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성열의 세계 – 문화재 : http://yellow.kr/nt.jsp
※ 국보 제28호 /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慶州 栢栗寺 金銅藥師如來立像) / 1962년 12월 20일 지정 / 국립경주박물관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의 백률사에 있던 것을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것이며, 전체 높이 1.77m의 서 있는 불상으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지 않은 편이며, 둥근 얼굴·긴 눈썹·가는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에서는 우아한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8세기 중엽의 이상적인 부처의 얼굴에 비해 긴장과 탄력이 줄어든 모습이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된 느낌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신체에 밀착된 옷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 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치마의 매듭이 보인다. 앞면에는 U자형의 주름을 연속적인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금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무거워 보이는데, 이것은 상체를 뒤로 젖힘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단전과 더불어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지만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여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상
–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 http://yellow.kr/blog/?p=142
–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 http://yellow.kr/blog/?p=159
–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 : http://yellow.kr/blog/?p=171
높이 177cm로 사람의 크기와 비슷한 등신대(等身大)의 불상이다. 현존하는 통일신라 금동불 중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주조 기법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금동불이지만, 신체의 볼륨이나 탄력은 이미 없어지고 평면적인 느낌을 주는 등 곳곳에서 형식화된 경향이 엿보이고 있다. 8세기 중엽의 최절정기 양식에서 벗어난 8세기 후반~9세기 초반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백률사에 대비상(大悲像)이 모셔져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금동불이 기록의 대비상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양손이 결실되어 있어 존명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백률사에 안치되었을 때의 사진에 약함을 들고 있는 왼손이 있었던 점과 현재의 양 손목 위치로 미루어 볼 때 당시에 일반적이었던 설법인의 약사여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백률사(栢栗寺)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효소왕2년(693)에 백률사와 대비천에 얽힌 기록과 이차돈 순교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백률사는 불교를 국법으로 허용해줄 것을 주장하다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머리가 떨어진 자리에 ‘자추사’라는 이름의 절을 세웠다고 한다. 언제부터 ‘백률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백률사라는 사찰명은 원래 ‘자추사(刺楸寺)’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刺楸’를 이두문자로 보면 刺는 ‘자’를 楸는 ‘ㅊ’을 음차한 것이 되어 결국 ‘잧’이 되고 ‘刺楸寺’는 잧절의 뜻이 되었다가 栢(잣나무 백), 栗(밤나무 율)로 변경된 것으로 판단된다.
약사여래(藥師如來)는 불교에서 중생의 모든 병을 고쳐주는 부처(여래) 즉, 약사 부처(Medicine Buddha)를 말한다. 아미타불의 48 서원과 함께 약사여래의 12대 서원이 유명하다. 약사여래는 산스크리트어로는 ‘Bhaisajyaguru’이고 “Medicine Master and King of Lapis Lazuli Light” 즉,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이며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동방 정유리세계(淨琉璃世界)에 있다.
약사여래의 공덕을 설해 놓은 경전이 바로 『약사경藥師經』이다. 약사경藥師經의 발생 시기와 지역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대략 2~3세기경에 인도 보다는 중앙아시아 지역, 또는 이곳과 인접해있던 서역 인도 등지에서 먼저 성립되고 유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이는 초기 인도조각에 약사상像이 보이지 않는 점과, 인도를 여행한 중국의 승려들이 약사신앙에 관하여 언급을 하고 있지 않은 점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중국에서 한역漢譯된 최고最古의 현존하는 약사경은 5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에서는 신라 선덕여왕 때 밀본법사密本法師가 《약사경藥師經》을 읽어 왕의 병을 고쳤고, 경덕왕대에는 경주 분황사에 거대한 약사불을 안치하였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따라 7세기 중엽부터 약사불이 널리 숭앙되기 시작하여 8세기 중엽에는 크게 유행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문화재청 :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약사여래
네이버 지식백과(세계미술용어사전) : 약사여래
네이버 지식백과 : 항마촉지인의 약사여래상
위키 백과 : 약사 여래
한국 미의 재발견 (강우방,곽동석,민병찬 / 솔출판사)
석사학위논문 : 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연구 (동국대학교 박영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