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1946년 ~ 1975년) – 동아시아 30년 전쟁

베트남전쟁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중국 쪽 관련 문서와 옛 소련의 자료들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베트남전쟁 후반기에 관련된 연구서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베트남 전쟁을 미국이나 베트남의 전쟁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넘어 ‘동아시아 전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 30년 베트남전쟁을 베트남 근현대사의 맥락에서 파악하되 한국전쟁을 겪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현대사, 특히 냉전체제가 형성되고 변화 · 붕괴되는 과정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1949년의 ‘중국 공산화로의 통일’이라는 사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사실 그 당시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패권을 유지해야 할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공산화된 통일 중국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해방 직후의 한국의 분단과 전쟁, 일본의 전후 처리, 중국을 적대국으로 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동아시아 냉전체제에 미친 영향이 크다 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전쟁은 일반적으로 미국이 개입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미국은 프랑스를 지원하며 깊숙히 개입을 하였다. 이 전쟁의 성격을 나타내는 문구를 아래의 책이나 참고자료에서 찾아 나열해 보았다:

 

* 베트남전쟁은 베트남인의 민족해방전쟁인 동시에 동아시아 지배권을 둘러싼 미일동맹과 중국의 대결이기도 하였다.

 

* 1963년 7월, 미군이 17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중국은 지상군을 투입해 참전하되 중국은 북베트남의 방어를 담당하고 베트남인민군은 남부로 들어가 작전하기로 하노이 정부와 합의하였다.

 

* 매코믹에 따르면, 한국전쟁에서 출발해 베트남전쟁을 종식시킨 1973년 초 파리 평화조약에 이르기까지의 23년은 “세계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수익성 있는 경제성장의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는 다른 누구보다 스티븐 마그린과 줄리엣 쇼가 “자본주의 황금기”라고 부른 시기이다.

 

* 미국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공격한 진짜 이유는 진부한 것이었다. 워싱턴은 베트남이 독립하면 주변 국가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가 될까 두려웠다.

 

* 베트남에의 군사개입을 앞장서서 촉구했던 사람들이 바로 민간인들이었습니다.

 

* 미국의 방위산업체와 뉴욕 금융계 주요 집단이 미 정부로 하여금 국내의 엇갈린 반응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는 군사적 합리화를 내세워 전쟁을 벌이도록 부추겼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 냉전은 이중적 기능을 담당했다. 첫째, 미국을 비롯한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내에서의 기능인데, 노동에 대한 자본과 국가의 안정된 지배의 확립을 담보하는 데 일조함으로써 순조로운 축적활동 보장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제로서의 기능을 했다. 둘째, 미국의 탈식민화정책에 따라 대거 등장한 신생독립국의 민족해방 열기를 잠재우고 그들을 계속 중심-주변이라는 세계자본주의 계서제(hierarchy) 속에 묶어두는 데도 일조했다(Hopkins et al., 1996).

 

당시의 관련된 연표도 정리해 보았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mhistory3.jsp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전쟁을 벌이고 폭격을 했던 나라들의 목록을 보자:

중국(1945-46, 1950-53) 한국(1950-1953), 과테말라(1954, 1967-69), 인도네시아(1958), 쿠바(1959-60), 벨기에령 콩고(1964), 페루(1965), 라오스(1964-73), 베트남(1961-73), 캄보디아(1969-70), 그레나다(1983), 리비아(1986), 엘살바도르(1980년대), 니카라과(1980년대), 파나마(1989), 이라크(1991-99), 보스니아(1995), 수단(1998), 유고슬라비아(1999), 아프카니스탄(2001), 2차 이라크 침공(2003-2011) ……

 

그런데 캐롤 퀴글리의 ‘비극과 희망Tragedy and Hope’이란 책에서는 매카시즘으로 유명한 미국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가 1950년 9월 23일 대중 집회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단다.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스탈린은 한국에서 전쟁을 일으키기로 계획을 세웠을 뿐  아니라, 그후 베트남에서도 비슷한 전쟁을 일으키기로 합의했다.”

“Here was signed the death warrant of the young men who were dying today in the hills and valleys of Korea. Here was signed the death warrant of the young men who will die tomorrow in the jungles of Indochina (Vietnam).”

 

※ 관련글

– 미국체제 위기 (1968년 ~ 1973년) : http://yellow.kr/blog/?p=582

– 자본주의 황금기 (1950년 ~ 1973년) : http://yellow.kr/blog/?p=984

 

도올 김용옥 – 해방 후 한국현대사 동아시아 30년 전쟁

6·25전쟁은 스탈린이 모택동 잡으려고 일으킨 것

 


환호속의 경종

– 유용태 / 휴머니스트 / 2006.09.18

 

30년 베트남전쟁을 베트남 근현대사의 맥락에서 파악하되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현대사, 특히 냉전체제가 형성되고 변화 · 붕괴되는 과정에서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베트남전쟁은 냉전의 개시와 함께 시작되어 프랑스를 대신해 미국이 그 전쟁에 전면 개입하면서 신생 중국의 대외위기를 증폭시켜 30만 명이 넘는 중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초래하였다. 이렇게 조성된 중국의 국가 위기는 문화대혁명을 촉발하는 국제적 요인이 되었고 이 전쟁의 종식과 더불어 문화대혁명도 종결되었다. 따라서 문화대혁명의 종결과 베트남전쟁의 종결이 있고서야 비로소 중국의 개혁 · 개방이 나올 수 있었다. 북한은 북한대로 남한의 파병에 맞서 중국 · 북한 · 베트남의 ‘북방 3각 동맹’ 속에서 대처하였고, 일본도 직접 파병한 것은 아니지만 한일수교를 통해 미국 · 남한 · 일본의 ‘남방 3각 동맹’을 형성하고 미일동맹 체제에 의거해 오키나와 미군기지 등을 통해 간접 지원함으로써 무시할 수 없는 역활을 분담하였다. 그런 만큼 이 전쟁을 미 · 베트남 간의 문제를 넘는 ‘동아시아의 베트남전쟁’으로 파악할 이유는 충분한 것이다.

……

중국은 대약진운동이 초래한 혼란의 여파가 지속되는 동안은 대외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매우 조심스러웠는데, 그 혼란에서 벗어난 1963년을 지나면서는 보다 대담하게 베트남전쟁에 베트남전쟁에 임하는 변화를 보였다. 이는 미국의 전략촌에 대한 남민전의 성공적인 공격, 중국 국내 경제의 회복과 핵무기 실험의 중대한 진전, 핵실험 금지조약과 국경 문제를 둘러싼 중·소 대립의 격화 등을 배경으로 일어난 변화였다. 특히 소련이 1963년 6월 미국·영국과 핵실험 금지조약을 조인해 핵을 독점하면서 중국의 국방을 소련의 핵우산 아래 예속시키려 한다고 우려한 중국은 미국의 전략과 베트남 정세를 면밀히 고찰하던 중 7월, 미군이 17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중국은 지상군을 투입해 참전하되 중국은 북베트남의 방어를 담당하고 베트남인민군은 남부로 들어가 작전하기로 하노이 정부와 합의하였다.

……

베트남전쟁은 베트남인의 민족해방전쟁인 동시에 동아시아 지배권을 둘러싼 미일동맹과 중국의 대결이기도 하였다. 이 전쟁과정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한 중국의 동기와 역활은 무엇인지 전통적 중화질서의 역사적 맥락도 고려하면서 살펴보았다. 남부 해방의 주체는 남부 인민 자신이고 통일의 주체는 남북 전체 인민이지만, 그들의 대의가 아무리 정당해도 중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독자적인 역량만으로는 그 시점에 해방과 통일을 완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중국의 지원은 일차적으로 베트남을 발판으로 북진하려는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방위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베트남의 통일에 대해서는소극적이었다. 반면 베트남인에게는 해방과 통일이 한 가지로 급선무였기에 그들은 소규모 게릴라에 의한 지구전을 선호하는 중국의 전략에 대해 일단 북부를 자국 방위의 완충지대로 삼아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하였다. 이것이 중 · 소 대립이 격화되고 미 · 중 접근이 진전됨에 따라 양국 관계가 급속히 균열로 치닫게 된 근본 원인이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동맹을 통해 장기 저항전쟁을 치러내면서도 중국의 지원에 따라 수반될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장을 늘 경계하였다. 중국은 베트남의 항프 · 항미 전쟁에 경제 ·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32만 명의 대군을 파병하여 직접 지원하였지만, 자국의 반소 노선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면서 당장 군대를 철수하겠다는 위협도 불사하였으며, 제네바협정에서도 자국의 안전을 고려해 결과적으로 베트남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양보를 강요하였으니 베트남에게는 은혜와 원한을 함께 준 셈이다. 그와 같은 긴장 속의 동맹을 유지시켜 민족해방을 달성한 것은 ‘반은 레닌이고 반은 간디’라는 평을 받는 호치민의 현실주의적 영도가 그 혹독한 냉전의 국제질서를 직시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호치민은 중국을 ‘형제이자 동지’라고 불렀지만 중국 · 베트남 관계에 있어 각기 자국의 국가형성과 국가방위는 어떤 이념적 의무감보다도 우선하였다.

