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미石見 은광이 개발되었을 시기는 일본 경제의 상업적 발전을 이룬 시기와 겹친다. 16세기 일본사는 중세에서 근세로의 이행기로 이해되고 있고 상업발전의 획기적인 발달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비록 중국과 비교하면 그 정도는 작았지만, 16세기 이후의 일본 또한 사실상 동아시아의 핵심 국가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중국이 은 본위 경제로 전환하는 명대 이전만 하더라도 일본은 딱히 내놓을 만한 상품이 없어 아시아 무역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은이 아시아 무역의 기축통화로 통용되고 때마침 이와미 광산에서 은이 채굴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은 중국과 한국의 선진 상품을 수입하여 상업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또한 유럽이 아시아 무역에 참여한 이후에는 이들이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무역을 담당하는 한 축이 됨이 따라 유럽의 지식과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였다. 한마디로 은은 현재의 일본을 가능케 한 혈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와미 은광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현재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과 더불어 은 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17세기 초, 일본 전체의 은 생산량은 전 세계의 1/3을 차지하였다고 하는데, 이와미 은광이 일본의 1/5의 은을 생산하였다고 하니 전 세계 은의 1/15를 생산한 셈이다.
이와미 은광은 은광 쟁탈전의 결과로 모리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이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의 군자금은 여기서 충당되었다고 한다.
정련가공된 은 ‘조긴丁銀’은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유통되었던 은화이며, 16세기 후반부터 마카오를 거점으로 활동을 한 포르투갈과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거점으로 활동을 한 네덜란드와의 교역에도 사용되었다. 조긴은 칭량화폐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원형이 남아있는 것은 극히 드물다.
– 일본의 은뿐만 아니라 1500년부터 1800년까지 신세계에서 생산된 은 가운데 약 4분의 3가량은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안드레 군더 프랭크는 “은은 세계를 돌면서 세계를 돌아가게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포르투갈 · 스페인의 유럽 기독교 세력이 동아시아에 나타나 기존의 무역 네트워크에 때로는 완력을 사용해 들어왔고, 중국 대륙의 연해부와 일본 열도 서변을 기지로 하는 밀무역 세력-이른바 ‘후기 왜구’-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1566년의 아말감 정련법의 실용화 이래 폭발적으로 증산된 서인도의 은을 중국시장에 가져왔을뿐 아니라 일본 은을 중국 대륙으로 날랐다.
활발한 대외무역은 경제 확장의 동력을 의미한다. 경제 발전이 일본인의 입맛을 자극하자 정상적인 대외무역으로는 그들의 강렬한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무법자가 되어 조선과 중국의 동남 연해에서 침탈을 시작했는데, 이들이 바로 중국과 조선 역사에 등장하는 왜구이다.
유럽 세력까지 참가하고 있는 밀무역 집단인 왜구는 15~16세기의 동아시아 가운데에서 가장 국가적 통합이 약했던 일본의 서부 변경을 근거지로 하면서, 조선인과 중국인까지도 포함하면서 등장한 국경을 초월한 인간 집단인 것이다. 그들은 14세기 후반 이래 명을 중심으로 하는 책봉체제가 느슨해짐에 따라, 국가간 혹은 공권력간의 공적 통교를 대신하여 이 지역의 사람이나 물건, 기술 교류의 주역이 되었다.
일본은 16~17세기에 막대한 은을 토대로 하여 베트남, 시암(타이), 캄보디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열대 동남아시아에서 무역활동을 전개했다. 심지어 당시 동남아에서 활동했던 일본인들은 네덜란드의 용병이 되어 영국과의 전쟁에도 참여했다. 이 둘은 서로를 활용하기 위해 1609년 일본 나가사키에 상관을 설치했다. 16세기 이후 일본은 유럽의 힘에 눌려 일방적으로 문호를 연 것이 아니라 열대 동남아시아 무역 활동을 통해 유럽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며 문화접변을 실현해나갔다.
