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석굴암 석굴 – 국보 제24호

※ 황성열의 세계 – 문화재 : http://yellow.kr/nt.jsp

※ 국보 제24호 / 경주 석굴암 석굴 (慶州 石窟庵 石窟) / 통일신라 / 1962년 12월 20일 지정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삼층석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불탑이나 사리탑과 더불어 석굴도 대표적인 불교건축의 하나이다. 원래 석굴은 기원전 350년경에 인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는데, 예배처(禮拜處)와 수도처(修道處)의 용도로 쓰였다. 불교가 전파되면서 도처에 현지의 자연지세(地勢)와 불교이념에 부응하는 크고 작은 석굴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것으로 5세기 전반에 굴조(掘造)된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얀(Bamiyan) 석굴군과 중국의 3대 석굴이다.

중국에서는 4세기 중반부터 석굴을 짓기 시작하여 5세기 후반부터는 대대적인 개굴(開掘)공사를 벌여 감숙 돈황의 천불동(일명 막고굴莫高窟)과 산서 대동(大同)의 운강석굴(雲崗石窟), 하남 낙양의 용문석굴(龍門石窟) 등 3대 석굴이 출현하였다. 한국에서는 석굴암 이전 7세기 후반의 경북 군위 삼존 석굴이나 경주 골굴암의 관음굴이 있다.

 

당시 불교 미술은 중국 성당(盛唐)의 이상화된 사실주의적 양식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 양식이 신라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유행하여 이 시기의 국제적인 양식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석굴암의 조각은 이 시기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미술품으로, 중대신라 미술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석굴암 조성의 배경에는 화엄, 법화, 유가유식 등 대승불교의 여러 사상이 종합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특히 효도와 진호국가(鎭護國家)를 위한 항마(降魔), 즉 왜적 격퇴의 내용을 담은 『관불삼매해경』을 비롯하여 『관정경』,『금광명경』등의 초기 밀교 경전과 『화엄경』,『법화경』등 여러 대승경전의 사상이 종합적으로 이 석굴암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석굴암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화강암은 경도가 매우 높아 섬세하기 조각하기가 아주 힘든 재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굴암의 모든 불상은 그야말로 완벽할 정도로 섬세하고 우아하다. 석굴암이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세계 어느 문화재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자랑스럽고도 신비로운 우리의 문화유산인 석굴암은 그 만큼의 많은 관심 때문에 논란거리도 많다. 대표적인 논란거리로는:

– 석굴암의 창건 주체

– 석굴암 원형 논쟁

– 본존불은 누구인가?

– 본존불이 바라 보는 곳

등이 있다.

 

우선 석굴암의 구조부터 알아보자.

 


석굴암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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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항공사진으로 상단에 석굴암의 목조전실과 석굴암을 덮고있는 봉토(封土)가 보인다. 목조전실은 석굴암을 둘러싼 논란거리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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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단면도

석굴암 주실 석조 돔 지붕 겉면의 콘크리트 두겁이 일제 때 시설한 것이고, 공간을 두고 그 밖으로 새로 1960년대에 시공한 것이 2차 두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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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의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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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평면도와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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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주실의 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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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불상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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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본존불을 바라보며 오른쪽 방향의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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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본존불을 바라보며 왼쪽 방향의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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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강담사 <주간 세계유산>(2002.10.17)에서의 석굴암 단면도

이 그림을 보면 목조전실이 없다.

 

 

일본 토목기사였던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는 1944년 『조선상대건축의 연구(朝鮮上代建築の硏究)』에서 석굴암의 기하학적 수리관계를 최초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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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네다 미요지는 석굴암 전실을 절곡형으로 보고 계산했다.

 

유홍준은 요네다 미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석불사의 석굴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로 통합된 지고의 최미라고 하였을 때 야나기와 고유섭의 고찰이 그것의 예술성에 대한 성찰이었다면 그것의 과학성을 밝혀낸 것은 한 일본인 토목기사였던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였다.

요네다의 책에 실린 「경주 석굴암의 조영계획」은 석불사 석굴의 과학적 신비를 푸는 첫 실마리이자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요네다는 자신이 측량한 수치를 근거로 하여 「석굴암 석굴의 천체(天體) 표현 사고(私考)」라는 짧은 논문을 썼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천문역술(天文歷術)의 기본인 천문수학을 상기시키면서 “억측”일지 모르지만 일단 제기해본다며 그 수리관계를 이렇게 풀었다.

