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튼우즈 체제 (Bretton Woods) – 1944년

1930년대의 금본위제 붕괴로 영국의 경제적 패권은 막을 내리고 제2차 세계대전 말인 1944년에 만들어진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는 미국의 세계 패권을 알리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새로운 세계 질서, 즉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미국에 의해 조직되는 질서를 성립시켰다. 브레튼우즈에서 새로운 통화 제도의 기초가 놓였고, 원자폭탄이라는 새로운 폭력 수단이 신질서의 군사적 토대를 증명했으며,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국가 건설과 전쟁 수행의 합법화를 규정하는 새로운 규범과 규칙이 유엔 헌장에 마련되었다.

 

미국의 패권 수립과 관련하여 브레튼우즈의 일차적인 의미는 협정이 계획하고 있는 금달러본위제도도, 협정에 의해 설립될 국제 통화 기구들도 아닌, 대형 금융에서의 민간의 통제에서 공공의 통제로의 대체였다. 즉 세계 유동성에 대한 통제권을 사적 수중에서 공적 수중으로, 런던과 월스트리트에서 워싱턴으로 이전시킨 것이다. 미국 재무부장관 헨리 모건소(Henry Morgenthau, Jr.) 스스로가 나중에 자랑했듯이, 그와 루즈벨트는 “화폐 자본을 런던과 월스트리트에서 워싱턴으로 옮겼고, 그래서 ‘대은행가들은’ 그 때문에 우리를 미워했다.”고 했다.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차 대전 직후에 형성된 국제 통화 체제를 가리킨다. 2차 세계대전 말인 1944년 서방 44개국 지도자들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 모여 입안했고, 그 운영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이 만들어졌다.

이 체제에서는 미국의 달러만 금(金)과 고정 비율로 태환(兌換)할 수 있는 반면, 다른 통화들은 금 태환 대신에 달러와 고정 환율로 교환할 수 있게 돼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달러는 기축통화였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는 대외 준비금으로 금이나 달러를 보유했는데, 금의 공급 증가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증가했다. 이 체제는 세계 경제에서 미국의 확고한 경제적 우위와 달러 가치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등으로 미국의 국제수지가 계속 적자를 면치 못하자 미국은 1971년 달러화의 금 태환을 중지한다고 선언했고, 1973년에는 주요국들이 금과의 고정 환율을 포기함으로써 엄격한 의미의 브레튼우즈 체제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공식적인 국제 합의는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달러화가 세계의 기축통화로 기능하고 있어 사실상 브레튼우즈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지속되는 동안 친서방 국가들은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기록적인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 관련글의 ‘자본주의 황금기’ 참조

 

※ 국제통화제도의 변천을 간략히 살펴보면;

– 금본위제도 : 1880 ~ 1914 (영국의 패권)

– 국제통화질서 혼란 : 1921 ~ 1936

– 브레튼우즈 체제 : 1944 ~ 1971 (미국의 패권)

– 국제통화질서 혼란 : 1967~1987

– ? 체제(현재) : 미국의 금융적 팽창, 신용화폐의 시대

◎ 금본위제도(고정환율) > 브레튼우즈 체제의 금환본위제도(고정환율) > 현재의 환본위제도(변동환율)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더버(Charles Derber)는 미국의 체제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제1차 법인체 체제(1865~1901) – 금장시대

존 D. 록펠러와 J.P. 모건이 집을 짓다.

진보적 체제(1901~1921) – 진보적 시대

테디 루스벨트가 제1차 법인체 체제라는 집에서 융성했던 트러스트(독점체)들을 붕괴시키다.

제2차 법인체 체제(1921~1933) – 광란의 20년대

하딩과 후버가 이 집을 거대한 기업체로 되돌려놓다.

뉴딜 체제(1933~1980) – 뉴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국민의 집을 설계하다.

제3차 법인체 체제(1980~?) – 레이건 혁명

전 지구적 법인체가 자신들을 위한 현재의 집을 짓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뉴딜 체제에 포함된다.

