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의 위기 – 기근과 흑사병

지금은 현재 진행중인 ‘지구 온난화’에 대해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있다. 그러나 만일 어느 시점에 지구 온난화가 멈춰지고 기온이 하락하며 추워지면 어떻게 될까? 준비하지 않은 기후의 역습에 대한 암울한 결과를 ’14세기의 위기’에서 볼 수 있다.

 

’14세기의 위기’는 유럽의 번영과 성장을 멈추게 한 14세기 전반과 15세기 초반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을 의미한다. ‘인구학적인 붕괴demographic collapse’, ‘정치적 불안정political instabilities’, ‘종교적 격변religious upheavals’이라는 3개의 주요 위기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다.

연속되는 기근과 역병疫病- 특히 1315년부터 1322년까지의 대기근과 1348년의 흑사병 유행 시작 -은 인구를 절반 이상이나 감소시켰는데, 이는 중세온난기가 끝나고 소빙하기로 진행하는 첫 번째 세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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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이 있는 ‘중세 온난기’를 표현하는 기온변화 그래프이다. ‘중세 온난기’는 다음글을 참조한다.

※ 중세 온난기 (Medieval Warm Period) : http://yellow.kr/blog/?p=619

 

’14세기의 위기’에서 유럽 국가 내부에서는 민중 봉기와 영국의 ‘장미전쟁’과 같은 귀족들간의 내전은 일상적이었고, 국제적으로도 대표적으로 ‘백년전쟁’과 같은 왕들의 충돌이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단일성은 ‘서방교회의 대분열Western Schism’이라는 사건으로 깨어졌으며, 신성로마제국도 쇠퇴했다.

 

이러한 사건들을 겪은 14세기 유럽의 사회는 더 이상 ‘평화로운’ 중세사회가 아니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에 걸쳐 유럽은 전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흔히 ‘중세 말’이라고 일컫는 이 시기는 11-13세기의 중세 전성기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며 그 파국적 성격은 이후 전개될 근대문명의 묘판을 이루게 된다.

 

14세기의 끔찍한 일들에 대해 책을 쓴 바 있는 바버라 터크먼(Barbara Tuchman)은 이 시기를 “폭력적이고, 고통스럽고, 당황스럽고, 붕괴되던 시대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사탄이 승리를 거둔 시기였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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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사의 캄포산토(Camposanto)에 있는 프레스코 벽화 <죽음의 승리 The Triumph of Death> / 부팔마코(Buonamico Buffalmacco) 추정, 1338년

 

동아시아에서도 ’14세기의 위기’는 존재했다. 원나라는 기근과 역병에 시달리며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위기를 관리하지 못하다가 결국 주원장이 이끄는 반란 세력에게 쫓겨난다. 고려도 기근과 북쪽에서는 홍건족의 침입, 남쪽에서는 왜구의 약탈에 시달렸다. 명의 건국과 조선의 건국에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영향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지 못하고 가용 토지 면적에 따라 결정되는 적정 수준 아래에서 증가와 감소의 사이클을 반복하는 현상을 인구 순환이라고 하며, 인구 순환이 지배하는 세계를 ‘맬서스의 세계’라고 한다. 마치 역사의 긴 들숨과 날숨처럼 반복되는 장기적인 인구 증감 사이클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며, 역사의 기본 구조로 보인다.

 

산업혁명 이전의 역사는 맬서스가 말한 대로 인구 감소를 통해서, 그것도 파괴적인 방법(기근, 전쟁, 질병)을 통해서 인구와 식량의 균형을 잡아왔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과학과 생산 기술의 발전으로 인구와 식량 생산이 동시에 증가하였는데 이를 두고 새로운 세계의 도래로 보는 학자와 ‘맬서스의 저주’가 유예되었다는 학자들이 있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Fernad Braudel)은 산업혁명으로 높아진(그러나 사라지지 않았다!) 가능성의 천장에 인류는 언젠가 부딪힐 것이며, 그러면 인류는 마치 14세기에 겪었던 것과 같은 재앙을 맞이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전망을 피력했다.

인간의 역사는 일반적인 논리를 가지고는 설명하기 힘든 권위적인 전체적 리듬에 복종하는가? 나는 분명히 그렇다고 믿는다. 비록 그것이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마치 기후 사이클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으나 학자들도 그 기원에 대해서는 추측 이상을 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세계의 물질의 역사와 경제의 역사에 리듬을 부여하는 조수와 같은 이 운동들을 믿는다. 비록 그 운동들을 만드는 유리하거나 불리한 문턱점들-수많은 관계의 산물-이 아직 불가사의한 채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리하여 1972~74년부터 우리가 겪고 있는 세계의 곤경이 시작된 이래 나는 종종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해보았다. 우리는 콘드라티에프 사이클의 하강국면에 들어선 것이 아닐까? 혹은 그보다도 더 긴 장기추세의 하강국면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사실 모든 장기적인 동향의 국면 변화는 구조적인 위기로 그것은 단지 구조적인 파괴와 재건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또한 1972년 로마클럽 보고서 <성장의 한계>로 환경과 자원의 한계 문제가 부각된 이래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 개념에 관심이 일어났다. 그 후 40년 동안 파국을 늦추기 위한 노력은 늘어나 왔지만, 확실한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존의 근대 체제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 14세기의 위기와 비슷했던 역사적 사건:

* 유목민들의 대이동(훈족의 이동, 게르만족의 이동 등), 로마의 쇠퇴와 멸망, 한나라의 멸망과 위진남북조

* 4200년전 기후변화 사건 – 이집트 제1 중간기 : http://yellow.kr/blog/?p=716

 

※ 소빙하기의 절정기는 다음글을 참조:

17세기 위기 – 소빙하기(소빙기) 절정 : http://yellow.kr/blog/?p=939

 

* yellow의 세계사 연대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315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아보았다.

