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의 함락(Fall of Constantinople)은 비잔틴-오스만 전쟁(1265~1453)의 마지막 부분으로 1453년 4월 6일에 전투를 시작하여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으로써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존재해왔던 비잔틴 제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고 오스만 제국의 동지중해 및 발칸 반도로의 진출과 지배권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대포와 화약이 전쟁의 중심으로 들어온 전환점이 된 전쟁이었고, 문화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 고전학 연구 학자들이 대거 서유럽으로 망명하고 결국 유럽 르네상스의 새로운 연료가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제4차 십자군전쟁에 있었던 1204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심각하게 쇠락했다. 14세기 중반 이후의 비잔틴 제국은 빈사상태에 있었다. 보다 전문적인 행정기구가 있다는 점에서 오스만 투르크나 슬라브족 경쟁자들보다 더 잘 조직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오스만 투르크의 관용이나 외부의 대규모 원조 없이는 거의 지속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가난하고 크기도 작았다.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에 함락되었지만 사실은 이미 50년 전에 투르크의 손에 떨어졌어야 했다. 1390년이 되자 대다수의 비잔틴인들은 게임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비잔티움은 실상 오스만 제국의 비공식적인 속국이었으며 제국의 공인된 일부가 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였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던 억지스러운 주종 관계는 14세기 말에 이르러 점차 와해되기 시작한다. 침착하고 점잖던 무라드 1세(Murad I)의 뒤를 이은 바예지드(Bayezid)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바예지드는 이미 1402년에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만약 지난 7년간 델리와 다마스쿠스 같은 도시들을 유린하고 (거의) 모스크바까지 휩쓴 티무르의 엄청난 군대가 소아시아 동쪽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콘스탄티노플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터키 역사 연구의 성과에 근거하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결코 오스만 투르크의 장기적인 포위와 공격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비잔틴 제국 내부의 조화될 수 없었던 반(反)서양적 입장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보루가 내부의 분열로 파괴된 것이다. 실제로 서양 라틴교회가 비잔틴의 그리스 동방정교회에 대해 일관되게 취했던 확장과 장악 정책 때문에, 그리스 동방정교회는 설사 터키인들에게 투항할지언정 서양 라틴교회와 동맹을 결성해 공동으로 터키 무슬림에 항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스 동방정교회가 터키인들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한 것은 사태의 압박 때문에 성급하게 내린 결정이 아니라, 장기적인 과정을 거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동방정교회 사람들은 서유럽 라틴교회의 통치하에서보다 터키인들의 진보적인 통치하에서 더욱 많은 자주성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던 것이다.
아래의 그림에서 보듯이 1450년 콘스탄티노플 주변 지역과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대부분의 영역만을 가진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1세(Constantine XI)가 이끌고 있었다. 이 도시를 건설한 황제도 같은 이름인 콘스탄티누스였다는게 아이러니하다.
1451년에 오스만 투르크의 왕좌에 오른 메흐메드 2세(Mehmed II)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결국 비잔틴 제국은 21세의 이 야심찬 청년 술탄에 의해 1453년 5월 29일, 1100여 년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 1450년경의 동東지중해 지역으로 오스만 제국에 둘러싸인 멸망 직전의 비잔틴 제국
※ 지휘관과 병력
비잔틴 제국 | 오스만 투르크 |
– 콘스탄티누스 11세(Constantine XI)
– 루카스 노타라스(Loukas Notaras) – 죠반니 지우스티니아니(Giovanni Giustiniani) – 약 7,000 – 12,000명, 26척의 배 |
– 메흐메드 2세(Mehmed II)
– 자가노스 파샤(Zaganos Pasha) – 술레이만 발토울루(Suleiman Baltoghlu) – 80,000 – 150,000명, 90 – 126척의 배 |
이미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지역 요새인 아나돌루 히사리(Anadolu Hisari)를 소유하고 있던 메흐메드 2세(Mehmed II)는 유럽 해안에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로 알려진 요새 건설을 시작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효율적으로 장악한 메흐메드는 콘스탄티노플을 흑해와 고립시키고, 흑해 지역의 제노바 식민지로부터 받을 수있는 원조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에 교황 니콜라오 5세에게 원조를 호소했다. 동방정교회와 로마 교회 사이의 수세기에 걸친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오는 서구유럽에서 도움을 청하기로 동의했지만 도와주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서구유럽의 왕들과 제후들은 각자의 문제 때문에 동방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으로 약해져있었고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은 레콩키스타의 막바지에 있었다. 독일의 선제후들은 서로 피터지게 싸우고 있었고 헝가리와 폴란드는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패배한 상태였다. 비록 몇몇 북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군대를 보내긴 했지만, 서방의 원조는 오스만 제국의 전력과 견주기엔 너무나 미미한 정도였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453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지연문명
