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우다 – 1616년

17세기 초는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뀌어가던 격동기였다. 격동의 핵심은 명청 교체. 14세기 후반 이래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군림한 명明이 신흥 강국 청淸의 도전에 밀려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 반세기 이상 계속된 명청 교체의 진행 과정 속에서 당사자인 명과 청뿐 아니라 조선, 일본, 몽골 등 인접 국가가 모두 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본래 명의 지배 아래 있던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주변의 여진족을 아우르기 시작한 것은 1583년이다. 명 중심의 책봉 체제 바깥에 있던 일본이 명을 정복하겠다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 1592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한 것이 1616년, 후금이 선전포고를 통해 공식적으로 명에 도전을 선언한 것이 1618년이고, 이후 명과의 대결에서 연전연승하던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제국 성립을 선포한 뒤 곧바로 조선 침략에 나선 것이 1636년이었다. 결국 명이 멸망하고 산해관을 통과한 청이 북경을 접수한 것은 불과 8년 뒤인 1644년이다.

 

명의 쇠락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다. 명이 멸망하고 27년이 지난 뒤에, 강소(江蘇) 무석(無錫) 사람인 계육기計六奇는 그가 저술한 『명계북략(明季北略)』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명조明朝가 천하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① 외부의 강적(여진족의 위협), ② 내부의 농민반란, ③ 자연재해의 유행, ④ 정부의 무능력이다. 이들 요인 중에서 계육기는 재해와 농민반란의 상호관계를 특히 강조했다.

『하버드 중국사 원.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명의 쇠락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1572년 황위에 올라 1620년에 사망한 만력제(신종)의 통치 시대로 돌아가 보자.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 달리, 명의 쇠락이 만력제의 결함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만력 연간에 발생한 두 차례의 환경 위기가 그러한 큰 그림에 해당한다.

1586~1588년에 발생한 첫 번째 ‘만력의 늪’은 정권 자체를 마비시켰다. 그 늪은 사회 재난의 새로운 기준이 될 정도로 엄청난 환경 차원의 ‘붕괴’였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이 재난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는 1580년대 초반부터 장거정이 시행했던 국가재정에 관한 개혁 덕분이었다. …… 그리하여 장거정이 1582년 사망할 때 국고에는 은이 넘쳐났다. 이렇게 보유한 자금 덕분에 만력제의 조정은 1587년 폭풍처럼 밀어닥친 자연재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

……

20년이 지난 1615년, 두 번째 ‘만력의 늪’이 발생했다. 이번 늪이 있기 2년 전부터 북부 중국 전역에서 홍수가 지속되었고, 2년째 되던 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추워졌다. …… 1616년 후반기에 기근은 북부중국에서 양쯔강 유역으로 파급되었고, 이어서 광동성을 덮쳤다. 최악의 사태는 1618년 이전에 종결되었지만, 이후에도 만력제의 마지막 2년 동안 가뭄과 메뚜기 떼의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

만력 연간의 기근으로 고통 받은 이들은 명나라 뿐만이 아니었다. 이 시기 북부 중국을 강타한 가뭄은 요동으로도 확산되었다. 요동은 이후에 만주로 알려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 부분에 해당한다. 바로 이곳에서 여진족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여진족과 몽골족 사이에 전례없이 폭넓은 동맹관계를 형성해냈고, 이 동맹은 1636년 마침내 ‘만주’라는 새로운 민족의 칭호를 탄생시켰다.

※ 17세기 위기 – 소빙하기(소빙기) 절정 : http://yellow.kr/blog/?p=939

 

1592년 일본의 조선 침공은 명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침공은 몽골의 위협이라는 그늘에 숨어 세력을 키워 온 만주 건주위가 드러내 놓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동아시아는 더 이상 명나라와 몽골이 아니라 만주와 일본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으로 바뀌어 갔다. 조선은 1592년부터 1636년까지 40년 남짓의 기간 동안 일본에 얻어맞고 명에 시달리고 청에 차이는 최악의 시간을 겪어야만 했다.

 

누르하치가 태어났을 무렵의 여진 부족은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해서여진(海西女眞) 4부, 명과 조선의 영향이 강한 압록강 북쪽의 건주여진(建洲女眞) 5부, 그리고 두만강 북쪽의 야인여진(野人女眞) 4부 등 13개 세력으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즉, 임진왜란 이전의 만주 지역은 마키아벨리의 이탈리아처럼 내부 세력이 상호 적대하고 프랑스 · 스페인 등의 강력한 외부 세력이 이러한 적대를 조장하는 상황이었다. 건주여진 5부족은 누르하치가 1583년에 군대를 일으켜 1589년 정월까지 모든 부를 굴복시키고 통합하였다.

 

누르하치의 굴기는 임진왜란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한다. 요동 지역에 있던 명군 대부분이 조선으로 출전하면서 생긴 명의 통제력 약화와 1593년 해서여진을 중심으로 한 9부 연합군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누르하치는 사실상 만주 지역의 패자로 떠올랐다.

잇따른 승전을 통해 인구와 영토가 늘어나고 자신감이 커지면서 누르하치는 내부 정비에 눈을 돌렸다. 1599년 만주 문자를 창제하고, 1603년에는 허투아라에 흥경노성興京老城이라는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다. 1615년에는 팔기제八旗制를 정비했다. 누르하치는 이어 1616년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칭해 독립 국가의 지향을 드러냈다.

※ 이 무렵 여진은 만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만주(manju 滿州)의 어원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지만 문수보살文殊菩薩(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의 산스크리트어 표기인 मञ्जुश्री (Mañjuśrī, 만주슈리)의 음사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1

– 1616년 당시의 중국판 역사지도

 

당시의 세계사 연표는 :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mhistory4.jsp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중국 – 외교관의 눈으로 보다

–  백범흠 / 늘품플러스 / 2010.04.19

 

일본의 조선 침공은 명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침공은 몽골의 위협이라는 그늘에 숨어 세력을 키워 온 만주 건주위가 드러내 놓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동아시아는 더 이상 명나라와 몽골이 아니라 만주와 일본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으로 바뀌어 갔다.

 

명나라는 몽골의 만주 침공을 막기 위해 요동 이동에 살던 건주위建州衛의 여진족을 강화시키려 했다. 명나라는 요서와 요동 등 만주의 일부지역만 직접 통치하고, 여타 대부분의 지역은 자치상태로 버려두었다. 당시 여진족은 ◇초기 고구려의 중심을 이루던 길림성의 건주여진, ◇부여의 고토故土이던 창춘-하얼빈 지역의 해서여진과 ◇수렵과 어로를 위주로 생활하는 흑룡강 유역의 야인여진으로 3분되어 있었다. 건주여진은 명나라 및 조선과 가까이에 있어 비교적 발달된 문화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생계수단인 수렵과 채취뿐만 아니라 농업에도 종사하고 있었다. 해서여진은 예헤부, 하다부, 호이화부, 우라부 등 4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모두 금나라의 후손을 자처했다.

 

예헤부와 하다부가 해서여진의 패권을 놓고 싸웠다. 거란의 후예로 판단되는 예헤부는 몽골에서 이주해온 부족으로 반명의식反明意識이 매우 높았다. 명나라는 하다부를 지원하여 예헤부를 통제하려고 했다. 하다부는 명나라의 지배에 반대하여 봉기한 건주여진 출신 왕고王杲가 도망쳐 오자, 그를 명나라로 넘겨주는 등 철저한 친명親明으로 일관했다. 명나라는 몽골을 의식하여 만주의 여러 부족들을 지원했으나, 그들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몽골의 동진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힘만 갖기를 바랐던 것이다.

