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전쟁 (1095 ~ 1291)

십자군전쟁(Crusades)에 대해 알아 보았다. 여기에서는 주로 원인과 성격, 그 영향과 결과에 촛점을 맞추고 조사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아래 <개설철학사>에서 얘기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십자군이라는 사건은 서구사(西歐史)의 내부에서 본다면, 가톨릭 ‘교권’의 신장과 그에 의거한 서구 세계의 중세적 ‘통일’에서 나타난 것이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서구 세계의 ‘반격’ 개시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까지 이슬람 세계의 ‘진격’에 의하여 지리적으로는 자기의 일부에 속하는 스페인까지도 상실했던 서구 세계는 간신히 이 시점에서 내부적인 ‘통일’을 달성하여 ‘반격’으로 전화轉化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십자군전쟁과 같은 유럽 팽창의 주요 요인 중의 하나인 ‘중세 온난기’라 불리는 기후의 변화에 대해서(로마의 번영도 당시 온난기와 상관관계가 있단다)는 다음의 글에서 알아 보았다.

* 중세 온난기 : http://yellow.kr/blog/?p=619

 

 

십자군

– 당시 주요 도시들과 육로, 해상로가 나타난다. (출처 : 두산백과)

 

이 당시의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연대표를 보면서 파악해야 구조적으로 해석하는데 도움이 될 듯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100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찾았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  리오 휴버먼 / 장상환 역 / 책벌레 / 2000.04.15

 

십자군은 상업을 크게 촉진했다. 수만 명의 유럽인들이 이슬람 교도들에게서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육로와 해로로 대륙을 건넜다. 그들은 원정 내내 물품이 필요했고, 상인들이 이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동행했다. 동방 원정에서 돌아온 십자군 전사들은 그들이 보고 즐긴 진기하고 사치스러운 음식과 옷에 대한 욕구도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의 수요가 이런 상품을 위한 시장을 탄생시켰다. 게다가 10세기를 지나면서 인구가 급증했고, 인구가 늘어나자 필요한 재화도 늘어났다. 그리고 늘어난 인구 중 일부는 토지가 없었기 때문에 생활 조건을 개선할 기회를 십자군에서 찾았다. 지중해 연안의 이슬람 교도들과 동유럽의 여러 부족들을 상대로 한 영토 전쟁은 십자군이라는 존엄한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약탈과 토지를 위한 전쟁이었다. 교회는 이 약탈 원정이 복음을 전파하거나 이교도를 절멸하거나 성지를 수호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존엄을 가장했다.

성지 순례는 일찍부터 있었다.(8세기부터 10세기까지 34번 있었고, 11세기에는 117번 있었다.) 성지를 수복하고자 하는 열망은 진실했고 딴 속셈이 없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의 진정한 힘과 그것을 이끈 활력은 특정 집단이 얻을 수 있었던 이익에 주로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 집단은 첫째, 교회였다. 물론 교회는 분명한 종교적 동기가 있었다. 교회는 당시가 전쟁의 시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만약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기독교국으로 바뀔 다른 나라들로 전사들의 폭력적인 열정을 옮겨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교회는 세력 확장을 원했고, 기독교 세계가 넓어질수록 교회의 권력과 부도 커졌다.

둘째, 아시아의 이슬람 세력권 중심과 매우 가까이 있었고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둔 비잔틴 제국과 비잔틴 교회(그리스 정교회)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십자군을 세력 확장의 기회로 여겼던 한편, 그리스 정교회는 자기 영토에 이슬람 교도들이 진출하는 것을 막을 수단으로 보았다.

셋째, 전리품을 원했거나 빚을 진 귀족과 기사, 유산이 적거나 전혀 없었던 젊은 자제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십자군이 토지와 부를 얻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넷째, 이탈리아의 도시들인 베네치아 · 제노바 · 피사였다. …… 이탈리아의 무역 도시들은 십자군을 상업상의 이익을 얻을 기회로 여겼다.

……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군의 결과는 일시적이었다. 왜냐하면 이슬람 교도들이 결국은 예루살렘 왕국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업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군의 결과는 엄청나게 중요했다. 십자군은 기도하는 사람들, 싸우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성장하는 상인 계급을 유럽 대륙 전역에 퍼지게 함으로써 침체된 서유럽 봉건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십자군은 해외 상품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 십자군은 지중해 항로를 이슬람 교도들에게서 빼앗았고, 이것을 다시 고대에 그랬던 것처럼 동방과 서방 사이의 중요한 무역 항로로 만들었다.

……

12세기 이후로 시장 없는 경제는 많은 시장이 있는 경제로 변모했다. 그리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중세 초기의 자급자족하는 장원의 자연 경제는 상업이 팽창하는 세계의 화폐 경제로 변모했다.