1592~1598년의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은 일본 열도의 세력이 대륙 진출을 시도한 세 번째 사건(663년의 백촌강 전투, 왜구의 대륙 진출 좌절)이자 유라시아 동해안의 해양 세력이 한반도 국가의 존속을 위협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일본열도 내의 100년간의 분열을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기세를 몰아 한반도, 중국, 인도를 모두 정복하고자 했다. 이 시기에 ‘대항해시대’를 선도한 포르투갈 · 스페인 세력은 인도, 필리핀 등지에 이어 일본열도에서도 활발한 선교 · 식민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유럽 세력과의 이와 같은 상호 접촉 속에서 히데요시는 유럽 세력이 기독교 포교를 앞세워 일본 열도를 지배하는 것을 저지하는 한편, 유럽 세력의 발달된 군사력과 지구 전체를 조망하는 그들의 세계관을 빌려왔다. 그리하여 중세 일본인이 생각하던 ‘전 세계’인 천축(天竺·인도), 진단(震旦·중국 및 한반도), 본조(本朝·일본)의 3개 지역을 모두 지배하려 했다. 여기서 당시 일본인들이 인도라고 믿은 것은 오늘날의 인도차이나반도로, 이 시기에 일본인은 유라시아 동해안의 남쪽 지역인 태국,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반도 등지에 거주하며 현지 세력과 정치 ·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범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대체로 겹치며, 1944년에 일본군이 인도를 침공한 것은 유라시아 동해안의 해양 세력 일본이 중세의 활동 영역을 뛰어넘었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 yellow의 세계사 연대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600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글로벌 차이나
– 이종민 / 산지니 / 2007.12.31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이 세계를 향해 성장을 시작한 시기가 흔히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나아간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은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고립된 섬으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상상 때문이다. 그래서 16~17세기 일본이 세계적인 은 생산지가 되어 당시 기축통화였던 은의 1/3 정도를 세계에 공급한 나라였다는 사실은 생소할 지 모른다.
페루의 포토시 광산과 더불어 세계적 은 광산으로 꼽히는 이와미 광산의 매장량 덕분에 일본은 고가의 중국 비단, 도자기, 생사와 조선의 인삼, 면포 등을 수입하는 신분으로 아시아 무역에 참여할 수 있었다. 특히 순도 80%의 은으로 만든 화폐인 인삼대왕고은(人蔘代往古銀)은 조선의 인삼을 구매하기 위하여 특수 제작한 것인데, 조선 상인들이 중국 비단을 구입하기 위한 결제대금으로 이 은화를 사용하면서 중국에서도 널리 유통되었다.
사실 중국이 은 본위 경제로 전환하는 명대 이전만 하더라도 일본은 딱히 내놓을 만한 상품이 없어 아시아 무역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은이 아시아 무역의 기축통화로 통용되고 때마침 이와미 광산에서 은이 채굴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은 중국과 한국의 선진 상품을 수입하여 상업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또한 유럽이 아시아 무역에 참여한 이후에는 이들이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무역을 담당하는 한 축이 됨이 따라 유럽의 지식과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였다. 한마디로 은은 현재의 일본을 가능케 한 혈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일본은 초기에 명과 조공무역의 일종인 감합무역의 방식으로 교역을 하였다. 명 황실은 일련번호가 붙은 감합부(勘合符)를 장부에서 떼어 일본의 막부(幕府)에 보내면, 일본의 사절단이 그것을 가지고 지정된 중국 항구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그 선박의 수와 화물, 인원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교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이 늘어나자 그 횟수의 증대를 요구하는 일본과의 무역마찰과 폭동이 발생하면서 중국은 해금령을 내려 일본과의 교역을 중단해버렸다.
하지만 중국 상품에 대한 일본의 지속적인 수요와 일본 은에 대한 중국의 거대한 수요로 인해 밀무역이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중국 동남 해안가에 출몰하여 폭동을 일으키던 왜구는 단순히 노략질을 하는 해적이라기보다는 밀무역을 통해 일본으로 중국 상품을 수입하던 수입상 가운데 하나였다. 밀무역 이외에 일본은 제3국을 통한 중계무역의 방식으로 중국 상품을 구입하였는데, 그 주역이 바로 유럽과 조선이었다.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거점으로 삼아 일본이 경제특구로 개방한 나가사키 항을 오가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으며,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바타비아를 거점으로 삼아 중국 상품을 구매한 후 나가사키 항에서 일본 상인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삼각무역의 차익을 누렸다. 또 부산과 쓰시마 루트가 개척되어 조선의 인삼과 중국의 비단 그리고 일본의 은이 동시에 거래되는 아시아적 풍경을 연출하였다. 하지만 중국과의 공무역이 금지된 이후에도 밀무역과 중계무역을 통해 중국 상품이 끊임없이 반입되어 일본 은의 유출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자, 막부는 나가사키 항의 무역을 제한하는 등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동시에 중국과 한국 상품의 수입을 대체할 수 있는 기술개발을 추진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 도자기 생산기술을 보유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중국과 조선 그리고 베트남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 이삼평 등의 조선 도공을 납치하여 제조기술을 이전시키고 나가사키 항을 통해 들여온 코발트 염료와 중국회화기법을 접목시켜 이마리 자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그 후 일본은 국내수요를 대체했을 뿐 아니라 채색자기로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유럽 수출상품을 개발함에 따라 중국 도자기와 경쟁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 중국 비단과 생사를 대체하기 위해 잠사 기술을 발전시켜 견직물의 자급화에 성공하였으며, 조선의 면포 수입을 대체하기 위해 조선을 통해 수입한 중국 면화종의 이식에 성공하여, 일본의 근대 견직업과 면방직업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이처럼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은 고립된 섬나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은을 매개로 아시아 무역 네트워크에 참여하여 중국, 조선의 선진 상품을 구매하고 나아가 그 기술의 대체화에 성공함으로써 근대산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요인을 주로 네덜란드의 ‘난학’이나 서구 근대사회의 수용과 같이 서구의 영향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그리고 일본 역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내세우며 일본의 근대가 정체된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구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고 인식한다.
