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천 전투 (670년) – 당과 토번의 전쟁

앞의 글 나당전쟁과 토번(티베트)에서 언급했던, 신라의 삼국통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요인 중 하나인 당唐과 토번(吐蕃)의 670년 대비천(大非川) 전투에 대해서 조사했다.

 

비교적 우호적 관계였던 당 태종과 토번의 송첸캄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자 토번은 고구려와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던 당나라를 대상으로 당의 실크로드 헤게모니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향후 200년 동안 계속되는 싸움을 통해 50년 가량을 토번이 실크로드를 장악했는데, 그 중요한 싸움들 중 처음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이 대비천 전투이다.

 

670년 당 고종(高宗)은 설인귀(薛仁貴)를 나살도행군총관(邏薩道行軍總管)으로 임명하고, 토번을 공격하게 했다. 토번의 명장 가르친링은 토번군을 이끌고 칭하이 호(靑海湖) 남쪽의 대비천(大非川)에서 맞서 싸워 당군을 궤멸시키고, 설인귀 등 주요 장수들을 사로잡았다. 가르친링은 포로가 된 당나라 장수들을 훈계하고 당나라에 돌려보냈는데 이 전투를 대비천 전투라고 한다. 설인귀는 귀국 후 대비천 전투에서의 패전 책임을 지고 한때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대비천에서의 패배로 서역에서의 당나라 위상은 실추되었고, 가르친링은 여세를 몰아 670년에 당나라가 장악하고 있는 서역을 공격했다. 그 결과 당나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속한 중요한 4개 도시인 안서사진(安西四鎭), 즉 카라샤르(焉耆)ㆍ쿠차(龜玆)ㆍ호탄(于闐)ㆍ카슈가르(疏勒)등의 주요 도시들이 토번의 영토가 되어 서역이 토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국경의 완충지대였던 당의 속국 토욕혼도 사실상 멸망되어 수도 장안도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동아시아의 역학구조에도 변화가 왔는데 신라의 한반도 패권, 발해의 건국, 돌궐의 독립, 거란의 성장 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세계사 연표는 :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mhistory1.jsp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  서영교 / 글항아리 / 2015.07.23

 

670년 4월 토번이 서역으로 진격하여 백주 등 18주를 함락시켰고, 우전과 연합하여 구자의 발환성을 함락시켰다. 당 조정은 톈산 남로의 구자 · 우전 · 언기 · 소륵 등 안서 4진을 폐지했다. 토번이 실크로드의 톄진 남로를 장악했다. 그러자 고종은 토번과의 전쟁을 수행할 장군들을 임명했다. 8월에 가서 그들은 병력을 이끌고 칭하이 호에 도착했다. 주력은 동돌궐 군대 11만이었다. 아사나충이 이끄는 동돌궐 군대의 일부는 이전에도 토번과의 전쟁에 동원된 바 있었다.

당과 토번 두 강국의 정면 승부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 전투 결과에 따라 신라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670년 7월께 당나라 군대 11만이 칭하이 호 부근에 도착했다. 이 염호의 면적은 4340제곱킬로미터로 서울 면적의 일곱 배다. 북쪽에서 여러 하천이 흘러들지만 배출 하천은 없다. 당군은 토번을 이곳에서 몰아내야 서역의 실크로드를 탈환할 수 있었고, 서역의 길목인 하서회랑을 지켜낼 수 있었다. 설인귀가 총사령관이었고 그 아래에 곽대봉과 돌궐 왕족 아사나도진이 있었다. 곽대봉은 설인귀와 같은 반열에 있었는데 전쟁에 투입될 당시에는 설인귀의 부하가 됐다. 그는 설인귀의 명령을 받는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이윽고 당나라 군대는 칭하이 호 남쪽에 있는 대비천에 이르렀다. 그곳은 지금의 칭하이 성 궁허共和 현 서남쪽 체지切吉 평원으로 그 부근에서 고도가 낮은 지역이었다. 설인귀는 이보다 고도가 높은 대비령 고개에 목책을 설치하고 중간 캠프로 활용할 작정이었다. 작전목표 지역은 오해였다. 대비령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중장비와 군수품, 치중輜重을 모두 가져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설인귀는 넓고 평평한 대비령 위에 목책을 설치해 그 안에 물건을 남겨두고 병사 2만으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했다. 그는 경무장한 정예병을 이끌고 빠른 속도로 철야행군해 토번군이 대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습격하려 했다.

