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 세상의 진실을 들여다보는 통찰 – 촘스키와의 대화

드니 로베르, 베로니카 자라쇼비치 인터뷰 / 레미 말랭그레 삽화 /강주헌 역 / 시대의 창 / 2002년 11월

 

‘세상일을 염려하는 사람’ 노엄 촘스키(Avram Noam Chomsky)는 미국의 언어학자, 철학자, 정치운동가, 아나키스트, 저술가이자 진보적 교수이며, 미국에는 얼마없는 좌파학자이기도 하다. 현재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언어학과 교수이다.

 

촘스키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촘스키는 매트릭스같은 세상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세상에 대한 고민을 유도하며 ‘알아라, 생각 좀 하고 살아라’하고 외치는 것 같다.

 

이 책으로 알게된 새로운 사실들, 세상을 한 번 더 곰곰히 생각해 볼 내용 등을 잊지 않게 발췌 정리해 본다.

 


선생님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입니다. 영원한 반항자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한편으로 선생님은 ‘지적인 자기 방어법’을 가르치고, 어떤 형태의 조작에도 대비할 수 있는 열쇠를 알려 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거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수천 년 전부터 그랬지만, 지식인의 역활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수필가이자 철학자였던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도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민중이 우리 멱살을 잡지 않도록 민중을 교육시켜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민중을 소극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우리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많은 부분에서 지식인이 이런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다 보면 선생님의 표현대로 ‘동의의 조작’이란 것에 저항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지식인들이 ‘동의의 조작’에도 일익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동의의 조작’이란 표현은 원래 내 것이 아닙니다.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에게 빌려온 표현입니다. 리프먼은 20세기 미국 언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로 진보적 사상가였습니다. 1920년대부터 그는 대중을 조절해서 동의를 조작해내기 위한 선전의 중요성에 주목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적용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은 자명합니다. ‘책임 있는’ 시민, 즉 레닌주의를 필연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는 전위부대가 한 나라를 끌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얌전히 있기만 하면 됩니다. 따라서 그들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군인처럼 일사분란하게 행동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

 

선생님은 오늘날의 권력을 무엇이라 정의하시겠습니까?
권력의 중심은 부자 나라들에 있습니다. G3, 때로는 G8로 일컫는 최강대국들,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 금융기관과 국제기관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들어 대부분의 경제활동이 과점寡占 형태로 이뤄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과점 형태의 시장으로 변해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강력하고 전제적인 힘을 지닌 소수 집단이 초강대국을 등에 업고, 때로는 국가의 정책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면서 일부 경제 경제 분야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다국적 기업이 국가보다 막강한 힘을 지녔다고 생각하십니까?
두 세력의 힘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기준은 없습니다. 국가와 다국적 기업은 운영 방식이 다릅니다.

기업은 독재적 성격을 띤 기관입니다. 현대의 다국적 기업들은 “유기적 존재가 개인에 앞선 특권을 갖는다”라는 원칙에 따라 운영됩니다. 그런데 20세기를 피로 물들인 두 가지 형태의 독재체제, 즉 볼셰비키즘과 파시즘도 바로 이런 원칙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요컨대 이 셋은 개인에게 절대적인 권리를 인정한 전통 자유주의에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다국적 기업은 이제 엄청난 힘을 과시하면서, 경제 · 사회 · 정치 등을 좌우하는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국가 정책은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하면서까지 다국적 기업의 권한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서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시민의 권한을 개인 기업에 양도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입니다. 다국적 기업은 국민 위에 군림하지만, 국민 앞에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민주 사회가 공공의 이익이란 대의大義를 상실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민주 사회의 어떤 집단이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것입니다. 엘리트 집단은 그들의 특권과 권한을 강화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이 넋을 놓고 있지는 않습니다. 끊임없이 투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발전이 있게 마련입니다. 실제로 지난 수백 년 동안 인권이 향상된 것은 사실입니다. 무척이나 느릿한 발전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물론 권력층은 이런 변화를 막으려 안간힘을 다합니다. 하지만 변화의 물결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다툼은 계속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권력집단의 행태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종교집단이나 종교기관이 막후에서나 전면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티칸이 자본주의를 비난한다면 그 효과는 무시할 정도일 것입니다. 아니,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실제로 1999년 요한 바오르 2세는 신년을 맞아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신자유주의, 둘 모두 인간을 파괴하는 이데올로기라며 격렬하게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의 메시지는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교황청이 세르비아에 대한 공습을 침략이라 표현하며 비난했지만, 그 소식은 신문의 한 귀퉁이에 짤막한 기사로 실렸을 뿐입니다. 바티칸의 영향력은 이런 것입니다.

