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 푸아티에 전투 (Battle of Tours) – 732년

투르 전투(Battle of Tours),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로도 불린다.

 

732년 알 안달루시아 총독 압둘 라흐만(Abdul Rahman Al Ghafiqi)이 이끄는 이슬람군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현재 프랑스 남서부의 보르도(Bordeaux)를 함락시키고 아키텐공(公) 오도(Odothe Great)를 격파한 후 서프랑스의 투르 근방으로 육박하였다. 오도의 요청으로 프랑크과 부르군트 연합군을 이끈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은 10월에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에서 이슬람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었고 압둘 라흐만은 전사하였다. 이 전투는 에드워드 기번이 “세계사를 바꾸는 조우遭遇”라고 불렀던 것 처럼,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를 이슬람화의 위기에서 구출한 것으로서 중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게 단순한 약탈행위 이상으로 유럽에 대한 영구적 정복의 의도가 있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 이슬람의 통치 기간 동안 이베리아 반도는 알 안달루시아로 불렸다.

 

푸아티에 전투가 인상적일 정도로 중요한 승리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역사의 저울 위에서 푸아티에의 진정한 무게를 잰다면 그것은 다시 반세기 이상 어느 쪽으로 대세가 기울어질지 결정하지 못한 전투였다. 왜냐하면 아랍과 베르베르 사람들이 그 후에도 계속 유럽 대륙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아랍 이슬람 세력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기독교 유럽으로 진출하려던 시도가 8세기 초반에 좌절되었던 것에 대해 서구 유럽의 전설과 역사는 기독교 세력의 군사적 성공을 찬양한다. 특히 투르 푸아티에 전투(732년)와 <롤랑의 노래>의 배경인 50년 뒤의 롱스보(론세스바예스)에서의 싸움은 신성한 전쟁의 이데올로기를 낳았고, 곧이어 이슬람의 진출을 막기 위한 민족적 자부심의 온상이 되었다. 즉, 유럽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규정한 획기적 사건으로 보았다. 그러나 좀더 객관적으로 보면 기독교 유럽을 구한 것은 프랑크족이 아니라 비잔틴 제국으로 공을 돌려야 하고 이슬람 세계의 분열, 반란, 혁명이 좀 더 큰 원인이라고 판단된다.

(이슬람 문명은 7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문화적 의미의 문명 파급은 이 지역의 구조적인 지정학적 정치의 분열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역사적으로 이슬람 문명의 정치 통일 기간은 매우 짧았다.)

 

이슬람의 서유럽 방향으로 확장에 관한 주요 연표를 살펴보자.

  711년  – 약 7천 명으로 추산되는 베르베르인 군대가 타리크(Tariq ibn Ziyad)의 지휘 아래 해협을 건넜다.

– 과달레테 전투(Battle of Guadalete)에서 타리크는 서고트 왕 로데릭Roderic을 대파하였다.

  712년  – 북아프리카의 총독인 무사(Musa bin Nusayr)는 18,000여명의 아랍군과 해협을 건너 타리크와 합류한다.

– 무사가 메디나시도니아, 세비야, 메르톨라를 점령

  713년  – 무사는 서고트족 왕국의 수도 톨레도에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칼리프가 이 지역의 통치자라고 선언했다.

– 이슬람이 하엔, 무르시아, 그라나다, 사군토를 점령

  714년  – 이슬람이 에보라, 산타렝, 코임브라를 점령
  716년  – 앙블레브 전투. 카를 마르텔이 권력 기반 확보
  717년  – 코르도바가 안-안달루스의 수도가 된다.
  718년  – 코바동가 : 펠라요와 그 지지자들이 아랍 부대와 교전

※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 방어

  720년  – 이슬람이 바르셀로나, 나르본, 셉티메니아를 정복한다.
  721년  – 툴루즈 전투에서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의 오도는 아키텐과 프랑크 연합군으로 이슬람을 격파
  725년  – 안바사(Anbasa ibn Suhaym al-Kalbi)가 프랑크 왕국 부르고뉴 지방의 오툉을 기습
  731년  – 세르다냐에서 아키텐의 오도와 동맹을 맺은 베르베르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진압된다.
  732년  – 압둘 라흐만이 이끄는 코르도바의 군대가 가론강에서 오도의 아키텐 군대를 격파한다.

– 카를 마르텔의 프랑크군은 압둘 라흐만이 전사한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군대를 물리쳤다.

  735년  – 이슬람이 프랑스 남동부 도시 아를(Arles)을 점령
  739년  – 우크바 이븐 알 히자즈가 카를 마르텔의 프랑스 침공 (~740년)

– 베르베르인들이 북아프리카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이는 이베리아 반도로 확대된다.

– 북아프리카의 반란군은 파견된 아랍군을 격파하고 지휘관인 쿨숨(Kulthum)을 살해한다.

