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후 전투 (명청교체의 판가름) – 1619년

누르하치가 1616년 후금을 건국했다.

※ 누르하치,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우다 – 1616년 : http://yellow.kr/blog/?p=1815

 

누르하치가 여진 세계를 통일할 의지를 실천에 옮기자,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해서여진의 여허 부족은 명과 몽골 세력 등을 끌어들여 이를 저지하려 했다. 이들 외부 세력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누르하치는, 1618년에 이른바 일곱 가지 원한을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한 뒤 무순(푸순, Fushun, 撫順)을 공격해 점령했다. 이로써 명과의 전면전은 불가피하였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사이 유라시아 동부 지역 정세는 일본과 여진이라는 두 신진 세력이 국내 통일과 대외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고, 기존 패권 세력인 조선 · 명 · 몽골 등이 현행 질서를 지키기 위해 이를 저지한 것으로 보인다.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패권을 두고 누르하치 세력과 반누르하치 연합군이 충돌한 것이 바로 1619년의 사르후 전투(싸얼후 전투)이다. 총지휘자 요동경략遼東經略 양호楊鎬는 심양에 지휘부를 두고 검문, 산서, 산동 등지에서 모집한 명나라군과 원수 강홍립姜弘立, 부원수 김경서金景瑞가 통솔하는 조선 원군을 심양, 개원, 철령, 청하, 관전 등 네 개로 나누어 후금의 대본영인 허투알라(興京, 싱징, 赫圖阿砬, Hetuala)로 공격했다. 그리고 병충秉忠, 장승기張承基를 요양遼陽에, 이광영李光榮을 광녕廣寧에 주둔시켜 후방 안전은 물론 협동 작전할 수 있도록 하고, 군수품은 관둔도사管屯都司 왕소훈王紹勛이 책임지도록 했다. 병력은 위키백과 기준으로 명나라 연합군이 10만여명(조선군 1만5000명 ?), 후금이 6만여명이었다.

 

명청교체의 결정적 전투인 사르후(薩爾滸, Sarhu) 전투의 전 과정은 다음과 같이 각개 전투별로 나눌 수 있다.

1. 사르후, 길림애(吉林崖, 자이피안) 전투 : 두송의 서로군

2. 상간하다(상간애, 尚間崖) 전투 : 마림의 북로군

3. 아부달리阿布達裡, 심하 전투深河戰役 : 유정의 동로군과 조선군. 심하 전투를 부차富察 전투라고도 한다.

 

서광계, 황인우黄仁宇 등 사르후전투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명군이 후금군을 이기는 것은 애초부터 거의 불가능했다. 우선 병력이 매우 적었다. 명군 지휘부는 애초 47만 명을 동원한다고 허풍을 쳤지만 조선과 예허의 지원병을 합쳐도 10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 병력의 대부분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명군의 무기와 장비도 열악했다. 강홍립의 보고에 따르면 유정의 부대는 대포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 화기수들을 들여보내라 닦달할 정도였다. 지휘관들끼리 사이도 좋지 않았고 작전도 엉망이었다. 명군은 병력을 넷으로 나눠 1619년 3월 1일 네 방향에서 일제히 허투아라를 향해 진격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좌익북로군을 이끌던 총병 두송杜松이 약속을 어기고 하루 먼저 출발했다가 싸얼후 산에서 후금군 복병의 역습에 걸려 전멸당한다. 이후 명군의 나머지 병력도 모두 후금군에게 각개격파되고 말았으니, 그중 하나가 심하전투였다. 전공을 탐해 약속을 어긴 두송도 문제였지만,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집중시켜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병력을 넷으로 분산시킨 것이 근본적인 실책이었다. 총사령관인 경략 양호가 네 명의 현장 지휘관들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책임도 컸다.

 

사르후 전투의 결과로 명나라는 국력을 크게 상실했으며, 전투에서 주요 전장이었던 자이판과 사르후 지역이 누르하치가 향후 요동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중요한 전초기지로 기능하였다. 2년 후에 누르하치는 8기군을 거느리고 심양과 요양(遼陽)을 점령했다. 1625년 3월, 누르하치는 후금의 도성을 심양으로 옮기고 심양을 ‘성경(盛京)’으로 고쳤다. 이때부터 후금은 명나라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당시의 세계사 연표는 :

* yellow의 세계사 연표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619

http://yellow.kr/mhistory4.jsp

 

 

1

– 사르후 전투의 전개과정

 

조선은 15,000여명을 파견해 인명 피해가 7000~8000명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조선 조정이 명과 후금의 충돌에서 보여준 태도에 대하여는 ‘균형외교'(한명기)라는 긍정적 평가와 ‘기회주의'(오항녕)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중국 (외교관의 눈으로 보다)

–  백범흠 / 늘품플러스 / 2010.04.19

 

누르하치의 세력이 통제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커지게 되자 명나라는 누르하치와의 교역을 정지하는 한편, 해서여진 예헤부를 지원하여 누르하치에 맞서게 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압력에 맞서 독립의 자세를 취해 나갔다. 그는 자기 가족을 포함한 만주족에 대한 명나라의 탄압사례를 일일이 열거한 <칠대한七大恨>을 발표하여, 명나라의 탄압에 무력으로 맞설 것임을 공언했다. 그는 새로 통합한 해서여진 하다부의 땅을 집중 개간하는 등 자립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누르하치는 1616년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하고, 수도를 길림성 흥경興京에 두는 한편, 푸순撫順을 공격하여 명나라군 유격(대령) 이영방의 항복을 받아 내었다. 그리고 추격해 온 광녕총병廣寧總兵 장승음의 1만 대군을 대파하였다.

 

누르하치의 급성장에 전율을 느낀 명나라는 1619년 병부시랑 양호楊鎬를 요동 경략, 즉 요동방면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양호는 요하 동쪽의 심하변瀋河邊에 위치한 심양瀋陽에 주재하면서 누르하치군에 대처해 나갔다. 명나라 조정의 명령에 따라 양호는 12만에 달하는 명나라-해서여진 예헤부-조선 등 3개국 연합군을 4로路로 나누어 누르하치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명나라 조정은 이여송의 동생 이여백李如栢을 부사령관격인 요동 총병에 임명하는 한편, 두송杜松과 왕선王宣, 마림馬林, 유정劉綎으로 하여금 각각 1로를 담당하게 했다. 양호와 유정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하여 일본군과도 싸워 본 경험이 있는 인물들이다. 예헤부가 1만 5천의 병력을 파견하였으며, 조선 광해군이 보낸 1만의 병력도 명나라를 지원했다.

 

4로의 장군들 가운데 누르하치를 경시한 두송은 무공武功을 독차지하기 위해 총사령관 양호가 내린 명령을 어기고 약속한 날짜보다 하루 먼저 혼하를 건넜다. 누르하치는 아들 홍타이지와 함께 대군을 휘몰아 심하瀋河 하안河岸의 사르허에서 시커먼 흙비를 정면으로 마주한 두송의 군단을 대파했다. 두송이 거느린 명나라군 3만은 전멸 당했다. 사르허 전투는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르허의 패전 소식을 접한 양호는 이를 이여백과 나머지 3로군 장수들에게 일제히 통지했다. 이는 명나라군의 사기만 떨어뜨렸다. 명나라군은 공포에 떨었다. 마림은 도주하고, 유정은 전사했으며, 이여백은 휘하의 병력이 함몰된 데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총사령관 양호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남원과 울산 전투에서 대패하는 등 그다지 능력이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참형을 당했다. 만주군은 명나라군을 차례차례로 분산, 고립시킨 후 각개 격파했다. 명나라군은 군율 이완에다가 지나치게 분산 배치되어 있어 만주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유정 휘하의 조선군은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만주군에 투항하였다. 누르하치는 승세를 타고 예헤부도 평정하였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  진순신 / 전선영 역 / 살림 / 2011.07.29

 

무순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명나라의 조정도 경악하여 누르하치 토벌을 위해 동원령을 내렸다.

병부시랑인 양호(楊鎬)가 요동 경략(經略)에 임명되어, 사로총지휘(四路總指揮)로 심양(봉천)에 주둔하게 되었다. 명군은 사로(四路)로 나뉘어 누르하치를 공격했다. 사로의 사령관으로 동원된 총병(사단장)과 총병 경험자는 6명이었다.