……

누르하치의 세력이 통제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커지게 되자 명나라는 누르하치와의 교역을 정지하는 한편, 해서여진 예헤부를 지원하여 누르하치에 맞서게 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압력에 맞서 독립의 자세를 취해 나갔다. 그는 자기 가족을 포함한 만주족에 대한 명나라의 탄압사례를 일일이 열거한 <칠대한七大恨>을 발표하여, 명나라의 탄압에 무력으로 맞설 것임을 공언했다. 그는 새로 통합한 해서여진 하다부의 땅을 집중 개간하는 등 자립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누르하치는 1616년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하고, 수도를 길림성 흥경興京에 두는 한편, 푸순撫順을 공격하여 명나라군 유격(대령) 이영방의 항복을 받아 내었다. 그리고 추격해 온 광녕총병廣寧總兵 장승음의 1만 대군을 대파하였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  한명기 / 서울신문 / 2011~2012

 

女眞은 上古 시기 숙신(肅愼), 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던 퉁구스 계통의 소수민족이다. 그들의 발상지이자 활동무대는 우리가 보통 만주(滿洲)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中國 동북지방이었다. 滿州란 과연 어떤 곳인가? 많은 韓國人들은 滿州 하면 먼저 高句麗를 떠올린다. 동시에 그곳은 독립운동가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말을 달리던 벌판이기도 하다.

……

이후 19세기까지 滿州에서는 거란(契丹), 여진(女眞), 몽골, 한족(漢族), 그리고 다시 女眞族의 순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滿州를 놓고 일본(日本)과 러시아가 치열한 다툼을 벌였고,1945년 이후에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격전이 벌어진 뒤, 滿州는 中國 땅이 되었다.

 

滿州에서 일어나 대제국 淸을 세운 女眞族은 오늘날의 中國에 커다란 선물을 남겨 주었다. 淸나라가 차지했던 광대한 땅이 고스란히 오늘날 中國의 영토로 계승된 것이다. 明나라 시절, 漢族 지식인들은 女眞族을 야만인이자 ‘금수(禽獸)’라고 멸시했다. 하지만 淸은 1644년 明을 접수한 이래 영토를 확장하여 신장(新疆), 티베트, 내몽골 지역을 자신들의 판도 속으로 집어넣었다. 淸나라의 지배 아래서 中國의 영토는 과거 明나라 시절보다 거의 40% 가까이 불어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1644년 베이징을 접수할 무렵, 女眞族의 인구는 대략 50만, 漢族의 인구는 1억 50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었다. 이후 女眞族은 자신들보다 300배 가까이 많은 한족들을 300년 가까이 지배한다. 좀처럼 믿기 어려운 사실이자, 동시에 女眞族과 淸朝 지배층의 정치적 역량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

1368년 中原에는 다시 漢族 왕조 명(明)이 들어섰다. 중원을 지배했던 몽골족의 원(元)나라는 베이징을 버리고, 北으로 도주하여 고비사막 방면까지 쫓겨갔다. 明은 다시 滿州 쪽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女眞族들을 통제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한다.

1279년 남송 멸망 이후 거의 백년 만에 중원을 되찾아 한족들의 자존심을 회복한 明의 女眞정책은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女眞族을 통제하되 그들을 너무 강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게 ‘섬세하게’ 길들이는 것이었다. 明은 흩어져 있는 女眞族들 사이에서 과거 아구다와 같은 패자(覇者)가 출현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렇게 되면, 女眞族이 다시 커다란 세력으로 뭉치게 될 것이고 宋나라가 겪었던 ‘끔찍한 경험’을 되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女眞族들을 뿔뿔이 흩어진 상태로 방치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明은 북으로 도망간 몽골의 원나라(보통 北元이라 부름)를 女眞族을 이용하여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明은 몽골을 견제하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을 고려한 셈이다. 그러려면 女眞族이 어느 정도까지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한마디로 明의 女眞정책은 일종의 ‘딜레마’였다.

明은 고심 끝에 14세기 후반부터 滿州의 女眞族들을 분할지배 방식으로 통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明은 랴오허(遼河)를 기준으로 서쪽, 즉 오늘날 랴오닝성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요동도사(遼東都司)라는 기구를 설치, 지역의 한족들을 직접 통치했다. 그리고 요동도사가 관할하는 산하이관(山海關) 부근부터 관전(寬奠)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변장(邊牆)이라 불리는 담을 쌓았다. 女眞族들은 이 담을 넘어 서쪽으로 올 수 없었다.

랴오허 동쪽, 오늘날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에는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라는 기구를 두어 女眞族을 통치했다. 그 아래에는 위소(衛所)라는 기관을 두어 女眞族 출신을 우두머리로 임명하고 자치를 허용했다. 하지만 위소의 우두머리를 임명할 때나, 女眞族 내부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에는 明의 지휘부가 개입했다. 女眞族의 자치를 허용하되, 女眞族 유력자들을 명의 행정체계에 포섭하여 통제하는 전형적인 ‘분할통치(divide and rule)’였다.

 

건국 직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明의 女眞정책은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 기간 동안은 명 내부의 정치가 그런대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만력제(萬曆帝)의 정치적 태만과 무능, 그에 더하여 壬辰倭亂과 같은 明 외부의 격변까지 맞물리면서 女眞정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침 이 무렵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던 누르하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1608년 8월, 조선 조야(朝野)는 ‘누르하치가 배를 만들어 장차 조선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에 긴장했다.1610년(광해군 2) 1월에는 허투알라 지역에 ‘조선이 명과 연합하여 건주여진을 토벌할 것’이며,‘이미 조선의 병마(兵馬)가 압록강변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

광해군이 건주여진을 조선에 비해 ‘열등한 존재’ ‘오랑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의 다른 지식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누르하치와 여진족을 가리켜 ‘노추(老酋)’ ‘견양(犬羊)’ 등 멸칭(蔑稱)으로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누르하치에 대한 정책은 유연했다.

‘무식하고 사나운 오랑캐에게 인륜과 이치를 내세워 사사건건 따져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그들을 자극하여 쓸 데 없는 화란을 부르지 말고, 적당히 경제적 욕구를 채워주면서 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

광해군은 누르하치와 관계를 유지하되 모험을 피하려 했다. 또 명과 누르하치 사이의 갈등 속으로 말려드는 것도 있는 힘을 다해 회피하려 시도했다.

임진왜란을 통해 처참한 상처를 입은데다 그 후유증이 채 치유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전란을 만날 경우 망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재위 중반까지만 해도 그같은 노력과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명과 누르하치의 관계가 아직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았던데다, 광해군 자신이 정치판을 그런대로 잘 이끌었기 때문이다.

……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통해 누르하치를 다독이는 한편, 광해군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군사적 대비책 마련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조총, 화포 등 신무기를 개발,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누르하치의 기마대는 철기(鐵騎)라 불릴 정도로 기동력에서 발군이었다. 그 ‘강철 같은 기마대’를 평원에서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성에 들어가 화포를 써서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은 당시의 상식이었다.

광해군은 1613년(광해군 5), 화기도감(火器都監)을 확대개편해 각종 화포를 주조하는 한편, 화약원료인 염초(焰硝) 확보에도 각별히 노력했다.

무기 확보를 위한 광해군의 노력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그의 일본에 대한 태도였다.

