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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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 | 당 태종 재위 |
당 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 598년: 개황(開皇) 18년 1월 23일 ~ 649년: 정관(貞觀) 23년 7월 10일)은 중국 당나라의 제2대 황제이며 당 고조 이연의 차남이다. 이름인 '세민'의 본래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다. 그는 실제로 뛰어난 장군이자, 정치가, 전략가, 그리고 서예가이기까지 했으며, 중국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어 청나라의 강희제와도 줄곧 비교된다. 그가 다스린 시대를 '정관의 치'라고 불린다.
* 날짜 : 626 ~ 649 | |
630 | 당, 동돌궐 복속 |
당태종은 630년에 출병하여 동돌궐을 공격하였다. 당의 승리로 끝난 전투에서 실리 카간은 생포되어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여기서 동돌궐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동돌궐 세력의 소멸로 이제 당은 서돌궐과 접경하면서 새로운 중국-서역 관계가 성립되었다.
* 날짜 : 630 | |
631 | 고구려,천리장성 쌓음 |
천리장성(千里長城)은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서쪽 변경(오늘날의 요동 지방)에 쌓은 장성이다. 축조기간은 631년~646년(총 16년)이다.
* 날짜 : 631 | |
632 | 선덕여왕 재위 |
선덕여왕(善德女王, 홍제 9년(580년)~인평 14년 음력 1월 8일(647년 2월 17일)) 또는 선덕왕(善德王)[1]은 신라의 제27대 군주(재위: 632년~647년)이며, 한국사에서 최초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며 태종무열왕의 큰이모이다.
* 날짜 : 632 ~ 647 | |
635 | 토욕혼, 당에 항복 |
635년 당에 항복하여 예속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663년 티베트의 토번(吐蕃)에게 멸망당하였다.
* 날짜 : 635 | |
640 | 고구려 태자,당에 입조(入朝) |
고구려 영류왕은 태자를 640년 당에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적어도 대당 강경책을 추구하지는 않았다고 여겨진다.
* 날짜 : 640 | |
640/09 | 당,고창국을 멸함 |
고창국은 당에 의해 멸망되고 교하현이 설치된다. 고창국의 멸망은 고구려에게 전쟁의 위협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소식이었다.
* 날짜 : 640/09 | |
641 | 당의 문성공주, 토번으로 시집감 |
문성공주(중국어: 文成公主, 623년경- 680년)는 당 태종의 조카딸로 토번이라 일컫는 티벳 송첸캄포 왕의 제2 황후이다. 640년 당을 떠나 그 다음 해 티벳에 도착하여 평화 조약의 일부로 얄루 왕 송첸캄포와 국혼을 치렀다. 문성공주는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며, 송첸캄포의 제1황후 '브리쿠티 데비'와 함께 티베트에 불교를 소개했다고 전한다.
* 날짜 : 641 | |
641/03 | 백제,의자왕 즉위 |
의자왕(義慈王, ? ~ 660년, 재위: 641년 음력 3월 ~ 660년)은 백제의 제31대 국왕이며 백제의 마지막 왕이다. 성은 부여(扶餘), 휘는 의자(義慈)이며 시호는 없다. 태자 때부터 아우들과 우애가 깊고 사려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칭송을 받았다.
* 날짜 : 641/03 | |
641/05 | 당,고구려에 진대덕 파견 |
당 태종 이세민은 직방랑중(職方郞中) 진대덕을 사신으로 고구려에 파견하였다. 직방랑중은 병부 소속으로 국내외의 주요 군사시설을 포함한 지도 제작을 관장하는 직으로서 군사정보 수집의 실무를 총괄하였다. 진대덕은 8월에 당으로 귀환하여 그가 얻은 정보를 당 태종에게 보고하였다.
* 날짜 : 641/05 | |
642/08 | 백제,대야성 전투 승리 |
대야성 전투의 결과, 일시적으로 백제가 신라를 압도했지만, 이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신라가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몰리게 된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과정에서 군권(軍權)을 장악한 김유신과 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가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이후 양자가 연합해 새로운 중대(中代) 왕실의 핵심세력을 형성했으며, 바로 이들의 주도 하에 삼국통일(三國統一)이 성취된 것이다.
* 날짜 : 642/08 | |
642/10 | 고구려,연개소문의 정변 발생 |
연개소문은 귀족들과 왕이 자신을 제거하려고 하자 642년 10월, 왕과 귀족들을 군대열병식에 초대하여 살해하였다. 이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세우고, 대외적인 강경책을 실시하였다.
* 날짜 : 642/10 | |
642/10 | 김춘추와 연개소문의 평양성 회담 |
김춘추와 연개소문의 평양성 회담.
* 날짜 : 642/10 | |
643 | 고구려,백제가 신라 공격 |
고구려,백제가 신라 공격.
* 날짜 : 643 | |
645/05 | 신라,고구려 공격 |
신라,고구려 공격. 대외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반고구려, 친당이라는 중대한 노선의 선택이었다.
* 날짜 : 645/05 | |
645/05 | 백제,신라 공격 |
백제,신라 공격.
* 날짜 : 645/05 | |
645/05/17 | 당,요동성 함락 |
마침내 5월17일, 과거 고구려-수 전쟁때 수나라가 총력을 기울여도 함락되지 않았던 요동 최대의 요새 요동성이 함락되었다. 요동성은 고구려 요동지역의 가장 크고 상징적인 요동 최대의 성이었다. 이때 성이 함락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이었다.
* 날짜 : 645/05/17 | |
645/06/12 | 왜, 을사의 역 |
고교쿠 천황 4년(645년) 음력 6월 12일(양력 7월 10일)에, 나카노오에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와 모의해, 당시의 권신이었던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를 고교쿠 천황이 보는 앞에서 참살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을사의 역) 이루카의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는 이루카가 참살당한 다음 날에 자결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고교쿠 천황의 양위에 따라 고교쿠 천황의 동모제(同母弟)를 고토쿠(孝德) 천황(재위 645~654년)으로 옹립하고, 나카노오에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일본 최초로 연호를 다이카(大化)로 정하고 개혁을 실행했다(→다이카 개신). 또한 아리마(有間) 황자와 같은, 자신과 대립한 유력 세력을 여러 가지 수단을 써서 제거해간다.
