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첨성대 – 국보 제31호

※ 황성열의 세계 – 문화재 : http://yellow.kr/nt.jsp

 

※ 국보 제31호 / 경주 첨성대 (慶州 瞻星臺) / 신라 / 1962년 12월 20일 지정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땅 위로 솟은 우아한 우물 모양을 하고 있는 첨성대는 오래전부터 고대 신라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으나, 지구상에서 그 비슷한 형태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신비에 싸인 유물이다.

 

첨성대도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논란이 많다. 첨성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느 주장이 맞는지 가릴 수도 없고, 또 앞으로도 해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외형으로 보면 전혀 천문대일 것 같지 않은 첨성대가 천문대로 알려지게 된 것은 역사 기록에 근거한다. 첨성대라는 이름이 지니는 사전적 의미(별을 보는 구조물) 뿐만 아니라 ‘천문에 대해서 묻던’ 구조물이었다는 역사 기록을 ‘천문을 관측’하던 구조물로 이해해 받아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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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31호 첨성대

 

1. 첨성대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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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내부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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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회전곡면

– 첨성대를 볼때 시각적으로 가장 특이한 형태는 1단부터 24단까지는 회전곡면을 이루며 그 위 27단까지는 직선으로 이루어졌다. S자형 회전곡면은 태양 그림자 길이의변화로 알 수 있는 황도의 곡선을 수직으로 세워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송민구

건축가이자 전 서울공대,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 송민구의 1980년 첨성대 논문에서 “회전곡면을 이루는 첨성대의 곡선은 태양이 원을 그리며 도는 궤도, 즉 황도의 곡선을 따온 것이다. 동지, 춘추분과 하지를 정점으로 하는 그림자 관측으로 신라인들은 황도가 그리는 곡선을 쉽게 알아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2, 기록상의 첨성대

첨성대에 관한 기록이 정통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첨성대가 미스터리의 대상이 된 것은 구조물의 비중에 비해 그에 관한 기록이 극히 박약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1281)

최초의 기록으로 <삼국유사>「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조(條)에 「별기운시왕대연석축첨성대(別記云是王代鍊石築瞻星臺)」(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 라고만 나와 있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덕왕 재위시(632~646)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첨성대조에 “첨성대는 경주부의 남쪽 월남성에 있는데, 당태종(唐太宗) 정관(貞觀) 7년 계사년(癸巳年: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원형이다. 높이가 19.5척, 위의 둘레가 21.6척, 아래 둘레가 35.7척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해서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설명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1481~1499)

이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천문을 물었다(以候天文)”는 문구만을 덧붙였다.

<동사강목(東史綱目)>(1758)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의 첨성대에서 “천문을 묻고, 요사한 기운을 살폈다”고 되어 있다.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그밖에도 <고려사>,<서운관지 書雲觀志>나 <문헌비고 文獻備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3. 여러가지 주장들

2009년 경주 첨성대의 쓰임새를 둘러싼 논쟁이 KAIST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주최로 있었다. 과학기술계 및 인문사회계 관계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첨성대의 쓰임새를 인문학과 과학으로 풀어보는 제4차 첨성대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1973년 시작한 첨성대 논쟁은 1974년과 1981년에 이어 28년 만에 다시 불붙었다. 그간 학계에선 첨성대가 별 관측 설치물이라는 기존 시각부터 해그림자 측정기, 종교적상징물, 수미산 제단 모형설, 영성단설, 천변관측설, 제천단설, 우물 신앙 및 점성 정치설, 우주우물 상징설 등 다양한 주장이 쏟아져나왔다.

이날 토론에서 이문규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첨성대는 천문현상을 관측하는 신성한 공간”이라며 “시끄러운 일상과는 격리되는 효과를 얻기 위해 지금 남아 있는 형태로 축조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전용훈 일본 교토산교대학 객원연구원은 첨성대가 삼국유사에서 언급하는 ‘그’ 첨성대인지 알 수 없는데다 점치던 점성대라고 볼 근거도 없다”며 “첨성대 존재 자체가 불분명하다”고 공격했다.

