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묶어주던 황금줄이 끊어지다.
1931년에 영국이 금본위제를 정지하고 1933년 미국까지도 금태환을 정지함으로써 영국 헤게모니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금본위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지금의 세계 패권국은 미국이지만 19세기는 영국의 세기였다. 그러면 언제 어떤 사건이 영국 패권 쇠락의 결정적 증거로 볼 수 있을까? 많은 학자들이 대공황 중이었던 시기의 1931년 영국의 금태환 정지를 내세운다. 영국은 1840년대 이래 대영제국 최대 업적의 하나로 자랑해온 자유무역이라는 신성불가침의 원칙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고 수많은 나라에서 외환 거래의 기초였던 금본위제도를 폐기한 것이다.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패권이동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으로 하여금 쌓아 놓았던 대부분의 잉여 자본을 지출케 하였는데, 이것이 미국으로의 패권이동을 가속화 시켰다. 게다가 미국이 무기판매를 통하여 벌어들인 부를 이용하여 영국에게 빚진 채무를 상환해 버림으로서 파운드화의 결제통화로서의 힘은 급격히 약하됨과 동시에 달러의 시대가 개막된다. 즉, 국민국가의 형태의 영국이 군산복합체로서의 미국에게 압도당해버린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대공황이 실제로는 영국의 헤게모니가 무너지는 전환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브레턴우즈에서 미국이 영국의 패권을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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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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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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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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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해외 대부 및 투자의 중단은 월스트리트 붐의 붕괴와 그에 뒤이은 미국경제의 불경기 때문에 항구적이 되었다. 급격한 단기 자본 회수 또는 도피에 직면하여 한 나라씩 자신의 통화를 보호해야 했으며, 그 방식은 평가절하거나 외환 관리였다. 1931년 9월 영국 파운드화의 금 태환 중지는 런던 시티의 재운이 달려 있는 세계 상업 · 금융 거래망의 최종적 파괴로 이어졌다. 보호주의가 창궐하였고, 안정 통화의 추구는 포기되었으며, “세계자본주의는 그 민족국가 경제들의 이글루와 그와 연결된 제국들로 후퇴하였다”(Hobsbawm 1991: 132).
이는 칼 폴라니가 “금실을 끊어 낸” 것이라고 추적한 “세계혁명”이다. 그 주된 지표들은 세계정치에서 고도금융의 소실, 국제연맹의 붕괴와 자력갱생 제국들에 대한 선호, 독일에서 나치주의의 등장, 소련의 5개년 계획, 그리고 미국에서 뉴딜의 개시 등이었다. “대전쟁이 끝날 무렵 19세기의 이상은 드높았고, 그 영향력은 뒤이은 10년간 계속되었지만, 1940년이 되면 국제체계의 모든 흔적이 사라졌고, 몇몇 고립지를 제외하면 각 국가는 완전히 새로운 국제 조건 속에서 살고 있었다”(Polanyi 1957: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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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겐소가 자랑한 적이 있듯이, 루스벨트와 모겐소는 실로 세계 유동성에 대한 통제권을 사적 수중에서 공적 수중으로, 런던과 월스트리트에서 워싱턴으로 이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브레턴우즈는 고도금융에 대한 루스벨트의 결별을 다른 수단을 통해 지속시킨 것이었다. 윌슨 행정부에서의 복무와 국제연맹에 대한 지지를 포함해 그의 국제주의적 경력에도 불구하고, 뉴딜에 대한 루스벨트의 주된 추동력은 민족경제 회복을 목표로 한 미국 정책들을 런던과 뉴욕이 주장하는 건전화폐 원칙에서 자유롭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대통령으로서 그의 첫 결정 중 하나는 달러의 금 태환을 중지시킨 것이었는데, 이는 국제 금 본위의 잔재를 파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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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
– 칼 폴라니 / 홍기빈 역 / 길 / 200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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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 경제는 해체되었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 문명 전체가 전환을 겪게 된바, 이 둘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고리는 바로 국제 금본위제의 붕괴였다. 이 요인의 결정적 중요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한다면 유럽이라는 기차를 파멸로 가는 철로 위에 올려놓은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또한 문명의 형식과 내용이 어쩌면 이렇게 취약한 것에 기반을 둘 수 있었는가라는 아연실색할 만한 사실에 대해서도 그것을 설명해줄 정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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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가 되면 급작스럽게 변화가 찾아온다. 그 이정표가 되는 사건은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 러시아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뉴딜의 출범, 독일에서 나치즘의 국가 사회주의 혁명, 국제연맹이 무너지고 대신 폐쇄형 제국들이 나타난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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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기의 근본 원인은 국제 경제 체제의 붕괴라는 위협적인 사태였다. 