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루즈 전투 (Battle of Toulouse) – 721년

툴루즈(Toulouse) 전투 (721년)는 아키텐(Aquitanian)의 오도(Odo) 대공의 기독교 군대가 툴루즈를 포위한 이슬람 우마이야(Umayyad) 왕조 알-안달루스 총독인 알-삼(Al-Samh ibn Malik al-Khawlani) 총독이 이끄는 이슬람 군대에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이슬람 세력의 나르본에서 아키텐으로의 확장을 저지하였다. 즉, 현재 프랑스 남부 지역을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등장할 유명한 전투인 ‘투르 푸아티에 전투’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 투르 푸아티에 전투 (Battle of Tours) – 732년 : http://yellow.kr/blog/?p=1761

 

711년 이슬람 군대는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서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다. 719년에는 피레네산맥을 넘어 나르본을 점령하여 산맥 너머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그리고 721년에 아키텐을 공략한다.

 

오도 대공(Odo the Great, ? – 735년)의 출신은 모호하다. 프랑크 왕족이라는 설이 다수지만, 로마인이라는 설도 있다. 오도는 700년 무렵에는 아키텐의 실권을 장악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오도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아키텐의 독립을 기도했던 인물로, 아키텐에서는 대왕 또는 대공이라는 별칭의 the Great로 부른다. 이슬람과 손잡고 아키텐의 분리 독립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투르-푸아티에 전투를 계기로 카를 마르텔의 종속인이 되었다.

 

민족국가 형성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툴루즈 전투는 서구 기독교 세계를 무슬림의 파도로부터 구출한 사건이었다. 역사적 대결에 뛰어든 기독교 전사들은 이런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도 대공은 그보다는 아우스트라시아의 피핀 왕조와 코르도바 총독들의 몰락을 더 원했을 것이다. 대공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공국을 유지하기 위해 이슬람 군대와 싸웠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mhistory2.jsp

 

툴루즈는 프랑스의 남서쪽 가론 강 연안, 지중해와 대서양으로부터 비슷한 거리만큼 떨어져있는 도시이다. 미디피레네 레지옹과 오트가론 주의 중심지이다. 2010년 현재 인구 441,802 명으로 프랑스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며, 근교를 포함한 대도시권은 1,218,166 명으로 프랑스에서 5번째이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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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1년 툴루즈 전투 당시의 역사지도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신의 용광로

–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 이종인 역 / 책과함께 / 2010.04.23

 

알-삼은 721년 봄 북부 아랍인과 남부 아랍인으로 보강된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고 이번에는 공성 기계까지 갖추었다. 그것은 강력한 요새 도시들을 함락시키려는 전면적인 지하드였고, 예언자의 종복들을 피레네에서 루아르 강에 이르는 광대한 토지에 식민하려는 계획의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아키텐은 가론 강에서 루아르 강까지 뻗어 있었다. 로마 제국이 다스리던 골 지방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아키텐은 가장 부유한 고장이었고 라틴 문화를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침략군은 나르본에서 툴루즈로 향하는 고대 로마 도로를 타고서 북서쪽으로 진격했다. 갑옷을 입은 아랍 기병과 맨발의 베르베르 보병은 로마 시대의 도로 위에서 가끔 길을 멈추고 하루 다섯 번씩 기도를 올렸다. 그들의 모습은 아키텐 농민이나 귀족이 볼 때 외계에서 온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알-삼의 군대가 툴루즈 성 앞에 나타나자, 툴루즈 시민들은 크게 동요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아키텐의 대공은 끼어 있지 않았다. 오도(외도, 외데스) 대공은 증원군을 모집해오기 위해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갔고 툴루즈 시민들은 대공이 돌아올 때까지 성안에서 버텨냈다.

 

오도는 혈통상 프랑크족이지만 그의 가문은 대대로 아키텐에서 살았기 때문에 라틴화한 켈트족에 거의 동화된 상태였다. 알-삼이 아키텐에 쳐들어왔을 때 대공은 50대 후반의 나이였음에도 신체 강건했고 군사적 지략이 뛰어났다. 몇 년 전 사촌인 프랑크 귀족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을 때 오도는 지는 쪽을 편들었기 때문에,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도움을 청할 데가 없는 형편이었다. 툴루즈 성 포위공격이 3개월이 지나면서 성안에는 식량이 바닥나고 있었다. 오도는 성안 귀족들을 설득하여 무슬림 군대의 후방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동시에 성의 정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수천 명의 창병, 궁수, 창기병이 일제히 정면 공격을 감행하고 나섰다. 무슬림 부대를 전후에서 공격하는 기발한 전략은 총독의 부대에 참패를 안겼다. 아키텐의 중무장 기병 부대는 성벽과 후방에서 압박하는 아군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면서 적의 보병 부대를 마구 무찔렀다. 좁은 땅에 갇혀 있던 시리아인과 베르베르인들은 작전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했다. 무슬림 군대의 절반 이상이 죽었고 그 일대의 평야는 피로 물들었다(대부분의 아랍 사료들은 알 삼의 패배를 ‘순교자의 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알-삼은 전투 중 부상을 입어 사망했고 부사령관이 남은 병력을 간신히 수습하여 포위망을 뚫고 나르본으로 퇴각했다.

