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와 피라미드에 관련된 책을 접했을때 많은 학자들이 등장하는데 이 학자들의 학문적 경향이나 시대적인 위치, 배경 등을 알아야 좀 더 편하게 소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이후의 이집트학과 그 학문적 이단인 유사 피라미드학의 역사를 한 번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계속 내용을 보완해야 할듯). 이를 위해서는 세계사의 흐름에서 이집트를 이해해야 하는데, 특히 그리스도교, 그리스, 이집트의 복잡한 삼각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또한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또한 이집트학에 영향을 미쳤다.
※ 관련글 :
– 세계의 피라미드 – 세계산 : http://yellow.kr/blog/?p=1490
– 이집트 피라미드 : http://yellow.kr/blog/?p=2039
–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 : http://yellow.kr/blog/?p=2055
– 대피라미드 – 쿠푸의 피라미드 : http://yellow.kr/blog/?p=3765
– 주요 이집트 피라미드들 : http://yellow.kr/blog/?p=1908
– 이집트학과 유사 피라미드학 발전사 : http://yellow.kr/blog/?p=1991
–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 방법에 대한 조사 : http://yellow.kr/blog/?p=2096
일단 그 시대의 배경을 조금 이해하고 넘어가자. 아래의 글은 『블랙 아테나』에서 정리한 것인데 한 번 생각해 볼 주제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 고대 모델 : 이집트와 셈족 문화의 주변부라는 시각에서 고대 그리스 문명을 레반트와 연결시키는 관점을 의미한다. 이는 고전기와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전통적인 견해이자, 유럽인들 역시 ‘아리안 모델’이 부각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당연시 했던 학설이다.
19세기에 이르게 되면 ‘고대 모델’은 급격히 밀려나기 시작한다. 이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부상한 낭만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19세기 초의 패러다임이었던 인종 및 진보와 결코 양립할 수 없었기에 더욱 퇴조하고 만 것이다. 즉, 고대모델은 학문의 발전 과정에서가 아니라, 당대에 유행하던 세계관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락했다는 의미다. 게다가 이는 반유대주의와 맞물리면서 더욱 힘을 얻게 된다. 이제 대다수의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이집트뿐 아니라, 페니키아가 끼친 영향력까지도 강경하게 부정하기 시작한다.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했으며 그리스 애호주의가 서유럽을 휩쓸었다. 그러한 반反아시아-아프리카적 그리스 열풍 속에서 고대 모델을 방어한다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1831년과 1860년 사이에 이집트학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없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이 시기에 이집트에 근거한 고대 모델이 파괴되고 인도에 근거한 아리안 모델이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1860년대에 이집트학이 하나의 학과로 자리잡게 된 이후 이단 학파와 기존 학계의 이집트학은 뚜렷한 차이를 드러냈다. 이집트학이 고전학의 지배를 받아들인 이후인 1880년대에는 그 차이가 더욱 격심해졌다. 그러나 어떤 단계에서도 양자 사이의 공식적인 논쟁은 없었다. 이는 우선, 학계를 장악한 그룹이 굳이 논쟁을 일으켜 주변인에게 ‘무게를 실어줄’ 이유가 없다는 일반 원칙 때문이었으며, 또한 두 집단이 서로 다른 학문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양측은 샹폴리옹과 조마르 사이의 차이를 반영했다. 이집트학 학자는 주로 언어학의 새로운 기법을 이집트의 문서 자료에 적용하는 문헌학자였다. 그러나 이단자는 수학자와 측량사, 그리고 천문학자로서 이집트어에 능숙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반면 19세기 이집트학 학자는 이단자의 기술적인 논쟁을 논박하기는 고사하고 따라갈 능력조차 없었다.