– 반란은 스페인 북서부의 갈리시아 지역 밖으로 이슬람군을 몰아낸다.

  740년  – 베르베르인들은 인종적으로 배타적인 아랍의 우마이야 칼리프에 대해 반항하고 세금의 징수를 거부한다.
  741년  – 쿨숨(Kulthum) 군대의 생존자 1만여명의 군대는 새로운 지도자인 Talaba ibn Salama와 이베리아에 도착한다.
  742년  – 알-안달루스에서 4년 동안 내전이 계속된다.
  750년  – 우마이야 왕조가 전복되고 아바스 왕조가 시작
  754년  – 피핀의 카롤링거 왕조 시작
  756년  – 우마이야 왕조 멸망 후 일족인 아브드 알 라흐만이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에 피신하여 독립했다.
  759년  – 아랍인, 나르본 상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mhistory.jsp?sub=2

 

1

– 732년 투르 푸아티에 전투 당시의 역사지도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신의 용광로

–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 이종인 역 / 책과함께 / 2010.04.23

 

푸아티에 전투는 푸아티에에서 투르에 이르는 도로의 약 3분의 1 지점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장소에 대해 여러 해 동안 잘 합의가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에드워드 기번이 “세계사를 바꾸는 조우遭遇”라고 불렀던 이 전투의 실제장소는 불분명했다. 영국이 이 전투를 집요하게 투르 전투라고 불러왔던 것은, 흑태자 에드워드가 푸아티에에서 프랑스군에게 거둔 1356년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그 전투에 푸아티에의 지명을 부여하려는 배경이 깃들어 있었다. 푸아티에 전투의 시기가 10월이었다는 사실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아랍 문헌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본 결과, 연도는 이제 733년이 아니라 732년으로 확정되었다. 사라센 군대와 프랑크-아키텐 동맹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의 정확한 위치도 20세기 후반까지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

역사의 통설은 승자가 쓴 것이다. 프레데가르 연대기 작가는 푸아티에 승리를 산문으로 썼고, 그 칭송의 문장은 세기를 거듭하여 울려 퍼졌다. “카를 대공은 용감히 그들과 맞서 전투 대형을 구축하고 전사는 그들에게 돌진했다.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그는 적의 천막을 뒤엎고, 번개처럼 빠르게 싸워 그들을 갈기갈기 도륙했다.” 카를에 대한 찬양은 그날부터 시작되었지만 마르텔(망치)이라는 별명은 9세기 초까지 공식적으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또한 무세-라-바타유에서 승리를 쟁취한 사람들은 장차 강력한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

……

8세기 후반과 9세기의 기독교 연대기 저자들은 자연스럽게 무세-라-바타유(푸아티에 전투)의 결과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보았다. 하지만 ‘순교자의 길’에서 대살육이 벌어진 다음 날, 무슬림들은 다른 생각을 했다. 그들은 알라가 이스마엘의 자손을 불리한 지경으로 밀어넣고, 골로 쳐들어간 무슬림 군대 앞에 아우스트라시아 군대의 ‘막강 석벽’을 세워놓아 지하드를 중단시켰다고 믿지 않았다. 푸아티에 전투가 인상적일 정도로 중요한 승리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역사의 저울 위에서 푸아티에의 진정한 무게를 잰다면 그것은 다시 반세기 이상 어느 쪽으로 대세가 기울어질지 결정하지 못한 전투였다. 왜냐하면 아랍과 베르베르 사람들이 그 후에도 계속 유럽 대륙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

지하드의 먹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푸아티에 전투는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끝내기는 커녕 오히려 가속화했다. 무세-라-바타유의 기슭에서 살육당한 뒤, 거의 10년 동안 무슬림제국은 전략적으로 더 대담하고 점점 확대되는 공격을 감행하여 유럽 대륙의 프랑크족과 라틴족을 괴롭혔다. 732년은 최후의 종착점이 아니라 이슬람 침입 스케줄에서 중요한 중간 지점일 뿐이었다. 하지만 거듭되는 패전으로 인해 히샴 1세의 인내심은 점점 없어져갔다. 그는 아예 끝장을 내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이교도에 대한 진군을 재개하라고 코르도바에 명령했다.

……

739~740년의 지하드는 규모와 전략에서 푸아티에 전투와 730년대 후반의 전투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개략적 사실은 알고 있지만 세세한 사항들을 잘 알지 못한다.