 

권력은 피라미드 구조라는 속설을 믿습니까?
피라미드의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독재주의 체제가 아닙니다. 물론 독재적 성격을 띤 집단들이 이 세상을 활보하지만, 이 세상을 움직이는 시스템은 결코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때때로 민중의 과격한 조직들이 권력자들에게 양보를 받아낼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 권력은 어둠 속에서 정기적으로 은밀히 만나는 사람들이 쥐고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그런 회합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빌데베르크 그룹이나 삼각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의 회합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물론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연례 모임인 다보스 경제 포럼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임들은 그저 사교적 모임에 불과합니다. 유치한 수준의 모임이라 할까요? 이런 모임에서는 어떤 중대한 결정도 내려지지 않습니다. 실질적인 결정권자는 다보스에 얼굴을 비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은밀히 따로 만납니다.

 

『조작된 동의: 매스미디어의 정치경제학』에서 선생님은 한 집단의 사회 지배력이 커질수록 그 집단은 정치인과 언론인을 앞세워 권력을 강화시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그처럼 정교한 전략을 구사한다고 믿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정치 권력자들,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들, 홍보 관련 기업들에서 어찌 그런 전략을 생각지 않겠습니까? 정교하게 꾸며진 전략의 결실이 바로 여론 조작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런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기업계 지도자의 표현대로 ‘개똥철학’ 즉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천박한 것’에 집착하는 인생관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주면서 장시간 노동을 기꺼이 수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 타인과의 연대 등과 같은 위험한 생각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요컨대 인간의 가치를 완전히 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테크놀로지의 발달, 금융거래의 가속화 등이 자본주의의 성격을 확연히 바꿔놓았습니다. 이 엄청난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과거의 기준을 벗어나야 하기 때문인지 누구도 지금까지 그 진실한 모습을 충실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현실과 이론 간의 괴리가…

브레턴우즈 체제는 자본의 흐름을 규제하고 악의적인 투기와 자본 유출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교환율을 조절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이상理想을 지켜낼 방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체제가 1970년대 초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민간 기업, 특히 금융자본이 대대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업자본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금융자본의 이동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우려했던 현상이 전세계에서 일어났습니다. 공공 서비스의 질이 현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사회보장제도가 왜곡되고, 실질임금이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노동시간은 늘어나고 노동조건도 악화되었습니다….

 

이런 자본주의 모델을 대체할 경제 모델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본주의요?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순수한 시장경제의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용과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거대한 공공 분야와, 전체주의적 성격을 띤 거대한 민간 분야가 양분하고 있는 경제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세상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경제체제를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엄청난 권력을 지닌 개인 기업들이 서로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존하면서 위험과 비용을 분산시키는 체제입니다.

 

테크놀로지의 혁신에 탈규제화가 더해지면서 경제체제를 불안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aynes의 이론에 따르면, 금융시장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시장입니다. 금융시장은 집단행동, 즉 부화뇌동적 특징을 띱니다. 그래서 케인즈는 금융시장을 미인경연대회에 비유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경연자들을 개인적 판단에 따라 채점하지 않고, 다른 심사위원들의 판단을 고려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곳이 바로 미인경연대회가 아닙니까! 금융시장과 투기시장도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들의 투자 방향을 짐작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지수가 미친 듯이 널뛰기를 합니다. 대공황에 버금가는 대폭락이 일어나고, 거꾸로 급격히 상승합니다… 이처럼 지수가 등락을 거듭하며 금융시장은 나날이 새로운 기록을 만듭니다. 달리 말하면 일정한 간격으로 두고 금융시장에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며 재앙이 닥칩니다.

 

선생님께서 특별히 우려하는 결과는 어떤 것입니까?
현재의 경제체제가 붕괴된다면 그 이유는 금융위기나 생태환경의 재앙일 가능성이 큽니다. 대중의 각성과 경계 이외에 현 사회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은 없습니다.

 

회계 분산이 더 큰 문제인 듯합니다. 요즘 들어 회계 분산을 위한 거점들이 확산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런 거점들이 지리적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1999년 11월 의회가 중국과의 통상을 승인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만약 모든 것이 미국의 의도대로 진행된다면 미국은 중국의 금융시장까지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중국의 은행들과 투자금융회사들이 모두 미국계 금융기관들에 종속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미국의 목표이자 목적입니다. 미국이 한국에게 시장을 개방하라고 압력을 가했을 때 어떤일이 벌어졌습니까? 한국의 금융시장은 완전히 미국의 지배 하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은행들이 연이어 파산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이제 미국계 금융기관들이 한국의 은행들을 떡 주무르듯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 논리와 기업 논리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맞습니까?
근본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서구의 민주국가들을 누가 지배하고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보십시오!

