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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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3/04 | 황건적의 난 |
황건적의 난(黃巾賊- 亂)은 중국 후한 말기 호족 지주에 의한 토지겸병의 위기에 끊임없이 직면해 있던 농민이 황건적(黃巾賊)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 날짜 : 184/03/04 ~ 185/01 | |
184/04/01 | 하진, 대장군에 임명 |
양주의 난(涼州-亂)은 기원후 184년에서 189년까지 후한의 서량 지방에서 일어난 불온사태이다. 본래는 소수민족 강족들이 한족의 지배에 대해 들고 일어난 것으로 시작했으나, 이 틈을 타 마등, 한수를 비롯한 서량의 한족 군벌들과 소월지까지 봉기하여 중앙 후한 정부에서 독립, 할거하였다.
* 날짜 : 184/04/01 | |
184/04 | 도원결의(?) |
도원결의(桃園結義)는 후한 말 영제시대 황건적이 일어나 유주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있었던 때에 유비, 관우, 장비가 장비의 집 뒤뜰에서 만나 의형제를 맺은 일을 말한다.
* 날짜 : 184/04 | |
184/11 | 양주의 난 |
양주의 난(涼州-亂)은 기원후 184년에서 189년까지 후한의 서량 지방에서 일어난 불온사태이다. 본래는 소수민족 강족들이 한족의 지배에 대해 들고 일어난 것으로 시작했으나, 이 틈을 타 마등, 한수를 비롯한 서량의 한족 군벌들과 소월지까지 봉기하여 중앙 후한 정부에서 독립, 할거하였다.
* 날짜 : 184/11 ~ 189/02 | |
184/08 | 장수의 거병 |
도교의 교단을 이끌던 장수가 익주에서 거병
* 날짜 : 184/08 | |
185 | 선비의 반란 |
후한 왕조가 혼란해지자 선비가 유주와 병주에 난입한다.
* 날짜 : 185 | |
185 | 흑산적의 난 |
흑산적(黑山賊)은 중국 후한말 시기 타이항 산맥을 근거지로 했던 산적 연맹체로 그 총두령은 장연이었다.
* 날짜 : 185 | |
185 | 흑산적 장연의 투항 |
흑산적(黑山賊)의 수령 장연은 스스로 귀순하여 평난중랑장(平難中郞將)에 임명되어 효렴을 추천할 수 있는 자격이 내려졌다. 정부가 사실상 장연의 병주 지배를 인정한 것이었다.
* 날짜 : 185 | |
185 | 전염병 발생 |
로마 제국의 안토니우스 역병 시기에 후한에서도 151년, 161년, 171년, 173년, 179년, 182년, 그리고 185년에 전염병이 발생한다
* 날짜 : 185 | |
187 | 장순의 난 |
장순은 187년 옛 태산태수 장거·오환의 수령 구력거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유주의 주도인 계(薊)를 함락시켰다. 장순 자신은 스스로 미천장군(彌天將軍)·안정왕이라 칭하고, 우북평·요서를 공격하여 여러 군의 태수들을 죽였다.
* 날짜 : 187 ~ 189/04 | |
187 | 손견, 강남 토벌 |
187년 장사군에서 구성, 영릉군과 계양군에서 주조(周朝)와 곽석(郭石), 관곡(觀鵠)이 함께 난을 일으키자 장사태수에 임명되어 그 진압을 맡았다. 손견이 모두 평정하고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졌다.
* 날짜 : 187 | |
188 | 공손찬이 장순을 격파 |
188년, 석문(石門)에서 장순 등을 대파하고 잡혀있던 많은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계속 추격했는데 너무 깊이 들어간 탓에 도리어 관자성(管子城)에서 구력거 등에게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 날짜 : 188 | |
188 | 오환 구력거의 투항 |
장순, 구력거 등의 반란 세력은 유주, 청주, 기주, 서주를 약탈하여 피해를 입혔고, 공손찬은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 유우를 유주목(幽州牧)으로 파견하자, 구력거 등은 유우가 온 것을 기뻐하며 귀순하였다.
* 날짜 : 188 | |
188/04 | 유우 유주 부임 |
유우(劉虞, ? ~ 193년)는 중국 후한 말의 관료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얻었으며 원소로부터 황제로 추대되기도 했는데 본인이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민족 정책을 놓고 공손찬과 대립하다가 살해당했다. 188년 조정에서 유우를 유주목으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 날짜 : 188/04 | |
188 | 흉노의 내홍 |
남흉노에서 내홍이 일어나 선우 강거가 살해되고 어부라가 선우 자리에 오른다.
* 날짜 : 188 | |
188/03 | 황건적 잔당 곽태의 난 |
188년이 되자 황건과도 관계 있는 백파(白波)의 적(賊)이 산시성(山西)에서 봉기한다.
* 날짜 : 188/03 | |
188/04 | 황건적 잔당의 난 |
188년이 되자 산둥성(山東) 방면에서는 칭조우(淸州)와 쉬조우(徐州)의 황건이 연달아 맹위를 떨친다.
* 날짜 : 188/04 | |
189/05/13 | 후한 영제 사망 |
한 효령황제 유굉(漢 孝靈皇帝 劉宏, 156년 ~ 189년, 재위 168년 ~ 189년)은 중국 후한의 제12대 황제로, 장제(章帝)의 고손자이다. 재위 중의 잇따른 재해와 소규모 반란, 그리고 황건의 난 등으로 그의 사후, 군웅할거 시대가 열리게 되고, 이는 삼국 시대로 이어진다. 189년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 날짜 : 189/05/13 | |
189/09/22 | 십상시의 난 |
환관을 압살하려던 대장군 하진이 환관 일파에게 암살당한다. 이에 분개한 원소가 부하를 이끌고 궁중에 난입하여 환관을 대규모로 학살한다.
* 날짜 : 189/09/22 | |
189/09 | 여포가 동탁군에 합류 |
낙양에 당도한 동탁은 정권을 장악하고자 정원의 군대를 손에 넣고 싶어 했다. 여포는 동탁의 꾐에 넘어가 정원을 죽이고 기도위에 올랐으며 그 양아들까지 될 정도로 깊은 신임을 받았다.
* 날짜 : 189/09 | |
189/09/28 | 동탁의 정권 장악 |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동생 유협을 제위에 올려서 조정의 실권을 쥔다.
* 날짜 : 189/09/28 | |
190 | 원술, 남양군 통치 |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여 정권을 잡고는 원술을 후장군에 임명하며 그 협력을 바랐지만 남양군으로 피하였다. 190년(초평 원년) 동탁의 횡포에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원술 역시 이름을 올렸다. 마침 장사태수 손견이 같은 연합군이었던 남양태수 장자(張咨)를 죽이고 남양군을 원술에게 바쳤다.
* 날짜 : 190 | |
190 | 공손탁의 독립 |
공손도(公孫度, ? ~ 204년) 또는 공손탁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는 승제(升濟)이며 유주 요동군 양평현(襄平縣) 사람이다. 이름인 度는 도나 탁으로 읽히며 어릴 적 이름은 공손표(公孫豹)였다. 후한 말의 혼란기에 동북방 변방의 태수로서 독자 세력을 구축하였다.
* 날짜 : 190 | |
190 | 유표 형주 부임 |
190년(초평 원년) 형주자사 왕예가 장사태수 손견에게 살해당하여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 날짜 : 190 | |
190 | 손견의 북상 |
190년(초평 원년) 1월(음력)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호응하여 낙양으로 진군하였다. 가는 길에 같은 연합군의 일원인 형주자사 왕예와 남양태수 장자(張咨)를 살해했다.
* 날짜 : 190 | |
190 | 군웅할거의 시대로 |
동탁군과 반동탁군이 대치하면서 조정의 혼란은 극에 달했고, 전국 각지에서 도적 떼가 날뛰고 제후들이 군사를 일으키는 등 군웅할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 날짜 : 190 | |
190/01 | 동탁 토벌전 |
동탁 토벌전(董卓討伐戰)은 190년~191년에 동탁과 동탁에 대항하여 연합군을 결성한 관동의 지방 세력 간의 싸움이다. 동탁이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하며 공포 정치를 행하자 관동의 지방 세력들은 원소를 중심으로 연합군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연합군 대부분은 동탁과 싸우기를 꺼려 조조 · 위자 · 포신 · 왕광 · 손견만이 동탁과 교전을 벌였고, 동탁은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하여 연합군의 예봉을 피했다. 손견이 여러 차례 이긴 데 힘입어 연합군은 낙양을 빼앗았으나 내홍이 일어나 분열되어 동맹은 결렬되고, 동탁이 주축이 된 후한 조정은 지방에 대한 통제를 잃었으며, 지방 세력의 할거 · 경쟁 구도로 바뀌었다.
* 날짜 : 190/01 ~ 191/04 | |
190/04/09 | 동탁, 낙양을 불 태우고 장안으로 천도 |
낙양 사람 수백만 명을 군대로 몰아치며 이주시키니 짓밟히거나 굶어 죽은 시체가 거리를 메웠고, 궁궐·관청·민가는 모두 불태워서 200리 내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여포를 통해 황제와 대신들의 묘까지 도굴하였다. 그 과정에서 원소의 숙부 원외와 원술의 동복형 원기 등 낙양에 남아있던 원소 일가를 멸족하였다.