……

알려진 세계에 대한 10세기의 주목할 만한 역사서, 『황금의 들판 The Fields of Gold』에서 알-마수디는 프랑크족의 끔찍한 호전성을 기록하지만 푸아티에 전투와 그 직후의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패전을 기록하기 싫어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랍 문헌이 침묵을 지키는 주된 이유가 아니다. 이런 침묵을 근거로 하여, 다마스쿠스의 칼리프가 푸아티에를 단지 제국의 변두리에서 벌어진 하찮은 작전이라고 여겼다고 짐작하는 것은 정확한 판단이 아니다. 푸아티에와 그 뒤에 벌어진 유사한 패전은 심각한 굴욕적 사건이었다. 그렇더라도, 푸아티에 패배 직후에 그리고 향후 몇십 년 동안 아랍은 알-가파키가 로마 공로에서 순교했다고 하여 지하드를 그만두어야 할 군사적 이유가 별로 없었다. 푸아티에와 뒤이은 패전은 알라가 축복해주는, 알프스 남쪽으로 내달리는 진군의 길에서 잠시 앞길을 가로막는 도로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나중에 그레이트랜드(이슬람 유럽을 뺀 기독교 유럽을 뜻한다)의 상실이 항구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알-마수디와 같은 아랍 역사가들은 푸아티에 전투를 간단하게 언급했다. 그렇게 논평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유럽 구출이 자신의 공로라고 주장하는 프랑크족들과는 다르게, 기독교 유럽이 생존할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무슬림 세력의 내분 때문이라는 나름대로 타당한 지적을 했다.

……

카를의 통치가 끝나가던 무렵 피핀 왕조의 프랑크란드는 기독교 세계에서 비잔틴에 뒤이어 제2의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었다. 이제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는 왕국의 단단한 핵심을 구성했고, 아키텐과 프로방스는 그 핵심과 잘 연결되어 있었다.

 


살육과 문명

–  빅터 데이비스 핸슨 / 남경태 역 / 푸른숲 / 2002.09.30

 

샤를의 병사들은 이슬람군을 상대한 서유럽 중장보병의 첫 세대였다. 푸아티에 전투를 시작으로 이후 1천 년 동안 규율과 힘, 중무장을 갖춘 서유럽의 군대와 기동성, 수, 개인 기술에서 우위를 보이는 이슬람군의 대결이 전개된다. 프랑크군은 대오를 이루고 있는 한 -그들은 전투가 끝난 뒤에도 철수하는 아랍군을 추격하기보다 대오를 유지하는 데 더 신경을 썼다- 돌파당하거나 말 발굽에 짓밟힐 우려가 없었다. 당시의 문헌에는 프랑크군의 전사자가 1천여 명이었고 이슬람군은 수십만 명이 죽었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과장일 테고 아마 샤를의 군대가 당시로서는 상당한 대군이었던 적을 몰아내고 소수의 병력만 잃었다는 정도가 사실일 것이다. 여느 기병전처럼 푸아티에 전투 역시 일대 유혈극이었다.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 말 수천 마리가 뒹굴었고, 무기를 빼앗긴 채 죽거나 부상한 이슬람 병사들도 부지기수였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그 전에 푸아티에에서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포로가 되지 못하고 처형당했다.

……

 