* 날짜 : 645/06/12 | |
645/06/22 | 고구려,주필산 전투에서 패배 |
주필산 전투는 고구려-당 전쟁 중에 645년(보장왕 4)에 당나라 태종이 지휘하는 당의 대군과 이에 반격하려는 고구려의 15만 대군이 동원되어 안시성 부근에서 교전하였던 중국 한족과-한국 한민족 간에 벌어진 고대의 대규모 전투이다.
* 날짜 : 645/06/22 | |
645/09/18 | 당태종, 고구려 원정 실패 |
당태종, 고구려 원정 실패.
* 날짜 : 645/09/18 | |
646 | 왜, 다이카 개신 |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은 일본 아스카 시대 고교쿠 천황 재임 중인 646년에 일어난 정치 개혁 운동이다.
* 날짜 : 646 | |
646/06 | 당,설연타 대파 |
당은 646년 6월 대규모 군병을 동원해 여러 방면에서 동시에 진공하여 설연타를 공격해 대파하였다. 이를 고비로 설연타는 더는 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 날짜 : 646/06 | |
647 | 김춘추,왜 방문 |
《일본서기》에는 고토쿠 천황(孝德天皇) 다이카(大化) 3년(647년)에 김춘추가 왜에 왔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김춘추의 관등은 상신(上臣) 대아찬(大阿湌)으로 표기되어 있다.
* 날짜 : 647 | |
647 | 신성,적리성 전투 |
647년~659년 당의 소모전 전략.
* 날짜 : 647 | |
647 | 신라,비담의 난 |
비담의 난(毗曇-亂)은, 645년 상대등에 오른 비담이 권력을 장악하여 647년 1월, '여주불능선리(여군은 나라를 다스릴 그릇이 못 된다)'라는 명분을 내걸고 염종의 군사와 함께 출정하여 일으킨 선덕여왕 대의 반란이다. 이로 비담은 도망치다가 김유신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고 그의 9족과 30명이 모두 숙청당했다.
* 날짜 : 647 | |
647 | 진덕여왕 재위 |
진덕여왕(眞德女王, ? ~ 654년, 재위: 647년 ~ 654년)은 신라의 제28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승만(勝曼)이다.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의 딸이다.
* 날짜 : 647 ~ 654 | |
648 | 박작성 전투 |
647년~659년 당의 소모전 전략.
* 날짜 : 648 | |
648/12 | 김춘추, 당에 입조 |
648년 12월에 김춘추는 드디어 아들 문왕(文王)과 함께 직접 당(唐)에 입조하였고(《자치통감》)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는 이곳에서 당의 국학(國學)을 방문하여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하였으며, 신라의 장복(章服)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했다. 당 태종으로부터 특진(特進)의 벼슬을 받고, 당에 체류하던 중에 태종의 호출로 사적으로 불려가 만나게 된 자리에서 김춘추는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조(天朝)를 섬긴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사온데, 백제가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해 왔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폐하께서 천병(天兵)을 빌려주시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주시지 못한다면, 우리 나라의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요,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며 태종에게 원병 파병을 호소해, 태종의 허락을 받아냈다.
* 날짜 : 648/12 | |
649 | 당 고종 재위 |
당 고종(唐高宗 李治, 628년: 정관(貞觀) 2년 7월 21일 ~ 683년: 홍도(弘道) 원년 12월 27일)은 중국 당나라의 제3대 황제로 당 태종 이세민의 9남이며 이름은 이치다. 모친은 문덕황후 장손씨이며, 자는 위선(爲善)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신라와 함께 멸망시킨 황제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 날짜 : 649 ~ 683/12/27 | |
650 | 토번,송첸캄포 사망 |
송첸캄포(생년 미상 ~ 650년)는 토번의 제33대 짼뽀이다. 주변 왕국을 정복하여 최초로 토번을 통일하였다. 송첸캄포 왕은 650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 날짜 : 650 | |
651 | 사산왕조 페르시아, 이슬람에 멸망 |
동로마 제국과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사산 왕조의 세력은 쇠퇴했고, 이슬람화된 신흥 아랍족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페르시아군은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있었던 네하벤드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야즈데게르드 3세도 651년에 메르브 근처에서 암살되었다. 이로써 이슬람 이전의 이란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 날짜 : 651 | |
654 | 토번,국가제도 개혁 |
녹동찬이 토번의 國制개혁을 단행. 그 해에 토번은 法을 성문화하고, 지방의 통치구역을 확정짓고 兵部를 창설했으며, 기존에 존재했던 국경의 수비체제를 정비했다. 또한 피지배민에 대한 감시망 확립과 세금 수취를 위한 토지 측량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전쟁시 그들을 군수물자 운송에 동원할 수 있는 방대한 시스템을 완성했다.
* 날짜 : 654 | |
654 | 태종무열왕 재위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2년 ~ 661년 음력 6월)은 신라의 제 29대 왕(재위 654년~661년)이자 신라의 정치가였다. 성은 김(金), 휘는 춘추(春秋)이다. 김용춘와 문정태후(文貞太后) 김씨의 아들이며 진골귀족 세력으로 선덕여왕·진덕여왕 시기에 국가의 중역으로 활약하였으며, 대당 외교를 주도하였다. 진덕여왕 사후 국인들의 추대로 진골 최초의 왕으로 즉위하였으며,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 날짜 : 654 ~ 661/06 | |
654/10/13 | 측천무후, 황후되다 |
측천무후(則天武后, 혹은 칙천무후, 624년 1월 23일 ~ 705년 11월 2일)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며 무주(武周) 왕조의 여황제로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이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무측천(중국어: 武則天 혹은 무칙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음탕하고 간악하여 황위를 찬탈한 요녀(妖女)라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서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걸(女傑)이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무조(武照)이고, 아명(兒名)은 무미랑(武媚娘)이다.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무조(武曌)로 개명(改名)하였다. 무사확(武士彠)의 차녀이다. 태어난 날짜는 정확하지 않고,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설도 있다.