 

※ 관련글

–  1931년 영국, 1933년 미국의 금본위제 폐지 : http://yellow.kr/blog/?p=1090

– 자본주의 황금기 (1950년 ~ 1973년) : http://yellow.kr/blog/?p=984

– 미국체제 위기 (1968년 ~ 1973년) : http://yellow.kr/blog/?p=582

– 닉슨, 달러-금 태환 정지 선언(1971년) : http://yellow.kr/blog/?p=1106

 

 

이 당시의 세계사 연표를 살펴본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44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

–  지오바니 아리기, 비벌리 J. 실버 / 최홍주 역 / 모티브북 / 2008.10.17

 

아서 솔터(Arthur Salter) 경은 1932년에 스무트-홀리 법안()의 서명은 “세계사의 전환점”이라고 썼지만, 폴라니는 그런 전환점이 금본위제가 최종적으로 붕괴한 해인 1931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건 어쨌든 두 사건은 단일 붕괴, 즉 19세기 세계 질서의 최종적 붕괴의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측면들이었다.

 

1930년대 초에 갑자기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획기적인 사건들은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와 러시아의 5개년 계획과 뉴딜 정책의 개시와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혁명과 독재 제국들의 길을 터준 국제 연맹의 쇠퇴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에는 19세기의 이상이 최고의 가치였고 그것의 힘이 그후 10년을 지배했지만, 1940년에 이르자 이 국제 체계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고 고립된 몇몇 곳을 제외하면 완전히 새로운 국제적 배경 속에서 살고 있었다.(폴라니, 『거대한 전환』)

1940년의 국제적 배경은 사실 폴라니의 주장처럼 새롭지는 않았다. 열강들 사이의 군사적 대결은 전례 없는 규모나 잔인성과 파괴성을 제외하고는19세기 영국의 세계 질서를 성립시켰던 대결과 닮아 있었다. 이 대결은 곧 새로운 세계 질서, 즉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미국에 의해 조직되는 질서를 성립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 세계 질서의 주요 윤곽이 형성되었다. 브레턴우즈에서 새로운 통화 제도의 기초가 놓였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새로운 폭력 수단이 신질서의 군사적 토대를 증명했으며, 샌프란시스코에서 국가 건설과 전쟁 수행의 합법화를 규정하는 새로운 규범과 규칙이 유엔 헌장에 마련되었다.

……

 

…… 너무 좁게 뉴욕이 런던을 대신하여 세계의 제1금융 중심지가 되었고, 미국의 달러가 영국의 파운드를 대신하여 세계의 제1통화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금융과 관련해서는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패권 이동의 단연 가장 중요한 측면인 이 근본적인 단절에 대해 밝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리게 된다. 전쟁 전의 국내 뉴딜 정책이 미국의 국가 금융에 대한 통제를 민간의 손에서 공공의 손으로 이양하는 것을 전제로 했었듯이, 전쟁 후의 세계적 뉴딜 정책은 세계 경제의 수준에서 비슷한 이양을 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헨리 모건소(Henry Morgenthau)가 브레턴우즈 협정 때 주장한 대로, 안보 제도와 통화 제도는 가위의 양날처럼 상호 보완적이기 때문에 유엔에 대한 지지는 IMF에 대한 지지를 의미했다. 사실 미국의 패권 수립과 관련하여 브레턴우즈의 일차적인 의미는 협정이 계획하고 있는 금달러본위제도도, 협정에 의해 설립될 국제 통화 기구들도 아닌, 대형 금융에서의 공공의 통제에 의한 민간의 통제의 대체였다. 모건소 스스로가 나중에 자랑했듯이, 그와 루즈벨트는 “화폐 자본을 런던과 월스트리트에서 워싱턴으로 옮겼고, 그래서 ‘대은행가들은’ 그 때문에 우리를 미워했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옮김 / 그린비 / 2008.12.25

 