사실 그 전투의 정확한 날짜는 모른다. 732년 10월의 어느 토요일로만 추정될 뿐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 사건을 투르 전투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실제 전장이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의 옛 로마식 도로 어디쯤이었기 때문이다. 샤를 마르텔이 교회 재산을 몰수한 것 때문에 그에게 적대감을 품은 후대의 그리스도교 역사가들은 그의 업적을 일부러 무시하거나 깎아내렸다. 그로 인해 이 전투는 무슬림군과 서유럽군이 최초로 벌인 충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보다는 후대의 십자군이 더 큰 조명을 받게 되었다. 이 전투를 둘러싼 당대와 현대의 신화는 쉽게 제거할 수 있다. 어느 문헌에는 그 전투에서 죽은 무슬림들이 30만 명이라고 되어 있으나 침략군 자체가 그 정도 규모가 못 되었다. 아마 양측의 병력은 2~3만 명 가량으로 서로 엇비슷했을 것이다. 인근의 농부들 수천 명에게 각자 자신의 농토와 재산을 보호하도록 한 프랑크의 조치가 성공했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유럽인의 수는 침략자보다 많았다고 봐야 한다. 비록 아랍군은 프랑크군보다 많은 전사자를 냈지만, 그것으로 완전히 소탕된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에 초기 봉건제가 어느 정도 확산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프랑크의 승리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샤를이 교회 재산을 몰수하여 휘하 영주들과 가신들에게 분배한 것은 주로 그 전투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학자들처럼 샤를의 업적이 유럽 기병대에 새로 보급된 등자 덕분이었다는 주장도 잘못이다. 등자는 사실 수십 년 전에 서유럽에 도입되었지만, 그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다가 훨씬 후대인 800~1000년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널리 사용되었다. 프랑크의 승리를 기술적 발전이나 신속한 조직적 혁신에 비중을 두어 설명하려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대 전투의 두 가지 보편적인 원칙을 알지 못하고 있다. 첫째, 중장보병은 대오를 잘 유지하고 방어 가능한 위치에만 있으면 대개 기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멀리 원정을 온 기병들이 오합지졸을 면하려면 항시적인 노력과 약탈로 확실한 보급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732년 아브드 알 라흐만의 침공은 프랑스를 정복하고 피레네 북쪽까지 이슬람권으로 만들겠다는 체계적인 시도가 아니었다. 당대의 역사가들은 그 전투에 대한 설명에서 노획물의 의미를 크게 강조했다. 즉 아랍인들은 푸아티에로 오는 도중 모든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하여 전장에 도착할 무렵에는 노획물이 상당했으나 야반도주할 때는 안전을 기하기 위해 천막에 모두 놔둔 채 달아났다. 무슬림군의 사기와 기동력은 아마 푸아티에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짐과 포로로 인해 상당히 저하되어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 전투에서 이슬람군이 승리했더라면-푸아티에는 파리에서 불과 200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와 같은 습격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을 테고, 결국에는 20년 뒤 에스파냐 남부에서와 같은 이슬람 영토가 프랑스에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프랑스 전체가 영구히 이슬람 영토로 남을 가능성은 적었다. 샤를이 이끄는 프랑크군은 무장을 잘 갖추고 사기도 높은 3만 명의 보병에다 수천 명의 기병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은 에스파냐에서 8세기 후반의 대부분을 유럽인 만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보냈다. 그래서 이슬람 세력이 어렵사리 개척한 서쪽 경계는 북아프리카를 이슬람화하는 정도에 그쳤다. 915년에 이르면 무슬림들은 모두 프랑스의 남부 국경 너머로 쫓겨난다. 9세기에는 무슬림이 프랑스를 침략하기보다 오히려 프랑크인들이 피레네를 넘어 이슬람 거주지를 습격하는 일이 더 잦았다.

샤를이 푸아티에에서 승리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그의 군대는 멀리 원정을 가서 약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양측의 규모는 비슷했는데, 그렇게 수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은 방어하는 측의 이점이었다. 양측은 둘 다 로마식 쇠미늘갑옷을 입고 강철로 된 칼을 사용했으나, 프랑크군의 갑옷과 무기가 더 강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카롤링거인들은 갑옷과 공격용 무기의 유출을 막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데, 이는 그만큼 설계가 우수하고 양이 많았다는 뜻이다. 샤를은 푸아티에에서 본능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찾아내고, 그곳에 밀집보병들을 배치했으므로 적이 측면으로 우회하거나 포위하는 전술을 구사할 수 없었다. 그는 군대의 대오를 유지하고 방어적인 태세만을 고수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푸아티에에서 적의 기병들을 잘 막아낸 덕분에 샤를은 이후 ‘쇠망치(Martellus)’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성서에 나오는 대장장이 유다 마카베오의 이스라엘군이 신의 도움으로 시리아의 공격을 막아낸 일을 연상시킨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  앙리 피렌 / 강일휴 역 / 삼천리 / 2010.10.28

 

지브롤터해협만으로는 정복자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서고트족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694년에 에르기카 왕은 유대인들이 이슬람교도와 공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박해 때문에 이슬람교도가 에스파냐를 정복하기를 바랐을 가능성이 있다. 710년에 톨레도에 있는 아길라 왕이 바이티카의 공작인 로드리고에 의해 폐위되자 모로코로 도망가서 이슬람교도에게 도움을 간청했다. 하여튼 이슬람교도는 이런 상황을 이용했다. 711년에 약 7천 명으로 추산되는 베르베르인 군대가 타리크의 지휘 아래 해협을 건넜다. 첫 교전에서 로드리고가 패했고 모든 도시가 정복자에게 성문을 열었다. 이 정복자는 712년에 두 번째로 파견된 병력으로 증원된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장악했다. 713년에 북아프리카의 총독 무싸는 서고트족 왕국의 수도 톨레도에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칼리프가 이 지역의 통치자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 멈출 리가 있었겠는가? 곧 에스파냐에서 나르본 지방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베리아반도의 정복이 완료되자마자, 720년에 이슬람교도는 나르본을 점령하고 이어서 툴루즈를 포위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프랑크왕국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력한 프랑크 왕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721년에 아키텐의 공작 외드가 이슬람교도를 아키텐에서 격퇴시켰다. 그러나 나르본은 여전히 이슬람교도의 수중에 있었다. 725년이 되자 나르본을 거점으로 한 새롭고 가공할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슬람 전사들은 카르카손을 공략하고 오툉까지 진군해서 이 도시를 725년8월22일에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732년이 되자 에스파냐의 총독인 아브드 에르 라만이 또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팜펠루나를 출발하여 피레네산맥을 넘어 보르도로 진군했다. 패배한 외드 공작은 샤를 마르텔과 함께 피신했다. 프랑크 남부 지방은 무력했기 때문에 이슬람교도에 대한 최종 반격은 북부지방에서 이루어졌다. 샤를 마르텔은 외드와 함께 진군하여 침략자에 맞섰으며, 푸아티에 근처의 협곡(과거에 클로비스가 서고트족을 무찔렀던 곳이기도 한)에서 아브드와 조우했다. 732년 10월에 전투가 벌어졌다. 아브드가 패하고 전사했다. 그러나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프로방스로, 다시 말하면 해안으로 위협이 가해졌다. 735년에 나르본의 아랍 총독인 유세프 이븐 아브드 에르 라만이 그 이웃 지역 공모자들의 도움을 받아 아를을 점령했다.