이성량의 아들인 이여백(李如栢)은 퇴역해 있었는데, 이때 특별히 기용되어 요동 총병으로 임명되었다. 원래부터 요동을 잘 알고 있는 무장의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이니 적임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선에서 고니시, 고바야가와와 싸웠던 이여송과는 친형제였다. 그러나 이 일가는 아버지 이성량을 비롯하여 고위 군직에 올랐지만, 야전 사령관으로서 유능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이때의 기용도 실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산해관 총병인 두송(杜松), 보정(保定) 총병인 왕선(王宣), 개원(開原) 총병인 마림(馬林), 요양(遼陽) 총병인 유정(劉綎) 등 사령관들의 면면은 참으로 쟁쟁했다. 유정은 남로(南路)의 사령관으로 그는 조선의 지원군 1만 명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때 명에서 이여송 등의 지원군을 보냈으니, 이번에는 그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그 밖에도 유격인 최일기(崔一琦)가 다른 조선군을 인솔하여 병력을 합치기로 되어 있었다. 한편 북로군인 마림의 휘하에는 해서여진 예헤부의 병사 1만 5천이 포함되어 있었다.

명군은 조선, 예헤부 등의 병사들을 산하에 둔 혼성부대로 그 수는 47만이라 호(號)했다. 호라는 것은, 보통 실제 숫자의 두 배가량이지만, 이때의 명군은 더 적어서 기껏해야 10만 정도였다고 한다. 양호가 누르하치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그 속에서 47만이라 호했던 것이다.

명군은 3월 1일에 각 노(路)의 군을 집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산해관 총병인 두송이 남보다 먼저 공을 세우려고 예정된 시기보다 일찍 혼하를 건넜다. 두송은 전쟁이란 용맹함만으로 승부가 결정되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단순한 군인에 지나지 않았다. 평소 자신의 몸에 있는 수많은 칼자국을 자랑스럽게 여겨, 무슨 일만 있으면 알몸이 되어 보이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공적을 위해서라면 부하들의 고생이나 희생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용맹하기는 했지만 사령관으로서는 부적격한 사람이었다.

혼하는 물살이 세기 때문에 뗏목이나 배로는 건널 수가 없다. 말을 타고 건너야 하는데, 이 도하 때 이미 많은 장병을 잃었다. 강을 건넌 후, 두송은 2만의 병사를 사르허(薩爾滸)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1만의 병사를 이끌고 계번성(界藩城)으로 향했다. 명군은 정찰을 통해서 누르하치가 계번에 성을 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만 5천 명의 인부가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호위하는 장병은 겨우 400명에 불과했다. 본대는 길림애(吉林崖)라는 곳에 있었다.

공사 중인 계번성을 노리겠다는 두송의 생각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명군의 움직임도 누르하치 쪽에게 정찰을 당하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세운 작전은 아들 홍타이지에게 2기(旗)의 병사를 주어 계번성을 구원케 하는 한편, 자신이 6기(旗) 4만 5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사르허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사르허에 있는 명나라의 본영은 대기하는 부대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방심하고 있었다.

이때도 저녁이 되자 모래바람이 불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찾아왔다.

이와 같은 커다란 모래바람을 ‘매(霾)’라고 한다.

 

갑자기 크게 매(霾)가 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라고 사서에는 묘사했다.

명군은 너무나도 어두워서 햇불을 밝히고 싸웠다. 누르하치의 6기는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을 공격하는 것이니,

 

쏘아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와 같이 유효한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서 명군은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을 향해 발포했기 때문에 거의 맞지 않았다.

 

총포는 모두 버드나무에 맞았다.

이런 상태였기에 명군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계번성으로 향했던 두송의 1만도, 복병을 만나 고전을 하던 중에 사르허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어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게다가 사르허에서 승리한 6기가 가세했으니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총병인 두송은 화살에 맞아 전사했고, 명군은 전멸했다.

 

횡시(橫屍)가 산야를 덮었으며 피는 흘러 도랑을 이루었고, 기치(旗幟), 기계(器械) 그리고 죽은 사종들이 혼하를 덮으며 흘러 마치 물이 없는 듯했다.

사서는 이 싸움의 참상을 이렇게 적었다.

패전 소식을 접한 양호는 각 군에 격문을 띄웠지만, 그것은 패전에 다시 패전을 더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마림은 도주를 했으며 유정은 전사했다. 이여백 군은 궤멸했고, 그는 일단 도망을 쳤지만 어차피 책임을 추궁당할 것이라고 체념했는지 자살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르허 전투다. 명나라가 쇠망하고 청나라가 흥기하여 그를 대신하게 된 단서가 이 전투에 있었다고 말한다.

……

 

신흥 누르하치에게 있어서 사르허의 전투는 실로 커다란 수확을 가져다 주었다. 이 세력의 가장 커다란 고민이 인구 부족에 있었다는 사실은 몇 번이고 이야기했는데, 이 전승으로 말미암아, 예를 들자면 유정 휘하에 있던 조선군이 전원 투항해 왔다. 그만큼 인구가 늘어난 셈이다.

또한 이 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누르하치는 개원과 철령을 탈취했다. 영토를 넓힘과 동시에 그 지역의 주민들까지 손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동족 가운데서 마지막까지 대적했던 예헤부를 이 기회에 평정할 수 있었다.

사르허의 전투는 명의 만력 47년(1619), 금의 천명 4년 3월의 일이었는데, 예헤부가 평정된 것은 같은 해 8월의 일이었다.

명에서는 패전의 최고 책임자인 요동경략 양호가 체포, 투옥되고 그 후임으로 웅정필(熊廷弼)이 기용되었다.

 


천추흥망 – 중화의 황혼 청나라

–  쉬홍씽 / 정대웅 역 / 따뜻한손 / 2010.12.20

 

칠대한을 명분 삼아 출정 결의를 다진 후금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명 왕조의 무순, 동주東州, 마근단馬根單 3성을 함락시키고, 보堡, 대臺, 장莊과 같은 작은 성 500여 곳을 쳐부쉈다. 점령지에서는 제멋대로 방화 살인 약탈을 감행한 뒤 퇴각했다. 이를 기점으로 후금의 군대는 빈번히 출격했고 잇따라 아골관鴉關, 청하성淸河城 등지를 점령했다.

후금은 이로써 명 왕조의 공개적인 적대세력이 되었다. 후금의 궐기는 대명 왕조를 뒤흔들었으며 누르하치에 대한 고답적 정책이 결국 명 왕조 변방의 위협세력으로 성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명 왕조의 사료 『』을 보면 누르하치의 침략에 따른 긴급사태를 맞아 1618년 4월부터 1619년 2월까지 10개월 동안 조정에서 상의하고 대책을 세운 기록만 100여 차례에 달한다. 평균 3일에 한 번 꼴로 명 정부가 얼마나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신종은 긴급히 양호를 총사령관 격인 요동경략으로 삼아 후금토벌을 명하고, 동시에 전국 각지에서 병사와 장군을 모아 접경지역으로 이동시킨 후 병사들의 군량과 급료 조달에 나섰다. 조선에서 파견한 원군을 포함하여 황급히 8만여 병사를 규합했는데 대외적으로는 47만 대군이라고 알려졌다.

……

이 격돌은 사르후 지역에서 가장 격렬하게 벌어졌기에 역사적으로 ‘사르후 전투’라 칭한다. 이 전투로 명나라 군대는 반수 이상의 군사를 잃었으나 후금은 겨우 2천여 병사만을 잃었다.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가 대패하고 후금 군대가 전승한 까닭은 누르하치의 정확한 판단력, 타당한 지휘력과 후금 군대의 승리를 위한 힘의 비축, 상하단결, 사기충천, 용감무쌍한 전투력과 같은 요인 이외에도 명 왕조의 부패, 군사 기강해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명 군대의 직접적인 패인은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적정을 살피지 않고 황급히 출정한 점이다. 명 정부가 후금의 정황을 명확히 알고 대대적으로 토벌하기로 결정한 뒤 후금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후금의 지휘부는 어떠한지 알아야 할 필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명나라 군사의 병력과 지휘부에 대해 매우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을 차례로 집중하는 전략으로 적을 각개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둘째, 임시 징집과 군비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명 정부는 각지에서 군대를 소집하고, 각지에서 노약하고 병든 사병을 많이 모아 임시 변통으로 파병했다. 그리고 요동에 파견된 고위 장령들 가운데에는 적에게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명의 신종 주익균(朱翊均, 만력황제)은 비록 큰 소리로 “대대적으로 토벌하라.”고 명령했으나 그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탐욕스럽고 아둔한 군주였기에 이런 대규모 전쟁을 앞두고 고작 국고에서 필요한 전비의 10분의 1만을 내어놓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턱없이 부족한 군비는 본래부터 낮았던 군대의 사기를 더욱 저하시켰다.