그는 일본으로 떠나는 통신사 편에 조총과 장검 등을 구입해 올 것을 지시했다. 일본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歲不共之讐)’로 여기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도 일본산 무기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1609년(광해군 1), 주변의 반발을 물리치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누르하치 때문에 서북변(西北邊)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언제까지 일본과 냉랭한 관계를 고집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대외관계에 관한 한 분명한 현실주의자였다.

광해군은 병력을 확보하고 뛰어난 지휘관을 기용하는 데도 노력했다. 병력 확보를 위한 근본대책으로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려 했고, 수시로 무과(武科)를 열었다.

1622년(광해군 14) 이후로는 모든 무과 합격자들을 변방으로 배치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향리에 은거하고 있던 곽재우(郭再祐)를 불러 올려 북병사(北兵使)에 제수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침략으로 도성이 함락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그곳을 ‘최후의 보루’로 여겨 수시로 보수하고 군량을 비축했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  진순신 / 전선영 역 / 살림 / 2011.07.29

 

이성량의 주선으로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좌도독, 용호장군의 칭호를 받았다. 칭호뿐만 아니라 은 800냥이라는 세폐도 받았다. 명나라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건주 5부(部)는 소극소호(蘇克素護), 혼하(渾河), 완안(完顔), 동악(棟鄂), 철진(哲陳)인데, 누르하치는 만력 11년(1583)에 군대를 일으켜 만력 17년(1589) 정월까지 모든 부를 굴복시켰다.

이렇게 해서 누르하치는 드디어 북쪽의 해서여진(海西女眞)과 대결했다. 누르하치는 무순, 청하(淸河), 관전(寬甸), 애양(靉陽) 등 네 곳의 관(關)에서 명나라와 활발하게 통상하여 더욱 국력의 내실을 기했다. 한편 해서여진 각 부는 하다부와 예혜부와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때까지 흑룡강 유역에서 나는 진주와 모피는 해서여진이 지배하는 개성(開城)을 경유하여 운반되었다. 그런데 전란 때문에 개성이 폐쇄나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어버렸다.

교역로가 폐쇄되었다 할지라도 상품 유통의 길을 막을 수는 없다. 개성을 경유하지 못한다면 남쪽의 길이 있었다. 누르하치의 통일로 건주는 평온했으므로, 그때까지 개성을 경유하여 해서여진을 윤택하게 했던 모피, 진주, 인삼 등이 건주를 경유하게 되어, 누르하치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누르하치도 적극적으로 이들 상품을 사들였다. 건주에는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누르하치가 교역으로 얻은 이익은 한 해에 수만 냥에 달했다. 만력 19년(1591)에는 압록강로(鴨綠江路)를 손에 넣었다. 영토를 넓힘으로 해서 백성을 늘림과 동시에 조선과도 교역의 길을 튼 것이다.

……

공포감을 느낀 해서여진족은 변경의 각 집단에게도 호소하여 누르하치가 ‘만주’라고 칭한 괴물을 쳐부수려 했다. 그들이 이전까지 얻고 있던 교역의 이(利)도 어느 틈엔가 만주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개성을 다시 교역지로 삼으려 하면, 만주는 온갖 책략을 사용해서 그것을 저지했다. 이런 녀석을 멋대로 날뛰게 내버려 두었다가는 우리가 당장 굶어죽을 것이라는 격문을 띄웠다.

이렇게 해서 9부의 병사가 모여 만주의 팽창을 저지하기로 했다. 그 가운데 해서 4부가 포함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석백부도 반만주(反滿洲)의 일익을 담당했다. 이 이른바 9부 연합은 만력 21년(1593)의 일이었다. 누르하치는 9부 3만의 무리를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연합군에 가담했던 장백산(長白山)의 주사리부(珠舍哩部, 주셔리)와 눌은부(訥殷部, 너연)로 원정하여 그 영토를 모두 합병해 버렸다.

……

조그만 소란이 자꾸만 일어나자, 넌덜머리가 난 명나라는 요동을 조용히 만들기 위해서 영향력이 있는 세력을 양성하려 했다. 그러나 그 세력은 영향력이 너무 강해서는 안 된다. 명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강성해서는 곤란하다. 이성량은 고삐를 쥐고 적당히 조절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와 함께하는 장사가 번창했기 때문에 고삐를 죄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

이성량을 해임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후임자를 얻지 못했다. 이성량은 떠났지만 요동의 군대에는 그의 숨결이 남아 있어서 후임자는 일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만주 제국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누르하치는 충분히 힘을 길렀기 때문에 이성량의 후임자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었다. 이성량 해임 후 10년 동안 요동의 군사 책임자는 차례차례로 교체되어 8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9부 연합군을 격파한 뒤에도 누르하치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해서 4부는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지만, 만주의 힘이 약해지면 화약(和約)이 깨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누르하치는 만주 정권의 힘을 더욱 기르기에 노력했다.

……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일본군이 철병한 이듬해(1599), 해서의 하다부는 결국 만주에 항복했다. 하다부는 예헤부의 사주를 받아 화약을 깨고 만주를 공격했다. 만주는 그것을 격파해 버렸다.

명나라는 이에 대해서 누르하치를 힐문하기 위해 사자를 보냈다. 이웃나라를 함부로 공략한 것을 나무란 것인데, 드디어 누르하치의 만주라는 존재에 공포심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런데 하다부의 어려운 처지에 편승하여 예헤부가 침공을 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해 예헤부를 힐문하라고 요구했지만, 명나라는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명나라는 너무나도 강대해진 누르하치 만주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예헤부를 대항시키는 작전을 취했다. 몽골계인 예헤부는 원래부터 명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누르하치에 대항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용맹한 예헤부밖에 없었다. 똑같이 하다부를 공격했지만, 명나라는 예헤부를 질책하려 들지 않았다.

그 무렵, 하다부는 기근 때문에 명나라에 식량의 긴급 수송을 요청했지만, 명나라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하다부는 누르하치에게 전면 항복을 하기로 했다.

이상은 만주 쪽 자료에 의한 해서여진 하다부의 멸망 과정이다.

이로 인해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누르하치와 명나라와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하다부에 이어 후이파부가 멸망했다. 만력 35년(1607)의 일이었다. 일본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정권의 귀추가 분명해진 시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江戶)에서 슨푸(駿府) 성으로 옮긴 해에 해당한다. 그러나 건주를 통일하고 해서 4부 가운데 2부까지 병합한 누르하치 정권이 머지않아 중국 전토를 지배하게 될 줄을 이 시점에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누르하치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라부가 멸망한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인 만력 41년(1613)의 일이었다. 해서여진 4부의 명칭은 모두 지명에 따른 것이고, 성(姓)은 나라(那拉) 씨 였다고 한다. 우라부는 하다부나 예헤부에 비해서 약했지만, 나라 씨의 정통 계보였다. 누르하치의 친정으로, 우라부의 수장인 푸첸타이(布占泰)는 100명도 되지 않는 패잔병들을 데리고 예헤부로 달아났다.

해서 4부 가운데서 남은 것은 예헤부뿐이었다. 예헤부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명나라는 유격(遊擊, 무관의 관직명)인 마시남(馬時楠), 주대기(周大岐) 등에게 화기를 능숙하게 다루도록 훈련된 병사 1천을 주어 구원군으로 보냈다. 원군을 요청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명나라는 지나치게 강해진 만주를 그 이상 방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르하치는 우라부 공격의 여세를 몰아 예헤부로 향했는데, 7성 19새(塞)를 함락하고 일단 물러났다.

