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사인암 – 명승 제47호

※ 황성열의 세계 – 문화재 : http://yellow.kr/nt.jsp

※ 명승 제47호 / 단양 사인암 (丹陽 舍人巖) / 2008년 9월 9일 지정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단양 사인암(丹陽 舍人巖)」은 남조천(일명 운계천)변에 병풍처럼 넓은 바위가 직벽을 이루며 위엄을 자랑하고 있는 곳으로 추사 김정희가 이곳을 두고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 그림과 같다고 찬양했을 정도로 그 경관이 특이하고 아름답다.

고려시대 경사와 역학에 능통했던 역동 우탁 선생이 정4품 벼슬인 사인(舍人) 재직 시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사연이 있어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였던 임재광이 사인암이라 명명했다고 전하며, 암벽에는 우탁의 글이 남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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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은 단양 남쪽 남조천변의 푸르고 깊은 계류를 끼고 있는 높이 70m의 기암절벽이다. 단양팔경 중 4경 (두산백과 : 단양팔경)
① 하선암(下仙岩), ② 중선암(中仙岩), ③ 상선암(上仙岩), ④ 사인암(舍人岩), ⑤ 구담봉(龜潭峰), ⑥ 옥순봉(玉筍峰), ⑦ 도담삼봉(嶋潭三峰), ⑧ 석문(石門)

 

『여지도서』(단양)에 의하면, “사인암이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운계의 북쪽 들판 상류와 선암 사이를 산 하나와 흐르는 물이 가로막아, 동서로 깊고 큰 골짜기를 이룬다. 계곡을 굽어보며 겹겹이 쌓인 절벽의 높이는 48~49길이고 둘레는 15~16아름이다.”라고 수록되어 있으며, 사선대(四仙臺)와 서벽정(棲碧亭)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대동지지』에는 사인암으로 수록되어 있다. 『해동지도』(단양)에 남면의 하천변에 ‘사암(舍岩)’으로 표기되어 있고 그 형세가 그려져 있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사인암(舍人巖)’으로 표기되어 있다.

사인암 뒤편 암자 오른쪽 바위에 “卓爾不群 確乎不拔”(탁이불군 확호불발) 새겨진 글귀는 사인암의 인상을 표현한것이고 왼편 앞쪽 바위에 “獨立不懼 遯世無憫”(독립불구 둔세무민) 글귀는 조선시대 유배 생활을 하던 선비들이 가장 많이 읽은 주역의 괘라고하는데 사인암의 기상을 또렷하게 말해준다.

단양읍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대강면, 황정리, 사암리에 걸쳐 흐르는 운계천 따라 펼쳐지는 경관이 운선9곡(雲仙九谷)이고 소백산에서 시작한 그 계곡 물이 합수한다는 곳이 바로 운선7곡이라는 남조천 일대이다.
옛날 서애 유성룡이 나라님으로부터 하사 받은 호피(虎皮) 한 장을 팔아서 이 일대를 사서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9谷)을 본떠 운선구곡(雲仙九谷)이라고 하며 노닐었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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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은 세로로 쭉 뻗은 암벽과 선명한 격자무늬가 시선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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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사인암 (출처:단양군)

 

사인암항공

사인암 항공사진 (https://youtu.be/UMfh_ibRW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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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 아래에는 천연 바둑판도 남아 있어 옛 선인들의 풍유를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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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필 병진년 화첩 (金弘道筆 丙辰年 畵帖)에서의 사인암도 / 삼성미술관 리움

김홍도필(金弘道筆) <병진년 화첩(丙辰年 畵帖)>은 조선 후기의 화가 단원 김홍도(1745∼?)가 그린 산수화와 풍속화 등을 모은 화첩이다.
단양 8경의 하나인 사인암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산수화에도 그의 특색이 잘 나타나는데 바위산의 모습을 근접한 시점에서 화면 가득히 배치하여 그 위용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농도와 크기를 달리하는 점과 선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화면에 강약과 변화를 주고 있다.
한진호의 ‘도담행정기’ 가운데 ‘사인암별기’를 보면 김홍도의 연풍 현감 부임은 본 업무였던 어람용 그림 제작과 관련이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인암별기에는 ‘세상에서 일컫기를 단양의 경승으로 다섯 바위가 있다고 하니, 삼선암의 세 바위,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과 운암 그리고 사인암을 이른 것이다. 이제 사인암을 보니 참으로 진기한 경관이다. 일찍이 듣자니 주상 정조께서 그림 잘하는 이 김홍도를 연풍 현감으로 삼아, 그를 시켜 그곳에 가서 영춘, 단양, 청풍, 제천의 사군산수를 그려 돌아오게 하였다. 김홍도가 사인암에 이르러 그 뜻을 얻지 못하더니, 십여 일 머물러 가면서 익히 보고 노심초사하였는데도 끝내 참모습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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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운의 ‘사인암(舍人巖)’, 사인암과 주변 강을 실제 풍경과는 반대방향에서 그렸다. ‘사군강산삼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 국민대박물관, 종이에 수묵담채

조선시대 후기에 이름을 떨친 산수화가 기야 이방운(1761~1815?)이 남한강 일대를 그린 서화첩 <사군강산삼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 이 화첩에 담긴 8곳의 명승지는 도화동, 평등석, 금병산, 도담, 구담, 의림지, 수렴, 사인암으로 현재 단양 8경과 제천10경에 해당하는 명소이다.

 

우탁(禹倬, 1263년 ~ 1342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단양,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이다.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급제하여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있을 때 요신(妖神)의 신사를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원나라를 통해 정주의 역전(易傳)을 연구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역학자였다.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명승지로 단양 팔경의 하나인 사인암(舍人巖)은 그가 고려 말기에 사인 벼슬로 있을 때 그곳에 휴양을 가서 이름이 붙여졌다.
1570년(선조 3) 이황(李滉)의 발의로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었다.

 

< 우탁 선생의 시조 탄로가(嘆老歌, 백발가) >

한 손에 가시 쥐고 또 한 손에 막대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백발은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
잠시만 빌렸다가 머리 위에 불게하여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늙지 말고 다시 젊어져 보려 했더니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이 다 되었구나
이따금 꽃밭을 지날 때면 죄 지은 듯 하여라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 사인암
– 네이버 지식백과(문화유산채널) : 단양 도담삼봉과 사인암
– 위키백과 : 우탁
– 국민대학교 : http://www.kookmin.ac.kr
– 2017.01.01  政事에 바쁜 정조가 그림으로만 볼수 있었던 ‘秘境’

단양 사인암 – 명승 제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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