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피라미드

이집트 피라미드는 이집트에 위치한 사각뿔 모양의 석조 구조물을 말한다. 세계에는 다양한 형태의 피라미드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서로 어떤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것은 대피라미드가 있는 이집트 피라미드(Egyptian pyramids)가 대표적일 것이다.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피라미드는 멤피스 북서부 사카라 (Saqqara)에서 발견된다. 이들 중에서 가장 초기의 조세르 피라미드(기원전 2630년 – 기원전 2611년 ?)는 이집트 고왕국 제3왕조 시대에 지어졌다. 이 피라미드와 그 주변 단지는 건축가 임호텝(Imhotep)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옷을 입힌 석조로 지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비적 인 구조물로 간주된다.

 

가장 유명한 이집트 피라미드는 카이로 외곽의 기자(Giza)에서 발견되는 피라미드이다. 기자 피라미드 중 쿠푸(Khufu)의 대피라미드는 이집트 최대의 피라미드이다. 대피라미드는 여전히 존재하는 고대 세계의 일곱 가지 불가사의 중 유일하다.

 

이집트 고고학자 자히 하와스는 2008년 11월에 이집트 피라미드의 숫자가 118개라 했다. 물론 다른 숫자를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집트에 피라미드가 많기는 하지만, 사실 거대한 피라미드는 피라미드 왕국이라 할 수 있는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에 집중된다. 규모면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압도적이다. 아래 그림은 연도별 피라미드 크기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인데 스네푸르(3개), 쿠푸, 카프레의 세 왕의 통치기에 집중된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때 그렇게 큰 피라미드가 필요했을까?

 

※ 관련글 :

– 세계의 피라미드 – 세계산 : http://yellow.kr/blog/?p=1490

– 이집트 피라미드 : http://yellow.kr/blog/?p=2039

–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 : http://yellow.kr/blog/?p=2055

– 대피라미드 – 쿠푸의 피라미드 : http://yellow.kr/blog/?p=3765

– 주요 이집트 피라미드들 : http://yellow.kr/blog/?p=1908

– 이집트학과 유사 피라미드학 발전사 : http://yellow.kr/blog/?p=1991

–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 방법에 대한 조사 : http://yellow.kr/blog/?p=2096

 

지금의 피라미드에 대한 학계의 정설은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으로 진흙 벽돌로 만든 마스타바(mastaba)에서 계단식 피라미드로, 이후 사각뿔의 돌로 만들어진 미끈한 피라미드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에 휩싸인 거대한 피라미드는 이집트 역사에서 고왕국 제4왕조 때의 스네푸르, 쿠푸, 카프레로 이어지는 오직 세 왕의 통치기에 건설되었을 뿐이다. 나머지 피라미드를 모아 봤자 이 시기에 지어진 피라미드 부피의 41퍼센트 밖에 안된단다.

도대체 이 시기에 왜 이러한 대공사를 했는지, 어떻게 건설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단지 이론과 학문적 추측만이 무성할 뿐이다. 즉, 우리는 모든 피라미드들을 한꺼번에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피라미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고대 이집트인이 아니라 후세의 그리스인이다. ‘피라미드’라는 말의 정확한 어원은 명확하지가 않다. 혹자들은 특별한 수학 용어, 즉 기하학의 ‘페레무스'(peremus)를 피라미드의 어원으로 보고 있다. 이 페레무스는 수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소위 린드 파피루스 1번과 2번에 등장하는 말로, 피라미드의 높이를 표현하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어의 ‘피르'(pyr : 불)에서 ‘피라미드’라는 단어가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밀가루로 빚은 케이크’를 뜻하는 그리스어 ‘피라미스'(pyramis)를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고대 이집트인은 계단 피라미드는 ‘야르‘, 진짜 피라미드는 ‘메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런 총칭보다는 보통 하나하나에 고유명사로 이름을 붙여 불렀다. 예컨대 쿠푸의 피라미드는 ‘해가 뜨고 지는 곳’, 카프라의 피라미드는 ‘위대한 모양’ 등으로 부른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고대 이집트인은 계단 피라미드와 진짜 피라미드를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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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형문자로 표현된 메르, 즉 피라미드. 사카라의 프타호텝 마스타바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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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도별 피라미드 부피 – 근거 Stadelmann(1980,438)과 Kemp(1983,88)