* 날짜 : 190/04/09 | |
190/05 | 형양 전투 |
조조가 맨 먼저 출병했으나 형양 전투에서 동탁군에게 패배
* 날짜 : 190/05 | |
191 | 공손찬과 원소의 대립 |
유주의 공손찬이 기주에 침공하여 한복을 압박하는 등 지배권을 놓고 원소와 대립하였다.
* 날짜 : 191 | |
191 | 공손찬, 황건적 봉기 진압 |
청주와 서주에서는 황건적 30만 명이 일어났는데 11월에 태산태수 응소에게 격파되자 발해군을 거쳐 흑산적과 합치려 하였다. 공손찬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끌고 나가 동광현(東光縣)에서 대파하고 3만여 급을 취했다. 황건적은 치중 수만 량(兩)을 내버리고 강을 건너 달아났다. 반쯤 건넜을 때 또다시 들이쳐 수만 명을 죽였다. 그 피로 강이 붉어졌으며 7만여 명을 생포했고 수레와 갑옷, 재물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위명이 크게 진동하여 분무장군(奮武將軍)에 계후(薊侯)가 되었다.
* 날짜 : 191 | |
191 | 장로의 독립, 한중 지배 |
중국 후한(後漢) 말에 장로의 조부인 장릉(張陵)이 서천 지방에서 오두미도교를 창시했다. 장로는 한중에서 독립하여 한중의 이름을 한녕으로 바꾸었다. 스스로 사군(師君)이라 칭하고 한중과 파에서 제정(祭政) 일치의 종교 왕국을 세웠다. 장로는 25년 동안이나 독립 왕국으로서 한중을 지배하게 된다.
* 날짜 : 191 | |
191/04 | 손견, 낙양에 입성 |
동탁·여포군을 격파한 손견이 낙양에 입성한다.
* 날짜 : 191/04 | |
191/07 | 원소가 기주 탈취 |
흑산적(黑山賊) 장연을 비롯해 어부라(於夫羅)· 장양(張楊) 등의 군벌이 기주를 넘보았는데 원소는 이들을 모두 격파하였으며 패퇴한 장양· 어부라는 원소에게 항복했다. 이로 인해 기주 내에서 위세를 얻은 원소는 이를 바탕으로 한복을 설득하며 또한 협박했다. 겁에 질린 한복은 결국 원소에게 기주목의 자리를 양도한다.
* 날짜 : 191/07 | |
191/11 | 양성 전투 |
공손찬은 원소와 대립하고 있던 사촌동생 공손월(公孫越)을 파견하여 원술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원술은 손견(孫堅)과 공손월을 파견해 원소의 간접적인 세력권 내에 있던 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공손월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에 공손찬은 더욱 대노하여 원소를 칠 것을 다짐하고 반하(磐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 날짜 : 191/11 | |
191/12 | 계교 전투, 공손찬 기주 포기 |
원소와 공손찬이 계교에서 격돌. 원소군의 압승으로 공손찬은 기주를 포기한다.
* 날짜 : 191/12 | |
191/12 | 양양 전투, 손견 사망 |
원술의 명을 받고 손견이 유표 토벌에 나선다. 유표의 거점 양양(襄陽)을 포위한 채 현산(峴山)으로 달아난 황조, 여공 을 쫓다가 화살과 돌에 맞아 죽었다. 시신은 손견이 효렴으로 추거해줬었던 환계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표에게 청해 받아왔다.
* 날짜 : 191/12 | |
192 | 조조가 청주 황건군 진압 |
청주 제북국에서 황건의 잔당이 거병하자 연주목이 된 조조가 이들을 진압한다. 이들을 흡수해 '청주병'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 날짜 : 192 | |
192 | 채옹 사망 |
채옹(蔡邕, 133년 ~ 192년)은 후한 말기의 학자로, 자는 백개(伯喈)이며 연주 진류군 어현(圉縣) 사람이다. 전한의 개국공신 채인의 14세손으로, 학문과 글씨에 뛰어난 재주를 가져 명성이 높았다. 서예의 기법인 영자팔법의 고안자라고도 알려져 있다. 훗날 서진 초의 명장 양호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또 방계 증손자로 채표(蔡豹,字士宣) 등이 있다.
* 날짜 : 192 | |
192/05/22 | 왕윤과 여포, 동탁을 죽이다 |
192년 5월 동탁이 여포 등 호위병을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는데 기도위 이숙 등 10여 명의 습격을 받았다. 동탁은 속에 갑옷을 입은지라 팔에만 부상을 입고 수레에서 떨어졌다. 큰 소리로 여포를 찾자 여포는 “조서를 받들어 역적 동탁을 치노라”고 하였고, 동탁은 “개 같은 놈,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다.
* 날짜 : 192/05/22 | |
192/06 | 이각,곽사의 장안성 전투 |
장안성 전투(長安城戰鬪)는 192년 한나라 장안성에서 동탁이 죽은 뒤 다시 정권을 되찾으려는 동탁의 잔당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등이 여포와 벌인 전투로 여포는 전투에서 대패해 원술에게로 가고 왕윤은 장안성에서 이각과 곽사에게 살해당했다.
* 날짜 : 192/06 | |
193 | 조조와 원술의 광정 전투 |
원소 진영의 연주목 조조가 광정(匡亭, 진류군 평구현 소재)에 주둔하던 원술 부하 유상(劉詳)을 깨트리고 봉구로 진격해왔다. 양읍현(襄邑縣)으로 철수하니 조조가 태수수(太壽水)의 물을 성으로 흘려보냈다. 양국 영릉현(寧陵縣)을 거쳐 결국 양주 구강군으로 도주하였다. 원술을 패퇴시킨 조조가 원소의 최대 라이벌로 바뀐다.
* 날짜 : 193 | |
193/09 | 조조의 서주 침공 |
도겸은 연주 동쪽 태산군에 침공했고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조는 193년부터 194년에 걸쳐 2차례 도겸 정벌에 나섰다. 조조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짓밟히던 서주는, 조조의 근거지인 연주에서 장막과 진궁이 조조를 배신하여 여포를 조조와 대립하게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
* 날짜 : 193/09 ~ 194/04 | |
193/12 | 공손찬, 유우 살해 |
유주자사 유우와 공손찬이 거용성에서 무력 충돌. 공손찬이 유우를 붙잡아 살해한다.
* 날짜 : 193/12 | |
194/04 | 마등ㆍ한수의 장안 침공 |
194년, 마등은 이각에게 식량을 지원해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려 했다. 한수는 마등과 이각을 중재하려 했으나, 나중에는 마등과 합세하여 장안을 공격했다. 이각이 곽사·번조와 조카 이리(李利)를 내보내 서량군을 공격하자 한수와 마등은 패배하여 서량으로 물러났다.
* 날짜 : 194/04 | |
194/05 | 복양 전투, 조조 연주 되찾다 |
복양 전투(濮陽戰鬪)는 194년~195년에 두 차례에 걸쳐 연주와 복양을 두고 조조와 여포가 싸운 전투로 조조가 이 전투에서 승리해 다시 연주를 되찾고 여포는 서주의 유비에게로 가 의탁한다.
* 날짜 : 194/05 ~ 195/01 | |
194 | 손책의 강동 평정 |
강동평정(江東平定)은 후한말 군벌 원술의 밑에 있던 손책이 양주 일대를 정복하고 독립된 군벌 세력으로 자립한 일련의 원정이다.
* 날짜 : 194 ~ 199/12 | |
194 | 도겸 사망, 유비 서주자사로 |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자 서주목 도겸(陶謙)이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으므로 유비는 전해와 함께 도겸을 돕게되었다. 이때부터 유비는 전해 밑을 떠나 도겸에게 몸을 의지하여 소패에 주둔하였으며, 도겸이 죽은 후에는 도겸의 유지를 받들고 주위의 권유를 받아 서주를 지배하게 된다.
* 날짜 : 194 | |
195/08 | 헌제, 장안에서 탈출 |
동탁 사후에 황폐해진 장안에서 후한 황제 헌제가 탈출. 이듬해, 낙양에 도착한다.
* 날짜 : 195/08 | |
196 | 장수張繡, 남양군에 터전을 잡다 |
196년(건안 원년) 홍농에 주둔하던 장제가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남양군의 양(穰, 지금의 허난성 덩저우 시)을 공격하다 유시에 맞아 전사하였다. 장수가 그 뒤를 이었고 형주목 유표의 배려로 완(宛)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 날짜 : 196 | |
196 | 원술과 유비의 우이·회음 전투 |
원술이 서주에 침공하자 유비가 우이·회음에 출전한다. 여포가 두 사람 사이에서 배신을 거듭한다.
* 날짜 : 196 | |
196 | 여포가 유비를 습격해 서주를 빼앗다 |
원술과 손잡은 여포가 유비를 습격해 서주를 빼앗다.