– 르우안웨이 / 최형록,김혜준 역 / 심산 / 2011.05.10
장기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서아시아 · 북아프리카 · 지중해 · 서유럽의 많은 역사적 사실에서 지연 시각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터키 역사 연구의 성과에 근거하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결코 오스만 투르크의 장기적인 포위와 공격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비잔틴 제국 내부의 조화될 수 없었던 반(反)서양적 입장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보루가 내부의 분열로 파괴된 것이다. 실제로 서양 라틴교회가 비잔틴의 그리스 동방정교회에 대해 일관되게 취했던 확장과 장악 정책 때문에, 그리스 동방정교회는 설사 터키인들에게 투항할지언정 서양 라틴교회와 동맹을 결성해 공동으로 터키 무슬림에 항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스 동방정교회가 터키인들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한 것은 사태의 압박 때문에 성급하게 내린 결정이 아니라, 장기적인 과정을 거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동방정교회 사람들은 서유럽 라틴교회의 통치하에서보다 터키인들의 진보적인 통치하에서 더욱 많은 자주성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던 것이다. 이보다 이전인 1385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는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편지를 보내, 터키인이 그리스교회에 충분한 행동의 자유를 줄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만약 문명과 문화 혹은 종교의 역량이 더 컸다면, 그리스 동방정교회는 분명 라틴교회와 동맹을 맺고 일치단결해 터키 이교도의 침략에 맞서 싸웠을 것이다. 이 두 교회가 믿은 것은 모두 기독교였을 뿐만 아니라 모두 삼위일체 형태의 기독교였기 때문이다(기독교 단성론파와 네스토리우스파도 이전에는 세력이 매우 큰 기독교 유파였다. 하지만 그들은 삼위일체설을 신봉하지는 않았다). 이는 두 교회가 교리에서는 실제적인 차이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차이는 단지 조직 문제, 즉 각자의 조직 기구를 인식하는 정체성에 있었다. 두 교회는 두 인류 집단을 대표했고, 또한 역대로 의견 대립도 있었다. 이 의견 대립이 신학에서의 의견 차이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근본 원인은 지연 정치적인 이해와 충돌이었다. 라틴교회와 그리스교회의 대립은 표면적으로는 신학 분쟁이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십자군의 동방 원정 시기에 서유럽 기독교도는 이교도의 징벌이라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오히려 동남 유럽의 비잔틴 기독교 동포들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이때 신학 대립이라는 가면이 완전히 벗겨졌고, 이익만이 중요 동기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는 또한 인류 집단의 충돌에서 지연 이익의 요소가 문명 · 문화 · 종교의 형태 요소보다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십자가 초승달 동맹
– 이언 아몬드 / 최파일 역 / 미지북스 / 2010.06.15
한 사람의 승전이 다른 사람에게는 대학살이며, 누군가의 승리가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파멸이 되는 것은 역사의 일반적 진리다. 쉽게 말해서 1453년은 많은 투르크인들에게 시작을 , 많은 그리스인들에게 끝을 의미했다. 이 장에서는 당시의 투르크인과 기독교도(카탈루냐, 그리스, 세르비아인)의 연이은 동맹에 지속적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앞서 언급한 대립적인 역사관만이 이 지역 역사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님을 입증할 것이다. 정체성이란 하룻밤 사이에 변하지 않는다. 어떤 민족이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정복당하더라도 말이다. 곧 살펴보겠지만 투르크인들이 정복한 그리스어권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다.이는 오스만군에 압도적인 수의 기독교도가 존재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오스만 투르크의 문화와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기도 하다. 외래 요소와 문화를 언제든지 기꺼이 받아들여 자신들 속에 융합하는 오스만 문화의 혼종성이야말로 제국이 이룩한 성취의 일부라는 견해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셀주크 투르크인, 일한 투르크인들과 대대손손 함께 살면서 관습과 먹을거리, 심지어 성소까지 공유한 그리스인들, 즉 소아시아의 ‘변경’ 지대에 살던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인들과 비잔티움의 문화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의 소아시아와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역사적 투쟁으로 보는 견해는 고도로 복잡한 일련의 역사적 변천을 곡해하는 것이다. 투르크군의 절반이 기독교도였고, 비잔티움 제국 군대의 절반이 투르크 용병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당시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도 함께 찾아야 한다.