 

특히 이집트 피라미드 건축사史에 있어 정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기자 피라미드 군에서의 쿠푸 왕의 피라미드, 즉 대피라미드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규모와 건설과정에서 발생했을 엄청난 노력, 즉 인력, 기술, 창의력, 재화 등 뿐만 아니라 현재의 기술력으로도 달성하기가 어려운 엄청난 정밀도 같은 것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존재해 우리에게 경이감과 신비로움 등 만감을 교차하게 만든다. 마치 대피라미드가 모든 피라미드의 주인이고 다른 것들은 대피라미드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피라미드학(Pyramidology)의 대부분이 대피라미드에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듯하다. 물론 주류 학계에서는 다른 피라미드에 비해 단지 규모가 크고 아주 복잡한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문하지만 말이다. 하긴 그 말도 맞기는 맞다. 그렇지만 어쨓던 지금 주류 학계에서 말하듯 피라미드가 단지 왕의 무덤이라는 것은 도대체 나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특히 대피라미드). 현재까지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미이라가 없기도 하고 말이다(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에서는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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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이집트 피라미드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대피라미드(제일 윗쪽)가 있는 기자 피라미드 지역을 보여준다. 하나의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는 설도 있는 이 피라미드들은 피라미드 시대라 할 수 있는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 때 건설되었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한 피라미드사史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왕조의 피라미드는 규모와 정밀도에서 떨어져 현재 정상적으로 남아있는 피라미드들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를 비롯한 제4왕조까지의 피라미드에는 벽화는 물론 문자도 새겨져 있지 않다. 제5왕조 말기의 우나스 왕 피라미드의 경우 내부에 <피라미드 텍스트>(http://www.pyramidtextsonline.com/)라 불리는 히에로글리프(상형문자)가 새겨지긴 했지만 그림이 그려진 예는 없다. 즉, 시대를 통틀어 피라미드의 벽에 그림이 그려진 적은 없었던 것이다.

 

피라미드의 왕조인 고왕국 시대(제3왕조 ~ 제6왕조)는 제1중간기의 혼란(http://yellow.kr/blog/?p=716 참조)으로 끝나는데 이후 중왕국 시대(제11왕조,제12왕조)에서는 단속적으로 피라미드가 건설되었다.

 

주류 학계의 ‘피라미드는 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은 ‘이집트학과 유사 피라미드학의 발전사(http://yellow.kr/blog/?p=1991)에서 언급한 조마르 학파들의 주장들, 예를 들면 피라미드의 천문학적인 관련성 주장 등으로 도전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지금의 학문이 세부화, 전문화가 되어 서로간의 경계선을 벗어나는 이질적인 주장들에 대해 비우호적인 경향이 있지만 피라미드 건설 당시에는 천문학과 종교가 뒤섞이고, 신화와 현실이 결합되고 뛰어난 수학, 기술, 관측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앞으로의 흐름이 백악기 공룡 멸종에 대해 기존 주류 학계가 보였던, 소행성 충돌설을 이단시 여겼다가 결국 지금은 강력한 정설로 인정하는 것과 비슷한 패러다임의 변화로 흘러가는 것은 아닌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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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의 주요 피라미드 군(群). 모두 나일강 서쪽에 존재한다. 해가 뜨는 나일강 동쪽은 이승이고, 해가 지는 서쪽은 무덤과 피라미드의 대지로서 저승으로 구분되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기자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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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피라미드(Great Pyramid)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정점이다.

 

기자 피라미드들의 경우를 보면 피라미드는 ‘왕의 무덤’이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 그것들의 소위 ‘무덤-내실’은 AD 9세기에 아랍 모험가들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을 때 비어 있었으며 그 안에서 파라오를 매장한 어떤 흔적도 발견된 적이 없다. 덧붙여 피라미드에는 왜 그것이 세워졌는지 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한 단어의 어떤 비문도 새겨져 있지 않다.