 


돈 그 영혼과 진실

–  버나드 리테어 / 강남규 역 / 참솔 / 2004.03.20

 

런던의 한 연대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316년은 옥수수 등 곡물의 대 품귀 현상이 발생한 때이다. 밀 1부셀 시세가 무려 5실링까지 올랐다. 가난한 사람들은 고양이, 말, 개를 먹었다……. 심지어 어린이를 유괴하여 인육을 먹는 일까지 벌어졌다.”

역사학자 바바라 하비(Barbara Harvey)는 기근의 결과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1300년 이후 대기근은 토지 임대료, 물가, 경작면적 감소 등으로 파악할 수 있다. 도시에서는 상가가 텅텅 비었고, 공산품 수요가 급감했다. 경제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인구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구 감소는 경제 위축의 속도보다 느렸고, 그 결과 1인당 소득으로 측정한 생활 수준은 급격히 하락했다.”

이는 브루스 캠벨이 쓴 『흑사병 이전』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캠벨은 흑사병이 발생하기 이전의 대기근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흑사병이 유럽 인구 감소의 원인’이라는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어놓았다. 대신에 그는 ‘흑사병은 50년 앞서 발생한 대기근의 결과’라고 강조했다.

캠벨의 연구는 1300년 이후 경제공황이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경제붕괴의 여파가 너무 참혹했기에 기근이 되풀이되었고, 1320~1340년 사이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야기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2세대 이후 유럽을 휩쓴 대혁명의 토양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경제몰락으로 주저앉기 시작한 ‘좋은 시절’은 흑사병으로 끝이 난 것이다.

 


기후의 문화사

–  볼프강 베링어 / 안병옥, 이은선 역 / 공감IN / 2010.09.10

 

14세기 초 유럽에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불행이 찾아오게 된다. 그것은 바로 대기근이었다. 잘 알려진 ‘7년 기근’은 창세기 41장 30절에 등장하는 재앙에 비견할만한 것이었다. 14세기에 유럽을 휩쓸었던 기근은, 많은 지역에서 1315년부터 1322년까지 정확히 7년 동안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초 기록자들은 성경의 재앙과 같던 이 시기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현대 역사학자들도 유럽에서 그처럼 오래 지속되고 광범위한 지역을 휩쓸었던 기근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는데 견해가 일치한다. 대기근은 영국 제도에서 러시아까지, 스칸디나비아에서 지중해까지 퍼져 나갔다.

 

대기근이 발생했던 원인으로는 네 가지 가능성이 거론된다. 첫 번째는 중세 중기 온난기에 시작되어 14세기 초반 농업생산력을 초과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던 인구증가이다. 두 번째는 나쁜 수확기 날씨와 식량 비축의 불안정성 때문에 식량이 빠른 속도로 고갈되었을 가능성이다. 세 번째 견해는 전쟁과 내전에 의해 식량배분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설이다. 정치적인 불안정이 국지적인 흉작을 대기근과 같은 슈퍼재앙으로 확대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환경조건에의 적응을 저해했던 농민들의 보수성이 지적된다.

하지만 당시의 기록자들에게 기근의 원인은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다. 대기근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일종의 천벌이었으며, 물질적인 차원에서는 연속된 자연재해의 결과였다. 자연재해 가운데서도 두드러졌던 것은 이상기후였다. 길고 추웠던 겨울 덕분에 식물의 생장기간은 단축되었고, 쉴새없이 내린 비는 ‘일용할 양식’을 공급할 작물수확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

흑사병은 유럽사상 가장 큰 재앙에 속한다. 불과 몇 년 만에 인구의 절반가량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는 20세기에 발발했던 세계대전 모두를 합한 것보다 큰 피해였다.

……

흑사병이 유럽에서 그토록 많은 피해를 낼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흑사병이 유행하기 수십 년 전부터 사람들의 내성이 약화되고 신체가 전반적으로 쇠약해졌다는 사실에 있다. 아동기에 굶주림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평생에 걸쳐 질병에 쉽게 걸릴 가능성이 높다. 1315년부터 1322년까지 지속된 대기근은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위기의 어머니 역활을 했을 것이다. 1330년대의 열악한 기후조건은 북반구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이 시기 몽골부족들은 엄청난 사회적 불안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을 침입함으로써 흑사병의 확산에 기여했다. 중국 서부에서 발견되는 집단묘지는, 중국에서 창궐한 흑사병이 비단길을 따라 서쪽으로 확산되었음을 말해준다. 유럽에서는 이미 이 새로운 전염병이 유행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1346년은 매우 추운 해였는데, 6월이 넘어서야 날씨가 따뜻해졌을 정도였다. 유난히 추운 날씨는 이미 9월 22일에 시작되었고, 마인, 라인, 모젤 강변에서는 설익은 포도들이 추위로 얼어버렸다. 귀리는 수확이 불가능했고, 와인은 마실 수 없을 정도로 품질이 떨어졌다. 눈은 이미 10월경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조사에 의하면, 주민의 30%가량이 흑사병으로 희생되었으며 사망률은 지역적으로 10%에서 60%를 오르내리는 수준이었다. 유럽의 역사상 이와 견줄만한 피해가 발생했던 사건은 전무후무했음이 분명하다.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역 / 코나투스 / 2007.04.13

 

130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세계사에는 심각한 위기가 찾아왔다. 그 한 가지는 유라시아대륙의 전역을 연결했던 몽고제국의 멸망이었고, 다른 하나는 흔히 페스트란 명칭으로 불리는 지독한 전염병으로 1300년대 중반 수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무시무시한 흑사병이었다.