 

설인귀는 선발대를 이끌고 가서 하구(적석積石)에서 토번군을 쳤다. 당군이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던 토번군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무너져 수많은 전사자를 냈다. 살아남은 자들은 흩어져 달아났다. 설인귀는 소와 양 1만여 두를 거둬들였고, 북을 치며 서쪽으로 이동해 곧장 오해성을 점령했다. 그는 그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본대를 기다렸다. 하지만 본대는 오지 않았다.

전투는 타이밍이다. 곽대봉은 치중을 대비령에 있는 목책에 두지않고 병사들에게 모두 짊어지게 했다. 행군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토번군 20만과 마주쳤다. 토번군은 질서 있고 기강이 잡힌 군대였다. 병력도 많았고 고산에 적응한 데다 충분한 휴식까지 취한 상태였다. 고산지대에서 치중을 가지고 오느라 지친 당군은 토번군과의 싸움에서 제대로 대항해보지도 못하고 궤멸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치중을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

장비와 인력을 모두 상실한 설인귀의 선발대는 암울했다. 일단 오해에서 대비천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토번 군부의 수장 가르친링이 이끄는 토번의 주력군대 40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인귀는 중과부적을 실감했다. 당군은 토번군에 의해 학살당했고, 설인귀는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 『구당서』 「진자앙전 陳子昻傳」은 그 패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국가가 이전에 설인귀와 곽대봉을 토벌의 장수로 삼았으나 11만이 대비천에서 도살돼 한 명의 병사도 돌아오지 못했다.” 설인귀 등은 가르친링에게 치욕적인 화해를 청했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극소수 병사들의 목숨이라도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해를 바꿔가면서 칭하이 호(청해)에서는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병사들의 죽음이 이어졌다. 여기서 전사한 이름 없는 병사들의 슬픔을 당의 시인 두보杜甫는 이렇게 읊었다.

 

너희들은 보이지 않는가

저 청해 부근에서는 예로부터 백골을 치우는 사람도 없고

새로운 망령은 한이 맺혀 몸부림치고

오래된 망령은 울부짖으며

하늘이 구름비로 축축해질 때

그 목소리는 흑흑 울고 있다

그 목소리는 흑흑 울고 있다

 

패장들은 죄인이 됐다. 당 조정에서 대사헌 악언위(彦瑋)가 진상을 조사했다. 설인귀와 두 명의 패장은 결박돼 장안으로 돌아왔다. 장군들을 태운 수레가 나타나자 당나라 군대가 패배했고 실크로드가 토번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고종에게 패전은 폐부를 찌르는 아픔이었다. 아버지 태종이 이뤄놓았던 실크로드 경영권을 아들이 상실했다. 정관의 치로 칭송받던 위대한 황제의 권좌가 그 같은 능력이 결여된 자식에게 계승됐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증명된 것이다. 중앙아시아는 물론 페르시아, 동로마제국의 상인과 사절들이 이 길을 거쳐서 중국을 왕래했으며, 따라서 실크로드 장악과 경영은 그야말로 당 대외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있었다. 향후 당은 주력을 서역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대비천 전투는 실크로드를 놓고 당나라와 토번 사이에 벌어진 150년 전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전쟁이 시장을 지향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나당전쟁의 개시와 그 배경

–  서영교 / 역사학보 제173집 (2002.3)

 

녹동찬祿東贊(가르통첸)은 660년에 당이 한반도 통일전쟁에 개입하자 그 이듬해 천산天山의 투르크계 궁월弓月(Kongul)을 충동하여 당에 반기를 들게 하였으며, 662년에 가서 이를 표면화했다. 토번과 궁월, 카슈가르(Kashrar) 등이 연합한 군대가 카슈가르 남쪽에서 소해정蘇海政이 이끄는 당군과 마주쳤다. 정면충돌로 가지는 않았지만 상호간의 긴장이 고조된 것은 확실하다. 이듬해인 663년에도 토번은 파미르고원의 Balur와 와칸(Wakhan)을 점령하여 그 지배하에 둠으로써 東투르키스탄에 대한 전략적 위치를 선점하게 되었다.