그것은 이미 금세기 초부터 절름발이 상태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과 베르사유 조약으로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이 점은 1920년대에 유럽 내부에서 벌어진 위기들 대부분이 대외 경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그 절정으로 치달았다는 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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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그 시대의 모든 나라 모든 계급 모든 이름의 종교와 사회철학이 함께 받아들인 유일무이의 교리가 있었으니, 이는 국제 경제 체제가 작동하는 데 금본위제는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당시 인류는 자꾸 무너져가는 스스로의 존재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에 몰두해 있었거니와, 이는 국제 경제 체제가 작동하는 데 금본위제에 대한 믿음은 그러한 삶의 의지가 한사코 붙들고자 했던 실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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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금본위제의 족쇄에서 풀려나고자 하는 본능적인 몸부림으로 결국 1933년 금본위제를 탈퇴했고, 이에 전통적으로 유지되어온 세계 경제의 마지막 흔적이 소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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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본위제가 사라지자 평화의 이해를 대변하는 두 조직, 즉 국제연맹과 그것의 주요 집행 도구들-로스차일드 집안과 모건 집안-이 정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전 세계를 묶어놓은 황금줄이 끊어졌다는 것은 곧 모종의 세계 혁명이 시작될 것이라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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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족쇄 (금본위제와 대공황, 1919~1939년)
– 배리 아이켄그린 / 박복영 역 / 미지북스 / 2016.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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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불안정한 균형은 금본위제 붕괴를 위한 무대를 만들어 놓았다. 다자 간 결제의 모습은 미국의 경상수지 흑자 재환류 의지에 달려 있었다. 처음에 미국은 대규모의 대부를 했다. 하지만 1928년부터 대부가 급감하면서 채무국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어려움의 절정은 채무 디폴트였는데, 그 결과로 대부의 일시적 감소는 항구적 급감으로 전환되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은 국가군에 속했다. 여러 금융 문제 앞에서 오스트리아중앙은행과 독일제국중앙은행은 국내 금융시스템의 안정과 금본위제 유지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국내 금융 안정을 선택했는데, 외국인 예금을 동결하고 금 태환 대신 외환 통제를 택했다. 채무 디폴트와 예금 동결은 이미 국제수지 포지션이 취약해진 영국에 새로운 충격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뉴욕에서, 중남미 및 중부 유럽으로 그리고 다시 런던으로 이어지는 금융 연결 고리를 통해서 불안정 요인이 전달되어 결국은 금본위제 붕괴를 초래했다. 그런 충격은 보통은 금 태환 유지에 대한 신뢰와 국제 협력으로 완화되었다. 하지만 1931년에는 금본위제의 신뢰성이 점점 약화되었다. 국내 압력 단체의 영향 때문에 금본위제 유지가 다른 목표보다 우선하게 될지 의심받기 시작했다. 대공황이 심화되고 있어서 파산을 방치했을 때의 비용이 증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불신이 고조되자, 시장의 안정화 기능은 약해지고 대신에 중앙은행의 부담이 점점 커졌으며 국제 협력의 중요성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필요한 협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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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국제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일방적 안정화 조치를 취하려 할 때 금본위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팽창적 통화정책 및 재정정책이 금 태환 유지와 양립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국내 금융 불안정을 억제하려는 노력도 무위로 돌아가고 오히려 해롭기까지 했다. 국내 금융 패닉이 전염되어 여러 나라로 번지는 상황에서도 통화 당국은 그냥 방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기는 한편으로는 기회였다. 금본위제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게 되자, 새로운 정책 대안들이 생겨났다. 팽창적 조치들을 일방적으로 취하는 데서 금본위제가 더 이상 제약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팽창정책을 위한 국제 협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팽창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다른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했다. 특히 금본위제의 종말이 금융 혼란과 정치적 혼란을 동반하는 새로운 인플레이션 시대의 시작을 의미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대표적 장애물이었다. 팽창적 조치의 채택에 대한 두려움이 최종적으로 극복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허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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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달리오의 금융 위기 템플릿
– 레이 달리오 / 송이루,이종호,임경은 역 / 한빛비즈 / 202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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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문제가 전염병의 진원지로 판명되었다. 영국의 은행들은 독일에 많은 차관을 제공했기 때문에 돈이 묶여 있었다. 영국 은행들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게 된 외국인 투자자들은 발을 빼기 시작했다. 1931년 7월 24일 프랑스는 영국에서 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다른 국가들은 파운드화의 신용이 떨어졌다고 판단하고 영국에서 예금을 빼내기 위해 파운드화 매도가 쇄도했다.