……

매우 포괄적인 관점에서 지난 1000년 동안 이루어진 인구의 증감에는 세 차례의 커다란 파장을 볼 수 있다. 900년부터 1000년 사이에 시작된 첫 번째 인구증가는 130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1350년대에 발생한 흑사병으로 인해 급격히 퇴조했다. 그 후 1400년대에 또 다시 인구가 증가했지만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감소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1700년대에 시작된 세 번째 인구증가는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2100년대에 그 증가는 멈추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빙하기에 살고 있다

–  더그 맥두걸 / 조혜진 역 / 말글빛냄 / 2005.12.12

 

지금까지 명백한 증거들에 대해 논했지만 아직도 경제적 쇠퇴나 굶주림, 흑사병과 같은 역사 속의 사건들이나 정치적인 변화의 모든 원인이 악화된 기후 때문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기후는 그저 ‘촉진하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태양의 활동량이나 지구의 궤도 변수가 기후를 촉진하는 요인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작은 빙하시대’와 같은 사건은 유럽 전체로 퍼졌기 때문에 기후가 유력한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역사 속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14세기 초 유럽에는 재난이 발생했다. 그동안의 번영과 온화한 날씨 덕분에 유럽의 인구는 증가했다. 대부분의 땅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춥고 습한 시기가 닥쳤다. 들판의 곡류가 썩거나 아예 자라지 않자 식비가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과 짐승들은 굶주리고, 병이 들었다. 사회는 엉망이 되었는데 배고픈 농부들은 먹거리를 찾아 길거리를 배회했고, 카니발리즘Cannibalism(식인종)에 관한 소문도 들려왔다.

1320년대에는 유럽 곳곳에 텅 빈 마을들이 종종 보였고 인구는 급속도로 감소했다. 그 시대의 평균 수명은 지금에 비해 반이었는데, 이 모든 대혼란은 한 사람의 일생보다 짧은 기간 안에 일어났다. 불과 몇십 년 후, 악명 높은 흑사병이 이미 비틀거리고 있는 유럽을 강타했으며 이때 인구의 대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14세기 초에는 그동안 유럽에서 성공한 봉건제도가 무너졌다. 정말 이 모든 사건들의 원인이 기후일까?

 


황금의 지배

–  피터 L. 번스타인 / 김승욱 역 / 경영정신 / 2001.05.24

 

역사상 14세기만큼 기근이나 흑사병, 사회적 혼란, 전쟁 등이 무자비하게 연속적으로 발생했던 시기는 없다. 이 시기는 유럽에서 커다란 발전과 업적이 이루어졌던 12세기 및 13세기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14세기의 끔찍한 일들에 대해 책을 쓴 바 있는 바버라 터크먼(Barbara Tuchman)은 이 시기를 “폭력적이고, 고통스럽고, 당황스럽고, 붕괴되던 시대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사탄이 승리를 거둔 시기였다.”고 표현했다.

……

1314년의 여름은 유럽의 여름으로는 드물게 춥고 습했다. 곡식들은 썩어갔고 추수가 지연되었으며, 이에 바짝 긴장한 당국은 농작물과 장작에 대해 가격규제를 실시했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전에도 여러 번 발생한 적이 있는 흔한 재앙이었다.

그러나 1314년의 끔찍한 기후는 연달아 일어난 재앙의 시작에 불과했다. 2년 연속으로 작황이 나쁜 경우는 좀처럼 없었는데 1315년의 기후는 그 전해보다 훨씬 더 나빴다. 큰 비가 끊임없이 쏟아지면서 발생한 홍수가 제방을 무너뜨리고 강의 수위가 높아져 마을이 파괴되었다. 격렬한 폭풍이 해안지방을 강타했고 스코틀랜드에서 이탈리아까지, 피레네 산맥에서 슬라브족의 고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역에서 비극이 발생했다. 식량의 가격은 5배 이상 뛰어올랐고, 많은 지역에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기후는 1316년에도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유럽 역사상 최악의 기근을 초래했다. 사람들은 고양이와 쥐, 벌레, 동물의 배설물 등을 먹었고, 나중에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자 공동묘지에서 시체들을 파냈다. 전염병과 흉악한 범죄가 널리 퍼져나갔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는 사람들도 흔했고 유태인이나 나병환자, 귀족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서슴없이 살해했다.

후에 대기근(The Great Famine)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이 당시의 사건은 14세기의 무시무시한 이야기의 서론에 불과했다. 1347년 제노바인들은 얼마 전 극동에서 출발, 거대한 러시아를 횡단해 치고 내려온 타타르(Tartar)인들의 포위공격에 맞서 크림 반도의 식민지 카파(Kaffa, 현대에는 페오드시아Feodsia라고 불린다)를 방어하고 있었다. 타타르인들은 자신들의 포위공격이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하자 기이한 물체를 성벽 너머로 발사해서 카파의 중심부에 떨어뜨리기로 결정했다. 이 기이한 물체란 전염병이 만연하면서 목숨을 잃은 타타르인들의 시체였다. 제노바인들은 공포에 질렸고, 곧 그 시체들에 전염이 되어 카파를 떠났다. 그들은 갤리선을 타고 흑해와 에게해를 지나 이탈리아를 향해 도망쳤다. 이 갤리선들 중 한 척이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 도착했을 때 이 배에서 나온 벼룩과 쥐, 그리고 죽어가고 있던 인간들로 인해 나중에 흑사병(Black Death)이라고 알려지게 된 무서운 전염병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 후 2년에 걸쳐 이 무시무시한 질병은 유럽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 당시의 인구 추정치는 단편적이고 신뢰성이 별로 없지만, 흑사병은 인도에서부터 아이슬란드에 이르는 지역에서 전 인구의 3분의 1, 즉 적어도 2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 같다. 유럽의 인구는 16세기 중반까지 1300년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