그런 관계 속에서 전쟁이 중국 본토로까지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는 미 · 중 간의 묵계를 바탕으로 전쟁의 국지화가 전제되었기 때문에 이 두 대국은 핵무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총동원하여 마음 놓고 전쟁에 임하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베트남인에게 돌아갔다. 대국들의 잔치인 제네바협정이 베트남을 냉전의 볼모로 삼았던 것의 연장인 셈이다. 베트남전쟁에서 사용된 폭탄이 2차 대전 때 사용된 양의 3배에 육박할 정도로 많았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것이 냉전 시기 국지전쟁의 특징인데, 냉전이란 유럽에서의 상태였을 뿐 동아시아의 열전은 이렇게 가혹하였고 이 둘이 짝을 이루어서야 비로서 냉전은 하나의 세계적인 체제로서 작동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쟁배상이 미국에 의해 남베트남과 남한의 반공 역량 강화 전략으로 연결되어 타결되고 한·미·일 남방 3각 동맹 속에 한국의 파병 참전이 이루어졌는데, 그사이 북한은 이에 맞서 북방 3각 동맹의 일원이 되어 1.21사태로 상징되는 특수부대 남파의 간접 참전으로 대응한 결과 베트남전쟁은 한반도에서까지 확장되는 형세를 보였다. 그에 따라 남북한 사회의 병영화와 박정희 · 김일성 1인체제의 강화가 진행되었다. 베트남전쟁 참전으로 조성된 대외위기를 문화대혁명 발동의 자극제로 삼은 중국과 그에 맞서 본토 수복을 외치며 계엄 상태를 지속한 타이완에서도 똑같은 이치로 사회의 병영화와 마오쩌둥 · 장제스 1인체제가 강화되고 지속되었다. 그러니 30년 베트남전쟁은 중국과 타이완, 남한과 북한에 사실상 각기 내전의 연장이기도 한 준전시(準戰時) 체제를 지속시켰던 것이다.

교과서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공인된 역사인식을 담고 있다면, 그것을 통해 동아시아 각국의 베트남전쟁 인식을 엿볼 수 있을 터이다. 각국 교과서가 대부분 베트남전쟁을 한국전쟁과 나란히 냉전체제의 형성과정 속에서 다루고 있으나, 두 전쟁을 기본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전쟁인 것처럼 제시하였다. 국제정치적 관계에서 미국과 중국 중심으로 보면 두 전쟁 모두 동일한 ‘반공전쟁’이거나 ‘항미전쟁’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미·소 군정의 치하에서 여운형의 인민공화국도 김구의 임시정부도 부인되어 제 역활을 수행하지 못한 채 남북이 따로 분단정부를 수립한 후 서로 무력통일을 호언하던 중 북의 공격으로 시작된 내전이었던 반면, 베트남전쟁은 외세의 지원 없이 민족운동의 정통성 있는 좌우합작의 연합정부로 수립된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이를 부인하고 베트남을 재식민화하려는 외세에 맞서 민족운동을 계속한 민족해방전쟁이었다. 그에 대응하여 미국이 UN군을 결성할 수 없었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지연문명

–  르우안웨이 / 최형록,김혜준 역 / 심산 / 2011.05.10

 

냉전은 마침내 종식되었다. 냉전이 끝날 수 있었던 것은 근시안적인 지연 정치학자들이 상상한 것처럼, 중국이 유라시아 대륙의 지연 전략 지역의 일부분에 속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중국은 독자적인 지연 정치적 역량임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그 자체가 바로 하나의 중요한 문명 중심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냉전 기간에 규모가 아주 큰 열전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바로 1950년대 한국전쟁과 1960~1970년대의 베트남전쟁이다. 당시 중국은 소련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력이 일으킨 전쟁의 화염이 자기 집 대문을 태우려고 하는 상황에서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가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중국은 대량의 군사 물자와 인원으로 베트남전쟁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력을 이겼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비겼다고는 볼 수 있다.

만약 한국전쟁 기간에 중국이 아직 완전히 소련의 구속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니었고, 또한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면모로 세계에 출현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1960년대 초 발생한 중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 대논쟁과 이로 인해 발생한 중국과 소련의 분열 및 무력 충돌은 중국이 잠시 맡았던 [소련에 대한] 종속적인 역활이 끝났음을 시사한다(물론 이 이전에 중국과 소련 양국 및 다른 국가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강철대오 같은 사회주의 진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또한 이는 중국이 서양과 소련의 양대 집단 이외의 제3의 지연 정치 역량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역사적으로 늘 그랬던 것처럼 중국은 미국 · 유럽 · 소련 외 제3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백년의 급진

– 원톄쥔 / 김진공 역 / 돌베개 / 2013.10.07

 

1960년대에 이르러 왜 제2차 위기가 발생했는가? 1960년에 처음 위기에 직면했을 때부터, 서방세계 전체가 중국 봉쇄를 시도했을 뿐 아니라, 공격을 가하려고 준비를 했다. 심지어 중국을 겨냥해 핵공격을 준비한 사례도 다섯 차례나 있었다. 중국이 아무리 가난해도 핵무기를 보유하려고 한 이유는, 이렇게 여러 차례에 걸쳐 핵 위협을 당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내내 미국은 비행기와 군함으로 800여 차례나 중국의 영해와 영공을 침범했다.

 


촘스키 실패한 국가 미국을 말하다

–  노암 촘스키 / 강주헌 역 / 황금나침반 / 2006.02.15

 

미국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공격한 진짜 이유는 진부한 것이었다. 워싱턴은 베트남이 독립하면 주변 국가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가 될까 두려웠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인도네시아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일본까지 독립한다면 이미 독립한 아시아 본토와 발맞추어 가면서 산업 중심지로 발돋움할 가능성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시아 역사학자 존 다우어(John Dower)의 표현대로 ‘슈퍼 도미노’였고, 일본이 1930년대에 정복을 통해 꿈꾸었던 신질서(New Order)가 구축되는 셈이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얻은 태평양 지배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외교 기록을 살펴보면,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 자유롭게 접근할 권리만 보장 받는다면 일본의 신질서를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워싱턴은 야심을 더욱 키우면서, 케넌의 표현을 빌리면, 일본에 ‘남쪽으로 뻗은 일종의 제국’을 제공할 작정이었다. 물론 미국이 지배하는 전반적인 구도 내에서!  케넌의 참모들이 개략적으로 말했듯이, 그 지역의 다른 역활은 영국에 옛 식민지의 자원에 접근할 기회를 보장하면서 ‘삼각무역’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삼각무역 구도는 전후 유럽의 재건을 위한 토대였고, 미국 기업에 새로운 시장과 투자 기회를 제공하는 토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베트남이란 바이러스가 억제되지 않는다면, 그런 계획 자체가 와해될 수 있었다.

어떤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그 바이러스를 박멸하고, 감염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예방접종을 하는 것이다. 이번 경우에는 인도차이나를 초토화시켜 바이러스를 박멸하는 동시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는 나라에는 군부 독재 정권을 세워서 예방 접종을 실시했다. 인도네시아는 1965년의 ‘망연자실케 하는 대량 학살’로 보호되었다. <뉴욕 타임스>가 환희에 들뜬 목소리로 보도했듯이, 그런 학살은 ‘아시아에 내린 한 줄기 빛’이었다. 땅을 갖지 못한 농부가 대부분이었던 수십 만의 양민 학살, 대중에 기반을 둔 유일한 정당이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와해에 유럽은 행복에 겨운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CIA가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의 범죄에 비교했던 유럽의 착취를 위해 인도네시아는 대문을 활짝 열어야 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의 기본 논리는 케네디와 존스의 안보 보좌관 맥조지 번디(McGeorge Bundy)의 입을 통해 분명히 밝혀졌다. 번디는 당시를 회고하며, 베트남에 쏟아 부은 미국의 ‘노력’은 1965년 이후로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았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가 안전하게 접종을 끝낸 때였기 때문에 전쟁의 기본 목표는 성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60년대 말, 미국의 기업계도 전쟁의 연장이 무의미한 짓이라 깨달았다. 그때쯤에는 전쟁이 미국 경제에 부담을 주기 시작했다. 국민의 호응을 얻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워싱턴이 국가 동원령을 내려 경제계에 큰 이익을 안겨 주었지만, 이번에는 반전 운동이 확산되면서 워싱턴도 많은 비용을 요구하는 ‘총과 버터’ 정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엘리트 계급의 의견과 정부 정책도 변했다.