영국은행은 자국 통화를 방어하고자 금 보유고를 매각하고(8월에만 전체의 3분의 1 매각) 금리를 올리는 두 가지 전형적인 방법을 택했다. 매주 금 보유고의 감소를 목격하는 외국인들에 의해 파운드에 대한 압박은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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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19일 토요일, 외국 차관을 모두 소진하고 약 1억 달러의 금 보유고만 남은 영국은행은 파운드화를 지탱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통화 가치의 급락을 방치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다음 날 공식적으로 금 지불을 중단함으로써 사실상 채무 불이행에 빠졌다. 처음에 국민들은 금본위제를 벗어나는 것이 자국의 이해타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신문에서는 한 시대의 종말을 한탄하는 논조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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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 이튿날인 1933년 3월 5일 일요일, 국가적 차원에서 나흘간의 은행 휴무일을 선언하고, 금 수출을 중단시켰다(사실상 달러와 금의 연계를 끊었다). 그리고 은행 시스템을 구제할 전담 팀을 구성했다.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일을 처리하려니 혼란이 많았다.
은행들이 3월 9일자로 영업을 재개하려던 때 의회는 1933년 긴급 은행법(Emergency Banking Act of 1933)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은행 휴무가 연장되었고, 은행 시스템에 유동성과 자본을 제공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권한을 연방준비제도와 재무부에 부여했다. 이 법이 가장 중요한 점은 금이 아니라 은행 자산을 근거로 달러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연방준비제도에 부여하는 것이었다. 달러와 금 사이의 연계를 끊는다는 의미뿐 아니라 화폐를 찍어낼 수 있도록 연방준비제도에 권한을 부여하여 은행들에 절실히 필요한 유동성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까지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방준비제도가 금 보유고를 소진하지 않고 화폐를 추가로 찍어낼 수 있도록 1917년 적성국 교역법(1917 Trading with the Enemy Act)에 의거하여 금 수출을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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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독법
– 곽수종 / 원앤원북스 / 2009.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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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독립전쟁은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 정치 · 경제적으로 오늘날 미국과 같이 세계질서의 균형자로서 군림해오던 영국의 헤게모니가 서서히 소멸되기 시작한 전조현상이었다. 군사 · 외교적 의미에서 영국의 입지는 미국의 독립전쟁 패배로 위축되는 한편, 경제적 위상 약화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다. 원인은 전비 지출에 따른 영국경제의 부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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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언급한 바대로 경제적으로 영국의 쇠락은 금본위제도의 해체과정에서 비롯된다. 영국의 파운드화에서 미 달러 기축통화제도가 굳혀지기에는 모두 네 차례의 국제환율제도의 변화가 있었다. 1919년부터 1931년까지 영국의 파운드화가 금본위제도상의 기축통화였다면, 미국의 대공황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는 미국의 달러화와 영국의 파운드화가 모두 기축통화로 받아들여졌던 이른바 복수기축통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원래 ‘권력’이란 것은 두 사람이 나눠가질 수 없는 것이므로 세계의 기축통화는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파운드화에서 미국 달러화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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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런시 워
– 제임스 리카즈 / 신승미 역 / 더난출판사 / 201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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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는 주목할 만한 두 차례의 대형 통화 전쟁이 일어났다. 먼저 제1차 통화 전쟁은 1921~1936년에 계속 이어졌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거의 모든 기간이며,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공황 기간이 포함된다. 제2차 통화 전쟁은 1967~1987년에 일어났다. 이 통화 전쟁은 군사 대결로 치닫지는 않고 1985년의 플라자 협정과 1987년의 루브르 협정으로 해소되었다.
통화 전쟁은 분명한 선행 사건이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전쟁과 비슷하다. 제1차 통화 전쟁의 가장 강력한 세 가지 선행 사건은 1870~1914년의 전통적인 금본위제와, 1907~1913년의 연방준비제도의 탄생, 1914~1919년의 제1차 세계대전과 베르사유 조약이었다.