그런데 마치 이 모든 일들만으로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흑사병이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던 1348년 끔찍한 지진이 나폴리에서 베네치아에 이르는 지역을 파괴했으며, 그 여진은 독일과 그리스처럼 멀리 떨어진 곳의 건물까지 무너뜨리고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14세기의 사회경제적 위기들과 흑사병

–  홍용진 / 민족문화연구원 / 2014.01월 통권 033호

http://rikszine.korea.ac.kr/front/article/humanList.minyeon?selectArticle_id=437

 

흔히 ‘중세 말 경제위기’라고 부르는 사태는 이미 13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개간사업의 중단이라는, 아주 단순한 경제적 경향의 결과로 일어났다. 1270-80년대까지 중세 유럽사회의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바로 개간사업이었다.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원격지 무역 외에 인민 대다수의 삶이 이루어지는 농촌사회의 번영은 바로 농경지의 확장과 이에 따른 수확량의 증가, 또 그 결과로 진행된 인구증가 사이의 선순환적 되먹임 관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세 동안 로마 말기에 울창했던 숲은 모두 없어져 갔고 급기야 13세기 말에는 더 이상 개간할 땅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토지·곡물·인구 사이의 팽창적 순환에서 토지확장에 급제동이 걸리자 곡물과 인구는 심각한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이미 13세기 동안 이루어지고 있었던 팽창의 불균형이 거대한 위기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즉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던 토지와 곡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던 인구를 간신히 부양하고 있었다. 이는 1인당 토지보유 면적의 감소와 맞물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13세기에 꾸준히 지속되던 개간사업은 이 불균형을 간신히 지탱하였는데, 바로 이 개간사업이 종료되자 늘어나는 인구를 토지와 식량이 현격하게 따라잡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세 말 농민들의 영양상태는 이전보다 더욱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개간사업의 충격이 바로 들이닥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3세기 말 14세기 초까지 진행된 점진적인 디플레이션을 낳았다. 이러한 와중에 1314-1317년 동안 유럽 북부지역에서는 냉해로 인한 흉작이 발생하여 치명적인 대기근 상태를 초래하였다. 사실 파종한 종자 대비 수확량이 그리 많지 않던 중세사회에서 수확한 곡식 중 이듬해의 종자를 제외하고 식량용 곡식에서 그해 소비량을 제외하고 비축할 곡물은 넉넉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3년 이상 연속된 기근은 커다란 식량난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흉작이 유럽 전역에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유럽 전체는 수확량이 인구를 따라가지 못하는 맬서스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고 곡물가 상승과 디플레이션이라는 장기적인 경제침체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잉글랜드와 특히 프랑스에서 이러한 상황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와 전쟁의 간접적인 효과인 조세에 의해 다른 어느 곳보다도 더욱 악화되어 나가고 있었다.

 


날씨가 바꾼 어메이징 세계사

–  반기성 / 플래닛미디어 / 2010.08.13

 

그러나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에 소빙하기가 닥쳐왔다. 알프스의 빙하가 전진해 내려와 고산 골짜기의 관개용 수로를 무너뜨리고 낙엽송 숲을 깔아 뭉갰다.

나쁜 날씨는 14세기로 접어들면서 점점 예측불능으로 바뀌어갔다. 1308년에서 1319년 사이에는 더 춥고 비가 잦은 날씨가 유럽을 뒤덮었고 기근으로 숱한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1315년에는 잠시도 쉬지않고 큰비가 내렸고 비는 유럽 내륙의 전쟁을 중단시킬 정도였다. 큰비의 재앙은 유럽 북부의 광대한 지역 영국, 아일랜드, 독일, 스칸디나비아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칠줄 모르고 내리는 비는 유럽 전역의 농토와 개간지를 온통 수렁으로 만들었다. 모든 농토는 흙더미가 쌓인 황무지로 변해버렸고 곡식은 모두 비에 녹아서 바닥에 누워 버렸다. 큰비로 인한 대기근은 사람들의 건강을 약화시켜 질병의 창궐로 이어졌다. 유럽 전역의 농민들은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정처없이 떠도는 유랑민 신세로 전락했다.

이 후에도 계속되는 소빙하기의 습윤하고 추운 날씨는 식량 생산량을 격감시켰고, 국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다. 영국의 에드워드3세는 프랑스 왕위계승에 트집을 잡아 프랑스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해서, 영국의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1345년 노르망디에 상륙한 영국군은 세느 강을 건너 플랑드르로 진군한다.