김기홍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우물모양을 기반으로 선덕여왕이 도리천에 환생할 성소로 규정했다. 조세환 한양대 도시대학원 교수는 산과 숲, 고분, 우물, 산성의 상징성을 가진 토속신앙과 제단이나 여성, 생산, 풍요, 왕위 세습 강화, 정치 안정, 점성적 제단 등의 의미를 부여해 첨성대 쓰임새를 복합적으로 재해석했다.

김창석 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또 첨성대가 제사 지낼 때 첨성대의 중간 창을 통해 남근 조형물을 던져 넣어 풍요로운 생산과 정치안정을 기원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 관심을 끌었다.

그동안의 첨성대 기능에 대한 연구를 요약해보면 크게 천문대설, 제천단설, 상징물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천문대설에 대한 근거로는 명칭, 건물 수치와 구조 등이 있다. 하지만 출입이 불편하고, 내부공간이 관측에 적합하지 않고 정남향이 아니라는 점 등 반증도 많다. 이에 따라 불교상징물, 천문수학 상징물, 토착신앙과 정치 상징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으며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풍습을 들어 제천단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다.

 

(1) 천문대설

◎ 천문학자인 박창범 고등과학원 교수는 `첨성대는 신라 왕조 관리가 천문관측을 하던 천문대`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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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정자석(안쪽 네모)은 남쪽 변이 정남에 대해 동쪽으로 13도 돌아가 있고 기단석(바깥 네모)은 정남향에 대해 동쪽으로 18.92도 틀어져 있다. 특히 정자석 모서리는 정동에서 남쪽으로 32도, 기단석은 26도를 향하고 있다<위 그림 참조>. 이 때문에 첨성대 방위가 천문관측 활동과 무관하다고 주장됐었다.

그러나 경주지방 동짓날 일출방향은 29.6도이므로 정자석 방향에 의미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첨성대 관측대(정자석) 위에서 완전한 지평선을 볼 수 없고 고도 2.8도부터 태양을 볼 수 있다고 하면 동짓날 태양이 뜨는 방향은 동남 32도가 돼 정자석의 방향과 일치한다”며 “기존 연구에서는 유일하게 송민구가 이를 주목해 석굴암, 부석사 무량수전 등이 동남쪽 30도를 향하는 것과 같은 경향이라고 지적했다”고 밝혔다.

첨성대 관측대가 있는 정자석 모서리를 동지 때 일출방향과 의도적으로 맞춘 것이라면 첨성대는 천변관측은 물론 동지를 알아내는 등 24절기 시작을 알아내는 목적으로 사용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한편 이 모서리 방향은 대략 동남향이므로 팔방위 파악에도 도움이 된다.

박 교수는 또 “첨성대 원형몸통부에서 정자꼴 머리부까지 29층으로 석재를 쌓아 음력 한 달의 날수(29.5)와 일치시키고, 원형몸통부는 27층으로 구성해 달이 공전해 같은 별자리로 돌아오는 주기(27.3일)에 맞추고, 365개(1년 날수 의미) 석재로 몸통 외부를 구성하는 등 첨성대에 부여한 천문상징이 많다”고 주장한 바 있다.

◎ 김봉규 천문연 본부장은 첨성대가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 주장하며 첨성대 건립으로 천문 기록이 10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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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먼저 첨성대에 대해 현대적인 해석을 한 사람은 일제강점기에 조선기상관측소에서 근무했던 일본인 와다 유지(和田雄治)였다. 그는 1910년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의 ‘경주첨성대의 설’에서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가구물을 세우고 혼천의(渾天儀) 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대였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1917년 〈조선고대관측기록 조사보고〉에서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관측을 위해 매일 교대로 오르내리는 데 불편한 점이 많고, 그 위에 목조건물을 세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만일 우물 정(井)자 모양의 꼭대기에 널판을 깔고 위에 혼천의 등을 설치했다면 관측자가 올라갈 계단이나 사다리를 따로 만들어야 하므로 상설 천문대로 사용했다는 의견에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 우리나라 학자인 홍이섭(洪以燮)도 〈조선과학사〉에서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천문관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주 첨성대를 들 수 있고 이것은 현존하는 동양최고의 천문대라고 평가했다.