 


네크로폴리스의 기본축

 

아래의 내용은 미로슬라프 베르너의 『피라미드』(p369~p370)와 http://www.ancient-wisdom.co.uk/pyramids.htm#alignment 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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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시르 네크로폴리스의 기본축,  사카라 네크로폴리스의 기본축,  기자 네크로폴리스의 기본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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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고왕국 제3왕조에서 제5왕조까지의 피라미드군들은 의도를 가진 축들이 있다.  Hans Goedicke가 주장한 것으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자, 사카라, 아부시르의 축들이 헬리오폴리스에 있는 태양의 신전으로 모인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단순한 파라오의 무덤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인데…

 


헬리오폴리스 – 벤벤 돌, 벤누 새(불사조, 피닉스)

 

헬리오폴리스 (Heliopolis)는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이다. 현재 이집트 카이로 북동쪽 교외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이우누(Innu, 기둥이라는 의미)”라고 불리었으며, 성서지명(聖書地名)의 온(On)에 해당한다.  고대 그리스로 번역되어 ‘태양의 도시’란 의미의 헬리오폴리스란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헬리오폴리스는 고대 이집트 신화의 태양신 라를 비롯한 주신들을 모시는 신전들이 있던 중요한 도시였다.

 

구약에서 북쪽의 베스-세메시(Beth-Shemesh)와 남쪽의 베스-세메시, 즉 온(On)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선지자 예레미야는 온에 오벨리스크가 있으며 ‘이집트 신들의 집’이 있다고 말했다.

 

헬리오폴리스 이야기는 신화와 역사 사이 경계선에 존재한다. 눈(Nun)에 대해 그리고 ‘태초의 흙단’에 대해, 벤누(Bennu) 새와 벤벤(Benben) 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는 헬리오폴리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헬리오폴리스는 눈(Nun)으로부터 떨쳐 일어난 땅-세계의 첫 부분으로 여겼다. 세계의 창조 전 아툼의 상태를 묘사하는 한 문헌에는 “내가 여전히 물 속에 혼자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때, 서거나 앉을 곳이 없었을 때, 내가 있을 수 있는 헬리오폴리스가 설립되기 전”… 이라고 되어 있다.

 

피라미드 문헌들 중 주문 600(utterrance 600)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오, 아툼! 당신이 생겨났을 때 당신은 높은 언덕으로 솟아올랐으며, 불사조 신전의 벤벤 돌로 빛났다.” (http://www.pyramidtexts.com/ 참조)

원래의 벤벤 돌은 고대에 헬리오폴리스에서 사라졌으며 그것이 오늘날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학자들이 확인하듯이 다수의 세부적인 문헌 언급, 그림 및 부조물로 보아 그것이 피라미드 모양이었다는 것, ‘둥근 물체, 각뿔, 계단이 있는 물체’로 다양하게 보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벤벤을 피라미드의 모자돌(피라미디온), 그리고 오벨리스크의 꼭대기돌의 모델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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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다슈르에 세워진 제12왕조 아메넴헤트 3세의 파손이 심한 피라미드에서 출토된 피라미디온이다. 네페루(neferu, ‘완벽’)라고 세번 반복한 상형문자 위에 두 눈을 뜬 호루스가 새겨져 있고 그 위로 날개 달린 태양이 펼쳐있다. (그런데 대피라미드에는 피라미디온이 어떤 모양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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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러 지폐에 있는 피라미드. 피라미디온 부분에 있는 호루스의 눈(?)은 위의 그림의 이집트 피라미디온과 비슷하다. 1달러 지폐는 대공황을 겪던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졌는데 이 지폐 도안에 대하여 프리메이슨과의 관련성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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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누(Bennu) : https://en.wikipedia.org/wiki/Bennu

 

베누는 고대 이집트 헬리오폴리스에서 숭배된 신조(神鳥). 푸른 매와 비슷하며 몸은 황금색을 띤다. 태양신 라와 관계가 깊은데, 라는 이 세상의 최초에 혼돈의 바다에서 벤누의 모습으로 태어나 벤벤석(石)이라고 하는 오벨리스크(기념비) 위로 내려왔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처음 태어난 새인 까닭으로 벤누의 울음소리로 이 세상의 시간이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학자들은 이 새를 피닉스와 동일시했다.

 

피닉스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신화는 다음과 같다.