……

소빙하기의 기후변화의 특색은 변화가 심하다는 것, 그리고 추위와 함께 많은 강수를 보인다는 것이다.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기 전이었던 고려 말의 기후도 소빙하기의 기후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고려 말기, 고종 42년과 43년은 계속되는 겨울 가뭄으로 굶주림과 병이 만연해 이로 인해 잇달아 쓰러진 사람들의 시체가 길을 덮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공민왕 당시의 기후 연표를 보면, 1352년에서 1374년까지 재위 23년 동안 기근은 13회에 이르렀고, 대풍大風, 우박, 대무大霧가 빈번했으며 대수大水로 인한 대수해가 5회, 한발이 있었던 해는 8회에 달했으니 2년에 한 번 정도로 수해와 한해를 겪은 셈이다. 이밖에도 기온은 이상 온난과 이상 저온을 되풀이했다. 공민왕 21년(1372)에는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아 극심한 가뭄이 들면서 산이 무너지고 우물과 샘이 모두 말랐다고 한다. 또한 공양왕 시대에는 늦서리나 여름 서리, 냉하 등으로 여름 기온이 매우 낮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공민왕 때와는 달리 대우, 항우, 대수, 우박, 대뇌우 등 비와 관련된 기상재해가 빈발한 것으로 보아 습윤한 기후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중국의 정세와 기후는 어떠했을까? 중국의 경우에도 소빙하기에 접어든 1300년 이후에는 가뭄, 홍수, 추위, 전염병이 번갈아 찾아오면서 원나라의 국력이 크게 피폐해졌다. 도처에서 기근으로 농민들이 땅을 등지고 도적이 되었으며, 이들은 조직화되어 국가에 대항했다.

 


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  제임스 M. 블로트 / 박광식 / 푸른숲 / 2008.08.14

 

브레너의 가설은 왜 자본주의가, 그리고 왜 경제적 근대화가-모두 중세 유럽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그런데 브레너는 이 긴 세 편의 논문 어디서도 중세 아프리카와 중세 아시아는 한 번 언급도 하지 않는다.

……

브레너는 봉건 지주들을 농민과 싸우게 만들었던 이런 계급투쟁의 마지막 결과로 봉건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로 전화했다는 점을 입증하고 싶어했다. 그는 동시에 봉건주의의 자본주의 전화를 해명하는 다른 설명들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까지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특히 두 가설, 보수주의적이거나 마르크스주의를 따르거나를 가리지 않고 “경제적” 요인들이 봉건주의 쇠퇴와 자본주의 등장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경제사가들이 아주 자주 끌어다 대는 두 가설을 공격한다.

이 두 가설 중 하나는 인구 변화에서 출발해 경제를, 더 나아가 사회를 설명하는 논거로, 맬서스의 인구 변화 가설에 기대고 있다.

……

브레너는 어떻게 (몇몇) 기성 경제사가들이 신맬서스주의적 논거들을 이용해 봉건주의의 쇠퇴를 해명했는지를 대략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 경제사가들은 중세 전성기에 번영이 한동안 이어지는 바람에 급속한 인구 성장이 일어났고, 이런 인구 성장은 농민들의 수가 농민들을 적절히 먹여 살리는 데 동원할 수 있는 자원들, 이를테면 농업에 사용할 만한 생산성있는 땅이나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기술 등등의 자원들을 훨씬 앞질러버릴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은 14세기 초에 “맬서스식 인구 위기”를 낳았고, 이 위기는 대략 14세기 중반에 흑사병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1350년 정도를 지나면서 유럽 인구는 뭉텅이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되자 지주들이 충분한 소득을 뽑아내기에는 농민들이 너무 적은 상황이 펼쳐졌고, 결국 지주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농노들을 해방시켜주고 농민들에게는 전반적으로 훨씬 나아진 생활 조건을 제시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뒤 이 농민들은 자유로운 신분의 차지농(借地農)이 되어 지대를 화폐로 내게 된다. 이 가설의 전형적인 설명에 따르면 1350년에서 1400년에 이르는 기간에 서유럽 상당수 지역에서 농노제가 끝난 것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성립되는 출발점이었다. 왜냐하면 차지농들은 이제 한편으로는 화폐 지대를 낼 돈을 구하느라 소출을 내다 팔면서 엄연한 상업 경제의 참여자가 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촌 인구가 엄청나게 줄어든 결과) 전보다 넓어진 농지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가설에서는 여기에 더해 언제나 다른 요인들도, 도시화도 그 가운데 하나였거니와, 작동했다고 파악하기는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14세기에 일어난 “맬서스식 위기”가 사회 변화의 근본 원인이었다.

이 가설을 겨냥한 브레너의 반박은 애초에 내걸었던 의제를 생각하면 너무 소극적이어서 새삼 놀랄 정도다. 그는 고작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인구학적 요인들도 실제로 중요하다. 맬서스식 이해도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구 위기는 1350년에서 1400년경에 그레이트브리튼 섬과 프랑스에서 진행된 봉건주의의 위기를 설명하지 못한다. 왜? 영주들은 농노들을 해방시켜주지 않고서도 어떤 식으로든 농민들한테서 계속 소득을 짜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브레너는 그 기간에 농노들 스스로 일으켰던-반란과 도주 같은- 계급투쟁이 성공한 것이 농노들이 해방된 근본 이유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구 감소도 여전히 한 요인인 것은 맞다. 이러고 나서 브레너는 농노 신분이 없어졌는데도 하나의 체제로서 봉건주의는 죽지 않았기 때문에, 인구 위기는 봉건주의의 몰락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나름대로 정확한 진단을 덧붙인다.

브레너의 주 공격은 사실 다른 가설을, 그러니까 상업화와 교역의 확대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이행을 설명하는 가설을 겨냥하고 있었다.

 


캘리번과 마녀

–  실비아 페데리치 / 황성원, 김민철 역 / 갈무리 / 2011.11.30

 

흑사병은 중세 투쟁들의 전환점이었다. 유럽 인구의 대략 30~40%가 죽었다.(Ziegler 1969:230). 면역력을 약화시킨 1315~1322년의 대기근에 이어(Jordan 1996), 이 예측할 수 없었던 인구 격감은 유럽의 사회적 · 정치적 삶을 뿌리부터 바꾸었으며, 사실상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었다. 질병의 만연으로 평준화효과가 발생하면서 사회 계서제가 전복되었다. 사람들이 죽음에 가까워지자 사회규율이 침식되었다. 갑작스런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사람들은 더 이상 일하거나 사회적 · 성적 규제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가능한 한 오래 먹고 마시며 현재를 최대한 즐기려 했다.