애초부터 대등한 싸움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단자는 19세기의 두 주요 패러다임인 ‘진보’와 인종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옳다면, 고대 아프리카 민족이나 반半아프리카 민족은 19세기 이전까지 그 어떤 유럽인보다도 훌륭한 수학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보다 세속적인 차원에서, 이단자들은 공식적으로 체계화된 학문적 지식에서 비롯되는 규율과 제재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때때로 종교적 환상으로 빠져들곤 했다. 이러한 경향은 이단자가 고대 수학과 천문학에서 발견한 놀라운 업적을 설명하고자 할 때 맞닥뜨렸던 진정한 어려움으로 인해 한층 증대되었는데, 그들은 고대 수학과 천문학의 업적을 신성한 계시의 견지에서 설명하려 했다. 그리고 이는 다시 피라미드가 신성한 예언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북돋우곤 했다. 이 모든 것이 ‘피라미드학’이라고 불리게 된 것의 신뢰성을 떨어 뜨리는 데에 기여했다.
19세기 독일과 영국에서 고전학과 언어학이 수학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는 점도 이단자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했다. 프랑스에서는 에콜 폴리테크니크(파리 공과대학)로 인해 불균형이 훨씬 덜했다.
피라미드학 학자는 플린더스 피트리의 변절(?)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더구나 피라미드학은 1880년대에 이집트학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와 1880년과 1960년 사이에 학계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진행된 일반적인 전문화로 인해 이상야릇한 이론이나 사이비 과학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집트학 분야 전체는 여전히 기본적으로 샹폴리옹의 언어학적 전통(자신들의 분야를 지배적인 낭만주의적 실증주의와 일치시킨 마스페로와 에르만을 비롯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학자에 의해 변형된)을 따를 것이며 수학과 측량에 중점을 두는 조마르 학파는 여전히 외곽에서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의 이집트에 대한 발언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기하학의 계산법과 원리를 이집트인들한테 배웠다고 한다. 그뿐 아니다. 피타고라스는 영혼회귀설도 이집트인들에게서 받아들였다. 이집트학 연구자들은 원주율 ‘파이'(π)를 발견했다고 하는 아르키메데스가 이 원리를 이집트에 체류하는 동안 알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는 매우 근거 있는 주장이다.
◎ 헤르도토스(기원전 485년 ~ 기원전 425년경)
이집트에서 가장 학식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헬리오폴리스이다……. 이집트인들이 천문학 연구를 바탕으로 태양력을 발명했으며 최초로 1년을 열두 부분으로 나누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들의 계산법이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정확하다……. 그리스 신들의 이름은 거의 모두 이집트에서 전해진 것이다.
◎ 스트라보(기원전 64년 ~ 기원후 25년)
이집트의 신관들은 천문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천재들이었다. 신비의 베일에 싸인 이집트인들은 외부와의 교류를 꺼렸지만 외부인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결국은 그들이 가진 지식의 일부를 전수해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정말 중요한 것들은 비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한 해의 주기에 대한 비밀을 가르쳐주었다. 그리스인들이 모르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 디오도루스(기원전 1세기)
그리스 최고의 지식층들은 탁월한 지식과 법률을 배우기 위해 이집트 방문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비록 이 왕국은 외부인들에게 문을 닫아 걸고 있었지만 고대인들의 일부가 이집트를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오르페우스, 호머, 피타고라스, 솔론 등이었다.
◎ 디온 크리스토메노스(기원후 30년)
이집트의 신관들은 그리스인들을 심할 정도로 조롱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많은 사실들을 그리스인들이 너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였다. 나폴레옹은 과학자, 공학자, 의사, 고전학자 등을 이집트에 데려갔다. 이들이 이집트에 대해 수집한 정보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것이자 중요한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 기자 지역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는 네 사람이 주도했다. 건축가 레페르, 나폴레옹의 부하인 장 마리 쿠텔 대령, 피라미드 내부 구조를 연구한 에드메 프랑수아 조마르, 예술가이자 공학도인 세실이 그들이었다.
– 1799년 로제타 스톤 발견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250885
– 이때의 성과를 정리한 책 『이집트 지』(Description de L’Egypte, 1809~1828) : 본격적인 이집트학의 서막이 열린 셈이었다.
– 나폴레옹은 대피라미드의 왕의 무덤 방에 들어가, 혼자서 일정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하룻밤을 지새웠다는 말도 있고, 한 시간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폴레옹이 피라미드 밖으로 나왔을 때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고 했다. 부관이 뭔가 보았느냐고 물었으나 나폴레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도 그 일을 말할 듯하다가 말았다고 한다.