만력 44년(1616) 정월, 누르하치는 가한(칸)의 자리에 올랐다. 예헤부의 토멸과 명나라와의 대결은 즉위 후의 문제로 남았다.

……

신흥 누르하치에게 있어서 샤르허의 전투는 실로 커다란 수확을 가져다 주었다. 이 세력의 가장 커다란 고민이 인구 부족에 있었다는 사실은 몇 번이고 이야기했는데, 이 전승으로 말미암아, 예를 들자면 유정 휘하에 있던 조선군이 전원 투항해 왔다. 그만큼 인구가 늘어난 셈이다.

또한 이 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누르하치는 개원과 철령을 탈취했다. 영토를 넓힘과 동시에 그 지역의 주민들까지 손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동족 가운데서 마지막까지 대적했던 예헤부를 이 기회에 평정할 수 있었다.

샤르허의 전투는 명의 만력 47년(1619), 금의 천명 4년 3월의 일이었는데, 예헤부가 평정된 것은 같은 해 8월의 일이었다.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  정두희 / 휴머니스트 / 2007.11.27

 

명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는 1580년대에 이르러 누르하치가 건주여진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583년에 건주자위(建州左衛)의 실권자로 등장한 이후 누르하치는 여러 차례 군사 행동을 통하여 건주위에 소속된 여러 부족을 흡수하였으며, 1589년에는 건주 3위와 그 주변을 모두 아우르고 실제로 건주위통일을 이룩함으로써 명실 공히 만주의 실력자로 떠올랐다.

……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누르하치의 군사적 팽창이 1589년 이후에 멈추어, 임진왜란 기간(1592~1598) 내내 재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589년에 팽창이 일단 멈춘 이유는 건주여진의 통일이 이때 완결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에 누르하치가 왕을 칭한 사실도 건주여진 통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4년 뒤인 1593년에 반(反) 누르하치 동맹을 체결하고 침입한 해서여진(海西女眞)과 몽골의 연합군을 대파하는 큰 전투를 치르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방어 차원의 불가피한 전투였을 뿐이다. 이 전투는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의 테두리를 벗어나 국제무대에서 치른 첫 전투로, 여기서 승리함으로써 누르하치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졌지만, 이 전투는 선제공격에 의한 전투는 아니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누르하치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적극적인 정복사업에 나서지 않고, 이후 몇 년간 여전히 군사 행동을 자제하였다는 점이다. …… 1593년의 승리 이후 1598년까지 약 5년 동안 누르하치가 수행한 전투는 1595년에 휘발(揮發, 후이파)의 한 성채를 공취한 것과 1598년에 동해여진(東海女眞)의 소규모 부락 두어 개를 복속한 것이 전부였으며, 이들 군사작전은 모두 1천 명 정도의 군대로 가능한, 매우 소규모 작전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휴지기’가 끝난 1599년부터 누르하치는 다시 적극적인 정복사업에 나서 1613년까지 거의 쉴 틈없이 합달(哈達, 하다), 휘발, 오랍(烏拉, 우라), 두만강 유역 동해여진의 여러 부족들, 흑룡강 일대 여러 부족들을 연이어 병합하는 등 엽혁(葉赫, 예허)을 제외한 모든 여진 부족을 통일함으로써, 만주 전역에 걸쳐 최고 실력자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

누르하치가 흥기하기 이전 시기 명의 대 여진 정책에 대해서는 이미 다양한 이들의 연구가 있었고,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시작된 명의 쇠락이 왜란을 거치면서 심화되었다는 해석도 있지만, 명의 건주여진 견제 정책이 왜란으로 인해 어떻게 제대로 기능할 수 없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아직 별로 제시된 바 없다. 오히려 최근에는 1570년부터 1610년 사이에 명의 군사력이 재정비되면서 증강되었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조선의 대 여진 정책도, 주지하듯이, 1467년 조 · 명 연합군의 건주위 정벌을 계기로 조선과 건주여진 사이에는 관계가 끊겼고, 이런 상황은 왜란 발발 당시까지 이미 125년 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16세기 조선의 대 여진 정책이라는 것은 주로 두만강 유역의 동해여진과 번호(藩胡)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지, 건주여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따라서 왜란을 계기로 명과 조선의 건주여진 견제가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는 식의 가설은 강한 설득력이 있음에도 물증의 뒷받침이 거의 없다는 결함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한 · 중 · 일 동아 삼국의 군사력이 한반도에 집결되었던 상황이 과연 누르하치에게 군사 팽창의 ‘호기’를 제공하였는지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당시 세계 최고 전력이었다는 일본군 15만, 그런 일본군을 맞아 싸운 조선군의 우수한 화력(화포 및 함포), 동아시아 최고 강대국인 명의 5만 여 군사 등 줄잡아 20만이 훨씬 넘는 군사력이 한반도에, 다른 말로 건주여진의 남쪽에 집결한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과연 그것을 군사 팽창의 호기로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위기감을 느꼈을까? 조선으로 이동하기 위해 랴오둥을 통과하는 명의 대군을 보며, 누르하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까, 아니면 불안을 느꼈을까?

누르하치는 위기와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북쪽에는 해서여진 세력이 아직 건재하고, 서쪽에서는 명군(明軍)이 쏟아져 나오고, 남쪽에는 일본군이 몰려와 있는 상황은 누르하치에게도 비상 국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섣부른 군사 행동을 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해서여진과의 싸움에 전력을 쏟을 상황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누르하치는 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상황에 직면하여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왜란 기간 중에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보이지 않은 까닭은 바로 이러한 국면과 깊이 관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신중한 태도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섣부른 군사 행동을 자제하고 상황을 지켜보며 외교적 방법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는 것이다. 이 기간에 누르하치의 주 관심사는 전쟁이 아니라 외교였다. 왜란이 벌어진 동안에 누르하치는 몽골의 여러 부족 및 해서여진 부족들과 연이어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우선 북쪽 배후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명과의 우호 증진을 꾀하여 조공 사신을 정기적으로 파견하였으며, 1595년에는 용호장군(龍虎將軍)을 제수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방법으로써 외교에 의존하였던 것이다.

……

명과 조선을 차별화한 누르하치의 차등외교는 1607년 무렵까지 그 기조가 유지되었다. 누르하치는 2년 정도 조공을 하지 않다가 1608년에 약8백 명의 조공 사신단을 베이징에 파견하였는데, 그들은 베이징에서 황제가 하사한 은의 양이 적다고 대놓고 불평할 정도로 ‘오만한’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마침 베이징에서 이 상황을 목도한 조선 사신은 서울에 돌아온 후 그들이 중국 조정을 모욕하고 깔보았다고 보고하였다. 이 점은 누르하치가 1608년에 이미 명질서에서 벗어날 준비를 완료하였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그는 이후로 다시 조공하지 않았으며, 1616년에는 후금 건국을 공식 선포함으로써 명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  김시덕 / 메디치미디어/ 2015.04.05

 