하지만 아시아 무역 네트워크에서 네덜란드는 선진 상품을 생산하는 기술 보유국이 아니라 중국의 선진 상품을 운송하는 물류 유통자의 역활을 수행한 것이며, 또 일본의 기술개발이 중국과 조선의 선진기술을 모방하며 대체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는 오리엔탈리즘에 길들여진 역사인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근대 이전 세계 최고의 선진 상품을 교역하던 아시아 무역 네트워크에 일본이 참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근대 일본이 탄생할 수 있는 경제적 기술적 여건을 갖추기는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과 바다 – 일본산 은·구리 ‘아시아 화폐경제망’ 엮다
– 주경철 / 산처럼 / 2009.03.05
귀금속과 화폐의 세계적 흐름을 조망하는 역사가들은 대개 아메리카의 은 생산과 유통에 주목한다. 워낙 엄청난 양의 은이 전 세계를 돌면서 파장이 큰 사건들을 만들어냈으므로 여기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문제는 아메리카 산 은이 세계의 모든 중요한 화폐 현상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처럼 서술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경우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아메리카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산출된 은 역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둘째, 귀금속(금과 은)이 아닌, 상대적으로 저급한 가치를 가진 다른 금속(구리가 대표적이다) 역시 원거리 교역의 대상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특히 주목해서 볼 사례가 일본의 은과 구리의 수출이다.
일본에서는 16세기 중반에 금광과 은광이 많이 개발되었다가 17세기 중엽부터 쇠퇴해 갔고, 그 이후 동광이 개발되어 구리 생산과 수출이 증가했다. 광산 개발은 원래 다이묘들의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시작되었지만 곧 상업 목적이 더 중요해졌다. 특히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던 중국 비단을 수입하고 그 대금을 결제하는 데에 은이 많이 필요했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교역은 처음에 중국 푸젠성 상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이 담당하였다가, 기독교 전도 문제로 말썽을 빚어 포르투갈인들이 축출되고 난 다음에는 네덜란드인들이 이 사업을 물려받았다.
일본 전체의 은 산출량과 수출량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통계 수치를 제시하기는 힘든 형편이다. 다만 16세기 말 이쿠노 은광에서 히데요시에게 보낸 은의 양이 1만㎏이라든지, 사도 광산의 연 생산량이 6만~9만㎏ 사이로 추정된다는 식의 부분적인 수치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자료들을 이용해 고바타라는 연구자는 17세기 초 일본의 은 수출량이 연 20만㎏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수치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한 세기 가까이 일본에서 다량의 은이 해외로 수출된 것은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근대 초 일본은 멕시코에 이어 세계 2위의 은 수출국으로 자리매김된다.
