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 전투(白江戰鬪)는 663년 백제 부흥군이 왜(倭)의 지원군과 함께 나당(羅唐) 연합군과 백강(白江)지금의 금강(錦江) 하구(동진강 설도 상당하다)에서 벌인 전투로서, 일본에서는 백촌강 전투(白村江戰鬪, 白村江の戦い), 중국에서는 백강구 전투(白江口戰鬪)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백강 전투가 있었던 백제 부흥 운동 부분을 서술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중의 하나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멸망(660) 이후, 각지에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복신, 도침, 흑치상지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나 · 당 연합군이 진압에 나서자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 갔다(백강 전투). 백제 부흥 군은 4년간 저항했지만, 결국 나 · 당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좌절되었다.
663년 백제 부흥운동을 도와주려던 왜국의 참전과 ‘백강 전투’에 대한 국사 교과서의 기록은 단 한 줄로 처리되어 있다. 박노자 교수는 “약 4만 2000명의 왜인이 참전하고 1만여 명이 전사한, 고대사를 통틀어 왜국이 외부에서 당한 가장 큰 규모의 패배였는데 우리 국사 교과서는 이에 대해 침묵한다. ‘숙적’ 왜국이 ‘침략’이 아닌 동맹국 백제에 대한 원조를 단행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통상적 일본관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삼국사기』의 기록도 매우 간략하다. 김부식을 비롯한 당대 역사가들은 백강 전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교과서에 반영된 것인지 모른다. 백제부흥운동과 관련한 이때의 상황은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상세히 나와 있으며 일본이 적극적으로 백제부흥운동에 나서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다.(사실 백강 전투가 일본사 전개에 한 단락을 짓는 계기가 된다.)
고대 한반도의 역사는 이처럼 일본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특히 가야, 백제에 대한 역사기록은 『삼국사기』,『삼국유사』같은 국내 역사책보다 『일본서기』등 일본 역사책에 더 많이 남아있다. 또 일본이 한반도 역사에 개입한 주요 사건은 백강 전투만이 아니다. 저 유명한 광개토왕비에도 ‘왜倭’가 중요한 전쟁 상대로 선명히 적혀있고,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왜倭’가 수없이 등장한다.
노태돈은 백강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강구 전투의 의의를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판가름하는 결정적 회전이었다고 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즉 이 전투의 주력이 당군과 왜군이었음을 강하게 의식하여, 마치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과 대비하여 고대 중국세력과 일본 세력이 한반도에서 자웅을 겨룬 전투인 것처럼 인식하려는 것은 전투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물론 이 전투는 백제 부흥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 고비로 왜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완전 물러나게 되니 고대 한일관계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백강 전투는 당에게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투는 아니었으며 신라에도 주된 전장은 아니었다. 전투 규모도 양측 모두 실제 동원한 병력이 만 수천 명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도였다. 무엇보다 백강구 전투에 관한 과도한 강조는 그 해에 벌어진 백제 부흥전쟁의 주전장이 주류성 공략전이었음과 신라군의 존재를 홀시하게 하고, 신라는 피동적 존재로 파악하는 역사인식을 낳게 하는 면이 있다. 이는 백강구 전투의 실상이나 그 뒤의 역사 전개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김현구는 ‘백강 전투는 당시 가장 많은 국가와 군사가 참전해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동북아 최초의 대전이었다’고 평했다.
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김용운 전 한양대 교수는 『풍수화(風水火)-원형사관(原型史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라는 책에서 663년 백강(白江·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신라-당(唐) 연합군과 백제-왜(倭) 연합군이 맞붙은 ‘백강 전투’가 오늘날 한중일 관계의 틀을 만든 핵심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풍수화’는 주변국을 흡수하는 중국은 물(水)로, 섬에서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일본은 불(火)로, 그 원형을 파악하고 바람의 원형을 지닌 한국을 풍(風)에 빗댄 표현이다.
일본 고고학회 회장을 지낸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규슈대 명예교수는 “백제 멸망과 유민의 대규모 이주는 일본 역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됐다”며 “백강 전투를 치른 7년 뒤인 670년에 왜는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새롭게 태어난다”고 전했다.
일본 방위대防衛大 총장을 지낸 이오키베 마코토 전 고베대 교수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을 2차대전에서의 패배와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 그리고 왜군이 나 · 당 연합군에 참패한 663년의 백강 전투에 비겼다. 역사상 일본의 큰 위기 중 하나로 ‘백강 전투’를 꼽은 것이다.
660년 당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듬해 평양을 포위하자 왜국은 극도의 위기의식에 휩싸인다.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면 다음은 왜국이라 생각했다. 당시 당 수군 전력에 혁명이 있었다. 수로가 닿는 곳이라면 적국의 수도가 어디라도 기습 포위할 수 있을 정도였다.
7세기 중반, 고구려(642년, 연개소문) · 백제(642년, 의자왕) · 일본(645년, 덴지 천황) · 신라(647년, 김춘추·김유신)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쿠데타가 있었는데, 이 총결산이 663년의 백강 전투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참전 배경으로 한국에서는 백제가 일본의 조국이므로 조국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나타나고, 일본에서는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었으므로 속국을 구원하기 위해서 출병했다는 식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실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에서 일본이 바라보는 시각은 백제를 일본의 속국 내지 조공국으로 보는 것이 대세라 한다. 이러한 시각은 『일본서기』가 논리를 제공했으며 칠지도, 광개토대왕 비문, 『송서』<왜국전> 등의 사료가 이를 바쳐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사강목』의 예처럼 일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의자왕의 뒤를 이은 풍왕을 백제 마지막 왕(32대)으로 보았고, 백강 전투가 있던 663년 9월까지 백제사에 포함시킨 바 있다. 일본의 역사가들 일부도 백제의 멸망 연대를 백강 전투로 보고 있다.
‘백강구 전투’ 또는 ‘백촌강 전투’라고도 하는 ‘백강 전투’의 역사적 비중이나 의의에 대한 학자의 태도는 다양하다. 일본에게 더욱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이 전투의 성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일본의 군대가 충돌하여 전쟁을 벌인 전투
◎ 백제 부흥운동이 사실상 끝나, 신라의 삼국통일 계기를 마련하였다.
◎ 많은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망명
◎ 고대 일본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 이후 일본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인 이른바 율령체제를 형성하였다.
◎ 일본이라는 국호의 성립
◎ 일본의 대외 관계는 폐쇄적이면서 자위적인 방향으로 전환된다.
◎ 일본은 대륙으로의 출병이 백해무익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 일본 입장에서는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이 왜국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다.
당시의 세계사 연표는 :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mhistory.jsp?sub=1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아래에 언급한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되었으며 <동북아 역사재단>의 번역본을 참조하였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완성되었으며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를 참조하였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구당서
※ 삼국사기 제28권 백제본기 제6(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 의자왕
당 용삭 2년(서기 662) 7월, 유인원과 유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병사를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 대산(大山), 사정(沙井) 등의 목책을 함락시켰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으며 병사들을 나누어 그곳을 계속하여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을 끼고 있으며 높고 험준하여 요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병사를 보태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유인궤가 밤에 신라 병사를 독려하여 성곽에 가까이 접근해 날이 밝을 무렵에 성 안으로 들어가 8백 명을 베어 죽이니, 마침내 신라에서 오는 군량 수송로가 통하게 되었다. 유인원이 증원병을 요청하니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치(淄)ㆍ청(靑)ㆍ내(萊)ㆍ해(海)의 병사 7천 명을 징발하고,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병사를 통솔해 바다를 건너 인원의 병사를 도와주게 하였다.
二年七月 仁願仁軌等 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 拔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 殺獲甚衆 仍令分兵以鎭守之 福信等 以眞峴城臨江高嶮 當衝要 加兵守之 仁軌夜督新羅兵 薄城板堞 比明而入城 斬殺八百人 遂通新羅饟道 仁願奏請益兵 詔發淄靑萊海之兵七千人 遣左威衛將軍孫仁師 統衆浮海 以益仁願之衆
이때 복신은 이미 권력을 독차지하여 부여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것을 핑계로 굴 속에 누워 부여풍이 문병하러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부여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였다. 부여풍이 고구려와 왜국에 사신을 보내 병사를 요청하여 당나라 병사를 막았다. 손인사가 도중에 이들을 맞아 쳐부수고, 마침내 인원의 무리와 합세하니 병사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공격의 방향을 의논하였다. 어떤 자가 말하였다.