셋째, 장수들이 무능하고 지휘체계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번 전쟁을 지휘한 명군대의 주장 양호는 패전을 밥 먹듯 하는 무능한 장군이었다. 더욱이 늙고 나약한 데다가 고집불통이어서 남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았다. 또한 수하 고위 장령을 지휘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한쪽 편만을 들어 불화를 야기하는 장수였으니, 이런 주장이 어찌 승리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두송과 같은 장수는 맹목적이면서 우쭐대길 좋아하는 인물이어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우고자 망령되게 말했다. “나는 누르하치를 생포하여 다른 사람과 전공을 나눠 갖지 아니할 것이다.” 그는 약정한 시간을 어기고 앞당겨 출정했다가 적진 깊이 잠입한 나머지 고립되어 후금 군사에게 포위 섬멸을 당했으며, 결과적으로 명 군대 전체 전선의 붕괴를 초래했다.

사르후 대첩은 명 왕조 때 여진 귀족세력이 자발적으로 출격한 유일한 전투였다. 이 전투는 쌍방의 역량 비교에 있어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명 왕조는 능동적 세력에서 피동적 세력으로 바뀌어 이로부터 줄곧 수세에 몰리며 얻어맞는 처지가 되었다. 누르하치의 후금 정권은 이 전투를 통해 요동분쟁의 주도권을 획득했고, 머지않아 요서遼西와 심양의 많은 지역을 점령한다. 후금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세력 확장에 따라 신속하게 확대 발전했다. 더욱이 군사력에 있어서는 이미 명 왕조보다 우위였고, 후금의 정치기구 역시 하루가 다르게 완비됐다. 이러한 모든 환경은 누르하치의 구미를 더욱 당기게 했고, 중원을 병탄하겠다는 야심 역시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1621년 누르하치는 요양遼陽으로 천도했다. 1625년 누르하치는 또 권위를 앞세워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심양으로 천도했다. 이로부터 심양은 후금의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후금은 이와 같은 군사 경제상의 장점을 갖춘 심양을 몽골, 조선과 중원의 드넓은 지역을 공격하는 전초기지로 삼았다.

 


사르후 전투

–  이훈 / 사람과글 / 2012년 2월 통권 10호

 

사르후 전투의 전 과정은 각개 전투별로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사르후, 기린산 전투

3월 1일 두송의 서로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두송은 혼하를 건너 사르후를 점령하고 1만여 명의 병력을 배치한 후,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후금군을 추격하여 다시 혼하를 건너 자이피얀을 공격했다. 자이피얀의 후금 부대는 후방의 기린 산으로 후퇴했고, 두송은 기린 산을 공격했다. 누르하치가 허투알라의 주력군을 이끌고 사르후와 기린 산이 보이는 구러에 도착한 것은 그 날 저녁 무렵이었다. 누르하치보다 먼저 도착한 대버일러 다이샨과 버일러들은 기린 산에 고립된 후금군을 구원하기 위해 기병 1천 명을 파견한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야음을 이용하여 사르후를 공격했다. 8기 가운데 사르후 공격에 6기가 동원되었고, 나머지 2기는 자이피얀의 명군을 감시했다. 후금군의 야습을 받은 사르후의 명군은 궤멸되었다. 후금군은 곧바로 사르후를 공격했던 6기와 자이피얀의 감시를 맡았던 2기, 기린 산의 부대로 세 방향에서 두송의 부대를 공격했다. 자이피얀의 명군은 궤멸되었고 두송 등의 장수들도 전사했다. 허투알라, 사르후, 자이피얀으로 이어지는 작전지역을 단 하루 만에 이동하며 공격을 전개한 후금의 기동력과 신속한 정보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2. 샹기얀 하다, 피여푼산 전투

두송의 군이 궤멸된 무렵, 마림의 북로군은 샹기얀 하다에 도착해 있었다. 2일에 서로군의 궤멸 소식을 들은 마림은 상기얀 하다에 강력한 포진을 구축했고, 潘宗顔이 지휘하는 북로군의 제2부대는 가까운 피여푼 산에 진영을 구축했다. 후금의 다이샨은 300명을 이끌고 출발하여 마림 군의 강력한 진영을 보고 누르하치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누르하치는 1천명의 병사로 와훈 오모에 주둔하던 명 서로군의 전차부대 2천을 궤멸시키고, 즉시 상기얀 하다로 달려왔다. 양군이 격돌했고 전투는 혼전에 빠졌으나, 결국 속속 도착한 후금의 부대들이 즉시 참전하면서 명군은 붕괴되었다. 마림 군은 패주하면서 추격하는 후금군에게 학살당했다. 피여푼에 주둔한 반종안의 부대는 참전의 시기를 놓쳤고, 마림 군을 붕괴시킨 누르하치 군이 예봉을 돌리자 바로 섬멸 당했다. 여허 군은 개원 남쪽의 中固城까지 내려온 상태였지만, 이 패전 소식을 듣고 철수하고 말았다.

 

3. 압달리 언덕, 심하 전투

누르하치는 명의 서로군과 북로군을 궤멸시킨 후, 전군을 허투알라(흥경)로 철수시켜 남로군의 북상에 대비했다. 남로군은 유정의 본대가 앞서 진군하고, 康應乾의 부대와 조선군이 뒤따랐다. 유정의 부대는 2일에 동고에서 후금의 니루어전 토보오가 이끄는 500명과 교전하여 50명을 죽이고 진격해나갔다. 후금의 다르한 히야가 이끄는 선발대는 토보오의 잔여병을 흡수한 뒤, 와르카시 숲에 매복하고 유정의 부대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유정의 부대는 10시경 다이샨이 이끄는 후금의 주력군과 만났고, 조금 후퇴하여 압달리 언덕에 포진했다. 이때부터 후금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다이샨과 홍타이지가 이끄는 두 주력군이 압달리 언덕을 양면 공격했고, 후방에서는 다르한 히야가 습격했다.

명군은 삼면의 공격을 맞아 전멸했고, 유정도 전사했다. 남로군의 본대를 전멸시킨 후금군은 푸차 들판으로 진격하여 남로군의 후위대인 강응건과 조선군을 공격했다. 강응건은 도주하고 조선군은 전투 끝에 투항했다.

 

※ 본문 : 만주족 이야기 – 사르후 전투

 


17세기 – 대동의 길

–  한명기,문중양 등 / 민음사 / 2014.06.27

 

…… 급기야 1618년 누르하치는 이른바 일곱 가지 원한을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한 뒤 무순을 공격해 점령했다. 무순의 성주 이영방李永芳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않고 후금군에 투항했다. 무순은 본래 여진족이 명 상인들과 교역을 벌이던 요충지였다. 그처럼 중요한 지역을 공격했다는 것은 누르하치가 작심하고 명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선 것을 의미했다.

 

무순이 함락되고 이영방이 투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명 내부는 들끓었다. 신료들은 누르하치를 제압하고 요동을 방어하기 위한 갖가지 대책을 황제에게 상주했다. 명은 누르하치의 근거지인 허투아라를 공격하기 위해 원정군 동원에 착수하는 한편, 해서여진의 예허부와 조선에도 병력을 동원해 자신들의 원정에 동참하라고 요구했다. 명은 조선의 파병을 요구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자신들이 “망해 가던 조선을 다시 살려주었다.”라는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1618년 윤 4월, 명의 병부시랑 왕가수汪可受가 조선에 보내온 격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건주의 소추(小醜, 보잘것없는 오랑캐)가 바닷가 연안의 좁은 땅을 근거지로 삼아 보잘것없는 여러 추장을 선동해 대대로 입은 국은國恩을 잊고 감히 쥐새끼처럼 엿보는 일을 은밀히 도모해 왔습니다. …… 이에 황상皇上께서 크게 노하시어 기필코 섬멸할 계책을 정해 사방의 정예병을 동원해 6월에 작전을 시작하려 하시는데 군량이 산처럼 쌓이고 군대의 사기가 우레와 같으니 저 오랑캐의 운명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나라를 세운 250여 년 동안 조선은 줄곧 보호를 받아왔습니다. 왕년에 조선이 왜노倭奴의 변란을 겪자마자 본조에서 즉시 10만 군사를 파견해 몇 년 동안 사력을 다해 왜노를 쓸어 버렸는데, 이는 조선이 대대로 충성을 바쳐 온 만큼 왕에게 계속 기업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수만 병력을 일으켜 노추를 협공하면 반드시 승리를 거둘텐데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왕께서 본조에 보답하는 길이자 나라에 무궁한 복을 안겨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 격문이 도착하는 즉시 왕께서는 신하들과 토의하신 뒤 빨리 군병을 정돈해 대기하다가 기일에 맞춰 나아가 토벌하는 데 실수가 없도록 하십시오.