12 – 13세기에 금(金)나라를 세웠다가 몽골인에 의해 멸망당한 뒤로, 이 지역의 여진인은 몽골 · 조선 · 명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16세기 당시 여진인은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해서여진(海西女眞) 4부, 명과 조선의 영향이 강한 압록강 북쪽의 건주여진(建洲女眞) 5부, 그리고 두만강 북쪽의 야인여진(野人女眞) 4부 등 13개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동질감이 약하여 서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몽골 · 조선 · 명 등의 주변 세력이 이러한 대립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즉, 임진왜란 이전의 만주 지역은 마키아벨리의 이탈리아처럼 내부 세력이 상호 적대하고 프랑스 · 스페인 등의 강력한 외부 세력이 이러한 적대를 조장하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도 비슷한 상황에서 통일 전쟁을 수행했지만, 그가 맞서야 했던 외부 세력은 유럽 이베리아반도에서 온 예수회뿐이었다. 누르하치는 예수회 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만주에 강력하게 개입하는 몽골 · 조선 · 명 등의 외부 세력과도 맞서야 했기에 노부나가보다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여진인의 전국시대는 몽골 · 조선 · 명 등이 이 지역에 계속 개입하는 한 이어질 터였다. 그러나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빠른 속도로 여진 집단을 합병해나갔고,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의 관심이 유라시아의 해양 세력인 일본으로 가 있는 사이에 그 과정을 거의 완성했다. 말하자면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끝낸 뒤 통일 일본 세력이 한반도를 공격하고, 그 파장으로 만주 지역의 전국시대가 끝나는 연쇄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

『만주실록』권3을 보면, 임진왜란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에 누르하치가 금과 은을 채굴하고 철의 제련을 시작함과 동시에 몽골 문자를 변형하여 만주 문자를 제정함으로써 여진인의 언어생활에 혁신을 가져오고 여진인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칭송한다.

……

…… 어쨌든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훗날 청나라를 세우는 여진인은 누르하치의 가장 큰 업적을 얘기할 때 문자를 제정하여 ‘만주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고, 홍삼 제조법과 광산을 개발함으로써 여진 세계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한 것을 으뜸으로 꼽는다.

……

1580년대에 여진 통일 전쟁을 시작한 누르하치에게 임진왜란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러나 상호 적대적이던 다른 여진 집단은 누르하치에게 정복되기보다는 몽골이나 명나라와 같은 외부의 힘을 빌려 누르하치를 꺾고자 했다. 한반도에서 조선 · 명 연합군과 일본국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던 1593년에, 몽골과의 연계가 강한 해서여진 세력은 코르친(Khorchin) 등의 몽골 세력과 연합하여 누르하치를 공격했다. 일본을 통일하고자 한 오다 노부나가의 기세를 꺾기 위해, 상호 적대하던 세력이 연합하여 노부나가 포위망을 펼친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이 전투에서 승리했고, 건주여진에 이어 여허(葉赫) 집단을 제외한 모든 해서여진도 합병한 뒤에 1603년에 허투알라(興京老城)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제까지 여진을 낮게 평가하던 몽골인 가운데 일부 세력이 이때부터 누르하치와의 연합을 모색하기에 이르렀고, 1593년의 전쟁에서 누르하치에게 졌던 코르친을 포함한 칼카(Kalka) 몽골 세력이 1606년에 그에게 ‘공경스러운 한(쿤둘런 한)’이라는 존호를 바쳤다. 금나라 멸망 이래로 이 지역에 존재한 몽골과 여진의 관계가 처음으로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1598년에 사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 1614~1615년의 오사카 전투를 거치며 일본의 지배자가 됐다. 도쿠가와막부는 히데요시가 무너뜨린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하고자 간청과 협박을 섞어서 조선을 설득했는데, 협박 가운데에는 다시 조선을 공격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일본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여념이 없었으며, 만주의 상황을 우려했지만 개입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명나라도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이 현실화되자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 따라 해서여진의 잔존세력인 여허를 지원하여 누르하치를 견제했다. 누르하치는 시종 명나라에 저자세를 취해왔으나, 이제 명나라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616년에 여허를 제외한 모든 여진 세력의 유력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금국(後金國) 건국을 선포하고 ‘여러 나라를 기르실 밝은 한’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7세기 대동의 길

–  한명기,문중양 등 / 민음사 / 2014.06.27

 

요컨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에도 조선이 처한 ‘복배수적腹背受敵’의 상황은 재현되었다. 복배수적이란 정면과 배후에 모두 적을 두고 있는 조선의 엄혹한 지정학적 현실을 지칭하는 용어다. 말하자면 남왜南倭가 물러갈 기미를 보이자 이번에는 북로北虜가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1606년 선조가 명에 보낸 주문奏文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신은 성상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곡진히 입었습니다. 신이 늘 감격해 보답하려 하지만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남방의 근심이 그치지 않았는데 북방의 경보는 더 다급해졌습니다. 비록 마음을 다해 막으려 하지만 기세가 나뉘고 힘이 약한지라 잿더미 가운데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천지 부모에게 호소하지 않고는 근심을 나라 밖으로 떨쳐 내는 것이 진실로 어렵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채 10년이 되지 않은 시점,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의 위협이 확연히 커져 가는 상황에 대해 조선이 느끼고 있던 위기의식이 생생하다. 위의 기사는 명의 도움을 받아 누르하치의 위협을 견제하려는 조선의 의도를 품고 있는 내용이다. 그와 동시에 당시 조선이 맞닥뜨리고 있던 복배수적의 상황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기도 하다.

……

명은 여진을 어르고 달래면서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나는 여진 부족들을 통제해 아구다와 같은 패자가 다시 등장하는 상황을 막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여진족을 활용해 북방의 강적 몽골을 견제하는 것이다. 그 같은 목적을 달성하려면 여진족을 ‘너무 강하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명은 요동도지휘사사와 누르간도사를 통해 여진 부족들을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동시에 생필품 교역을 통제해 경제적으로도 그들을 장악하려 했다. 당시 여진족은 만주 각지의 교역장에서 인삼, 모피, 진주 등 특산물을 가지고 명 상인과 생필품을 교역했다. 그런데 이 교역에는 명 황제 명의의 칙서를 소지한 여진 부족만 참여할 수 있었다. 칙서가 없거나 그것을 박탈당한 부족은 교역할 수 없었다.

여진족을 지배하려는 명의 정책은 16세기 후반까지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효력을 발휘했다. 만력 연간(1573~1619) 여진족을 통제하는 데 중심 역활을 한 인물은 이여송의 부친인 이성량이었다. 이성량은 전후 30년 동안 요동총병 등으로 재임하면서 여진 세력을 복속시키는 데 수완을 발휘했다. 당시 건주좌위 소속이던 누르하치 집안은 이성량과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과 여진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한창 굴기하던 누르하치의 영향력이 조선에 복속한 여진족을 향해 밀려왔기 때문이다. 1591년 무렵 조선의 국경 지역까지 세력을 뻗쳐 조선에 복속한 여진족을 흡수한 누르하치는 일본군의 북상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선 조정이 의주로 피란해 있던 1592년 9월, 명의 병부는 요동도사를 통해 ‘누르하치가 왜란으로 곤경에 처한 조선을 돕기 위해 수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겠다’고 제의한 사실을 조선에 전했다. 조선 조정은 누르하치의 제의를 놓고 고민하다가 이를 거절했다. 유성룡 등은 당唐이 안녹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회흘(回紇,위구르)과 토번(吐蕃,티베트) 등에게 청원했다가 화를 입은 고사를 들어 누르하치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데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이 같은 파병 제의를 통해 누르하치의 강성함을 인지하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1595년에도 조선인을 쇄환하겠다면서 통교를 제의했다. 조선은 누르하치의 동향을 명에 통보하는 한편, 이후 누르하치 집단과 사달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선조는 1595년 신충일을 명군 장수와 함께 허투아라에 파견해 그들의 동태를 탐지했다. 당시 신충일이 남긴 견문 보고서가 유명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이다. 선조는 또 변방의 관리들에게 삼을 캐러 국경을 넘어오는 여진인을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그들의 월경으로 마찰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건주여진 측에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명군 지휘관들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이미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세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는 누르하치 세력과 충돌하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이었다.