“가림성(加林城)이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이곳을 쳐야 합니다.”
유인궤가 말하였다.
“병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병사들이 다칠 것이요, 밖에서 지키면 시일이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소굴로써 무리들이 이곳에 모여 있으니, 만약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이에 손인사와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金法敏)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別帥) 두상(杜爽)과 부여융(扶餘隆)은 수군과 군량을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병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덮고 바닷물도 붉게 되었다.
왕 부여풍은 몸을 피해 도주하였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말하였다. 당나라 병사가 그의 보검을 노획하였다.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더불어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遲受信)만이 혼자 남아 임존성에서 버티며 항복하지 않았다.
時 福信旣專權 與扶餘豊 寖相猜忌 福信稱疾 臥於窟室 欲俟豊問疾 執殺之 豊知之 帥親信 掩殺福信 遣使高句麗倭國 乞師以拒唐兵 孫仁師中路迎擊破之 遂與仁願之衆相合 士氣大振 於是 諸將議所向 或曰 加林城水陸之衝 合先擊之 仁軌曰 兵法 避實擊虛加林嶮而固 攻則傷士 守則曠日 周留城 百濟巢穴 群聚焉 若克之 諸城自下 於是 仁師仁願及羅王金法敏 帥陸軍進 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 帥水軍及粮船 自熊津江往白江 以會陸軍 同趍周留城 遇倭人白江口 四戰皆克 焚其舟四百艘 煙炎灼天 海水爲丹 王扶餘豊脫身而走 不知所在 或云奔高句麗 獲其寶劒 王子扶餘忠勝忠志等 帥其衆 與倭人並降 獨遲受信據任存城 未下
처음에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정방이 병사를 보내 이들을 공격했으나 상지가 이들과 싸워서 승리하였다. 상지가 다시 2백여 성을 빼앗으니 소정방이 당해낼 수가 없었다. 흑치상지는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吒相如)와 함께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복신과 호응하다가 이때에 와서 모두 항복하였다.
유인궤가 그들에게 진심을 보이며, 그들에게 임존성을 빼앗아 스스로 공을 세워 보이라고 하고 갑옷과 병기, 군량 등을 주었다. 손인사가 말하였다.
“야심이 있는 자는 믿기 어렵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무기와 곡식을 제공한다면 도적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인궤가 말하였다.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그들에게는 충성심과 꾀가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공을 세울 것이니 오히려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그들 두 사람이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려두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잔당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손인사 등이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갔다.
初 嘯聚亡散 旬日間 歸附者三萬餘人 定方遣兵攻之 常之拒戰敗之 復取二百餘城 定方不能克 常之與別部將沙吒相如據嶮 以應福信 至是皆降 仁軌以赤心示之 俾取任存自效 卽給鎧仗粮糒 仁師曰 野心難信 若受甲濟粟 資寇便也 仁軌曰 吾觀相如常之 忠而謀 因機立功 尙何疑 二人訖取其城 遲受信委妻子 奔高句麗 餘黨悉平 仁師等振旅還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로 하여금 백제 땅에 주둔하며 병사를 거느리고 지키게 하였다. 전쟁의 여파로 집집마다 파괴되고 시체가 풀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유인궤가 비로소 해골을 묻게 하고 호구를 등록하고 촌락을 정리하고 관리들을 임명하였다. 또 도로를 개통하고 교량을 세우고 제방을 수리하고 저수지를 복구하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리고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고아와 노인을 보살피게 하였다. 당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정삭(正朔)과 묘휘(廟諱)를 반포하니, 백성들이 기뻐하며 각기 자기 집에 안주하게 되었다.
당나라 황제가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신라와의 오래된 감정을 풀고 백제의 유민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詔留仁軌 統兵鎭守 兵火之餘 比屋凋殘 殭屍如莽 仁軌始命 瘞骸骨 籍戶口 理村聚 署官長 通道塗 立橋梁 補堤堰 復坡塘 課農桑 賑貧乏 養孤老 立唐社稷 頒正朔及廟諱 民皆悅 各安其所 帝以扶餘隆爲熊津都督 俾歸國 平新羅古憾 招還遺人
※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 문무왕 3년
3년(서기 663) 봄 정월, 남산신성(南山新城)에 길다란 창고를 지었다.
부산성(富山城)을 쌓았다.
2월,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쳐서 항복시키고, 덕안성(德安城)을 쳐서 1천7십 명의 목을 베었다.여름 4월, 당나라가 우리나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고, 임금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삼았다.
5월, 영묘사 문에 벼락이 떨어졌다.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 왕으로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 낭장 유인원(劉仁願)을 웅진성(熊津城, 충남 공주)에서 포위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조칙으로 유인궤(劉仁軌)에게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를 겸직하게 하여 이전의 도독 왕문도(王文度)의 군사를 통솔하고 우리 병사와 함께 백제의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이 군대는 매번 싸울 때마다 적진을 함락시키니 가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는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가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인 다음 그의 무리를 자기 군대에 합치고, 아울러 배반하고 도망쳤던 무리들을 불러 모아서 커다란 세력을 이루었다. 유인궤는 유인원과 병사를 합하여 잠시 무장을 풀고 군대를 쉬게 하면서 병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당 황제가 조칙을 내려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에게 병사 40만을 거느리고 출병하게 하였다. 그는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으로 진군하였다.
임금은 김유신 등 28명[혹은 30명이라고도 한다.]의 장수를 거느리고 그와 합세하여 두릉윤성(豆陵[혹은 ‘량(良)’이라고도 한다]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조리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에 자리를 잡고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다가 11월 4일에 군사를 돌려 설리정(舌[혹은 ‘후(后)’라고도 한다]利停)에 이르렀다. 전공을 따져서 상을 차등있게 주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의복을 만들어 진에 남아있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三年春正月 作長倉於南山新城 築富山城 二月 欽純天存領兵 攻取百濟居列城 斬首七百餘級 又攻居勿城沙平城降之 又攻德安城 斬首一千七十級 夏四月 大唐 以我國爲鷄林大都督府 以王爲鷄林州大都督 五月 震靈廟寺門 百濟故將福信及浮圖道琛迎故王子扶餘豊 立之 圍留鎭郞將劉仁願於熊津城 唐皇帝詔仁軌檢校帶方州刺史 統前都督王文度之衆 與我兵向百濟營 轉鬪陷陳 所向無前 信等釋仁願圍 退保任存城 旣而福信殺道琛 幷其衆 招還叛亡 勢甚張 仁軌與仁願合 解甲休士 乃請益兵 詔遣右威衛將軍孫仁師率兵四十萬 至德物島 就熊津府城 王領金庾信等二十八[一云三十]將軍 與之合攻豆陵[一作良]尹城周留城等諸城 皆下之 扶餘豊脫身走 王子忠勝忠志等 率其衆降 獨遲受信據任存城 不下 自冬十月二十一日 攻之 不克 至十一月四日 班師 至舌[一作后]利停 論功行賞有差 大赦 製衣裳 給留鎭唐軍
※ 삼국사기 제42권 열전 제2(三國史記 卷第四十二 列傳 第二) – 김유신
용삭 3년(서기 663) 계해에 백제의 여러 성에서 비밀리에 부흥을 도모하였다. 그 두목은 두솔성(豆率城)에 웅거하면서 왜(倭)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지원을 삼으려고 하였다. 대왕이 직접 유신ㆍ인문ㆍ천존ㆍ죽지 등 장군들을 거느리고 7월 17일에 토벌 길에 올랐다. 그들은 웅진주(熊津州)에 가서 진수관(鎭守官) 유인원의 군사와 합세하여 8월 13일 두솔성에 이르렀다. 백제인들은 왜인과 함께 나와 진을 쳤는데 우리 군사들이 힘껏 싸워 크게 깨뜨리니 그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대왕이 왜인들에게 말했다.
“우리와 너희 나라가 바다를 경계로 하여 일찍이 서로 다툰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우호관계를 맺고 서로 예방하며 교유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늘날 백제와 악행을 함께 하여 우리나라를 치려 하는가? 이제 너희 군졸들의 생명이 나의 손아귀에 있으나 차마 죽이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돌아가서 너희 왕에게 이 말을 고하라!”