석굴구성의 기본은 반지름을 12자(지름 24자는 1일 24시간에 일치)로 하는 원(360도는 1년 360일에 일치)이다. 석굴 출구의 12자는 1일(12刻)에 해당하고 궁륭천장(천체우주)은 같은 원둘레에 구축하여 유구한 세계를 표현하고 그 중심(천장덮개돌)에는 원형(태양)으로 큼직하게 연꽃덮개돌을 만들고 구면 각 판석의 사이에 팔뚝돌이 비어져나와 별자리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출처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2 / 유홍준 / 창작과비평사>

 

요네다 미요지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기하학적인 접근은 계속되었다. 석굴암 전실은 전개형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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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방(석굴암에 응용된 조화의 문, 원융과 조화, p.269. 원문:『미술자료』38호, 국립중앙박물관, 1987)

 

11

– 문명대,『석굴암불상조각의 연구』, 동국대박사학위논문, 1987, p.31.

 

12

– 송민구,『한국 옛 건축의 조형의미』, 기문당, 1987, p.138.

 

13

– 정명호,「石佛寺에 관한 몇 가지 管見」,『초우황수영박사고희기념미술사학논총』, 통문관, 1988

정명호의 도면은 총독부의 1차 공사 직전의 실측도를 대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곧, 변형되기 전의 석굴암에서 전개형의 정당성을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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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훈, 1990년「석굴암의 건축적인 조형계획」,『석굴암의 과학적 보존(자료편)』

 


석굴암의 불상

 

1. 본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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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본존불. 참 대단하다.

 

석굴암 본존불은 높이 약 3.4미터의 거대한 불상이다. 석굴 중앙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부좌(趺坐)하였고, 수법이 정교하며 장중웅려(莊重雄麗)한 기상이 넘치는 매우 보기 드문 걸작이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친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을 하였고,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다.

 

강우방은 석굴암 본존불의 도상이 7세기 인도 부다가야의 대각사(大覺寺)에 봉안되어 있던 주불을 모델로 삼았음을 논증했다.

당나라의 현장(A.D602~664)이 17년간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고 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보면,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룬 바로 그 자리에 대각사(大覺寺)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 정각을 이룬 모습의 불상이 발을 괴어 오른발 위에 얹고, 왼손은 샅 위에 뉘었으며 오른손을 늘어뜨리고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대좌의 높이는 당척 4척2촌이고 넓이는 1장2척5촌이며 상의 높이는 1장1척5촌, 양 무릎폭이 8척8촌, 어깨폭이 6척6촌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석굴암의 본존불 크기와 이 기록이 일치하고 있는데, 현장이 보았던 대각사의 그 불상은 현존하지 않고 있어 석굴암에 역사적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강우방>

 

석굴암의 본존불의 명칭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석가불, 아미타불이 우세하지만 비로자나불 등의 주장도 있다. 하지만 석굴암 조성의 배경에는 화엄, 법화, 유가유식 등 대승불교의 여러 사상이 종합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그 당시에는 통불교적인 분위기가 우세하였기 때문에 여러 경전의 사상을 포괄적으로 소화하여 본존불로 구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십일면관음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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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

 

우리나라 석조 관세음보살을 대표하는 작품이 석굴암 본존불 바로 뒷면 후벽 정중앙의 11면관세음보살입상이다. 머리 위에 불상 1기와 보살 10기의 얼굴이 조각된 보관(모자)를 쓰고 있어 11면관음보살이라고 한다.