 


하버드 중국사 원.명

–  티모시 브룩 / 조영헌 역 / 너머북스 / 2014.10.30

 

명의 쇠락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1572년 황위에 올라 1620년에 사망한 만력제(신종)의 통치 시대로 돌아가 보자.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 달리, 명의 쇠락이 만력제의 결함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만력 연간에 발생한 두 차례의 환경 위기가 그러한 큰 그림에 해당한다.

1586~1588년에 발생한 첫 번째 ‘만력의 늪’은 정권 자체를 마비시켰다. 그 늪은 사회 재난의 새로운 기준이 될 정도로 엄청난 환경 차원의 ‘붕괴’였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이 재난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는 1580년대 초반부터 장거정이 시행했던 국가재정에 관한 개혁 덕분이었다. …… 그리하여 장거정이 1582년 사망할 때 국고에는 은이 넘쳐났다. 이렇게 보유한 자금 덕분에 만력제의 조정은 1587년 폭풍처럼 밀어닥친 자연재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

……

20년이 지난 1615년, 두 번째 ‘만력의 늪’이 발생했다. 이번 늪이 있기 2년 전부터 북부 중국 전역에서 홍수가 지속되었고, 2년째 되던 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추워졌다. …… 1616년 후반기에 기근은 북부중국에서 양쯔강 유역으로 파급되었고, 이어서 광동성을 덮쳤다. 최악의 사태는 1618년 이전에 종결되었지만, 이후에도 만력제의 마지막 2년 동안 가뭄과 메뚜기 떼의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

만력 연간의 기근으로 고통 받은 이들은 명나라 뿐만이 아니었다. 이 시기 북부 중국을 강타한 가뭄은 요동으로도 확산되었다. 요동은 이후에 만주로 알려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 부분에 해당한다. 바로 이곳에서 여진족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여진족과 몽골족 사이에 전례없이 폭넓은 동맹관계를 형성해냈고, 이 동맹은 1636년 마침내 ‘만주’라는 새로운 민족의 칭호를 탄생시켰다.

……

원-명을 통털어 숭정제만큼 심각하게 비정상적인 기후를 만났던 황제는 없었다. 통치 첫 해에는 심각한 상황이 제국의 서북쪽에 몰려 있었다. 1628년 어사의 보고에 따르면, 가뭄과 기근이 너무 심각해 섬서성 전체가 재난 지역이었다고 한다. 다음 해에는 기온이 급강하했고 1640년까지 한파가 지속되었다.

중국만 한파를 겪은 것은 아니었다. 1630년대 러시아도 12월부터 2월 사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심각하게 추웠다. 그러다가 1640년에 이르면 겨울마다 매달 극심한 추위가 잇따라 보고되면서 12세기 이래 러시아 역사상 가장 혹독하게 추웠던 10년으로 기록된다. 만주에도 역시 혹독한 추위가 덮쳤다. 여진족이 남쪽으로 진출한 것은 명의 경제력을 노린 측면도 있겠지만, 혹독한 추위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

1632년 이후 재해는 더욱 심각해졌다. 1635년, 메뚜기떼가 대규모로 출현했다. 숭정 10년(1637년)에는 전국적인 가뭄이 덮쳤다. 이후 7년에 걸친 가뭄으로 굶주린 사람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먹기 시작했고, 급기야 썩은 송장까지 건드리게 되었다.

……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가장 타격을 받은 곳은 정부 조달에 의존했던 북방 지역이었다. …… 조정이 긴축 재정을 운영하면서 군사들과 역참 병졸들에게 돌아갈 보수는 한푼도 없었다. 많은 병사가 주변지역으로 도망쳐 도적질로 간신히 목숨을 이어갔다. …… 1628년 봄, 섬서성을 덮친 가뭄을 계기로 병사들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시작으로 향후 1년간 전국을 뒤덮는 반란이 되풀이되었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황정(荒政)과 왕조교체(王朝交替)

–  김문기(부경대) / 중국사학회 / 2014년

 

명조가 멸망하고 27년이 지난 뒤에, 상주부常州府 무석현無錫縣의 계육기計六奇는 그가 저술한 『명계북략(明季北略)』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명조明朝가 천하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① 외부의 강적(여진족의 위협), ② 내부의 농민반란, ③ 자연재해의 유행, ④ 정부의 무능력이다. 이들 요인 중에서 계육기는 재해와 농민반란의 상호관계를 특히 강조했다.

가령 유구(流寇,무리 지어 떠돌아다니는 도적)가 소란을 일으켰을 때 백성들이 기근의 근심이 없었다면, 오히려 살아남기를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여 성지城池를 굳건히 지켰을 것이니 도적의 형세는 점차로 고립되었으리라. 어찌하랴! 섬서와 하남에 여러 해 동안 대기근이 들고, 산동과 호광에 매년 황재蝗災와 한재旱災가 드니, 궁핍한 백성들이 살아갈 방도가 없어 단지 도적을 따라서 약탈하며 잠시의 죽음을 연장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렇기에 도적이 이르는 곳마다 앞 다투어 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맞이하여 그 무리로 들어갔다. 비록 수령守令일지라도 또한 금할 수 없었으니, 도적의 무리는 날로 많아지고 도적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니, 대란大亂이 이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졌다.

계육기는 명말의 농민반란이 변경의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병향兵餉을 가파加派하는 등 국가의 가혹한 착취에서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왕조를 무너뜨릴 정도의 대란으로 발전했던 원인은 연이은 재해로 인한 극심한 기근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의 재해가 대기근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면 농민반란이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명조의 멸망과정에서 재해의 파괴력을 그 시대를 겪었던 계육기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

명청교체를 바라보는 전통적 시각은 ‘계급투쟁’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의 부패, 관료체제의 붕괴, 농민계급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강조하지만, 재해와 인화(人禍)로 끝내 농민반란을 추동하여 명조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이러한 관점에서 벗어나 각기 다양한 관점들이 제시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전환은 환경사적 관점에서의 접근이다. 페스트가 명조의 멸망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연구도 그 중의 하나이다. 다만 이것은 지엽적인 문제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기후변동이었다. 명청교체가 이루어진 17세기는 ‘지난 1만년 사이에 가장 한랭했던 시기’였다. 바로 소빙기(Little Ice Age)의 기후 변동이 최절정에 달했던 기간으로 ‘지구적인 위기(Global Crisis)’를 초래했다.

’17세기 위기’의 관점에서 명청교체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구미연구자들에 의해 먼저 시도되었다. 환경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국 학자들도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최근에는 명청교체를 아예 ‘생태위기’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17세기의 소빙기 기후변동이 생태를 악화시켜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농민반란을 촉발하여 명조의 멸망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소빙기는 명조의 멸망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소빙기의 생태위기를 강조할 때 주의해야할 부분이 있다. 소빙기의 기후변동은 17세기의 전반보다 후반이 훨씬 극심했다. 명조는 이런 생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했지만, 청조는 오히려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이루었다. 왕조는 교체되었지만 소빙기는 지속되었다. 명조의 멸망이 소빙기 때문이라면, 청조의 성공도 소빙기를 통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재해에 대한 국가의 대응은 양조兩朝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단서일 것이다.