정치계의 전반적 의견에 따르면 결과는 ‘미국의 패배’였다. 목표를 최대치에 둔다면 인도차이나 전쟁은 미국이 패한 전쟁이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위성국을 심지 못했을뿐 아니라 미국의 신뢰도 어느 정도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기본 목표는 충분히 달성한 전쟁이었다. 폭력 수단의 엄청난 차이를 감안한다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지만 말이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  노암 촘스키, 베로니카 자라쇼비치, 드니 로베르 / 강주헌 역 / 시대의 창 / 2002.11.18

 

『조작된 동의』에서 선생님은 언론의 글 쓰기가 전체를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글을 해독해내면 글의 방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언론 보도에는 비밀이 감춰져 있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그렇습니다. 아주 중요한 점을 지적했습니다.

가령 “미국이 남베트남을 보호한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가”라는 주제로 미국이나 유럽에서 토론회가 열린다면, 미국이 남베트남을 보호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아프카니스탄을 보호한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갖는다면 주제 자체가 잘못 선정된 것이라고 항의합니다. 달리 말하면 러시아는 아프카니스탄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미국도 침략자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그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남베트남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남베트남을 보호한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냐는 식의 토론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나는 40년 동안 미국 언론의 보도방향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케네디가 남베트남을 공격했다고 지적한 언론 보도는 단 한 건밖에 없었습니다.

……

미국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베트남인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냐고 물으면, 대개가 10만 명쯤 죽었을 것이라 대답합니다. 만약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로 30만 명 가량의 유태인이 희생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모두가 독일에 문제가 있다고 중얼대면서 선전공작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이 화제로 오르면 희생자의 수는 관심의 대상도 아닙니다.

……

 

그런데 선생님은 최근의 군사개입을 부추긴 주역이 민간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던가요?

대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입니다. 군사 작전이 필요할 때도 군사령부는 대체로 주저하면서 망설입니다. 이런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면서, 베트남에의 군사개입을 앞장서서 촉구했던 사람들이 바로 민간인들이었습니다. 해병대 사령관, 데이비드 슈프(David Shoup) 장군이 미국의 정책을 격렬히 비난하면서, “우리는 달러를 가득 쥔 더러운 손으로 그들의 문제까지 간섭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을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때로는 민간인이 군부보다 더 호전적입니다.

 


테러리즘의 문화

–  노암 촘스키 / 홍건영 역 / 이룸(김현주) / 2002.11.30

 

엘리트들의 “우경화”는 1970년대 초부터 상당 부분 베트남전쟁에서 야기된 문제들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다. 이 문제들은 크게 경제문제와 규율문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경제적인 문제는 전쟁으로 미국이 많은 손실을 본 반면 미국의 산업경쟁국들은 덕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가령 캐나다는 일인당 최다 군수품 수출국이 되었으며, 인도차이나의 파괴 덕택에 – 미국의 야만성을 유감스럽게 여기면서- 부유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일본이다. 일본 경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실제로 아주 순탄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전쟁에서 미국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역활을 맡게 되면서 부터다. 케네디 정부는 일본 경제의 생존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 힘을 기울였지만, 베트남전쟁이 끝났을 때부터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65년 일본과 미국 간의 무역수지는 일본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에는 그 정도가 심각해졌다. 유럽도 1950년대 후반부터는 무역수지에서 미국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있게 됐다. 미국 국력의 상대적 쇠퇴가 두드러졌으며, 베트남전의 결과는 엘리트들의 여론을 들쑤셔놓았다. 한국의 “비상” 또한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는데, 1965년 1월부터 “남베트남을 방어”할 목적으로 투입된 한국 용병 삼십만 명이 베트남 주민에 행한 테러에 대한 보수를 포함하여 한국 외화수입의 약 20%를 베트남전쟁에서 벌어 들였다.

이런 사정으로 정부는 미국 경제의 수익성과 파워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 모색에 착수해야 했다. 닉슨은 달러화에 대한 태환을 중지시키고, 국제관행을 무시하면서 수입에 대해 10%의 추징세금을 부과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금융계와 산업계의 일부 집단 사이에서는 인기가 없었지만, 노동조합과 사회 프로그램에 대한 공격, 펜타곤 체제를 통한 선진 산업부문에 대한 공적 보조, 그 밖에 레이건 행정부가 “우경화”되면서 시작된 여타의 프로그램과 같은 국내적 조치들은 엘리트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장기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마셜 플랜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서유럽을 미국 이미지에 따라 재형성하기 시작하였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세계무역과 생산 팽창의 “이륙”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 말 전체에 걸쳐 계속되는 달러 부족 때문에, 유럽에서 미국의 기반을 강화한다는 그 목표 자체는 심각하게 방해받았다. 국제수지의 어려움이 민족들의 시기심을 부추켜, 일반적으로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내의, 그리고 특수하게는 유럽 국가 간 화폐 협력의 진전을 가로막았다(Bullock 1983: 532~41, 659~61, 705~9, 720~3).

유럽 통합과 세계경제 팽창을 위해서는 마셜 플랜이나 다른 원조 계획에 연관된 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으로 세계 유동성을 재순환시켜야 했다. 결국 이런 더욱 포괄적 재순환을 실현시킨 것은 세계역사상 평화시에 가장 대대적으로 무장을 추진하려 한 노력이었다. 그 입안자인 국무부 장관 애치슨과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폴 니츠는 이런 노력이 있어야만 마셜 플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치슨과 니츠는] 유럽 통합도 통화 재동맹도 마셜 플랜 종료 이후 상당한 수출 잉여를 유지하거나 미국-유럽 경제 유대를 지속시키는 데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들이 제안한 새로운 정책 노선-미국과 유럽의 대대적인 재무장-은 미국 경제 정책의 주요 문제에 대해 뛰어난 해결책을 제공했다. 국내 재무장은 수요를 지탱해 주는 새로운 수단을 제공하여, 국내경제가 더 이상 해외 잉여 유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유럽에 대한 군사원조는 마셜 플랜 만료 후 유럽에 대해 계속 원조를 제공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 군사력을 긴밀하게 통합하면 하나의 경제 지역으로서 유럽이 미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 줄 것이다.(Block 1977 : 103~4)

이런 새로운 정책 노선이 1950년 초 국가안전보장위원회에 제안되었고, 4월에 트루먼 대통령은 그 입장을 보여 주는 보고서(NSC-68)를 검토하여 원칙적으로 승인하였다. 이 문서는 관련 비용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참모들이 추계한 것은 연 지출 기준으로 1950년 국방부가 처음 요구한 총액의 세 배에 이르렀다.

 

반공주의라는 명목을 내걸더라도, 재정적으로 보수적인 의회에서 어떻게 그런 돈을 타낼 수 있는가는 행정부에게 작지 않은 고민거리였다. 무언가 국제적인 긴급사태가 필요했고, 1949년 11월부터 애치슨 장관은 조만간 1950년에 아시아 주변지역에서 그런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는데, 그 지역은 한국, 베트남, 타이완 중 하나 또는 그 셋 모두였다. 대통령이 NSC-68을 검토한 두 달 후 위기가 발발했다. 애치슨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와서 우리를 구원해 주었다.”(McComick 1989 : 98)

한국전쟁 중, 그리고 그 후의 대대적인 재무장이 전후 세계경제의 유동성 문제를 영구히 해결해 주었다. 외국 정부에 대한 군사원조와 해외에서 미국의 군사비 직접 지출- 둘 다 1950년에서 1958년 사이와 또다시 1964년에서 1973년 사이에 꾸준히 늘어났다 -이 세계경제 팽창에 필요한 모든 유동성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매우 관대한 세계 중앙은행으로 작동하는 미국 정부와 더불어 세계무역과 생산은 전례 없는 속도로 팽창했다(cf. Calleo 1970:86~7 ; Gilpin : 133~4).

매코믹에 따르면(Thomas J. McCormick), 한국전쟁에서 출발해 베트남전쟁을 종식시킨 1973년 초 파리 평화조약에 이르기까지의 23년은 “세계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수익성 있는 경제성장의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는 다른 누구보다 스티븐 마그린과 줄리엣 쇼가 “자본주의 황금기”라고 부른 시기이다(Magrlin and Schor 1991).