그리고 왕은 그들을 마음대로 가게 하고, 군사를 나누어 여러 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오직 임존성(任存城) 만은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한 데다 군량마저 풍족했기 때문에 공격한 지 30일이 되어도 무너뜨리지 못했다. 따라서 군사들이 너무 지치고 피곤해져 싸울 뜻이 없자 대왕이 말했다.
“지금 성 하나가 아직 함락되지 않았으나 나머지 여러 성이 모두 항복하였으니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는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다.겨울 11월 20일, 서울에 당도하여 유신에게 밭 5백 결을 하사하고 기타 장졸들에게는 공의 정도에 따라 상을 주었다.
龍朔三年癸亥 百濟諸城 潛圖興復 其渠帥據豆率城 乞師於倭爲援助 大王親率庾信仁問天存竹旨等將軍 以七月十七日 征討 次熊津州 與鎭守劉仁願合兵 八月十三日 至于豆率城 百濟人與倭人出陣 我軍力戰大敗之 百濟與倭人皆降 大王謂倭人曰 惟我與爾國 隔海分疆 未嘗交構 但結好講和 聘問交通 何故今日與百濟同惡 以謀我國 今爾軍卒在我掌握之中 不忍殺之 爾其歸告爾王 任其所之 分兵擊諸城降之 唯任存城 地險城固 而又粮多 是以攻之三旬 不能下 士卒疲困厭兵 大王曰 今雖一城未下 而諸餘城保皆降 不可謂無功 乃振旅而還 冬十一月二十日 至京 賜庾信田五百結 其餘將卒賞賜有差
※ 일본서기 권 제27 – 천지천황 2년
2년 봄 2월 을유삭 병술(2일)에 백제가 달솔 김수(金受)들을 보내 조(調)를 올렸다. 신라인이 백제 남부의 사주(四州)를 불태우고1, 아울러 안덕(安德) 등의 요지를 빼앗았다. 피성(避城)은 적에게 너무 가까워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으므로, 도로 주유로 돌아갔다. 전래진이 생각한 바와 같다.
이 달에 좌평 복신이 당의 포로 속수언(續守言) 등을 바쳤다.
3월에 전장군 상모야군치자(上毛野君稚子 ; 카미츠케노노키미와카코)와 간인련대개(間人連大蓋 ; 하시히토노무라지오호후타), 중장군(中將軍) 거세신전신역어(巨勢神前臣驛語 ; 코세노카무사키노오미오사)와 삼륜군근마려(三輪君根麻呂 ; 미와노키미네마로), 후군 장군 아배인전신비라부(阿倍引田臣比邏夫)와 대택신겸병(大宅臣鎌柄 ; 오호야케노오미카마츠카)을 보내 2만 7천 인을 거느리고 신라를 치게 하였다2.
여름 5월 계축삭(1일)에 견상군(犬上君 ; 이누카미노키미)[이름이 빠졌다.]이 달려가, 출병한 사실을 고구려에 고하고 돌아왔다3. 그리고 규해(糺解)4를 석성(石城)에서 만났다. 규해는 복신(福信)의 죄를 말하였다.
6월에 전군(前軍) 장군 상모야군치자(上毛野君稚子) 등이 신라의 사비(沙鼻), 기노강(岐奴江)5 두 성을 빼앗았다. 백제왕(百濟王) 풍장은 복신이 모반할 생각이 있다고 의심하고, 손바닥을 뚫어 가죽으로 묶었다. 그러나 혼자서 결정하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복신의 죄는 이와 같은데, 참수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때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극악한 사람을 방면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복신은 집득에게 침을 뱉고, “썩은 개, 미친 놈”이라고 말하였다. 왕은 힘센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참수하여 그 머리로 젓을 담갔다6.
가을 8월 임오삭 갑오(13일)에 백제왕이 자기의 훌륭한 장수를 죽였으므로, 신라는 곧바로 백제로 쳐들어가 먼저 주유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백제왕이 적의 계략을 알고 장군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들으니 대일본국(大日本國)의 구원군 장수 노원군신(盧原君臣 ; 이호하라노기미오미)이 건아(健兒)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 장군들은 미리 준비하도록 하라. 나는 백촌(白村)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접대하리라.”라고 말하였다.
무술(17일)에 적장(賊將)이 주유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대당(大唐)의 장군이 전선(戰船)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白村江)에 진을 쳤다.
무신(27일)에 일본의 수군 중 처음에 온 사람들이 대당(大唐)의 수군과 싸웠다. 그러나 일본이 져서 물러났다. 대당은 진열을 굳게하여 지켰다.
기유(28일)에 일본의 장군들과 백제왕이 기상을 살피지 않고, “우리가 선수를 친다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대오가 흔들린 일본 중군(中軍)의 병졸을 이끌고 다시 나아가 진열을 굳건히 하고 있는 대당의 군사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대당이 곧 좌우에서 배를 둘러싸고 싸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官軍)이 패배하였다. 이때 물속으로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또한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가 없었다. 박시전래진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이를 갈며 분노하면서 수십 인을 죽이고 마침내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왕 풍장은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망갔다7.
9월 신해삭 정사(7일)에 백제의 주유성(州柔城)이 마침내 당에 항복하였다8. 이때 국인(國人)들이 “주유가 항복하였다. 사태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테례성(弖禮城 ; 테레사시)9에 가서 일본 장군들과 만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자.”고 말하였다. 그리고 먼저 침복기성(枕服岐城)10에 가 있던 처와 아이들에게 나라를 떠나가려 한다는 마음을 알렸다. 신유(11일)에 모테(牟弖)를 출발하였다. 계해(13일)에 테례(弖禮)에 이르렀다. 갑술(24일)에 일본의 수군 및 좌평 여자신(余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곡나진수(谷那晋首), 억례복류(憶禮福留)와 국민(國民)들이 테례성(弖禮城)에 이르렀다. 이튿날에 비로소 배가 출항하여 일본으로 향하였다.
– 1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 2월조에 흠순과 천존이 병사를 이끌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7백여 명을 참수하였으며, 거물성,사평성,덕안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고 했는데, 백제 남부의 4주는 바로 이 네 성을 가리킨다고 보는 설이 있다. 거열성은 경상남도 거창, 거물성은 전남 남원 부근이다. 안덕은 덕안의 오기로 보고, 덕안은 백제의 5방 중의 하나인 東方의 치소가 있었던, 충남 恩津으로 추정한다. 한편 ‘百濟南畔四州’를 ‘百濟南 畔四州’의 오기로 보고, 이를 웅진도독부 관할하의 7주 중의 하나로 보아 영광과 함평, 고창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2 : 백제부흥운동을 도운 왜국군은 지방 호족들이 동원한 國造軍의 집합체였다. 국조군은 국조의 일족과 그 지배하의 민중과 노비로 구성되었다.
– 3 : 백제 부흥군은 석 달 뒤 백촌강 전투로 이어지는 왜군의 참전과 관련된 군사적 협의를 고구려와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 4 : 풍장(豊璋)을 가리킨다.
– 5 : 사비는 경남 양산, 기노강은 경남 의령으로 추정된다.
– 6 : 『구당서』 백제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즉 복신이 병권을 독점하여 부여풍과 점차 시기하고 갈라지게 되었다. 복신은 병을 칭하고 동굴의 방에 누워서 장차 부여풍이 병문안을 오면 공격하여 죽이려고 꾸몄는데, 부여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을 공격하여 죽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이 기록이 가장 자세하다.
– 7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왕 부여풍이 탈주하였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혹은 고구려로 도망갔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구당서』 유인궤전에서는 “여풍은 북에 있고 여용은 남에 있다.”고 적고 있다. 여용은 禪廣을 가리키며, 남에 있다는 것은 왜국에 있다는 뜻이다. 『자치통감』 고종 총장원년 12월 정미조에 의하면 부여풍은 668년 10월 이적(李勣)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포로로 잡혀 당으로 끌려가서 12월 嶺南에 유배되었다.
– 8 : 『자치통감』 唐紀에서는 주유성(周留城)이 항복한 날을 9월 무오(8일)라고 하였다. 『일본서기』에서 백제부흥운동 기사는 이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신당서』, 『자치통감』에 의하면 이후 신라군과 당군은 지수신이 지휘하고 있던 임존성의 백제부흥운동군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당에 투항한 사택상여와 흑치상지를 이용하여 이 해 11월경 임존성을 함락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64년 3월에 사비산성의 백제부흥운동군이 당군과 신라군에 의해 진압되었다고 하는데, 이로써 백제부흥운동은 끝나게 되었다.