 

관음보살은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 속에 거의 들어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널리 신앙되었다. 《법화경法華經》 <보문품普門品>에는 위난(危難)을 당한 중생이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관음이 즉시 33종류의 화신으로 변해 그들을 구해준다고 되어 있으며, 현령(顯靈)하여 불법을 강연하던 도량(道場)이 절강성浙江省 보타산普陀山에 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관음보살은 이 고통 받는 세계를 내려다보고는 자비심으로 가득 차서 머리에서는 수없이 많은 머리가 솟아났고(도상학적으로는 11개로 그려진다), 몸에서는 도움의 손길이 달린 천 개의 팔이 솟아났는데 이것은 마치 휘황찬란한 광배와 같았고, 그 각각의 손바닥에는 무한한 시야를 가진 눈들이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법화경法華經》 외에 《화엄경華嚴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능엄경楞嚴經》을 중심으로 관음신앙이 전개되었다.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을 대세지보살과 지장보살과 함께 협시하는 경우가 많고, 아미타를 협시하는 8대 보살로서도 많이 표현된다. 형상은 머리의 보관에 아미타불을 새기고 손에 보병이나 연꽃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의 절에서 초기에는 남자상이 많았으나, 당대(唐代) 이후로는 여자상으로 바뀌었다. 밀교의 관음은 백의관음白衣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羂索觀音 등이 있는데, 이는 중생의 제도를 위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한 것이다.

 

 

3. 팔부중상 (팔부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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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가루라迦樓羅, 마후라가摩睺羅伽, 야차夜叉, 긴나라緊那羅, 용龍, 건달바乾達婆, 천天, 아수라阿修羅

 

석굴암 전실을 들어서면 양쪽 벽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있으나 내부의 것에 비해 그 수법의 정교함이 덜하다.

 

팔부신장(八部神將)이라고도 한다. 인도에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던 신들 가운데 여덟 신을 하나의 군으로 수용해서 불교의 수호신으로 삼아 조성한 상을 말한다. 따라서 팔부중은 처음부터 일정한 체계에 의해서 정형화된 것이 아니라 점차 발전되고 변모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4. 인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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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로 입구 양 옆에는 인왕(仁王) 혹은 금강역사 한 쌍이 석굴 입구를 지키고 있다. 산스크리트로 Vajrapani인데 ‘벼락 운반자’라는 뜻이다.불법을 수호하는 한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고, 산스크리트로 Vajrapani인데 ‘벼락 운반자’라는 뜻이다.

 

 

5. 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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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방 광목천왕(西方 廣目天王), 남방 증장천왕(南方 增長天王), 동방 지국천왕(東方 持國天王),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

 

입구 통로, 즉 비도(扉道)의 좌우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각 2개씩 반육각되어있다.

 

사천왕은 사대천왕(四大天王)·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한다. 욕계육천(欲界六天)의 최하위를 차지한다.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6. 천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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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로 입구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이 있다.

 

범천(梵天, 산스크리트어: ब्रह्मा 브라흐마)은 불교의 수호신인 천부 중 하나이다. 고대 인도의 신 브라흐마가 불교에 편입된 것으로서 십이천에 포함된다. “범”은 브라흐마의 음차이다.

제석천(帝釈天, 산스크리트어: शक्र 샤크라)은 불교의 수호신인 천부 중 하나이다. 천주제석(天主帝釈), 천제(天帝), 천황(天皇)이라고도 한다. 바라문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의 무신이자 히타이트 조문에서도 등장하는 뇌신 인드라가 불교화된 것이다.

 

 

7. 보살상

천부상 옆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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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문수보살

문수보살(文殊菩薩, 산스크리트어: मञ्जुश्री Mañjuśrī, 만주슈리)은 ‘훌륭한 복덕(福德)을 가진’ 혹은 ‘완전한 지혜를 가진’ 불교 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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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보현보살

보현보살(普賢菩薩, 산스크리트어:समन्तभद्र, Samantabhadra, 사만타바드라)은 불교의 진리와 수행의 덕을 맡은 보살이다.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모니 여래 옆을 지키고 있으며, 연와대에 앉거나 여섯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있다. 사보살의 하나다.

 

 

8. 10대 제자상

석굴 벽면에 십나한(十羅漢)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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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불, 마하목건련, 마하가섭, 수보리, 부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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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전연, 아나율, 우파리, 라훌라, 아난타

 

 

9. 감실상

10대제자상 위로 벽의 윗부분에는 10개의 불감(佛龕)을 만들어 그 속에 작은 부조상을 하나씩 안치하였다. 그 중에는 1체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과 7체의 보살상이 있다. 두 개는 대한제국 때 일본인이 반출해서 지금은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석굴암의 역사

 

1. 통일신라때 김대성의 창건

고려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또한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 불국사와 석굴암

 

건축 규모 등을 미루어 석굴암과 불국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전하는 김대성 개인이 창건한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건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석굴암은 건립당시에는 석불사로 불리었다.

