥트어를 동시에 사용한 사람들이었다. 기독교를 잉태시킨 최초의 언어로서 우리는 희랍어와 콥트어를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 최초의 조직적 운동은 모나스티시즘(monasticism) 즉 수도원제도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수도원제도 자체가 이집트 나일강변에서 발생한 것이다. 개별적 은둔생활인 앵코라이티시즘(anchoriticism)에서 집단적 규율생활인 세노비티즘(cenobitism)으로 발전해 나간 과정은 이미 앞서 상술하였다. 이들이 말하고 쓴 언어가 모두 콥트어였다.

이 공동규율수도승집단의 최초의 영적 리더가 파코미우스(Pachomius)였고, 파코미우스는 그의 저작을 콥트어로 남겼다고 사료되고 있다. 그의 저작은 전통적 이집트의 지혜문서와 연계선상에 있다. 그리고 파코미우스의 수도원운동을 더 엄격하고 더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셰누테(Shenoute, Shenute, or Schenoudi, AD 360c.~450c.)였다. 셰누테는 사소한 규율이라도 어기는 수도승에게는 채찍을 가할 정도로 엄격한 세노비티즘을 강조했는데, 셰누테야말로 콥트어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많은 글을 남긴 대문호였다. 셰누테는 고도의 개념적 어휘들을 매우 주체적으로 구사하면서 콥트어의 스타일과 문법을 완성시켰다. 셰누테는 AD 431년에 에베소공의회(the Council of Ephesus)에 참석하여 네스토리우스(Nestorius)를 이단으로 휘몬 장본인이기도 했다. 우리가 이제부터 공부하려는 도마복음서는 콥트어로 쓰여진 것이며, 이들 수도승들이 그들의 교과서로 가지고 있었던 바이블 텍스트였다.

- 출처 : https://news.joins.com/article/2995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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