 


2천년 동안의 정신

–  폴 존슨 / 김주한 역 / 살림 / 2005.12.12

 

11세기 중엽의 유럽은 봄이었다. 북쪽의 바이킹족의 침입과 남쪽의 이슬람의 침략이 한풀 꺾였던 시기로, 서방 기독교 세계가 야만적인 이교도들의 독 이빨로부터 빠져나왔던 것이다. 농업 생산량도 점차로 증가되었고, 그에 따라 인구와 무역의 규모 또한 늘어났다.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들도 전파되고 있었다.

……

10~11세기에 왕권은 교회의 유력자들과의 다툼에 밀려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왕권은 본질적으로 왕이 소유한 토지의 양과 비례하였는데, 이 시기에 왕의 토지 또한 점차 줄어들었다.

 

십자군 전쟁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나?

십자군 전쟁은 다음의 세 가지 요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요인은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소규모로 전개되었던 ‘성전(holy war)’의 발전이었다. 십자군은 1063년에 이슬람 세력에 의해 살해된 아라곤(Aragon) 왕 라미로 1세(Ramiro)의 복수를 위해 소집된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의 군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2세는 전장에 나갈 때에 십자가의 이름을 앞세웠으며 이 전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의무를 면제시켜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 또한 스페인을 돕는 국제적인 연합군 창설을 후원하였으며, 기사(knight)들에게 자신이 정복한 땅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해 주었다. 다시 말해 십자군 운동은 교황령을 넓히려는 욕구와 연결되어 강력한 정치 · 경제적인 동기들을 유발시켰던 것이다.

 

둘째 요인은 800년경부터 시작된 프랑크족의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카롤링거 국왕들은 스스로 예루살렘 성지와 그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할 의무와 권리가 있음을 주장해 왔으며, 적어도 11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이슬람 칼리프들은 이를 인정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10세기 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자 클뤼니 수도원에서는 순례지 곳곳마다 순례자들을 접대할 수 있는 수도원들을 세워나갔으며, 무슬림들의 동의 아래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호위병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1064~1066년에 7천 명의 독일인들이 중무장을 한 상태에서 예루살렘을 여행하였다. 외형적으로 보면 십자군은 대규모의 순례단처럼 보여 그들 사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1세기 말에 이교도들의 땅을 정복하려는 스페인 사람들과 대규모로 무장한 순례자들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결합되면서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구의 지도자들이 십자군 전쟁을 감행하게 된 실제적인 동기는 11~12세기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의 증가와 그에 따라 발생한 토지의 부족에 있었다.이것이 십자군 전쟁을 발발하게 한 세 번째 요인이다. 시토 수도원이 국경지역에서 토지를 개척하려 했던 것도 토지가 부족해지면서 생긴 현상이며, 십자군 전쟁 역시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기도 했다.

 

십자군 운동의 실패

12세기가 넘어가자 십자군의 인기는 급속도로 떨어졌다. 인구가 이전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하지도 않았고 인적 자원이 풍부하였던 프랑스마저도 십자군에 참여하기보다는 도시로 모여드는 경향을 보였다. 독일에서는 튜튼족 기사들이 프로이센과 폴란드까지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유럽의 인구는 1310년 이후부터 감소하다가 14세기 중엽부터는 노동력이 극심하게 부족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이러한 인구 불균형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다시 회복되었다). 그렇다고 인구가 부족해져서 십자군이 실패했다고 볼 수 만은 없다. 무엇보다 12세기 말부터 십자군 운동을 옹호하는 이론들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파르시팔 Parsifal』의 저자인 볼프라메 폰 에센바하(Wolframe von Eschenbach)는 1210년 경에 『빌레할름 Willehalm』에서 십자군 문제를 다루었는데, 이 저술은 12세기 중엽에 썼던 『롤랑의 노래 Rolandslied』와는 다른 논조를 보였다.

『롤랑의 노래』에서는 십자군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짐승처럼 살해되는 이교도들을 보며 행복하게 노래하였던 것에 비해, 『빌레할름』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부인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라센 여인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이교도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장을 서슴없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십자군이 12세기 이후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난 이유도 십자군의 숫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고 첫 10년 동안, 즉 1095~1105년 사이에 약 1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성지(Holy Land)로 갔으나 그들은 자녀를 거의 낳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크족들의 아이들은 오래 살지 못했고, 특히 남자들의 사망률이 높았다. 이때문에 동방지역에 정착했던 프랑크족의 이주민들은 한두 세대가 지나자 다 죽고 사라졌던 것 같다. 12세기에 제2, 제3의 이주물결이 몰아닥쳤으나 이들 역시 10명에 1명 꼴로 죽었다. …… 기독교인들이 식민지 국가로 이주하여 이곳을 적극적으로 발달시키려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던 운송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시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교회가 이민자를 도울 수도 있었으나, 불행히도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십자군

–  토머스 F. 매든 / 권영주 역 / 루비박스 / 2005.05.30

 

흔히 중동 사람들은 오래전 과거의 일도 잊지 않으며 십자군은 서구에서는 잊혀진 과거가 되었을지 몰라도 중동 지방에서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고들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겨우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 십자군을 가리키는 말 ‘하르브 알 살리브(Harb al-Salib)’는 19세기 중반에 비로소 생겼으며, 아랍에서 처음으로 십자군에 관한 역사가 써진 것은 1899년의 일이었다.