도미니크 비방 드농 (Dominique Vivant Baron Denon, 1747~1825)
–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 화가이자 도안가로 참여
– 루브르 박물관의 전신인 나폴레옹 박물관의 관장(1804~1815)
– 방대하고 과학적이긴 했지만 『이집트 지』(Description de L’Egypte, 1809~1828) 는 훨씬 작고 가격이 저렴한 책에 그 공을 빼앗겨 버렸는데, 프랑스인들은 드농 남작이 1802년 출간한 『이집트 남부와 북부 여행기』(Voyage dans la basse et la haute Égypte, 1802)이라는 천연색 그림이 생생한 책에 매료되었다. 책은 일시적인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수십 년간 관심의 대상이던 ‘이집트’가 갑자기 열광적인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이집트 지』의 첫 번째 부분이 출판되었을 때엔, 이미 이집트 마니아가 형성되어 있었다.
조반니 바티스타 벨초니 (Giovanni Battista Belzoni, 1778~1823)
– 서커스 곡예사 출신으로 거구를 자랑하는 이 모험가는 고대 유물을 캐내다가 그야말로 엄청난 돈을 벌었는데,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를 무척 탁월한 고고학자로 여겼다.
– 1816년부터 재(在) 이집트 영국총영사 헨리 솔트(H. Salt)에 고용되어, 룩소르에서 람세스 2세 거상, 람세스 3세 화강암 석관을 영국으로 운반하고, 1817년 ‘왕가의 골짜기’에서 세티 1세의 묘를 발견, 1818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기자의 제 2 피라미드의 현실(玄室)에 도달하는 등 미술품의 발굴 · 반출에 활약했다.
– 『이집트와 누비아 여행』(Narrative of Operations and Recent Discoveries with in the Pyramids, Temples, Tombs and Excavations, in Egypt and Nubia, 1820)
– 이집트 테베에서 발견한 람세스 2세의 머리를 나일 강으로 운반하는 모습. 당시에는 누구의 상인지 몰라 그리스 신화의 멤논(Memnon)이라 불렀다.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
– 18세에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세에 그르노블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후 정치적인 문제(그는 형과 함께 자코뱅주의를 주장하고 나폴레옹을 지지했다)와 학계에 많은 적을 두어 험난한 이력을 보여준다.
– 1822년 이집트 상형문자 판독, 이집트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 1822년 덴데라에 있는 황도대黃道帶의 연대를 로마 시대로 추정하였다.
– 『고대 이집트어 상형문자법 요론』(Précis du système hiéroglyhique des anciens égyptiens, 1823)
– 샹폴리옹은 자신의 역사적 발견을 힉소스 이후의 왕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즉 그 연대를 기원전 2200년까지로 신중히 제한함으로써 성서의 우선성을 인정했다. 그는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 옹호자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그가 최초의 그리스 문명 훨씬 이전에 존재했던 이집트의 위업으로 주의를 돌린 것은 그리스학 학자의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그는 한동안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 사이의 동맹을 갈라놓았다.
– 1830년 7월 혁명 이후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집트 역법, 즉 이집트 문명이 기원전 328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자신의 결론을 거리낌 없이 발표했다. 그러자 그리스도교도와 그리스학 학자가 다시 결합하여 그에게 맞섰다.
– 1832년에 그가 사망한 이후 이집트학은 4반세기 동안 퇴보의 길을 걸었던 반면 그의 적인 그리스학 학자와 오리엔탈리즘 학자는 계속해서 프랑스 학술원을 지배했다.
– 『이집트와 누비아의 유적』(1845)
– 기원전 196년에 제작된 로제타 스톤은 같은 내용을 이집트 신성문자, 이집트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로 적혀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에드메 프랑수아 조마르 (Edme François Jomard, 1777~1862)
– 수학자이자 측량사로서 나폴레옹의 원정에 참여했다. 『이집트 지』의 편집에 참여했다.
– 샹폴리옹과 경쟁 관계 유지
– 나폴레옹 탐사대의 다른 위원과 함께 대피라미드를 정확하게 실측하고 기록하면서그 주변까지 철저히 탐사했다.