……

미국체제의 위기가 도래했음을 알린 것은 1968년과 1973년 사이 서로 구분되면서도 밀접하게 연관된 세 개의 영역이었다. 군사적으로, 미국은 베트남에서 훨씬 더 심각한 곤경에 처했다. 금융적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브레턴우즈에서 수립된 세계화폐의 생산 및 조절 양식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나아가 그 유지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미국 정부의 반공십자군은 국내와 해외 모두에게 정당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위기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1973년에는 모든 전선에서 미국 정부가 퇴각하였다.

……

1970년대에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베트남전쟁이 세계역사상 가장 고가의, 기술적으로 선진적이고, 파괴적인 군사장치가 지구상 가장 빈곤한 인민 중 하나의 의지를 막는 데 무력하다는 것을 드러낸 후, 자유세계의 경찰로서 미국 정부의 신뢰성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 상당 부분이 일시적으로 상실되었다. 그 결과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소련 및 그 동맹국들과 공개적 또는 암묵적으로 결탁한 국지적 세력들이 즉각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유럽 식민주의의 마지막 잔재를 털어 내고 민족해방과정을 완수하는 것(아프리카의 포르투갈 식민지와 짐바브웨처럼), 인근 지역에 대한 정치적 공간을 재편하려고 서로 간의 전쟁을 일으키는 것(동아프리카, 남아시아, 인도차이나처럼), 그리고 미국의 피후견 국가를 권력에서 몰아내는 것(니카라과와 이란처럼) 등이 그것이었다. 소련의 지배집단들은 그들이 만들어 내거나 통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문에 냉전 질서의 지명된 적대자로서의 위신과 권력이 드높아진, 이런 교란의 상승 파도에 올라타고서는, 기저에 놓인 권력 형세를 보지 못하고서 그들보다 더 강력한 미군이 베트남에서 달성 못한 것을 달성하겠다고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파견했다.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윌리엄 엥달 / 서미석 역 / 길 / 2007.10.25

 

비극적인 베트남 전쟁 이후 그 전쟁의 이유와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책들이 쓰여졌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는, 미국의 방위산업체와 뉴욕 금융계 주요 집단이 미 정부로 하여금 국내의 엇갈린 반응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는 군사적 합리화를 내세워 전쟁을 부추겼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군비 증강은 그들의 이해관계에다 미국 산업을 대대적으로 방산품 생산으로 전환해 소생시킨다는 정치적으로 그럴듯한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미국 경제의 핵심은 점점 더 일종의 군사경제로 변형되고 있었고, 이러한 경제에서는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지출을 정당화하는 데 공산주의자들의 위험에 맞서는 냉전이 이용되었다. 군사 지출은 뉴욕 금융 및 석유 대기업들의 전 세계적 경제 이해관계를 위한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 이는 20세기 반공주의라는 허울을 쓴 19세기 대영제국의 또 다른 모방이었다.

경제의 이러한 방위 요소를 장기적으로 증강하기 위해 맥나마라 국방장관, 번디 국가안보특별보좌관은 국방부 정책 기획자들 및 존슨 대통령의 핵심 보좌관들과 함께 처음부터 ‘승산 없는 전쟁’이 되게끔 베트남 전쟁 전략을 신중하게 입안해냈다. 워싱턴은 불어나는 미국의 예산 적자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으로 방위산업체의 국내 일자리가 창출된다면 미국의 유권자들이 베트남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사악한 공산주의의 잠식’에 대항하는 막대한 전쟁 비용을 기꺼이 용인할 것으로 판단했다.

 


살육과 문명

– 빅터 데이비스 / 남경태 역 / 푸른숲 / 2002.09.30

 

하지만 미군은 벌써 10년 가까이 명확한 전선도 없고 전방과 후방의 개념조차 없이 재래식 전쟁이 어울리지 않는 지형에서 재래식 전쟁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전반적인 전략은, 소련이나 중국과의 간접적이거나 우연적인 충돌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면서 아시아에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지만, 전략의 변화가 도마 위에 오를 때마다 수많은 모순과 역설이 생겨나 정책 입안자들을 괴롭혔다. 일반적으로 항구에 기뢰를 설치하거나 – 이것은 1972년까지 금지되었다 – 하노이와 하이퐁의 중요 정부 시설들을 파괴하는 정책은 공산 진영의 수출업자나 자문단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채택하기를 꺼렸다. 북베트남을 직접 침략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금지되었다. 군수품 하역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도시의 발전소와 병참소도 한동안 손대지 않았다. 적의 병참기지와 대피소가 많이 있는 캄보디아, 타이, 라오스에 무력으로 들어가는 것도 전쟁 기간 내내 금지되었다. 따라서 미군의 전략은 도시와 촌락에서 베트콩을 제거하기 위해 적극적인 반게릴라전을 전개하기보다 오로지 공군력과 야포 사격으로 일관하면서 방어 기지를 강화하는 것뿐이었다.

묘한 일은, 모호하고 근거 없는 판단에 따라 전쟁을 억제하려 노력하면서도 미국 행정부는 정작 전장에서의 학살을 거의 10년 동안이나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든게 뒤죽박죽인 베트남에서는, 정글을 무차별 폭격하는 것은 허용된 군사 행동인데 비해, 하노이의 공장과 조선소를 정확히 조준하여 폭격하는 것은 비인도적인 일로 취급되었다. 수많은 미군들이 목숨을 잃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전후 하노이를 방문한 사람들은, 미군이 엄청난 폭격을 퍼붓고 거리의 민간인들을 무수하게 죽였다는 반전 운동가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거의 폭격을 당하지 않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

1965년 무렵 미국은 더 폭넓은 개입에 대한 우려와 핵무기가 사용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북베트남 해역에서 소련의 선박들을 건드리지 않았고 국경 너머까지 전투기로 추격하지도 않았다. 또한 하노이를 위협하다가 소련이나 중국이 체제 수호를 위해 직접 개입하게 되는 상황을 빚지 않도록 조심했다. 존슨 행정부는 차라리 미군 병사들을 전장에서 공개적으로 죽게 놔둘지언정 중국과 소련의 자원군에게 남모르게 죽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믿었다. 게다가 한국 전쟁에서는 미국의 공군이 북한의 상공을 지배했지만, 1972년 베트남에서는 더 앞선 소련과 중국의 방공망 – 8천 대의 대공포, 250개의 지대공 미사일 포대, 200~300대의 현대식 제트 전투기, 수천 명의 외국인 자문단 – 이 있었으므로 미군 조종사들이 지속적인 폭격 작전을 펼치려 한다면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또한 베트남의 지형은 한국보다 삼림이 훨씬 빽빽하기 때문에 적의 병력을 정확히 찾아 폭격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남베트남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남한의 대통령 이승만은 국내의 지지를 상당히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그는 북한을 중국 스탈린주의자들의 꼭두각시라고 규정하면서 자신이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처럼 가장할 수 있었다. 이는 호치민이 베트남에서 한 것과 마찬가지다. 호치민은 베트남 국민들에게, 미국이 전에 베트남을 지배했던 일본과 프랑스로 이어지는 제국주의 계보의 막내에 해당한다면서 결국 그들처럼 베트남에서 버티지 못하고 쫓겨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전쟁에서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의 물결이 일본에까지 미치는 것을 자신들이 저지했다고 믿었다. 그와 달리 베트남을 잃는다고 해서 공산 진영의 영향권이 동남아시아까지 파급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실 미국의 시민들과 병사들은 동남아시아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1964년의 미국인들은 2차대전의 종전 직후이자 냉전 초기였던 1950년대의 미국인들과는 또 달랐다. 그들은 전보다 더욱 풍요를 누렸고, 개혁적인 자세를 견지했으며, 20년에 걸쳐 큰 희생을 치러가며 공산 진영의 세계적 진출을 저지하는 일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국 전쟁에서 미국은 실제로 단결된 공산 진영의 위협을 받았으나 1965년의 미국인들은 생각이 달랐다. 비록 소박한 관점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중국과 러시아는 준(準)적일 뿐이며, 베트남은 중국과 전통적인 앙숙이었다. 또한 캄보디아, 라오스, 타이의 공산주의자들은 서로 굳게 단결하지 못했고, 오히려 자기들끼리, 또 베트남에 대한 오랜 반목의 역사를 지녀왔다. 그러므로 미국은 동맹국이나 자국의 국민들에게 공산주의가 베트남에 진출하면 유럽이나 아메리카도 위험해진다고 설득할 수 없었다.