모든 앞선 세계화폐체계-영국의 것을 포함해-에서, 고도금융의 회로와 망은 이윤 획득을 위해 그것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사적 은행가와 금융가들의 수중에 확고히 장악되어 있었다. 세계화폐는 이렇듯 이윤추구 활동의 부산물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브레턴우즈에서 수립된 세계화폐체계에서 세계화폐의 “생산”을 담당한 것은 주로 복지, 안보, 권력에 대한 고려에서 추동된 정부 조직들의 망-원칙적으로는 IMF와 세계은행, 실제로는 미국의 친근하고 중요한 동맹국 중앙은행들과 공조를 이루어 행동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었다. 이렇듯 세계화폐는 국가형성 활동의 부산물이 되었다. 1945년 헨리 모겐소가 주장했듯이, 새로운 세계질서의 안보 기구와 화폐 기구는 가위의 양날처럼 서로 보완적이었다(Calleo and Rowland 1973: 87에서 재인용).

 

모겐소가 자랑한 적이 있듯이, 루스벨트와 모겐소는 실로 세계 유동성에 대한 통제권을 사적 수중에서 공적 수중으로, 런던과 월스트리트에서 워싱턴으로 이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브레턴우즈는 고도금융에 대한 루스벨트의 결별을 다른 수단을 통해 지속시킨 것이었다. 윌슨 행정부에서의 복무와 국제연맹에 대한 지지를 포함해 그의 국제주의적 경력에도 불구하고, 뉴딜에 대한 루스벨트의 주된 추동력은 민족경제 회복을 목표로 한 미국 정책들을 런던과 뉴욕이 주장하는 건전화폐 원칙에서 자유롭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대통령으로서 그의 첫 결정 중 하나는 달러의 금 태환을 중지시킨 것이었는데, 이는 국제 금 본위의 잔재를 파괴하였다. 그는 이어서 그의 정부를 동원하여 민족 경제 회복을 촉진하고 관리하였고, 미국 은행제도를 정밀 점검하였다. 가장 중요한 개혁 중 하나인 1933년 글래스-스티걸 법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여, 모건 가의 미국 금융시장 지배에 최종 일격을 가했다(Frieden 1987 : 54~5).

고도금융과의 결별이 거의 마무리된 것은 1933년 7월 루스벨트가 “이른바 국제 금융가라는 낡은 숭배물들”을 맹비난하고, 세계화폐 규제에 다소의 질서를 복원하려 시도하는 런던 경제회의를 사보타주했을 때였다. 월가는 경악하였고, 제임스 워버그 같이 영향력 있는 은행가이자 국무부 자문역이었던 인물은 사직했다.

 


거대한 체스판

–  Z.브레진스키 / 김명석 옮김 / 삼인 / 2000.04.01

 

특히 ‘국제적’ 금융 기구 같은 전문 기구의 세계망을 미국 체제의 일부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와 세계은행은 ‘세계적’ 이익을 대표하며, 그들의 지역구는 세계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들은 미국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그 기원 자체가 미국의 이니셔티브, 즉 1944년의 브레튼우즈 회의에 근거하고 있다.

 


경제독법

–  곽수종 / 원앤원북스 / 2009.09.01

 

이미 언급한 바대로 경제적으로 영국의 쇠락은 금본위제도의 해체과정에서 비롯된다. 영국의 파운드화에서 미 달러 기축통화제도가 굳혀지기에는 모두 네 차례의 국제환율제도의 변화가 있었다. 1919년부터 1931년까지 영국의 파운드화가 금본위제도상의 기축통화였다면, 미국의 대공황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는 미국의 달러화와 영국의 파운드화가 모두 기축통화로 받아들여졌던 이른바 복수기축통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원래 ‘권력’이란 것은 두 사람이 나눠가질 수 없는 것이므로 세계의 기축통화는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파운드화에서 미국 달러화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