– 조마르는 대피라미드를 천체 관측을 위한 시설이자 동시에 각종 측량 기록을 정리 보관하는 곳으로 보고 있다. 즉 피라미드의 각종 규격에는 그 지리적 위치와 관련된 정보, 그리고 이를 정확하게 계산할 모든 천문학과 측량학적 지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 조마르는 기자의 대피라미드와 그 정확한 지리학적 위치를 직접 측량한 결과를 토대로 대피라미드의 측정치에 나타나는 수학적 의미에 관한 고대의 기록과 연결시켰다. 그는 고대 이집트인이 지구의 둘레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근거로 길이의 단위를 구성했음에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조마르의 연구 결과는 30년이 지난 뒤에야 책으로 출간되었고, 당시 유럽 학계를 지배하던 변덕스러운 지식인들이 그리스 문화에 심취되어 이집트 문명을 폄하하던 시기라 조마르의 정밀한 연구 결과는 실수투성이 혹은 지적 사기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 샹폴리옹에 의해 덴데라 황도대의 연대 추정과 관련된 조마르의 명성에 일격이 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잔존하거나 혹은 종종 재발견되어 19세기 내내 발전하였다.
– 조마르는 왕정 복고 이전에 프랑스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왕정 복고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존 테일러 (John Taylor, 1781~1864)
– 시인이자 수필가이면서 한때 <런던 옵서버>지의 편집장이기도 했던 존 테일러는 나이 50이 되어 피라미드에 매료되었고, 죽을 때까지 30여 년 동안 피라미드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테일러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대피라미드 : 누가, 왜 건축했을까? The great pyramid; why was it built: & who built it?』(1859)라는 책으로 요약했다.
– 테일러는 피라미드의 바닥 둘레는 적도에서의 지구 원주를 나타내며, 높이는 지구 중심에서 극점까지를 상징한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이 맞으면 조마르가 말한 바와 같이 이집트인들은 지리학적 위도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360을 곱해 지구의 원주를 구했으며, 반지름을 계산하도록 파이π를 사용했다는 주장과 일치한다.
– 테일러 대피라미드 밑변 둘레의 길이를 높이로 나누면 2π가 나온다고 주장했다.
– 테일러가 그 다음 몰입한 과제는 아이작 뉴턴과 존 그리브스가 마무리 짓지 못한 이집트 도량형의 단위 문제였다. (http://en.wikipedia.org/wiki/Pyramid_inch 참조)
– 테일러의 신념은 종교적 신앙과 기하학적 · 역사적 객관적 사실과 충돌을 빚는다. 당시 신앙심이 깊던 많은 사람들 처럼 그는 우주가 4천 년 전에 생겨났으며 세상은 기원전 2400년경 대홍수를 맞았다는 『구약 성서』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당시 피라미드의 건축 연한이 기원전 21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에 그는 할 수 없이 최초의 시기에 신이 주신 지적 능력이 있었는데, 이는 지구에 사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었다고 단언해 버렸다. 그는 더 나아가 신성한 영국의 인치가 ‘피라미드 인치’와 가까우므로 둘은 같은 선조에서 전수한 같은 단위나 다름없으므로, 영국인들은 실종된 이스라엘 부족과 관련 있다고 추측하였다.
칼 리하르트 렙시우스 (Carl Richard Lepsius, 1810~1884)
– 그의 주도아래 1842년에서 1845년까지 이집트 고대 유물들을 집중 탐사한 프로이센 학술조사단의 활동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이집트 연구는 제대로 된 학문적 틀을 갖추기 시작한다. 당시 그는 대피라미드의 구조를 집중 조사하여, 피라미드의 중심부가 돌을 쌓아 만든 와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한 프로이센의 탐사대는 자그마치 15,000개나 되는 고대의 유물들을 베를린으로 실어 날랐다.
– 『이집트 및 누비아의 기념물』(1849 ~ 1895)은 『이집트지』와 샹폴리옹의 『이집트와 누비아의 유적』과 함께 오늘날까지 이집트학 전공자의 필독서로 평가되고 있다.