이윽고 737년에 아랍인들은 마우콘투스의 도움을 받아 아비뇽을 점령했고, 멀리 리옹과 아키텐 지방까지 약탈을 자행했다. 샤를 마르텔이 다시 진군하여 그들에 맞섰다. 곧 아비뇽을 탈환하고 나르본으로 진군했다. 그는 나르본 앞에서 이슬람교도의 도움을 받아 바다를 건너온 아랍 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나르본을 탈환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마귈론, 아드, 베지에, 님을 점령하여 방화하고 파괴한 뒤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아우스트라시아로 돌아갔다.

샤를 마르텔의 몇 차례에 걸친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은 739년에 또 다시 프로방스를 침공했다. 아랍인들은 이번에는 롬바르드족도 위협했다. 마르텔은 롬바르드족의 도움을 받아 또 다시 아랍인들을 격퇴했다.

이후에 발생한 일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랍인들이 프로방스 해안을 장악하고 몇 년 동안 지배했던 것 같다. 752년에 피핀 3세가 프로방스에서 아랍인들을 격퇴했으나 나르본 공격은 실패했다. 피핀은 나르본을 수복하지 못하다가 759년에야 수복할 수 있었다. 이 승리는 프로방스에 대한 원정의 종말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유럽 서부에서 이슬람 팽창의 종말을 의미한다. 콘스탄티노플이 718년의 대공세를 막아 냄으로써 동방을 지켰듯이, 서방에서도 카롤링거 국왕들의 가신들인 아우스트라시아의 정예군이 서방세계를 지켜 냈다.

그러는 동안 동방에서 비잔티움 함대가 이슬람을 에게 해 연안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 반면에, 서방에서는 이슬람이 티레네 해의 재해권을 장악했다.

 


프랑스사

–  김복래 / 미래엔 / 2005.08.01

 