* 날짜 : 196 | |
196/03 | 조조의 예주 정벌 |
조조가 여남 영천 양군의 황건 잔당을 항복시키고 예주를 평정한다.
* 날짜 : 196/03 | |
196/09 | 조조의 헌제 보호 |
196년 가을에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가 헌제를 맞이하니, 이때부터 헌제는 조조의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한편 원소의 부하인 저수(沮授)가 당시 중국에서 가장 강한 군벌로 성장한 원소(袁紹)에게 헌제를 모실 것을 원소에게 조언하였으나, 헌제가 동탁 덕분에 황제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 원소는 헌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헌제를 맞이하지도 않았다.하지만 한편에는 헌제가 조조에게 보호받는 처지가 되자 헌제를 맞이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 날짜 : 196/09 | |
197 | 원술 토벌전 |
원술 토벌전(袁術討伐戰)은 후한말 197년 군벌 원술이 황제를 자칭하자 후한 조정의 조조와, 원술에 반대하는 손책·유비·여포 등의 군벌들이 협공하여 원술을 멸망토록 한 전투이다.
* 날짜 : 197 ~ 199/07 | |
197 | 원술의 칭제 |
197년 기어이 부명(符命)을 받았다며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중(仲)이라 하였다. 구강태수를 회남윤(淮南尹)으로 승격하고 공경백관(公卿百官)을 두었으며 천지에 제사지냈다. 이를 간하던 손책은 독립하였다.
* 날짜 : 197 | |
197 | 손책의 독립 |
황제의 제위에 오른 원술에게 등을 돌린 손책이 강동에서 독립한다.
* 날짜 : 197 | |
197 | 원술, 여포에게 패배 |
진등의 책략에 말려 양봉과 한섬이 여포 측에 붙는 바람에 호현 부근에서 여포군에게 참패하여 장훈만 간신히 퇴각하고 다른 장수는 죽임을 당한다.
* 날짜 : 197 | |
197 | 원술, 조조에게 패배 |
원술이 진국을 공격하지만 조조가 물리친다. 원술은 휘하에 있는 장수들을 남겨둔채 포위망을 뚫고 홀로 빠져나간다.
* 날짜 : 197 | |
197/02 | 조조와 장수의 전쟁 |
조조와 장수와의 전쟁은 장수가 조조에게 항복함으로써 끝이 났다.
* 날짜 : 197/02 ~ 199/12 | |
198 | 유비가 조조로 도망 |
여포에게 공격을 받은 유비가 패주한 후 조조군과 합류한다.
* 날짜 : 198 | |
198 | 역경 전투, 공손찬 사망 |
198년(건안 3년), 원소가 대대적으로 침공해왔다. 199년 3월, 역경. 하북의 백마장군으로 명성을 날렸던 공손찬이 원소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패사했다.
* 날짜 : 198 ~ 199/03 | |
198/12 | 하비 전투, 조조가 여포 처형 |
하비 전투(下邳 戰鬪)는 198년 서주의 하비를 목표로 조조와 여포가 싸운 전투로, 조조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서주를 되찾고 여포는 처형된다.
* 날짜 : 198/12 ~ 199/02/07 | |
199/03 | 원소가 하북의 패자로 등장 |
북방 이민족을 포함한 염유군까지 거두어들인 원소는 공손찬을 정벌한 시세를 타서 유주·기주 외에 청주와 병주까지 흡수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고, 비옥한 하북을 중심으로 한 4주를 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 날짜 : 199/03 | |
199/07 | 원술 사망 |
결국 원수처럼 여기던 원소에게 의지하려다 조조에게 저지당하고 객사하였다.
* 날짜 : 199/07 | |
199/05 | 유비의 독립 |
서주 정벌에 나선 유비가 조조를 배신하고 독립한다.
* 날짜 : 199/05 | |
200/02 | 동승의 조조 암살 계획 |
헌제의 측근 동승이 조조를 토벌하기 위해 쿠데타를 기도하지만 발각되고, 동승은 처형된다. 여기에는 동승을 비롯하여 왕자복,오자란,충집 등이 뜻을 같이했다. 조조를 타도하려는 유비도 이름을 올렸다.
* 날짜 : 200/02 | |
200/02 | 소패전투, 유비 원소에게로 |
조조가 자신의 암살 계획에 가담한 유비를 조조가 정벌.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하고, 유비는 원소에게 몸을 의탁한다.
* 날짜 : 200/02 | |
200/03 | 백마 전투 |
원소군과 조조군이 백마에서 격돌하여 관우가 안량의 목을 벤 후, 그 수급을 조조에게 헌상한다.
* 날짜 : 200/03 ~ 200/05 | |
200/05 | 연진 전투 |
연진 전투(延津之戰)는 후한말 군벌 조조와 원소가 격돌한 관도 전역의 두 번째 전면전이다. 황하 남안의 연진이 전장이었다. 바로 직전의 백마 전투에서 원소군의 숙장인 안량이 전사함에 이어 연진 전투에서 또다른 숙장 문추가 전사함으로 인하여 원소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하였고, 이는 뒤이은 본 게임인 관도대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날짜 : 200/05 ~ 200/08 | |
200/05/05 | 손책 사망 |
손견의 장남이자, 대제 손권(孫權)의 형이다. 손견 사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도 강동의 호걸들을 불러모아, 강동을 정벌하여 오나라의 기반을 닦아 소패왕이라 불렸다. 겨우 스물여섯 나이에 요절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 날짜 : 200/05/05 | |
200/06 | 정현 사망 |
정현(鄭玄, 127년 ~ 200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학자로, 자는 강성(康成)이며 북해국 고밀현(高密縣) 사람이다.
* 날짜 : 200/06 | |
200/09 | 관도 대전 |
관도 대전(官渡大戰)은 중국 후한 말 시기에 관도(官渡 : 현재의 허난성 정저우시 중무현 근처)에서 조조(曹操)와 원소(袁紹)가 벌인 큰 전투이다. 적벽 대전 · 이릉 대전과 함께 삼국시대의 흐름을 결정지었던 중요한 전투이다.
* 날짜 : 200/09 ~ 200/11 | |
201/05/20 | 창정 전투 |
조조가 창정에 있는 원소군을 공격해 원소를 업현으로 후퇴시킨다.
* 날짜 : 201/05/20 ~ 201/06/18 | |
201/09 | 여남 전투, 유비 유표에게로 |
유표와 연대하여 조조의 배후를 다시 교란하려던 유비가 조조군에게 패한다. 유비는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 형주로 도망친다.
* 날짜 : 201/09 | |
202/06/28 | 원소 사망 |
중앙에서 태어난 관료 출신이었지만 사상가·정치가로서의 명망과 경력을 바탕으로 기주 일대에서 빠르게 군벌화하였고, 한복·공손찬·장연·전해·공융 등의 정부 관료·군벌들을 격파·병합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조조에게 패한 뒤(관도대전) 202년에 병으로 죽었다.
* 날짜 : 202/06/28 | |
202/10 | 여양 전투, 조조의 승리 |
원씨 형제를 토벌하기 위해 진군한 조조군이 여양에서 승리한다. 원씨 형제는 업현으로 패주한다.
* 날짜 : 202/10 ~ 203/06 | |
203 | 조조의 북중국 통일 원정 |
조조의 북중국 통일 원정.
* 날짜 : 203 ~ 207/10 | |
203 | 박망파 전투 |
신야에 주둔한 유비가 북진하면서 박망에서 하후돈이 이끄는 조조군과 충돌한다. 승패가 가려지지 않은 채 양군이 철수했다.
* 날짜 : 203 | |
203/04 | 하구 전투 |
황조를 토벌하기 위해 손권이 하구에 출진하지만 산월이 반란을 일으켜서 철수한다.
* 날짜 : 203/04 | |
203/10 | 원담, 조조에게 투항 |
원씨 형제가 내분을 일으키고, 결국 원담은 조조에게 투항한다.
* 날짜 : 203/10 | |
204/03 | 업 전투, 조조가 업성 함락 |
원씨 일가의 거점인 업성을 포위한 조조가 원상군을 무찌르고 점령한다.
* 날짜 : 204/03 ~ 204/09 | |
205/01 | 남피 전투, 조조가 기주 접수 |
조조가 자신을 배신하고 남피에서 농성에 들어간 원담을 사로잡아 참수한다. 이 전투로 원씨 세력은 기주 땅에서 완전히 추방되고, 조조가 기주의 새로운 맹주로 자리 잡았다.
* 날짜 : 205/01 | |
205/04 | 장연이 조조에게 투항 |
흑산적의 두목 장연이 조조에게 귀순한다.
* 날짜 : 205/04 | |
206 | 손유의 마둔과 보둔 공격 |
손유와 주유가 산월의 진지인 마둔과 보둔을 공격하여 함락한다.
* 날짜 : 206 | |
206/06 | 호관 전투, 조조 병주 평정 |
호관에서 반기를 든 고간을 조조가 직접 토벌한다.
