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태종무열왕릉비 – 국보 제25호

※ 황성열의 세계 – 문화재 : http://yellow.kr/nt.jsp

※ 국보 제25호 /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慶州 太宗武烈王陵碑) / 1962년 12월 20일 지정 /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4-1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위로 연꽃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머릿돌 좌우에는 6마리의 용이 3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 놓아 비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놓았다.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강한 인상을 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능숙하게 빚어낸 기법에서 당시 석조 조각의 발달상을 엿볼 수 있다.

귀부(龜趺) 높이 1.03m, 길이 3.8m, 폭 2.49m, 이수(螭首) 높이 1.06m, 폭 1.36m, 두께 0.36m, 비좌(碑座) 1.73cm×0.86m이다. 무열왕릉 전방 약 40m 좌측에 머리가 서남쪽을 향하도록 세웠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비액碑額(비석에 새기거나 쓴 글이나 글씨)의 형식을 갖춘 비는 <태종무열왕릉비>(661년경)가 가장 이른 것이다. 이 비는 현재 비신을 잃고 귀부와 이수만 태종무열왕릉 앞에 있다. 신라의 통일기로 661년 이후 어느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비의 이수 가운데 공간을 마련하여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전액篆額(전서체로 쓴 머리글자)을 새겼는데, 이것이 본격적인 비액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과 연대를 전후한 시기에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과 <유인원 기공비劉仁願 紀功碑>가 당인唐人들의 주도로 건립되고 새겨졌다. <대당평백제국비명>(660년)은 <정림사지오층석탑>의 탑신에 새긴 것으로 비액에 해당하는 전액이 당나라 초기의 전액서풍 가운데 하나인 곡두전鵠頭篆의 퇴영退嬰한 서풍으로 보인다. 특히 <유인원 기공비>(663년)는 비록 당인의 손으로 건립되었지만, 현존상태로 보아 비신과 이수를 갖추고 있어 귀부龜趺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형제形制를 갖춘 비로 판단된다.

이렇게 자의든 타의든 661년을 전후하여 한반도에 비액의 형제가 출현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가운데서도 신라인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세워진 <태종무열왕릉비>는 통일기의 왕성한 힘과 문화적 역량을 표현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비의 비액은 김인문의 작품으로 전한다. 그가 20여년 동안 당왕조에 숙위宿衛 생활을 하였고, 그 기간 중에 비액을 서사書寫하였을 것이기에 비액의 서풍이 당나라 초기의 서풍과 관련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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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거북은 장수를 상징하는 신화와 전설상의 신령스러운 동물로 기린 봉황 용과 더불어 4령(四靈)이라 불린다. 그리고 5,000살 먹은 거북은 신귀(神龜)라하고 1만 살 먹은 거북은 영귀(靈龜)라고 한다. 그래서 비의 받침으로 거북을 주로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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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릉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태종무열왕릉(?)

능은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비교적 큰 편이며 능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으나 지금은 흙 속에 묻혀있다.

태종무열왕릉이라고 여겨지는 무덤 뒤로 무열왕릉에 버금가는 크나큰 무덤 4기가 일렬로 마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무열왕릉을 포함 모두 5기의 대형무덤이 나란히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열왕릉을 제외한 4기의 무덤은 누구의 무덤이며 무엇 때문에 같은 지역에 일렬로 함께 마련되었을까.

무열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가짜 묘로 마련된 것인지 아니면 이 가운데 제일 높은 위치에 마련된 것이 무열왕릉인지 밝혀진 바 없고 단순히 왕릉 비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무덤을 왕릉으로 보아 지금에 이르고 있지는 않는지 이 또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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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어스에서 본 태종무열왕릉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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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비각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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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원 기공비(劉仁願 紀功碑 / 663년) – 사진 출처 : 위키 백과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이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문무왕 3년(663)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에 비문을 새긴지 3년 후이다.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비문 중에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과 부흥운동의 중요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문화재청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태종무열왕릉비
위키 백과 : 태종무열왕릉비
위키 백과 : 유인원 기공비
나말여초(羅末麗初)의 비액서풍(碑額書風) (진복규 / 미술사학 제30집, 2008년6월)
2010-11-23  [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 <59> 태조무열왕 비의 귀부와 이수
http://blog.daum.net/jsy1851/33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 국보 제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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