오귀스트 마리에트 (Auguste-Ferdinand-Fran?ois Mariette, 1821~1881)
– 체계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시작된 것은 1850년이다. 프랑스 출신의 이집트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그 선두 주자다.
– 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베르디의 『아이다』 각본을 쓴 사람이다.
– 1851년 그는 사카라(Saqqara)에서 사라페움(Sarapeum)을 발굴했는데, 이 유명한 지하 무덤 안에는 신의 성스러운 동물인 아피스 황소들의 무덤이 있었다.
– 1858년 이집트 총독인 사이드 파샤Said Pasha는 이집트 유적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사람으로 프랑스의 고고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Auguste Mariette를 선임했다. 이집트 문화재 관리국이 탄생한 것이다.
– 테베에서 제17왕조 왕들의 무덤을 발굴
– 기자에서 섬록암으로 만들어진 쿠푸의 조상을 발견
– 말년에는 사카라의 페피1세의 피라미드에서 값어치 있는 피라미드 문헌을 발견했다.
피아치 스미스 (Charles Piazzi Smyth, 1819~1900)
– 스코틀랜드 왕립 천문학 회원(1845~1888)
– 존 테일러의 영향을 받았다.
– 1867년에 스미스는 대피라미드를 건축할 때 계측 기준이 된 큐비트라는 단위에 관해 대담한 설을 발표했다. 흔히 주척(팔꿈치 자)으로 번역되는 큐비트는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했던 단위로, 팔꿈치에서 중지 끝까지의 길이를 기초로 한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스미스는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기준이 된 1큐비트의 길이는 25.025인치라면서 그것을 성聖 큐비트라고 불렀다. 또한 1큐비트를 25로 분할한 길이를 피라미드 인치라 했다. 이것은 예전에 뉴턴이 구약성서 시대의 큐비트의 길이로 제창했던 수치를 기초로 해서 다소 수정을 가한 것이었다.
– 스미스는 피라미드가 완공된 시점이 기원전 2170년 추분 날 밤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날은 용자리의 알파 별이 정확하게 하향식 통로의 선에 놓이고 황소자리의 산개 성단인 플레이아데스성단이 대회랑의 직선 꼭대기 방향이자 피라미드의 자오선 위에 놓이는 때였다.
– 스미스는 피라미드가 지구를 도형학적으로 형상화했으며 피라미드 하단부의 둘레는 태양력에서 사용되는 날짜 수와 일치한다고 믿게 되었다.
– 다윈의 반대파들과 마찬가지로, 스미스는 테일러는 성서를 있는 그대로 믿는 근본주의자들이었다. 창조와 대홍수에 관한 지적 혼란에 당황한 스미스는 테일러처럼 피라미드가 신적인 영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 자신에 대한 지독한 냉소와 심한 비난에도 면역이 되어 버린 피아지 스미스는 속세의 반응에는 아랑곳 않고 더 특이한 방향으로 통계치를 낸 다음 분석을 계속했다. 예를 들어 피라미드는 높이 10단위당 폭 9단위로 만들어졌다는 계산을 구하고, 피라미드의 높이를 잡아 10을 곱한 다음 9제곱을 하니 대략 91,840,000마일이라는 수치가 나오는데 이는 지구에서 태양까지 일반 거리의 근사치라고 주장했다.
– 『대피라미드에서의 인생과 작업』(Life and Work at the Great Pyramid, 1867), 『대피라미드가 물려준 우리의 유산』(Our Inheritance in the Great Pyramid, 1864)
– The Plate XX from an original 1877 copy of Piazzi Smyth’s “Our Inheritance in the Great Pyramid”.