* 날짜 : 654/10/13 | |
655 | 귀단수 전투 |
647년~659년 당의 소모전 전략.
* 날짜 : 655 | |
657/11 | 당, 서돌궐을 토벌 |
583년, 수나라의 이간책으로 돌궐이 동서로 분열했다. 그 중의 서역 세력이 서돌궐이라고 칭해졌다. 당 태종에게 일단은 복속했지만, 태종의 사후에 독립해 세력 회복을 완수했다. 그러나 3대 고종이 본격적인 토벌군을 파견해, 657년에 멸망했다.
* 날짜 : 657/11 | |
658 | 적봉진 전투 |
647년~659년 당의 소모전 전략.
* 날짜 : 658 | |
659 | 횡산,석성 전투 |
647년~659년 당의 소모전 전략.
* 날짜 : 659 | |
660/03 | 당,백제로 출병 |
660년 3월 소정방을 원정군 사령관으로 한 13만의 당군이 백제를 향해 진발하였다.
* 날짜 : 660/03 | |
660/07/09 | 황산벌 전투 |
황산벌 전투는 660년 8월 20일 (음력 7월 9일) 황산벌(오늘날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및 신암리 일대)에서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에 일어났던 전투이다. 삼국사기 계백 열전, 삼국유사 태종무열왕조 등에 전투 내용이 나온다.
* 날짜 : 660/07/09 | |
660/07/18 | 백제 멸망 |
백제 의자왕 때인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멸망하였다.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에 의하여 백제의 5천 결사대가 패배하고, 금강 기벌포에서 당의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에 의하여 백제군이 항복하였으며, 양군이 집결하여 사비성을 공격하였다. 7월18일 공격이 있은 지 열흘이 못 되어 백제는 항복함으로써 백제 건국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 날짜 : 660/07/18 | |
660/08 | 토번, 토욕혼을 대규모 공격 |
토번의 토욕혼애 대한 대규모 공격은 660년 8월에 시작되었다.
* 날짜 : 660/08 | |
661/07 | 문무왕 재위 |
문무왕(文武王, 626년 ~ 681년 7월 21일 (음력 7월 1일) )은 신라 제30대 왕(재위: 661년 음력 6월 ~ 681년 음력 7월 1일).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둘째누이인 문명왕후의 맏아들로서 이름은 법민(法敏)이다.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 지역을 차지하려 했던 당나라의 군대를 나당 전쟁에서 격퇴함으로써 676년에 삼국통일을 이룬 왕이다.
* 날짜 : 661/07 ~ 681/07/01 | |
661/08 | 당,해상으로 대규모 고구려 침공 |
661년 음력 8월에 당나라는 드디어 총력을 다해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당군은 총 44만의 대군을 6개의 부대로 편성하였다. 예전 수나라의 침공, 그리고 당태종의 1차 침공 때와 확연한 차이는 주력 침공군은 해상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상륙하였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고구려 침공 시, 수양제, 당태종은 수군을 통한 공격도 있었지만 엄연히 주력은 육상을 통한 요하를 건너 요동으로 진공하던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 날짜 : 661/08 | |
661/09 | 백제 부흥군,부여풍을 왕으로 옹립 |
백제 부흥군은 661년 9월 왜국으로부터 부여풍을 맞이하여 왕으로 옹립하니 백제의 서부와 북부 지역이 이에 호응하였고 남방의 여러 성들도 복신에 귀부하였다. 이때 왜국의 원병 5천이 부여풍과 함께 도착하였고, 추가로 왜국의 원병이 더 올 것으로 예상되어 백제 부흥군의 세력은 더욱 확대될 기세를 보였다.
* 날짜 : 661/09 | |
661/10 | 철륵의 대규모 봉기 |
661년 10월, 철륵의 회흘부 추장 비속독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난다.본국 당나라에서는 수도 장안이 위급해지는 긴급상황이 발생하게되고 당나라는 정인태를 대총관으로 철륵도행군을 편성하여 출진시켰고 그리고 병력이 부족하여 고구려로 출병했던 소사업의 부대를 회군시켜서 선악도행군으로 긴급히 편성하였고 설인귀,손인사,유심례등을 부총관으로 참전시켜 철륵과의 전쟁에 나섰다. 하지만 정인태가 이끄는 당의 철륵도행군은 전멸을 당해 당은 큰 위기에 빠졌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철륵 출신의 계필하력의 정예 요동도행군 마저도 철륵 전선에 추가 투입을 위해 긴급히 군사를 철수하라는 조서가 있었으므로 계필하력이 이끄는 주력 요동도행군도 다시 바다를 건너 당으로 돌아가야 했다.
* 날짜 : 661/10 | |
662 | 왜, 백제 부흥운동 지원시작 |
662년 1월에는 화살 10만 척과 곡식 종자 3천 석을 보내기도 하고, 두 달 뒤인 3월에는 추가로 피륙 300단을 보냈다. 이는 왜국 외에 외부 후원을 받을 길이 없었던 백제 부흥군으로서는 귀중한 선물이었다. 왜가 '백제 지원에 나서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배경에는 당시 고구려가 661년 12월에 있었던 당의 침략 시도를 좌절시켰다(《일본서기》)는 소식을 빠르게 접한 부분도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662년 1월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군대가 평양(平壤) 근교에서 당병 10만을 전멸시키고, 2월에는 군량이 떨어져 평양 근교에 고립되어 있던 당의 소정방이 고구려 경내까지 들어온 신라의 군량지원을 받아 간신히 퇴각하는 등의 활약을 보인 점을 의식하여, '고구려와 함께 벌이는 전쟁이라면 손해볼 것이 없다'는 판단하에 백제부흥군 지원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날짜 : 662 | |
662/02 | 표하 전투 |
662년 김유신의 신라군이 야밤에 몰래 행군하여 표하(瓢河)에 이르니 고구려군이 추격해왔다. 김유신이 군사를 돌려 총반격에 나섰다. 신라는 고구려군의 수급을 1만이나 베고, 5000명을 사로잡았으며….(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 등)
* 날짜 : 662/02 | |
662/02 | 당,고구려에서 퇴각 |
고구려는 요동지역을 포함, 그 후방인 압록강 이남 지역 전체가 주 전장터가 되었다. 평양성은 오랫동안 포위되었었고 당의 요청에 따라 신라도 침공군을 보내어 북진하여 평양성에 합류하여서 고구려 남부지역을 포함 고구려의 전 지역의 경제 활동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한편 당나라는 백제 원정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어 또 다시 대규모 고구려 원정을 하였으나 도중에 철륵이 봉기하여 철륵과의 전쟁을 치루게 되었고 또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 따른 실패하여 이로 인해 많은 장병과 군수물자를 잃고 피해가 적지 않아 고구려 원정을 사실상 당분간 포기하는 상태가 되었다.