서양인들에게는 중동 사람들이 최근에야 비로소 십자군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뜻밖일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기독교도들이 수백 년간 그들에 맞서 벌인 거룩한 전쟁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는가? 그러나 십자군은 유럽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어도 이슬람에게는 지극히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이슬람교도들은 전통적으로 이슬람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 벌어지는 일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이교도와 벌인 다른 전쟁들이나 십자군이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십자군은 어차피 실패했으므로 의미도 없었다. 18세기에는 중동에서 십자군에 대해 들어본 이슬람교도를 찾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심지어 19세기에 와서도 오로지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십자군을 알고 있었다. 이슬람의 장대한 역사에서 십자군은 조금도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이슬람의 인식이 달라졌다. 십자군이 처음으로 이슬람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사실상 십자군에 대한 이슬람의 기억은 만들어진 기억, 사건이 발생하고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존재하게 된 기억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앞서 보았듯이, 오스만 제국이 함락된 후 유럽의 식민 열강이 중동을 지배하게 되면서 그들은 중세의 맥락으로 이해한 십자군의 개념을 중동에 들여왔다.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은 책과 식민 교육을 통해 이슬람 세계에 십자군을 가르치며 그것이 중동에 문명을 가져다주기 위한 영웅적인 전쟁이라고 가르쳤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  아민 말루프 / 김미선 역 / 아침이슬 / 2002.04.27

 

이 책은 지극히 간단한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십자군을 보고, 겪었고, 기록을 한 ‘다른 편’의 이야기를 적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른 편은 곧 아랍이다.

아랍 사람들은 십자군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프랑크인들의 전쟁 내지는 침략이라고 말한다. 프랑크인들(les Francs)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바는 지역, 저자들,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Faranj, Faranjat, Ifranj, Ifranjat …… 이 명칭들을 하나로 묶는 뜻에서 나는 좀 더 단순한 형태를 골랐다. 오늘날 서유럽인들을 가장 대중적으로 부르는 말로, 특히 프랑스인들을 지칭하는 프랑코(Franj)다.

……

겉으로는 아랍 세계가 눈부신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였다. 서유럽인들이 연이은 침공으로 이슬람이 뻗어 나가는 것을 억제할 생각이었다면 그 결과는 완전히 반대로 나타났다. 무슬림들은 프랑크 국가들의 2세기에 걸친 동방 식민 지배를 완전히 뿌리뽑는 데 그치지 않고, 오스만 투르크의 깃발 아래 서유럽을 정복하러 다시 나설 만큼 세력을 회복한 것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그들의 손에 떨어진다. 1529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기병들이 베네치아 코앞까지 몰려왔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겉모습일 뿐이다. 역사라는 가늠자로 보자면 상반된 관찰도 필요한 법이다. 십자군 전쟁 동안 에스파냐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아랍 세계는 아직은 지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가장 앞선 문명의 보고였다. 그러나 나중에 세계의 중심은 결정적으로 서쪽으로 옮겨진다. 여기에는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것일까?  과연 십자군이 서유럽에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으며-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아랍 문명에는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까?  물론 전혀 그릇된 판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판단이 약간의 수정을 요한다는 점이다. 아랍인들은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분명한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프랑크인들이라는 존재가 그것을 드러나게 했고 더 악화시켰을지는 모르지만 그 결함을 창출한 장본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9세기에 들어서면서 예언자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을 잃었다. 실제로 그들을 통치했던 지배자들은 하나같이 이방인들이었다. 2세기에 걸친 프랑크인들의 점령 기간을 통틀어 연이어 등장한 그 많은 통치자들 중에 진짜 아랍 사람이 누가 있던가?  연대기 저자들, 카디들, 소국의 왕들-이븐 암마르, 이븐 문키드 등- 그리고 무능한 칼리프들을 보라. 앞장서서 프랑크인들과 싸웠던 실권자들-장기, 누르 알 딘, 쿠투즈, 바이바르스, 칼라운-은 투르크족이었다. 알 아흐달은 아르메니아 출신이었고, 시르쿠, 살라딘, 알 아딜, 알 카밀은 쿠르드족이었다. 물론 이들이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아랍에 동화된 인물들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1134년에 술탄 마수드가 칼리프 알 무스타르시드와 회담할 때 통역관을 대동해야 했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그 일족이 80여 년이나 다스렸지만 셀주크 왕은 아랍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또 있다. 아랍이나 지중해 문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수많은 유목민 전사들이 정기적으로 군대의 지배층에 편입되곤 했다. 자신들의 땅에 들어온 외국인들에게 지배당하고, 압박받았으며, 우롱당했던 아랍인들은 7세기에 벌써 꽃피기 시작한 그들의 문화적 부흥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프랑크인들이 들어올 즈음에 그들은 이미 과거에 얻은 것에 만족하며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었다. 비록 이 새로운 침입자들에 비한다면 그들은 거의 전 영역에서 앞서 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쇠락은 시작되고 있었다.