노먼 로키어 (Norman Lockyer, 1836~1920)
– 영국의 천문학자. 1892년 왕립학회 부회장. 1897년 기사작위 받음. 1913년 힐 천문대(노먼 로키어 천문대) 대장
– 1868년 태양 대기에서 헬륨 발견
– 1869년 『네이처, Nature』 창간, 50년간 편집을 맡음
– 영국에 있는 스톤헨지를 포함한 스톤서클들은 대부분 태양의 방위와 별의 위치를 고려하여 만들어졌다고 발표
– 이집트 신전이 천문학적인 용도로 건설되었다고 주장
– 『천문학의 새벽』(The Dawn of Astronomy, 1894)에서 특히 카르나크에 위치한 아멘 라(Amen-Ra) 신전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 축이 의도적으로 지점(至點, 동지와 하지)을 지향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수천 년 전에 이집트인들은 지점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으며, 태양의 연중 행로를 다소 온전하게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천체의 다채로운 움직임은 지구의 공전과 자전 그리고 세차운동의 결과이지만, 이집트 인들은 이미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본 것을 주의깊게 연구하고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을 귀중한 형태로 집대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기묘한 이미지나 신앙체계와 연결시켰다.……
가스통 마스페로 (Gaston-Camille-Charles Maspero, 1846~1916)
– 마리에트의 후계자. 프랑스의 고고학자이며 이집트 고고국 국장을 지냈다.
보르하르트 (Ludwig Borchardt, 1863~1938)
–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건축학자
– 아부시르, 아부구랍, 아마르나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유명해진 인물이다. 아마르나에서 왕비 네페르티티의 저 유명한 흉상을 발굴하였다.
– 그는 피라미드 묘역에 담긴 비밀을 건축학의 관점에서 밝혀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 카이로에 독일 고고학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뒤이어 역시 카이로에 스위스의 이집트 건축술 및 유적 연구소도 세웠다.
에르만(Adolf Erman, 1854~1937)
–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언어학자
– 그는 이집트어의 이해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으로, 특히 이집트어와 셈족 언어 사이의 관계를 집중 탐구하면서 이집트 고대어와 신 이집트어의 문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냈다.
플린더스 피트리 (William Matthew Flinders Petrie, 1853~1942)
– 영국의 고고학자. 근대 이집트 관련 고고학의 창설자이기도 하다. 현대 이집트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 대단한 지구력과 근면성을 가진 그는 특히 기자의 피라미드들에 관한 연구에서는 이후 모든 연구가 나아갈 바를 제시할 정도였다.
– 피라미드학 학자는 피트리의 변절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피트리는 기술자이자 측량사로서의 경력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피아치 스미스를 비롯한 다른 조마르 후계자의 사상에 열광했었다.
– 진정한 의미에서 피트리가 쓴 첫 번째 책인 『대피라미드 연구』(Researches on the Great Pyramid, 1874)에서 피트리는 피아지 스미스를 조롱하는 사람들을 단호한 어조로 반박한다. 그러나 몇 가지 반대 의견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영국인은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후손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 1875년~1880년 스톤헨지의 고적을 조사, 발굴했다.
– 피트리는 1880년에 최신 측량 기구를 가지고 이집트로 건너가 이전 측정치의 정확성을 몸소 점검했다.
– 대피라미드가 이후의 어느 건축물보다도 더욱 정확하게 나침반의 기본 방위에 따라 배치되었으며 내실의 치수는 파이π(22/7)와 피타고라스 삼각형에 관한 지식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대체로 그 역시 대피라미드 건축에 투입된 기술적 · 수학적 기량에 경탄했다. 다른 한편, 그는 건축에 사용된 큐빗의 길이에 관해 피아치 스미스와 의견을 달리 했으며, 그 건축물이 1년의 정확한 길이를 반영한다는 스미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피트리는 기자의 피라미드들을 연구한 성과를 종합하여 『기자의 피라미드들과 신전들』(The Pyramids and Temples of Gizeh, 1883)이라는 책을 펴냈다.
– 피트리는 뛰어난 측량과 다양한 토기 양식을 순서대로 배열하는 유형학의 개발을 통해 이집트 고고학뿐만 아니라 모든 근대 고고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이집트학 학계의 일원으로서 학계에 필수불가결한 버팀목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는 학계 외부 기부자에게 힘입어 대학 교수직을 얻어야 했으며, 1942년에 오랜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학계 안의 외톨이로 남아 있었다.