– 9 : 이를 冬老縣(전남 보성군 烏城)이라는 설과 경남 남해로 보는 설이 있다.
– 10 : 현재 전남 강진지역으로 추정된다.
※ 구당서(舊唐書) 권199 동이열전(東夷列傳) 백제(百濟)
11)○ [용삭(龍朔)] 2년(A.D.662; 신라 文武王 2) 7월에 인원(仁願)‧ 인궤(仁軌) 등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이끌고, 웅진(熊津) 동쪽에서 복신(福信)의 무리들을 크게 무찔러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 대산(大山)‧ 사정(沙井) 등의 책(柵)을 빼앗고, 많은 무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어서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복신(福信)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에 바짝 닿아 있는 데다 높고 험하며, 또 요충(要衝)의 위치라 하여 군사를 증원시켜 지켰다.
인궤(仁軌)는 신라(新羅)의 군사를 이끌고 야음(夜陰)을 타 성(城)밑에 바짝 다가가서 사면에서 성첩(城堞)을 더위잡고 기어 올라 갔다. 날이 밝을 무렵 그 성(城)을 점거하여 8백명의 머리를 베어 마침내 신라(新羅)의 군량운송로를 텄다.
인원(仁願)이 이에 증병(增兵)을 주청(奏請)하니, 조서(詔書)를 내려 치(淄)[주(州)]‧ 청(靑)[주(州)]‧ 내(萊)[주(州)]‧ 해(海)[주(州)][註@057]의 군사 7천명을 징발하여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웅진(熊津)으로 가서 인원(仁願)의 무리를 도와주게 하였다.
이때 복신(福信)은 벌써 병권(兵權)을 모두 장악하여 부여풍(扶餘豊)과 점점 서로 시기하여 사이가 나빠지고 있었다.
복신(福信)은 병을 핑계로 굴방(窟房)에 누워서 부여풍(扶餘豊)이 문병오기를 기다려 덮쳐 죽일 것을 꾀하였다. 부여풍(扶餘豊)은 [그러한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그의 심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福信)을 덮쳐 죽이고, 또 고려(高[구,句]麗)와 왜국(倭國)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여 관군(官軍)을 막았다.
손인사(孫仁師)가 중도(中道)에서 [부여풍(扶餘豊)의 군대를] 맞아 쳐 무너뜨리고 드디어 인원(仁願)의 무리와 합세하니, 병세(兵勢)가 크게 떨쳤다.
이에 인사(仁師)‧ 인원(仁願) 및 신라왕(新羅王) 김법민(金法敏)은 육군(陸軍)을 이끌고 진군하고, 유인궤(劉仁軌) 및 별수(別帥) 사상(社爽)‧ 부여융(扶餘隆)은 수군(水軍) 및 군량선(軍糧船)을 이끌고 웅진강(熊津江)에서 백강(白江)으로 가서 육군(陸軍)과 회합하여 함께 주류성(周留城)으로 진군하였다.
인궤(仁軌)가 백강(白江)어귀에서 부여풍(扶餘豊) 의 무리를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척을 불사르니, 적들은 크게 붕괴되고, 부여풍(扶餘豊)은 몸만 빠져 달아났다.
위왕자(僞王子) 부여충승(扶餘忠勝)‧ 충지(忠志) 등이 사녀(士女) 및 왜(倭)의 무리를 이끌고 함께 항복하니, 백제(百濟)의 모든 성(城)이 다시 귀순하였다. 손인사(孫仁師)‧ 유인원(劉仁願) 등이 철군을 하여 돌아왔다.
조서(詔書)를 내려 [유(劉)]인원(仁願) 대신 유인궤(劉仁軌)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이에 부여융(扶餘隆)에게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제수(除授)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내어, 신라(新羅)와 화친(和親)을 맺고 남은 무리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二年七月,仁願、仁軌等率留鎮之兵,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拔其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殺獲甚衆,仍令分兵以鎮守之。福信等以真峴城臨江高險,又當衝要,加兵守之。仁軌引新羅之兵乘夜薄城,四面攀堞而上,比明而入據其城,斬首八百級,遂通新羅運糧之路。仁願乃奏請益兵,詔發淄、青、萊、海之兵七千人,遣左威衛將軍孫仁師統衆浮海赴熊津,以益仁願之衆。時福信旣專其兵權,與扶餘豐漸相猜貳。福信稱疾,卧於窟室,將候扶餘豐問疾,謀襲殺之。扶餘豐覺而率其親信掩殺福信,又遣使往高麗及倭國請兵以拒官軍。孫仁師中路迎擊,破之,遂與仁願之衆相合,兵勢大振。於是仁師、仁願及新羅王金法敏帥陸軍進,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率水軍及糧船,自熊津江往白江以會陸軍,同趨周留城。仁軌遇扶餘豐之衆於白江之口,四戰皆捷,焚其舟四百艘,賊衆大潰,扶餘豐脫身而走。偽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士女及倭衆並降,百濟諸城皆復歸順,孫仁師與劉仁願等振旅而還。詔劉仁軌代仁願率兵鎮守。乃授扶餘隆熊津都督,遣還本國,共新羅和親,以招輯其餘衆。
삼국통일전쟁사
– 노태돈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9.02.25
여기서 말하는 백강이 어느 강인지는 금강 하류설과 동진강설이 그간 평행선을 그어왔다. 이 문제는 주류성의 위치 비정과 직결된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도 한산 건지산성설, 홍성설, 부안의 우금산성설, 연기 당산성설 등이 있다.
……
그런데 백강구 전투를 묘사하여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海水皆赤)”라 하였으므로 전투는 바다에서 벌어졌다. 금강 하구는 바다로 이어지며, 금강 하구와 동진강 · 만경강 하구는 바다 쪽에서 볼 때 같은 해역에 속하는 근접 지역이다. 당시 신라 · 당 해군과 왜의 해군이 이 지역에서 진을 쳤을 것이니, 진을 친 구체적인 지점에서 약간의 다름이 있을지라도 넓게 보면 금강 하구 해역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한편 8월 17일 신 · 당군이 주류성을 포위하였으며, 170여 척의 당 수군은 백강구에 이르러 육군에 공급할 군량을 하역한 후 진을 치고 바다로부터 주류성을 구원하러 진입하려는 적병, 즉 왜병을 대기하였다. 27일 왜 수군이 백강구에 도달하여 주류성에서 온 일부 왜군 및 부흥군과 합세하였다. 백제의 기병이 강어귀 언덕에 포진하여 왜선을 엄호하였다. 이어 왜 선단이 당 수군에게 선공하였으나 ‘불리하여 물러섰다’. 당 수군은 진을 지키며 추격하지 않았다. 일종의 탐색전인 셈이었다. 양측 수군의 군세를 보면, 당군의 병선이 170척 왜군은 400척이었다. 당의 병선은 대형인 듯하고, 왜선은 상대적으로 소형이었다.
다음날 본격적으로 접전이 벌어졌다. 신라 기병이 백제 기병을 공격하였으며, 왜의 해군이 당 해군에 돌진하였다. 구체적으로 이 날의 해전을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일본 장수들과 백제왕은 기상을 살피지 않고 서로 일러 말하기를 “우리들이 앞다투어 싸우면 저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고 하면서,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대오가 어지럽게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당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일본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많고 배가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다쿠쓰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왕 풍장이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런 기록을 통해 백강구 전투에서 왜군이 패배한 원인을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당군은 8월 17일 백강구에 도착하여 대기하면서 주변 환경을 숙지하고 전술을 준비한 데 비해, 뒤늦게 도착한 왜의 수군은 기상조건이나 조수 등에 관한 고려 없이 전투에 들어간 전술적 실책이 지적된다. 이 전투에 대해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그득하였고” “바닷물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라고 하였는데(구당서, 유인궤전) 이는 왜선이 화공(火攻)에 큰 타격을 입었음을 말한다. 화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풍향이다. 바람의 힘을 업지 않은 화공은 큰 효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기상을 살피지 않고’ 근접전을 벌였다는 것은 곧 화공 대비책을 고려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둘째, 당군은 진을 형성하고 일정한 전술에 따라 절도 있는 움직임을 전개한 데 비해 왜군은 용감히 돌격해 단병접전(短兵接戰)으로 승부를 결정지으려 하였다. 이는 당일 개개 병사나 장수의 취향에 따른 결과로 볼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양측의 군대 편성과 훈련 과정의 차이도 연관되는 문제이다. 당시 왜군은 기본적으로는 국조(國造) 등 지방 세력가 휘하의 군대를 연합한 것인데, 이들 부대는 각 지역 유력가와의 동족적 결합과 인격적 예속관계를 내포한 공동체적 유제가 강하게 작용하고 그에 비례하여 엄격한 상하지휘체계가 약한 군대였던 데 비해, 당군이나 신라군은 국가가 징발 편성하여 훈련한 군대이다. 그에 따라 후자는 일원적인 지휘체계에 바탕을 둔 군령에 따라 지휘되었고, 엄격한 군율에 따른 집단적 진퇴 훈련이 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전자는 그런 면이 부족하였다고 여겨진다. 그에 따라 전자는 개병 전투에선 강하나 진형(陳形)을 형성하는 대규모 집단 전투에선 약함을 노출하게 되었다.