* 날짜 : 662/02 | |
663 | 토번,토욕혼의 수도 부사를 격파 |
강성해진 토번은 점차 토욕혼을 위협하다가, 마지막 가한인 오지야발륵두가한(烏地也拔勒豆可汗) 모용 낙갈발(慕容諾曷鉢) 때인 663년에 토욕혼의 수도 부사를 격파하였고, 672년에는 토번의 영향력이 토욕혼의 모든 땅에 미치게 되어 사실상 멸망하게 되었다.
* 날짜 : 663 | |
663 | 당,신라에 계림대도독부 설치 |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는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신라 왕을 계림주 대도독(鷄林州大都督)에 임명하였다.
* 날짜 : 663 | |
663/08/27 | 백강 전투 |
백강 전투(白江戰鬪, 일본어: 白村江の戦い 백촌강의 전투[*])는 663년 8월에 한반도의 백강(현재의 금강 부근)에서 벌여진 백제·왜의 연합군과 당·신라의 연합군 사이의 전투이다. 당·신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대륙에 당이 등장하여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새롭게 바뀌는 가운데 일어났던 전쟁이며, 왜도 영토가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국방체제·정치제제의 변혁이 일어났으며, 백제부흥군 활동이 종언을 고하게 되는 등 큰 영향을 미쳤다.
* 날짜 : 663/08/27 | |
663/09/07 | 주류성 함락 |
귀실복신의 죽음과 같은 백제 부흥군의 내부 분열에 겹쳐 백제 부흥군이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왜병마저 당의 수군에게 궤멸되면서 백제 부흥군의 기세는 크게 꺾여 결국 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백제 부흥군 지휘부, 그리고 백제 유민의 대부분은 당시 백제의 '우호국'이었던 왜로 망명하는 길을 택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63년 9월에 주류성이 함락되었을 때, 백제 귀족들은 "오늘로서 백제의 이름이 끊어졌으니 조상의 무덤도 다시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다"며, "호례성에 가서 일본군 장수들과 논의해야 할 일을 상의하자"고 입을 모았다.
* 날짜 : 663/09/07 | |
665 | 연개소문 사망 |
660년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 661년 고구려를 침략해 소정방이 이끄는 군대가 평양 부근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아들 연남생을 막리지에 임명하여 압록강에 보냈으나 패배하였다. 이듬해 방효태가 이끄는 당군이 다시 침입하자 연개소문은 직접 사수 언덕에서 접전을 벌여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죽이는 등 방효태가 이끄는 당나라군을 전멸시켰다. 이후 장남 연남생에게 대막리지를 물려주고 자신은 명예직인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에 올랐으며, 몇 년 후 사망하였다. 665년 등이 있으나 그의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는 665년이 가장 유력하다.
* 날짜 : 665 | |
665 | 당의 서역 제후국들 반란 |
토번의 도움으로 당의 서역 제후국들 반란.
* 날짜 : 665 | |
665/08 | 취리산 회맹 |
665년(문무왕 5) 8월 신라의 문무왕과 백제왕자 부여 융(扶餘隆)이 취리산에서 국경에 대하여 맺은 동맹.
* 날짜 : 665/08 | |
666/09 | 고구려 연남생, 당에 투항 |
고구려 연남생, 당에 투항
* 날짜 : 666/09 | |
666/12 | 고구려 연정토, 신라에 투항 |
고구려 연정토, 신라에 투항
* 날짜 : 666/12 | |
667 | 토번,가르통첸 사망 |
가르통첸은 667년에 사망했으며 훗날 재상이 된 맏아들 가르친네와 명장 가르친링을 비롯한 그의 다섯 아들들은 당나라를 상대로 많은 공을 세웠다.
* 날짜 : 667 | |
668/06 | 신라,고구려 공격 |
당나라 고종은 고구려를 협공하기 위해 신라에게도 군사를 징발케 하여 남쪽으로 부터 진군하게 하였다. 이에 신라 문무왕은 호응하고자 김흠순과 김인문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켰다.이 때 김유신은 병중이라 출진하지 못 하였다. 668년 6월, 고구려의 남부의 군사 요충지였던 대곡성·한성 등 2군 12성이 항복하였다. 특히 고구려 한성 (현재 황해도 재령, 사리원으로 추정된다)은 국내성, 평양성과 더불어 고구려의 3성이라고 불리던 고구려 남부의 정치,경제,군사,인구의 중심지였다.
* 날짜 : 668/06 | |
668/09/12 | 신라, 왜와 국교 재개 |
668년 9월 12일 신라 사신 사훼부 급찬 김동암이 왜를 방문하였다. 이해는 657년 신라와 왜의 국교가 단절된 후 11년, 663년의 백강구 전투가 있은 지 만 5년이 흐른 해이다.