첫 번째 결함과도 상관 있는 아랍인들의 두 번째 ‘결함’은 확실한 제도를 구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동방으로 들어오던 무렵 프랑크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 예루살렘만 보아도 권력의 계승이 대체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왕국의 평의회가 단일 군주의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성직자의 역활도 인정받고 있었다. 무슬림의 나라에서는 그러한 장치가 없었다. 군주가 죽으면 항시 그 권력이 위협당했으며, 무슬림 국가치고 계승 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그 책임을 국가의 존립 자체를 불안하게 한 연이은 침공 탓으로 돌려야 할까? 아니면 아랍인들 자신을 비롯해 투르크나 몽골 같은 유목민 출신 민족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까?

 


십자군 전쟁

–  W.B. 바틀릿 / 서미석 역 / 2004.01.10

 

옮긴이의 글

 

십자군은 단순히 종교전쟁인가. 아니다. 그렇게 단편적이기보다는, 당시의 상황으로 모든 요인들이 맞물려 빚어진 총체적인 드라마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사회적으로 살펴보면, 봉건시대가 점차 정착하면서 봉토를 물려받을 수 없는 장자 이외의 아들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스스로 개척해야 했으므로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호전적인 전사계급들의 개인적인 전쟁으로 성직 계급과 일반 대중들은 그들의 무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사들의 교전 무대를 유럽 내부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돌리고자 하는 사회계층의 바람과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고자 하는 교황의 야욕이 적절하게 일치했다.

둘째, 종교적으로는, 힘겨운 삶을 영위하고 있던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떠돌이 수도승들이 성지 예루살렘에 대해 환상을 품게 만들었으며, 교황은 십자군에 참가하는 전사들에게 전폭적인 대사(大赦)를 베풂으로써 이교도에 대한 살인 행위를 정당화시켜주었다.

셋째, 경제적인 면에서는, 무역으로 번성하기 시작하던 이탈리아 도시들은 동방으로 눈을 돌려 시장과 교역 규모를 확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미 축적된 부로 인해 대규모 원정에 드는 막대한 자원의 조달도 가능했다. 일단 이렇게 유럽의 내부적인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다.

이제 마지막이면서도 제일 중요한 한 가지 요인이 남았다. 그것은 바로, 이미 11세기에 아랍 중심의 동질성이 무너진 상황에서 이방인인 투르크족이 용병으로서 아랍을 실질적으로 지배함으로써 빚어진 이슬람 세계의 내부갈등과 분열된 팔레스타인 지역의 혼란이었다. 거기에 남의 힘을 빌어서라도 잃어버린 제국의 영토를 되찾고 싶어하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마지막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이렇듯이 모두 한 배 위에서 동상이몽을 꿈꾸는 사람들의 원정이었으므로 십자군의 불순한 이상은 곧 쉽사리 타락하는 것이 당연했다.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신의는 애초에 내팽개쳤고, 언제든 적과의 동침도 가능했으며, 같은 종교의 뿌리에서 나온 다른 종파의 사람들에게 칼을 겨누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 있을 수 없었다.

 


철학 역사를 만나다

–  안광복 / 웅진지식하우스 / 2005.12.20

 

십자군이 제1차 원정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이슬람 세계의 무지와 분열이 큰 역활을 했다. 사실, 대다수 무슬림은 십자군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에 그들은 십자군의 침입을 그 당시 흔했던 영토 분쟁 정도로만 여겼다고 한다. 무슬림은 기독교도들이 자신들에게 신앙적 적대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당시는 이슬람 국가의 왕들이 여느 이웃 국가들에게 하듯, 다른 이슬람 국가를 치기 위해 기독교 국가에 동맹을 청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십자군 전쟁은 서로 피 터지게 치고받는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전쟁을 정당화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처음부터 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싸우는 과정에서 상대를 ‘신앙의 적’으로 만들어 갔다. 기독교에 대항하여 성전, 곧 지하드를 펼쳐야 한다는 생각은 살라 웃딘(살라딘) 대왕(1137~1193,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체계화되었다.

……

십자군은 분명 사상 운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서양 역사에 그 어떤 사상보다도 큰 정신적 영향을 끼쳤다.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어 식민지를 개척하던 유럽 국가들은 자신을 새로운 십자군으로 여겼다. 야만적이고 잔혹한 이교도의 땅에 기독교 문명을 전파한다는 사명감은 그들의 탐욕을 정당화시켜 주곤 했다.