……
당시 왜군 부대의 성격을 지방 유력자 휘하 부대들의 임시적 연합이라 보는 그간의 설은 백강구 전투에 관한 구체적 기사에 입각한 것이 아니고, 이 무렵까지 왜국의 군대 동원 형태와 성격 이해를 토대로 설명한 것으로서, 결과론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논리적 비약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겠다. 그러나 당시 왜국은 율령제 정착 전이다. 아직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왜국의 군대가 지닐 약점 지적은 그것이 왜군이 패전한 이유의 전부일 수는 없지만, 이유의 한 부분임은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셋째, 앞서 보았듯이 부흥군 내부에선 복신의 처형에 따른 분열과 갈등이 있었다. 게다가 왜군과 부흥군 사이의 갈등과 불협화도 상정할 수 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전투력 저상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 당군과 신라군은 오랜 전란을 치르면서 단련된 군대인 점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이다.
넷째, 함선의 차이를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당시 당은 견고한 대형 군선을 건조하여 수전에 사용하였다. 이 시기 당의 주력함은 루선(樓船), 몽충(蒙衝), 주가(走舸), 유정(遊艇), 해골선(海鶻船) 등이다. …… 위의 『일본서기』 기사에서 “배가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고 한 상황에서, 당군이 화공과 함께 우수한 군선으로 당파작전을 수행하여 왜선을 격파하였던 것 같다.(해골선이 백강구 전투에 투입되었는지는 전하는 바 없으나, 宋代에 편찬된 『武經總要』戰略考에서 백강구 전투를 상세히 다루고 있어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이때 당의 함선이 170척인 데 비해 왜는 400여 척에 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왜의 군선이 상대적으로 소형이었던 것 같다. 이 또한 당파작전을 효율적으로 전개할 수 있게 한 요소였다.
그 다음 백강구 전투에 한번쯤 고려할 점은 이 전투가 지닌 비중과 의의에 관한 이해이다. 백강구 전투의 의의를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판가름하는 결정적 회전이었다고 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즉 이 전투의 주력이 당군과 왜군이었음을 강하게 의식하여, 마치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과 대비하여 고대 중국세력과 일본 세력이 한반도에서 자웅을 겨룬 전투인 것처럼 인식하려는 것은 전투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물론 이 전투는 백제 부흥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 고비로 왜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완전 물러나게 되니 고대 한일관계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전투 패배 이후 일본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인 이른바 율령체제를 형성하였던 만큼, 이 전투가 일본사 전개에 한 단락을 짓는 계기인 것은 사실이다. 역사적 사건은 그것이 미친 영향에 따라 평가되는 면을 지닌 만큼 백강구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중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전투는 당에게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투는 아니었으며 신라에도 주된 전장은 아니었다. 전투 규모도 양측 모두 실제 동원한 병력이 만 수천 명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도였다. 무엇보다 백강구 전투에 관한 과도한 강조는 그 해에 벌어진 백제 부흥전쟁의 주전장이 주류성 공략전이었음과 신라군의 존재를 홀시하게 하고, 신라는 피동적 존재로 파악하는 역사인식을 낳게 하는 면이 있다. 이는 백강구 전투의 실상이나 그 뒤의 역사 전개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백강구 전투 이후 많은 수의 백제인이 왜로 망명하였다. 백제 지배층뿐 아니라 일반 민중도 상당수 바다를 건너갔다.
……
백강구 전투 이후 망명한 그들의 일본에서의 삶은 비록 전문인으로서의 능력에 대한 높은 평가가 큰 힘이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일본 조정의 배려에 의지하여 이루어졌다. 일본 황실에 기생하여 내일을 꾸려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이 지닌 숙명이었다. 그들은 백제 부흥과 고국 복귀를 바랐지만, 자력으로 구체화할 역량은 없었다. 그들이 이를 열망할수록 실현 가능성을 일본세력의 한반도 개입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일본 조정이 한반도에 관심을 유지하게 깊은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고, 이를 위해 한반도가 이른 시기부터 일본 천황가에 종속되었다는 역사상 구축에 적극 나섰다. 그들이 돌이켜 백제 존립 당시의 백제와 왜, 그리고 왜와 가야나 신라와의 관계사를 정리 기술할 때 취하였을 입장의 큰 틀은 짐작할 수 있다. 이른바 백제삼서(百濟三書)는 이들의 저술이거나 그들의 손을 거쳐 수정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런 저술은 『일본서기』의 내용 구성에 크게 작용하였다. 또한 『일본서기』는 그 뒤 일본인들의 대외의식, 특히 대한국 인식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백강구 전투에서 흘린 백제인과 왜인의 피의 저주는 천수백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작용하여 한 · 일 양국인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 박노자 / 한겨레출판 / 2010.09.27
민족주의 사학에 있어 ‘우리’ 영토에서 이뤄지는 외국군과의 싸움은 늘 의미심장하다. ‘무장한 타자’에게 저항하다가 짓밟혔다면 ‘국치’를 중심으로 하여 ‘피해자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고, 외국군을 이겼다면 ‘국민적 자랑’을 구심점으로 삼으면 된다.
……
교과서에 딱 한 줄 언급된 ‘백강 전투’
……
우리로 하여금 ‘튼튼히 뭉치게끔’ 만드는 ‘성공적’ 외침의 수치나 격퇴된 외침의 자랑이면 일단 교과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외침’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외국군의 한반도 진입은 비교적 소홀히 다뤄진다. 식민화가 입힌 상처 때문인지 특히 고대 · 중세의 왜국(일본)과의 각종 군사적 관계들은 무시된다. 예컨대 663년 백제 부흥운동을 도와주려던 왜국의 시도 그리고 그 시도로 촉발된 663년 8월 27~28일의 ‘백강 전투’에 대한 국사 교과서의 기록은 단 한 줄로 처리된다. 신라-당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의 대대적인 싸움이었는데도 왜 수군이 금강(백강) 입구까지 왔다가 패하여 쫓겨갔다는 간단한 서술로 끝난다. 약 4만 2000명의 왜인이 참전하고 1만여 명이 전사한, 고대사를 통틀어 왜국이 외부에서 당한 가장 큰 규모의 패배였는데 우리 국사 교과서는 이에 대해 침묵한다. ‘숙적’ 왜국이 ‘침략’이 아닌 동맹국 백제에 대한 원조를 단행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통상적 일본관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일본은 무엇 때문에 동아시아 최대 강자인 당나라와의 일전까지 불사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을 도우려 했던가? 650년대부터 660년대 초까지 백제와 왜국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했기에 당나라의 일본 열도 침략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까지 무릅쓰고 백제 구원에 나섰던가?