베트남 공산주의는 비록 혐오스러워 보이지만 미국의 국가 안보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 만약 베트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고 아프리카나 서아시아에 있었다면, 공산 세력이 프랑스 식민 체제나 토착 반공 세력으로부터 베트남을 빼앗았다 해도 그저 스쳐지나가는 관심거리에 불과했을 것이다.(D. 오버도퍼, 《테트!》, 334쪽)

만약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결정적이고 신속한 승리를 거두었더라면 그러한 사항들이 논의되었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군대만이 전쟁을 수행하고, 수백만의 미국인들은 분노에 차서 자국 군대와 정치 지도자들을 무지하고 무능하게만 바라보는 상황에서 승리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다크 플랜

–  짐 마스 / 전미영 역 / 이른아침 / 2009.03.31

 

베트남전쟁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맺어진 얄타 비밀협정에서 시작되었다. 전후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할 지역’으로 결정된 곳은 태평양과 동남아시아였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적대 관계가 끝나자, 프랑스는 재빨리 프렌치 인도차이나(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3국)에 대한 군사적 통제를 재개했고, 이에 따라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

1945년에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자, 호치민과 보 구엔 지압 장군은 점령군을 격퇴하기 위해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항복하고 베트남에서 철수한 뒤에도 호치민은 계속해서 미국의 원조를 받았다. 언론인 로이드 시어러는 “우리는 그를 신뢰했고, 정기적으로 무기와 무선 장비, 장비 기사 및 약품을 공급했다.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지위와 신분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은 호치민이 독립 베트남 창설을 의도하고 있으며, 이는 그의 배후에 있는 미국인들의 이 지역 입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드골은 1945년 10월에 프랑스 군대를 사이공으로 진격시켰다. 베트남을 프랑스 소유로 만들기 위해 드골은 바오 다이(마지막 황제)를 다시 권좌에 돌려놓겠다는 약속까지 했으나 호치민은 독립 이외에는 무엇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수년간의 전투 끝에 유능한 지압 장군이 이끄는 호치민의 군대가 베트남 대부분 지역에 지배력을 갖게 되었으며,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마침내 철수했다.

……

남베트남의 미국에 대한 의존이 심화되는 동안 공산주의 북베트남은 러시아와 중국의 원조를 받았다. 세력 균형이 공고화되면서 전쟁을 위한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세계화주의자들과 맞선 JFK

1963년 무렵 동남아시아에서의 전쟁 확대에 있어 최대 걸림돌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그는 이미 미국의 개입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표명한 상태였다.

민주당원인 존 F. 케네디는 1960년 선거에서 아이젠하워 정부 부통령이었던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후보를 꺾었다. 그러나 특별자문이었던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우리는 케네디 선거 진영에서 일했으므로 정부 안에서 인정받고 발언권도 있었지만, 외교 정책은 여전히 CFR(미국 외교협회) 인사들의 수중에 있었다”고 밝혔다. CFR 회원들이 정부에 워낙 많았기 때문에 케네디 대통령도 그 문제에 관심을 표시했다. 그는 “새로운 인물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

CFR은 처음부터 베트남 문제를 우려하고 있었다. 1951년, CFR은 영국의 왕립국제문제연구소와 함께 록펠러 재단의 기금을 받아 동남아시아 문제를 연구하는 학술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얄타협정에 따라 미국과 영국이 이 지역에서 공동으로 패권을 행사할 것을 권고했다. 아이젠하워 시절, CFR 창립자인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부 장관이 형제인 앨런 덜레스 CIA 국장과 함께 이 모임에서 권고받은 정책을 관장했고, 프랑스의 패배에 뒤이어 미국의 군사자문단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디엔비엔푸가 함락된 지 불과 4개월 뒤에 덜레스 국무부 장관은 마닐라 회의를 소집해서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출범시켰다. 조약의 내용은 미국과 영연방(호주와 뉴질랜드 포함), 프랑스, 필리핀 등을 인도차이나에서 상호 방위 체제로 묶는 것이었다.

……

케네디가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중단하려 했다는 증거가 아주 많이 있지만 누구도 그 문제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울린 총성이 그의 대통령직에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JFK의 암살에 관한 정황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존슨 대통령과 키신저

케네디의 뒤를 이은 텍사스주 출신 린든 존슨은 합동참모본부와 CFR 회원들의 요구에 좀더 귀를 기울였다. 존슨은 하원 군사위원회와 상원 원내총무를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

1963년 12월 2일, 대통령직에 취임한 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백악관의 존슨은 맥스웰 테일러(CFR 회원) 장군에게 메모를 보냈다. 1998년에야 대중에 공개된 이 메모에서 존슨은 “문제를 들여다 보면 볼수록 남베트남이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군사 지역이라는 점이 점점 더 명확하게 느껴진다. 장군 및 합동참모본부의 동료들이 가장 유능한 장교들을 폴 하킨스 장군에게 배치해 전적으로 그의 지휘를 받게 하길 바란다. 이 일에는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을 배치해야 할 것이다”라고 지시했다.

……

로즈와 밀너의 비밀 조직 성향과 관련이 있는 록펠러 및 모건 사람들이 만든 CFR 회원들을 보면 베트남전 시기의 인명록이 연상된다. 맥나마라, 사이러스 밴스, 월트 로스토우, 윌리엄 번디와 맥조지 번디, 딘 애치슨, 딘 러스크, 애버럴 해리먼이 바로 그들이다. 전쟁 기간 중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헨리 로지, 맥스웰 테일러, 엘즈워스 번커 역시 전원이 CFR 회원들로 미국 정책을 좌우했다. 저술가 도널드 깁슨은 이와 관련, “정부 안팎에서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지지한 중요 인사들은 CFR의 이사회 성원들이었다”고 지적했다. 앨런 덜레스, 데이비드 록펠러, 존 맥클로이, 헨리 리스턴(모건의 동료)이 여기에 포함된다.

……

저술가월터 아이작슨과 이반 토머스가 지적한 것처럼, 린든 존슨 대통령은 선발된 14명의 자문단과 거의 매일 만났다. 이 중 12명이 CFR 회원이었다. 전원 은행가와 변호사로 구성된 이들은 한결같이 베트남 개입 확대를 권고했다. 또한 존슨의 핵심 자문 6명인 로버트 로베트(트루먼 행정부의 국방부 장관), 맥클로이, 해리먼, 애치슨, 찰스 볼렌(국무부 자문), 조지 케넌(전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은 모두 CFR 회원이었다. 존슨은 자신의 가까운 친구인 이들을 ‘현자들(Wise Men)’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1968년 무렵, 이들은 갑자기 전쟁 반대로 돌아선다.

존슨은 외교 기득권층의 이런 배신에 강한 충격을 받고 낙담해서 재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텔레비전을 통해 발표했다. 존슨의 자문들이 마음을 바꾼 이유를 묻는 질문에 맥스웰 테일러 장군은 “CFR의 내 친구들은 《뉴욕 타임스》의 구름 속에서 살고 있었다”라고만 답했다. 다시 말해, 자기기만에서 깨어나 베트남 문제로 미국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전쟁은 7년이나 더 계속됐다.

신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전쟁을 이끌게 되면서 CFR 회원이자 삼각위원회 소속인 헨리 키신저가 1969년 초 국가안보자문으로 들어갔다. 그해 말이 되자 키신저는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통제하게 된다. 일부 사람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키신저가 그 자리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닉슨 행정부의 국방부 장관 멜빈 레어드는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통령은 키신저의 친구도 아니었고, 1968년 12월 이전엔 그를 아예 알지도 못했지만 말이다”라고 밝혔다.

……

CFR 회원들은 전쟁의 경제적 필요를 인정했지만, 핵전쟁은 논외라는 점에 동의했기 때문에 이후의 분쟁은 범위가 제한되어야만 했다. 1957년 CFR의 《대외관계》에는 “우리는 제한된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갈등에 손이 묶여 ‘대량보복’을 넘어선 진전을 이룰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제한된 전투에서 겪을 패배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기고문이 실렸다.

군부가 절름발이 상태라면 전투에서 지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다. 1985년 기밀분류가 해제되어 의회 의사록에 게재된 베트남전 당시의 ‘전투 수칙’을 보자. 26쪽에 달하는 전투 수칙에는 합동참모본부가 결정한 전략 목표 대부분에 대한 공습 요청을 반복적으로 거부하기, 베트콩이 먼저 화기를 발사하지 않았을 경우 미군이 발사할 수 없다는 일반 명령, 호치민 루트에서 200야드 이상 벗어난 곳에 있는 차량에 대한 폭격 금지, 북베트남 전투기가 공중에 떠서 명백하게 적대적인 행동을 할 때를 제외한 경우에는 공격 불가, 건설 중인 지대공미사일(SAM) 기지에 대한 접근 불가, 라오스나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도주한 적에 대한 추적 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은 또한 북베트남에 특정 지역은 폭격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보증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북베트남의 대공 포대는 폭격 가능성이 높은 곳에 집중되어 있었고 미군의 피해는 크게 증가했다.