……

십자군 전쟁은 문화와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이슬람권 세계는 성서의 권위에 짓눌려 학문 발전이 정체되어 있던 유럽에 비해 훨씬 발전된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수많은 선진 문물이 전쟁과 함께 아랍에서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대수학(algebra), 알코올(alcool), 설탕(sucre) 등의 말들은 모두 아랍어에서 왔다. 아랍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철학적으로도 십자군 전쟁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 유럽에서는 잊혀졌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전쟁과 함께 다시 유럽으로 전해 온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체계적으로 기독교 신학에 녹아들어, 이후 교회의 위상과 체계를 재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개설철학사

–  中村雄二郞 외 / 우리기획 옮김 / 백산서당 / 1983

 

십자군이라는 사건은 서구사(西歐史)의 내부에서 본다면, 가톨릭 ‘교권’의 신장과 그에 의거한 서구 세계의 중세적 ‘통일’에서 나타난 것이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서구 세계의 ‘반격’ 개시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까지 이슬람 세계의 ‘진격’에 의하여 지리적으로는 자기의 일부에 속하는 스페인까지도 상실했던 서구 세계는 간신히 이 시점에서 내부적인 ‘통일’을 달성하여 ‘반격’으로 전화轉化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게르만 기사들의 전통적인 상무정신(尙武精神)도 이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교적인 사상과 융합하여 가톨릭 교회의 이념과 일치를 보아, 중세적 정신의 정화라고 불리는 ‘기사도’로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십자군은 동시에 중세적 ‘통일’을 내부에서 해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 점에 관해서는 여기에서 상세히 서술할 여유는 없고, 단지 그 결과로서 생긴 사상적 · 문화적 영향에 관해서만 살펴보도록하자. 즉 십자군 운동의 결과, 콘스탄티노플과 서구 사이에 학문과 예술상의 교류가 촉진되었으나, 이것은 이 때까지 주로 아라비아어로 번역된 각 문헌을 통하여 해오던 고대 그리스의 사상 · 문화의 재발견을 곧바로 그리스어 원전을 통하여 행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서구 세계가 사상적 · 문화적으로도 이 때까지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의존 관계에서 벗어나 지적인 ‘반격’으로 돌아서는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

이와 같은 이슬람 세계로부터의 지적 충격은 그리스도교 사상을 중핵으로 한 서구 세계의 정신적 전통에 커다란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그리스 · 로마적인 합리주의 사상이 그리스도교의 정통 사상에 커다란 위험이 되리라 생각하고 그것을 탄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사상의 지적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는 신사상 가운데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합리주의적 성격을 가진 아베로에스(이븐 루슈드, 1126~1198)의 아랍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까지도 서구 세계에 침투하기에 이르렀다. 역사가 크리스토퍼 도오슨은 “사실상 이 시대(12~13세기)에 서구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를 말하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교도가 아니라 스페인의 이슬람 교도인 아베로에스 바로 그였다”(『중세기의 종교』)라고 말한다. 아베로에스는 종교와 철학 · 과학, 신앙과 이성 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였다. 즉 그는 계시(啓示)에 의한 진리와 이성에 의한 진리를 구분함으로써 훗날 나타난 ‘이중 진리설(二重眞理說)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또 세계는 영원하며 개인은 죽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아베로에스의 학설은 그리스도교 사상 내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중세 사상의 한 전형인 ‘스콜라 철학’을 완성시킨 토마스 아퀴나스는 바로 이와 같은 사상적 상황에서 출발하여 아랍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의 대결을 통하여 그 사상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에 의한 ‘스콜라 철학’의 형성은 한 편에 있어서는 이슬람 사상을 매개로 한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과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결합이라는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다른 면에 있어서는 이슬람 사상의 ‘진격’에 대한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사상적 ‘반격’의 개시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지중해 문명의 바다를 가다

–  박상진 / 한길사 / 2005.11.25

 

9세기 말에 들어서도 이슬람의 지중해 제해권 우위는 계속되었다. 890년경 이슬람 함대는 프로방스 지방에 기지를 구축하여, 마르세유와 니스 등을 장악하였고, 서부 알프스까지 진격하여 순례자들과 교역 상인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9세기 중엽부터는 노르만 왕국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남부 유럽 해안 지대와 지중해 내륙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이후 2세기 동안의 침략과 약탈은 이슬람 세력보다는 노르만을 비롯한 유럽의 신흥 변방 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서유럽 역사는 기독교 세계의 피해를 이슬람군의 약탈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문학과 영웅담을 통해 극화시키고 반복하여 과장함으로써 비난과 적대감을 증폭시켰다. 이는 결국 11세기 이슬람에 대항한 기독교 세계의 십자군 결성의 감정적 토대가 되었다.