몽골인부터 투르크멘인과 헝가리인까지, 베르베르인부터 비잔티움 황제의 시위대를 이루던 앵글로 색슨인, 바랑인Varangian(발트해 연안에서 기원한 노르만의 일족)까지, 이 시기와 관련된 민족 및 인종 집단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다양하지만 이 장에서 다루는 유력 집단은 크게 투르크인, 비잔틴인, 라틴인의 세 집단이다. 세 집단은 모두 내적인 차이와 다양한 민족 구성, 복잡하게 뒤얽힌 역사와 문화 등으로 인해 내분이 끊이지 않던 복합적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비잔티움 황제가 자신의 딸을 투르크의 술탄에게 선뜻 내어주고 결혼 피로연에도 나흘씩이나 머물며 축하했던 까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 역사의 장에 참여한 ‘주요 배역’들의 활동 배경을 차근차근 살펴봐야 할 것이다.
……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에 함락되었지만 사실은 이미 50년 전에 투르크의 손에 떨어졌어야 했다. 1390년이 되자 대다수의 비잔틴인들은 게임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비잔티움은 실상 오스만 제국의 비공식적인 속국이었으며 제국의 공인된 일부가 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였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던 억지스러운 주종 관계는 14세기 말에 이르러 점차 와해되기 시작한다. 침착하고 점잖던 무라드 1세의 뒤를 이은 바예지드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바예지드는 이미 1402년에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만약 지난 7년간 델리와 다마스쿠스 같은 도시들을 유린하고 (거의) 모스크바까지 휩쓴 엄청난 군대가 소아시아 동쪽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콘스탄티노플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서양에서 태멀레인Tamerlane(티무르)이라는 이름으로 악명 높은, 바예지드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도착한 것이다. 바예지드는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를 풀고 소아시아로 떠날 때 두 번 다시 그 도시를 보지 못할 운명이었다.
티무르와 앙카라 전투 : 바예지드의 충성스런 세르비아 군대와 불충한 투르크 군대(1402년)
발칸의 역사
– 마크 마조워 / 이순호 역 / 을유문화사 / 2006.05.25
발칸 기독교인들에게 미친 그리스 문화의 지배력은 13세기와 15세기 동안 일어난 비잔티움의 붕괴로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문화의 성격은 새로운 민족-투르크어를 쓰는 무슬림-이 출현함으로 변해갔다. 이 투르크 세력은 남동부유럽의 여러 기독교 세력-비잔티움은 물론, 세르비아, 제노바, 헝가리, 베네치아, 그 밖의 다른 왕조들까지-을 격파하고 격파한 지역들을 하나의 정치, 경제적 제국으로 통합하여 5세기 동안 지배했다. 하지만 투르크족의 발칸 정복은 느닷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정복하기 전부터 이미 그 지역에서 기독교 세력의 동맹자 혹은 원조자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그것이 정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후에도 투르크족은 기독교 병사들을 계속 이용했고, 그 같은 상황은 특히 아나톨리아와 중동 원정 때 두드러졌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관계는 여러 세대가 교류하는 것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정복과 협력의 형태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보다는 오히려 영국의 인도 탈취와 유사한 점이 많다.
심지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부터 기독교인들은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있었다. 15세기의 한 그리스인 대주교는 “돈 벌 욕심과 유력 인사가 되어 호화롭게” 살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혀 자발적으로 개종하는 이들을 역겹다는 듯 언급하기도 했다. 16세기 초 이슬람으로 개종한 기독교인들의 수는 이미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비잔틴 제국의 역사
– 워렌 트레드골드 / 박광순 역 / 가람기획 / 2003.05.26
술탄 무라드가 황제로서의 콘스탄티누스와 펠레폰네소스의 예하 통치자로서의 그의 두 동생의 충성 맹세를 받아들였다. 비잔티움으로서는 불행하게도 1451년에 무라드가 사망하고, 1년 안에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바르나에서의 십자군의 실패에 크게 낙담했지만, 그중 일부가 콘스탄티누스의 호소로 약간의 병력을 파괴했다. 주로 베네치아 인과 제노바 인들이었다. 1453년에 술탄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공격하면서,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도시의 성벽이 여느 때와 거의 마찬가지로 튼튼했지만, 메메드에게는 여러 문의 대포가 있었다. 그것들은 최근에 개량되어 요새를 공략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두 달에 걸쳐 포격을 가한 뒤에 오스만 투르크 군은 성벽을 뚫고 도시로 돌입했다. 비잔틴의 수비군은 거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웠다.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자신도 싸우다가 죽었다. 그러자 다수의 이탈리아 인들이 배를 타고 도망쳤다. 술탄은 도시의 대부분의 지역을 철저히 약탈하고, 사로잡은 비잔틴의 관리들을 처형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의 수도로 삼고 이곳을 재건하고 재식민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새 총대주교를 임명하고, 잠시 콘스탄티누스의 두 동생이 자신의 봉신으로서 계속 펠레폰네소스를 통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런 타협책에 싫증이 나서 메메드는 1460년에 그들의 영지를 그냥 병합해버렸다. 다음해에 술탄은 비잔티움의 마지막 남은 조각인 트레비존드 제국을 점령했다.