 


여허(예헤)의 마지막 날

–  이훈 / 사람과글 / 2012년 2월 통권 010호

 

명은 지난 2세기 동안 여진을 산산이 분리시켜 관리함으로써 여진의 통합을 막아왔지만, 이 정책은 작동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이는 명 내부의 말기적 혼란상과 임진왜란 등의 외부적 여파로 인해 여진에 대한 견제가 느슨해진 원인도 있고, 누르하치 세력의 확대와 성장이 너무 급속했기 때문에 견제의 시점을 놓쳐버린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은 누르하치 세력의 성장이 심상치 않음을 일찍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조선이 1595년 (선조 28)에 신충일을 누르하치의 도성인 퍼알라에 파견한 것은, 표면상 누르하치의 건주와 통교하기 위한 사절임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하는 여진 정세의 변화를 감지하고 정탐하려는 목적이었다. 신충일은 귀국 후에 <건주기정도기 >를 작성하여 퍼알라의 제반 상황에 대해 조정에 상세히 보고했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가 벌어진 1619년의 후금은 신충일이 정탐한 1595년의 건주와 완전히 다른 국가였다.

그 사이 20여년간 누르하치는 여진 세계의 대부분을 통합했고, 1603년에는 신충일이 다녀갔던 퍼알라에서 인근의 허투알라로 수도를 이전했다. 새로운 수도에는 병합한 각지 여진의 주민을 대거 이주시켜서 병력을 더욱 확충했다. 단순히 규모만 확대된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 여진인이 수렵할 때 10명 정도로 구성하는 임시 조직인 ‘니루 ’를 상설적인 군사조직이자 행정조직으로 재편한 것도 여진사회의 구조를 뒤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새로운 니루는 과거의 수렵조직 니루와 이름만 같을 뿐 성격과 규모는 완전히 달랐다. 규모는 1니루에 장정 3백명으로 확대되었고, 니루의 수장인 니루어전은 니루의 구성원들의 행정, 납세, 군사 활동 등의 전반을 관리했다. 새로운 니루는 과거의 씨족과 촌락을 대체하는 국가의 기간 군사조직이자 행정조직이었다. 니루 약 25개를 총괄하는 조직인 구사 (旗 )는 국가의 최상급 조직이었고, 구사의 수장인 버일러들은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는 최고위 권력자들이었다. 허투알라로 대거 이주된 여진인은 속속 니루로 조직되었다. 최초에 4개였던 구사에 4개의 구사가 증설되어서 총 8개의 구사, 즉 팔기가 완성된 것은 1615년이었다. 30여년 전에는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병사 수가 고작 수십 명이었으나 이제는 만 단위로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사르후 전투가 일어나기 수년 전에, 누르하치의 국가는 인류사에서 보기 드물게 군사조직과 행정조직이 일체화된 완벽한 ‘병영국가 ’를 형성하고 있었다.

 

※ 본문 : 사르후 전투

 


천붕지열의 시대 명말청초의 화북사회

–  정병철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08.02.20

 

…… 명조는 융경5년(1571) 몽골 오이라트부의 수장 알탄(俺答)을 순의왕(順義王)에 봉하고 강화(講和)하였다. 이로써 몽골세력은 더 이상 명조를 침공하지 않았다. 한편, 일본은 16세기 후반 100여 년의 전국시대의 혼란을 통일하고 집권적인 무사정권의 단초를 열게 되었다. 이로써 ‘가정 대왜구 嘉靖 大倭寇’의 화禍도 거의 종식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부터 동북아에는 새로운 변화가 태동하였다. 포르투갈을 필두로 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의 해양강국이 동아시아 해역으로 진출하여 활발한 무역활동을 하면서 소위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동아시아 바다에는 이들 서구인 외에도 각종 해상세력이 번성하면서 새로운 기운이 넘쳐나게 되었으니, 왕직(王直) · 정지룡(鄭芝龍) 등 중국 동남해안을 거점으로 활동한 거대 밀무역조직, 일본 서부의 여러 대명(大名, 다이묘) 등이 그들이다.

이러한 16세기 동아시아 해상세계의 급변이라는 시운을 타고 통일정권을 창출해낸 일본은 동아시아의 신흥강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통일일본의 총아 풍신수길은 임진왜란을 도발하여 명조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정면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말 동북아에서 발발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세계의 격동의 산물이며 당시 동북아 국제관계를 반영한 국제전쟁이었다.

……

명의 임진왜란 참전은 화북민華北民에게 인적 · 물적인 부담을 가중시켜 민심의 이반을 낳았고, 그 결과 일어난 사건이 만력27년(1599)의 임청민변臨淸民變이었다. 명말 중국은 도시의 민변, 변방의 소수민족 반란뿐 아니라 유적 · 토적반란 등 각종 민중반란이 만연한 가운데, 숭정년간(1628~1644) 만주족의 수 차례의 화북침공으로 화북지방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한편 이러한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민원民怨만 가중시키는 명조에 대한 이반離叛의 기운이 광범하게 퍼졌다. 그 결과 일어난 이자성 · 장헌충 반란 등 미증유의 민중반란은 17세기 중국사회의 모순의 총집결이자 동북아세계 동요의 신호탄이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은 16~17세기 동북아의 격변과 동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국제전이었다. 중국은 이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전쟁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의 국제관계는 물론 중국 자체도 큰 영향을 겪게 되었다.

중국의 왜란 참전은 그 기간과 참가규모, 그리고 전비소모 등에서 소위 ‘만력삼대정萬歷三大征’ 중에서 영하寧夏의 보바이 반란, 사천의 양응룡楊應龍 반란 보다 비중이 훨씬 더 컸다.(※)  파견 병력으로 요동군은 물론이요, 산서山西 · 산시陕西의 소위 북병北兵, 강남 · 절강 등지의 남병南兵 · 절병浙兵 등이 대거 징발되었으므로 이들 지역의 인력부담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대부분 모병이었으므로 특정지역에서의 병력 징발을 꼭 그 지역의 인적 · 물적부담으로만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원병파견으로 인한 재정지출 또한 대부분 은량銀兩 행태로 이루어졌으니, 이 또한 특정지역의 부담이라기 보다는 중국 전체의 재정부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만력삼대정’의 전쟁비용에 관해, 영하 보바이의 반란 진압에 100만 냥 이상, 사천 양응룡의 반란 진압에 120만여 냥, 임진 · 정유년의 두 차례의 왜란참전 비용이 590만여 냥이었다는 언급이 있다(趙世卿). 한편 위 세 전쟁의 비용으로 각기 200만 냥, 200만여 냥, 780만여 냥이 소모되었다는 지적도 있다(曺于忭).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1609년 광해군일기[중초본] 23권, 광해 1년 12월 19일 병인 6번째기사