서구 역사상 처음으로 중무장을 갖춘 기병대를 출전시켜 이슬람 군대를 격퇴시킨 마르텔의 푸아티에에서의 7일간의 전투 무용담은 환영(幻影)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신화는 카롤링거 왕조의 서유럽 지배를 정당화하고 교황권 옹호자로서의 역할을 공고히 하는 데 시의 적절하게 이용되었다. 19세기에도 ‘732년의 서사시’는 문학 작품이나 회화를 통해 찬미 대상이 되었다. 루이-필립 치세하에 알제리의 식민 정책은 ‘기독교 문명의 수호’라는 프랑스의 전통적 역할에서 그 정당성을 구했다. 즉, 알제리 식민화를 기독교 세계를 구출한 프랑스 역사의 연속선상에 위치시킨 것이다. 그래서 푸아티에 전투는 1832년부터 알제리 정복을 정당화시키는 역사적 근거로 이용되었다.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인의 집단 기억 속에 공고히 자리잡은 신화를 재확인할 수 있는 문학 작품과 이미지 표상들이 그 당시에 선을 보였다. 그러나 푸아티에 전투 승리의 결과가 실제로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샤를 마르텔은 정말 기독교 세계의 구원자인가? 피핀 2세의 사생아였던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용모가 의젓하고 무용이 뛰어났다는 것만이 전해지고, 그 밖의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성자들에게 은혜를 베푼 그의 가계에서 유별나게도 종교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샤를 마르텔은 휘하의 무사들을 중장기병대로 조직하려 했고,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 토지를 몰수하여 교회의 엄청난 원성을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교나 수도원장의 직위를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그의 일족이나 가신들에게 배당해 주었다. 그 결과, 이러한 성직자 가운데에는 『롤랑의 노래』1)에 나오는 튀르팽(Turpin)처럼 무용이 뛰어난 인물이 많았지만, 성직에 부적합한 인물들이 많아져서 골 지역 교회들의 규율은 엉망이 되었다. 그러므로 샤를 마르텔에 대한 교회측의 평판이 좋았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골에 침입한 이슬람 세력을 격퇴하고, 독일 내부 깊숙이 영토를 확장했다는 공로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탁월한 무용과 소(小) 피핀(또는 피핀 3세)이나 샤를마뉴 대제 같은 직계 후손들에 의해 카롤링거 왕조의 창시자로 추대되었다. 8세기 이후 성직자나 기독교사가들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한 기적적인 성격을 극구 강조했다. 18세기 초에 에드워드 기본(E. Gibbon)을 위시한 세속적인 역사가들 역시 전투의 거시적인 중요성, 즉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서방 세계의 승리를 실제보다 훨씬 과장해서 평가했다. “(만일 전쟁에서 우리가 패했다면) 사라센 인들에게 라인 강은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보다 더 건너기 쉬운 동네 하천이 되었을 것이다. 또, 아라비아 함대는 해전 없이 템스 강의 입구를 마치 제집처럼 드나들었을 것이며,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현재 코란의 해석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또 학생들은 예언자 모하메드 계시의 신성성과 진실을 할례를 받은 유대 인들에게 증명해 보이고 있을지도 모른다.”(에드워드 기본, 『로마 제국의 흥망사』) 한편, 1869년에 프랑스 역사가이며 고위 공직자였던 기조와 그의 부인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것(푸아티에 전투)은 동양과 서양, 남과 북,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기독교 복음과 코란(Koran)2) 간의 투쟁이었다. 우리는 세계 문명이 바로 그 전투의 향방에 달려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1878년, 에르네스트 메르시에(E. Mercier)는 그의 논문에서 최초로 푸아티에 전투에 관한 객관적 평가를 제공했다. 1944년, 모리스 메르시에(M. Mercier)와 앙드레 스갱(A. Seguin)은 『샤를 마르텔과 푸아티에 전투』라는 전공 논문에서 라틴과 이슬람측의 자료를 동시에 비교, 분석하였다. 이 때, 종전의 과장된 해석에 대한 거품이 서서히 빠지고 보다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첫째, 푸아티에 전투는 이슬람 침공을 완전히 종결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 교도들은 이미 732년 이전에 골의 영토를 침범했고, 아키텐의 외드(Eudes) 공(公)이 툴루즈 근처에서 먼저 사라센 군을 격파시켰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덕분에 외드 공은 교황으로부터 극도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 군대는 759년에 완전히 물러났다. 둘째, 이슬람의 서진은 무함마드의 예언이 준 충격이나 전도열 때문에 시작되었다(한편, 인구 과잉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단순한 침략이나 약탈의 시도나 모든 기독교 왕국을 섬멸시키려는 원대한 정복 사업이 아니었다. 이슬람의 통치자 압둘 라만(Abdul-Rahman)은 많은 전리품을 쟁취하고, 아키텐의 외드 공을 생포하는 동시에 이슬람의 적들을 패주시킬 구체적인 목적으로 골 지역을 침범했다. 그러나 전투의 양상은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투쟁을 종결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강자인 프랑크 군대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전투의 승리 이후 궁재의 일인자 샤를 마르텔은 마르텔(Martel), 즉 ‘망치(marteau)’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또, 야심만만한 샤를 마르텔은 푸아티에 전투의 기회를 틈타 그가 권력을 장악한 이래 개인적으로 탐을 내오던 아키텐 지방을 수중에 넣었다.

 

프랑크 역사에서 푸아티에 전투가 가지는 의의를 정리한다면, 이슬람 군대의 발빠른 약진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모로코 지역에 이르기까지 이전의 기독교 지역과 비(非)아랍 지역에 이슬람 문화가 강렬히 각인되었다는 점이다. 아랍 인들은 비잔틴 제국을 제외한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프랑크 왕국과의 대립에 가장 중요한 역사적 비중을 두고 있다. 중세 아랍 문헌을 살펴보면, 16명의 프랑크 국왕 명단이나 프랑크-아랍 군대의 접촉 등 프랑크 인들에 대한 기록이 많다.

 

8세기경 아랍 어에는 ‘Franj’라는 단어가 도입되었다. 훗날,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프랑스 인을 지칭하는 프랑크인(Franks)이나 유럽 인을 의미했다. 근대 표준 아랍 어에서도 ‘Franji’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동사 ‘tafarnaja(어근=f-r-n-j)’는 유럽화되는 것, 형용사 ‘mutafarnij’는 유럽화된 것, 또 ‘al-Ifranj’는 유럽 인들을 의미했다.