……
흑해 교역의 팽창으로 베네치아 인이나 제노바 인뿐만 아니라 비잔틴 인까지 이득을 보았다. 킵차크의 몽골 칸 통치령의 곡물과 모피, 노예가 예로부터의 비단길을 따라 도착하는 중국산 물품에 추가되었다. 이 교역품들은 대부분 크리미아나 트레비존드의 항구를 거치고, 거의 모두 콘스탄티노플의 항구를 통과했다. 콘스탄티노플이 1203년의 크기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성장한 여러 국가의 덜 중앙 집권화된 경제가 테살로니카와 아드리아노플, 미스트라, 트레비존드, 아르타와 같은 다른 도시의 성장을 촉진했다. 하지만 비잔틴과 트레비존드의 영토를 통과하는 교역품의 양은, 흑사병이 비잔티움과 트레비존드에 불균등한 타격을 가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강국들은 대부분 악성 돌림병에서 곧 회복하고 다시 성장해나가기 시작한 반면에, 고통을 덜 겪은 오스만 투르크 인들은 더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정복을 통해서 비잔틴의 회복을 앞질러 방해했다.
……
1204년 이후 예전의 제국의 영역에 걸쳐 있었던 비잔틴 사회와 문화가 1453년 이후에도 같은 지역에 존속하고 있었다. 많은 비잔틴적인 태도나 관습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어도 여전히 이전의 비잔틴 땅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이탈리아 어나 투르크어에서 차용된 단어들에 의해 다소 변하거나, 아나톨리아 중부의 투르크화에 의해 얼마간 그 사용권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리스 어는 그리스와 트라키아, 에게 해의 도서지방, 키프로스, 아나톨리아의 연안지대의 주요 언어였다. 언어보다 훨씬 더 많이 비잔틴의 전통을 보존해온 비잔틴 교회도 훨씬 덜 축소되거나 변한 채 존속하고 있었다.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온갖 격변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그리스 어를 사용하는 교회의 지도권을 유지했고, 또 대부분의 러시아와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루지야 그리스도 교도들도 충성스런 태도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는 바에 따르면,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비잔티움과 서방교회의 재통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전사들은 라틴 제국을 유지하는 것보다 이 일을 해내는 데 훨씬 더 크게 실패했다.
중국
– 백범흠 / 늘품플러스 / 2010.04.19
1453년 오스만 터키(Ottoman Turkey)에 의해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에 따라 서유럽 국가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첫째는 동로마(주로 그리스인) 학자들과 학문의 유입이었다. 새로운 학문은 서유럽 엘리트들을 각성시켰다. 이는 결국 학문과 제도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산업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둘째는 초강대국 오스만 터키에 의해 중동과 인도, 중국으로 향하는 육상 통로가 사실상 차단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서유럽인들은 오스만 터키를 우회하여 인도와 중국으로 갈 수 있는 해로海路를 찾게 되었으며, 이는 남·북 아메리카의 재발견과 그 곳에서 산출된 재화의 서유럽 반입을 가져왔다. 재화의 서유럽 반입은 서유럽 국가들의 국부의 증대와 함께 산업혁명의 동인으로 작용했다. 유럽인들은 또한 중국에서 전래된 종이 제조법과 인쇄술을 기계화했으며, 화약을 개량하는 한편, 고성능 대포도 제작했다. 그들은 지식과 노하우(know-how)를 지속적으로 축적하여 산업혁명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14세기 후반과 15세기에 제노바의 추세와 사건들은 이런 제노바의 원거리 교역망에 대한 압박에 의해서, 그리고 이와 동시에 지중해 세계경제와 이탈리아 도시국가체계에서 제노바의 권력지위의 하락에 의해서 심대하게 영향을 받았다. 중국으로 가는 제노바의 중앙아시아 통로의 급속한 폐쇄, 오스만 투르크, 베네치아, 카탈로니아-아라곤 권력이 제노바의 지중해 교역으로 쇄도한 것, 제노바의 대도시 영역을 둘러싼 모든 강력한 도시국가들의 부상, 이러한 상황 형세가 제노바인들에게는 매우 희망 없어 보였을 것이다.