◎ 첨성대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히 실측하고 연구한 홍사준(洪思俊)은 첨성대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 27단의 내부에 반듯이 누워 중천을 쳐다보며 관측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첨성대가 개천설(蓋天說)에 의거하여 백제인이 세운 신라 천문대라고 보았다.

◎ 박동현(朴同玄)도 첨성대가 개방식 돔 형태를 가진 천문대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 송민구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첨성대의 내용적인 측면은 순수한 천문대로서 기능하였지만, 표현적인 측면에서는 수미산이라는 상징성, 제천의식의 장소라는 종교성, 여왕을 기념하는 기념성 및 당시 수학적인 무한의 개념이 들어 있는 복합적 의미가 있다.”

◎ 서금석 전남대 강사 – 경주 첨성대는 다목적 천문대
단순히 천체만 관측하는 장소가 아니라 1년간의 월일, 해와 달의 운행, 24절기 등을 기록한 책인 역일(曆日)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기구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견해는 8·15해방 전부터 1960년대까지 정설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후 상설천문대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2) 상징물설, 제천단설

◎ 전상운(全相運)은 첨성대가 규표(gnomon)를 중심으로 한 다목적 관측대일 것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개방식 돔으로 관측하기에 불편한 내부구조를 근거로 상설 천문대로 보기 어려우며 백제인들이 주비(周髀)의 법에 따라 세웠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 이와 비슷한 견해로 김용운(金容雲)은 첨성대가 실제로 관측에 사용된 것이 아니며, 다만 수학 및 천문학에 관한 당대의 권위서였던 〈주비산경 周髀算經〉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축조한 상징적인 탑이라고 주장했다.

◎ 역사학자 이용범(李龍範)은 1970년대에 첨성대의 외형이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須彌山)을 닮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불교의 영산인 수미산을 형상화해 제작한 불교적 용도의 제단이었다고 주장해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른바 ‘수미산설’이다.

이 주장은 7세기 초의 신라 사회가 비로소 불교가 크게 융성하기 시작하던 때였다는 사실과, 실제로 첨성대의 외형이 불경에 나오는 수미산을 크게 닮았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가설이었다.

※ 수미산 그림 – 이구치 쓰네노리의 『천문도해(天文圖解)』(1689)에 제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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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래(朴星來)는 첨성대를 넓은 의미의 천문대로 평가하면서도 겉 모양은 불교의 수미산을 좇았으며, 토속신앙에 따른 농업신인 영성(靈星)을 숭배하기 위한 제단이었다고 추측했다.

……

수미산은 불교의 영산으로 아닌게 아니라 첨성대와 비슷한 모양을 지니고 있으며 불경에서 볼 수 있다. 이용범 교수는 7세기 초는 신라에서 불교가 크게 융성하던 시기이고, 따라서 첨성대는 불교 영산의 모양을 본떠 세워진 일종의 제단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필자 역시 당시 이용범 교수의 주장에 상당히 동조했다. 미국 유학중에 일본의 불교서적을 뒤적이다가 수미산 그림을 처음 보고는 당장 우리의 첨성대를 연상했던 필자는 이용범 교수의 주장이 전혀 낯설지 않았고, 당연히 동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 모양이 수미산을 본떴다 하여 그것이 천문 관측과 상관없는 불교의 제단일 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는 첨성대가 모양은 불교의 수미산에서 따 왔지만, 그 기능은 여전히 천문학적인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삼국사기>를 뒤진 끝에 필자는 그 위치가 지금의 첨성대 자리에 해당하는 곳에 신라 당시에는 영성단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신라 사람들은 입추 후의 첫 진일에는 영성단에 제물을 차려 놓고 영성에 감사하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영성이란 농업을 관장하는 별이라 여겨졌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는 신라인들이 농업신인 영성에게 지내는 일종의 추수감사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라 사람들은 왜 영성단 자리에 첨성대를 지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필자의 추측은 다음과 같다. 아마도 신라 사람들은 처음에는 중국 사람들을 따라 영성에 대해 제사를 지내기는 했지만, 점점 그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마침 신라에는 천문 기관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런 천문 기관의 자리로 한때 영성단이었던 자리가 선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영성단 위치에 첨성대를 세우고 영성에 대한 제사도 그 위치에서 계속 지내면서 한편으로는 그 일대에 천문관측 담당자들의 집무처를 건설해 갔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다. 첨성대는 말하자면 신라의 천문 관측소가 자리잡았던 위치에 지금은 유일하게 남아 있게 된 유물이 아닐까. 따라서 718년에 만든 것으로 기록된 누각전이라는 천문관청은 바로 그 부근에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