……

십자군 전쟁은 외관상으로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의 충돌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서구와 동방이 전방위적으로 만나면서 낙후된 서구가 동방의 선진문화에 커다란 자극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향료와 진귀한 상품들은 물론, 오렌지 · 레몬 · 커피 · 설탕 · 면화 등과 그 재배법이 유럽에 소개되었고, 비잔티움과 소아시아, 무슬림 에스파냐 등지의 의복과 패션, 일상 생활 방식까지 중세 유럽 사회에 범람하던 것도 이 시기였는데 대학자이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기도 한 알베르투스가 1245년 아랍 복장을 입고 파리에 도착하는 해프닝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아랍 복장은 이교도의 상징이나 유행이 아니라, 학자의 품위와 신분을 상징하는 표현이었고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 무슬림들은 철학자와 동의어로 여겨질 정도였다.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교양

–  존 라이트외 / 박상은 역 / 이지북 / 2005.06.10

 

11세기에는 이탈리아에서, 12세기에는 네덜란드에서 자치 공동체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에따라 도시 거주자는 모두 치안판사에게 복종하고 평화 유지와 자유를 지킬 것을 맹세했다. 또 도시생활을 소생시켜 중세도시를 자치 길드 연합으로 만들었다. 길드는 직인과 상인이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결성한 연합체였다. 서유럽 도시에서 정기적으로 열린 장시는 무역의 재확립을 자극했고, 지중해에서는 이탈리아 도시(특히 베니스와 제노아)가 서구를 비잔티움이나 근동의 이슬람국가에 연결했다. 역설적이게도 십자군 원정이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을 자극했고,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는 13세기에 중국과 서아시아를 잇는 비단길을 통해 교역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었다.(빌렘Willem van Ruysbroeck, 마르코 폴로Marco Polo, 오도리크Odoric da Pordenone 및 이븐 바투다Ibn Battuta와 같은 선교사, 상인, 지리학자가 13세기 중엽 이후로 유명한 여행을 계속한 것을 보면 이 무역로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향료나 섬과 인도에서 나는 물산은 모두 바닷길로 페르시아 만과 홍해에 이르렀고, 거기서부터는 육로로 레반트Levant에 있는 도시와 유럽으로 전해졌다.

파리, 볼로냐, 살레르노 및 옥스퍼드와 같은 유럽의 상업 교회 도시에서는 대학이 세워졌고, 대학에서는 그리스와 아랍의 학문이 카롤링거 왕조에서 세운 학교의 기독교 전통과 합쳐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철학이 기독교 용어로 재해석되어, 스콜라 철학이 법학, 철학, 신학 및 과학에 영향을 미쳤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보나벤투라Bonaventure, 로저 베이컨Roger Bacon 및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와 같은 13세기의 유명한 학자들은 모두 새로 생긴 교단인 프란체스코 교단과 도미니크 교단의 멤버였다. 복음에 따라 청빈한 생활을 하고 이단과의 싸움에 몸을 바치는 그들은 대학의 발달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유럽의 팽창이라는 첫 자극이 이러한 사회 · 문화 · 종교적 제도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늘어난 인구를 부양케하는 산림 개간이나 농경지 개간과 같은 새로운 경제적 동기에 힘입은 것이었다. 또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스페인을 다시 정복하거나 튜턴족 기사들이 프러시아와 리보니아Livonia를 정복하거나 리투아니아를 개종(1386년 이후)시킨 것과 같이 변방의 영토를 종교 · 정치적으로 확고히 유럽화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문명의 교류와 충돌

–  교재편찬위원회 / 계명대학교출판부 / 2008.02.15

 

(3) 십자군운동의 영향과 역사적 의의

 

일반적 영향

십자군전쟁은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성골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데다 훈련도 받지 못한 병사들이 다수를 차지한 것, 당시의 교통통신 수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먼 지역으로 원정한 것, 국왕과 대영주들로 구성된 지휘부의 갈등이 심했던 것, 상업적 전쟁으로 변질 된 것 등을 실패의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십자군전쟁은 성지 탈환이라는 당초의 목적달성에 실패한데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업적 성격의 전쟁으로 변질되어 십자군이란 이름이 무색할 지경이었지만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효력은 서서히 나타났으되 바로 중세의 문을 닫고 근대의 문을 열게 했다.

 

경제적, 정치적 영향

십자군운동은 지중해를 다시 유럽인의 활동무대로 바꾸었다. 비잔티움-소아시아 항로나 베네치아, 제노바, 마르세유 등을 통해 지중해를 왕래한 십자군과 함께 각종의 군수물자가 대량으로 운송되었고 그로 인해 지중해는 다시 유럽인들의 교역로로 부활했다. 그리고 지중해무역은 그 무렵 등장하기 시작한 유럽의 내륙 시장들과 함께 유럽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켜 결국은 유럽을 초기 상업자본주의적 사회로 이끌었다.