* 날짜 : 206/06 | |
206/10 | 조조 청주 평정 |
조조가 청주 연안의 해적 관승을 토벌한다. 이번에는 조조가 직접 출진하지 않았으나 악진,이전군의 활약으로 관승군은 괴멸한 채 동해의 섬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 날짜 : 206/10 | |
207/10 | 백랑산 전투, 조조 북중국 평정 |
오환으로 달아난 원상,원희를 조조가 백랑산에서 무찌른다. 조조는 이 전투의 승리의 결과로 20만 명이나 되는 오환의 군대를 자군에 흡수하면서 세력을 더욱 확장했다.
* 날짜 : 207/10 | |
207/10 | 공손강이 원씨 형제 살해 |
백랑산 전투에서 패배한 원씨 형제는 요동의 공손강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 도망친다. 하지만 조조의 후환을 두려워한 공손강은 원희,원상을 살해하고, 그들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냈다.
* 날짜 : 207/10 | |
207/12 | 삼고초려 |
삼고초려는 유비가 융중에 기거하던 제갈량을 얻기 위해 몸소 제갈량의 초가집으로 세 번이나 찾아갔던 일화에서 유래하였다.
* 날짜 : 207/12 | |
208/04 | 하구 전투, 손권이 황조를 토벌 |
손권이 다시 하구를 공격해 황조를 공격하여 죽이고, 마침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
* 날짜 : 208/04 | |
208/07 | 조조가 형주 토벌에 나서다 |
원씨 일가를 멸망시키고 유주에서 업현으로 귀환한 조조는 내정을 정비한 후 같은 해 7월, 형주를 정복하기로 결심하고 곧장 남방으로 향한다.
* 날짜 : 208/07 | |
208/09 | 유표 사망 |
조조가 하북을 정리한 후 다시 형주로 남하하던 때 병사하였다. 나이 67세였다. 형주를 거의 20년간 다스렸음에도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후사는 채모, 장윤 등 평소 대다수의 지지를 받던 차남 유종이 이었다.
* 날짜 : 208/09 | |
208/10 | 조조 형주 접수 |
유종은 형주목 유표의 아들로, 유표 사후 형주를 넘겨받았으나 곧바로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 날짜 : 208/10 | |
208/10 | 장판 전투 |
번성을 탈출한 유비군이 장판에서 조조군에게 대패한다.
* 날짜 : 208/10 | |
208/11 | 적벽 대전 |
적벽 대전(赤壁大戰 / 赤壁大戦)은 중국의 삼국 시대, 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계속 팽창하던 조조에, 손권과 유비가 연합해 대항하여 양자강에서 벌어진 큰 전투이다. 삼국정립의 시작이다.
* 날짜 : 208/11 | |
208/12 | 합비 전투, 손권의 패배 |
합비 전투(合肥戰鬪)는 208년(건안 13년) 손권이 적벽 대전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조조군의 합비로 쳐들어간 전투로 손권이 패배했다.
* 날짜 : 208/12 ~ 209 | |
208/12 | 남군 전투, 조인이 양양으로 퇴각 |
남군 전투(南郡 戰鬪)는 208년 적벽 대전 후 형주에서의 조조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손권과 유비가 형주의 남군, 양양, 이릉 등을 습격해 조조군과 교전을 벌였고 결국 형주를 탈환했다.
* 날짜 : 208/12 ~ 209/12 | |
210 | 주유 사망 |
주유는 기주 원정을 준비를 하던 중 파구에서 210년 36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 날짜 : 210 | |
210 | 유비의 형주 남부 접수 |
적벽 대전 후 유비는 유기를 형주 자사로 천거하는 한편, 무릉, 장사, 계양, 영릉 등 4군을 평정하였다. 그 후 유기가 죽자 군신들은 유비를 형주자사로 추대했으므로 손권은 유비를 두려워해 자기 여동생인 손부인(孫夫人)과 결혼시켜 유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 애 썼다. 주유의 사망 후 형주 남부에서 유비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 날짜 : 210 | |
210 | 사섭이 손권에게 귀순 |
교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사섭이 손권에게 신하로서 복종을 맹세한다.
* 날짜 : 210 | |
210/04 | 조조, 구현령 발포 |
‘재능제일(才能第一)’이라는 인재등용 방침은 210년에 ‘구현령(求賢令)’으로 공포되는데, 여기에 기라성 같은 인재가 모여들어 크게 활약하게 된다. 이것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조조의 수집벽인데, 알고 보면 조조의 뛰어난 통솔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 날짜 : 210/04 | |
211/04 | 동관 전투, 조조의 관중 평정 |
동관 전투(潼關 戰鬪)는 후한 말기 건안 15년(211년) 조조와 관중 지방의 군벌 연합이 싸워 조조가 승리한 싸움으로 관중 군벌들은 몰락하게 되었다.
* 날짜 : 211/04 ~ 211/11 | |
211/11 | 유장, 유비 초청 |
211년에 조조가 동관 전투에서 마초를 무찌르자 위험을 느낀 한중 태수 장로가 익주를 손에 넣으려고 20년 넘게 익주를 다스리던 익주 자사 유장을 공격한다. 이에 유장은 부하 장송을 보내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고 장송은 유비에게 익주를 다스리라고 한다.
* 날짜 : 211/11 | |
212/01 | 유비의 입촉 |
유비의 입촉(劉備-入蜀)은 212년 ~ 214년까지 유비가 익주 자사 유장을 공격해 벌어진 전쟁이다. 그 결과 유비는 유장을 무찌르고 유장의 세력을 흡수해 훗날 촉한의 기틀을 마련한다.
* 날짜 : 212/01 ~ 214/07 | |
213 | 마초, 장로에게 망명 |
기성을 빼앗긴 채 갈 곳을 잃은 마초는 장로에게로 도망쳤다.
* 날짜 : 213 | |
213 | 유수구 전투, 조조 패배 |
유수구 전투(濡須口之戰)는 기원후 213년 후한말의 군벌 조조와 손권이 양주 유수구에서 맞붙은 싸움이다. 적벽 대전의 패배 이후 양자강 이남에 대한 제어권을 상실한 조조가 재차 강남 진출을 목적으로 벌인 대규모 원정이었으나 손권은 이를 막아내는 데 성공한다.
* 날짜 : 213 | |
213 | 장송이 처형되고 유비 익주 정벌 시작 |
유비와 유장의 친선 관계도 잠시 유비와 유장의 관계가 악화되고 장송이 형 장숙에 의해 유비를 돕는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되자 유비와 유장은 전쟁을 시작한다.
* 날짜 : 213 | |
214 | 복황후의 거사 |
조조는 세력을 확대시키며 212년 위공에 자리에 올라 황제 헌제를 무시하고 맘대로 국상을 처리하기 시작한다. 이에 헌제의 황후 복황후가 편지를 써서 사람에게 보내 조조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 날짜 : 214 | |
214/07 | 마초, 유비에게 망명 |
유비가 성도의 유장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유비에게 밀서를 보내 망명을 청하고 무도군을 통해 촉나라로 들어갔다. 유비의 환영을 받으며 성도 아래에 주둔하니 성은 두려움에 떨었고 얼마 안 가 항복하였다.
* 날짜 : 214/07 | |
214/07 | 유장이 유비에게 항복 |
마초는 모든 군사를 이끌고 성도성 바로 앞까지 진격해 유장에게 항복으로 요구한다. 이에 익주 태수 동화와 황권, 유파가 반대하지만 촉군 태수 허정이 항복하고 초주에게 설득되어 결국 유장은 유비에게 항복을 하고 유비는 익주를 손에 넣는다.
* 날짜 : 214/07 | |
215 | 하후연, 량주 평정 |
215년 하후연은 포한으로 깊숙이 진격해 천하대란 이래 30여년 간 황제를 참칭하던 송건을 붙잡아 참수했다. 또 장합에게 황하를 건너 진격하게 하자 하서의 강족 등 여러 군벌세력들이 다 항복했다. 이로서 184년 변장·한수의 난 이래 반란이 끊이지 않던 서량이 모두 평정됐다.
* 날짜 : 215 | |
215 | 형주 문제로 손권과 유비가 대립 |
215년 유비는 형주를 둘러싸고 손권과 대립하였으며, 조조의 한중 침공으로 다시 화해하였다. 결국 형주 동부의 강하, 장사, 계양을 오나라에 양보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 날짜 : 215 | |
215/04 | 양평관 전투, 조조의 한중 점령 |
양평관 전투(陽平關 戰鬪)는 215년 조조가 한녕태수 장로를 공격해 승리한 전투이다.
* 날짜 : 215/04 ~ 216/01 | |
215/10 | 합비 전투, 손권 패배 |
유비와 손잡은 손권이 합비 정벌에 나서지만 조조군에게 패퇴
* 날짜 : 215/10 | |
216/05/29 | 조조가 위왕이 되다 |
216년 조조가 위왕(魏王)에 봉해지면서 훗날 위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지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헌제는 사실상 허수아비였으며 이 무렵 후한의 실권자는 조조였으나 황제가 되지는 않고 주 문왕을 따른다는 고사를 이상하리만치 확고하게 지키며 위왕으로 붕거(추숭 전 훙거. 추숭 후 붕어)하였다.