……
그러나 깊이 들여다 보면, 이 위기에 대응하여 제노바의 교역 및 축적망은 근본적으로 구조조정되어, 장기적으로 보면 제노바 상인 은행가들을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자본가계급으로 바꾸어 놓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
간단히 말해서 15세기 제노바 자본가계급은 근본적 난관에 빠져 있었다고 묘사될 수 있다. 한편에서, 앞선 시대의 원거리 무역 기회를 상실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이윤에 손상을 주는 경쟁, 싸움과 끝없는 분란이 일어났고, 또한 세계경제 전역에 흩어져 사용되지 않고 사용될 수 없는 사업망은 소실되어 같다. 다른 한편, 이런 경향들을 반전시키기에 충분한 규모의 새로운 원거리 무역의 기회를 개방하려면, 그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계산불가능하기도 한 위험, 따라서 합리적인 자본주의 사업의 지평을 넘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달리 말하자면, 이윤형성의 논리 그 자체가 제노바 자본의 자기 팽창을 제약했고, 이로써 자기 파괴의 위협을 불러왔다.
이런 난관에서 벗어나는 가장 분명한 길은 이베리아인 같은 영토주의적 통치자들과 정치적 교환관계에 들어서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계산 가능한 이윤 이외의 동기에서 새로운 상업적 공간을 개척하려 추동되었고, 이들은 또한 제노바 자본가계급이 가장 잘 제공해 줄 수 있는 종류의 서비스, 즉 적절한 통화 및 상품 거래를 자유롭게 조직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공인되지 않은 해역으로 이베리아가 팽창할 때 십자군정신은 금전적 비용과 이득에 대한 끊임없는 합리적 계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전진할 수 있게 해주는 탁월한 보증이었다. 그리고 르네상스정신에 대한 집착은, 그 팽창의 추진자이자 조직자들이 그 당시 가장 크고 가장 자금이 풍부하고 가장 연결고리가 많던 상인계급-더욱이 이 계급은 이미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자리를 잘 틀었다-과 연합하는 이점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게 해줄, 마찬가지로 훌륭한 보증이었다. 이 연합이 형성되고 이른바 신대륙 발견이 이를 공고화하자, 제노바 자본주의는 마침내 그 장기 위기에서 구원받아 새로운 대팽창의 계기를 향해 진격하였다.
비잔틴제국 – 천 년의 명암
– 진원숙 / 살림 / 2007.04.30
오스만제국은 마침내 비잔틴제국에 최후의 공격을 했다. 젊은 나이에 술탄이 되었지만 술수와 영도력을 갖춘 메흐메드 2세(재위 1451~1481)는 친위군단 예니체리를 지휘해 아나톨리아의 반란 세력을 진압한 뒤 비잔틴제국으로 눈을 돌렸다.
……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서유럽에 투르크와 싸울 십자군을 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서유럽은 동방정교회의 로마교회와의 통합을 십자군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했고, 비잔틴 황제는 터번을 쓴 투르크인들에게 머리를 숙일지언정 교황에게 머리를 숙일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십자군을 결성하기 위한 노력도 헛수고가 되었다. 그 후에도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위급함을 호소했으나 교황 니콜라우스 5세를 움직이지는 못했다.