……
은 다음으로는 구리가 수출되었다. 사실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은 주로 고액 결제에 쓰일 수밖에 없으므로, 대개 소액거래를 하는 광범위한 사회 계층과 관련해서는 구리가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띈다. 예컨대 인도 내부의 농촌 경제와 연관된 화폐현상을 이해하려면 금이나 은보다는 구리가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일본에서 17세기 후반 새로운 동광이 개발되면서 구리의 생산과 수출이 급증했다. 생산량이 최고점에 달했던 1700년에는 연 5400톤이 생산되었다. 일본 구리는 일부가 중국에 수출되어 화폐 주조에 쓰이기도 했지만,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이 전체 수출의 약 80%를 차지하였다. 벵골, 실론, 말라바르, 구자라트 그리고 다른 어느 곳보다도 코로만델 해안(인도의 동해안) 지역이 중요한 수출 지역이었다. 동인도회사는 그 동안 이 지역에서 직물을 구입하고 그 대금을 금으로 지불해 왔으나 점차 금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지자 대신 구리를 지불수단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일본은 은과 구리를 수출하는 대신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금을 수입하였다. 금과 은의 상대가치 면에서 일본의 금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1610년대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금을 가지고 오면 60%의 환차익이 가능했다. 동남아시아와 일본 사이에서도 사정이 비슷해서, 17세기 초에는 인도차이나, 수마트라, 시암 등지의 금이 영국과 네덜란드의 배로 일본에 들어왔다. 1617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한 직원의 편지에는 아유타야(오늘날의 타이)에서 일본으로 금을 보낸 결과 35~40%의 이익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자료들을 보면 동아시아 해상세계에서는 귀금속의 상대가치의 차이로 인해 다량의 귀금속이 오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기할 점은 중국과 일본 간 혹은 동남아시아와 일본 간 귀금속 가치 차이가 시간이 가면서 점차 줄어들어 수십 년 뒤에는 거의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시아 내에 아주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귀금속 거래망이 형성되어 원격지 간 귀금속 가격의 조정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이는 자본주의적인 국제시장 체제가 등장하는 중요한 표식 중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네트워크에서 조선은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아시아의 거대한 귀금속·화폐 거래망에서 조선이 중요한 가지였다는 점을 밝히는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일본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자체의 은 수요가 증가하면서 은의 해외 수출이 금지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1688년부터 일본 막부가 은 수출을 금지하고 대신 구리를 수출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던 사실이다. 그런데, 다시로라는 연구자는 대마도의 중요 자료인 종가문서(宗家文書)를 이용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나가사키를 통해서는 은이 수출되지 못했지만 ‘대마도-조선’ 루트를 통해 일본에서 중국으로 약 60년 정도 더 은이 수출되었다는 것이다.
지연 문명
– 르우안웨이 / 최형록,김혜준 역 / 심산 / 2011.05.10
지속적인 경제 발전으로 일본에는 기세등등한 상인 계층이 출현했고, 그들은 중국과 조선 및 동남아시아 지역의 무역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대외무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상인만이 아니었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 종교단체 · 무사 · 귀족도 대외무역에 개입했고, 어떤 때는 막부의 장군까지 뛰어들었다. 이는 당시 유럽의 상황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그 시대 유럽 귀족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스스로 신분을 낮추는 일을 하지 않았다.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일본의 대외무역은 급속하게 발전했고, 무역 활동의 범위도 멀리 말라카 해협까지 이르렀다. 1560년 이후 일본은 이미 은과 동의 주요 수출국이 되었다. 일본은 중국과 조선에는 주로 은 · 동 · 부채 · 병풍 등의 수공예품을 수출했고, 인도와 서아시아에는 황금 · 유황 · 장뇌 · 목재 · 진주 · 철 · 도검 · 칠 · 가구 · 청주 · 차 · 고급 쌀을 수출했다. 반대로 일본은 중국의 비단과 인도의 면직물을 수입했고, 조선과 중국 및 동남아시아의 기타 생산품과 소비용품을 수입했는데 아연 · 주석 · 염료 · 설탕 · 피혁 · 수은 같은 것들이었다. 활발한 대외무역은 경제 확장의 동력을 의미한다. 경제 발전이 일본인의 입맛을 자극하자 정상적인 대외무역으로는 그들의 강렬한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무법자가 되어 조선과 중국의 동남 연해에서 몇백 년에 이르는 침탈을 시작했는데, 이들이 바로 중국과 조선 역사에 등장하는 왜구이다.
……
16세기 말 일본은 정치 통일을 실현했고, 이후 일본 경제는 뚜렷하게 발전하여 국력은 크게 증대한다. 1592년에서 1598년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조선 침략 전쟁은 과거의 왜구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 일본 군대는 비록 명나라의 군사적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조선에서 퇴각했지만, 조선 침략은 일본이 정식으로 일으킨 전쟁으로 흥기 중인 일본이 최초로 동아시아 국제정치 질서에서 중심적 지위에 있던 중국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을 의미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도요토미는 비록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일본이 16세기에 중단한 조공을 재개하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비록 정권의 합법성에 불리하게 작용했지만, 자신들은 중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의 정식 구성원이란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은을 통해 본 16세기 한일 비교와 교류
–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 / 2002년 강원대 학술회
동서로 긴 시마네(島根) 현의 거의 중앙에 있는 오오다(大田)시의 산간부에, 16세기에 열렸던 거대한 광산의 흔적「이와미(石見) 은광 유적」이 잠들어 있다. 17세기 전반의 전성기에는, 연간 은 생산이 8천 관에서 만 관(3만2천˜4만 킬로그램)에 달했다. 당시의 일본 전체의 은 생산고는 4˜5만 관으로 추산되며, 이것이 전세계 은 생산의 1/3을 차지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와미 은광에서만 전세계 은의 1/15을 산출한 셈이 된다.