오도 대공은 아랍 침략군을 맞아 대등하게 싸우면서 야전에서 승리를 거둔 피레네 동쪽의 최초의 기독교인 통치자였다. 툴루즈 전투는 아랍 연대기에서 잘 언급되지도 않지만 언급된다 해도 각주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지하드의 길에서 부딪힌 가벼운 충돌도 되지 못했다. 안달루스 사람들은 10년의 회복과 준비를 거쳐서 피레네 동쪽으로 다시 나오게 된다. 그때에는 10년 전 툴루즈에서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퇴각했던 아브드 알-라흐만 이븐 아브드 알라 알-가피키가 사령관으로 침략군을 이끌게 된다. 오도의 승리는 역사적으로 서사시적 의미가 부여되는 추후의 전투를 위한 예행연습이었다. 그의 승리는 한번 가속도가 붙으면 멈추는 법이 없는 아랍 침략의 물길을 되돌린 중요한 사건이었다. 무슬림이 다시 정복에 나서자 갈로-로마인들과 프랑크족은 긴급한 사태의 필요에 따라 서로 협조하게 되었다.

……

11년 전인 721년, 오도 대공은 툴루즈에서 기병 부대를 통솔하여 알-삼 총독과 그의 군대에 의외의 대승을 거두었고, 총독에게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혀 전사시켰다. 그리하여 아랍 침략군은 이슬람 세력권인 셉티마니아의 해안 거점(나르본)까지 후퇴해야 했다. 유럽 대륙에서는 이슬람의 첫 패배 이후에 많은 일들이 발생했다. 피핀 왕조의 맹주권은 721년 이후 11년에 걸쳐 결정적으로 굳어졌다. 이 기간 동안에 왕조는 프랑크 왕국의 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민족국가 형성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툴루즈 전투는 서구 기독교 세계를 무슬림의 파도로부터 구출한 사건이었다. 역사적 대결에 뛰어든 기독교 전사들은 이런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도 대공은 그보다는 아우스트라시아의 피핀 왕조와 코르도바 총독들의 몰락을 더 원했을 것이다. 대공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공국을 유지하기 위해 이슬람 군대와 싸웠다.

 


이슬람의 탄생

–  진원숙 / 살림 / 2008.02.20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아랍전사들을 손짓해 부르던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는 일은 이슬람교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이 맡았다. 누사이르의 부장 타리크Al-Tariq는 711년에 주로 베르베르족으로 편성된 7천여 명의 군사와 함께 지브롤터해협-지브롤터는 ‘타리크의 바위’라는 뜻이다-을 건너 타리크산에 상륙했다. 바로 이베리아반도의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서西고트왕국은 왕위계승을 놓고 벌어진 내분에 빠져 있었다. 거기다 서고트족의 지배에 저항하던 이베리아반도의 원주민 켈트족과 종교적 박해에 시달리던 유대인이 타리크와 베르베르 전사들을 환영했다. 타리크는 서고트 최후의 왕 로데리고의 군대를 패퇴시킨 후 북진을 계속해 그라나다, 코르도바, 톨레도 등을 점령했다. 예상밖의 성공에 고무된 북아프리카 총독 누사이르도 대군을 인솔하고 이베리아반도로 건너와 세빌라, 메리나 시도니아, 사라고사를 점령한 다음 칼리시아의 아스투리아스공국을 멸하고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차지했다. 서고트왕국 출신의 일부 호족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공납을 납부한 대신 넓은 영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이슬람의 전사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으로 침공해 들어갔다. 720년에 유럽대륙과 이베리아반도를 갈라놓는 피레네산맥을 넘은 무슬림전사들은 먼저 나르본을 점령했다. 아키테느공公 외드의 저항으로 툴루스는 가론강을 따라 진격해 온 아랍군에 점령되는 것을 면했다.