* 날짜 : 216/05/29 | |
217 | 한중 공방전 |
217년, 한중을 정복한 조조에게 맞서 유비는 한중을 공략하기로 하고 양평관으로 출진한다. 219년 한중 전투(漢中 戰鬪)는 유비와 조조가 벌인 전투로 유비가 대승을 거두고 조조를 무찔러 한중을 차지하여 촉의 힘은 2배로 커지게 되었다.
* 날짜 : 217 ~ 219/06 | |
217 | 노숙 사망 |
노숙은 손권에게 천하삼분지계를 건의하였으며, 사람됨이 온화하였다. 217년 여몽(呂蒙)을 후임으로 선정하고 병사하였다.
* 날짜 : 217 | |
218 | 경기·위황의 난 |
경기와 위황의 난은 후한 말기 218년 경기와 위황 등이 승상 조조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으로 동승의 거사, 복황후의 거사 이후 마지막으로 일어난 후한 부흥 운동이었다.
* 날짜 : 218 | |
219/03 | 하후연 사망 |
하후연(夏侯淵, ? ~ 219년)은 중국 후한 말 조조 휘하의 장군이다. 재빠르고 과감한 기동이 장기였으며 항상 앞장서서 싸우는 용장이었다. 마초와 한수, 여러 이민족을 물리치고 농우를 평정하였다. 유비로부터 한중을 지켜내던 중 황충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날짜 : 219/03 | |
219/06 | 유비의 한중 점령 |
한중 전투(漢中 戰鬪)는 219년 유비와 조조가 벌인 전투로 유비가 대승을 거두고 조조를 무찔러 한중을 차지하여 촉의 힘은 2배로 커지게 되었다.
* 날짜 : 219/06 | |
219/08 | 번성 전투 |
번성 전투(樊城 戰鬪)는 기원후 219년, 한중왕 유비의 측근 관우가 조조가 점유 중이던 형주 북부를 침공한 사건이다. 처음에는 조조군을 관우군이 압도했으나, 조조군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 사이 유비군과 동맹 관계이던 손권군이 관우를 배신하여 관우는 번성에서 철수한다. 이후 전투는 형주 공방전으로 이어지며, 공방전의 결과 관우는 사망하고 유비는 형주를 상실한다.
* 날짜 : 219/08 ~ 219/12 | |
219/08 | 한중왕 유비 |
유비가 위왕 조조에 맞서 한중왕에 오른다.
* 날짜 : 219/08 | |
219/09 | 조조와 손권의 동맹 |
유비가 한중왕에 즉위하자 분노하지만 사마의의 권유로 오의 손권과 동맹을 맺는다.
* 날짜 : 219/09 | |
219/11 | 형주 공방전, 손권 형주 점령 |
이전부터 호시탐탐 형주를 노리던 손권은 관우가 조조군과의 싸움에 집중하는 빈틈을 노려 몰래 형주를 공격했다. 공방전의 결과 관우는 사망하고 유비는 형주를 상실한다.
* 날짜 : 219/11 ~ 220/01 | |
220 | 구품중정제 실시 |
군에는 소중정이 있어 언행이 훌륭한 자를 선발하여 주의 대중정에게 보내고, 대중정이 이를 다시 살펴 중앙의 사도에게 추천하면 사도가 이들을 평가한 후 상서에게 올려 임용하는 방식인데, 이 때 중정관은 대상자를 평소 관찰한 바의 언행에 따라 9품으로 나누어 추천하였다.
* 날짜 : 220 | |
220 | 황충 사망 |
황충(黃忠, ? ~ 220년)은 후한 말 유비 휘하의 군인으로 자는 한승(漢升)이며 형주 남양군 사람이다. 촉나라에서 후장군에 올랐다.
* 날짜 : 220 | |
220/01 | 관우 사망 |
유비가 거병한 이래 최고의 충신이던 관우가 오의 여몽군에게 살해당했다.
* 날짜 : 220/01 | |
220/02 | 여몽 사망 |
여몽(呂蒙, 178년 ~ 219년)은 중국 후한 말 손권 휘하의 장군이다. 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무인이었는데 손권의 권유로 시작한 공부가 일취월장해서 노숙이 놀랐다는 괄목상대라는 고사와 관우가 지키던 형주를 손에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 날짜 : 220/02 | |
220/03/15 | 조조 사망 |
조조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가 있다. 건시전을 지을 때 탁용사의 신목(神木)을 베자 나무에서 피가 흘러 이를 본 조조가 기절하고 말았다든가, 배나무를 옮겨심을 때 뿌리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이것을 본 후 병상에 눕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 날짜 : 220/03/15 | |
220/12/11 | 조비, 위 건국 |
조조 사후 그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한나라를 멸하고 위나라를 세웠다.
* 날짜 : 220/12/11 | |
221/04/06 | 촉한 건국 |
촉한(蜀漢, 221년 ~ 263년)은 중국 삼국 시대 때 유비(劉備)가 지금의 사천성 지역에 세운 나라로 정식 국호는 한(大漢)이나 역사상 구분을 위하여 촉한이라고 부른다.
* 날짜 : 221/04/06 | |
221/07 | 장비 사망 |
관우 사후 그 복수를 위해 오나라로의 출진을 준비하던 도중 부하인 범강과 장달에게 암살당했다.
* 날짜 : 221/07 | |
221/08 | 이릉 대전 |
이릉 대전(夷陵大戰 / 夷陵大戦), 또는 효정 전투(猇亭戰鬪)는 221년 촉한의 황제 유비가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손권의 오나라를 침공해 발발한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유비는 육손의 화공(火攻)과 뒤이은 공격에 의해 참패하고 백제성까지 물러났다.
* 날짜 : 221/08 ~ 222/10 | |
222/09 | 조비의 남정 |
조비의 남정(魏- 吳 侵攻)은 삼국시대 위나라가 222년과 224년 두 차례에 걸쳐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침공한 사건으로 위 황제던 조비까지 직접 나가고 대군을 동원했으나 끝내 패배했다.
* 날짜 : 222/09 ~ 225 | |
222/10 | 동구 전투 |
명확한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조휴군이 철수함으로써 동구 전투는 싱겁게 끝이 났다. 하지만 완벽하게 방어한 손권군과, 잃기만 하고 얻은 게 없었던 조비군 사이에는 명암이 엇갈렸다.
* 날짜 : 222/10 ~ 223/01 | |
222/10 | 강릉 전투 |
조진군이 강릉성을 포위하자 주연은 사기가 땅에 떨어진 병사를 격려하며 끝까지 견뎌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주연은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고작 5000명의 병력으로 수만 명에 이르는 조진군과 비등하게 싸웠다.
* 날짜 : 222/10 ~ 223/04 | |
222/11 | 유수구 전투 |
유수구에서는 조인과 주환이 대치했다. 상조가 참수당하고 왕쌍이 포로로 잡히자 조인, 조태 부자는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 날짜 : 222/11 ~ 223/02 | |
223/06/10 | 유비 사망 |
223년 4월 관우, 장비의 사망과 이릉전쟁으로 인해 병이 심해진 유비는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이엄을 보좌로 삼고 영안궁에서 63살의 나이에 붕어(崩御)하였고, 8월에 혜릉(惠陵)으로 이장되었다.
* 날짜 : 223/06/10 | |
223/06 | 기춘 전투 |
오나라 하제가 기춘에서 오를 배신하고 위에 투항했던 진종(晉宗)을 토벌했으나 매우 더운 날씨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 날짜 : 223/06 | |
224 | 촉한이 오나라와 동맹 체결 |
제갈량은 오나라에 등지를 사자로 보내 동맹을 모색한다. 오나라는 촉한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위나라의 날카로운 칼끝이 자신에게 향할까 우려하여 동맹 제안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장차 촉한이 북상하여 위나라를 견제한다는 것을 전제로 224년에 다시 동맹을 맺었다.
* 날짜 : 224 | |
224/10 | 광릉 전투 |
224년 조비는 다시 손권을 토벌하기 위해 거병하여 양주 북부의 광릉 방면으로 침공한다.
* 날짜 : 224/10 ~ 225/01 | |
225/04 | 제갈량의 남정 |
제갈량의 남정(諸葛亮- 南征) 또는 남중 평정전(南中平定戰)은 삼국 시대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225년 대군을 이끌고 남만 지역을 정벌하고 남만의 왕 맹획의 항복을 얻어낸 사건이다.
* 날짜 : 225/04 ~ 225/09 | |
226/06/29 | 조비 사망 |
226년, 평소 주색에 빠져있던 것이 원인이 되어 병을 얻은 조비는 병세가 위독해지자 아들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한 후 조진(曹眞)과 조휴(曹休), 사마의(司馬懿), 진군(陳羣)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사망하였다. 그가 제위에 오른 지 7년, 나이 40살 때의 일이었다.
* 날짜 : 226/06/29 | |
226/08 | 석양 전투, 손권 패퇴 |
조비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손권이 출병해 석양을 포위하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철수한다.