현대 국제금융사에 있어 1944~1945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 융성했던 유럽경제의 세계경제 지배가 마침내 미국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바로 브레튼우즈 체제의 출범과 함께 1945년 설립된 IMF(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가 있다. IMF는 지금까지 국제금융시장의 주요한 감독기관으로서, 또 자금조달기구로서 그 역활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  백승욱 / 그린비 / 2005.04.25

 

브레턴우즈 체제는 실제 집행과정에서 원안이 상당히 변형되긴 했지만 고도금융을 통제한다는 핵심 목표는 관철됐다. 그러나 금-달러 본위제에 입각해 지배적 경제인 미국의 정책에 따라 전후 금융질서를 수립하게 된 브레턴우즈 체제는 그 기반이 되는 달러의 안정성이 깨지면 국제금융질서도 붕괴될 우려가 있다는 취약함을 안고서 출발했다. 예컨대 한편으로는 영국을 배경으로 금융자유화를 시도한 고도금융세력이 1960년대에 팽창한 유로 시장에서 부활을 위한 공간을 찾아냈고, 또 한편으로는 1947년 하이에크를 중심으로 결성된 몽페를랭 협회가 이들을 위한 신보수주의적 경제이념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요컨대 브레턴우즈 체제에는 처음부터 균열의 요소가 많이 있었다. 균열은 1967~73년 미국 경제의 이윤율이 하락해 미국 헤게모니가 물질적 팽창에서 금융적 팽창으로 넘어가는 조짐이 나타나면서 분명해졌다.

 


하룻밤에 읽는 경제학

–  마르크 몽투세 /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 중앙 / 2005.07.09

 

< 브레턴우즈 체제의 변화 >

브레턴우즈 체제의 개막 (1944년)

– 미국의 경제력과 달러의 태환성에 기반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 (1960년대)

– 대외원조, 차관의 증가

– 미국기업의 해외 공장이전, 외국에 대한 직접투자

– 무역수지 적자(유럽과 일본의 등장)

– 적자 해결 위한 달러 발행 증가, 유로달러의 팽창

브레턴우즈 체제 신뢰도 하락 (1960 ~ 1970년대)

– 미국외 국가의 달러보유량이 미국의 금비축량을 추월

– 달러의 태환요구 증가, 달러의 신뢰도 하락

– 미국의 강한 달러정책 지속

브레턴우즈 체제 포기 (1970년대)

– 1971년 8월 닉슨 쇼크(달러의 비태환성 선언)

– 1971년 12월 스미소니언 10개국 회의에서 달러 평가 절하(금 1온스당 35달러에서 38달러로)

– 이후 계속된 달러의 신뢰추락으로 각국 달러와 고정환율 포기

– 브레턴우즈 체제의 위기로 IMF의 역활 증가

 


지구화와 정치변화

–  오기평 / 오름 / 2000.05.12

 

19세기부터 시작된 정치체제 변동의 다이내믹은 서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케인스식 복지국가의 형성으로 그 가닥이 잡혔다. 국가가 재정과 금융정책에서 독자성을 행사함으로써 시장의 지구화가 국내 정치 ·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흡수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GATT의 무역자유화체제는 국가가 자본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조정 가능한 고정환율제(pegged and adjustable exchange rates)’를 채택한 브레턴우즈(Bretton Woods)협약과 병행하여 실시되었다. 즉 국민국가 중심의 경제와 상호의존을 지향하는 국제경제 간의 상보관계를 지향했던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복지체제를 제도적으로 결합시킨 케인스식 복지국가는 시장사회의 대치세력들에게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공존할 수 있는 터를 제공했다. 나라에 따라서 어느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수요의 촉진에 의한 경제성장과 고용확대, 생산의 합리화를 통한 포디즘과 산업자본의 집중, 국가와 사회세력들간 정책합의를 제도화한 코포라티즘(corporatism), 집중화 · 중앙화된 노동과 자본 간 단체협상 등은 케인스식 복지국가를 실천에 옮긴 제도적 기제였다(Garrett 1998, 796-98; Helleiner 1993, 20; Eichengreen and Flandrequ 1997, 1-2; Lash and Urry 1987).