거기다 내분 상태의 신성로마제국(독일), 백년전쟁의 뒷마무리에 열중해 있던 프랑스, 30년 장미전쟁(1455~1485) 직전의 잉글랜드 등은 비잔틴제국을 도와줄 처지가 못 되었다. 20여 년 간 계속 전쟁을 해 온 이탈리아반도의 경우도 비잔틴제국의 안위를 걱정할 형편이 아니었다.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 로마가 1454년과 1455년에야 각각 ‘로디평화조약’과 ‘이탈리아동맹’을 맺었고, 그로 인해 불안하지만 겨우 정치가 안정된 상황이었다.1)
베네치아만이 무슬림들과 싸워 자국의 전통 교역로를 보호하고, 비잔틴제국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베네치아는 지중해가 무슬림들의 무대가 된 다음에도 줄곧 비잔티움‒흑해 혹은 크레타‒로도스‒키프로스를 잇는 해로를 확보하고 활발하게 교역해 왔다. 남부 프랑스,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 알제이 등과 교역한 것은 물론 대서양 연안 해로를 따라 플랑드르까지 진출한 베네치아는 오스만 투르크족에게 비잔틴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베네치아는 제국의 원군 요청에 응해 1452년 8월에 크레테섬에 주둔하던 해군을 출동하게 했다. 제노바도 소수의 함선을 보냈다.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역 / 코나투스 / 2007.04.13
오스만제국은 13세기 후반 오스만 1세가 이끌던 투르크 유목민이 아나톨리아반도-오늘날 터키-를 통일하면서 시작되었다. 14세기 오스만 1세의 후계자들은 화약을 이용한 강력한 무기를 개발하고 노예들로 구성된 막강한 부대인 예니체리를 동원하여 이집트에서 맘루크족을 몰아냈다. 전 국민이 이교도와 싸우는 종교전사가 되기를 갈망했던 오스만제국은 비잔틴제국이 발칸반도에 세운 기독교왕국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1389년에 세르비아를 정복하고 1400년에는 다뉴브강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가장 큰 수확은 기독교왕국-비록 로마가톨릭교회가 아닌 동방정교회였지만-의 동부 최전선이자 비잔틴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것이다. 보스포루스해협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은 지중해 동부와 흑해의 무역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수세기에 걸쳐 동방정교회와 비잔틴제국은 오스만제국과 이슬람세력의 서부 진출을 견제해왔다. 그러나 15세기 중반 오스만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1453년 마침내 이 기독교왕국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면서 이스탄불로 개명했고 성 소피아성당을 이슬람사원으로 개조했다. 오스만제국은 그 곳을 거점으로 삼아 그리스와 알바니아를 포함한 발칸반도를 정복했고 에게해의 크레타섬과 항구도시 제노바를 장악한 후 로마까지 침략할 계획을 세웠다.
1453년 오스만제국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유럽의 기독교세계에 엄청난 타격이었다. 지중해 기독교세계의 동부 최전방인 콘스탄티노플은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 대한 십자군원정의 교두보였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의 수복을 고대하는 수많은 기독교도들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이슬람세력이 여전히 막강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유럽이 자칫 세계의 주류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오스만제국이 지중해 동부로 이르는 경로를 봉쇄하면서 유럽은 중국과 인도양에 이르는 무역로를 잃었다. 결국 유럽인들은 아시아의 부에 접근할 수 있는 다른 경로를 찾아야만 했다.
……
1453년 오스만투르크는 강력한 대포를 앞세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고, 프랑스도 영국군을 영국해협 너머로 쫓아내면서 기나긴 백년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1453년 대포는 유럽 전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그 위력을 충분히 입증했다. 그 후 스페인의 ‘가톨릭 왕’ 페르난도와 이사벨라는 무려 180문의 대포를 이끌고 공성포열을 갖추어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세력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하는데 성공했다.
음모와 반역의 천년제국
– 타임라이프 북스 / 권경희 역 / 가람기획 / 2004.12.10
설령 적이 첫 번째 방어선을 뚫고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길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 육로 성벽들은 지난 1,000년 동안 적들의 바퀴 달린 차로 움직이는 탑들, 투석기, 그리고 모든 형태의 전쟁 기계들을 막아냈다. 하지만 이제 투르크 인들은 바위를 돌가루로 분쇄시키는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신종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이 대포의 위력을 생각할 때 누구보다 괴로운 사람은 바로 황제였는데, 이 대포의 발명자인 헝가리 기술자 우르반이 애초에 이 신무기를 황제를 위해 만들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아마도 돈이 모자라서 그랬겠지만, 이 기술자가 부르는 가격을 맞춰줄 수 없었거나 맞춰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우르반은, 역사에 등장하는 무기 거래상들이 다 그렇듯이, 그러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자신의 발명품을 황제의 적에게 팔아넘겼다.