* 날짜 : 226/08 | |
226/12 | 사섭 사망 |
226년에 교주의 사섭이 죽자, 손권은 여대를 시켜 교주를 지배하에 두었다. 그때까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교주는 이민족을 굴복시킨 사섭이 거의 독립 세력으로 잔존하고 있었다.
* 날짜 : 226/12 | |
227 | 제갈량의 출사표 |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220~280년)에 당시 촉한(蜀漢)의 승상(丞相)이었던 제갈량(諸葛亮-184~234)이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에게 북벌을 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이다. 흔히 출사표라 하면 전출사표를 말하는 것이고, 후세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전해지며 그 원문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 날짜 : 227 | |
228/01 | 제갈량의 북벌 |
제갈량의 북벌(諸葛亮 - 北伐)은 227년부터 234년까지 촉한(蜀漢)의 승상인 제갈량이 추진한 군사 정책이다. 촉한은 후한(後漢)을 계승한 왕조이기 때문에 후한을 무너뜨린 위나라(魏)를 정벌해야 한다는 유비의 사명을 제갈량이 계승한다는 명분 아래 시행되었다.
* 날짜 : 228/01 ~ 234/10 | |
228/02 | 사마의가 맹달의 반란 진압 |
조비 사후 입지가 흔들려 촉나라의 제갈량에 협조하다가 사마의에게 정벌당했다. 위나라는 사마의의 발빠른 대처로 신성을 지켰고, 촉한 제갈량의 북벌은 초장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 날짜 : 228/02 | |
228/02 | 가정 전투, 읍참마속 |
산 위에 군사를 포진한 마속이 가정 전투에서 장합에게 무참하게 패한다. 이 패전으로 제갈량의 숙원인 북벌의 꿈도 산산조각이 났다.
* 날짜 : 228/02 ~ 228/05 | |
228/05 | 강유가 제갈량에게 발탁 |
강유(姜維, 202년 ~ 264년)는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장군으로 옹주 천수군 기현(冀縣) 사람이다. 위나라의 관리였는데 제갈량의 제1차 북벌 때 촉나라로 귀순하였다. 제갈량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촉나라에서 중요직책을 맡으며 중히 쓰였으며 제갈량, 장완, 비의, 동윤 등 촉한사영이 세상을 떠나자 촉나라의 병권을 잡아 대장군이 되었다.
* 날짜 : 228/05 | |
228/06 | 석정 전투, 손권의 승리 |
조휴군이 오나라 영토에 침공하지만 오나라 장수 주환·전종 등이 육손군과 합세해 석정에서 격파한다.
* 날짜 : 228/06 ~ 228/10 | |
229/01 | 진창 포위전 |
2차 북벌을 개시한 제갈량은 진창을 포위하지만 군량미 등 준비 부족으로 위나라 군대에게 패배한다.
* 날짜 : 229/01 ~ 229/02 | |
229/04 | 촉한, 무도·음평을 정복 |
진식을 앞세운 제갈량의 북벌군이 무도와 음평을 공략해 장악한다.
* 날짜 : 229/04 | |
229/05/23 | 손권의 오나라 건국 |
오(吳, 229년 ~ 280년) 또는 동오(東吳), 손오(孫吳)는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 중의 하나로 친자 3대에 걸쳐 구축되었다. 위촉오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건국되었으나,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였고 가장 나중에 멸망하였다. 손견(孫堅)과 손책(孫策)의 맹활약으로 강동에 기반을 잡았고, 수성의 달인인 손권(孫權)을 통해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 날짜 : 229/05/23 | |
229/11 | 조운 사망 |
조운(趙雲, ? ~ 229년 11월)은 중국 후한 말 ~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으로, 자는 자룡(子龍)이며 기주 상산군 진정현(眞定縣) 사람이다.
* 날짜 : 229/11 | |
230 | 오의 이주夷洲 탐색 |
손권이 위온과 제갈직을 파견하여 이주의 동태를 살피게 한다.
* 날짜 : 230 | |
230/09 | 위의 한중 침공 실패 |
촉한이 장악한 한중에 침공한 위나라가 장맛비로 철수
* 날짜 : 230/09 | |
230/10 | 양계 전투 |
촉한의 위연군과 위나라의 곽회군이 양계에서 격돌하여 곽회군이 패주한다.
* 날짜 : 230/10 | |
231/03 | 기산 전투 |
제갈량과 사마의가 상규와 기산에서 펼친 일진일퇴의 지구전. 제갈량은 군량 보급에 실패하여 철수한다.
* 날짜 : 231/03 ~ 231/08 | |
231/03 | 오, 무릉만의 반란 |
형주 무릉만이 오나라에 반기를 들고 거병한다. 오나라의 반준이 진압에 나서지만, 평정하는 데 시간이 걸려 234년에야 정벌을 마무리한다.
* 날짜 : 231/03 ~ 234/12 | |
232/12/27 | 조식 사망 |
진사왕 조식(陳思王 曹植, 192년 ~ 232년 12월 27일(음력 11월 28일))은 후한 말기 ~ 조위의 시인이자 제후왕으로, 자는 자건(子建)이며 패국 초현(譙縣) 사람이다. 아버지 조조, 형 조비와 함께 시에 능통하여 삼조라 일컬어졌다.
* 날짜 : 232/12/27 | |
233 | 공손연, 오나라 사자 참수 |
오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자 위나라와 동맹을 맺기 위해 참수하여 머리를 위나라에 보냈다.
* 날짜 : 233 | |
233 | 합비신성 전투 |
손권이 합비에 출진하지만, 새로 축성한 신성을 지키는 만총군에게 패한다.
* 날짜 : 233 | |
233/09 | 선비족 보도근의 반란 |
병주 국경을 지키던 보도근과 가비능이 손잡고 반란을 일으키지만 진랑이 진압한다.
* 날짜 : 233/09 | |
234 | 위와 고구려의 화친 |
요동 공손씨 세력의 동에 있는 고구려를 포섭하고자 234년 동천왕 8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자 위와 고구려는 화친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 날짜 : 234 | |
234/03 | 오장원 전투 |
제갈량이 최후의 북벌을 감행해 오장원에 진을 치고 사마의와 대치한다. 제갈량이 세상을 떠나자 촉한군이 철수한다.
* 날짜 : 234/03 ~ 234/10 | |
234/05 | 손권, 합비에 출병 |
손권이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해 다시 합비신성을 포위한다.
* 날짜 : 234/05 ~ 234/07 | |
234/10/08 | 제갈량 사망 |
227년부터 지속적인 북벌(北伐)을 일으켜 8년 동안 5번에 걸쳐 위나라의 옹·양주 지역을 공략하였다. 234년 5차 북벌 중 오장원(五丈原) 진중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 날짜 : 234/10/08 | |
234/10 | 위연 사망 |
제갈량 사후 회군 지시를 어기고 내분을 일으켰다가 참수되었다.
* 날짜 : 234/10 | |
235 | 선비족 가비능 암살 |
가비능은 위나라와 다시 싸우나 235년 유주자사 · 오환교위 왕웅에게 암살된다.
* 날짜 : 235 | |
236/03 | 손권, 고구려에 사신 보냄 |
236년 동천왕 10년에는 당시 위(魏)와 대치했던 동오의 황제 손권이 고구려를 포섭하고자 사신 호위를 보내 화친을 청했지만, 고구려 동천왕은 그 사신을 억류했다가 가을에 그 사람을 괵수해 위(魏) 황제 조예에게 보냈다.
* 날짜 : 236/03 | |
237/07 | 공손연, 연왕 선언 |
위나라가 공손연 세력을 완전히 멸할 뜻을 보이면서 공손연은 이전에 오나라가 봉했었던 연왕(燕王)을 자처하고 연호도 새롭게 제정했지만 사마의에게 토벌당하였다.
* 날짜 : 237/07 | |
238/06 | 사마의, 요동 정벌 |
요수 전투(遼隧之戰)는 237년 요동의 공손연이 위나라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듬해 사마의가 이를 토벌한 전투이다. 공손연은 양평성을 버리고 도망치려다 붙잡혀 참수당했다.
* 날짜 : 238/06 ~ 238/09 | |
238/09 | 위, 낙랑·대방군 접수 |
위(魏)가 건국된 후 명제(明帝)는 238년, 사마의를 파견하여 공손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유흔(劉昕)과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낙랑·대방을 평정하였다. 이후 2세기 중후반 동안 낙랑군은 고구려 및 한반도 일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날짜 : 238/09 | |
238/12 | 왜국이 위에 조공 |
왜나라의 히미코가 위나라에 조공을 보낸다.
* 날짜 : 238/12 | |
239/01/22 | 조예 사망 |
238년 요동 제압을 완료한 후, 수도 낙양에 있던 조예는 병상에 있어 조방의 후견인을 누구로 할지를 모색했다. 처음에 조예는 연왕 조우, 하후헌, 조조(조휴의 아들), 진랑, 조상과 함께 조방을 보정하게 하려고 했으나, 진랑 등과 사이가 나쁜 유방과 손자가 조우, 진랑, 조조를 헐뜯고 조상과 사마의를 추천했다. 결국 조상과 사마의를 후견인으로 다시 세우고 239년 1월, 36세의 나이로 붕어하여 고평릉에 묻혔다.