6세기 초부터 일본 열도로의 선진 문물 수입 통로가 된 백제는 왜국의 ‘으뜸가는 대륙 파트너’로서 자리를 굳혔지만 양쪽 지배층들의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왜국과 백제의 우정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6세기 말에 수나라의 천하통일로 위기에 빠진 고구려는 왜국과의 관계 강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해 승려 혜자를 성덕태자(聖德太子,쇼토쿠 태자, 573~621)의 스승으로 파견하는 등 ‘대왜 관계 관리’에 열심이었는데, 왜국 지배층은 이 움직임에 관심있는 태도를 보였다. 또 645년에 쿠데타로 집권한 급진개혁 세력은 당나라와 당나라의 동맹국인 신라를 중앙집권화 지향의 개혁 모델로 삼아 신라 지배자들과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대일 관계라면 일단 소홀히 다루는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일본서기』[효덕천황(고토쿠천황) 3년]에 따르면 647년에 신라의 실세인 김춘추가 직접 도일해 일본 귀족들에게 ‘아름답고 쾌할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백제를 없애려는 김춘추, 김유신 일파로서는 백제의 오랜 동맹국인 왜국을 백제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백제를 고립시키려는 신라의 적극적인 대왜 외교가 결국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본적으로는 왜국의 내부 사정이 크게 작용했다. 나중에 천지천황으로 등극하는 나가노 오에(中大兄, 626~672) 황자는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유수의 호족인 소가(蘇我)씨와 긴밀한 통혼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런 그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게 되어 친백제 경향이 친신라 경향보다 훨씬 우세해졌던 것이다. 나가노 오에 뒤에 있는 소가씨 등의 호족들에게 백제란 ‘우리 조상의 땅’이었을 것이란 점을 잊으면 안된다. 거기에다 신라와 당나라의 너무나 빠른 ‘친해지기’는 왜국 지배자들에게 불안을 심어주었다. 649~651년에 당나라 관복제도와 궁중의례 등을 빨리 받아들인 신라의 사절 사찬 지만(知萬)이 651년 왜국에 오자(『일본서기』효덕천황 백치2년) 왜국 지도자들이 이를 불쾌하게 여겨 ‘신라 침공’까지 들먹였다. 저들이 제 딴에는 왜국 중심의 국제질서의 일부분으로 파악하려 했던 신라가 이미 왜국의 국력을 무한히 능가하는 당대 동아시아의 ‘중심’ 당나라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는 게 못마땅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구다라나이, 백제 것이 아닌 하찮은 물건
660년 9월 신라와 당나라의 공격에 백제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왜국에 전해지자 ‘공포의 무드’가 조성됐다. 한반도를 왜국·일본의 ‘피해자’로만 생각하는 데 익숙한 우리로선 다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660년대 왜국 지배자들은 당나라와 신라가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일본열도까지 침공할 것을 두려워해 각종 방어시설의 축성에 애를 많이 썼다. 일본에서 한반도 국가를 ‘잠재적 침공세력’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처럼 왜국으로선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 다음의 군사적 목표로 일본열도를 정할 것도 두려웠지만, 300여 년 동안 왜국에 온갖 선진 문물을 보내준 ‘세계로의 창’ 백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어로 백제를 ‘구다라’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일본어에서도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사소한, 별로인, 좋지 않은, 하찮은)라는 말이 있다. 속설이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지만 이 단어의 어원을 ‘백제의 것이 아닌 하찮은 물건’이라는 표현과 연결시키려는 이들도 있다. 그 진위를 알 수 없지만 그 속설이 전해온 것 자체는 ‘백제’에 대한 일본인의 특별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대우를 받아온 백제가 돌연히 국망을 맞이한 것은 일본 지배층으로서는 충격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들은 당장에 백제 부흥 운동의 지원에 나서지는 않았다. 백제 부흥 운동의 지도자인 복신(福信)이 이미 660년 10월 왜국에 ‘인질’(즉, 백제 왕실의 상주 대사)로 잡혀 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豊·?∼669)의 귀환을 요청했지만, 왜 조정은 661년 9월이 되어서야 이 요청을 들어주었다. 왜국으로서는 천하 최강인 당나라에 도전장을 던지다는 것이 그만큼 내리기 힘든 결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정치적 결단이 내려진 뒤 왜국은 백제인들의 저항운동에 파격적인 원조를 해주었다. 662년 1월에 화살 10만 척과 종자용 벼 3천 석을 보냈는가 하면 같은 해 3월에 피륙 300단을 추가로 보냈다(<일본서기> 덴지 천황 원년). 왜국 외에 외부 후원을 받을 길이 없었던 백제 부흥군으로서는 귀중한 선물이었을 것이다. 왜국이 백제 지원에 나서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배경에는 연개소문의 군대가 660∼662년 당나라와 신라의 침입 시도를 좌절시켰다는 소식을 빠르게 접한 이유도 있었다. 동북아의 정통 ‘노(老)강대국’ 고구려와 같이 벌이는 작전이라면 크게 손해를 볼 일이 없다는 게 왜국 지배층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왜국에서는 부흥운동 내부의 각종 내홍과 모순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등 상황 전개를 신중히 예의주시했다. 당시에 수집된 정보의 일부가 『일본서기』에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없는 이야기지만, 『일본서기』에 따르면 부여풍에게 잡혀 가죽 끈으로 손바닥이 꿰여 묶인 복신은 반대파 귀족에게 침을 뱉으면서 ‘썩은 개’ ‘미친 노예’라고 크게 욕하는 등 장렬하게 고통스러운 죽임을 맞이했다. ‘좋은 장군’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복신의 죽음이 백제 부흥 운동을 크게 약화시킬 것이란 게 왜국 쪽 판단이었지만 백제 원조 계획은 바뀌지 않았다. 그만큼 왜국 지배층으로서 백제의 생존은 생사 문제로 인식됐던 것이다.
백제 저항운동에 파격적인 원조
663년 8월27∼28일 백강 전투에서의 패배는 왜국으로서는 ‘참패’에 가까웠다. 왜국의 전선 800여 척은 170여 척도 되지 않는 당나라 수군을 감당하지 못해 전선의 절반 정도를 잃고 말았다. 불타는 왜국 전선에서 나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환하게 하고 바닷물을 붉게 했다’는 게 『삼국사기』(28권)의 평이다. 수적으로 우세한 왜의 수군이 당나라와 신라에 이렇다 할 만한 손실을 입히지도 못한 채 궤멸되고 만 것은 선박 건조 기술이나 해군 전략, 군사 훈련 차원에서 그 당시 왜국이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더 이상 왜국의 지원 능력을 믿지 못하게 된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망갔지만, 사면초가에 빠진 고구려도 그에게 현실적 지원을 해줄 여력은 없었다. 백제 부흥운동의 가장 큰 기대는 역시 왜국의 지원이었는데, 왜 수군의 완패로 그 기대가 무너져 부흥운동의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왜국도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대륙으로의 출병이 백해무익하다는 교훈, 둘째 한반도의 새로운 패권 세력인 신라와 친해지지 않으면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이 왜국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교훈이었다. 그리하여 백제 부흥운동 세력들이 완전히 패배하자 왜국은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그 뒤로는 신라의 실력자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나라와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지만 신라와는 적극적으로 교류를 이어나갔다. 원효, 경흥(憬興)과 같은 신라 승려들이 나중에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었던 정치·외교사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사에서 ‘외침’이 잦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무장해서 한반도에 들어오는 모든 ‘타자’들이 꼭 ‘침입자’만은 아니었다. 이미 고대부터는 한반도의 여러 정치세력들이 외부의 군사적 지원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이런 지원에 엄청난 기대를 걸었다가 파산을 당한 경우가 바로 663년의 백강 전투다. 나중에 식민 모국이 된 일본의 전신인 왜국이 참전한 전투라고 해서 그 의미를 과소평가해야 하는가. 사실 백강 전투야말로 일본의 대륙 간섭 중지와 신라의 한반도 지배 등 이후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확정되는 데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역사 스페셜 3
– KBS 역사스페셜 / 효형출판 / 2001-08-20
『삼국사기』「백제본기」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당시 왜(倭)는 400척의 배에 27,000명의 군대를 보냈다. 『일본서기』는 663년 8월 17일 하루 동안의 전투를 이렇게 전한다.
당唐의 장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백강)에 진을 쳤다. 일본 수군 중 처음 온 자와 당의 수군이 교전을 벌였다. 일본이 불리해 물러나자 당은 진을 굳게 지켰다.
……
그러나 663년, 부흥군을 이끌던 부여풍과 복신 사이에 내분이 일어난다. 「백제본기」에는 “복신은 부여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게 되었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굴 속에 누워서 풍이 문병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죽이려고 했다. 풍이 이를 알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부여풍이 수하 장수를 죽인 것을 안 신라가 곧바로 주류성을 빼앗으려 했고, 이에 27,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지원군을 보내 신라를 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왜군은 출병한 지 보름 만에 나 · 당 연합군에 대패한다.