1980년대 이후 지구화는 과거와 다른 양상을 띠며 전개되고 있다. 지구화는 거래 · 생산 · 금융시장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 문화적 영역에 걸쳐 총체적 · 전방위(全方位)적 변혁을 일으키고 있다. 19-20세기에 겪었던 제1의 대변혁에 이어 제2의 대변혁이 21세기에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커런시 워

–  제임스 리카즈 / 신승미 역 / 더난출판사 / 2012.02.28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한 연합국의 주요 강대국은 베르사유조약의 실수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새로운 세계 통화 질서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1944년 7월에 뉴햄프셔에서 열린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마무리되었다. 이 회의 결과 제정된 규칙과 표준, 기관은 향후 30년 동안 국제 통화 제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1944~1973년의 브레턴우즈 시대는 경기 후퇴기가 간간이 끼어들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통화 안정과 낮은 인플레이션, 낮은 실업률, 높은 성장, 실질 소득 상승을 이룬 기간이었다. 이 기간은 거의 모든 면에서 1921~1936년의 제1차 통화 전쟁 기간과 반대였다. 브레턴우즈협정에 따라 국제 통화 제도는 무역 상대국이 1온스당 35달러에 금으로 자유롭게 태환할 수 있는 미국 달러를 통해서 금에 굳건히 기반을 두었고, 다른 통화와는 미국 달러 대비 고정 환율을 통해서 금에 간접적인 기반을 두었다. 또한 브레턴우즈협정은 IMF가 무역 적자에 처한 특정한 국가에 단기 대출을 해주도록 했다. 각 국가는 IMF의 승인을 받을 때만 통화를 평가절하할 수 있었으며, IMF는 높은 인플레이션을 동반한 지속적인 무역 적자가 일어날 때만 평가절하를 허용했다.

많은 사람이 브레턴우즈협정을 원대한 국제협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게 높았던 시절에 미국이 혼자 브레턴우즈협정의 구조를 좌지우지했다. 당시 미국의 국력은 냉전 시기를 통틀어 최고 상태였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음에도, 1960년대 후반에 제2차 통화 전쟁의 시작을 1967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선행 사건은 1964년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그의 ‘총과 버터’ 공약이었다. 총은 베트남 전쟁을 뜻하고, 버터는 빈곤과의 싸움을 비롯한 이른바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복지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화폐전쟁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옮김 / 코나투스 / 2007.04.13

 

화폐로서의 금의 지위를 배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과정은 세 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첫 단계는 미국 국내에서 유통 및 교환되는 금화를 폐지하고, 두 번째 단계는 세계적으로 황금의 화폐 기능을 없애는 것이다. 1944년에 브레턴우즈 협정에 따른 달러 환전 시스템으로 두 번째 단계를 완성했다. 훗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1년에 가서야 세 번째 단계의 작업을 마무리했다.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윌리엄 엥달 / 서미석 옮김 / 길 / 2007.10.25

 

브레턴우즈체제, 그것은 곧 ‘미국의 세기’임을 보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브레턴우즈체제는 세 가지 핵심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회원국의 분담금으로 국제수지 균형이 위기에 처할 경우 사용할 수 있는 긴급 준비금을 조성하는 국제통화기금(IMF), 둘째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를 위해 회원국 정부에 차관을 공여하는 세계은행(World Bank), 끝으로 ‘자유무역’의 조정된 의제들을 만들어내는 임무를 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그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합리적인 국제기구들이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영국과 미국을 위한 것들이었다. 특히 미국을 위한. 즉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내에서 실질적인 표결 통제권은 영국과 미국에 주어졌으며, 브레턴우즈체제는 근본적으로 ‘금본위제’를 출범시켰는데 이는 회원국의 통화가 달러화와 연동됨으로써 세계의 가장 강력한 통화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제 미국은 자국의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전략적 이익을 통제하는 영국의 노선을 본받아 20세기 중후반 실질적인 패권국이 되었다.