* 날짜 : 239/01/22 | |
239/01/22 | 사마의와 조상의 권력 투쟁 |
조상(曹爽, ? ~ 249년)은 대장군 조진의 아들로 조희, 조훈, 조언의 형이며, 자는 소백(昭伯)이다. 사마의와 함께 조방의 고명대신이고 사마의를 권력에서 소외시켜 홀로 정권을 잡았으나, 사마의가 일으킨 쿠데타의해 권력을 내주고 제거당했다.
* 날짜 : 239/01/22 | |
241 | 위나라에 손권이 대대적인 침공 |
손권은 241년에 나이 어린 황제를 둘러싼 중신 간의 분쟁이 계속되는 위나라로 침공을 개시한다. 이후 제갈근의 와병과 황태자 손등의 사망으로 진군한 지 2개월 만에 위나라 침공을 포기했다.
* 날짜 : 241 | |
241/05 | 오, 후계자 다툼이 시작 |
오나라의 황태자 손등이 죽자 치열한 후계자 다툼이 시작
* 날짜 : 241/05 | |
242 | 고구려, 서안평 침공 |
242년 동천왕 16년, 고구려 동천왕은 요동의 공손씨의 멸망하자 이제 서측의 요동으로 진출하고자 위(魏)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해 격파하고 점령한 때 동천왕의 신하 득래는, 위(魏)를 침략하고 맞서는 것을 수차례 간했으나 동천왕은 그 말을 좇지 않았다.
* 날짜 : 242 | |
244/03 | 위나라 조상의 한중 침공전 |
조상은 대군을 이끌고 촉한의 한중에 침공했다가 대실패
* 날짜 : 244/03 | |
244 | 고구려-위 전쟁 |
고구려-위 전쟁은 위나라의 244~245년 일련의 고구려 침공 전쟁이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평정한다.
* 날짜 : 244 ~ 245/06 | |
245/03 | 육손 사망 |
손화와 손패의 후계자 분쟁 와중에 245년 육손이 세상을 떠났다. 분에 못이겨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후로 오나라는 안에서부터 붕괴한다. 특히 군사·외교를 도맡았던 육손의 죽음은 오나라의 장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 날짜 : 245/03 | |
246 | 장완과 동윤이 죽고 황호의 등장 |
촉한에서 장완과 동윤이 죽자, 환관 황호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
* 날짜 : 246 | |
247 | 강족의 반란 |
옹주 서부에서 강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촉한이 호응하지만 위군이 진압한다.
* 날짜 : 247 | |
247/06 | 사마의, 일선에서 물러나다 |
조상과 사마의는 대립은 했으나 이를 표면화하여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247년 사마의는 아내를 잃은 후 고령과 병을 이유로 정치, 군사의 일선에서 물러나 자택에 은거한다.
* 날짜 : 247/06 | |
249/02/05 | 사마의 쿠데타, 고평릉의 변 |
고평릉의 변(高平陵之變)은 249년 삼국 시대 위나라의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있던 조상과 그 일당을 처형한 사건으로 이로써 위나라의 세력 판도는 조씨 정권에서 사마씨 정권으로 넘어간다.
* 날짜 : 249/02/05 | |
249 | 왕필 사망 |
왕필(王弼, 226년 ~ 249년)은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관리이자 사상가이다. 자는 보사(輔嗣)이다. 당시 유명한 천재로 알려졌으며, 이를 들은 하안(何晏)이 그를 중용하고 학문에 대한 토론을 나눴다. 16~20세 사이에 노자의 《도덕경》과 《주역》의 주와 약례를 썼다.
* 날짜 : 249 | |
250 | 오, 황태자 교체 정변 |
오나라에서 황태자 교체라는 정변이 망국의 씨를 뿌린다.
* 날짜 : 250 | |
251/06/07 | 왕릉의 난 |
위나라 왕릉의 사마의 타도 계획이 발각된 후, 왕릉이 거병했으나 사마의에게 평정되고 자살한다.
* 날짜 : 251/06/07 | |
251/09/07 | 사마의 사망 |
위나라의 실질적 권력자인 사마의가 세상을 떠난다.
* 날짜 : 251/09/07 | |
252 | 사마사, 위의 대장군 |
가평 3년(251년)에 사마의가 죽자, 사마사는 당시 황제인 조방에게 무군대장군 벼슬을 제수받아 보정(섭정)을 맡았고, 이듬해(가평 4년, 252년)에는 대장군이 되었으며 시중, 지절, 도독중외군사, 녹상서사도 겸해 정치 · 군사를 모두 아우르는 권력을 거머쥐었다.
* 날짜 : 252 | |
252/05/21 | 손권 사망 |
손권은 252년, 제갈각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7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정사 삼국지 저자 진수는 손권을 "시기심이 많고 살육하는 데는 과감 했으며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런 모습이 더 심해졌다"고 평했다.
* 날짜 : 252/05/21 | |
253/01 | 동흥 전투 |
위나라의 제갈탄이 동흥 제방을 공략하기위해 진군하지만, 원군으로 출병한 제갈각 군이 격퇴한다.
* 날짜 : 253/01 ~ 253/02 | |
253/02/16 | 비의 사망 |
비의는 한수(漢壽)에서 연회를 열던 도중 상당히 취한 상태에서 미처 몸을 방어하지 못하고 위나라 출신 항장 곽순에게 살해당했다. 곽순의 원래 의도는 촉에 항복한 뒤에 후주 유선을 살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선 주변의 무사들이 가까이 가는 것을 막아 꿩 대신 닭으로 대장군인 비의를 목표로 바꿨다고 한다.
* 날짜 : 253/02/16 | |
253/02 | 강유의 5차례 북벌 |
촉한의 강유가 시도한 무리한 북벌은 매년 실패로 끝난다.
* 날짜 : 253/02 ~ 258/03 | |
253/04 | 합비신성 전투 |
오나라의 제갈각이 합비에 처들어가지만, 신성이 견고해 대패하고 철수한다.
* 날짜 : 253/04 ~ 253/08 | |
253/11 | 손준, 제갈각 죽임 |
제갈각(諸葛恪, 203년 ~ 253년)은 중국 삼국시대 동오의 권신이다. 태부로서 오의 제2대 황제 폐제 손량의 섭정이다. 자는 원손(元遜)이고, 오나라의 명신 제갈근의 장남이자 제갈량의 큰조카이다. 제갈각의 전횡이 심해지자, 253년에 손씨 종친 중 하나인 손준(孫峻)에게 연회장에서 살해당했다.
* 날짜 : 253/11 | |
254 | 사마사, 조방 폐위하고 조모를 새 황제로 |
아버지인 사마의보다도 더 많은 권세를 누렸고, 그 권력은 황제를 이미 뛰어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방이 정원 원년(254년)에 이풍, 장집, 하후현 등과 사마사 제거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자 사마사는 이풍, 장집, 하후현 등을 주살하고, 조방마저도 폐위하고 제왕(제나라를 봉국으로 삼는 제후왕)으로 강등했으며, 고귀향공 조모(曹髦)를 모셔와 새 황제에 앉혔다.
* 날짜 : 254 | |
255 | 관구검의 수춘 반란 |
관구검과 문흠이 반사마사의 기치를 내걸고 수춘에서 거병하지만 사마사에게 진압당한다.
* 날짜 : 255 | |
255/05/23 | 사마사 사망 |
255년, 진동대장군 관구검이 양주자사 문흠 등과 더불어, 황제 폐위에 대한 죄를 묻고자 태후의 명령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사마사는 직접 출병하였다가 자신의 왼쪽 눈에 갑자기 큰 통증이 생겼고, 눈 위의 혹이 악화되어 얼마 뒤 진중에서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날짜 : 255/05/23 | |
256/10/19 | 손준 사망 |
오나라에서 실력자 손준이 세상을 뜨고, 손준의 사촌 동생 손침이 실권을 잡는다.
* 날짜 : 256/10/19 | |
256 | 왕숙 사망 |
왕숙(王肅, 195년 ~ 256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魏)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작위는 난릉후. 자는 자옹(子雍). 본관은 동해군 담현이나, 회계(會稽:현재의 저장성)에서 출생하였다. 왕랑(王朗)의 아들이다. 그의 딸인 왕원희는 사마소(司馬昭)에게 시집가서 진(晋)의 무제 사마염(武帝 司馬炎)을 낳았다.
* 날짜 : 256 | |
257/06 | 제갈탄의 난 |
제갈탄이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회남에서 거병하지만 사마소에게 토벌당한다. 왕릉, 관구검과 문흠, 제갈탄의 모반을 '수춘삼반'이라고 한다.