 

711년, 이슬람 정복자들은 서고트 왕국을 단 한 번의 격투에 무찔러 버렸다. 그래서 이베리아의 기독교 주민들은 7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슬람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베리아 지역의 재탈환은 콜럼버스가 대서양 횡단을 위한 공식 지원을 받기 불과 몇 달 전인 1492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만일, 샤를 마르텔이 서고트 국왕 로데릭(Roderick)처럼 이슬람 군대에게 무참히 패배했다면 아마 역사의 운행은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기독교 세계의 승리를 미화하는 서구 중심 사관에는 문제점이 많다. 그러나 732년의 전투에서 압둘 라만이 승리했다면, 기독교 왕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메로빙거의 유명무실한 무위왕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카롤링거 왕조의 역사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말이 바꾼 세계사

–  모토무라 료지 / 최영희 역 / 가람기획 / 2005.11.10

 

6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서유럽에서는 여러 민족의 이주와 정주가 반복되는 등 공권력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8세기에 접어들어서면서 이곳에도 통합의 기운이 싹트게 된다.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한 것이 바로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공이었다.

8세기 초 이슬람군은 이베리아 반도를 건너 지중해 연안과 피레네 지방을 침략했다. 그리고 이슬람의 기마군단은 그리스도교 최대의 성지 중 하나인 프랑스의 산마루탄 수도원을 목표로 북상했다. 이에 원군을 요청받은 프랑크 왕국의 궁재(宮宰) 카를 마르텔은 스스로 연합군을 이끌고 이슬람 군대와 대치했다. 732년 양군은 투르와 푸아티에의 사이에 있는 전쟁터에서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슬람군은 패주하였고 이후의 침략행위에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 전투가 세계사에서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우선 침입할 수 있는 한계지점까지 가보려고 한 정도의 약탈행위에 불과했고, 오히려 서유럽이 입은 그 후의 충격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까? 이 전투에 대해서는 신빙성 있는 사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전투 날짜와 장소조차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전투를 전후로 기병은 수적인 측면에서 대규모로 발전하였고, 기병대에 대한 수요도 극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기병대의 수요증가는 프랑크 왕국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방위하려는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투르-푸아티에 전투는 서유럽의 그리스도 교도가 이슬람 군대를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비록 쫓겨나기는 했지만 이슬람군의 우수한 기마대는 그리스도교 세력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만큼 기마전술 때문에 애를 먹었을 것이다.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전투력이 강한 전문적인 기사 집단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제 누가 보더라도 명확해졌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보답하는 의미로 프랑크 왕국은 전사들에게 교회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증여하였다. 전사들은 이 자본을 바탕으로 스스로 기사의 무구를 갖추고 자신을 단련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국왕의 가신이 되었다. 그들이 하사받은 토지는 은대지(恩貸地)라고 불렀는데, 군무 봉사가 없을 경우에는 반환해야 했다. 그리고 기사들은 신분에 걸맞은 행동과 예절을 익혔다. 이리하여 이른바 봉건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투르-푸아티에 전투는 기사단의 성장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래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유럽의 재발견

–  볼프강 슈말레 / 박용희 역 / 을유문화사 / 2006.02.10

 

레프가우의 아이케는 자신이 만든 『작센 법령집』에서 노아의 세 아들에 대한 성서 구절을 인용하여 그 자손들을 예속의 신분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라고 썼다.(Fischer 1957)  이미 알려져 있듯이 아이케의 자유에 대한 생각은 널리 영향을 미쳤다.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이 이야기는 적어도 식자(識者)들의 세계에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일시적으로 노아의 전설에 입각한 “야훼의 땅(Japhetien)”이란 명칭이 “유럽”이란 명칭과 경쟁하는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프랑크제국의 카롤링조朝라는 새로운 정치적 문화적 구심점이 생겨났으며, 이 제국은 다시 유럽이란 개념과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었다. 샤를마뉴 대제(카를 대제)의 제국(재위 768~814)은 로마제국의 연장이라 생각되었고, 세계제국의 반열에 올랐으며, 기독교적 구원사에 확실히 연결되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8세기 중엽 연대기(코르도바에서 나온 작자 미상의 연대기)에는 732년 투르Tour와 푸아티에Poitier의 전투에 대한 기술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개념이 나타났다. 이 연대기는 전투에 참여한 유럽 전사(戰士)들을 유럽인(europenses)이라고 명명하고 있었다. 이 명칭은 새로이 나타난 단어였으며, 분열된 유럽 종족들을 묶어내고자 하는 당시의 위기의식을 반영한 말로 보인다.

따라서 샤를마뉴 대제는 유럽의 아버지(pater Europae)라 불리게 되었고, 그가 만든 나라는 유럽왕국(regnum Europae)이 되었다. 아마도 이 이름은 새 왕국이 로마제국에 구원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 로마제국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들의 발언>

 

◎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승리의 진군은 지브롤터의 바위로부터 1천 마일이나 이어져 루아르의 강둑에까지 이르렀다. 그런 식으로 계속 갔더라면 사라센군은 폴란드의 국경지대와 스코틀랜드의 고원지대까지 파죽지세로 내달았으리라. 라인 강은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만큼 건너기 어렵지 않으므로 아랍 함대는 별다른 해전도 없이 템스 강 어귀까지 항해했으리라. 그랬다면 아마 지금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코란을 강의했을 테고, 학생들은 할례를 받고 마호메트의 계시에 담긴 신성한 의무와 진리를 탐구했으리라.