* 날짜 : 668/09/12 | |
668/09/21 | 고구려 멸망 |
백제가 멸망한 후 고구려에 대한 당의 공격에 버티고 있었던 고구려가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내부 분열로 인해 힘이 약해지고 있었고,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구심점을 잃게 되어 666년 이후 요동성이 함락되고, 668년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보장왕이 백기를 들게 되었다. 당은 고구려 점령 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지배하겠다는 야망을 서서히 펼쳤고, 이때부터 신라와 당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 날짜 : 668/09/21 | |
669/05 | 신라,당에 사죄사 파견 |
669년 5월 신라는 김흠순과 김양도를 당에 사죄사로 파견하였다. 사죄사를 파견한 이유는 669년 4월경에 신라군의 일부가 백제지역으로 잠입하여 작전을 벌였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 날짜 : 669/05 | |
669/09 | 토번의 천산남로 급습(?) |
토번의 천산남로 급습.
* 날짜 : 669/09 | |
670 | 토번의 쿠차 진출 |
토번의 쿠차 진출로 당의 안서도호부가 다시 고창으로 옮겨짐. 안서4진도 폐지됨.
* 날짜 : 670 | |
670 |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
국호를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고침.
* 날짜 : 670 | |
670 | 안동도호부, 평양에서 신성으로 옮김 |
안동도호부, 평양에서 신성으로 옮김.
* 날짜 : 670 | |
670 | 검모잠 거병 |
검모잠(劍牟岑, ? ~ 670년)은 고구려의 부흥운동 지도자로 벼슬은 대형(大兄)이었다.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을 규합하고 옛 왕족 안승을 옹립하여 부흥운동에 나섰다. 신라의 지원을 받아 당(唐)의 세력을 몰아내려 했으나, 당군의 반격과 그에 따른 후퇴 와중에 안승에 의해 살해당했다.
* 날짜 : 670 | |
670/03 | 나당전쟁의 시작(?) |
나당 전쟁은 670년 3월, 신라군 1만과 고구려 유민군 1만이 압록강을 건너 당군을 선제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와 동시에, 신라군은 옛 백제 지역을 공격하여 당나라 주둔군과 웅진도독 부여융(扶餘隆, 백제의 왕족 출신)이 이끄는 백제군이 주둔하는 옛 백제 지역의 82개 성을 빼앗았으며, 671년에는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그곳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직속령으로 삼아 백제의 옛 땅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 날짜 : 670/03 | |
670/07 | 당-토번, 대비천 전투 |
대비천에서의 패배로 서역에서의 당나라 위상은 실추되었고, 가르친링은 여세를 몰아 670년에 당나라가 장악하고 있는 서역을 공격했다. 그 결과 당나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속한 중요한 4개 도시인 안서사진(安西四鎭), 즉 카라샤르(焉耆)ㆍ쿠차(龜玆)ㆍ호탄(于闐)ㆍ카슈가르(疏勒)등의 주요 도시들이 토번의 영토가 되어 서역이 토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국경의 완충지대였던 당의 속국 토욕혼도 사실상 멸망되어 수도 장안도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동아시아의 역학구조에도 변화가 왔는데 신라의 한반도 패권, 발해의 건국, 돌궐의 독립, 거란의 성장 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 날짜 : 670/07 | |
671 | 신라, 사비성 함락 |
671년에는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그곳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직속령으로 삼아 백제의 옛 땅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 날짜 : 671 | |
671/10/06 | 대동강 전투 |
신라 문무왕 11년(671) 10월 6일 대동강 하구에서 신라함대가 당의 군량선을 격침시킨 전투.
* 날짜 : 671/10/06 | |
672 | 신라, 장창당 창설 |
장창보병(長槍步兵)이란 기병이 절대적으로 열세일 때 창설되는 군조직이다. 이는 중국의 漢· 唐· 宋과 서양의 로마에서 확인되며, 또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 플랑드르 · 스위스 보병에서도 볼 수 있다.
* 날짜 : 672 | |
672/07/23 | 왜, 진신의 난 |
진신의 난(일본어: 壬申の乱 じんしんのらん)은, 서기 672년에 일어난 고대 일본사 최대의 내란이다. 덴지 천황의 태자 오오토모 황자에 맞서, 황제(皇弟) 오오아마 황자가 지방 호족들을 규합해 반기를 든 사건. 일본 역사에서 예외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측이 승리한 내란이었으며, 사건이 일어났던 서기 672년이 간지로 임신년(壬申年)에 해당되므로 간지의 이름을 따서 '진신의 난'이라 부른다. 진신란(壬申亂)으로도 칭한다.
* 날짜 : 672/07/23 | |
672/08 | 신라,석문전투에서 대패 |
672년 8월 황해도 서흥에서 신라 중앙군 부대들이 당의 장수 고간의 유인작전에 의해 패배한 전투.
* 날짜 : 672/08 | |
672/12 | 백빙산 전투 |
백빙산 전투는 672년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이 백빙산에서 당나라군과 벌인 전투이다.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 모두 수천의 사상자를 내는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신라군이 당나라군을 무찔렀으나 사실상은 신라의 패전이었다. 이후 고구려 부흥군은 673년 호로하 전투에서 다시 패하면서 쇠퇴하게 된다.
* 날짜 : 672/12 | |
673/05 | 호로하 전투 |
호로하 전투는 673년 5월 고구려 부흥군이 신라 호로하(칠중성)에서 당나라와 벌인 전투이다. 고구려 부흥군은 당나라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당나라 연산도총관 이근행에게 크게 패하여 고구려 부흥군이 완전히 해체되는 계기가 된다. 남은 부흥군의 무리는 신라로 달아났다.
* 날짜 : 673/05 | |
673/07/01 | 김유신 사망 |
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음력 7월 1일(양력 8월 18일))은 신라의 군인, 정치인이자 외척이었다.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한일통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 날짜 : 673/07/01 | |
674 | 토번, 천산북로 위협(?) |
토번, 천산북로 위협(?).
* 날짜 : 674 | |
674 | 보덕국(~683) |
보덕국(報德國)은 고구려 멸망 뒤, 674년(신라 문무왕 14)에 안승(安勝)이 세운 나라이다. 또는 후고구려국(後高句麗國)이라고도 한다.