* 날짜 : 257/06 ~ 258/03 | |
258/11/09 | 손침, 손량 폐위하고 손휴를 새 황제로 |
처음에는 편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손준이 세상을 떠난 후, 손준에게 뒷일을 부탁받아 시중·무위장군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모든 군사를 총괄했으며, 손준을 대신해 조정의 정사를 주관했다. 손침은, 폐제 양이 정무를 본 이래로 많은 힐문을 받게 되어 두려워했다. 마침내 폐제는 손침을 죽일 모의를 세웠으나, 폐제의 비가 손침의 사촌 누나의 딸이었으므로 이 음모를 손침에게 알려 주었다. 손침은 결국 폐제를 폐출하고 반대하는 신하는 죽였으며, 낭야왕 손휴(孫休)를 맞아 황제로 세우니 이가 곧 오의 제3대 황제 경제였다.
* 날짜 : 258/11/09 | |
258 | 황호, 촉한 정권 장악 |
황호(黃皓, ? ~ ?)는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환관이자 간신이다. 유선(劉禪)에게 아첨하여 권력을 잡고 나라를 어지럽게 한 그의 행동은 촉나라가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258년에는 정사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 날짜 : 258 | |
259 | 위나라가 고구려에 패하다 |
259년 중천왕 12년 겨울 12월, 위나라 장수 울지해가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중천왕은 정예 기병 5천명을 선발하여, 위(魏)군과 양맥 골짜기에서 2차 양맥전투를 벌여 위군에게 크게 이기고, 8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 날짜 : 259 | |
260/06/02 | 사마소, 황제를 살해하고 조환을 새 황제로 |
사마소가 가충(賈充)을 보내 조모(曹髦)의 죽임을 벼르고 있던 차에, 더욱 큰 위협을 느낀 당시 위의 천자 조모는 사병 300명을 풀어 사마소를 죽일 계책을 펼친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사마소는 조모의 계략을 무마시키고 이를 빌미로 천자를 살해했다. 그 후 조환(曹奐)을 앞세워 위의 천자로 옹립함으로써 사실상 사마소는 위의 모든 전권을 잡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날짜 : 260/06/02 | |
262 | 사마소, 혜강을 처형 |
혜강(嵇康, 223년~262년)은 조위의 철학자이자 작가 · 시인으로, 자는 숙야(叔夜)이며 초군(譙郡) 즐현(銍縣) 사람이다. 죽림칠현 중 한 사람으로 《양생론(養生論)》,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絶交書)》등 수많은 철학 · 정치적 논문과 서간문을 썼다. 당시 위나라 공주(패목왕의 손녀)와 결혼했다. 혜강은 동평사람 여소(呂昭)의 아들 여손(呂巽), 여손의 동생 여안(呂安)과 더불어 친했는데 여손이 친동생 여안의 아내와 간음하고 오히려 동생을 불효죄로 무고해 가두었다. 혜강은 여안을 두둔하다 종회의 건의로 사마소에 의해 40세의 나이에 여안과 함께 처형되었다.
* 날짜 : 262 | |
262/11 | 강유 북벌, 조양 전투 |
양주 정벌을 감행한 강유가 조양에서 등애에게 패하고 답중으로 후퇴한다.
* 날짜 : 262/11 | |
263/12/17 | 촉한의 멸망 |
촉한의 멸망(魏滅蜀之戰)은 263년 위나라의 촉한 멸망을 목적으로 한 침공 전역이다. 위나라의 실권자 사마소가 결정하고 종회, 등애, 제갈서에게 군대를 3방향으로 나아가게 해 촉한을 공격하게 했다. 답중에 주둔한 촉한의 강유가 등애와 제갈서의 방해를 받는 틈에 종회가 한중을 돌파했으나 강유가 제갈서를 따돌리고 검각에서 농성하며 종회를 저지했다. 등애는 음평에서 강유로 나아갔고 면죽에서 제갈첨을 베 촉한의 서울 성도를 압박했다. 이에 촉한의 황제 유선은 등애애게 항복하고 강유도 유선이 항복하자 종회에게 항복해, 촉한은 멸망했다.
* 날짜 : 263/12/17 | |
264/05/02 | 사마소 스스로 진왕이라 칭함 |
사마소가 자신의 전권을 토대로 스스로를 진왕(晋王)에 봉한다.
* 날짜 : 264/05/02 | |
264/09/03 | 손휴 사망 |
오 경황제 손휴(吳 景皇帝, 재위 258년 ~ 264년)는 오의 제3대 황제로 손권(孫權)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 3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고, 손화의 아들이며 손휴의 조카인 오정후 손호(孫皓)가 즉위하였다.
* 날짜 : 264/09/03 | |
265/09/06 | 사마소 사망 |
후계자로 형에게 입양시킨 아들 사마유(司馬攸)를 자신을 이을 정권자로 지명하려고 했으나 가충의 반대로 사마염을 후계자로 지명하게 되는데, 사마염을 후계자로 지명할 땐 벌써 중풍을 맞고 쓰러져 겨우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이에 사마소는 얼마 가지 못해 죽게 된다.
* 날짜 : 265/09/06 | |
266/02/08 | 사마염, 진 건국 |
서진(西晉, 265년 ~ 317년)은 중국의 왕조이다. 촉한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낸 위나라의 중신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이 건국했다.
* 날짜 : 266/02/08 | |
266 | 왜가 진나라에 조공 |
위지 왜인전에는 266년에 이요 여왕(히미코의 딸)이 진에 통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날짜 : 266 | |
266/11 | 오, 시단의 반란 |
오나라 영안에서 산적 시단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진압된다..
* 날짜 : 266/11 | |
266/12 | 오나라의 환도 |
손호가 도읍을 265년 무창으로 옮겼다가 다시 건업으로 환도한다.
* 날짜 : 266/12 | |
268 | 관동·합비 전투 |
268년 11월에는 오나라 장수 정봉이 제갈탄의 아들 제갈정(諸葛靚)과 함께 합비를 공격했으나, 진나라의 여음왕(汝陰王) 사마준(司馬駿)에게 격파당했다.
* 날짜 : 268 | |
270 | 초주 사망 |
초주(譙周, 199년 이전 ~ 270년)는 중국 삼국 시대 촉(蜀)의 정치가로, 자는 윤남(允南)이며 익주(益州) 파서군(巴西郡) 서충국(西充國) 사람이다.
* 날짜 : 270 | |
270/07 | 선비족의 반란 |
독발선비의 수령 독발수기능은 270년 6월(음력) 서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다.(독발수기능의 난) 269년 신설된 진주를 다스리던 자사 호열은 만곡퇴(오늘날의 감숙성 고란현)에서 독발수기능과 대치하지만 사마량의 명을 받고 지원하러 온 유기가 도와주지 않아 크게 패하고 전사한다.
* 날짜 : 270/07 | |
271 | 오, 교지 평정 |
오나라의 설후가 반란을 평정하고 구진·일남도 되찾는다.
* 날짜 : 271 | |
272/10 | 서릉 공방전 |
서릉을 지키는 오나라 장수 보천이 진나라와 내통해 반란을 일으키지만 육항이 탈환한다.
* 날짜 : 272/10 | |
274/09 | 육항 사망 |
육항(陸抗)은 동오의 군인으로 오군 오현(吳縣) 사람이다. 육손의 둘째 아들이고, 손책의 외손자다. 쓰러져 가던 오나라 말기에 최후의 명장이라 칭송받는다. 273년 봄, 오의 육항은 대사마가 되고 형주목을 겸임했으나, 이듬해 여름 병이 들었다. 결국 그는 274년 죽게 되고, 기둥이 무너진걸 안 진의 익주자사 왕준(王濬)이 오를 치자고 권해 오는 결국 멸망하게 된다.
* 날짜 : 274/09 | |
278/12/27 | 양호 사망 |
양호(羊祜)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 진나라의 장수로 연주(兗州) 태산군(泰山郡) 남성현(南城縣) 사람이다. 후한 말의 학자 채옹(蔡邕)의 외손자이자 그의 딸 채염(蔡琰)의 조카이며 촉나라에 항복한 하후패(夏侯霸)의 사위이고 양호의 누나 양휘유(羊徽瑜)는 사마사의 아내가 되었으며, 진나라가 세워진 후 경헌황후(景獻皇后)로 추존되었다. 278년 병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나아가 오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마염은 양호에게 오나라 정벌을 맡기고 싶어했으나, 양호는 굳이 자신이 갈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 날짜 : 278/12/27 | |
279/01 | 선비족의 양주 침공 |
선비가 양주에 난입하자, 진나라 군대가 1년에 걸쳐 겨우 진압한다.
* 날짜 : 279/01 ~ 279/12 | |
279/07 | 곽마의 반란 |
교주 계림에서 곽마가 오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후, 삽시간에 교주 일대를 장악한다. 일찍이 오나라에는 '오가 멸망할 때 남방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손호는 곽마의 반란 소식을 듣고 "이 세상은 망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 날짜 : 279/07 | |
279/12 | 진의 오 정복 |
진의 오 정복(晉之吳征服)은 280년 서진의 사마염이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멸망시킨 일로 서진이 오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했다.
* 날짜 : 279/12 ~ 280/05/01 | |
280/05/01 | 오 멸망, 진 중국 통일 |
진의 오 정복(晉之吳征服)은 280년 서진의 사마염이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멸망시킨 일로 서진이 오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했다.
* 날짜 : 280/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