그러나 흑사병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계급갈등이 만들어 낸 노동력 위기의 심화였다. 노동인구 중 많은 수가 질병으로 사망하자 노동력이 극도로 부족하게 되었고 임금이 상승했다. 이는 봉건지배의 족쇄를 부수고자 하는 사람들의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다이어(Christopher Dyer)가 지적한 것처럼, 역병으로 인한 노동부족이 권력관계를 하층계급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이동시켰다. 토지가 부족할 때는 추방의 위협으로 농민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인구가 흑사병에 희생당하고 토지가 넘쳐나게 되자 지주의 협박은 효과를 상실했다. 이제는 농민이 자유롭게 이동하여 경작할 토지를 찾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Dyer 1968:26). 농작물이 썩어가고 가축이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 농민과 장인이 상황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전개의 한 양상으로서 다른 장원이나 도시로 집단이주하겠다는 위협을 동반한 지대납부 거부 운동이 일어났다. 장원기록에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는 바에 따르면, 농민은 “지불을 거절했다.” 또 그들은 “더 이상 관습에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집을 수리하고 배수로를 청소하고 도망친 농노를 추적하라는 영주의 명령을 무시했다(같은 책:24).

14세기 말에 이르면 지대납부 거부와 부역 거부가 집단적 현상이 되었다. 여러 마을이 결합하여 벌금, 세금, 지대의 납부를 중단했고, 금납화된 부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봉건권력의 주 도구였던 장원법정의 결정을 무시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지된 지대나 부역이 얼마나 되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봉건질서를 지탱하던 계급관계가 전복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16세기 초에 귀족의 시각을 대변하던 한 작가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기도 했다.

농민은 너무 부유하고…… 복종의 의미를 모른다. 그들은 법률을 무시하며, 귀족이 없기를 바란다. …… 그리고 그들은 우리 토지의 지대를 그들이 결정하고 싶어 한다(같은 책:33).

임금상승과 봉건지대의 하락에 대응하기 위해서, 부역을 부활시키거나 때로는 노예제를 부활시켜서라도 노동착취를 증대시키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피렌체에서 노예를 수입하는 것이 1366년에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들은 계급갈등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을 뿐이다. 잉글랜드에서는 귀족이 최고임금을 제한하는 <노동법령>을 정하여 노동비용을 억제하려 했고, 이 때문에 1381년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지역에서 지역으로 번졌고, “국왕과 대화하기 위해” 켄트에서 런던으로 농민 수천 명이 행진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Hilton 1973; Dobson 1983). 프랑스에서도 1379년에서 1382년 사이에 “혁명의 회오리바람”이 일었다(Boissonade 1927:314).

 


쿠오 바디스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 1

–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 정초일 역 / 푸른숲 / 2002.02.20

 

페스트가 도래할 때까지 3백 년 동안 유럽에서는 온화한 기후가 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호한 기상 여건은 풍성한 수확과 풍족한 식사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기후는 14세기 초에 이르러 종말을 고하고, 대신 냉혹한 겨울과 짧은 여름이 찾아왔다. 그 결과는 보잘것없는 수확과 기근이었다. 또한 어린아이들에게 특히 치명적인 갖가지 질병들까지 등장했다.

그 무렵의 연대기들을 검토하면, 어느 곳에서나 사망률이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316년이 되어 기근이 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강타하자, 적지 않은 지방에서 인구의 10퍼센트가 사망한다. 때마침 가축 전염병이 등장해서 양, 소, 말, 그리고 돼지의 수를 감소시킨다. 경제와 무역은 큰 손실을 입고 휘청거린다. 농부들도 가난에 시달린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은 병으로 쓰러진 가축들의 고기를 먹는다. 그로 인해 발생한 질병들은 공동묘지의 묘역을 확장해야 할 정도로 많은 희생자를 낸다.

뒤미처 1340년부터 몇 해 동안 축축하고 차가운 겨울이 계속된다. 게다가 메뚜기 떼들은 수확물을 결딴낸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에게 급기야 홍수까지 밀려든다. 최초로 유럽 땅에 발을 디딘 검은 죽음(Black Death, 흑사병)은 이처럼 쇠약해지고 불안정한 사회와 마주친 것이다.

 


만들어진 역사

–  조셉 커민스 / 송설희, 김수진 역 / 말글빛냄 / 2008.05.07

 

암흑의 시대가 오기 전 유럽의 기후는 현저하게 추웠으나 AD1000년경에 기온이 상승했다. 농업 기술의 개량(한 예로, 새로운 유형의 쟁기)으로 식량 생산이 두드러지게 증가했다. 1300년대 초까지 인구는 급속도로 성장했고, 도시는 번성했으며 밀집된 거주지가 여러 곳에서 형성되었다. 동시에 조선업과 항해술의 진보로 무역업자들은 이미 알려진 세계를 가로질러 훨씬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4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유럽은 ‘소 빙하기’라고 알려진 추위에 강타당했다. 파괴적인 폭풍과 혹한의 날씨는 농작물들을 대량으로 파괴했다. 1315년경, 북유럽에 대규모의 흉작이 찾아들었는데 이는 생존자들의 면역 체계를 엄청나게 약화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아시아 깊숙한 곳에서 서혜선종(선 페스트)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때 중국은 몽고군에 맞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오랫동안 치르고 있었다. 중국 대륙 여러 곳에서 무분별한 벌목 작업이 진행돼 숲들이 파괴되었고, 이로 인해 더 이상 숲 속에서 먹을 것을 찾을 수 없게 된 쥐들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터전을 옮겼다. 생명체들이 굶주리고 죽어감에 따라 크세놉실라 케오피스는 새로운 숙주를 찾아야 했다. 우연히 마주친, 굶주림과 질병, 스트레스로 쇠약해진 인간들은 그들의 완벽한 표적이었다. 1330년대까지 그 전염병은 중국을 가차없이 파괴했다. 유럽에 남겨진 기록만큼 완벽하지는 않지만 역사가들은 약 1억 2,500만 명의 전체 인구 중 3,500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몇몇 학자들은 두 사람 중 한 사람 꼴로 죽었다고 말한다.