 

 

2. 고려, 조선시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석굴암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1688년 5월15일 석굴암을 방문했을 때 ‘불상들이 살아 있는 것 같다’고 표현하며 석굴암 입구의 홍예와 본존상 좌대석, 주벽의 여러 조각 등이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표현해 당시까지 석굴암은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승려와 시인, 신도들이 방문해 시를 짓고, 겸재 정선의 그림과 화첩이 남아 있어 당시 전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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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의 골굴석굴도 / 간송미술관 / (골굴암?, 석굴암?)

윗그림은 정선이 1733년(영조 9년)에 그린 ‘교남명승첩(嶠南明勝帖)’ 2권 중에 있는 골굴석굴도이다. 이 화첩에는 석실 입구에 전실(前室)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어, 후의 복원공사에서 목조 전실을 만들게 된 근거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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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중엽의 경주부 지도

목조 건물로 씌워지지 않은 석굴 옆에 목조 암자가 있으며, 석굴의 위쪽에 ‘골굴’에는 많은 목조 암자들이 있다.

 

조선 말기인 1822년(순조 22년)에 간행된 <불국사고금창기>에도 석굴암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1703년(숙종 29년)과 1758년(영조 34년)에 석굴암을 중창하고 굴 앞에 계단을 쌓았다”는 내용으로 미뤄 이때까지 석굴암은 토함산 자락에 묻혀 있다가 다시 법등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때부터 석불사를 석굴암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석굴암이 중창되고 난 후 1767년(영조 43년) 조선 후기의 학자 임필대(任必大, 1709~1771)는 석굴암 방문 후 “석굴암은 온전하게 그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3. 일제 강점기

1912년의 중수를 위한 기초조사에 따르면, ‘천장의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으로부터 흙들이 들어오고 있으며, 구멍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본존 불상까지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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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년도 경 석굴암의 퇴락한 모습.

지금은 목조건물이 있는 전실에 지붕이 없어 눈이 쌓여 있고, 주실 전면의 이마 부분이 붕괴되어 구멍이 나있다.

 

일제시대인 1912년 초대총독 데라우치가 석굴암을 방문한 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는 석굴암에 대해 세 차례의 중수를 행했는데, 제1차는 1913-1915년, 제2차는 1917년, 제3차는 1920-1923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1차 중수는 거의 완전한 해체 및 복원공사였다. 당시 그들은 새로운 재료로 등장한 시멘트를 석조물 조립에 사용하였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석굴암 보존에 있어 큰 어려움을 남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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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유리원판사진 95년만에 첫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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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석굴암

 

 

4. 해방 후

해방 이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방치되어 오다가 석굴암은 말라붙은 새똥과 이끼, 곰팡이가 피고 말았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2년간 문화재관리국의 주도로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일제가 바른 시멘트로 인해 습도와 온도 유지가 어려워지고, 내부에 맺힌 물이 시멘트를 녹여 결과적으로 화강암으로 된 조각상들을 침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존의 시멘트 구조물 위에 약간의 공간을 두고 그 위에 돔을 덮었다.

그리고 이때 외부 습기를 차단하기 위해 유리로 봉인하고, 습기제거장치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렇게 밀폐된 공간 속에 관람객들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와 이물질이 갇혀 화강암을 손상시키는 점이 지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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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시멘트 돔 설치 공사 중인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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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목조전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목조에 기와를 덮은 전실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석굴암의 통풍을 막는 요소라고 지적되고 있다. 그래도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자 196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김효경 교수는 석굴암 우측에 환풍기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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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팔부신중의 변화 (논란이 있다)

 

1970년부터 또 다시 앞지붕을 짓고 입구에 유리로 설치해 실내의 습도가 항상 조절되고 있지만, 일반인은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매년 석가탄신일에만 석굴암 내부까지 공개된다.