이 같은 제한에 덧붙여 훈련된 장교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북베트남의 하이퐁항을 통해, 아무런 방해 없이 전쟁 물자가 공급되도록 방치했던 것이다. 이 중 80%는 미국의 적국인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

 

 

적과의 거래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북베트남에 물자를 공급하는 공산주의 국가들과 미국의 거래는 실제로 증가했다. 이는 CFR의 또 다른 목표였다.

1961년, 삼각위원회 창립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동유럽을 경제적으로 원조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대외관계》에 기고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1964년에 모스크바를 방문, 그런 거래에 대해 찬성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해 9월 12일자 《시카고 트리뷴》에 따르면 “체이스맨해튼은행 사장인 데이비드 록펠러는 오늘 존슨 대통령을 만나 러시아 지도자 니키타 후루시초프와 면담한 내용을 보고했다. 두 시간에 걸친 만남에서 후루시초프는 ‘미국과 러시아의 교역을 늘려야 한다’면서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장기차관을 연장해 주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록펠러는 전했다.” 록펠러 일가는 1920년대 체이스 은행이 미 · 러 상공회의소 설립에 협력한 것을 계기로 러시아와 이미 오랜 거래 관계를 갖고 있었다.

1966년 10월 13일, 《뉴욕 타임스》는 “동서 교역 촉진을 위해 존슨 대통령이 발의한 법안이 오늘부터 실행되어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으로 향하는 400개 이상의 품목에 대한 수출제한이 철폐된다”고 보도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0월 27일, 이 신문에는 “소비에트 연방과 동맹국들은 지난주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담에서 북베트남에 10억 달러 상당의 물자 및 자금을 원조하기로 합의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1967년, 록펠러 일가는 사이러스 이튼과 손잡고 소비에트 연방에 알루미늄과 고무 공장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성했다. 이튼은 《퍼레이드》지가 “공산주의자의 가장 절친한 자본가 친구”라고 부른 인물이다. 전도사를 지망했던 이튼은 존 D. 록펠러의 설득으로 기업 세계로 들어섰고 이후 리퍼블릭 스틸을 창립했다. 1970년대 50억달러 규모의 카마강 공장을 건설하는 데 자본과 기술을 댄 것은 미국이고, 이는 주로 체이스맨해튼은행을 통해 이루어졌다. 소비에트 연방의 이 공장에서 생산한 많은 대형트럭이 군사용으로 개조돼 사용되었다.

카마강 공장 건설에 필요한 미국의 투자를 승인한 협정에 서명한 사람은 조지 슐츠였다. 그는 레이건 행정부 때 알렉산더 헤이그의 뒤를 이어 국무부 장관을 지냈다. 슐츠는 CFR 이사였으며, 프랫 하우스를 CFR 본부 건물로 기부한 프랫 여사의 친척이다.

미국이 북베트남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이렇게 미국의 물자와 자금은 러시아와 동유럽으로 들어갔고, 이는 다시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데 사용됐다. 이런 황당한 상황을 깨달은, 징병에 민감했던 그 당시의 대학생들이 왜 반전 시위를 시작했는지 지금에 와서 보면 이해할 만하다.

……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오늘날 베트남에서 겪은 경험은 미국의 철저한 패배로 인식될 뿐이다. 이 패배는 대다수 미국인들은 물론, 그곳에서 싸웠던 용감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패배다.

저술가 펄로프는 “베트남전을 둘러싼 신화, 곧 실수로 인한 것이라든지 오만한 침략주의의 결과라든지 하는 그런 신화를 통해 볼 때만 그 전쟁은 미스터리”라고 지적했다. “고의적인 관리 실패라는 관점에서 보면 신비화의 베일이 벗겨진다. 전쟁의 결과는 CFR의 전통적인 목표를 충실하게 완수했다”는 것이다.

 


영화로 보는 20세기 전쟁

–  이성주 / 가람기획 / 2006.03.20

 

베트콩 한 명을 죽이기 위해 미군이 사용한 비용은 평균 얼마였을까? 자그마치 33만 2000달러였다. 포병은 하루 평균 1만 발의 포탄을 정글로 날려보냈고, 소총수들은 M16의 등장으로 소총을 가지고 탄막을 형성하게 된다. 그중 제일 압권은 역시 B-52 폭격기의 폭격일 터인데, 제2차 세계대전 최고의 폭격기라 불리던 B-29 세 대 분량의 폭탄을 싣고 날아 오르던 이 녀석은 약 100톤의 폭탄을 떨어뜨려야 호치민 루트에 있는 베트콩 1명을 죽일 수 있다는 계산서를 뽑게 된다.

이 B-52의 손익계산은 아무리 봐도 밑지는 장사였다. 폭격이 가장 심했던 시기에 B-52는 1년 동안 무려 20억 달러의 폭격비용을 들여 베트콩의 생명줄인 호치민 루트를 폭격했다. 그 결과 약 1,500명을 죽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같은 기간 약 15만 명이 남파되었으니까, 평균 100명당 1명이 전사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북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미군은 연평균 10억달러 정도를 북폭에 쏟아부었는데, 폭격으로 인한 북베트남의 손실은 1억달러 미만이었다. 그 손해마저도 동구권과 중국, 소련의 지원으로 금방 복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베트남이란 나라가 공업국가가 아닌 논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농업국가였다는 점이다. 아무리 논바닥에 폭격을 해도 벼는 다시 자라니까 말이다.

이런 전비 차원의 낭비보다 심각한 것은 병력의 낭비였다.

군사작전에 동원된 미군 병사들 중 최소한 4명 중 3명은 비전투요원이었다. 작전중에도 접시닦이, 요리사, 수선공들이 참여했고, 그 나머지 제대로 된 1명 역시도 제때에 전장에 투입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베트남 전 당시 미군 배치가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약 55만 명이 투입되었으나, 그중 제대로 된 전투병력은 약 5만 5000명 수준이었고, 실제로 FFZ에 투입되거나 매일 전투에 참가하는 인원은 5000명 수준이 고작이었다. 이 엄청난 괴리는 무엇을 뜻하는가? 당시 미군 총 병력의 10%만이 제대로 된 전투병력이란 점을 보면, 미군이 베트남 전에서 질 만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

문제는 베트남 전쟁은 전쟁이라 하기엔 너무도 복잡미묘하게 얽히고 설켜 있었단 것이다. 한 마디로 ‘군인’들에게 너무도 많은 제약을 가했다는 것인데, 정글이란 낯선 환경에서 헤어나오기도 힘에 부친 이 상황에서 정치적인 제약 덕분에 순군사적 활동을 제약받은 미군은 그저 정글에서 부비트랩과 베트콩의 저격병들을 맥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종국에 가서는 명예롭지 않은 퇴각을 결정해야 했다.

왜 그랬을까? 일단은 이 베트남 전쟁의 성격부터가 미국과 공산주의권의 전쟁이란 점에서부터 따져들어가야겠다. 간단히 말해서 베트남 뒤에 소련과 중국이 있었다는 점일 게다.

……

당장 미국이 전쟁에 끼어들자 전쟁은 미국과 공산권과의 본격적인 전쟁분위기로 흘렀다. 당장 북위 17도선 넘어서 폭격을 하려 해도 여러 가지 눈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바로 베트남 위에 붙어 있는 중국이 걸리는 것이었다. 결국 북베트남 전지역을 폭격하려 해도 중국과 인접해 있는 북부지역은 폭격대상에서 제외해야 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만한 문제였다.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호치민 루트’에 대한 용인이었다. 1959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 통로는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경유해 북베트남에서 남베트남으로 물자와 병력을 보급해주는 ‘생명줄’ 그 자체였다.

……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건 미국이 호치민 루트를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웨스티의 주장대로 라오스로 치고들어와 점령했다면, 우리는 실패했을 겁니다.”

베트남 정규군 대령이었던 부에 틴이 미국의 한 인권단체의 초청강연에서 했던 말이다.

그 말 그대로 웨스티는 호치민 루트에 대한 차단을 목적으로 라오스 지역을 경유하는 호치민 루트에 대한 지상군 침공을 주장했지만, 역시 미 행정부의 거부로 공격은 무산되었다. 이미 미 행정부와 중국 · 소련은 비밀리에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중립국으로 남겨놓겠다는 협정을 맺은 상태였기에 웨스티는 어쩔 수 없이 소규모 특공대와 거의 대놓고 B-52를 동원한 대규모 폭격으로 이 호치민 루트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 생명줄을 지키기 위해 북베트남도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호치민 루트에 1만여 문이 넘는 대공포와 6만의 수비병력을 배치해놓고 절대사수를 외쳤다. 미국은 끝끝내 이 호치민 루트를 분쇄하지 못했다.