함경 감사 장만(張晩)이 치계하기를,

“북병사 이수일(李守一)의 치보를 접수하여 보니 노추(奴酋)의 병마가 지금 수하(水下)에 있으면서 여러 부락을 공략한다고 하는데, 이 적이 이문암(利門巖)을 얻은 뒤부터 동쪽으로 이어진 여러 부락에 위세를 부렸습니다. 지난해에는 번호(藩胡)를 모두 철수시키고 정병 5, 6천 명을 얻어 심복의 군대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또 한 부대의 군사로 멀리 수천 리 밖으로 침입해 들어갔지만 홀온(忽溫) 등지의 오랑캐들이 감히 그들이 떠나고 없는 틈을 엿보지 못하며, 군사들의 날카로운 기세가 지향하는 곳을 감히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서북(西北) 사이의 지역에서 뜻을 얻었음은 대체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앞서는 먼 곳과는 교통하고 가까운 곳은 공격하는 술책을 행하면서 단지 번호만 철수시키고 바닷가의 여러 부락에는 온건한 사신을 보내어 잠시 기미책을 썼다가, 지금에 와서는 군사의 위세로 겁을 주며 또 노략질해 가는데 군사를 얻은 숫자가 틀림없이 번호와 같거나 또는 더 많을 것입니다. 그들의 소굴에서부터 동쪽으로 북해(北海)의 끝까지 모두 그들의 소유가 되었으니 우리 나라 서북 방면의 근심이 이로부터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이 적이 남목(南牧)에 뜻을 둔 지 오래이니, 그들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킬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훈련되지 않은 군사와 원망하는 백성, 주먹만한 돌로 쌓은 성(城)과 제대로 맞지 않고 어긋나는 기계(器械)로는 아마도 이 적을 당해낼 수 없을 듯합니다. 앞서 방비하는 계책을 조정에서 미리 헤아리고 지휘해야 할 일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서장을 살피건대 북도의 근심거리를 소홀히 할 수 없다. 도 체찰사와 함께 의논하여 무릇 방수(防守)에 관계되는 계책을 십분 강구하여 서둘러 하유(下諭)할 〈일로 비변사에 말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장계의 내용에 깊은 근심과 멀리 염려하는 단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노적(老賊)이 10년 가까이 여러 부락을 아울러 삼켜 모두 복속하게 하였는데, 지금 서로 대항하여 버티면서 감히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은 뒤에 있는 여허(如許), 곁에 있는 해동(海東)·해서(海西) 등 세 곳의 큰 부락입니다. 만약 이 세 부락이 함께 복속된다면 반드시 앞으로는 음흉한 마음을 그만두지 않고 또 우리 나라를 도모하려고 힘쓰면서, 먼저 꼬투리를 잡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깨물어 뜯으면서 일을 일으킬 바탕으로 삼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북쪽 지방의 번호를 철수했다는 말은 단지 하나의 조그마한 근심거리일 뿐입니다. 만포 첨사 김응서(金應瑞)가 【응서가 뒤에 경서(景瑞)로 이름을 고쳤다. 〈기미년 심하(深河)의 전투 때에 부원수로 노적(奴賊)에게 투항하였다.〉 】 보고한 바에 의하면, 우리 나라와 명나라가 장차 합세하여 자기들을 공격하려 한다고 말한다 하니, 그들의 음흉한 모략은 헤아리기 어려우며 처음 볼 때부터 극도로 우려할 만하였습니다. 우리 측에 있는 방비는 성을 쌓거나 못을 파며 군사를 훈련시키거나 군량을 저축하여 전술을 갈고 닦으면서 그들을 기다리는 데 불과한 상황인데, 그러한 우리의 형세마저도 한결같이 약화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금년에는 서도에 크게 흉년이 들었으며 거기에다 앞으로 조사(詔使)의 행차가 있을 예정입니다. 이 적의 발동에 있어서 그 시기와 장소를 미리 헤아리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만약 빨리 발동하여 북쪽에서 출현한다면 그래도 버틸 수 있겠지만, 늦게 발동하여 서쪽으로 출현한다면 우려가 바야흐로 커지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의 방비는 서쪽을 중하게 여겨야 하며 북도가 그 다음인데, 서변(西邊)의 방어는 북방과 비교하여 더욱 허술하니, 조정에서는 이 뜻을 알고 미리 도모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본도에서 청구하는 화약(火藥)·화기(火器)·궁현(弓弦)·어교(魚膠) 등의 물품을 해사(該司)로 하여금 넉넉한 숫자를 들여 보내게 하고, 초봄에 보내주는 방어군을 재촉하여 빨리 들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윤허하였다.

 


관련 그림

 

2

–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해서여진(海西女眞) 4부, 명과 조선의 영향이 강한 압록강 북쪽의 건주여진(建洲女眞) 5부, 그리고 두만강 북쪽의 야인여진(野人女眞) 4부

 

 

3

– 1589년 봄까지 건주여진의 통일을 이룩한 누르하치가 항복해 온 여러 족장들을 접견하는 장면 (출처 : 만주실록)

 

 

4

요녕성 동부 산간지역에 있는 신빈현의 옛 이름은 흥경(興京)이다. 이곳은 청나라의 발상지다. 청태조 누루하치의 4대조를 모신 영릉과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하고 한(汗)으로 등극한 허투아라(赫圖阿拉)성 등 역사적인 유적들이 있다. 지금도 만주족 자치현이다. 또한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자치주(延辺朝鮮族自治州)이기도 하다.

 

 

4

– 허투아라성의 복원도

 

 

5

– 허투아라성(赫圖阿拉城)의 왕궁 모습.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누르하치가 집무한 正殿 한왕전(汗王殿)이다.

 

 

6

 

 

7

– 팔기군의 복장과 깃발

팔기제八旗制는 ‘니루’라는 기본 단위를 토대로 만들어진 통치 조직이다. 300명으로 구성된 니루 다섯 개를 자란, 다섯 개의 자란을 구사 또는 기旗라고 불렀다. 모든 여진 주민은 ‘나가면 병사가 되고 들어오면 백성이 되는’ 군민軍民 복합 공동체인 기에 편제되었다.

당시 쇠망의 조짐이 뚜렷했던 명군이, 조직화된 팔기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실제 팔기는 1644년, 청이 베이징으로 입성한 뒤에도 중원(中原)을 제압하고 통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중원 장악 이후, 팔기에 소속된 사람들을 기인(旗人)이라 불렀는데 그들은 별도의 호적에 편입된 특수 신분이 되었다. 그들은 기지(旗地)라 불리는 토지를 하사 받고, 그들만을 위한 독자적인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중원 입성 이후 기인들은 오로지 만주어를 익히고 궁술(弓術)을 연마하여 관리나 군인으로 등용되었다. 다른 농공상의 직업을 갖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특권도 컸지만 의무도 명확했다. 기인들에게 만주어를 익히게 하고, 궁술을 연마시킨 것은 결국 만주족이 지닌 정체성과 야성(野性)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수십만에 불과한 만주족이 1억 이상의 한족을 270여년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비책이기도 하다.

 

 

8

– 1593년 누르하치가 아홉 부족 연합군을 대패시키다.

 

 

9

– 1606년 몽골 칼카(Kalka)의 엉거더르(恩格德尔)가 누르하치에게 ‘공경스러운 한(쿤둘런 한)’의 존호를 올리다.(『만주실록』 恩格德尔来上尊号图)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http://ko.wikipedia.org/wiki/%EC%B2%9C%EB%AA%85%EC%A0%9C

네이버캐스트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2360

한반도는 언제부터 ‘지정학적 요충지’가 되었나

명(明)을 정복한 여진족 청(淸)왕조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황정(荒政)과 왕조교체(王朝交替) (김문기 / 부경대 / 2012)

2007-03-15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Ⅱ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26> 기근과 카니발리즘: 1615~1616년 중국 산동의 대기근

淸의 260년 중화지배는 팔기제 덕분

이순신은 왜 무능한 왕조를 전복하지 않았나

http://www.dhseol.org/nation/jushin/jushin21.html

누르하치,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우다 – 1616년

One thought on “누르하치,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우다 – 1616년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