 


석굴암의 논란

 

석굴암의 창건 주체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불국사와 석굴암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 주요한 이슈이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김대성 설화’가 두 사찰의 유일한 창건연기설화이다 : 삼국유사 – 대성효이세부모(大成 孝 二世 父母)

◎ 국찰(國刹)의 성격을 갖는 사찰이라면 정사(正史)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독 김대성의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점에서 김대성 개인의 비원을 담은 원찰(願刹)이었다는 주장

◎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는 것은 정치적인 문제로 인한 기록 인멸 :

불국사가 김대성의 개인사찰로 둔갑한 까닭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2007-12-18  “김대성은 석굴암 창건자 겸 조각가”

2005-09-15  <뚜껑 연 ‘판도라 상자’ 석가탑 중수기>(2)

 

 

석굴암의 원형 논쟁

◎ 광창

– 남천우 : 현재의 석굴은 완전히 밀폐구조로 되어 있어나 원래에는 완전히 개방구조였으며 출입문은 개방되어 있었으며 그 위에는 광창이 있었으며 내부 주벽 상부에도 10개에 달하는 간접 광선과 통풍을 위한 창구가 있었다.

– 성낙주 : 남천우 교수의 주장대로 광창을 낸다면 일종의 토굴 모양이 될 터인데, 이는 석굴 위를 엄청난 무게의 잡석과 흙, 기왓장이 덮히게 되어 있는 석굴암의 구조상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 거룩한 성소를 들짐승이나 날짐승이 마구 드나들어 더럽힐 게 뻔한 상황에서 일부러 그런 통로될 것을 만들어 놓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 목조전실(木造前室)

– 남천우 : 지금의 전실에 해당되는 공간은 원래 작은 마당이었다.

– 최영성 : 19세기 말 석굴암 중수 공사를 기록한 상량문을 분석하여, 중수 공사 전에는 지금과 달리 목조전실 등 목구조물이 없었다는 주장

– 성낙주 : 기후나 위치 등의 자연조건 자체가 창건 당시와 크게 다를 바 없음을 감안할 때 조각상의 보호를 위해서나, 예배처라는 석굴암의 성격상 전실의 목조지붕은 필수적이다. 이제는 그 존재 유무를 다투는 식의 불필요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며, 차라리 그 목조지붕 양식의 원형을 궁구하고 복원하는 데나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 팔부신중의 배열방식

– 김원용 박사는 절곡(折曲)을 주장, 황수영 박사가 현재 처럼 전개형으로 복원함

– 성낙주 :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에 의해 대등하게 설계된 전실과 주실의 면적 대비를 고려해 볼 때도 절곡형보다는 전개형이 백번 타당하다. 또한 여덟 신중 가운데 두 신중만 꺾어 세움으로써 석굴암 전체를 관통하는 대비·대조의 흐름을 망가뜨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2007-09-18 <기자수첩> 석굴암의 ‘원형’

 

 

석굴암 본존불은 과연 누구인가?

석불사 석굴사원의 본존불을 우리는 그냥 본존불이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 있다. 그 이유는 이 불상이 석가모니라는 설, 아미타여래라는 설, 비로자나불이라는 설 등이 팽팽히 맞서 있기 때문이다.

◎ 석가모니

본존불의 인상(印相)은 분명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성도할 때 마귀를 항복시키고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순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민영규 선생은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은 법화경의 『견보탑품』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미루어 석불사 본존을 영취산 정토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로 보았고, 문명대 교수는 『관불삼매경』에 근거를 둔 석가상으로 주장하며, 남천우 박사는 12지연기보살과 연계된 석가여래라는 설을 내놓았다.

 

◎ 아미타여래

황수영 박사는 아미타여래설을 주장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군위 삼존불에서도 보이듯 아미타여래도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예가 있고 8세기 중엽에는 미타신앙이 팽배해 있었던 점, 본존불 뒤에 11면관음보살상이 있는 점, 석불사에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현판이 19세기에 걸려 있었다는 주장 등에 근거한 것이다.