 


‘펜타곤 대학’ 하버드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2379.html

 

하버드는 ‘펜타곤 대학’이었다. 하버드의 학자들은 미국의 국가정책에 깊숙이 개입했다. 전략정보국(OSS)이 중앙정보국(CIA)으로 전환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연방수사국(FBI)을 포함한 정보기관과 연대하며 미 정부가 필요로 하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생산했다. 하버드 출신의 정치인과 학자는 베트남전쟁의 일등 공신이었다. 하버드의 영웅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해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 대통령 안보보좌관이던 맥조지 번디 등은 초기 베트남전쟁을 확전으로 이끈 장본인들이다. 하버드가 자랑하는 학자들인 헨리 키신저와 새뮤얼 헌팅턴은 대규모 폭격을 명령하거나 그 명분을 제공해 민간인 대량학살을 야기했다.

……

이런 하버드를 움직이는 것은 누구인가. 총장을 포함한 13명(2010년까지 7명)으로 이루어진 제왕적 조직 ‘하버드 법인’이다. 총장은 이사들이 선출하고, 이사는 종신직이다. 회의 내용과 결과를 공개할 의무도 없다. J. P. 모건과 록펠러 가문이 주축인 법인 이사들은 거대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업의 중역들이 대부분이다. 골드만삭스 회장, 빌 클린턴 정부의 재무장관을 거쳐 시티그룹 회장을 지낸 로버트 루빈도 그중 하나다.

 


변환의 세계정치

–  하영선 / 을유문화사 / 2007.08.15

 

냉전은 기본적으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립이지만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중국이 지역 강국으로서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특수성이 존재한다. 스탈린 사후 소련은 주로 유럽에 대외적 관심을 집중했으며, 미국과의 대립관계도 제한적으로나마 점차 완화되었다. 반면 중국은 명실상부한 아시아 국가로서 동아시아 지역의 지도적 공산국가로서 위상을 과시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직접 교전당사국으로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1954년과 1958년 두 차례에 걸쳐 대만이 점유하고 있는 금문도와 마조도에 포격을 가하여 대만해협위기를 일으켰다. 또한 중국은 1964년 핵실험에 성공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동맹국가에 대한 지원과 이데올로기 공세를 적극화했다.

중국의 이러한 노력은 스탈린 사후 벌어진 중·소 간의 이념논쟁, 그리고 중국 내부 정세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에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대외적으로 자본주의국가들과의 평화공존원칙에 입각한 정책이 추진되자 중국은 소련의 이러한 노선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이념적으로 더욱 교조적인 입장을 취했다. 아울러 중국은 비동맹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자신을 아시아 ·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표하는 지도국으로 네세웠다. 한편 중·소 관계가 악화되면서 소련이 중국에 대한 경제 및 기술적 지원을 중단하자 중국은 1958년 대약진운동을 시작하여 중국식 산업화를 추구했다. 하지만 집단노동과 전근대적 방식에 의존한 대약진운동은 실패했고 수천만의 기아사망자를 발생시켰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의 실패에 따른 정치적 위기를 또 다른 대중정치운동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1965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이 그것으로서, 마오쩌둥은 이를 통해 공산혁명의 완수를 위한 노력을 강화했다.

이처럼 중국이 대내외적으로 공산혁명의 심화와 확대를 추구하는 가운데 미국은 중국을 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세력팽창을 지원하는 주된 위협세력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여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군사동맹체제를 구축했다. 이미 미국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일본과 샌프란시스코조약을 통해 일본에 대한 군사점령을 종결하고 동맹관계를 체결했다.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 봉쇄전략을 위한 핵심국가로 인식하고 일본의 재건과 부흥을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초승달 모양의 동아시아 반공지대구축을 추진했다. 일본의 주권회복과 경제적 재건 · 부흥, 그리고 나아가 재무장을 통해 일본이 동아시아 지역통합을 위한 중심적 역활을 담당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구상이었다. 일본은 방위는 미국에 맡기고 경제발전에 주력하는 소위 ‘요시다 노선’을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대응했다.

미국은 일본에 이어 1953년에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으며, 1954년 제1차 대만해협위기 직후 대만과도 군사동맹을 맺고 경제적 지원과 군사적 보호를 약속했다. 또한 동남아시아의 필리핀 · 태국, 오세아니아의 호주 등과도 각각 동맹을 맺음으로써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련의 양자동맹체제를 구축했다. 이들 동아시아 국가 상호간에는 직접적인 동맹관계가 맺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국가들은 각각 미국과의 양자동맹을 통하여 자유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미국 중심의 양자동맹체제는 유럽에서 NATO와 같은 집단 동맹체제가 형성되어 작동한 것과는 대비되는 것이었다.

동아시아의 냉전이 유럽에서의 냉전과 구별되는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한국전쟁에 이어 베트남전쟁이라는 열전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유럽에서는 NATO(1949)와 바르샤바조약기구(1955)의 수립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1950년대 중반까지 동서간의 정치적 · 경제적 · 군사적 대립라인이 분명하게 그려졌다. 그 대립라인은 쉽사리 변경될 수 없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양극적 세력균형을 뜻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과 소련은 상호대립이 직접 군사충돌로 비화되지 않도록 조심했고, 그 결과 유럽에서는 현상유지의 선에서 어느 정도의 안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제3 세계는 이러한 안정과 거리가 있었다. 특히 많은 신생국가들이 아직 내부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럽과 같은 분명한 냉전대립의 라인이 그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인도차이나반도의 베트남도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세계체제 동북아 한반도

– 이수훈 / 아르케 / 2004.02.28

 

이런 각도에서 볼 때 냉전은 이중적 기능을 담당했다. 첫째, 미국을 비롯한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내에서의 기능인데, 노동에 대한 자본과 국가의 안정된 지배의 확립을 담보하는 데 일조함으로써 순조로운 축적활동 보장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제로서의 기능을 했다. 둘째, 미국의 탈식민화정책에 따라 대거 등장한 신생독립국의 민족해방 열기를 잠재우고 그들을 계속 중심-주변이라는 세계자본주의 계서제(hierarchy) 속에 묶어두는 데도 일조했다(Hopkins et al., 1996). 1989년 냉전의 공식적 종말 시점까지 소련은 미국과 더불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한 기둥 역활을 해왔던 것이다. 소련은 미국 헤게모니의 주니어 파트너에 불과했지 미국의 실질적 위협이 된 적이 없었다. 소련의 위협은 미국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사실과 달리 부풀려지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했다(서재정·정용욱, 1996).

이런 점은 냉전구조의 공고화와 동북아 지역으로의 확산에 결정적 계기가 된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특히 그랬다. 당시 미국 헤게모니사업 추진세력이었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 내 ‘전쟁공포’를 일으키고 소련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제파 대 국내파 사이의 제도정치 위기를 타개하고 헤게모니사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재무장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진척시킨 바 있다(Lee,H.J., 1999).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군사적 케인스주의 노선 채택에 성공하고 광범위한 개입을 내용으로 하는 외교노선 확립에 성공하였다. 따라서 냉전구조를 단순한 국제 정치군사적 동서대립으로 보는 것에서 나아가 전후 미국 헤게모니체제의 형성과 그 성공적 전개의 일부로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이수훈, 2001).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관통하는 위대한 세계경제 팽창기 동안에는 자본축적의 중심부가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서독과 일본의 부흥, 그들의 활발한 기술발전과 조직혁신에 기초한 가파른 경제적 상승은 미국 헤게모니체제를 심각하게 동요시켰다. 따라서 이전의 중심부 협력관계도 점차 첨예한 경쟁관계로 바뀌었다. 즉 1970년대 초기부터 본격화된 세계경제의 축적위기와 더불어 미국은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떨어지고, 대신 일본과 서독 등 옛 중심국들의 약진이 두드러진 결과 1980년대에는 미국에 의한 단일 헤게모니체제가 다중심체제로 전환되는 조짐이 역력했다. 미국 산업생산품들의 국제경쟁력은 일본과 서독 제품들에 비해 격차가 났고, 특히 일본 제품의 광범위한 미국시장 잠식으로 미국은 대규모 국제수지 적자와 함께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기축통화로서의 달러화 가치하락 압박과 금의 부족 등에 따라 닉슨 대통령은 1971년 브레튼우즈체제의 종식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73년에 발생한 오일쇼크로 세계경제는 다시 큰 타격을 입고 1974/75년 공황을 겪게 되는데, 이는 미국 헤게모니체제의 동요로 직결되었다.