그래도 녹동찬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654년, 657년, 658년, 665년 4회에 걸쳐 당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양국사이의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없었다. 특히 665년의 경우 토욕혼 점령지에 대한 당의 합법적인 인정을 받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는 당의 속국을 점령하면서도 그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녹동찬이 666년 토욕혼 정벌을 완료하고 귀국한 그 이듬해 사망하자 상황은 급선회한다. 그 자제子弟 가르(喝爾)一家가 669년 9월에 타림분지에 급습을 가했던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당이 지배하던 실크로드 지역에 대한 토번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신당서』권216에도 녹동찬의 아들 4명이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과두체제가 들어서자 이때부터 당의 변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다고 명기하고 있다.

녹동찬의 경우 前왕의 신임을 받은 신하임이 분명하다. 녹동찬은 당과의 결혼동맹 체결에 중추적 역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보다 앞서 히말라야 산록에 있는 네팔의 공주를 손챈캄포(松贊干布)의 비妃로 맞이하는 일을 성사시킨 바 있다. 그에게는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손챈캄포의 유조를 받아 어린 왕을 보좌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Helmut Hoffman에 의하면 녹동찬의 섭정에 대해 어린 토번왕은 최소한 표면상 반감을 나타내지 않았고, 정국문제에 있어도 그에게 위임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이 과두정을 행할 당시에 토번왕은 친정親政을 할만큼 성장해 있었다. 섭정의 객관적인 필요성이 사라진 때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 녹동찬이 죽은 후 그들의 과두정(Oligarch)은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이 군대 장악을 지속화시킬 필요성을 절감케 했을 것이고, 군대에서 그들의 역활이 확대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국내의 관심을 외부로 돌려야 했던 것이다.

실로 669년 9월 토번의 타림분지 급습은 이러한 토번의 국내사정에 의해 비롯되었다. 토번사吐蕃史의 거장 좌등장佐藤長이 가르氏 일가를 주전파主戰派로 명명하고있는 것도 토번의 군사적 팽창정책이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이다. 가르氏의 집정執政시기에 당 · 토번의 전쟁은 지속되었다. 『자치통감』권206을 보면 가르氏가 토번군대를 장악한 후 당은 30여년 간 그 침략을 받게 되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가르氏 정권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세계최대의 강국 당나라와 전쟁을 해야 했고 그 승리의 결실을 재분배하면서 그들의 권위를 고양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당 고종은 토번의 이러한 공세를 막기 위하여 670년 4월 한반도 지역을 관할하던 안동도호부 도호 설인귀를 對토번 전선에 투입했다. 하지만 670년 7월에 그의 군대는 참패하고 말았다. 670년 7월 토번은 설인귀의 10만 대군을 청해靑海 대비천大非川에서 전멸시켰던 것이다. 백전노장 설인귀는 모든 병사들을 잃어버리고 몸만 겨우 빠져 나왔다고 한다. 그 결과 실크로드의 안서사진安西四鎭(카라샤르, 쿠차, 호탄, 카슈가르)이 토번에 떨어졌다. 토번이 당군을 격파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한 이 사건은 전세계에 퍼졌을 것이다.

당 고종, 그에게 실크로드의 상실은 폐부를 찌르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당 태종이 이루어 놓았던 실크로드 경영권은 당 고종이 한반도전쟁에 주력한 사이에 토번에게 고스란히 넘어 갔다. 정관의 치(貞觀의 治)로 칭송 받던 위대한 황제의 권좌가 그 같은 능력이 결여된 자식에게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증명된 것이다.

중앙아시아는 물론 페르시아, 동로마제국의 상인과 사절들이 이 길을 거쳐서 중국을 왕래했으며, 필연적으로 실크로드에 대한 장악과 경영은 그야말로 당의 대외정책의 최우선순위에 있었다. 향후 당은 주력을 서역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670년 3월 약소국 신라가 압록강을 넘어 만주에 들어가 당군을 선제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상황 아래서 이루어졌다. 670년 3월 나당전쟁 발발 시점이 당과 토번의 전쟁의 서막이 된 699년 9월과 일치하고 있다.

 


중국

–  백범흠 / 늘품플러스 / 2010.04.19

 

고구려가 멸망당한 다음해인 669년, 명장 가르첸링이 이끄는 토번군은 설인귀가 지휘한 10만의 당나라-토욕혼 연합군을 청해호 남쪽의 대비천(大非川)에서 격파하였으며, 여세를 몰아 신강의 안서 4진 즉, 카라샤르(언기), 쿠차(구자), 호탄(우전), 카슈가르(소륵)을 장악하였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영역으로 하는 발해가 독립하고, 한반도 남부의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대비천 전투에서 당나라가 토번에 대패했기 때문이었다.