* 날짜 : 674 | |
675/01 | 토번의 평화사절이 당 방문 |
토번의 평화사절이 당 방문
* 날짜 : 675/01 | |
675/09 | 신라,매소성 전투에서 승리 |
신라군은 매소성 전투에서 군마 3만 380마리와 3만여명 분의 무기를 노획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신라는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신라군과 당군은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를 18차례에 걸쳐 벌였다.
* 날짜 : 675/09 | |
676 | 토번, 만손만첸칸포 사망 |
토번의 왕 만손만첸칸포가 사망하자 토번은 왕위계승문제를 놓고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 날짜 : 676 | |
676 | 당, 청해에서 토번 격파 |
당, 청해에서 토번 격파
* 날짜 : 676 | |
676/02/25 | 신라, 삼국통일 |
평양에 있던 당의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옮겨가고 신라는 676년 당의 세력을 대동강 이북으로 밀어냄으로써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 날짜 : 676/02/25 | |
676/11 | 신라, 기벌포 해전에서 승리 |
676년 11월, 금강 하구인 기벌포(伎伐浦: 현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에서 신라 수군과 설인귀가 이끈 당의 수군 사이에 마지막 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도 신라군이 승리를 거두었고, 당나라는 더 이상 전쟁 수행의 의지를 상실했다.
* 날짜 : 676/11 | |
677 | 당,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김 |
당나라는 도호부의 거점지를 요동 고군성(故郡城)에 옮겼고, 이듬해에는 요동의 신성(新城)으로 옮겼다가 한때 폐지하기도 했다. 당나라는 699년 안동도독부로 격하하여 개칭하였고, 보장왕을 요동주 도독 조선왕(遼東州都督朝鮮王)으로 임명하고 다스리게 하였다.
* 날짜 : 677 | |
678 | 당, 신라에 대한 대규모 원정 추진 |
신라에 대한 대규모 원정 추진. 토번과의 전쟁을 이유로 한 반대로 폐기
* 날짜 : 678 | |
678 | 토번, 승풍령 전투에서 당에 대승 |
678년 가르첸링의 토번군은 중서령 이경현이 이끄는 당나라 18만 대군을 청해호 부근의 승풍령에서 대파하였는데, 이로써 청해(토욕혼)의 티베트화가 공고하게 되었다.
* 날짜 : 678 | |
679 | 신라, 사천왕사 창건 |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는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 시대 사천왕사의 터로서, 사적 제8호이다. 사천왕사는 신라 문무왕 당시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을 가진 사찰이다.
* 날짜 : 679 | |
680 | 문성공주 사망 |
문성공주(중국어: 文成公主, 623년경- 680년)는 당 태종의 조카딸로 토번이라 일컫는 티벳 송첸캄포 왕의 제2 황후이다. 640년 당을 떠나 그 다음 해 티벳에 도착하여 평화 조약의 일부로 얄루 왕 송첸캄포와 국혼을 치렀다. 문성공주는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며, 송첸캄포의 제1황후 ‘브리쿠티 데비’와 함께 티베트에 불교를 소개했다고 전한다.
* 날짜 : 680 | |
681 | 김흠돌의 난 |
김흠돌의 난은 신라에서 681년 소판(蘇判) 김흠돌이 파진찬 흥원(興員),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함께 모반을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된 사건으로 신라의 왕권이 전제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사건이다. 신문왕은 이를 계기로 진골 귀족세력을 숙청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조카이자, 김유신의 사위이고, 신문왕의 장인이었다.
* 날짜 : 681 | |
681 | 보장왕의 부흥 운동 실패 |
당나라로 압송된 보장왕은 전쟁에 대한 직접 책임이 없다 하여 당 고종으로부터 벼슬을 하사받고, 그들이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에 머무르다가 677년에 “요동도독조선군왕”에 임명되어 요동에 머물렀다. 이때 그는 고구려의 재건을 노려 말갈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681년에 양주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682년에 사망하였다.
* 날짜 : 681 | |
681/07/01 | 신문왕 재위 |
신문왕(神文王, ? ~ 692년, 재위: 681년 ~ 692년)은 신라의 제31대 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정명(政明), 자는 일소(日怊).[1] 문무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 왕비는 소판 김흠돌(金欽突)의 딸이었지만, 신문왕 즉위 직후에 김흠돌이 모반 혐의로 숙청되면서 그녀 역시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후에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딸(신목왕후)을 맞이했다. 665년에 태자가 되었고, 681년 7월 21일(음력 7월 1일)에 선왕 문무왕이 사망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삼국 통일 후에 국내 통치의 기반을 굳혀 왕권의 강화에 노력했다. 진골 왕통의 세 번째 왕이었지만 그는 모계로는 진흥왕의 후손으로, 신문왕의 외조부 김선품은 진흥왕의 손자였다.
* 날짜 : 681/07/01 ~ 692/07/02 | |
683 | 돌궐이 당에서 독립 |
돌궐이 당에서 독립.
* 날짜 : 683 | |
683/12/27 | 당 고종 사망 |
당 고종 사망. 당 고종 이치(唐 高宗 李治, 628년 7월 21일 ~ 683년 12월 27일)은 중국 당나라의 제3대 황제이다. 당 태종 이세민의 9남이며 이름은 이치다. 모친은 문덕황후 장손씨이며, 자는 위선(爲善)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신라와 함께 멸망시킨 황제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 날짜 : 683/12/27 | |
685 | 신라, 9주5소경 완비 |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지배에 저항해 온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인과 연합하여 당을 격파하고 동모산에 정착하였다. 거란인 이진충의 당 영주성 습격으로 당이 약해져 있을 때, 고구려 장수 대조영은 말갈족과 함께 당을 벗어났고 이를 추격하던 당과 천문령전투에서 대승리함으로써 당의 추격을 물리치고 발해를 건국하게 되었다.
* 날짜 : 685 | |
687/05 | 신라,문무관에게 관료전 지급 |
687년 5월, 수조권 만을 행사할 수 있는 문무 관료전을 최초로 지급하였고, 689년 1월 귀족에게서 노동력 징발이 가능한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킴으로써 왕권의 전제화를 이루었다.