 


달러의 경제학

–  애디슨 위긴 / 이수정 옮김 / 비지니스북스 / 2006.01.20

 

브레튼우즈 협약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은 오늘날 상당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것은 국제통화정책을 위한 모든 계회안이 세계 금본위제를 고수하고자 하는 국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협약에 동의한 나라들은 금을 기준으로 소폭의 변동 폭을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 자국 통화의 가치를 유지하기로 약속했다. IMF가 설립된 이유는 일시적인 지급 불균형을 돕기 위해서였다.

… …

고정환율(금을 기준으로 고정된 통화가치)은 국가의 생산성과 금 보유고를 바탕으로 한 분별있는 경제정책을 지지한다. 브레튼우즈 체제를 따르면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세력들 사이의 합의 하에 고정환율이 정해진다.

의도는 좋았지만, 사실상 국제통화는 자연스럽게 미국의 달러가 되었고, 다른 나라들은 금보다도 달러를 기준으로 자국 화폐의 환율을 고정했다. 결국 브레튼우즈 체제의 실제 성과는 금본위제를 달러본위제로 대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

그 선의와는 달리 브레튼우즈를 통해 탄생한 협약과 체제는 전 후 유럽의 경제문제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국은 수년 동안 막대한 무역흑자를 내고 있는 한편, 유럽으로부터 전쟁 채무 이자까지 벌어들이고 있었다. 미국의 준비금은 실로 막대했으며, 해마다 증가를 거듭하고 있었다.

 


글로벌 불균형

–  배리 아이켄그린 / 박복영 역 / 미지북스 / 2008.11.05

 

이 책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요즘 금융 분석가, 시사평론가 그리고 심지어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다시피 한 것처럼 최근의 글로벌 불균형을 1950 ~ 1960년대의 브레튼우즈 체제에 비유하는 것은 늘 치명적인 오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비유는 밝혀내는 것만큼이나 많은 것을 은폐하기도 한다. 그런 비유 때문에 미국 경상수지 적자의 지속 가능성과 달러의 안정성에 관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자만심이 생겨나고 있다. 널리 퍼져 있는 이런 견해에 따르면 미국은 브레튼우즈 통화 체제의 전성기에 최고의 기술 선진국이었고 달러는 압도적인 준비 통화였기 때문에 무역 수지와 경상 수지의 적자를 지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브레튼우즈 방정식의 다른 변에는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추격 경제’ 즉 유럽과 일본이 있었는데, 2차 대전 직후 이 두 지역의 소득 수준은 미국의 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나라들은 수출 주도 성장을 추구하면서 달러에 비해 자국 통화 가치를 낮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경제 규모의 증가에 비례하는 대외 준비금 축적을 위해 경상 수지 흑자를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국제 수지 적자를 봐서 좋은 ‘중심부’ 미국과 흑자를 봐서 좋은 ‘주변부’ 유럽과 일본 사이의 금융적 상호 의존이 20년간이나 균형을 유지시켰던 것이다. 결국 1971년에 달러는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었고 브레튼우즈 체제는 해체되었다. 하지만 그런 종말이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브레튼우즈의 경험을 보면 계속 증가하는 미국의 경상 수지 적자나 그것과 쌍을 이루는 1990년대 말 이후 아시아의 흑자는 분명히 지속 가능한 수준이며 20년 정도는 계속될 수 있다고 말한다. 브레튼우즈 때처럼 지금도 외국 중앙은행이나 정부는 달러를 준비금으로 보유하고 미국은 그런 달러를 공급하는 비정상적인 특권을 누리고 있다. 미국은 자신이 생산한 것 이상으로 소비하며 분에 넘치는 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역시 브레튼우즈 때와 똑같이 고성장을 하는 ‘추격 경제’ 그룹이 있는데, 지금은 대부분 아시아 국가인 이 그룹은 수출 주도 성장의 촉진을 위해 달러 대비 통화 가치를 낮게 유지하고 대외 준비금을 쌓아가는 데 열중하고 있다. 미국이 경상 수지 적자를 기록해서 행복한 것처럼 이 나라들도 흑자를 기록해서 행복해한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타난 불균형을 세계 경제나 세계 금융에 대한 위협으로 볼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사실은 역사 분석에서나 정책 함의에서나 이런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역사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세심한 분석이 아니라 캐리캐처에 가깝다. 브레튼우즈 국제 통화 체제가 허약하고 단명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 체제는 20년(1950년대와 1960년대) 동안 국제 통화 및 금융 관계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럽이 경상 거래에 대한 통제를 철폐한 1959년 초에야 실제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일본이 경상 계정 태환성을 회복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1962년이었다. 그리고 1960년에 이미 달러는 외환 시장에서 압력에 시달렸다. 달러가 다른 통화에 대해 평가 절하되는 것을 막기위해서는 외국 중앙은행이나 정부의 특별한 지원이 필요했다.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1962년에 만들어진 것이 소위 골드풀이다. 골드풀은 오늘날의 G10의 기원이었는데 이 나라들이 당시 개입 조정에 참가한 주역들이었다. 이 모든 것이 어슴푸레한 역사적 소사小史에 불과해보일지 모르지만 중요한 소사이다. 그런 역사적 경험은, 브레튼우즈 체제하의 중심국의 만성적 적자는 균형의 결과라는 시각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더욱이 1960년대에 ‘주변부’라는 하나의 응집적인 추격 경제 블록이 있었다는 관념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이다. 독일과 같은 몇 나라는 상대적으로 인플레이션을 기피했으며 통화절상을 허용할 의사도 있었다. 반면 영국과 같은 나라는 만성적 흑자는 커녕 만성적 적자를 겪고 있어서 달러에 대해 평가절하를 해야 했다. 프랑스 같은 나라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유지에 필요한 달러 지지에 덜 적극적이었다. 이런 사실 역시 더 어슴푸레한 역사적 소사에 지나지 않지만, 브레튼우즈 체제가 왜 유지되었으며 언제 그리고 어떻게 붕괴되었는지를 이해라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  노암 촘스키 /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05.12.11