– 그의 제자였던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는 투탄카멘 무덤을 발견한다.
http://www.touregypt.net/petrie/index.htm
융커 (Hermann Junker, 1877~1962)
– 독일의 고고학자. 처음에는 빈 대학에 재직하다가 나중에 카이로의 독일 고고학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 이집트 전역에 걸친 여러 발굴작업에 참가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자의 네크로폴리스에 대한 조사 활동이다.
오토 노이게바우어 (Otto E. Neugebauer, 1899~1990)
– 오늘날 고대 천문학사史의 권위로 알려져 있는 그는 극히 엄격한 실증적 방법으로 고대의 사료를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 그의 가장 유명한 연구는 고대 과학에 관한 것이었다.
– 이슬람 과학이 코페르니쿠스의 배경을 이룬다는 점을 인정
– 그리스의 수학과 천문학에 미친 메소포타미아의 중요한 영향을 진술
– 정통 이집트학 학자와 협력하여 이집트 천문학에 관한 몇몇 저서를 출간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메소포타미아를 다루는 태도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그의 공동 연구자들이 드러내는 이집트와 헤르메스주의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를 공유했다.
로에르 (Jean-Philippe Lauer, 1902~2001)
– 프랑스 출신의 고고학자. 1920년대부터 이집트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집트 연구의 거목이다. 그의 연구는 거의 사카라의 피라미드 묘역, 특히 조세르의 그것에 집중되어 있다. 로에르는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축에 관한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전문가로 손꼽힌다.
– 대피라미드의 측정치가 상당히 눈여겨볼 만한 특성을 드러내며, 그러한 특성에서 파이π와 피Φ, 황금수, 그리고 피라고라스 삼각형 등과의 관련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련은 헤로도토스를 비롯한 고대 작가들의 주장과 대체로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 그는 조마르와 피아치 스미스의 ‘공상’을 비난했다.
– 대피라미드의 비상한 수학적 정확성에 대한 수용과 그리스인이 최초의 ‘진정한’ 수학자라는 ‘확신’ 사이의 모순은 그 주제에 관한 로에르의 수많은 저술 전체를 관류한다.
– 로에르는 단지 후기 이집트 전설로 치부되던 제3왕조의 건축가 임호텝이 실존 인물이라는 점을 밝혀냈으며, 사카라에 있는 임호텝의 뛰어난 건축물 가운데 일부를 발굴했다.
–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의 문제들』, 『피라미드의 신비』
에드워즈 (I.E.S. Edwards, 1909~1996)
– 영국의 고고학자. 대영박물관에 오랫동안 근무했으며, 이집트 피라미드의 주요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 그의 책 『이집트의 피라미드』(The Pyramids of Egypt, 1947)는 이 분야의 필독서
– 1993.07.18 고대 이집트 쿠프왕 피라밋서 비밀문발견
슈타델만 (Rainer Stadelmann, 1933~)
– 독일의 고고학자. 기자 고원 고고학의 전문가로 간주된다.
– 그는 엘레판티네, 테베, 다흐슈르 등에서 발굴작업을 펼쳤다.
– 『이집트의 피라미드 : 돌로 쌓은 세계의 기적』(1985)
– 1982년 슈타델만이 다흐슈르 붉은 피라미드 근처에서 발견한 피라미디온(Pyramidion)
– 2007.04.03 “피라미드, 내부로부터 건축”
– 1993.07.18 고대 이집트 쿠프왕 피라밋서 비밀문발견
자히 하와스(Zahi Hawass, 1947~)
– 이집트 고고학자. 이집트 고대유물최고위원회 위원장(2002~2011?). 이집트 유물장관(2011)
– 그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미국 보스턴박물관 등 세계 유수 박물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자국 유산을 돌려줄 것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다.
– 기자 묘역에 대한 고고학 발굴을 주도했다.
–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은 노예가 아니라 건설 노동자였다”,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은 말라리아 합병증으로 숨졌다”
– 2010.10.20 이집트 고고학자…4500년된 무덤 공개
– 2010.03.09 ‘파라오 벽화’ 반환 이끈 일등공신 자히 하와스 위원장
– 2010.01.10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 묘지군 발견
– 2007.09.27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 흑인 아니다(?)