 


살육과 문명

–  빅터 데이비스 핸슨 / 남경태 역 / 푸른숲 / 2002.09.30

 

이슬람의 가파른 확장은 놀라우리 만큼 눈부셨다. 마호메트가 사망한 지 불과 2년 뒤인 634년에 무슬림군은 페르시아를 정복했다. 636년에는 시리아가 함락되었고 2년 뒤에는 예루살렘도 정복되었다. 641년에는 알렉산드리아마저 무너져 그 서쪽의 서고트족 영토 전체가 이슬람의 눈앞에 들어왔다. 40년 뒤 무슬림은 콘스탄티노플의 성문 앞에 이르렀으며, 673년부터 677년까지 그 도시를 점령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 681년 아랍인들은 대서양에 도달하여 베르베르인의 옛 왕국이 이슬람에 편입되었음을 공식화했다. 카르타고는 698년에 최종적으로 멸망했고 최후의 여왕인 카히나의 머리는 다마스쿠스의 칼리프에게로 보내졌다. 이제 17마일만 더 가면 유럽 땅이었다. 715년 에스파냐의 서고트족이 정복되었으며, 그 뒤부터 남프랑스에 대한 주기적인 약탈이 여러 차례 자행되었다. 718년에 아랍인들은 대거 피레네를 넘어 나르본을 점령한 뒤 모든 성년 남자를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았다. 720년에는 아키텐을 마음대로 습격했다. 에스파냐 무어인의 총독 아브드 알 라흐만이 이끈 732년의 대규모 원정군은 푸아티에를 점령하고 투르를 약탈하기 위해 가던 도중 비외푸아티에의 촌락들과 오를레앙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있는 무셀라바타유 사이 지점에서 샤를 마르텔에게 저지되었다.

……

그러나 기병전의 장점에는 한계가 있었다.우선 기병들은 바다로 수송하기가 어려웠고, 기병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약탈과 넓은 목초지가 필요했으며, 산악지대의 고갯길을 대규모 기병대가 넘기도 쉽지 않았다. 에스파냐와 동유럽의 계곡들은 넓은 초원이나 사막이 아니었으므로 무슬림 기병대가 우회해갈 만한 여건도 되지 못했다. 게다가 중동의 군대는 국민군의 토대를 이룰 만큼 수가 많지 않았고 주로 노예 병사들에 의존했다. 중동의 맘루크Mamluk와 후대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가 모두 그런 경우다. 이슬람의 물결은 일단 서유럽과 비잔티움 제국으로 넘어오자 전진을 멈추었다. 그에 따라 고정적인 방어선이 구축되었고, 서구 문명-에스파냐,발칸,동부 지중해-은 자유민으로 구성된 보병을 바탕으로 서서히 공세로 돌아섰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  앙리 피렌 / 강일휴 역 / 삼천리 / 2010.10.28

지브롤터해협만으로는 정복자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서고트족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694년에 에르기카 왕은 유대인들이 이슬람교도와 공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박해 때문에 이슬람교도가 에스파냐를 정복하기를 바랐을 가능성이 있다. 710년에 톨레도에 있는 아길라 왕이 바이티카의 공작인 로드리고에 의해 폐위되자 모로코로 도망가서 이슬람교도에게 도움을 간청했다. 하여튼 이슬람교도는 이런 상황을 이용했다. 711년에 약 7천 명으로 추산되는 베르베르인 군대가 타리크의 지휘 아래 해협을 건넜다. 첫 교전에서 로드리고가 패했고 모든 도시가 정복자에게 성문을 열었다. 이 정복자는 712년에 두 번째로 파견된 병력으로 증원된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장악했다. 713년에 북아프리카의 총독 무싸는 서고트족 왕국의 수도 톨레도에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칼리프가 이 지역의 통치자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 멈출 리가 있었겠는가? 곧 에스파냐에서 나르본 지방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베리아반도의 정복이 완료되자마자, 720년에 이슬람교도는 나르본을 점령하고 이어서 툴루즈를 포위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프랑크왕국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력한 프랑크 왕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721년에 아키텐의 공작 외드가 이슬람교도를 아키텐에서 격퇴시켰다. 그러나 나르본은 여전히 이슬람교도의 수중에 있었다. 725년이 되자 나르본을 거점으로 한 새롭고 가공할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슬람 전사들은 카르카손을 공략하고 오툉까지 진군해서 이 도시를 725년8월22일에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관련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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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 백과 : Battle of Toulouse (721)

위키 백과 : Battle of Tours

위키 백과 : 툴루즈

https://en.wikipedia.org/wiki/Odo_the_Great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나르본(Narbonne)

툴루즈 전투 (Battle of Toulouse) – 7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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