* 날짜 : 687/05 | |
689/01 | 신라,녹읍 폐지 |
687년 5월, 수조권 만을 행사할 수 있는 문무 관료전을 최초로 지급하였고, 689년 1월 귀족에게서 노동력 징발이 가능한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킴으로써 왕권의 전제화를 이루었다.
* 날짜 : 689/01 | |
689 | 당-토번, 인식가 전투 |
689년, 당의 무측천(武則天)이 고종의 상이 끝나자 문창우상 위대가(韋待價)를 안식도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안서대도호 염온고(閻溫古)를 부총관에 임명하여 10만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토번(吐蕃)이 장악한 안서사진(安西四鎭)을 치게 하였다. 그에 맞서 가르친링(論欽陵)은 군을 이끌고 인식가(寅識迦)강으로 이동하여 당군과 대치하였다. 겨울철의 추위를 이용하여 당군이 인식가 강에서 행군하지 못하고 있을 때 폭설이 내리자, 가르친링은 강을 건너 당군을 습격하였다. 결국 당군은 추위로 인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강의 지리를 이용한 가르친링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고 당나라군은 대패하였다. 거기에다 퇴각하는 도중 폭설을 만나 많은 당군이 얼어죽었다. 무측천은 이 패전에 매우 노하여 위대가를 수주(지금의 광서 계평현 남쪽)로 유배시키고 염온고는 참수했다.
* 날짜 : 689 | |
690/09/09 | 측천무후 재위 |
측천무후則天武后, 624년: 무덕(武德) 7년 1월 23일 ~ 705년: 이주(利州) 5년 11월 2일)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며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이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무측천(중국어: 武則天)이라 부르기도 한다.
* 날짜 : 690/09/09 ~ 705 | |
692 | 당, 타림분지 회복 |
당, 토번에게서 타림분지 회복.
* 날짜 : 692 | |
692 | 돌궐, 쿠틀룩 사망과 카프간 승계 |
당서(唐書)에 묵철(默啜)로 알려져 있는 카프간은 돌궐사에서 위대한 정복자로 기억될 만큼 후돌궐 제국의 형성과 발전에 주요한 기틀을 마련했다. 쿠틀룩의 중국에 대한 공략과 기습을 더욱 맹렬한 기세로 계속한 카프간의 정복 당위성은 다음과 같았다. 즉, 중국을 압박함으로써, 신생 후돌궐 제국의 안정적 발전을 도모하고, 백성들에게 충분한 곡물을 확보하는 한편, 중국 변방에 산재해 있는 투르크족들을 외튀켄으로 귀환시켜 군사적, 경제적 잠재력을 증대시키는 일, 마지막으로는 아시아 대륙의 전 투르크족들을 돌궐의 깃발 아래 통일시키는 일 등이었다.
* 날짜 : 692 | |
692/07/02 | 효소왕 재위 |
효소왕(孝昭王, 687년 ~ 702년 8월 24일(음력 7월 27일), 재위: 692년 8월 20일(음력 7월 3일) ~ 702년 8월 24일(음력 7월 27일))은 신라의 제32대 왕이다. 이름은 이홍(理洪) 또는 이공(理恭). 신문왕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황후이다. 691년에 태자가 되었고, 692년 음력 7월에 선왕 신문왕이 사망하여 왕위에 올랐다. 692년부터 696년까지 중시 김원선(金元宣)이 섭정하였고 696년부터 698년 붕어할 때까지 중시 김당원(金幢元)이 섭정하였으며 698년부터 699년까지 중시 김순원(金順元)이 섭정하였고 699년부터 702년 붕어할 때까지 파진찬 김영종(金永宗)이 섭정하였다.
* 날짜 : 692/07/02 ~ 702/07/27 | |
696/05 | 거란, 이진충의 난 |
거란인 추장이었던 이진충이 당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으킨 반란.
* 날짜 : 696/05 | |
698 | 대조영, 발해 건국 |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지배에 저항해 온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인과 연합하여 당을 격파하고 동모산에 정착하였다. 거란인 이진충의 당 영주성 습격으로 당이 약해져 있을 때, 고구려 장수 대조영은 말갈족과 함께 당을 벗어났고 이를 추격하던 당과 천문령전투에서 대승리함으로써 당의 추격을 물리치고 발해를 건국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진이라고 했지만, 713년 발해로 이름을 바꾸었다.
* 날짜 : 698 | |
699 | 토번, 가르친링 사망 |
699년 나이가 든 치둑송첸은 가르 가문을 왕권 강화에 방해되는 걸림돌로 여겨 반역죄를 뒤집어씌우고, 가르 일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그러자 가르친링은 치둑송첸에 대항하지 않고 토번을 위해선 자신이 죽는게 최선이라 생각하여 동생 가르첸바(喝爾贊婆, 論贊婆)와 아들 가르궁린(喝爾弓仁, 論弓仁)을 당나라에 보내 항복하도록 하고 자신은 청해호 근처에서 2000여명의 무사들과 집단으로 자결했다.
* 날짜 : 699 | |
699 | 소고구려 |
고구려 유민이 당의 지원하에 요동에 건설한 국가.
* 날짜 : 699 | |
701/08 | 일본, 다이호 율령 |
다이호 율령은 8세기 초반에 제정된 일본의 율령이다. 당나라의 영휘 율령(永徽律令, 651년 제정)을 참고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본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율령으로, 이 율령의 반포 및 시행으로 고대 일본은 본격적인 율령제 국가로 들어서게 되었다.