술탄 메메드 2세는 우르반의 대포를 반기며 그가 요구한 금액의 4배를 주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발명품을 루멜리 히사르 성벽 가장 높은 곳에 설치하는 즉시, 그것보다 2배 더 큰 대포를 다시 주문했다. 두 번째 신형 대포는 거의 8m 길이에 구경이 20cm가 넘는 거대한 청동 대포로, 벌어진 포구는 지름이 76cm에 무게가 500kg이 넘는 대포알들을 뱉어냈다. 아드리아노플에서 시험 포격이 있던 날, 포탄 하나가 1.6km를 더 날아가 땅에 약 2m 깊이의 웅덩이를 파놓는 것을 본 메메드 2세는 쾌재를 불렀다. 이것은 이제껏 보았던 대포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메메드 2세는 부하들에게 그의 도시에서부터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로 대포를 옮길 수 있는 길을 닦아놓으라고 명령했다. 200명의 일꾼들이 달라붙어 전속력으로 길을 포장하고 교량을 강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1453년 3월이 시작되는 날, 마부들이 휘두르는 채찍 아래 60조의 황소들이 거대한 대포를 끌고 트라키아를 지나갔다. 또 다른 200명은 이 금속 괴물이 최종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3주일 후, 메메드 2세는 앞서 출발했던 7만~10만 명의 대군이 남긴 흔적을 따라 아주 빠른 속도로 행군했다. 4월 5일 목요일, 그는 콘스탄티노플 성벽 바깥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이슬람의 안식일, 그는 포격을 명령했다. 이로써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탄불 (동서양 문명의 교류)
– 이희수 / 살림 / 2004.06.30
1453년 5월 29일. 환희와 비극이 교차하는 이날은 길이 기억될 날이었다. 천 년을 이어온 동로마 제국이 종말을 고하는 날이었으며, 동양의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터키에게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인류에게는 중세가 마감되고 근세가 시작되는 대사건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정복이 임박하자, 동로마의 비잔틴 제국은 유럽과의 종교적 화해를 모색하면서 이교도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지키려 했다. 1452년 12월 12일에는 로마 교황의 사절이 도착하여 성 소피아 성당에서 처음으로 가톨릭 의례를 집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감은 여전히 차가웠다.
오스만 제국의 새 술탄이 된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19살의 젊은 술탄에게 콘스탄티노플은 그의 제국이 열어갈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기 때문이었다. 메흐메트 2세는 보스포러스 해협 양안에 룸 엘리 히사르와 아나돌루 히사르라는, 마주보는 두 개의 성채를 축조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해상 보급로를 차단한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직접적인 공략을 서둘렀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음에도 항복을 하지 않자, 4월 12일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는 치열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도심을 감싸고 있는 서쪽 외벽은 2중 3중의 두터운 방어벽이 있어서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골든 혼 내해쪽의 성벽은 수비가 허술했지만, 골든 혼의 좁은 입구를 쇠사슬이 막고 있어 함대가 진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배를 육로로 날라 언덕을 넘어 골든 혼 내해에 진입시키는 전술을 계획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작전이었다. 4월 21일 밤, 70여 척의 함대가 골든 혼 바깥쪽의 톱하네에 집결하여 밤새 테페바시 언덕을 넘어 카슴파샤 쪽으로 이동해갔다. 골든 혼의 쇠사슬 저지선을 뚫은 것이다. 4월 22일 날이 밝자 오스만 함대는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16만의 오스만 군대는 약 5천 명의 군인과 3만 명의 주민이 결사 항쟁하는 비잔틴을 쉽게 꺾을 수 없었다. 5월 29일 아침, 치열한 전투는 오스만 군대의 마지막 총공세로 끝이 났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뚫리고 도시는 완전 장악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로마노스 문 근처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관련 그림>
– 당시의 콘스탄티노플
– 콘스탄티노플의 공성전(1453년4월6일~5월29일) 녹색의 오스만과 빨간색의 비잔틴 군의 배치도.
위의 배치도를 위쪽으로 90도 돌린 상태의 그림을 아래에서 보자.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프랑스 부르고뉴 출신의 베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Bertrandon de la Broquière)라는 인물이고, 제작연도는 역사적 전투가 끝난 지 불과 2년 뒤인 1455년이다.
삼각형의 푸른색 성곽으로 둘러싸인 이 기독교(동방정교) 천년고도가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이끄는 이슬람군대에 포위돼 있다. 육지 쪽으로는 오스만 육군이, 바다 쪽으론 해군이 둘러싸고 있다.