 

격문에서 드러나듯이 명은 조선을 이용해 누르하치를 제압하려 했다. 전형적인 이이제이책이었다. 명의 급사중 관응진官應震은 조선과 예허에서 병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예 두 나라를 순이順夷라고 지칭했다. ‘고분고분한 오랑캐’라는 뜻이다. 명이 이처럼 여진과는 또 다른 ‘오랑캐’ 조선과 예허에 ‘아쉬운 소리’를 한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명은 ‘중화’의 위상에 걸맞는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군사력의 바탕이 되는 재정이 휘청거렸기 때문이다. 명은 후금 방어에 들어가는 국방비가 총 세입의 절반 가까이나 되는 상황에서 증세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백성의 고통이 커졌다. 실제로 명은 1618년 4월 무순이 함락된 직후부터 병력 동원에 나섰지만 몇 개월이 지나도 10만 명을 채우지 못했다. 이 같은 처지에서 조선에 대한 원병 요청은 절박한 것이었다.

……

명의 압박과 대다수 신료의 채근 속에서도 파병을 회피하려 한 광해군의 시도는 명군 경략(총사령관) 양호楊鎬에 의해 무산되었다. 정유재란에 참전해 조선의 내부 사정에 밝은 그는 “조선이 재조지은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익한 외교 문서만 왕복시키고 있다.”라고 질타한 뒤 병력을 파견하라고 겁박했다. 1619년 광해군은 결국 1만 5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가 이끄는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넌 뒤 명군 총병 유정劉綎의 휘하에 배속되었다. 유정 등 명군 지휘관들은 조선군이 사세를 관망하면서 전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지나 않을까 몹시 우려했다. 그들 가운데는 심지어 강홍립 등에게 칼을 빼들고 빨리 전진하라고 재촉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명군 지휘부의 채근과 성화에 떠밀린 조선군은 입고 있던 군장을 벗어던지거나 운반하던 군량을 포기한 채 명군을 따라가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

명군 지휘부의 압박에 떠밀려 허투아라를 향해 전진하던 조선군은 1619년 심하深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후금군에게 참패하고 강홍립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투항했다. 일찍이 일본인 학자 다가와 고조田川孝三가 “광해군은 애초부터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려 후금군에게 투항하라고 지시했다.”라고 주장한 이래 ‘조선군의 고의적인 항복’은 정설처럼 알려져 왔다. 하지만 심하전투 당시 조선군의 인명 피해가 7000~8000명에 이르렀다는 『광해군 일기』의 기록을 고려하면 이 주장을 온전히 믿기는 쉽지 않다. 애초부터 항복할 계획이었다면 수천 명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인조반정 이후 심광세를 비롯한 서인들 가운데는 ‘광해군과 그를 추종하는 신하들이 오랑캐에게 출병 기일을 누설하는 바람에 명군이 원정을 망치고 궁극에는 요동 전체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주장을 부연하면 ‘강홍립과 광해군 때문에 명이 망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원정군의 주체가 명군이었다는 사실, 명군의 전력이나 작전 능력이 형편없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하면 이 같은 주장은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중국에서는 심하전투를 포함해 허투아라를 공략하려던 명군이 참패한 일련의 전투를 보통 싸얼후전투라고 부른다. 그런데 서광계, 황인우黄仁宇 등 싸얼후전투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명군이 후금군을 이기는 것은 애초부터 거의 불가능했다. 우선 병력이 매우 적었다. 명군 지휘부는 애초 47만 명을 동원한다고 허풍을 쳤지만 조선과 예허의 지원병을 합쳐도 10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 병력의 대부분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명군의 무기와 장비도 열악했다. 강홍립의 보고에 따르면 유정의 부대는 대포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 화기수들을 들여보내라 닦달할 정도였다. 지휘관들끼리 사이도 좋지 않았고 작전도 엉망이었다. 명군은 병력을 넷으로 나눠 1619년 3월 1일 네 방향에서 일제히 허투아라를 향해 진격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좌익북로군을 이끌던 총병 두송杜松이 약속을 어기고 하루 먼저 출발했다가 싸얼후 산에서 후금군 복병의 역습에 걸려 전멸당한다. 이후 명군의 나머지 병력도 모두 후금군에게 각개격파되고 말았으니, 그중 하나가 심하전투였다. 전공을 탐해 약속을 어긴 두송도 문제였지만,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집중시켜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병력을 넷으로 분산시킨 것이 근본적인 실책이었다. 총사령관인 경략 양호가 네 명의 현장 지휘관들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책임도 컸다.

이 같은 실상을 염두에 두고 서광계는 명군이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고 단언했고, 황인우는 명군은 그저 후금군이 실수를 저지르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더 나아가 ‘싸얼후 패전은 황제의 태만함, 격렬한 당쟁, 환관의 발호, 재정의 고갈 등 당시 명이 안고 있던 구조적이고 총체적인 문제점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조선군은 결국 이처럼 ‘준비되지 않은’ 명군 지휘부의 강요와 닦달에 떠밀려 군량 보급로도 확보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행군하다가 후금군의 기습을 받아야 했던 셈이다.

싸얼후전투, 나아가 심하전투의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 이후 심광세 등이 패전의 모든 책임을 강홍립과 광해군에게 돌린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변(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 정권을 전복시킨 것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실제로 심하전투 이후 후금의 위세는 더욱 커졌다. 후금은 1621년 요동을 완전히 점령했다. 이제 북경과 가까운 요서까지 후금군의 위협에 노출되자 다급해진 명은 ‘배후 거점’ 조선을 더 확실하게 끌어들이려 했다. 1621년 6월, 요동 경략 웅정필熊廷弼은 삼방포치책三方布置策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내놓았다. 광녕 등지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고, 천진과 산동의 수군을 이용하고, 조선을 시켜 압록강 부근에서 후금을 견제한다는 전략이었다. 수세에 처할수록 조선을 이이제이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명의 욕구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해 명은 감군어사 양지원을 조선에 보내 다시 원병을 파견하라고 요구했다. 광해군은 확답을 피하며 요구를 따르지 않았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  김시덕 / 메디치미디어/ 2015.04.05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패권을 두고 누르하치 세력과 반누르하치 연합군이 충돌한 것이 1619년의 사르후 전투다. 잘 알려져 있듯이, 후금과 명이라는 양대 세력의 충돌에서 중립을 유지하고자 한 광해군은 조선군에 소극적인 대응을 명했다. …… 전투 중에 포로가 된 강홍립은, 조선군이 자발적으로 이 전투에 참전한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갚기 위해 할 수 없이 온 것이라고 변명했다. 누르하치의 일대기인 『만주실록』권5에는 강홍립의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우리 병사들이 이 전쟁에 원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왜자국(倭字國, 일본)이 우리 조선을 공격하여 토지와 성을 모두 약탈했었습니다. 그 환란(患亂)에 대명(大明)의 군사가 우리를 도와 왜자를 물리쳤습니다. 그 보답이라고 우리를 데리러 왔습니다. 당신들이 살려준다 하면 우리는 투항하겠습니다. 우리 병사들이 대명의 군대에 합류하여 간 자들을 당신들이 모두 죽였습니다. 우리의 이 영(營)에는 조선인뿐입니다. 대명의 한 유격(遊擊) 관원과 그를 따라온 병사들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잡아 당신들에게 보내겠습니다.