……
1526년에 이와미에서 광산채굴이 시작되어, 1533년 회취법의 도입에 따라 그 산출이 늘어난 일본은은, 당초는 국내의 수요는 조금뿐이었고, 대부분이 수입의 결제로 쓰이거나, 혹은 수출 상품으로 해외에 유출되게 되었다. 특히 조선에서는 일본 은의 급격한 유입이 정치 ․경제․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6 세기 제 1사분기까지 조선을 방문하는 왜인이 지니는 주된 상품은 동으로, 은은 오히려 일본측의 수입 물자였다. 이와미 은광의 발견은 이 상황을 크게 전환시켰다. 1528년에 서울에서 왜인으로부터 매입한 「연철」로 은밀히 은을 만든 사람들이 적발됐다. 가미야 쥬테이 일행이 이와미 은광을 발견한 불과 2년 후, 일본산 함은연이 조선에 유입되어, 조선의 기술로 정련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회취법의 은광 정착을 거친 1538년 무렵에는, 왜인이 조선에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의 대부분이 은이 되어 버렸다. 이 해 중신들이 국왕에게 바친 의견서에 의하면 「왜인은 은만을 가지고, 다른 물건은 가지지 않고 있다」고 되어 있다.
왜인들이 은의 담보로 조선에 요구한 물건은 압도적으로 면포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목면 이하의 천이 화폐로서 기능하고 있었고, 왜인의 요구에 그대로 응하자니, 국가로서 사용해야할 면이 부족해져 버릴 염려가 있었다.
……
이와미 은광을 비롯한 눈부신 일본 은의 증산을 받혀준 조건은, 회취법의 도입이라고 하는 기술혁신뿐 아니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사」를 말하게 된 시대인 16세기의 대변동이었다.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카리카타에 도달한 이래, 포르투갈 세력은 1510년에 인도의 고어에 일대 거점을 구축하고, 1511년에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교역 터미널, 마라카를 점령, 1512년에는 향료섬인 안본에 상관을 두었다. 이어 중국으로의 진출을 목표로 해 대륙 남해안의 교역 루트를 동진하여, 1540년에는 절강성의 다도해 지역에 도달, 이윽고 아시아의 동쪽 끝 일본 열도에도 모습을 나타낸다. 1557년에는 명조로부터 마카오 거주를 허락받고, 마라카․마카오․나가사키 간에 정기 항로를 열었다. 이것은 일본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루트가 된다.
한편, 1492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스페인은 서인도 제도에서 중앙 아메리카․남아메리카에 걸쳐 식민 제국 인디아스를 구축하였다. 1519년에는 마젤란의 함대가 세계 일주를 출발하여,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단을 돌아 태평양을 종단하고, 1521년에 필리핀에 도달한다. 스페인의 아시아에서의 거점 만들기는 포르투갈과의 대립에 따라 난항이었지만, 간신히 1571년에 루손 섬에 마닐라를 건설하고, 멕시코의 아카프루코 간에 정기 항로를 열었다. 이것은 「서인도」의 은(볼리비아의 포토시 은산을 중심으로 한다 )이 중국으로 흘러들어오는 루트가 된다.
이리하여 16세기 이베리아 양국은 지구를 반대로 돌아 아시아에서 만나, 지구 규모의 「세계」가 유럽의 주도권 아래에서 성립하는 단서를 열었다. 이 세기가 「유럽 세계 경제」가 태어난 시기이며, 이에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적인 규모의 「세계사」을 이야기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는 유럽의 힘만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강자의 경제권이 있었고, 그것을 지탱하는 「중화세계제국」의 질서가 있어, 유럽 세력도 있는 힘껏 짓밟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중화세계제국」의 질서 그것 자체는 유럽세력의 등장을 기다리지 않고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일본 열도와 그 주변에 시점을 두면, 그 변동은 다음의 3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첫째로, 일본 열도에 있어서는 전국 규모의 전란을 통해, 군사적 요인에 주도되면서 중세적인 권력 분산 상황이 극복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천하 통일에 이른다. 그 운동은 열도 내에서 멈추지 않고, 16세기 말에 조선에의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임진․정유 왜란). 정치적 통합의 진전은 생산력의 집중적 운용을 가능하게 하였고, 전쟁의 거대화와 더불어 광산 개발과 같은 대규모 사업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게 되었다.
둘째로, 중국 대륙에 있어서는 상품 유통의 발전에 수반되어 동전(銅錢) 중심의 통화 체계가 한계에 달해, 은 중심의 통화 체계로의 이행이 시작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명조가 잡다한 조세를 은에 의한 납입으로 통합한「일조편법」이라고 하는 징세법을 채용한 것이, 은 수요의 확대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북방, 동방에서는 기마 민족인 몽고와 여진이, 선진 지역의 경제발전에 연동되었던 변방의 경제 붐 속에서 이익을 손 안에 넣어, 타고난 기동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명조의 지배를 크게 흔들기 시작한다. 이것에 대항하기 위한 군비 조달도 은 수요 확대의 요인이 되었다.