……
제1차 통화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1921년에 극적으로 시작되었다가 확실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1936년에 서서히 사그라졌다. 이 통화 전쟁은 다섯 대륙에서 여러 라운드에 걸쳐서 벌어졌으며, 21세기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921년에 독일이 초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며 먼저 움직였다. 초인플레이션은 원래 경쟁력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막대한 전쟁 배상금 때문에 중압감에 시달리던 독일 경제를 오히려 완전히 파탄 내버리는 터무니없는 지경으로 확산되었다. 다음으로 1925년에 프랑스가 나서서 금본위제로 돌아가기 전에 프랑을 평가절하했다. 이에 따라 전쟁 전의 금 시세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영국이나 미국 같은 국가보다 수출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영국은 1931년에 금본위제를 포기했고, 이에 따라 1925년에 프랑스에 빼앗긴 입지를 되찾았다.
독일은 미국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이 전쟁 배상금의 지불 유예를 선언한 1931년을 기점으로 사기가 올랐다. 지불 유예는 1932년 로잔회의의 결과에 따라 영구적으로 지속되었다. 독일은 히틀러 등장 이후에 점차 독자적인 노선을 걷다가 세계 무역에서 탈퇴하면서 자급자족 경제로 변해갔다. 물론 오스트리아와 동유럽과는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은 1933년에 금 대비 달러화를 평가절하하면서 움직였으며 1931년에 영국에 빼앗겼던 수출 가격의 경쟁 우위를 어느 정도 되찾았다.
마지막으로 이제 프랑스와 영국이 다시 자국 화폐를 평가절하할 차례가 되었다. 1936년에 프랑스는 금본위제를 포기했으며 주요 국가 중 대공황의 그림자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벗어나는 국가가 되었다. 영국은 193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평가절하 이후에 달러에 뺐겼던 우위를 되찾으려고 다시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했다.
주요 국가들은 여러 라운드에 걸친 평가절하와 채무 불이행 속에서 지나치게 경쟁했다. 그 결과 무역에서 생산력 상실과 부의 붕괴라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제1차 통화 전쟁 기간 동안 국제 통화 제도가 워낙 변동이 심하고 많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제1차 통화 전쟁은 오늘날 세계가 또다시 막대한 미지급 부채라는 어려움에 직면할 때 명심해야 할 가장 큰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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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제국
– 존 고든 / 안진환,왕수민 역 / 황금가지 / 2007.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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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7월 13일, 독일 최대의 다나트 은행이 영업을 정지했다. 독일 정부는 베를린 증권 거래소와 은행들을 닫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유럽의 금융 체제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고비에 처했고, 불길은 유럽 금융의 상징인 런던을 향해, 그리고 달러 다음으로 강력한 통화인 파운드화를 향해 번져 나갔다. 당시 영국의 국가 재정은 불황으로 말미암아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은행과 무역업자들이 금을 보유하기 위해 파운드화를 헐값으로 포기함에 따라 엄청난 속도로 은행에서 금이 유출되고 있었다.
9월 21일, 뉴욕연방준비 은행과 프랑스 은행으로부터 250만 파운드를 대출받았음에도, 영국은 결국 1821년에 수립한 이후 줄곧 유지해 온 금본위제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영국의 경제 강대국으로서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세계 무역의 많은 부분이 파운드화로 이루어졌고 영연방에 속해 있든 그렇지 않든 수많은 국가의 통화가 파운드화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여파는 엄청났다. 점점 더 많은 중앙은행이 금본위제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흐름을 거부했다. 외국의 중앙은행과 투자자들이 금을 송환하기 시작하자 연방준비은행은 자국의 금본위제를 유지하고 달러를 보호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선택한 최악의 결정이었다. 어쩌면 당시 미국이 저지른 모든 실책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시행착오였을 것이다.
금본위제를 유지한다는 것은 곧 이자율을 올리고 통화량을 줄인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조치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던 디플레이션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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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본
– 토마 피케티 / 장경덕 외 역 / 글항아리 / 201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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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가치가 안정된 세계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영원히 무너졌다. 엄청나게 폭력적이고 강도 높은 전쟁의 비용을 대느라 그리고 군인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갈수록 더 비싸고 복잡해지는 무기의 비용을 조달하느라 정부는 빚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1914년 8월에 이미 주요 참전국들은 자국 통화의 금태환을 끝냈다. 전쟁 후 각국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같이 엄청난 공공부채를 처리하기 위해 지폐를 찍어내는 인쇄기에 의존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 금본위제를 부활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1930년대의 경제위기로 무산되었다. 영국은 1931년, 미국은 1933년, 프랑스는 1936년에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금본위제 역시 조금도 더 강건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체제는 1946년에 시작되어 달러의 금태환이 중지된 1971년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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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경제학
– 밀턴 프리드먼 / 김병주 역 / 한국경제신문사 / 2009.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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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영국과 다른 나라들의 금본위제 이탈이 중국에 미친 악영향은 1931년 9월 일본의 만주 점령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 이러한 군사적 수요가 국민당의 재정적자 증가의 핵심 요인이었다. 적자의 장기화에 따라 경제체질이 약화되고 이것이 그 후 발생한 중국의 초인플레이션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Greenwood and Wood, 1977a, p27).