 

누르하치는 명이나 몽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충돌할 요소가 적은 조선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

자신에 적대한 모든 세력과의 충돌에서 대승을 거둔 누르하치는 이제 랴오둥반도로 세력을 확장코자 했다. 사르후 전투 후에 조선에 유화적인 자세를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몽골 세력에도 친근한 언사로 접근했다. 그는 당시 몽골에서 가장 강력했던 차하르 몽골의 릭단 칸(Ligdan Khan)에게 1620년에 편지를 보내, “대명과 조선 두 나라는 말이 다를 뿐이지 입은 옷과 머리 모양은 하나같아서 같은 나라처럼 삽니다. 만주와 몽골 우리 두 나라도 말이 다를 뿐이지 입은 옷과 머리 모양은 하나같습니다”라고 몽골을 회유한다(『만주실록』권6). 명과 조선이 언어는 다르지만 문화적으로 하나인 것처럼, 만주와 몽골 역시 언어는 달라도 문화적으로 동일하니 힘을 합치자는 것이었다. 이 밖의 여러 기록에서도 누르하치 등 만주인 집권층은 자신들의 인종적 · 문화적 동질성을 몽골인에게서 추구했으며, 조선은 여진인과는 무관한 존재로 인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힘

–  오항녕 / 사람과글 / 2012년 2월 통권 10호

 

광해군은 처음에는 파병에 반대했다. 명의 요청이 “아직 황제 칙서가 아니”라는 이유였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내내 광해군의 정책을 후원했던 이이첨은 이 사안과 관련해서 광해군과 의견이 달랐다. 광해군은 ‘국내의 형편’을 들어 파병을 미루든지, 아니면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파병할 때도 이런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조선이 억지로 참전한 것이며, 후금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라’고 밀지를 내렸다는 설은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노력하라’고 한 점을 보면, 밀지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전쟁에 임하는 광해군의 태도는 밀지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강홍립에게 내린 하유에서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심하 전투 후에 강홍립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강홍립 등이 직명을 써서 장계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배동관령背東關嶺에 도착해 먼저 후금의 역관(胡譯) 하서국河瑞國을 보내어 후금에게 비밀리에 알리기를. ‘비록 명나라에게 재촉을 당해 여기까지 오기는 했으나 항상 진지의 후면에 있어서 접전하지 않을 계획이다.’고 했기 때문에 전투에 패한 후에도 서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만일 화친이 속히 이루어진다면 신들은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강홍립은 명이 압박해 참전했을 뿐이지 싸움은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고, 전투에 패한 뒤에도 잘 지내고 있다고 보고했다. 후금과 화친이 이루어진다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전달했다. 밀지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위의 광해군의 하유, 강홍립의 장계에 이어 후금에서 온 국서國書에서도 이런 논조는 이어진다.

 

너희 조선이 군대를 일으켜 명을 도와 우리를 친 것에 대해, 우리는 너희가 이번에 온 것은 조선 군대가 원하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바로 명나라 사람들에게 압박을 받아, 일본의 침략 때 너희를 구한 은덕을 갚기 위해 왔을 뿐이리라. …… 이 넓은 천하에 없어야 할 나라가 있겠는가. 어찌 큰 나라만 남고 작은 나라는 모두 멸망해야 하겠는가. 조선의 국왕 너는 우리 두 나라가 평소 원한이나 틈이 없었으니 지금 우리 두 나라가 함께 모의해 명에 대해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이미 명나라를 도왔으니 차마 명을 배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너의 대답을 듣고 싶다.

 

위 국서의 앞부분은 강홍립의 장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 국서에서는 강홍립의 항복을 근거로 조선 국왕 광해군에게 명의 편을 들 것인지, 후금의 편을 들 것인지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강홍립의 말에 근거해, 광해군의 태도를 최종 확인받으려는 후금의 국서라고 판단된다.

 

광해군은 줄곧 밖으로는 기미책을, 안으로는 자강책을 추구한 것처럼 말을 했지만, 그의 대후금 정책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심하 전투’에서의 ‘실리주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강홍립의 말처럼 그가 항복한 뒤 후금에서 ‘잘 지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강홍립의 항복으로 전사한 조선 군사가 1만여 명 중 9천 명 정도였다. ‘항복’이라는 ‘실리주의’의 결과치고는 너무나 처참하다.

 


여허(예헤)의 마지막 날

–  이훈 / 사람과글 / 2014년 1월 통권 33호

 

아래에서는 『만주실록』(manju i yargiyan kooli)의 기록을 참고하여 여허(예헤)가 멸망하는 날 사진 속의 저곳에서 벌어진 광경을 그릴 것이다. 『만주실록』은 여허가 멸망하는 최후의 순간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물론 청 황실이 멸망한 여허를 애도하거나 추념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황실 조상들의 전승을 기념하는 데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실록』의 기록이 후금과 여허 사이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며 왜곡없이 사실을 전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이 기록만큼 상세히 이 날의 사실을 전하는 기록도 달리 없다.

 

1619년 음력 8월 19일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의 군대는 수도인 허투알라를 출발하여 해서여진의 마지막 남은 나라인 여허를 공격하는 장도에 올랐다. 동아시아 역사의 향배를 바꾸어 놓은 사르후 전투가 발발하고 끝난지 불과 5개월 정도 후였다.

……

 

※ 본문 : 만주족 이야기 – 여허의 마지막 날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1618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28권, 광해 10년 5월 5일 임진 5번째기사

박홍구(朴弘耉)·유희분(柳希奮)·이상의(李尙毅)·이이첨(李爾瞻)·민형남(閔馨男)·이시언(李時言)·조정(趙挺)·유공량(柳公亮)·이경전(李慶全)·이충(李沖)·심돈(沈惇)·김신국(金藎國)·장만(張晩)·최관(崔瓘)·남근(南瑾)·우치적(禹致績)·권반(權盼) 등이 헌의(獻議)하였다.

“세상 일은 뜻밖의 환란을 당하는 것도 있고 정상적인 도리에 입각해야 할 것도 있는데, 뜻밖의 환란을 당하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지라도 정상적인 도리에 따르는 것을 어찌 폐해서야 되겠습니까. 삼가 성상의 분부를 받들건대 뜻밖의 변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계시는 것이 지극하고도 곡진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중국 조정은 우리에게 있어 부모의 나라로서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가 있는데 지금 외부로부터 수모를 당하여 우리에게 징병을 요청해 왔고 보면 우리의 도리를 살펴볼 때 어떻게 달려가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병농(兵農)을 구분하지 않아 본래 미리부터 양성해 놓은 군졸도 없는 데다가 거듭 결단이 난 뒤끝에 이제 겨우 상처를 씻고 일어나는 판에 쇠약한 군졸들을 다그쳐 중국 군사를 도와 싸우게 한다면, 정벌하는 데에는 아무 보탬이 없고 우리 나라를 지키는 데에 해만 있을 것이며, 기타 갖가지로 우려할 만한 일이 발생하게 되리라는 것을 신들도 어찌 모르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국적으로 말하면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고 사적인 정리(情理)로 말하더라도 꼭 보답해야 할 의리가 있는 만큼 이쪽으로 보나 저쪽으로 보나 단연코 응원하지 않아서는 안될 입장입니다.

만약 우리 세력이 약하다는 생각만으로 꺼리는 기색을 보였다가 중국 조정에서 대의(大義)에 입각해 책망하여 어찌할 수 없게 된 뒤에야 응원하러 간다면 그 뒤에 져야 할 책임을 면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뒷날 혹시라도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장차 무슨 면목으로 중국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겠습니까.

따라서 지금의 계책으로는, 급히 서둘러 군병을 뽑아서 미리 단속해 두었다가 작전 일자를 듣는 대로 약속 장소에 집결시켜 아침에 명령하면 저녁에 출동할 수 있는 것처럼 해두고 칙유가 도착하는 날 행군하여 달려가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칙유가 내려오지 않는다면 어찌 자문(咨文)을 보내 왔다는 이유만으로 지레 앞서서 강을 건널 수야 있겠습니까.