……

미국 헤게모니체제는 1973년경부터 3중심체제(미국과 유럽, 동아시아)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그 질서는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일본의 장기간에 걸친 불황과 이른바 ‘아시아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중국의 약진에 의해 축적된 동아시아 지역의 부를 감안할 때, 동아시아가 여전히 3중심체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현실이다.

 


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1945-1979

– 김용직 /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 2005.02.15

 

닉슨 독트린이 예기치 않게 동아시아 정치에 미친 영향 중의 하나는 이 지역에서 권위주의 정권이 연이어 등장했다는 점이다. 연이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권위주의 체제로의 회귀는 사무엘 헌팅턴의 제3의 물결이 일기 전 제2의 물결의 역류 시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970년 캄보디아에서 론놀장군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1971년 11월 태국 군사정권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1965년 수카르노에게서 정권을 찬탈한 군부가 1971년 여름 총선을 통해 정권 안정의 기틀을 다졌다. 1972년 9월에는 필리핀에서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동년 10월에는 한국에서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성립시켰다.

 


사료, 발언 모음

 

* 1946년 12월 17일 미국 국무성:

미래의 중국제국주의로부터 베트남과 동남아를 보호하기 위해 이 지역에 프랑스군의 주둔이 긴요하다.

 

* 1954년 9월 베트남민주공화국 팜반동 수상:

제네바협정은 다른 여러 나라를 끌어들여 인도차이나에서 전쟁을 계속하려는 미 개입주의자들에게 패배와 손실을 안겨 주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제네바협정의 이행을 거부하려 기도하고 있다.

 

* 맥나마라가 그의 저서 ‘회상’에서 말한 베트남전에 얻은 11가지 교훈이다.

(1) 우리는 적의 지정학적 의도를 잘못 파악했으며 그들의 행동이 미국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을 과장했다.

(2)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남베트남 사람들과 지도자들을 바라보았다. 그 결과 베트남 내부의 정치적 힘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3) 우리는 (베트남) 민족주의가 발휘하는 능력에 대해 과소평가했다.

(4) 적과 동지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그곳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에 대한 무지를 반영했다.

(5) 우리는 현대 과학 기술과 군사 장비의 한계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다.

(6) 우리는 군사행동을 하기 전에 의회와 미국민들이 대규모 군사 개입에 대한 찬반 토론에 충분히 참여시키지 못했다.

(7)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왜 그런 일을 했는지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8) 우리는 우리 국민과 지도자들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았다.

(9) 군사 행동은 다국적군의 협력이 필요하다.

(10) 즉각적인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11)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문제의 특이하고 광범위한 복잡성을 효과적으로 다룰 만한 행정체계를 조직하는데 실패했다.

 

* 1971년 펜타곤 보고서:

베트남의 팽창주의는 손쉽게 인접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집어 삼킬 것이고 …… 그리고,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폴, 심지어 인도네시아가 다음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중국의 핵 실험 실시가 초읽기에 들어간 1964년 9월 존슨 대통령이 주재한 대책 회의에서 주 베트남 대사인 테일러(Maxwell Taylor)는 “조만간 미국은 북베트남에 훨씬 강력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합참의장 휠러(Earle Wheeler) 역시 “우리가 남베트남에서 패배한다면, 우리는 동남아시아를 잃을 것이고, 이들 지역의 국가들은 차례로 지역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공에 기울게 될 것”이라고 거들었다.

 

* 공화당 대선 후보 아이젠하워의 외교 참모였던 덜레스는 1952년 5월 초 파리에서 한 연설을 통해 인도차이나를 방어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중국이나 소련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 의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중공이 그들의 공산군을 베트남으로 보내면 우리의 대응이” 중국 본토로까지 확대되고 또한 사용하는 무기의 제한도 두지 않겠다는 점을 중국 정부가 인식하게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1953년 9월에는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설에서 “중국의 공산 정권은 (한반도에 이어) 인도차이나에서 또 다시 도발할 경우 미국의 대응은 인도차이나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고 이에 따라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1953년 발언:

우리가 인도차이나를 상실한다고 가정해 보자,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우선 반도의 방위가 어려워진다.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주석과 텅스텐을 잃어버릴 것이다. …… 따라서 미국이 이 전쟁에 4억달러를 제공하는 것은 토벌 계획이 아니다. 우리는 미국과 미국의 안전, 미국의 힘,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의 보물창고에서 필요한 물자를 입수할 능력과 관련하여 어떠한 걱정할 만한 사태도 일어나지 않게 예방하는 가장 값싼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 존 F. 케네디 1956년6월 ‘미-베트남 친선협회’ 연설에서:

우리가 베트남이라는 아이의 실제 아버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에게 이름을 지어 준 아버지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그 아이의 탄생에 즈음하여…… 그 성장을 도와 스스로 장래를 결정할 수 있도록 원조하고 있다.

 

* 프랑스 대통령 드골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 충고

이 지역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당신은 끝없는 미로에 빠질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이 한번 눈을 뜨고 궐기한 다음에는 아무리 강대한 외부 세력도 자기의 의사를 강요할 수 없다. …… 당신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는…… 지배욕으로 간주될 것이며, 당신이 반공주의를 내세워 깊이 개입할수록 그곳 민중은 공산주의를 민족독립의 기수로 보게 될 것이다. …… 우리는 그것을 싫도록 경험했다. 한마디 더 충고하고 싶은데 아무리 돈과 사람을 쏟아부어도, 오히려 당신네들은 그곳에서 밑도 끝도 없는 군사적 · 정치적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가 몸을 가눌 수 없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 존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 베트남전쟁 개입에 중요한 역활을 맡았던 경제학자 월트 로스토우

어느 사회든지 내부의 혁명이라는 것은 외부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므로 이것을 끊으면 그 힘을 고갈시킬 수 있다. 남베트남 사태는 북베트남의 지원과 교사에 의한 것이므로…… 북베트남의 공엽력을 폭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위협하기만 하면, 하노이 지도자들은 놀라서 베트콩에게 활동을 중지하라고 명령할 것이다.

 

* 미국 국방성 문서

미국의 베트남 개입 목적

(64년 11월 29일, 국방성 비밀문서 제27호)

① 침략에 반대하는 보호자라는 명성을 지킨다.

② 동남아시아에서 공산화 도미노 현상을 저지한다.

③ 남베트남을 ‘붉은 손’에서 지킨다.

 

* 미국의 베트남전쟁 목적

(65년 3월 24일, 맥노튼 국방차관보가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보낸 「남베트남을 위한 행동계획」)

70% :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저지한다.

20% : 남베트남(및 이웃 나라들)의 영토를 중공의 손에서 지킨다.

10% : 남베트남 국민에게 보다 나은 자유생활을 보장한다.

그리고 수락 불가능한 폐해가 남지 않도록 하면서 위기에서 빠져 나간다. 그러나 만약 미군 철수를 요청받을 경우에는 그대로 남아 있기 어렵지만,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벗을 돕는 것이 아니다.”

 

* 만일 최악의 경우 남베트남이 붕괴하든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어 남베트남을 버리기로 결정할 경우 이때는 “훌륭한 의사가 최선을 다해 치료했는데도 환자는 죽고 말았다”는 인상을 대외적으로 주도록 노력한다.

(「남베트남 행동계획」최종각서, 64년 8월 3일, 비밀문서 제19호)

 


관련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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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격전지와 주요 미군 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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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위키백과 : 베트남 전쟁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위키백과 : 중국-베트남 전쟁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네이버 지식백과(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 분단과 전쟁, 재무장의 동아시아

[데일리차이나] 베트남전과 중국

베트남의 우공이산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2012-02-19  시진핑의 메시지 ‘핵심이익서 손떼라’

Council on Foreign Relations(CFR) : http://en.wikipedia.org/wiki/Council_on_Foreign_Relations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 헨리 키신저

독자 핵개발 좌절! [박정희 코드] 비밀 풀리나?

2015-06-25  6.25전쟁과 미국 군사주의

2013-11-11  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할까?

2013-04-01  제2차 한국전쟁 막는 길은 ‘중국화’뿐이다!

2011-12-30  베트남 독립 전쟁에 환호한 조선!

2011-12-28  호치민이 ‘민족 반역자’ 소리를 들었던 이유는?

2011-05-12  같은 분단 국가? 그러나 달랐다!

2004-01-10  베트남전에 가려진 ‘숨겨진 전쟁’

베트남전쟁 (1946년 ~ 1975년) – 동아시아 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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