* 날짜 : 701/08 | |
702/07/27 | 성덕왕 재위 |
성덕왕(聖德王, ? ~ 737년)은 신라의 제33대 왕(재위: 702년 ~ 737년)이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효소왕이 죽자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초명(初名)은 천중(天中). 휘(諱)는 융기(隆基)였으나 당(唐)으로부터 현종(玄宗) 황제와 휘가 같다는 항의를 받고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1] 702년부터 73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702년부터 703년까지 중시 김원훈(金元訓)이 섭정하였고 703년부터 705년까지 중시 김원문(金元文)이 섭정하였으며 705년부터 706년까지 중시 김신정(金信貞)이 섭정하였고 706년부터 707년까지 김순원(金順元)이 섭정하였으며 707년부터 737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 날짜 : 702/07/27 ~ 737/02 | |
702/06 | 일본, 당에 사신 파견 |
702년 6월 일본이 672년 이후 처음으로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 날짜 : 702/06 | |
703 | 신라, 당에 사신 파견 |
신라는 703년 견당사를 파견하였으며, 이후 신라가 당에 해마다 한 차례 이상 사신을 파견하는 등 신당 간에 긴밀한 관계가 맺어졌다.
* 날짜 : 703 | |
704 | 돌궐, 사사충의 당군 패퇴시킴 |
카프간의 중국에 대한 공세는 하북도와 하동도를 중심으로 702년 이후 계속되었다. 704년에는 명사 전투에서 사사충이 이끄는 80,000 당군을 패퇴시켜 당조를 혼란에 빠뜨렸다.
* 날짜 : 704 | |
705/02/23 | 당 중종 재위 |
당 중종 이현(唐中宗 李顯, 656년: 현경(顯慶) 원년 11월 26일 ~ 710년: 경룡(景龍) 4년 7월 3일)은 당의 제4대 황제이다. 당 고종 이치의 7남으로 모친은 측천황후 무씨이다.
* 날짜 : 705/02/23 ~ 710/07/03 | |
710 | 일본, 나라 시대 |
나라 시대(일본어: 奈良時代 나라지다이[*]; 내량시대, 710년~794년)는 넓은 의미로는 710년 겐메이 천황이 헤이조쿄(平城京)로 천도한 때부터 794년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할 때까지의 84년의 기간을 말하고, 좁은 의미로는 710년에서 784년에 간무 천황이 나가오카쿄(長岡京)로 천도할 때 까지이 74년의 기간을 가리키는 일본역사의 시대구분의 하나이다.
* 날짜 : 710 | |
710 | 금성공주, 토번에 시집 감 |
30년 동안 토번에 있으면서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데 힘썼고, 경계비를 세우고 교역 시장을 여는 등 당나라와 토번 사이 경제적, 문화적 교류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 날짜 : 710 | |
712/09/08 | 당 현종 재위 |
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년: 수공(垂拱) 원년 9월 8일 ~ 762년: 상원(上元) 3년 5월 3일)는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이다. 별호는 당명황(唐明皇)이며, 당 예종 이단의 3남으로, 어머니는 숙명황후 유씨이다. 당 태종 이세민 이후, 번영을 이끌었으나, 동시에 쇠퇴를 이끌기도 한 황제이다.
* 날짜 : 712/09/08 ~ 756 | |
712 | 당, 현종 즉위 |
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년: 수공(垂拱) 원년 9월 8일 ~ 762년: 상원(上元) 3년 5월 3일)는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이다. 별호는 당명황(唐明皇)이며, 당 예종 이단의 3남으로, 어머니는 숙명황후 유씨이다. 당 태종 이세민 이후, 번영을 이끌었으나, 동시에 쇠퇴를 이끌기도 한 황제이다.
* 날짜 : 712 | |
713 | 대조영, 국호를 발해로 |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진이라고 했지만, 713년 발해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조영이 713년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 받은 뒤에는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신당서(新唐書)』발해전에서 이때에 “말갈 칭호를 버리고 발해로만 불렀다”고 한 것은 당나라에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당나라는 발해국을 공식 인정하기 전에는 말갈 집단으로 비하해 불렀기 때문이다.
* 날짜 : 713 | |
716 | 돌궐, 빌게 카간의 통치(716~734) |
그의 19년에 걸친 샤드 지위와 19년의 카간 재위 동안 돌궐 제국은 번영을 누렸다. 제국의 영토는 동으로 산둥 반도, 서로는 철문(鐵門, Demir Kapi), 남으로는 카라샤르, 북으로는 바이르쿠(Bayirku, 拔野古) 지역에 이르렀다.
* 날짜 : 716 | |
726 | 발해, 흑수말갈 공격 |
당이 흑수말갈을 이용하여 배후에서 발해를 공격하게 하고 그 가운데서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획책하는 가운데, 726년 흑수말갈은 발해에는 아무런 통고도 하지 않고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보호를 요청했다. 이를 기회로 당은 726년 흑수국을 흑수주로 개칭하고 거기에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통제케 하여 당의 기미주(覊縻州)로 삼았다. 발해 무왕은 당의 배신적인 행위에 분개하여 당을 칠 것을 결심, 먼저 당과 동맹을 맺은 흑수말갈을 쳐 이를 완전히 굴복시켰으며 앞으로 당과 협력하지 않을 것을 다짐받았다(726년).
* 날짜 : 726 | |
727 | 발해, 일본과 외교 |
727년 발해와 일본의 외교관계가 시작되자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악화되어 갔다.
* 날짜 : 727 | |
731 | 일본, 신라 공격 |
일본이 병선 300여척으로 동해안을 침입하자 이를 격파
* 날짜 : 731 | |
732 | 발해-당 전쟁 |
발해-당 전쟁은 732년 발해가 당나라의 등주를 선제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 날짜 : 732 | |
733 | 신라,발해 남부 지방 공격 |
신라,발해 남부 지방 공격.
* 날짜 : 733 | |
735 | 당, 대동강 이남 신라 영토로 인정 |
신라는 735년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 인정받음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개척을 본격화하게 되었다. 736년 윤충 등 대신들을 파견하여 평양(한산주)과 우두주의 지세를 검찰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북방개척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 날짜 : 735 | |
735/08 | 덴표 역병 |
덴표 역병(天平の疫病大流行, 덴표 역병대유행)은 일본에서 발생한 천연두의 유행을 지칭한다. 일본 전체 인구의 약 1/3을 죽였으며, 전국에 걸쳐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영향을 미쳤다. 735-737년 일본의 천연두 유행이라 부르기도 한다.
* 날짜 : 735/08 ~ 73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