……

1348년 봄, 유럽 대륙의 한복판에서 시작된 그 전염병은 유럽 역사상 가장 사악한 반유대주의 폭력을 불러일으켰다. 책임을 뒤집어씌울 대상을 찾던 사람들은 전통적인 추방자인 유대인들이 우물 안에 독을 넣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었다. 흑사병으로 죽은 유대인의 비율이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외부 사람을 피하는 경향이 있는 그들은 더 고립되어 있었고, 정결한 생활 습관으로 더 나은 개인 위생과 더 깨끗한 음식이 이유였을 것이다.

유대인을 향한 광적인 흥분은 미처 날뛰는 수위에 다다랐고, 2천 5백여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 인민재판과 사사로운 입법 행위들이 빈번하게 발생해 유대인들을 사형에 처했고(주로 화형을 선호했다), 추방하고 재산과 토지를 몰수했다.

독일의 스트라스부르와 같은 도시에서는 유대인들을 나체로 벗겨 옷에 감춰진 돈을 빼앗은 후 한꺼번에 수백 명씩 화형에 처했다. 이는 몇 세기 후에 닥쳐올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유대인 대학살의 징조였다.

 


한의학과 현대의학

–  김우겸 / 서울대학교 출판부 / 2003.08.30

 

이슬람교도 이븐 알와디(Ibn al-Wardi)는 알레포(Aleppo)를 엄습한 페스트 유행에서 살아남았는데, 그의 기록에 의하면 페스트는 ‘암흑의 땅’에서 발생하여 먼저 북아시아로 번져 간 후 중국을 엄습하고, 중국에서 다시 인도와 이슬람 여러 나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알레포는 원래 대상들이 드나드는 도시로, 14세기 아시아의 초원지대를 동서남북으로 이어 주는 교역 중심지여서 페스트 만연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 데 합당한 위치에 있었다.

 

기독교인의 손으로 작성된 페스트 관련 기록을 보면 페스트는 먼저 중국에서 발생하고, 여기서 아시아대륙을 횡단하여 크림반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타당한 가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페스트는 1331년에 중국에 들어왔다. 운남성(雲南省)과 미얀마 등 오랜 페스트 감염 중심지로부터 직접 들어왔거나 만주와 몽골초원에 살던 설치류가 새로이 페스트에 감염되어 중국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로부터 16년 후 아시아대륙 대상교역로를 거쳐 1347년 크림반도에 도달했고, 거기서 배에 실려 유럽 여러 항구에 옮겨졌으며, 유럽 내륙과 중동의 거의 모든 지역에 퍼졌을 것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동유럽으로 분포되어 있던 대상기지들은, 페스트균이 인적 드문 지역을 뛰어넘어 다른 곳으로 전파되는 데 좋은 징검다리가 되었을 것이다. 대상들이 묵었던 숙소에는 언제나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여행객과 낙타가 먹을 많은 식량이 있었으므로 쥐와 벼룩도 많았을 것이다. 서유럽 내륙지방에서는 제분소가 이러한 구실을 했다. 모여든 쥐와 벼룩이 페스트에 감염되면 다시 페스트균을 퍼뜨려 새로운 지역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앞다투어 도망갔으며, 병균은 다시 다른 지역으로 옮겨져 새로운 감염지역을 만들었을 것이다.

 


함두릴라 알카히라

–  최준석 / 메디치미디어 / 2009.05.10

 

핫산 시대는 이런 국정의 혼란에다가 흑사병의 내습으로 나라가 결딴났다. 흑사병은 1차 재임기 2년차인 1348년 처음으로 카이로를 강타했다. 2년 새 카이로 인구의 약 3분의 1을 쓰러뜨렸다. 유럽 인구의 4분의 1을 희생시킨 흑사병의 발병과 시기가 비슷하다.

카이로의 흑사병은 흑해에서 온 노예 상인들이 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데리고 온 노예들, 즉 미래의 마믈룩 전사들과 함께 병균이 카이로에 온 듯하다. 이븐 바투타는 알 나시르 무함마드 술탄 때 카이로에 왔다가 인도를 거쳐 중국까지 간 뒤 다시 핫산 술탄 때인 1348년 카이로에 돌아오는데 당시 이집트의 흑사병의 참상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도 하루에 1080명의 사망자를 냈던 페스트는 한풀 꺾였다. 카이로로 갔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때 하루 사망자는 무려 2만 1000명에 달했다. 일찍이 나와 안면이 있는 셰이크들은 모두 죽었다.”

하루에 2만 명이 죽었다는 말은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1000명 이상이 숨졌다는 말은 여러 문헌에서 나온다.