678년 가르첸링의 토번군은 중서령 이경현이 이끄는 당나라 18만 대군을 청해호 부근의 승풍령에서 대파하였는데, 이로써 청해(토욕혼)의 티베트화가 공고하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

–  토머스 레어드 / 황정연 역 / 웅진지식하우스 / 2008.05.02

 

송센 감포와 문성공주의 혼인으로 상징된 양국의 비공식 평화조약은 송센 감포와 당 태종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유지되었다. 태종과 송센 감포는 649년 몇 달 차이로 죽었다. 태종의 대를 이은 고종高宗은 티베트를 공격했고, 이후 200년 동안 티베트와 중국은 여섯 차례에 걸친 서면 조약을 체결했다. 중국은 처음 두 조약을 어겼다. 두 제국은 끊임없는 화해 노력 속에서도 서로를 비롯해 아랍, 투르크, 위구르 등의 중앙아시아의 강대 세력과 계속 대치 상태에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동맹과 충성, 배반 속에 중앙아시아의 5대 강국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싸웠다. 한 티베트 공주가 투르크의 왕과 정략적으로 맺어졌고, 중국의 공주들이 위구르와 투르크의 왕들에게 보내졌다. 677년 티베트는 타림Tarim 분지 전체를 손에 넣게 되었다. 티베트 사람들은 투르크와 연합해 당을 공격했고, 동맹이 반대로 맺어지기도 했다. 그칠날 없는 전쟁과 끊이지 않고 엎어지는 동맹의 역사였다.

티베트 북쪽 국경에 걸친 방대한 타림 분지와 중가르(Jungar, 준가얼) 분지의 내아시아 사막에 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은 실크로드 상인들의 중간 거점이었다. 주로 불교를 믿는 아리안족과 투르크족이 건설했고 주민도 대부분 아리안족과 투르크족이며 중국인과 티베트인은 거의 없었던 고립된 도시국가들을 통치하는 자는 통상로를 통한 교역을 조종할 수 있었다. 200년간에 걸친 거대한 승부가 펼쳐지는 동안 티베트는 전부 두 차례에 걸쳐 50년 동안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하지만 200년간 두 강국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경쟁이 계속되는 동안 최종 승자는 없었다.

 


나당전쟁과 토번

–  서영교 / 동양사학연구, 제79집(2002.07)

 

나당전쟁은 실로 서역의 전황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669년 9월 토번이 천산남로를 급습하자 670년 4월 설인귀가 이끄는 한반도 주둔 병력이 청해에 투입되었다. 그때 요동이나 한반도 북부지역의 당군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고, 670년 3월 신라군은 압록강 이북까지 작전 반경을 넓힐 수 있었다. 670년 7월 청해 지역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이 전멸 당하자, 그 해 같은 달에 신라는 백제 대부분 지역을 장악한다.

672년 4월 토번의 사절이 장안에 도착하여 당 고종과 측천무후를 접견하면서 모종의 협상을 진행시키자, 같은 해 8월 당장 고간高侃이 이끄는 정예기병이 황해도 서흥(石門)에서 신라 중앙군단을 거의 전멸시킨다. 나아가 동년 12월에 당군은 고구려 유민이 지키고 있던 백수산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를 구원하려고 온 신라군마저 격파했으며, 그 이듬해인 673년 윤5월에 임진강 서쪽에서 고구려인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전투 상황 자료>

 

설인귀http://www.zwbk.org/MyLemmaShow.aspx?zh=zh-tw&lid=101968 에서

전투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원본의 진위는 알기 어렵다. 번역 부분은 http://sunheung7.blog.me/10009092209 에서 가져옴

 

薛仁貴任安東都護時,吐蕃漸趨強盛,擊滅了羌族建立的吐谷渾,又侵略唐西域地區。為此,唐高宗調任薛仁貴為邏婆道行軍大總官,並以阿史那道真、郭待封為副將,率軍十餘萬人,征討吐蕃。

 

薛仁貴奉命西行,軍至大非川(今青海共和縣西南切吉平原;一說今青海湖西布哈河),將趨烏海(今青海光海縣西南苦海),薛仁貴對阿史那道真和郭待封說:“烏海地險而瘴,吾人死地,可謂危道,然速則有功,遲則敗。今大非嶺寬平,可置二柵,悉內輜重,留萬人守之,吾倍道掩賊不整,滅之矣。”郭待封自願留守,薛仁貴又囑咐他千萬不可輕舉妄動。