세번째로, 포르투갈․스페인이라고 하는 유럽의 카톨릭 세력이 동아시아에 나타나, 기존의 교역 네트워크에 때로는 완력을 사용해 들어왔고, 중국 대륙의 연해부와 일본 열도 서변을 기지로 하는 밀무역 세력-이른바 「후기왜구」-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은 1566년의 아말감 정련법의 실용화 이래 폭발적으로 증산된 「서인도」의 은을 중국시장에 가져왔을뿐 아니라, 일본 은을 중국 대륙으로 날랐다.
이상과 같은 거대한 변동을 권력과 국가의 움직임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불충분하다. 예를 들면 유럽 세력까지 참가하고 있는 밀무역 집단이 왜「왜구」라고 불렸던 것일까. 이「왜」혹은「왜인」이라는 것은, 15~16세기의 동아시아 가운데에서 가장 국가적 통합이 약했던 일본의 서부 변경을 근거지로 하면서, 조선인과 중국인까지도 포함하면서 등장한, 국경을 초월한 인간 집단인 것이다. 그들은, 14세기 후반 이래의 명을 중심으로 하는 책봉체제가 느슨해짐에 따라, 국가간 혹은 공권력간의 공적 통교를 대신하여 이 지역의 사람이나 물건, 기술 교류의 주역이 되었다.
……
위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은산의 번영을 준비한 것은 분명 왜인의 네트워크였으며, 회취법의 도입에 의한 기술혁신이었다. 하지만, 세계 은 생산의 1/3을 차지할 정도의 폭발적인 증산은, 에도 막부의 성립에 의한 예전에 없던 권력 집중과, 그 조건하에서의 생산력의 효율적인 관리 운용이 없었다면 결코 달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강고히 집중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금(海禁)체제가 재건 또는 구축된다. 청과 조선의 해금은 16세기 이전보다 훨씬 엄해졌다. 일본에서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대외교통․무역의 국가 관리가 완성되고(이른바 쇄국), 중세의 무정부적인 상태는 일변하였다. 경계를 넘어 인적 연쇄가 존립할 수 있는 조건은 크게 후퇴되고, 중앙 집권적인 통일국가권력이 왜인들의 활동을 질식시키게 되었다.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
– 한명기 / 한겨레 오피니언 / 2012.02.17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19636.html
스페인을 뛰어넘은 새로운 ‘은의 나라’
1503년(연산군 9년) 5월의 <연산군일기>에는 은의 제련과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이 보인다. 양인 김감불(金甘佛)과 장예원의 노비 김검동(金儉同)이 납[鉛鐵]으로 은을 불려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습니다 …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냄비 안에 매운 재를 둘러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탄(炭)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시험해 보라”고 했다.
당시 첨단의 은 제련술이었던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 조선에서 개발돼 활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런데 회취법(灰吹法)이라고도 불린 이 기술은 정작 조선보다는 일본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조선을 드나들던 일본 상인에 의해 곧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이다.
회취법이 도입되기 이전 일본의 은 제련 기술은 원시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채굴한 은광석을 쌓아놓고 닷새 이상 나무를 때서 가열한 뒤, 산화되고 남은 재에서 은을 추출하는 수준이었다. 제련에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경제성이 영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회취법 도입을 계기로 1530년대 이후 일본의 은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곳곳에서 은광 개발 붐이 일어났다. 부국강병을 위한 재원 마련에 고심하던 다이묘들은 은광산 개발에 열중했다. 일본은 16세기 중반 스페인이 개발한 남미 지역의 은 생산량에 버금가는 ‘은의 나라’로 등장한다. 그리고 17세기 초가 되면 일본의 은은 전세계 생산량의 4분의 1 이상을 점하게 된다.