그리고 양 경략(楊經略)은 우리 나라의 사정을 익숙히 알고 있는 만큼 경략이 나온 뒤에 혹 주선해주는 일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경략이 기꺼이 허락해 주기만 한다면 그런 다행이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사(王師)가 연합해서 정벌할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인데, 만약 경략이 주선해서 정지시켜 주리라는 가능성만 믿고서 미리 대비하고 있지 않다가 만에 하나 칙유가 빨리 내려와 작전 일자가 매우 급박하여 창졸간에 미처 조발(調發)해 보내지 못할 경우, 그때 당할 후회막급의 엄청난 걱정거리들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수어(守禦)할 방략으로는, 우선 군병을 조발해서 강변 일대를 파수하게 하여 빈 틈을 타서 몰려 들어올 걱정에 대비토록 하고, 현재 있는 군량을 한데 모아 군량 조달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한편, 양호(兩湖)의 정예병을 선발해 두었다가 형세를 살펴 진퇴시키며 계속 응원할 계책을 삼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삼가 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1618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27권, 광해 10년 윤4월 26일 갑신 12번째기사

왕이 징병(徵兵)하여 들여보내는 일의 편부(便否)에 대해서 2품(品) 이상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비변사가 명패(名牌)를 내주기를 청한 뒤 회의하여 그 내용을 봉(封)해서 들였다. 【이때 왕이 징병을 요청해 온 일에 응하고 싶지 않아 누차 비국에 분부하여, 요동(遼東)·광령(廣寧)의 각 아문에 자문(咨文)을 보내 저지해 보도록 하였는데, 묘당에서 의견을 고집하며 따르지 않자 조정의 의논을 널리 거두라고 명한 것이었다. 이에 2품 이상이 아뢰면서 목소리를 합쳐 같은 내용으로 청하였으니, 비록 간사한 원흉(元兇)이라 하더라도 대의(大義)를 범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윤휘(尹暉)가 앞장 서서 보내면 안된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황중윤(黃中允)·조찬한(趙纘韓)·이위경(李偉卿)·임연(任兗)의 무리는 왕의 의중을 탐색하여 아첨하려고 속임수로 가득 찬 도리에 어긋나는 말로 공공연히 헌의(獻議)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끝내는 기미년 전역(戰役)에서, 역관(譯官)을 보내 오랑캐와 통하고는 두 원수(元帥)가 투항하게 되는 결과를 빚게끔 하고 말았다. 안으로는 군모(君母)를 감금하고 밖으로는 황명(皇命)을 거부하여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말았는데 〈이러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라 하겠다.〉 】

 

 

1618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28권, 광해 10년 5월 5일 임진 5번째기사

박자흥이 의논드렸다.

“징병(徵兵)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본래 묘당에서 훌륭하게 헤아리고 있을 것이니 신이 감히 섣불리 의논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나름대로 살펴보건대, 노추(老酋)가 처음에 용호장(龍虎將)으로 있을 때는 그 세력이 미미했는데 건주(建州)의 왕으로 봉(封)함을 받은 뒤부터는 세력이 점점 커져 동쪽으로 홀온(忽溫)을 병탄하고 북쪽으로 몽고(蒙古)와 혼인관계를 맺는가 하면 서쪽으로 여허(如許)를 위협하는 등 이미 세력이 극도로 팽창되었습니다.

시험삼아 호서(胡書)를 가지고 말해 보건대 처음에는 녹봉(祿俸)과 담비 값을 요구하는 데 불과할 뿐이었으나 지금 와서는 중국 조정을 남조(南朝)라고 하면서 얼굴을 바꾸고 땅을 쟁탈하려고까지 하고 있으며 곧바로 또 조위총(趙位寵) 의 일을 제기하여 우리 나라를 유혹하며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자를 알지 못하는 오랑캐가 위총에 대한 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여튼 남조는 중국을 가리키고 위총은 우리 나라를 말하는데 이미 중국을 범했고 보면 우리 나라의 변경을 침범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노추가 이미 1만 병력을 채웠는데 장창(長槍)과 화기(火器)를 사용하고 있다 합니다. 여기에 또 중국의 기교까지 겸비했으니 만약 불행히도 요광(遼廣)을 지키기 어렵게 된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장차 어떻게 계책을 할 것입니까. 그리고 가령 노추가 서북 지방을 침범해 온다면 중국 조정에 위급함을 고하여 구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지금은 속히 요역(徭役)을 견감(蠲減)하고 정비하는 데 정신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며, 부적합한 수령이나 변장(邊將)은 갈아버리고 미비된 성지(城池)와 기계들을 조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회자(回咨)를 보내면서 ‘우리 나라의 존망은 중국 조정에 달려 있다. 부득이 노추를 토벌하게 된다면 어찌 감히 우리 나라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대기하지 않겠는가. 다만 원래부터 우리 나라의 병력은 너무나도 취약한 데다 야전(野戰)을 더욱 못하는 단점이 있으니, 만에 하나 전쟁 마당에 나서서 먼저 움직이면 천위(天威)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 또 우리 나라의 서북 일대는 노추의 소굴과 서로 맞닿아 있는데 국경에 병마를 주둔시켜 놓고 기각의 형세를 펼쳐 보인다면 그 소문을 듣고 오랑캐가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감히 모든 힘을 기울여 천위에 맞서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면 징병을 요구한 일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뒷날 할 말이 또한 있게 될 것입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

 

 

1618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28권, 광해 10년 5월 29일 병진 3번째기사

평안도 절도사 김경서(金景瑞)가 장계하기를,

“만포 첨사(滿浦僉使) 장후완(蔣後琬)이 치보(馳報)하기를 ‘이번 5월 16일에 말을 탄 호인(胡人) 12명이 국경 건너편에 와서 통사(通事)를 부르기에 즉시 통사를 시켜 물어보게 하였더니 갖고 온 문서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가져다가 겉봉을 보건대 「조선 국왕은 뜯어보라.」고 제목을 달았기에 너무나도 한심해서 통사를 시켜 개유(開諭)하기를 「우리 나라는 너희 장수와는 사체가 같지 않다. 예전부터 문서를 서로 통하는 규례(規例)를 보면 곧장 조정에 전달하는 예(禮)가 없으니 받아들이기가 무척 곤란하다.」고 하면서 반복해서 타이르고 전후의 문서를 모두 내주었더니 차호(差胡)가 말하기를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서 편지를 갖고 나왔을 뿐이다. 사체가 그러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구박하며 되돌려 준다는 것이 형세상 어렵기에 우선 호관(胡館)에 머물게 하고 엄한 말로 타이르는 한편 술과 고기를 후하게 대접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 뒤에 여진 훈도(女眞訓導) 방응두(房應斗)와 향통사(鄕通事) 하세국(河世國) 등을 시켜 오랑캐의 내부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차호가 대답하기를 「우리가 바야흐로 군대를 모아 중국 장수와 싸우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서로들 드나들다 보면 군기(軍機)가 누설되는 폐단이 없지 않겠기에 일체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 이번에 군대를 일으키게 된 것은 요동(遼東)에서 우리 장수의 조부(祖父)를 죽였고 또 여허성(如許城) 안에 중국 장수를 보내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켰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이를 원망하며 수년 간 군사를 훈련시켜 오다가 지난 4월 15일에 우리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무순(撫順) 등 4진(鎭)을 한꺼번에 격멸하였다. 그런 뒤에 한 곳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노획한 우마(牛馬)·포물(布物)·궁전(弓箭) 및 포로로 잡은 중국인을 점검해 보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무순을 지키던 장수는 투항해서 생포되었는데, 우리 장수의 막내딸을 그에게 시집보내 현재 우리 성안에서 같이 살게 하고 있다. 또 5월 그믐이나 6월 초승께 여허에 가서 격파한 뒤에 그대로 요동과 광령(廣寧)으로 향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날씨가 무덥고 장맛비가 오는 데다 수목이 울창하기 때문에 현재 확정짓지는 못하고 있다. 포로로 잡힌 중국인 1천여 명은 즉각 머리를 깎고 우리 복장을 갖추게 한 뒤 선봉으로 삼고 있다. 조선은 우리 조정과 신의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만약 요동에서 조선에 청병(請兵)할 경우에는 회령(會寧)·삼수(三水)·만포(滿浦) 등의 곳에 우리 장수가 한 부대의 병마를 보내 공격하도록 할 것이다. 조선은 우리 장수와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으니 삼가 강토나 지키면서 군대를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 하기에, 대답하기를 「중국 조정이 2백 년 동안 쌓아온 국력을 가지고 너희 소추(小酋)를 상대하는 것은 태산으로 계란을 누르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외국을 불러 구조를 청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문답하는 사이에 어투가 매우 거칠었습니다. 그런데 관(關)에 들어올 때 성에 비치된 기계의 허실을 유심히 살피는 듯하였습니다. 호서(胡書) 본문은 호관(胡館)에 놔두고 등서하여 올려보냅니다.’ 하였습니다.