 

◎ 비로자나불

이 본존불을 불법 그 자체를 의미하는 법신불(法身佛)로서 비로자나불이라고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김리나 교수는 화엄경의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에서 적멸도량의 깨달은 부처는 설법장소가 바뀌어도 촉지의 자세로 다른 곳에 화신(化身)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비로자나불이면서 석가의 권속들을 이끌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본존불이 바라 보는 곳

◎ 황수영 박사는 본존불이 대왕암을 바라보고 있다는 설을 1964년에 발표

 

◎ 남천우 박사는 본존불이 바라보는 곳은 동짓날 해뜨는 방향(29.4°)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석굴암에서 망각된 고도의 신라과학」에서 발표하였다.

 


 

그외 석굴암에서 짚어 보아야 할 내용으로 성낙주의『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을 인용하여 정리하면:

 

● 천개석: 3조각난 천개석을 그대로 얹어 공사를 마무리한 것은, 당시 고구려·백제 유민을 아우르며 통일전쟁의 후유증을 화해와 통합의 길로 이끌어야 하는 당대 지식인들의 고뇌가 김대성을 통해 승화된 상징물로 보아야 한다. 참회와 화쟁에 기반한 석굴암 조영 원리에 비춰봐서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 돔형 지붕: 실크로드에서 만난 동서양의 건축과 조각이 경주 석굴암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루었다. 로마 판테온 신전의 돔형 지붕과 석굴암의 돔형 지붕이 보이는 구조적·미학적 유사성과 친연성은 너무도 뚜렷하다. 돔 지붕의 나머지 반구(半球)를 마저 그려볼 때 나타나는 높이와 평단면 직경의 일치라는 비례의 동일함이나, 돔 지붕의 5단 구성, 원형의 주실과 사각형의 전실을 둔 배치 등이 특히 그렇다. 물증 자료의 불비함을 메우는 일 등이 남는 문제이지만, 이는 앞으로 충분히 논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삼국유사』 소재의 ‘김대성설화’에 대한 신화학적 해석이나 석굴암에 구현된 미학원리, 혹은 동양고대건축에서 유일무이한 석조 돔 지붕의 기원 문제 등이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 관련 그림 >

 

토함산지구안내도

– 토함산 중턱에 석굴암이 있다.

토함산含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는 두 가지 설이 전해온다. 하나는 동해바다와 가까이 있어 자주 발생하는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산이라는 설과, 또 하나는 신라 4대 왕인 탈해 왕의 이름에서 연유됐다는 설이다.

탈해는 海龍系의 神人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토해吐解’로도 썼다. ‘吐’와 ‘脫’은 유사음의 차용표기로, ‘토해吐解’와 ‘토함吐含’은 같은 말로서 각각 인명과 산명이 되었다.

 

<출처 : 역주 삼국유사 / 정신문화연구원>

 

 


< 관련자료 및 참고자료 >

 

석굴암

위키 백과 : 석굴암

네이버 지식백과(세계미술용어사전) : 관음보살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팔부중상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사천왕

위키백과 : 범천

위키백과 : 제석천

https://en.wikipedia.org/wiki/Avalokite%C5%9Bvara

석굴암의 변명

성낙주의 석굴암미학연구소 : http://blog.daum.net/chakraba

석굴암 바로 알기 (법보신문에 연재된 기사 모음)

석굴암, 석가모니불’정각(正覺)’의 상징 (강우방 / 법보신문)

성낙주의 ‘석굴암’ – 이진기·송태호의 ‘석굴암’ (Buddhapia)

석굴암 주실, 두 겹 이상 기와지붕 판명 (2005.01)

석굴암 주실 지붕 사진에 엇갈린 평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2 (유홍준 / 창작과 비평사)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 (성낙주 / 개마고원)

석불 돌에 새긴 정토의 꿈 (최성은 / 한길아트 / 2003.02.15)

손종흠 교수의 다시읽는 한국신화 (손종흠 / 휴먼앤북스)

씰크로드학 (정수일 / 창작과비평사 / 2001.11.20)

토함산솔이파리

아름다움을 찾아서

석굴암

http://www.stone.biz/zogak/daesung/culture/sokkuram/index.html

2017-03-24  “석굴암 원래 모습엔 지금의 목조 전실 없었다”

2014-12-18  석굴암은 신들의 거처였다

2013-12-12  세계문화유산 석굴암의 보존내력

2004-10-11  석굴암 제대로 보기(1)

2004-10-16  석굴암 제대로 보기(2)

경주 석굴암 석굴 – 국보 제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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