 

薛仁貴安排好後,率部前往烏海,及至河口,遇吐蕃守軍數萬人,薛仁貴率軍一陣衝殺,斬獲殆盡。薛仁貴收其牛羊萬餘頭,鼓行而西,直逼烏海城,然後派千餘騎兵回大非川接運輜重,但這時郭待封已被吐蕃擊敗。薛仁貴因無輜重接濟,退軍大非川。至此,吐蕃調集40萬大軍前來進攻,唐軍抵敵不住,大敗。但吐善並不窮逼,以唐軍不深入為條件與唐議和,薛仁貴不得已應允,然後率敗軍東歸。戰後,他因敗績被免為庶人。

 

설인귀가 안동도호를 역임할 때 토번( 吐蕃 )이 점점 강성해져 강족( 羌族 )이 건립한 토욕혼( 吐谷渾 )을 격멸하였으며 또 당 서역( 西域 ) 지역을 침략하였다. 이 때문에, 고종은 설인귀를 전임시켜 나파도행군대총관( 邏婆道行軍大總官 )으로 삼고 아울러 아사나도진( 阿史那道真 ), 곽대봉( 郭待封 )으로써 부장을 삼아 군 10여만 인을 통솔하고 토번을 정토하게 하였다.
설인귀가 명을 받들어 서쪽으로 가니 군은 대비천( 大非川: 지금의 청해(青海) 공화현(共和縣) 서남쪽 절길(切吉) 평원, 일설에는 지금의 청해 호서포합하(湖西布哈河)에 이르러 오해( 烏海: 지금의 청해 광해현(光海縣) 서남쪽 약해(苦海))로 나아갔으며 설인귀는 아사나도진과 곽대봉을 대하고 ” 오해는 땅이 험하고 기후가 매우 나빠 우리의 사지( 死地 )로 위태로운 길이라고 할 수 있으매 그러한즉 빠르면 공적이 있으며 더디면 패하리라. 이제 대비령이 넓고 평평하니 두 울타리를 설치하고 안의 군수품에 진력하여 1만인을 머물러 수비하게 하고 나는 길을 배로 빨리가서 도적을 덮쳐 질서정연하지 못하게 하고 멸하겠다. ” 말하였다. 곽대봉이 자원하여 남아서 지켰으며 설인귀는 또 다른 경거망동은 절대 불가라고 분부하였다.
설인귀가 역할을 나눈 후, 부대를 통솔하고 오해에 나아가 강 입구에 이르러 토번 수비군 수만 인과 만나니 설인귀는 군을 통솔하여 한바탕 부딪혀 죽이고 거의 다 참획하였다. 설인귀는 그 소와 양 만 여두( 頭 )를 거둬들였으며 북을 치며 서쪽으로 이동하여 곧장 오해성( 烏海城 )을 핍박한 연후에 천여 기병을 대비천으로 돌려보내 운반하는 군수품을 접수하려 파견하였으나 이때 곽대봉이 이미 토번에게 쳐발렸다. 설인귀는 군수품 보급이 없으므로 인하여 대비천으로 퇴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토번이 40만 대군을 이동 집결시키고 다가와서 진공하매 당군은 적에게 저항할 수 없어 대패하였다. 단 토번이 그다지 극단적으로 핍박하진 않아 당군에게 철저하지 않은 조건을 삼음으로써 당군과 강화하니 설인귀는 부득이 승락한 연후에 패군을 통솔하고 동쪽으로 귀환하였다. 전쟁 후 그는 대패로 인하여 서인( 庶人 )이 되었다.

 


관련 지도

 

1


2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가르친링

위키백과 : 토욕혼

위키백과 : Battle of Dafei River

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 (1) – 정순태

[특집]당번고도(唐蕃古道)를 가다·1

[당번고도를 가다](2)눈물바다 일월산(日月山)을 넘어

吐蕃, 티베트 최초의 제국(4)-가르 가문의 시대와 대비천 전투

http://blog.naver.com/giveurhand/150166844186

http://valley.egloos.com/viewer/?url=http://songij21.egloos.com/1374086

http://cafe.naver.com/sakcafe/1178

http://www.natizen.com/board/view.asp?C_CC=BE&C_IDX=32733

대비천 전투 (670년) – 당과 토번의 전쟁

One thought on “대비천 전투 (670년) – 당과 토번의 전쟁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