 

1971년에 이르러 베트남 전쟁은 다른 선진 공업국들과 비교하여 미국을 경제적으로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타개책의 하나로 닉슨 행정부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해체시켰습니다. 2차대전 이후 세계 경제를 조직해온 이 체제 하에서 미국은 세계의 은행 노릇을 했습니다. 이 체제는 미국 달러를 금과 연계된 글로벌 준비 통화로 만들었고, 수입 쿼터 철폐에 대한 조건을 부과했습니다. 그런데 닉슨은 이 체제를 실제로 와해시켰습니다. 금본위제도를 철폐했고, 달러의 태환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관세를 올렸습니다. 다른 나라는 감히 이런 조치를 취할 힘이 없었지만 닉슨은 그것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많은 힘 있는 적들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다국적기업과 국제은행은 브레튼우즈 체제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해체해 버리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를 면밀히 연구해보면 닉슨이 그 당시에도 『월 스트리트 저널』같은 신문에서 공격당하고 있었습니다. 내 생각에 바로 이때부터 힘 가진 사람들이 그를 손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워터게이트는 그 기회를 제공한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  드니 로베르, 베로니카 자라쇼비치 /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2.11.18

 

브레턴우즈 협정은 자본의 흐름을 규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날 즈음 영국과 미국이 브레턴우즈 체제를 창설했을 때만 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있었습니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사회민주주의적 이상理想, 달리 말하면 복지국가를 세우기 위한 열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자면 자본의 이동을 규제해야 했습니다. 자본이 국경을 넘어서 제멋대로 이동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언젠가 금융기관과 투자가가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까지 올라서게 될 것이란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융기관과 투자자는 ‘실질적인 의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실체도 없는 그들이 자본을 회수한다거나 그 밖의 다른 금융조작으로 국가를 위협하면서 국가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자본의 흐름을 규제하고 악의적인 투기와 자본 유출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교환율을 조절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이상을 지켜낼 방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체제가 1970년대 초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민간 기업, 특히 금융자본이 대대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업자본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금융자본의 이동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우려했던 현상이 전세계에서 일어났습니다. 공공 서비스의 질이 현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사회보장제도가 왜곡되고, 실질임금이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노동시간은 늘어나고 노동조건도 악화되었습니다 ….