대개 이 적이 중국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우리 나라에 글을 보내 이해 관계를 따지게까지 하고 있으니 더욱 통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가 침략해 올 염려가 중국 조정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변경 역시 어느 때 침략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군사 대비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미 뽑은 황연도(黃延道)의 군병은 숙천(肅川) 등 지역에 내보내 주둔시키고, 본도 군병의 경우는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 등을 본도 수령으로 겸차(兼差)시킨 뒤 각각 병력을 인솔하고 맡은 지역에 가 주둔케 하면서 조련하며 변방의 사태에 대비하다가 즉각 달려가 구원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와 함께 도내의 물력(物力)이 여유있는 고을 및 강변의 수령도 무반(武班)으로 바꿔 차임한 뒤 군병을 단속하고 있다가 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는 대로 달려가 구원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방비책이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호서(胡書)를 잇달아 두 번이나 위에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보면 필시 뜻밖의 환란이 있게 될 것인데, 호인(胡人)에 대한 방비책으로는 성을 지키며 청야(淸野)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강변 일대를 말하건대 강계(江界)·만포(滿浦)·창성(昌城)·삭주(朔州)·의주(義州) 등 약간의 성이 있을 뿐이고 그 나머지는 성이라고 해야 한 길 남짓한데 불과하고 해자(垓字)라고 해야 몇 자를 넘지 않으니 결코 들어가서 수비하기가 어렵습니다. 내지(內地)의 용강(龍岡)·안주(安州)·평양(平壤)의 성들은 모두 지킬 만한 곳입니다만 이미 오래 전부터 폐기된 상태에 있어 창졸간에 수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영변(寧邊)의 한 성만은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사면의 산이 높아 사수(死守)할 만한 곳인 데도 오래도록 수리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데, 수선해 쌓자면 적이 이르기 전에 백성이 먼저 농사를 망치고 말 것입니다. 군병을 뽑아 내보내 주둔시키는 일과 성들을 수축하는 일 등에 대해 묘당을 시켜 비변사에 계하해서 속히 지휘하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이번의 호서 및 만포에서 문답한 이야기는 흉참하기 그지없습니다. 심지어는 7종(宗)이 고뇌하며 한스럽게 여겨 중국 조정과 원수를 맺었다고 하면서 끝에 가서는 하늘이 말없이 도와주시어 뜻을 이루도록 해 주었다고 하는 등 한편으로는 뜻을 얻은 것을 과시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변방을 겁주고 있습니다. 또 이번에 온 호인의 행동이 거친 것 또한 전일에 비할 바가 아닌 것으로서 침범당할 근심이 오늘날 박두했으니 본도의 일을 속히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황연도의 군병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이미 부대별로 들어가 방어하도록 분부하셨는데, 주둔할 곳에 대해서는 순찰사와 자세히 의논하여 진퇴해야 하겠습니다. 방어사와 조방장을 수령으로 겸차(兼差)하는 일과 도내의 수령을 무반으로 바꿔 임명하는 일은 조정에서 알아서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안주성의 수비에 대한 일은 본사에서 ‘하유하시어 제때에 수리를 해서 꼭 지킬 수 있도록 하라.’고 청한 결과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곽산(郭山)의 성은 안주와 멀지 않아 성원(聲援)할 수 있고 형세가 가장 좋으니 먼저 수축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평양과 영변 등 지역은 백성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예전부터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논이 한두 번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도의 근본이 되는 지역을 또한 헛되이 버려둘 수는 없으니 도내의 물력을 참작해서 혹시라도 세월만 보내며 고식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추진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개 흉봉(兇鋒)이 일단 중국 조정으로 돌입한만큼 다음에는 우리 나라로 군대를 돌릴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이 점을 십분 유념해 정비해 둠으로써 뒷날 적기(賊騎)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감사에게 아울러 행이(行移)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1618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31권, 광해 10년 8월 5일 신유 4번째기사

의주 부윤이, 노적이 청하보(淸河堡)를 함락시켰다고 치계하였다.

 

 

1619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36권, 광해 11년 1월 9일 계사 1번째기사

비변사에 전교하였다.

“도원수 이하가 적의 소굴을 정벌하러 들어가고 난 뒤에는 순변사만으로 방어해야 하므로 군대를 거느리는 데에 허술한 점이 많을 것이다. 방비에 관계된 제반사를 다시 요리하여 지시하고, 함경 남북도를 방비하는 계책도 착실히 계획하여 급히 지시하라.”

 

 

1619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38권, 광해 11년 3월 2일 을유 2번째기사

원수의 군대가 심하(深河) 지방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치계하였다.

“신은 도독을 따라 중영(中營)에, 김경서(金敬瑞)는 우영(右營)에 있으면서 대열을 지은 채로 30리 가량 행군하여 심하 방면에 도착했는데 오랑캐의 목책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적의 기병 3백여 명이 와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 유격(喬遊擊)과 유길룡(劉吉龍) 등이 일시에 진격하자 적은 패하여 달아났는데, 중국 군대가 추격하여 매우 많은 적병을 죽였습니다. 패한 적의 기병 1백여 명이 궁지에 몰려 산으로 올라가자 홍립이 독부(督府)의 분부를 받들어 중영의 장수 문희성(文希聖)으로 하여금 진격하게 하였고, 경서도 우영의 정예병을 이끌고 추격하였습니다. 그런데 희성이 화살에 맞아 손을 다치고 군사들도 다쳤으므로 신이 중영의 안여눌(安汝訥)과 수하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산위로 전진하고 희성의 군사들은 영으로 내려가서 쉬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군관 노의남(盧毅男), 가량장(架梁將) 김흡(金洽), 별대장(別隊將) 한응룡(韓應龍) 등으로 하여금 화병(火兵)을 거느리고 육박전을 하게 하였는데, 오랑캐가 화살을 빗발같이 쏘아댔으므로 싸우다가 후퇴하고 싸우다가는 후퇴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김흡이 용감하게 돌입하자 적은 퇴각하여 깎아지른 벼랑에 숨어서 나와서 쏘다가 다시 숨곤 하였는데 절벽이 깎아지른 듯하여 발을 디딜 수 없어서 공격해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나무에 의지한 채로 서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활·화살·조총을 어지럽게 마구 발사하는 가운에 죽은 자가 태반이었는데, 중국인들은 앞을 다투어 적의 머리를 베었으나 우리 병사들은 힘써 응전할 뿐이었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에야 신이 징을 쳐서 병사들을 퇴각시켰습니다. 어쨌거나 군대에 현재 양식이 없어 근심이 눈앞에 닥쳤으니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1619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38권, 광해 11년 3월 3일 병술 3번째기사

비밀리에 비변사에 전교하였다.

“중국의 동쪽 방면의 군대가 매우 약하여 오직 우리 나라 군대만을 믿고 있다고 하니, 원수의 장계를 보고 나는 한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당초에 내가 염려했던 것이 바로 오늘과 같은 근심이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군대도 이렇게 약하다고 하는데 훈련도 받지 않은 나약한 우리 나라의 군사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이렇게 나약한 군사들을 호랑이 굴로 몰아대었으니 전쟁에 지는 것만으로 끝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 나라에 말할 수 없는 근심이 닥쳐올 것인데, 본사는 이 점을 생각하고 있는가?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오직 영건을 정지시키는 것만을 첫번째 급무로 여기고 있는데, 영건을 중지하기만 하면 노추(奴酋)의 머리를 효시하고 그의 뜰을 쟁기질할 수 있겠는가. 임금이 지금 물과 불 속에 빠져 있는데 신하된 자가 위태로운 곳에 그대로 있으라고 힘써 권하니, 이것이 과연 신하의 의리란 말인가. 경박한 젊은 무리들이야 국가의 구례(舊例)를 제대로 모르니 나무랄 것도 없다 치더라도 나이가 지긋한 재신(宰臣)들조차도 임금의 위태로움을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할 뿐 명을 받들어 거처를 옮기려는 뜻이 없으니, 우리 나라의 인심이 각박하다고 할 만하다. 지금 이후로 영건하는 일에 대하여 다시는 말하지 말고, 마무리를 잘 지을 수 있는 계책을 여러 가지로 강구하여 조속히 해결해 나가도록 하라.”