현재 주요 이집트학 개설 대학교
– University of Chicago
– Brown University
– New York University
– Yale University
– Indiana University
– University of Oxford
– University of Cambridge
– Swansea University
– University of Liverpool
– University of London
– Leiden University
최근의 유사 피라미드 이론들 중 몇 가지
◎ 정통 학계에서 이단아로 돌아 버린 리비오 카툴로 스테치니(Livio Catullo Stecchini, 1913~1979)와 조르조 드 산티야나(Giorgio de Santillana,1902~1974), 두 사람이 있다. 하버드에서 고대 측정법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탈리아인 스테치니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발표한 수많은 연구를 통해 이집트인이 지구의 치수를 매우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지식이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곳에 대단히 정밀하게 적용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산타야나나는 갈릴레이에 대한 책을 저술한 르네상스 시대 과학사의 권위자였다(MIT 과학철학 및 역사학 교수). 그는 헤르메스적인 이집트 전승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만년에는 뒤피의 『모든 제례의 기원』을 읽은 후 고대 신화의 대부분이 사실상 과학적 천문학에 대한 비유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산티야나는 뒤피와 이집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훨씬 더 이른 시기의 지식을 주장했다. 그러한 지식의 자취는 전 세계의 신화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그는 춘분점 세차를 이용하여 그 지식의 연대를 기원전 6000년 이전으로 추정했다.
그가 헤르타 폰 데첸트(프랑크푸르트 대학교 과학사 교수)와 함께 저술한 『햄릿의 물방앗간 : 신화와 시간 구조에 대한 소론』(Hamlet’s mill: an essay on myth and the frame of time, 1969)은 드 산티야나의 대단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대학 출판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상업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는 그러한 연구가 존경받는 학자의 필수 고려 사항이 아님을 의미한다. 게다가 드 산티야나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한 바람에 뒤피와 조마르 학파를 지지하는 효과가 훨씬 감소했다. 더욱이 그의 연구는 스테치니와 톰프킨스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다소 ‘과격한 소수파’의 산물로 취급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정통파 학자는 그의 연구를 무시할 수 있거나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유의 책이 피라미드에 대한 변방 이론의 폭을 더 넓혔음은 부인하기가 어렵다.
◎ 피라미드가 외계 생명체, X-행성과 관련 있다는 주제는 제카리아 시친(Zecharia Sitchin)이 쓴 ‘지구 연대기'(1976~2007)라는 시리즈에 집약되어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헌을 전거로 사용한 시친은 인간이 유전학적인 기술에 의해 창조되었고, 우리 태양계에서 발견되지 않은 행성에서 거주하는 아눈나키라는 인종의 독창적인 발명품이라고 주장했다.
시친은 대피라미드가 레바논에 있는 비밀 지역에 이착륙하는 거대한 우주선의 관문에 해당한다고 믿었다.
◎ 『오리온 미스터리』(1994)라는 저서에서 로버트 보발(Robert Bauval, 1948)과 아드리안 질베르는 기자의 세 피라미드가 오리온좌의 주요 세 별이 이루는 대형을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극단적인 이론에 비하면 그들의 주장은 상식적인 편이었고, 그들이 고대의 미스터리를 다룬 텍스트에 정통한지 의심스럽지만 연구 결과가 마법으로 여겨지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은 뚜렷했다.
* Orion Correlation Theory – http://en.wikipedia.org/wiki/Orion_Correlation_Theory
* The Official Robert Bauval Website – http://robertbauval.co.uk/articles/articles/cciae.html
◎ 고대 문명의 유산이거나 그들의 후손이 만들었다는 설
– 위의 이론들과 상관관계가 높다.
– 『신의 지문』, 『신의 거울』의 그레이엄 핸콕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피라미드, 상상 그 너머의 세계(케빈 잭슨,조너선 스탬프 / 정주현 옮김 / 샘터)
피라미드 (미로슬라프 베르너 / 김희상 옮김 / 심산)
블랙 아테나 (마틴 버낼 / 오흥식 옮김 / 소나무)
신의 거울(그레이엄 핸콕 / 김정환 옮김 / 김영사)
http://en.wikipedia.org/wiki/Egyptology
http://en.wikipedia.org/wiki/Pyramid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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