 


불량국가

–  노암 촘스키 / 장영준 옮김 / 두레 / 2001.10.15

 

개발도상국가의 경우 브레튼우즈 체제 이후의 시대는 전반적으로 볼 때 재앙이었다. 몇몇 국가들은 그러한 재앙으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도 세계은행의 수석 경제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시장은 전지전능하다는 ‘신앙’을 거부함으로써 단지 잠정적으로만 재앙을 피했을 뿐이었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동아시아의 기적은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처방된 공식으로부터 상당히 거리가 먼 정책들을 취함으로써 이루어 낸 결과였다. 다만 동아시아의 떠오르는 스타인 한국은 1990년대 초 자본 자유화에 동의한 이후 심각한 타격을 입기는 했다.” 그와 그 밖의 많은 분석가들은 자본 자유화가 한국이 겪은 금융 위기의 핵심 요인이고 ‘라틴 아메리카화’되어 가는 첫 단계라고 분석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엘리트들은 훨씬 더 심각한 부의 불균형을 경험하고 있으며 “민족주의 성향의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더 허약한 공동체 의식”을 경험하고 있다. 이들은 또 “외국의 고급 금융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유럽과 미국식의 소비와 하이컬처(고급 소비 문화)를 탐욕스럽게 추구하게 하는 요인들이라고 국제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펠릭스는 지적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재산가들은 재산의 이동을 통해 누진 세금을 거부했고 기초 및 중등교육을 위한 지출을 제한하면서도 재정 위기를 겪을 때는 ‘관대한 나라’의 공공 구제금융을 끌어다 썼다. 이는 수세기 동안 자유시장 정책이 보여 온 전형적인 특징이다.”

 


매드 머니 Mad Money

–  수잔 스트레인지 / 신근수 옮김 / 푸른길 / 2000.06.01

 

1965년 2월에 드골은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브레턴우즈 협정 하에서 설립된 국제적인 금본위제에 있어서 달러의 ‘무지막지한 특권’을 공격했다. 그는 전통적인 금본위제와 비교하여 이 제도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유럽 공동 전선이 미국과 전능의 달러에 대항한다는 그의 꿈은, 국제 금융 개혁과 관련된 논쟁에서 서독이 프랑스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세 사라져 버렸다.

서독은 소련이라는 적군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안전 보장으로 미국에 의한 핵우산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독은 이에 대해 미국이 몇 번이나 확인한 바와 같이 암묵의 거래로 NATO에의 가맹과 지지, 금융 재정 운영에 있어서의 미국의 이해에 대한 추종이라는 대가를 지불했다.

 


<관련 그림>

 

1

– 당시 회담 장면

 

WhiteandKeynes

– 왼쪽의 미국 대표 화이트(Harry Dexter White)와 영국 대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유대인인 화이트 뒤에 로스차일드 가문의 입김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2

– 1954년부터의 미국 기준금리(파란색)와 그 전의 기준금리 데이터가 없어 비슷한 3개월 채권금리(빨간색)로 1934년부터의 기준금리를 유추할 수 있다. 1981년까지는 상승하고 이후 지금까지 하락하고 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하여 금리는 0%대로 내려와 1930~40년대와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달러와 미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브레튼 우즈 체제

네이버 지식백과(경제학사전) : 브레튼우즈체제

2015-12-11  中 군사전략가의 美 금융제국 비판 <上>

2009-11-16   달러몰락 재촉…金의 반격

브레튼우즈 체제 (Bretton Woods) – 1944년

One thought on “브레튼우즈 체제 (Bretton Woods) – 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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