「백제본기」는 당시 상황을 “(신라가) 왜군과 맞닥뜨려 4번 모두 이기고 배 400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띠었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는 이 싸움에서 패한 부여풍이 고구려로 망명한 것으로 전한다. 백강구 전투에서 구심점을 잃은 백제는 이후 힘없이 무너졌다. 부흥 운동의 거점이던 주류성도 백강구에서 패한 지 불과 열흘 뒤 나 · 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다. 663년의 백강구 전투는 백제 최후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3년 동안 지속된 부흥운동이 막을 내린 뒤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는 큰 변화를 맞는다. 당과 신라가 주도권을 쥐게 되고 668년 결국 고구려까지 멸망하면서 한반도엔 신라의 시대가 도래한다.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바꿔 놓은 백강구 전투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왜의 참전이다. 당시 백제는 이미 멸망한 상태였고 부흥군만이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신라와 맞서고 있었다. 왜는 그런 백제를 적극 지원하는데, 이를 두고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백제가 왜의 속국이 아니라면 멸망한 나라에 그만한 지원군을 보낼 리 없다고 주장한다.
……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백강구 전투에서 패배하고 2년 뒤인 665년, “달솔(達率) 답발춘초(答㶱春初) 등을 보내 오오노 성을 쌓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달솔’은 백제의 지방 행정관이다.
백제의 몰락은 일본 열도에 군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런 상황에서 왜는 백제 기술자를 동원해 나 · 당 연합군이 침략해 올 곳으로 예상되는 쓰시마에서 북큐슈 · 세토 내해와 왕도에 이르는 요충지에 10여 개의 성을 쌓는다. 시가현 오오츠시(大津市)의 주택가 한켠,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패한 직후 천황마저 아스카에서 이 오오츠 궁으로 옮긴다. 침략에 대비해 수도를 내륙 깊숙이 옮긴 것인데 당시 왜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 지를 알 수 있다.
백제가 멸망하자 그 다음 단계는 왜가 아니냐는 두려움 때문에 왜의 대외 관계는 폐쇄적이면서 자위적인 방향으로 전환된다. 그 영향으로 왜는 국제 사회에 당분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체 개혁을 추진한다.
……
백강구 전투 이후 폐쇄적인 외교 정책을 펴던 왜는 오히려 율령 체제를 확립하고 국가적인 기틀을 다진다. 그것은 백제와 왜 사이의 친밀한 외교 관계의 결실이자 백제 멸망 이후에도 일본에서 선진 문화를 꽃피운 백제인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혹자는 백제 문화의 정수를 보려면 일본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에 있었던 백강 전투를 주목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한국인
– 김병훈 / 반디출판사 / 2006-05-20
서기 663년 8월 27일, 28일 우리나라 금강하구에서 왜의 수군과 당 수군이 대격전을 벌였다.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왜군이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함락시킨 당군과 회심의 일전을 벌인 것이다. 육지에서는 백제부흥군이 왜군의 승리를 기원하고, 신라군은 당군을 응원하고 있었다.
이틀 동안의 격전에서 왜군은 패했다. 대군이 거의 전멸하는 참패였다. 이로써 백제부흥운동의 기세는 꺾이고 왜-백제 연합군과 당-신라 연합군이 맞선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전은 당-신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9월 7일 주요 거점인 주류성이 항복하면서 백제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1천3백여 년 전 백제가 멸망할 때 벌어진 극적인 사건이다. 교과서에는 이 이야기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에 “이 때,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갔다.”고만 적혀있다.
『한국사신론』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660년 의자왕이 항복한 후 백제지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을 설명하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백촌강 전투’를 언급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백제부흥을 위해 일본의 대군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삼국사기』의 기록도 매우 간략하다.
……
『삼국사기』의 집필자 김부식을 비롯한 당대 역사가들은 백촌강 전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교과서에 반영된 것인지 모른다. 백제부흥운동과 관련한 이때의 상황은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상세히 나와 있으며 일본이 적극적으로 백제부흥운동에 나서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다.
……
『일본서기』에 상당히 자세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 기록이 없다면 백제 멸망 뒤에 일어난 백제부흥운동을 알기 어렵다.
대전투가 정확히 어디서 벌어졌는지 모르나 금강이 서해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하구 일대로 생각된다. 흔히 ‘백촌강 전투’로 부르는 것도 내용이 풍부한 『일본서기』의 영향이다. ‘백강구 전투’라고도 한다.
일본은 왜 전력을 다해 백제부흥운동에 뛰어들었을까.
파견 병력만도 3만2천 명이 넘는다고 하고 천황이 사망한 마당에 즉위식도 치르지 않고 오로지 남의 나라 전쟁에 매달렸다. 당시 일본이 거의 모든 국력을 쏟아 부었으며 무리한 전쟁으로 ‘진신(壬申)의 난'(672)을 초래해 덴지(天智) 천황 정권이 붕괴했다는 역사적인 평가를 보면 더욱 아리송해진다. 일본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지 ‘역사의 미스터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한국 쪽에서는 당시 일본이 백제의 핏줄을 이은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로 모국을 구하는 전쟁에 물불을 가릴 수 없는 처지였다고 말한다. 사이메이 천황이 백제 의자왕의 누이동생이라는 근거가 빈약한 이야기까지 나온다.
일본에서는 반대로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어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고 설명한다.
어느 쪽 설명이 진실일까.
이렇게 물으면 둘 중 하나는 진실이라는 착각이 성립한다. 양쪽 다 명확한 근거없는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어쨌든 당-신라 연합군과 이에 맞선 왜-백제 연합군의 대전투라니 고대 동아시아 역사는 우리가 배웠던 것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긴박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이겼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덴지 천황이 풍을 백제왕으로 명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 됐을 지도 모른다.
고대 한반도의 역사는 이처럼 일본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특히 가야, 백제에 대한 역사기록은 『삼국사기』,『삼국유사』같은 국내 역사책보다 『일본서기』등 일본 역사책에 더 많이 남아있다. 또 일본이 한반도 역사에 개입한 주요 사건은 백촌강 전투만이 아니다. 저 유명한 광개토왕비에도 ‘왜(倭)’가 중요한 전쟁 상대로 선명히 적혀있고,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왜’가 수없이 등장한다.
역사를 통한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
– 김기봉 / 푸른역사 / 2006.02.28
국가와 민족의 기원을 말할 때 중요한 것이 국호다. 그래서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표상하는 국호가 언제 어떻게 성립했는지를 교과서는 밝혀야 한다. 일본 역사 교과서에는 <일본이라는 국호의 성립>이라는 독립된 장이 있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나타나는 결정적인 계기는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의 패배다. 3백 년간 친교관계에 있었던 백제와의 단절은 당시 일본 열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당과 신라의 내습에 대한 위기의식은 거국적인 방위를 위한 천황제 율령국가를 성립시키고, 이로써 일본이라는 국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의 기원은 무리하게 1만 수천 년 전의 조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립은 7세기 말부터라고 쓰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 국사 교과서에는 한국이라는 국호가 언제 어디서 기원하는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만들어진 나라 일본
– 마쓰오카 세이고 / 이언숙 역 / 프로네시스 / 2008.06.10
이렇게 일본 열도의 통일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618년에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唐나라가 들어섰는데, 신라는 바로 이 당의 세력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당나라도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를 정복하고 싶어했지만 좀처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때에 신라의 김춘추가 당나라가 빼든 공격의 칼날을 고구려에서 백제로 돌리게 하여 당을 통해 백제를 정복하는 외교 전략을 도모했다. 이 교묘한 외교 정책은 성공했다.
백제는 이러한 계획을 눈치 채고 일본에 원조를 요청했다. 일본은(아직 일본이라기보다 왜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백제와 연합하여 당 · 신라 연합군에게 대항했다. 이렇게 양측이 격돌하게 된 전투가 663년의 백촌강白村江 전투다. 68세인 여제女帝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은 두 아들, 나카노오에中大兄 왕자와 오아마大海人 왕자를 데리고 북규슈로 향했다. 그러나 당 · 신라 연합군은 백제 · 왜 동맹군을 산산조각 내듯 대파했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백제는 멸망하고, 일본(왜)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신라는 이를 기회로 당과 더욱 강력하게 연합하여 고구려를 물리치고 한반도를 통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순간 ‘왜’는 마침내 ‘일본’으로 성장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일본을 자립하게 만든 것은 외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와 일본은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구당서舊唐書』에는 “일본은 왜국과는 다르다. 이 나라는 해가 뜨는 쪽에 있으므로 그 이름을 일본이라한다”고 나와 있고, 『신당서新唐書』에는 “왜라는 이름이 좋지 않으므로 새로이 그 이름을 일본이라 한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이 일본을 지배한 인물이 덴무 천황天武天皇(오아마 왕자)이었다.