……
중국이 은본위제 덕분에 얻었던 국제무역의 일시적 우위가 야금야금 침식된 것이 아니라 1933년 미국마저 금본위제를 이탈하게 되자 단숨에 완전히 소멸되어 오히려 열위로 변하였다.
……
미국의 금본위제 이탈이 중국에 미친 악영향은 은을 위해 “무엇인가 하라”는 요청에 따른 미국의 조치, 즉 1933년 1년 동안 은의 가격을 거의 두 배로 올리고, 1935년 4월에는 세 배 이상 올려 최고 수준에 이르게 한 조치에 의해 크게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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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年 英國 金本位制의 崩壞 原因에 대한 再檢討
– 박복영 / 학술논문 경제논집 제 41권 2호 pp.141~167 /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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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에 영국의 금본위제가 붕괴된 원인에 관한 기존의 지배적 견해는, l차 대전 이후 경제정책이 정치화됨으로써 금본위제 유지에 필요한 일관된 정책이 이루어지지 않아 스털링에 대한 국제적 신뢰가 하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 논문은 우선 이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금본위제의 붕괴 원인이 경제정책의 변화가 아니라 대외포지션의 변화에 있었음을 주장한다. 런던은 여전히 국제금융중심지로서 장기자본수출을 계속했지만, 그것을 보전할 수 있는 경상수지흑자 구조가 와해되어 영국의 단기대외부채는 계속 증가하였다. 이에 더하여 뉴욕 금융시장의 성장과 스털링의 만성적 약세로 런던의 ‘預金强制力’이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1년 5월 이후 유럽 각국에서는 금융위기 때문에 流動性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다. 이런 유동성 수요는 국제금융중심지인 런던에 최종적으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미 단기포지션이 악화된 영국의 支拂能力마저 不信되면서 런던에서 단기자본의 유출이 가속화되어 금본위제가 붕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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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전쟁
– 쑹홍빙 / 차혜정 역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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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못할 사건은 모건의 청문회 기간에 펼쳐졌다. 사람들의 이목이 온통 모건의 청문회에 집중해 있는 동안 루스벨트는 금본위제를 폐지할 중요한 법을 조용히 통과시켜버린 것이다. 대통령에 취임한지 겨우 1주일 만인 3월 11일에 루스벨트는 경제 안정을 내세워 은행의 황금 교환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곧이어 4월 5일, 미국인은 소유한 황금을 모두 내놓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부는 온스당 20.67달러로 이를 수매했다. 약간의 금화와 금 장신구만 허용할 뿐, 금을 소장한 사람들에게는 10년 징역에 25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비상 상태에서 내린 임시 조치라고 변명한 이 법은 1974년에 가서야 폐지되었다.
1934년 1월, 황금준비금 법안을 통과시켜 금 가격을 온스당 35달러로 고정했다. 그러나 미국 국민은 황금을 교환할 권한이 없었다. 사람들이 황금을 정부에 내고 나자 몇 년 동안 모아놓은 저축액은 절반으로 줄어버렸다. 1929년 증시 대폭락 전에 내막을 알고 발 빠르게 대처한 국제 금융재벌들의 “우량 고객”들은 많은 자금을 증시에서 빼내 황금으로 바꾼 다음 런던으로 운반했다. 그들의 황금이 런던에서 팔릴 때는 온스당 35달러였으니 눈 깜짝할 새 69.33%의 차액을 챙긴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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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그림>
– 대공황 시기 주요 국가의 금본위제 탈퇴 시기와 1인당 소득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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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네이버캐스트(금융사전) : 금본위제도
네이버 지식백과 : 대공황시대 / 양동휴 / 살림출판사 / 2009.07.01
브레턴우즈 체제 : http://yellow.kr/blog/?p=1093
위키백과 : 대공황
위키백과 : Gold standard
2010-11-15 한경BUSINESS : 가치의 척도, 금본위제의 기원과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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