 

선생님의 논리대로라면 국가는 없어져야 할 대상처럼 생각됩니다….
조금 완곡하게 표현해 봅시다. 권력자에게는 국가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지배하고 비용과 위험을 국민에게 분산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선생님의 설명이 미국에 국한된 것이라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니까 유럽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유럽은 미국에 비해 집단가치를 존중하는 편입니다. 사회민주주의를 경험한 대륙이니까요. 하지만 유럽도 조만간 미국처럼 변할 것일 것입니다.

 

혁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존 생각에 변화가 있을 때 혁명이 일어납니다.
다국적 기업의 횡포를 무너뜨리겠다는 실천적인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의지를 상실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더욱 키워나가야 합니다. 19세기의 정신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19세기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임금 노동은 노예제의 다른 형태일 뿐이라 생각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임금 노동자는 근본에서 노예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미국의 공화당도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국민에게서 이런 생각을 떨쳐내려고 대대적인 선전 공작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되살아난다면, 국민이 사회와 경제를 다시 민주화시키고 인간을 소중히 생각지 않는 힘에 맞서 싸우기 위해 힘을 결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국민운동이 확대되고 권력자들이 폭력으로 억누르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우리 사회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것입니다.

 

선생님을 무정부주의자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요….
무정부주의는 한 마디로 해석하기 힘든 개념입니다. 하지만 고전 자유주의의 직계, 즉 자본주의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무정부주의가 있습니다. 이런 무정부주의자들은 국민에게 자유의 열매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조직의 결성을 촉구하는 데 촛점을 맞춥니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지배구조와 계급구조는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의혹의 대상으로 삼아 그 정당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요즘 상황이 견디기 힘든 지경이라면, 국민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언론에 의해 국민이 세뇌됐기 때문이라 생각하십니까?
언론은 거대한 선전 기계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학교, 인텔리겐차, 그리고 여론에 영향을 미치면서 통제하는 연구기관들이 동원되어 국민을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때때로 국민은 세상사를 완벽하게 꿰뚫어보고 있지만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여론조사에 응한 미국인 대다수가 정부는 국민이 아니라 소수집단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언론은 그 결과를 되풀이해서 보도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대중이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중이 현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시 같은 질문을 드려야겠습니다. 국민이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앞장서서 기존 질서를 뒤바꾸려 한다면 그 대가를 호되게 치러야 할 것입니다.

요컨대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기꺼이 치르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곤경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조직화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된다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을 수월하게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을 파괴하려는 음모가 다각적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선전보다 이런 파괴공작 때문에 국민이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1988년 『조작된 동의Manufacturing Consent』를 발표한 이후, 동의의 조작에 대한 선생님의 이론이 정확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까? 아니면 그 이후로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내 모델은 완벽하게 입증되었습니다.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1990년대에 가장 잔혹한 인종청소가 나토 회원국에서 일어났습니다.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 독일 정부가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터키가 쿠르드 인의 마을들을 초토화시키고 잔혹 행위를 저지르며 2~3백만의 난민을 길 거리로 내쫓을 수 있도록 첨단 무기를 터키에 제공한 장본인들이 뻔뻔스럽게도 불쌍한 난민을 증인으로 내세우며 인종청소를 비난한다는 거짓 증거를 내보였습니다. 지식인들은 길들여졌기 때문일까요? 모두가 목소리를 죽였습니다. “잠깐만! 터키에서 자행되는 인종청소를 반대한다면서 어떻게 터키에 군사원조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항의한 지식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이런 저항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하지만 CNN의 위상이 나날이 커진다고 지적하지 않으셨나요?