조금 복잡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일본의 역사 전체도, ‘일본이라는 방법’도, 오모카게의 변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중국 · 한반도 · 왜는 운명 공동체였기에, 신라의 통일은 일본의 자립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중국의 동아시아 경영에 나타난 변화, 이에 따른 한반도의 급격한 변화, 이로 인해 휘몰아친 7세기 초의 백촌강 전투, 이 전투에서 당 · 신라 연합군의 승리, 그리고 백제와 일본의 패전, 이로써 왜가 일본으로 성장했다는 점, 마치 현대의 태평양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은 패전을 극복하고 성장을 이룬 것이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 김시덕 / 메디치미디어 / 2015.04.05
…… 이에 따라 조선을 강제 병합한 20세기 전반에 일본은 임나일본부의 거점으로 그려지는 가야 지역을 발굴 혹은 도굴했으나 그 역사적 실체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최근 들어 가야 지역이 아닌 전라남도의 영산강 지역에서 일본의 무사들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왜계倭系’ 무덤이 발굴되고 있다. 이들은 중국의 『진서晉書』 열전에 보이는 마한馬韓의 잔존 세력 ‘신미제국新彌諸國’이 백제에 저항하기 위해 고용한 용병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20세기 전기에 일본이 만들어낸 ‘임나일본부설’과는 무관하게, 일본열도의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는, 마치 일본열도의 통일 정권이 이들을 주도적으로 한반도 남부에 파견한 양 후세에 정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일본서기』 등의 고대 일본 역사서에서 임나일본부의 창세기로서 존재하는 것이 ‘진구코고神功皇后의 삼한 정벌’ 전설이다. 이 전설을 간단히 설명하면, 진구코고의 남편인 주아이텐노仲哀天皇가 규슈 지역에 군사 원정을 갔다가 한반도를 정복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도 무시했다. 그 때문에 남편이 죽자, 진구코고가 이 신탁을 수행하여 신라 · 백제 · 고구려를 정복, 일본의 속국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진구코고라는 사람의 실존 여부, 과연 이 시기 일본에 이처럼 대규모의 해외 원정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단일한 중앙집권 정권이 존재했는가의 문제를 포함하여 이 전설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전근대 일본은 이 전설을 통해 한반도 남부 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했고, 국제관계를 설명해왔다.
이처럼 일본이 진구코고의 삼한정벌 전설을 통해 유라시아 동부에서의 활동을 정당화하려고 했다면, 그 활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러 온 일본의 수군이 당나라 군대와의 전쟁에서 패한 663년 8월의 백강 전투였다. 당시 신라 · 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지왕 등의 지배층을 당나라로 끌고 가자, 백제 부흥군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귀국시키고 일본 세력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그리하여 백제 부흥군이 육지에서 신라군에 맞서고, 일본 수군은 오늘날 금강 근처에서 당의 수군과 맞섰다. 육지와 바다를 피로 물들일 정도로 치열한 전투 끝에 신라 · 당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백제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됐다. 이로써 일본열도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는 사라졌고, 대륙에 거점을 확보하고자 한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시도는 유라시아 동부의 정세에 큰 영향을 주진 못했지만, 한반도의 분열 상태라는 불안정 요인이 제거돼 이후 신라 · 당 · 일본은 국내외적으로 안정을 유지했다.
한 중 일의 역사와 미래를 말한다
– 진순신 / 문학사상사 / 2000.06.10
<김용운>
1995년은 일본이 패전한 이후 5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일본에 있어서는 이 50년이라는 기간이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시대적인 하나의 매듭이라는 뜻에서의 숫자가 아닙니다. 일본 역사는 50년을 주기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일본의 불교는 백제에서 552년(538년이라는 설도 있음)에 전해졌습니다. 그 후 근 50년이 지난 602년을 전후하여 거대한 사원이 건립됩니다. 율령제가 실시되고, 고대 국가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되지요. 이때 쇼토쿠 태자의 중국(수)에 대한 망상적 외교가 시작됩니다. 그후 50년이 지나 일본은 당시의 군사대국이 되었고, 663년에는 백제를 도우려 백마강까지 출병합니다. 결과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대패했습니다만, 그후 50년이 지난 713년 전후에는 당시 세계 최대의 불상을 건립하고, 『일본서기』, 『고사기』, 『만엽집』을 편찬하는 등 완전히 고대국가로서의 난숙기를 맞이합니다.
‘백강전투’ 재조명 한중일 국제학술 세미나
– 전라일보 / 2016-11-03 : http://www.jeolla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96897
◎ 김중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장
삼국통일 전투지 기벌포, 옥산·회현면 일대 추정
◎ 바이건싱 섬서사범대학교 교수
백제의 멸망은 왜가 한반도 남쪽지방에서 이익을 얻을 수 없음을 뜻하며 결국 왜는 663년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전쟁(3차례 기벌포 전투) 결과 동아시아는 큰 변화를 겪는다. 당나라는 신라의 3국 통일을 인정하고 신라는 당나라 중심의 질서에 가입하는 전제하에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왜는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포기하고 내부 개혁과 중국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백제, 고구려 이주자들로부터 한반도 양식의 견고한 성벽을 쌓는 등 방어에 주력했다.
◎ 고미야 히데타카 계명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
일본사에서 백강 전투는 신라·당과 백제·왜의 전투에서 패배한 왜가 당을 모범으로 한 율령국가 형성을 급속히 추진하는 계기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
세 번째로 653년 경 왜는 백제를 견당사 파견 도움의 대상국으로 삼았고 659년에는 친백제외교를 펼쳤다. 이 때문에 사신이 당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백제를 공격하려는 당나라의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됐다. 결국 왜의 백강전투 참가는 균형외교의 파탄에서 빚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 박영철 군산대 교수
한반도 운명 가름한 세 차례 기벌포 전투
<관련 그림>
– 백강 전투
– NHK제작 다큐멘터리 방송
– 전북 부안의 개암사와 뒷편 우금산성(위금암산성)의 우금암이 보인다. 우금산성이 주류성이라는 의견도 있다. (사진 출처 : 대명리조트)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연기군 전의면의 당산성(唐山城), 전북 정읍시의 두승산성(豆升山城),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 등에 비정하는 학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주류성이 백강(白江)에서 가깝고 “농사짓는 땅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돌 많고 척박한 땅이어서 농사지을 수도 없는 땅이다. 지금은 지켜내는 곳이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백성들이 굶주리기 쉽다”고 적혀 있어 위치 추정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 일본에 있는 한국식 성
백강 전투 패배의 결과 일본측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중국의 당과 신라의 동맹군이 일본에 공격해 오는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피폐한 가운데서도 일본은 당나라 · 신라 연합군을 막기 위해 도처에 산성을 축조한다. 그리고 왕도를 아스카에서 오미(近江 : 현재의 시가현[滋賀縣])로 옮긴다. 아스카가 소가씨의 본거지인 점도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의 산성들을 살펴보면 백강 전쟁의 패배 후, 쓰시마 · 이키 · 쓰쿠시 등의 변방 지구에는 병력들과 봉화대가 배치되었고 각지에 많은 성들이 축조된다.
– 일본 구마모토(熊本)현에 기구치(鞠智城)라는 성의 상상도
1400년 전 우리 백제에서 건너간 귀족이 세운 성으로 65ha에 이르는 이 넓은 성에는 인근 3개 성에 대한 무기, 병참, 예비병력을 담당했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성 광장에 세워진 백제 귀족 억예복유(憶福留)의 축성 지휘를 하는 모습의 동상이 인상적이다.
‘백강전투’에서 일본군이 패퇴할 때 이 전투에 참여했던 많은 백제 귀족들이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들은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이번에는 일본으로 쳐들어 올 것에 대해 숙의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들은 일본으로 올라오는 목줄과도 같은 구마모토의 기쿠치에 성을 쌓는 작업을 서둘렀고 그 총책임자는 백제에서 건너온 귀족이 맡았다. 그렇게 기쿠치성 안내문에 기록되어 있다.
인문학 강의 – 유홍준 : 빛은 한반도로부터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 백강구전투
위키백과 : 백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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