◎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불교적인 도리천 신앙을 담았다는 주장이 고대사학자 김기홍에 의해서 새로이 제기되었다. 이 새로운 ‘도리천설’은 첨성대가 수미산의 형상을 그대로 모형화한 것이 아니라, 수미산 정상에 위치한 도리천의 세계를 형상화했다는 주장이다.

◎  정연식 서울여대 사학과 교수는 첨성대가 천문관측대가 아닌 선덕여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란 주장을 내놓았다.

◎ 작가 최홍은 첨성대는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와 같은 제단이라 주장 – 첨성대는 메소포타미아 여신 섬긴 석녀(石女) 선덕여왕의 개인 제단

◎  2016년 언론인 출신인 김명숙 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 – “경주 첨성대는 ‘여신의 신전’이었다.”
첨성대는 한반도 최초의 여왕인 신라 선덕여왕이 시조여신 서술성모(성조)의 신전을 돌을 다듬어 우물 형태로 쌓아 올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3) 기 타

◎ 소설(안병호 · 손명진 지음) <어링불>에서는 첨성대가 용광로였다고 주장한다.

2000년 전 연오랑 · 세오녀 부부가 영일만에 용광로를 세우고 쇳물 끓이는 기술자로 살다가 그 기술을 탐낸 일본인들에 의해 납치돼 현해탄을 건넌다. 500여년 뒤,선덕여왕이 이를 알고 서라벌 반월성(지금의 경주) 앞에 첨성대를 세운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무기를 생산하는 데에는 용광로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첨성대에 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짧게 생각해본 것은 다음과 같다. 불교에서의 수미산은 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수미(須彌)가 수메르(Sumeru)의 음사(音寫)라고 하는데 고대 찬란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수메르를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을 의미하고 수메르 문명에서 파생된 우주관, 천문학의 상징들이 불교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첨성대에 투영된 것은 아닐까?

사실 모든 종교의 밑바닥에는 천문학적인 요소들이 녹아 들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대로 갈수록 말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지금은 파라오의 무덤보다도 천문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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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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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첨성대 의기대

고려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곳이다. 높이 2.4m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문화재청 : 첨성대

네이버 지식백과 : 첨성대-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키백과 : 첨성대

2012-12-25  정밀한 건축 첨성대, 현대천문학으로 밝힌 4000년 전 고대사

2012-11-26  정자석과 판석, 첨성대의 천문상수들

2012-10-26  첨성대와 천문의 수학 : 송민구 등의 연구

2012-09-12  첨성대에서 보는 별자리와 경주 고분 및 유적들

2009-09-23  첨성대는 무엇이었을까?

2009-09-21  첨성대는 구조ㆍ방위상 확실한 천문대

2007-01-01  첨성대는 메소포타미아 여신 섬긴 석녀(石女) 선덕여왕의 개인 제단

우리역사 과학기행 (문중양 / 동아시아 / 2006.04.20)

선덕여왕 (이적 / 어문학사 / 2009.05.29)

경주 첨성대가 천문대 맞나요? 논란 속 진실은?

민족과학의 뿌리를 찾아서 (박성래 / 두산동아 / 1991.04.01)

학회지(박성래 / 1980) – 첨성대에 대하여

첨성대, 천문대 아니다 (2009-09-21)

첨성대 곡선의 비밀은 돌-흙 동시에 쌓기 (2009-03-03)

선덕여왕은 왜 첨성대를 지었나?

http://blog.daum.net/kinhj4801

http://blog.daum.net/santaclausly/11793420

http://blog.daum.net/kelim/15713706

http://blog.daum.net/robustus/16887482

경주 첨성대 – 국보 제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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