예컨대 미국의 3대 텔레비전 방송국 중 하나인 ABC에서 오랫동안 기자로 근무했던 한 친구는 리비아 폭격의 진상에 대해 내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언론매체 모두가 한결같이 입을 다물고 있던 그 사건의 뒷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실제로 리비아 폭격은 텔레비전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대에 맞춰 계획된 역사상 최초의 폭격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3대 텔레비전 방송국이 저녁 뉴스를 시작하는 시간, 즉 동부기준시간으로 정각 19시에 폭격이 계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프랑스가 그들의 영공비행을 허락지 않았기 때문에 폭격기들은 런던에서 이륙해서 지중해를 지나 예정된 시간에 트리폴리를 폭격해야 했습니다. 사전에 교감이 없었다면,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어떻게 현장에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트리폴리에는 지국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언론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지 않았습니까?
워터게이트 사건은 언론과 엘리트 계급이 민주주의에 대해 품고 있는 증오심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사례입니다.
같은 시기에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워터게이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그처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만한 사건이었을까요?

그런데 같은 시기에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언론에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지만 법정에서는 뜨거운 공방이 있었던 사건입니다.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닉슨 행정부 밑에서 연방정부와 연방경찰인 FBI가 합동으로 방첩防諜 프로그램Counter-Intelligence Program(CoIntelPro)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대공對共 프로그램에 대한 법정 다툼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원래 공산당을 분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여성조직, 평화주의자 조직, 흑인 조직 등 모든 반체제조직의 감시로 업무가 확대되었습니다.

CoIntelPro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비해 훨씬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워터게이트는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있었을까요?
워터게이트 사건에서는 그 대상이 권력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누구도 감히 권력자를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못합니다. 가령 당신이 권력자들을 비난한다면 그들이 거센 반격을 가하면서 당신을 미치광이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결국 닉슨이 비도덕적인 인물로 낙인찍히면서 탄핵까지 받은 것은, 그 이전부터 권력자들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닉슨의 그런 용기에 마음속으로 성원을 보냈습니다.

워터게이트는 언론과 지식인의 원칙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권력층은 비난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의 원칙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흑인은 암살해도 상관없지만 권력을 움켜쥔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꼭 머리 속에 새겨두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이 충고보다 현실적인 충고는 달리 없을 것입니다.

 

『조작된 동의』에서 선생님은 언론의 글 쓰기가 전제를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글을 해독해내면 글의 방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언론 보도에는 비밀이 감춰져 있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그렇습니다. 아주 중요한 점을 지적했습니다.
가령 “미국이 남베트남을 보호한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가”라는 주제로 미국이나 유럽에서 토론회가 열린다면, 미국이 남베트남을 보호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보호한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갖는다면 주제 자체가 잘못 선정된 것이라고 항의합니다. 달리 말하면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미국도 침략자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그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남베트남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남베트남을 보호한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냐는 식의 토론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나는 40년 동안 미국 언론의 보도방향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케네디가 남베트남을 공격했다고 지적한 언론 보도는 단 한 건밖에 없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속도 경쟁으로 기억력이 떨어지고 비판정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그것이 목표라는 소문도 있는데요….
비판정신이 실종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속도 경쟁 때문이 아닙니다. 깊이가 없는 커뮤니케이션 탓입니다. 방금 말했듯이 신문을 한 달 뒤에 보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뉴스는 항상 변하는 것이 아닐까요….

속도는 우리에게 사건의 중심에 살고 있다는 환상을 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선전 효과에 100퍼센트 노출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동시성과 즉각성은 사건의 흐름에 우리 몸을 그대로 내맡기게 만듭니다.
내 생각에, 현재의 인식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속도가 아닙니다. 깊이의 상실입니다. 피상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기억을 지워 없애려고 고안된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운영하시면 비용이 훨씬 절감될 텐데요….

인터넷 신문은 그 존재 자체로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존재를 알리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포털의 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포털들이 민간 기업에 의해 운영된다면 인터넷 신문의 사이트를 찾아내기 무척 어렵습니다. 물론 요즘에는 약간만 노력하면 그 사이트를 찾아낼 수 있지만, 인터넷이 상품화될수록 인터넷 신문 사이트에 접근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입니다.

 

결국 애초부터 ‘인종청소’를 종식시킬 생각이 없었다는 뜻입니까?

클린턴 행정부의 전략적 계획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좀처럼 없습니다. 하지만 국가 고위층에서 작성되었지만 대중에게 공개된 자료들을 훑어보면 누구라도 클린턴 행정부의 전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자료들이 국가이익을 위협받을 때마다 미국은 ‘비합리적이고 반드시 보복하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심어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핵무기의 사용도 서슴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이런 진실을 세상이 알아야 합니다.

 

그럼 양식良識을 믿으십니까?
양식만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평등과 자유를 추구한다고 믿을 만한 몇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폭력을 일삼는 친위대원이 될 수도 있고 성인군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환경, 그리고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위키백과 : 노엄 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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