사실 십자군들은 귀금속이나 동방물산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몇 배 혹은 십 수배의 이윤을 남기는 동방물산에 대한 서유럽인의 관심은 비록 2,3백년 뒤의 일이지만 콜럼부스의 아메리카대륙으로의 항해가 잘 말해준다. 콜럼부스로 하여금 대서양 횡단이라는 모험을 하게 한 것도 바로 동방물산에 대한 관심이었다.

상업의 부활은 토지에 의지한 봉건세력을 서서히 몰락으로 이끌었다. 다수의 기사들은 물론 영주들이 십자군전쟁에 참전하여 입은 인적, 물적 손실도 봉건체제의 붕괴를 촉진했다. 반면 봉건세력의 몰락은 군주들로 하여금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군주들은 상공시민과 제휴하는 일방 봉건귀족을 억압하면서 통치권을 강화해갔다. 그 모든 것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그런 정치적 변화는 결국 17세기의 절대주의로 이어졌다.

 

종교적 영향

십자군은 주된 목적인 성지회복에 실패했지만 교황청의 권위를 신장시키는 일에도 결국은 실패했다. 제1회 십자군이 그나마 성공했기 때문에 교황의 지위는 일시 고양되었다. 사실 제4회 십자군까지는 동 · 서 교회의 통합이라든가 성지회복이란 대의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인적, 물적 손실이 매우 큰 데다 연이은 실패는 탈선한 4회 십자군과 함께 십자군을 발의한 교황의 권위를 흔들기 시작했다. 십자군의 실패로 깊은 상처를 입은 교황과 교회 앞에는 ‘아비뇽 유수’와 ‘대분열’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화적 영향

십자군전쟁도 여느 전쟁과 동일하게 문화의 교류와 지식의 확대에 기여했다. 물론 고대 이래 문물의 교류는 있어왔지만 십자군운동을 통해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교 중동은 상당히 활발하게 문물을 교류했다. 물론 십자군운동이 문물을 통한 문화의 발전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약탈과 살육이 다반사로 행해진 무자비한 전쟁이었고 따라서 두 세계 사이의 대립과 증오를 크게 증폭시켰다.

십자군과 무슬림의 만남이 반드시 살육과 약탈 일변도로 시종일관한 것은 아니었다. 십자군에 종군한 수도사들이 아랍의 증류법을 배워 위스키를 개발했지만, 서양세계는 십자군을 통해 비잔틴제국과 이슬람제국의 우수한 문화에 접할 수 있었다. 주지하듯이 이슬람제국은 아라비아숫자가 상징하는 수학을 비롯해 화학과 의학, 문학과 예술(특히 건축)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비잔틴제국 또한 철학과 신학은 물론 문학과 예술 등에서 창조력을 발휘했다. 특히 비잔틴제국은 고대 그리스의 고전을 보전하고 연구함으로써 인류문화에 이바지했다.

십자군전쟁 이후 셀주크 투르크족은 쇠퇴했다. 그들을 몰락으로 이끈 것은 몽골족이지만 십자군도 그들의 쇠망에 일조했다. 셀주크 투르크족은 1101년의 프랑스군과의 싸움 및 1178년의 비잔틴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도 했지만, 1차 십자군과의 싸움에서 패한 이래 여러 전투에서 패했다. 십자군은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 만큼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그들로 하여금 국력을 소모케 하고, 나아가 국가적 통일을 다지고 영토를 넓히는 일에 매진할 수 없게 했다.

십자군이 이슬람세계에 미친 영향을 간략히 정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적어도 초기에는 이슬람 측은 십자군에 대해 거의 무지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비잔틴제국 군대와 십자군을 구분하지 못했고, 또한 십자군이 갖는 종교적 성격도 알지 못했다. 유럽의 전면적 도전에 당황해 했을 뿐 그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그들은 군사적으로 맞설 수 있는 조직을 쉽게 갖추지 못했다.

둘째, 십자군은 그때까지 기독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이었던 무슬림들로 하여금 관용적 태도를 버리게 했다. 결국 성전의식으로 무장한 투르크-아랍 무슬림들 모두 십자군의 지나친 만행에 분노했다. 당연하지만 무슬림들은 십자군전쟁을 겪으면서 기독교도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버렸다. 십자군운동은 그리하여 지중해, 특히 동지중해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첨예한 대립의 장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아틀라스 세계사

–  지오프리 파커 엮음 / 김성환 역 / 2004.12.10

 

<비잔틴 세계>

11세기에 셀주크투르크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이 조성되었다. 1071년, 셀주크투르크가 만지케르트에서 비잔틴군을 격파하자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1081~1118)는 서유럽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재앙이었다. 왜냐하면 프랑크는 비잔틴을 도와주기보다 소아시아에 자신의 속주를 세우는데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내 비잔틴 영토를 장악하고 있던 노르만족은 그리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베네치아가 이끄는 이탈리아 도시들은 지중해 상권에 대한 자신들의 몫을 늘리는 데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1세기 동안 긴장이 높아 가다가 결국 제4차 십자군 병사들이 1204년에 비잔틴을 점령했다. 그 결과 비잔틴 제국은 붕괴되고 발칸 반도 전역에 걸쳐 라틴 국가들이 건설되었다.