은은 당시 국제교역의 결제대금이자 ‘세계의 화폐’였다. 넘쳐나던 일본의 은은 교역의 이익이 있는 곳을 향해 몰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중국의 강남 지방이었다. 비단과 생사, 도자기 등 세계인 모두가 좋아하는 상품의 주산지였다. 하지만 교역은 여의치 않았다. 명이 만들어 놓은 해금(海禁)이라는 장벽 때문이었다. 일찍이 명의 주원장은 조공을 바치는 국가에만 감합무역을 허용했을 뿐, 민간인들끼리의 사사로운 교역은 엄격히 금지했다. “판자 하나도 바다에 띄울 수 없다”는 말이 상징하듯이 민간인들은 해외 도항과 무역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교역의 이익을 권력으로 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 은이라는 화폐를 손에 넣은 일본 상인들은 강남 상인들과 밀무역을 벌이거나 무장선단을 이끌고 명의 동남 연해 지역을 약탈했다. 이들을 보통 ‘16세기 왜구’, ‘후기 왜구’라고 부른다. 이들 중에는 중국인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절강(저장)과 복건(푸젠) 연해의 호족들은 공공연히 왜구와 거래를 벌였고, 왜구의 두목으로 이름을 날린 중국인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명 조정은 왜구를 근절할 수 없었다. 실제 1547년 왜구 금압을 명 받고 절강 순무(巡撫)로 부임했던 주환(朱紈)은 왜구와 연결된 지방 호족들의 참소에 휘말려 자살하고 만다.
요컨대 16세기 초반 대항해시대가 동아시아, 특히 일본으로 몰고 온 파장은 컸다. 신무기 조총은, 이미 오랜 내전을 통해 단련된 일본의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켰다. 나아가 이 무렵 은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은 일본의 경제력이 크게 향상되었음을 상징하는 지표였다. 이런 상황 속에 오다 노부나가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르러 전국이 통일되자 응축된 일본의 힘은 명과 조선을 겨누게 된다. 임진왜란은 바로 그 귀결이었다.
한반도와 유라시아 동해안 500년사
– 김시덕 / 주간조선 / 2014.06.16 :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8&nNewsNumb=002311100013
15세기 말부터 한 세기 이상 유라시아 대륙 남부의 바다를 지배한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양의 상업 질서를 무력으로 깨뜨리면서 시작된 포르투갈의 이 지역에서의 우위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설립한 동인도회사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우월한 군사력으로 아프리카와 인도 연안을 장악한 포르투갈은, 동남아시아 · 중국 · 일본과의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 당시 동남아시아의 상업 거점이었던 말라카왕국을 1511년에 정복했다. 이 사건 뒤에 누군가 이렇게 기록했다. “누구든지 말라카를 지배하는 자가 베네치아의 목을 누르고 있는 것이다.”(R. A. 스켈톤 ‘탐험지도의 역사’, 새날, 204쪽에서 재인용) 이 말은 유럽과 유럽 바깥의 세계를 잇는 주요한 바다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인도양으로 넘어왔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포르투갈 세력은 중국의 비단 · 도자기 · 생사(生絲) 및 일본의 은(銀)을 노리고 동중국해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에서 전해진 새로운 은 제련법 덕분에 은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었다. 기존에 유럽의 중상주의(重商主義)를 지탱하던 남부 독일의 은이 바닥난 상황에서, 오늘날의 볼리비아에 있는 포토시(Potosi) 은광과 일본의 이와미(岩見) 은광에서 채굴되는 은은 17세기 초에 각기 세계 은 생산의 절반과 1/3~1/4 정도의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막대했다.(야마구치 게이지 ‘일본 근세의 쇄국과 개국’, 혜안, 30~33쪽, 참고로 이들 두 지역의 은광 채굴 유적은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지역의 은으로 중국의 물산을 구입하면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포르투갈 세력은, 아프리카·인도·동남아시아 연안에서 그러했듯이 동중국해에서도 무력을 과시함으로써 무역을 독점하려 했다. 그러나 16세기 당시 중국과 일본에는 상대적으로 강력한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포르투갈의 무력 시위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이들은 전략을 바꾸어 중국의 중앙정부에 대해 공손한 태도를 취하면서 오늘날의 광동(廣東) 마카오(澳門)에 상업 거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후일 포르투갈이 네덜란드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 의해 동중국해에서 밀려나고 중국의 왕조가 명에서 청으로 바뀐 뒤에도, 광동을 유일한 거점으로 하여 중국-일본-동남아시아를 잇는 서양 국가들의 무역 체제는 유지되었다. 1841~1842년의 아편전쟁 이후 체결된 난징조약으로 서양 국가들의 중국 무역이 사실상 자유화될 때까지 유지된 이 무역 시스템을 광동 시스템(Canton System)이라고 한다. ‘중국 광동 무역의 흥망’( ‘MIT Visualizing Cultures: Rise & Fall of the Canton Trade System’·http://ocw.mit.edu/ans7870/21f/21f.027/rise_fall_canton_01/index.html)에는 이 시기 광동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시각자료가 다수 공개되어 있다. 박연(朴淵·Jan Jansz Weltevree)이나 하멜(Hendrick Hamel)과 같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이 한반도에 표류한 것 역시, 동중국해에서 이러한 세계 경제 시스템이 작동하던 가운데 생긴 불상사였다.