◎ 19세기 프랑수아 기조(François Guizot)는 프랑크족이 끔찍한 운명으로부터 문명을 구원했다고 주장했다.

 

◎ 앙리 마르탱은 19권짜리 『1789년까지의 프랑스 역사』에서 “푸아티에는 프랑크족과 아랍인 사이에서 세계의 운명을 좌우했던 순간”이라고 선언했다.

 

◎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도 푸아티에 전투를, ‘모하메트주의자가 이탈리아와 갈리아를 정복하려 위협하던 8세기 벽두,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점들 가운데 한 순간'(『종교개혁의 역사』)에 있었던 일대 전환점이라고 여겼다.

 

◎ 에드워드 크리시도 푸아티에 전투를 ‘세계의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로 꼽으면서 유럽을 구한 획기적인 전투라고 보았다.

“그 이후부터는 비록 단절이 없지는 않았지만 문명의 진보, 근대 유럽의 여러 국가와 정부의 발전이 궁극적으로 확실한 길을 걷게 되었다.”(1851년 『세계의 15대 결정적인 전투The Fifteen Decisive Battles of the World』)

 

◎ 20세기 초의 역사 편찬자 에르네스트 라비스는 푸아티에가 프랑크족이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에게서 유럽을 구출했다고 반복하여 말했다.

 

◎ 독일의 전쟁 사학자 한스 델브뤼크(Hans Delbrück)는 19세기 초에 관해 저술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역사상 이보다 더 중요한 전투는 없었다.”

 

◎ 40년 전 두 명의 역사가, 장-앙리 롱와 장 드비오스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무슬림 군대가 승리했을 경우의 이득으로 천문학, 삼각법, 아라비아 숫자, 그리스 철학의 집대성 등을 열거했다.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우리 유럽은 267년의 세월을 벌었을 것이다. 종교전쟁은 일어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관련 그림>

 

 

2

1837년 카를 폰 슈토이벤(Steuben)이 푸아티에 전투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얼음 덩어리’를 이룬 프랑크군의 위력을 보여준다. 이슬람 기병들은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사슬갑옷을 입은 창병들의 방벽을 뚫지 못했다.

 

 

3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와 이슬람의 기병들이 싸우는 장면이다. 왼쪽의 프랑크 기병이 오른쪽의 이슬람 기병들을 향해 활을 쏘고 있지만, 활은 이슬람 기병의 주무기였고 프랑크군은 기병보다 보병이 주력이었다.

 

 

4

푸아티에 전투에 관한 기록은 지금 빈약하게 전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 모든 기록이 일치한다. 그것은 이슬람군이 튼튼한 방진(方陳)을 이룬 채 꼼짝하지 않고 방어하는 프랑크 보병대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공격했다는 사실이다. 투르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프랑크군이 일사불란하게 적의 공격을 물리치자 마침내 공격자들은 자기 진영으로 물러갔다. 이시도루스의 후계자가 쓴 역사서에는 프랑크군이 ‘흔들리지 않는 바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서로 밀집한 채’ 마치 ‘성벽’처럼 굳건히 서 있었다.

“그들은 얼음처럼 단단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5

– 6세기 프랑크족 전사

 

 

6

–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한 후 파리로 개선하는 샤를 마르텔

 

 

7

– 샤를 마르텔 시대의 프랑크 왕국의 영역

 

 

8

– 샤를 마르텔의 735년~742년의 아키텐(Aquitaine), 셉티마니아(Septimania), 프로방스(Provence) 지역에서의 군사 작전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투르푸아티에 전투

네이버 지식백과(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 프랑크인의 왕국을 위한 싸움

네이버 캐스트 : 동로마-아랍전쟁(2)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프랑크왕국의 카롤링거왕조

위키 백과 : 투르 푸아티에 전투

위키 백과 : Battle of Tours

위키 백과 : Battle of Toulouse (721)

http://en.wikipedia.org/wiki/Timeline_of_the_Muslim_presence_in_the_Iberian_peninsula

http://www.conflicts.rem33.com/images/deut/earl2.htm

http://home.eckerd.edu/~oberhot/moussais.htm

http://2083europe.wordpress.com/2011/08/02/1-20-battle-of-poitiers-battle-of-tours-first-islamic-wave-year-732/

투르 푸아티에 전투 (Battle of Tours) – 7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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