 

<이슬람 세계>

시간이 흐르면서 이슬람 세계는 정치적 통일성을 잃고 수니파와 시아파 왕국들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1055년 셀주크투르크가 바그다드를 차지하고 소아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기독교도들을 몰아내자 이슬람은 한층 강화되었다. 12세기 십자군 및 13세기 몽골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서아시아를 계속 장악했으며 선교사와 상인들은 이슬람을 동으로는 말레이시아 · 인도네시아 · 필리핀까지, 남으로는 사하라 이남 국가들과 아프리카 연안의 스와힐리 도시들까지 전파했다.

 


신의 용광로

–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 이종인 역 / 책과함께 / 2010.04.23

 

클뤼니 수도회와 여타 수도회의 힘이 교리를 효율적으로 포장하는 능력과 모범적인 행동이라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십자군 기사들의 힘은 오른팔의 완력이었다. 1064년 여름, 3천 명의 노르망디, 프랑스, 이탈리아 기사들은 교황 기병대의 사령관인 몽트뢰유의 기욤과, 아키텐의 대공 기욤 3세의 지휘 아래 피레네의 론세스바예스 산길을 떠들썩하게 통과하여 우에스카 지방의 요새 도시인 바르바스트로(Barbastro, 현재 스페인 아라곤자치지방 우에스카주에 있는 자치시)를 향해 나아갔다. 재물을 빼앗는 약탈자들, 상속 전망이 없는 둘째 아들들, 음울한 동기를 가진 참회자들로 구성된 이 국제 연합군은 알렉산데르 2세 교황(재위 1061~1073년)이 그리스도 메시지를 이교도의 땅에 전하라는 호소에 열렬히 응답하여 조직된 군대였다. 1095년의 제1차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기 한 세대 전, 바르바스트로 포위공격은 로마의 새로운 교황 제국주의자들이 무력을 과시한 사건이었다. 하드리아누스 1세 교황의 후계자들은 카롤링거 왕조의 해체된 잔해 위에 새로운 상부구조를 세우고 있었다. 그 구조에서는 정치력이 라테란 궁전의 성직자들에게 귀속되었는데, 그들의 확고한 목표는 전 세계적으로 단일 종교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11세기의 주된 특징이었다. 알렉산데르 2세와 그의 뒤를 곧 이은 후계자, 힐데브란트(그레고리우스 7세)는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정책은 생전의 샤를마뉴를 크게 당황하게 했을 것이다. 교회는 백작, 왕, 심지어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재위 1056~1106년)의 권위에 도전하는 정책도 세웠다. 그 정책에 따르면 교회 봉사의 반지와 지팡이를 성직자에게 부여하는 권한은 당연히 로마 교황청에 귀속되는 것이었다.

 


서양사 개념어 사전

–  김응종 / 살림 / 2008.07.31

 

예루살렘 지방의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한 전쟁만이 십자군 전쟁인 것은 아니다. 1053년에 교황 레오 9세가 이탈리아 남부의 노르만인들을 상대로 선포한 것도 십자군 전쟁이며,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한 ‘재정복 운동’ 역시 십자군 전쟁이었다. 북유럽에서는 프로이센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을 상대로 십자군이 조직됐다. 1208년 교황은 프랑스 남부에 있던 이단인 카타르파를 상대로 십자군을 선포했다. 보헤미아의 이단인 후스파도 십자군 전쟁의 대상이었다.

 


<관련 그림>

 

Europe_map_1092

– 1092년의 유럽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네이버 백과사전 : http://100.naver.com/100.nhn?docid=103473

위키백과 : http://ko.wikipedia.org/wiki/%EC%8B%AD%EC%9E%90%EA%B5%B0

레콘키스타 : http://ko.wikipedia.org/wiki/%EB%A0%88%EC%BD%98%ED%82%A4%EC%8A%A4%ED%83%80

이븐 루슈드 : http://100.naver.com/100.nhn?docid=126327

문화의 다원주의, 톨레도에서 배우다

이슬람 시아파/수니파 : http://terms.naver.com/item.nhn?dirId=703&docId=5753

[오늘의 경제소사/11월27일] <1253> 십자군

[오늘의 경제소사/10월2일] 1187년 예루살렘 & 살라딘

십자군 운동과 유럽의 팽창(경북대) : http://bh.kyungpook.ac.kr/~leor/ma/matop11.htm

 

십자군전쟁 (1095 ~ 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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