광동 시스템은 조선왕조가 한반도 남부의 왜관(倭館)에서만 일본인의 거주와 상업 활동을 허가한 것과 근본적으로 마찬가지 철학에서 비롯된 무역 방식이었다. 예수회를 앞세워 대일본 무역에 집중하던 포르투갈이 밀려나고,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기독교 포교 금지령에 충실하게 따르는 네덜란드가 17세기 중엽에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라는 인공섬에 상관(商館) 개설을 허가받은 것도 이와 상통하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17~19세기 사이에 동중국해에서는 조선·청·일본이 각기 왜관·광동·나가사키라는 해외 무역 거점을 설치하여 해외와 교통하고 있었으며, 이들 무역 거점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조선·청·일본 등의 유라시아 동부 국가들에 있었다.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동남아시아에서 학살을 자행하며 무역 이익을 추구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동중국해에서는 막대한 상업적 이익을 얻기 위해 이 지역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들의 방침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하네다 마사시 ‘동인도회사와 아시아의 바다’, 선인, 130쪽) 중국과 일본이 각기 광동과 나가사키라는 거점을 통해 풍부한 물산과 은을 거래하면서 세계 경제 시스템에 편입되어 가던 때, 조선이 양적·질적으로 어느 정도 이 시스템에 편입되어 있었는지의 문제도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광주여자대학교의 정성일 선생 등 여러 연구자가 이 거대한 문제를 추적해 온 바 있고, 최근에는 성균관대학교 안대회 선생이 온라인상으로 ‘담바고의 문화사’를 연재하면서 담배의 국제적 맥락을 흥미진진하게 소개하는 등 관련 연구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한반도와 세계 경제 시스템의 관계가 이 정도로 그치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거대한 저류(底流)가 존재할 것인지에 대해 필자는 여전히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다.
세계사 칵테일
– 역사의 수수께끼 연구회 / 이강훈 그림 / 홍성민 역 / 웅진윙스 / 2007.03.12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인이 일본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소총을 전해준 것으로 일본사의 흐름은 크게 달라졌다. 소총이 전장의 주력 병기로 등장해 나가시노 전투에서 그것을 사용한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의 군웅할거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던 것이다.
한편, 소총을 전해준 포르투갈인은 이후 매년 규슈 각지의 항구에 나타났다.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일본에서 생산되는 은에 있었다. 당시 일본은 세계 굴지의 은 생산국으로 1526년에 이와미(石見) 은광이 발견된 이래, 이쿠노(生野)와 사도(佐渡) 등에서 차례로 은광이 개발되었다. 포르투갈인은 일찌감치 이 은을 점찍어 두었던 것이다.
대항해시대의 선두에 섰던 포르투갈은 1510년 인도의 고아(Goa)를 점령하고 다음해에는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Malacca)에 진출했다. 그리고 16세기 중반에는 명나라로부터 말라카의 일부를 양도받아 동아시아 무역의 거점을 쌓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일본에 닿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과의 무역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포르투갈 상인은 일본산 은을 손에 넣기 위해 카스텔라, 담배 등을 갖고 왔는데 일본 측이 그 이상으로 원했던 것은 중국산 견직물과 생사였다. 이로써 포르투갈인은 생사(生絲)와 견직물을 중국에서 값싸게 구입해 일본에 들여와 은과 교환하게 되었다. 그 결과, 포르투갈 상인이 얻은 이익은 유럽에 향신료를 운반해 얻은 이익보다 훨씬 커졌다. 더욱이 이 무역은 일본에 기독교를 확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549년에 예수회의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Francisco Xavier) 일본에 간 것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관련 그림>
– 왜구의 활동
– 16세기 스페인(흰색)과 포르투갈(파란색)의 무역로
– 17세기 네덜란드의 무역
– 17세기 일본의 무역
– 이와미 은광 /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
– 이와미 은광 위치
– 아브라함 오르테리우스/타르타리아(타타르, 달단) 지도(1570년)
일본에 [minas de plata](은광산)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 구리와 은을 분리하는 과정
– 회취법(灰吹法)
– 1543년 규슈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한 중국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선원들이 일본인에게 조총 사격법을 시범해 보이고 있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이와미 은광
YouTube : 세계유산 이와미 은광
네이버 지식백과(일본사) : 남만인(南蠻人)과 남만 무역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감합부
한반도와 유라시아 동해안 500년사 : 한반도는 언제부터 ‘지정학적 요충지’가 되었나
http://www.hani.co.kr/arti/society/life/277260.html
http://cafe.naver.com/booheong/25304
http://cafe.naver.com/booheong/104228
http://dylanzhai.egloos.com/2368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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