콘스탄티노플이 외부에서 군사적으로 공략하기 힘들었던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도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곽이었다. 4세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건설한 이 성곽은 1024년 십자군에 의해 한 차례 함락됐을 뿐 10여 차례의 공성전을 막아 천년제국을 지켜낸 막강한 방어막이었다. 비잔틴군은 이 성벽을 더욱 보강해 놓고 이슬람군대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철통방어의 둘째 요인은 위쪽 보스포루스해협에서 아래쪽으로 뻗은 긴 물길, 그림에서 왼편 성곽을 따라 내려오는 ‘골든 혼(Golden Horn)’이라 불리는 수로였다. 이 물길의 양 끝을 육중한 나무 구조물과 쇠사슬을 이용하여 봉쇄해 놓으면 침략군은 이 도시를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방어체계를 메흐메드 2세의 군대는 어떻게 뚫을 수 있었을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오스만군대의 사령부가 위치한 아래쪽 금빛 막사 뒤로 포병들이 전투 준비를 하고 있다. 오른편으로 오스만군대가 자랑하는 초대형 대포가 시선을 끈다. 성곽의 파괴는 이 대포가 맡았다. 메흐메드 2세는 헝가리 출신의 대포 기술자 우르반(Urban)를 영입해 포신이 8m를 넘고 450㎏짜리 돌덩이를 1.5㎞ 이상 날릴 수 있는 지상 최대의 대포를 제작했다. 이 포는 사용 중 파열되고 말았지만 오스만군의 최신 대포들은 방어벽을 타격하기에 충분했다.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는 오스만 군. 오른쪽에 거대한 대포가 보인다.
그림은 Fausto Zonaro가 1903년
비잔틴 제국은 골든 혼 입구에 쇠사슬을 걸어놓아 오스만 제국의 배가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골든 혼 입구 바다를 가로질러 설치된 방재구역 쇠사슬은 아주 오래전부터 콘스탄티노플 방어에 핵심적인 역활을 해왔다. 716년 이슬람 해군의 침입을 저지했는가 하면, 917년 러시아 왕자 올레그(Oleg)도 이 장애물 때문에 도성 진입에 실패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쇠사슬의 시작 지점인 갈라타 탑을 기습 공격, 철쇄(鐵鎖)를 끊음으로써 방재 구역을 장악하고 골든 혼 성벽까지 무너뜨리며 도성 진입에 성공했다. 그 뼈아픈 교훈을 살려 이번에는 갈라타 타워를 바깥으로 확장하고 쇠사슬은 적이 쉽게 성벽을 침투할 수 없는 곳에 설치했다. 제노바인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기술력으로 구축한 이 방재 구역의 관리 책임 및 지휘권은 제노바 출신 공병 바르톨로메오 솔리고에게 맡겨졌다. 쇠밧줄이 연결된 양쪽 끝은 골든 혼 입구 유게니우스 성문 근처 켄테나리오스 탑(현재 시르케지 지역, 사라이 부르누 조금 못 미친 지점)과 갈라타 성채 카스텔리온(현재 카라쿄이 지역의 예르알트 자미 자리)이었다. 양쪽 탑 사이의 거리는 550~600미터였다.
골든 혼의 방어막을 극복하기 위해 메흐메트 2세는 더욱 획기적인 작전을 고안했다. 보스포루스해협의 전함을 육지를 통해 골든 혼으로 끌어오는 방안이었다. 땅 위로 2㎞에 가까운 목재 레일을 깔고, 그 위로 60~80척의 전함을 운반해 골든 혼으로 들여놓은 것이다.
–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삼중의 성벽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난공불락의 도시로 불리게 된 데에는 이 성벽의 도움이 컸다.
– 콘스탄티노플 공성전 상상도 (http://panoramikmuze.com/)
– 터키 영화 ‘페티 1453(Fetih 1453)’에서 대규모 공성전을 볼 수 있다.
– 당시의 제노바, 베네치아의 무역로
– 보스포루스 해협의 2004년 위성사진으로 북쪽이 흑해, 남쪽이 마르마라해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터키의 해협이다. 길이는 30 km이며, 폭은 가장 좁은 곳이 750 m이다.
<관련자료 및 참고자료>
위키백과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네이버 지식백과(비잔틴제국-천 년의 명암) : 1453년의 일
술탄과 황제 (김형오)
[비주얼경제사] 비잔틴 천년제국의 최후 전투, 세계 경제를 뒤흔들다
네이버 지식백과(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 콘스탄티노플 함락
네이버 지식백과(동유럽사) : 발칸 반도의 정복 과정(1403~1481)
네이버 지식백과(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상을 바꾼 발병품 1001) : 대포
2011-04-01 지중해를 무대로 벌어진 문명충돌
Hello. excellent job. I did not anticipate this. This is a splendid story. Tha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