 

 

1619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38권, 광해 11년 3월 12일 을미 1번째기사

평안 감사가 치계하기를,

“중국 대군(大軍)과 우리 삼영(三營)의 군대가 4일 삼하(三河)에서 크게 패전하였습니다. 이 때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선두에서 행군하였고, 도독이 중간에 있었으며 뒤이어 우리 나라 좌·우영이 전진하였고, 원수는 중영(中營)을 거느리고 뒤에 있었습니다. 적은 패한 개철(開鐵)·무순(撫順) 두 방면의 군대를 회군(回軍)하여 동쪽으로 나와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켜 두고 있었는데, 교 유격이 〈앞장서 가다가〉 갑자기 【부거(富車) 지방에서 노추(奴酋)의 복병을】 만나 전군이 패하고 혼자만 겨우 살아났습니다. 도독이 선봉 군대가 불리한 것을 보고 군사들을 독촉하고 전진해 다가갔으나, 적의 대군이 갑자기 이르러 산과 들판을 가득 메우고 철기(鐵騎)가 마구 돌격해 와서 그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구 깔아 뭉개고 죽여대는 바람에 전군이 다 죽었고, 도독 이하 장관들은 화약포 위에 앉아서 불을 질러 자살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좌영의 장수 김응하(金應河)가 뒤를 이어 전진하여 들판에 포진하고 말을 막는 나무를 설치하였으나 군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적이 승세를 타고 육박해 오자 응하는 화포를 일제히 쏘도록 명했는데, 적의 기병 중에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재차 진격하였다가 재차 후퇴하는 순간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어닥쳐 먼지와 모래로 천지가 캄캄해졌고,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서 화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적이 철기로 짓밟아대는 바람에 좌영의 군대가 마침내 패하여 거의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응하는 혼자서 큰 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시위를 당기는 족족 명중시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적은 감히 다가갈 수가 없자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슴을 관통했는데도 그는 잡은 활을 놓지 않아 오랑캐조차도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약 이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하고는, ‘의류 장군(依柳將軍)’ 이라고 불렀습니다. 우영의 군대는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모두 섬멸되었고, 원수는 중영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가 험준한 곳에 의거했으나, 형세가 고립되고 약한데다가 병졸들은 이틀 동안이나 먹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적이 무리를 다 동원하여 일제히 포위해오자 병졸들은 필시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분개하여 싸우려 하였는데, 적이 우리 나라의 오랑캐말 역관인 하서국(河瑞國)을 불러 강화를 하고 무장을 풀자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경서(金景瑞)가 먼저 오랑캐 진영으로 가서 약속을 하고 돌아왔는데 또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와서 맹세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중국의 패잔병 수백 명이 언덕에다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적이 우리 군대에다 대고 ‘너희 진영에 있는 중국인을 모두 내보내라.’고 소리치고, 또 ‘중국 진영에 있는 조선인을 모두 돌려보내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때 교 유격이 아군에게 와서 몸을 숨기려고 하다가 우리 나라가 오랑캐와 강화를 맺으려는 것을 보고는 즉시 태도가 달라져 작은 쪽지에다 글을 써서 자신의 가정(家丁)에게 주면서 요동에 있는 그의 아들에게 전하라고 하고는 즉시 활시위로 목을 매었는데, 우리 나라의 장수가 구해내자 낭떠러지로 몸을 던져 죽고 말았습니다. 홍립 등이 중국 군사를 다 찾아내어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자 적은 그들을 마구 때려서 죽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홍립은 편복(便服) 차림으로, 경서는 투구와 갑옷을 벗어 〈오랑캐 깃발 아래에 세워 두고〉 오랑캐 진영으로 갔는데, 적은 홍립과 경서로 하여금 삼군(三軍)을 타일러 갑옷을 벗고 와서 항복하게 하였습니다.

백(白)씨 성을 가진 호남(湖南)의 무사가 이민환(李民寏)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항복할 뜻을 이미 정했다면 공은 막부의 계책에 참여했었으면서 어찌하여 군막으로 나아가 대의로써 꾸짖지 않았는가. 그렇게 해서 두 원수를 목베어 삼군을 격려하여 한 번 싸우다가 죽는 것이 노추에게 무릎을 꿇어 천하 만세의 욕이 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였지만, 민환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부하 장수 이일원(李一元)·안여눌(安汝訥)·문희성(文希聖)·박난영(朴蘭英)·정응정(鄭應井)·김원복(金元福)·오신남(吳信男) 등과 함께 제각기 거느린 군졸과 말을 인솔하여 무기를 버리고 갑옷을 벗은 채로 오랑캐 진영으로 가서 항복했는데, 적은 홍립과 경서와 장수들로 하여금 군졸들을 거느리고 앞장서게 하고 적병으로 둘러싼 채로 노추(奴酋)의 목책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노추는 홍립과 경서만 목책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그밖의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성밖에 두고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싸움에 개철 총병(開鐵摠兵) 두송(杜松)이 공을 탐내어 경솔히 전진하는 바람에 전군이 패몰함으로써 적병이 동쪽 방면에 전념하게 되어 끝내는 사방의 군대가 모두 패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후 오랑캐에게 잡혔던 장수와 군사들이 대부분 달아나 동쪽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굶주림으로 골짜기에서 뒹굴거나 오랑캐에게 잡혀 거의 다 죽고 돌아온 자는 겨우 수천 명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1619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44권, 광해 11년 9월 3일 임오 3번째기사

치제관(致祭官) 목대흠(睦大欽)을 파견하여 진강(鎭江)으로 가서 총병 유정(劉綎)과 유격(遊擊) 교일기(喬一琦)의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였다.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유 총병과 교 유격은 모두 장렬하게 죽었다. 유 총병은 바로 정유년에 왜적을 정벌할 때의 대장이었다.

 


관련 그림

 

 

2

– 사르후 전투 전의 명과 후금

 

 

3

– 명나라 말 북쪽지방의 명칭과 사르후의 위치

 

 

4

– 명과 후금이 1619년 사르후 산에서 벌인 전투를 묘사한 그림. 왼쪽에서 말을 타고 활을 당기는 쪽이 후금군이고, 오른쪽에서 총포를 겨누고 있는 쪽이 명군이다. 사르후전투는 후금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5

– 유정의 군대를 공격하는 후금 기병 <만주실록>

 

 

6

– 「파진대적도」 김응하의 전승을 기리는 문집인 『충렬록』에 실린 것으로, 조선군과 후금군이 맞서 있는 장면이다. 조선군의 앞줄에는 총을 든 조총수, 그 뒷줄에는 활을 지닌 궁수가 도열해 있다.

 

 

7

– 버드나무 아래에서 싸우는 김응하 (위) / 항복하는 강홍립 (아래), 그는 정묘호란 때 후금의 길잡이가 된다.

 

충무공 김응하 장군

<광해군일기> 1619년 3월 12일에 나오는 기록을 살펴보자. 심하 전투 이후 평안 감사가 올린 보고이다.

우리나라 좌영의 장수 김응하(金應河)가 뒤를 이어 전진하여 들판에 포진하고 말을 막는 나무를 설치하였으나 군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적이 승세를 타고 육박해 오자 김응하는 화포를 일제히 쏘도록 명했는데, 적의 기병 중에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재차 진격하였다가 재차 후퇴하는 순간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어 닥쳐 먼지와 모래로 천지가 캄캄해졌고,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서 화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적이 철기로 짓밟아대는 바람에 좌영의 군대가 마침내 패하여 거의 다 죽고 말았습니다.

김응하는 혼자서 큰 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시위를 당기는 족족 명중시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적은 감히 다가갈 수가 없자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슴을 관통했는데도 그는 잡은 활을 놓지 않아 오랑캐조차도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약 이 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하고는, ‘의류 장군(依柳將軍)’ 이라고 불렀습니다.

위에서 보듯 의류 장군이라고도 하고, 버드나무 아래에서 전사했다고 하여 ‘유하 장군(柳下將軍)’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무공으로 명나라에서는 요동백(遼東伯)에 추증했고, 광해군도 충렬사라는 사당을 세워주었다. 훗날 현종 11년(1670) 김응하 장군에겐 이순신 장군과 같은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주었다.

김응하 추모를 통해 심하전투 당시 ‘조선군도 목숨을 바쳐 분전했다’는 것, ‘조선이 거국적으로 그를 추모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강홍립이 고의적으로 항복했다’고 여기는 명의 의심을 해소하려는 계책으로도 볼 수 있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사르후 전투

네이버 지식백과(한민족 전투) : 사르후전투

네이버 지식백과(중국상하오천년사) : 살이호대전

네이버 캐스트 : 무너지는 명나라

한국사 콘텐츠 : 심하전투

[병자호란 다시 읽기] (21)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Ⅲ

명(明)을 정복한 여진족 청(淸)왕조

<최종병기 활>이 놓쳤던 광해군의 앞잡이!

사르후전투 <2> 누르하치의 도박과 조선군의 행군 지연

사르후전투 <3> 만주족의 병력 재배치와 유정의 최후

사르후 전투 (명청교체의 판가름) – 16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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