흑사병은 1348년 최초 발생한 뒤 1374~1375년, 1379~1381년 다시 카이로로 돌아왔다. 15,16세기 들어서도 1416, 1430, 1437, 1448, 1459, 1469, 1477, 1492, 1498, 1505, 1513년의 흑사병은 특히 심했다. 1430년에는 하루 2000명이 숨졌고, 그해 알 카히라와 푸스타트에서 총 10만 명이 죽었다고 중세사가 마크리지는 추정하고 있다. 이집트는 흑사병이 안긴 인구 감소와 재정 수입 축소의 휴유증을 오래 앓았다. 1800년 이집트 인구는 1200년 전 아랍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흑사병이 신의 진노라고 생각해 카이로에는 광신주의와 미신이 유행했다.

마믈룩 왕조가 오스만 제국에 쉽게 멸망한 것도 흑사병의 여파라는 해석이 있다. 인구가 줄어드니 재정 수입이 감소하고, 군대의 근간인 마믈룩을 사들일 돈이 넉넉지 않게 되었으며, 이는 유능한 군지휘관의 감소와 허술한 무장으로 나타났다. 유럽은 바로 회복한 데 비해 이집트에는 흑사병이 끊이지 않고 재발했다. 오스만 제국의 속주가 된 1517년부터, 1894년까지도 흑사병은 133년 동안 발병했으며 이 중 33번은 피해가 컸다.

 


송·원대 재해와 사회구제 연구 :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박사학위 논문)

–  김대기 / 강원대학교 / 2010

 

원元대의 재황(災荒) 이전의 역대왕조보다도 심하였다. 1320년대를 전후하여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비롯하여 여러 재해들이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 원元대는 비교적 다른 시기보다 특히 역병이 상당히 사회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

원元대의 역병은 전쟁과 유관한 기록이 확실한 것만 34차례이다. 이것은 전체 역병 발생 수의 절반에 해당한다. 요컨대 전쟁은 원대 역재(疫災)의 주요 유발 요인이다.

원조의 남송 정복전쟁이 종료된 14세기 이후에도 역병은 빈번히 발생하였고 수재(水災)와 기황(饑荒)도 동반되었다. 그 주요 원인은 기후의 이상변화로 인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

1226년부터 1362년까지 136년간 역재(疫災)의 시기별 분포는 시간이 흐를수록 밀집하여 점차 발생 간격이 짧아졌다. 이 시기 재해 발생을 억제하는 기제는 상실되었고, 동시에 재해가 사회조직에 반응하는 시간도 갈수록 짧아졌으며 사람들의 방역 기제와 능력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만약 20년을 단위로 하여 원대 역재의 발생빈도를 살펴보면 점차 상승하는 추세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역재의 발생빈도가 점차 줄어들지만 대역大疫의 발생빈도는 갈수록 증가하여, 2년 이상 연속으로 역재가 출현하는 빈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높아진다.

……

 

※ 원元나라 시기별 역병 발생빈도

 기간 상반년 발병횟수  하반년 발병횟수
 1226~1245  0  1
 1246~1265  1  0
 1266~1285  3  1
 1286~1305  3  2
 1306~1325  3  3
 1326~1345  6  3
 1346~1362  9  1

 

위 통계로 볼 때, 앞에서 언급한 원조元朝 후기로 갈수록 역병의 발병이 증가하는 요인은 단순히 사회의 방재체제의 부실로만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하반기의 경우 역병의 발병이 크게 증가하지 않는 반면 상반기에는 증가 추세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기로 갈수록 상반년의 기후환경이 역병발생의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王登傳』은 두 개의 전형적인 鼠疫(페스트) 病例를 제공한다. 왕징의 임상증상 중 페스트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 그리고 당순신의 예에서 페스트에 걸려 죽음에 이르는 과정 등을 제공한다. 더불어 사천四川 및 양양襄陽 일대 戰事를 통하여 두 지역 인구 사망의 기본적인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남송南宋 가정 연간 사천지역의 인구는 약 600만에 이르렀다. 1282년, 즉 원군이 사천을 완전히 평정한 지 3년째 되던 해, 사천의 백성은 12만호 전체 인구는 대략 60만 정도였다. 원나라 사람 우집(虞集)은 남송 후기 사천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촉인蜀人들이 慘禍를 깊이 당하여 거의 다 사상死傷을 입으니, 천, 백인 중에 한 둘도 남아 있지 않았다.”

……

 

3

 

 


<관련 그림>

 

 

4

– 1201년부터 1960년까지 서유럽의 곡물가 변화 추이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경향을 보이는 빵 가격을 두고 경제사학자들은 ‘가격혁명’이라 불렀다. 그런데 가격상승의 배경은 화폐의 가치절하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늘어난 빵의 수요였다. 인구는 곡식 생산량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다.

 

 

 

5

–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전파 / 출처 : 위키미디어

 

 

 

6

– 흑사병의 전파 / 출처 : http://chssp.ucdavis.edu/programs/historyblueprint/maps/medieval-map#blackdeathanch

 

 

 

7

– 1411년 토겐부르크 성서에 그려진 흑사병 환자

 

 

 

8

– 흑사병의 희생자를 묻고있는 벨기에 투르네(Tournai)의 시민들

 

 

 

18

– 기원전 2500년부터 기온 변화 (출처 : http://www.longrangeweather.com/)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농민반란

네이버 지식백과(역사의 원전) : 흑사병

네이버 지식백과(세상의 모든 지식) : 흑사병

위키 백과 : 흑사병

위키 백과 : Great Famine of 1315–17

위키 백과 : Crisis of the Late Middle Ages

위키 백과 : Popular revolt in late-medieval Europe

[역병과 재해] 고려시대 전염병·기근의 발생과 불교 – 임혜경

2011-06-10  기근과 풍요의 반복

2011-03-09  백두산이 곧 폭발한다고?

 

14세기의 위기 – 기근과 흑사병

4 thoughts on “14세기의 위기 – 기근과 흑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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