고대 이집트 나일 삼각주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즉 ‘태양의 도시’에는 피닉스가 오백년마다 찾아오는 태양의 신전이 있었다. 그곳 사제들은 고서(古書)의 기록을 토대로 피닉스가 찾아 올 때를 계산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해가 오면 신전의 제단을 정갈하게 하고 그 위에 피닉스의 분신(焚身)을 도울 다양한 향료와 유황, 향나무 가지들을 쌓아올렸다. 그러면 피닉스가 찾아와 제단에 내려앉은 뒤 날갯짓을 하여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재만 남을 때까지 활활 타오른다. 다음날이 되면 그 재 안에서 작은 벌레가 생겨나고, 이틀째나 삼일 째에는 그 벌레가 날개가 돋아난 피닉스의 모습으로 변한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더 지나면 새는 날개를 펴고 원래 살던 아라비아로 날아간다. 일부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피닉스의 재생을 예수의 부활에 빗대기도 했다.

 

한편, 피닉스는 종종 이집트 천지창조 전설에 나오는 벤누(Bennu), 태평성대의 상징인 중국의 봉황(鳳凰), 새들의 왕인 인도의 가루다(Garuda) 등의 신조(神鳥)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예술과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여전히 불멸과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고학자와 함께하는 이집트 역사기행

–  요시무라 사쿠지 / 김이경 역 / 서해문집 / 2002.11.05

 

원래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를 비롯한 제4왕조까지의 피라미드에는, 벽화는 물론 문자도 없다. 제5왕조 말기의 우나스 왕 피라미드의 경우 내부에 <피라미드 텍스트>라 불리는 히에로글리프(상형문자)가 새겨지긴 했지만 그림이 그려진 예는 없다. 즉, 시대를 통틀어 피라미드의 벽에 그림이 그려진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피라미드에는 벽화가 그려지지 않았을까? 그 점을 파헤치는 것이 피라미드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고왕국 시대의 피라미드와 신왕국 시대의 왕묘를 혼동하는 수준이라면 도저히 그러한 접근은 기대할 수 없다.

……

앞서 서술했듯이 ‘피라미드는 왕의 무덤이다’라는 게 오랫동안 정설이었지만, 여기서는 그 문제점을 생각해 보려 한다. 종래에는 초기 왕조 시대에 왕족과 귀족의 분묘로 만들어진 마스타바가 피라미드의 원형이고, 마스타바를 쌓아올린 형태에서 발전해 쿠푸의 피라미드와 같은 사각추 모습을 띠게 되었다고 보았다. 형태라는 면에서만 보면 그럴 듯한 설명이다.

시대적인 추이에 비추어 보면, 제세르 왕의 계단 피라미드에서 시작한 제3왕조의 피라미드는 모두 사각의 상자를 아래서부터 차례로 쌓아올린 계단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제4왕조 스네푸르의 시대에는 하부와 상부의 경사각이 서로 다른 변형된 사각추의 굴절 피라미드가 만들어지며, 그 이후는 정사각추의 형태를 띤다. 계단 피라미드와 구별해서 정사각추의 피라미드는 진짜 피라미드로 불린다.

피라미드 건축술이 점차 발전해 왔다는 종래의 설로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되지만 좀 의심스럽기도 하다. 어느 쪽이나 똑같이 피라미드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니 목적도 똑같다고 보는 것은 경솔하지 않을까? 이들 건축물에 피라미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고대 이집트인이 아니라 후세의 그리스인인 것이다. 그리스인이 피라미드라고 이름을 붙인 유래에도 몇 가지 설이 있다. 예를 들면 피라미스라는 사각뿔 모양의 빵과 비슷해서라든가 그리스어로 ‘불’이라는 뜻의 ‘퓨르’에서 나왔다는 설이 그것이다. 어쨌던 그리스인이 정사각뿔을 보고 ‘피라미드’라고 부른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은 계단 피라미드는 ‘야르‘, 진짜 피라미드는 ‘메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런 총칭보다는 보통 하나하나에 고유명사로 이름을 붙여 불렀다. 예컨대 쿠푸의 피라미드는 ‘해가 뜨고 지는 곳’, 카프라의 피라미드는 ‘위대한 모양’ 등으로 부른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고대 이집트인은 계단 피라미드와 진짜 피라미드를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한 가지 점만 보아도 마스타바에서 계단 피라미드를 거쳐 진짜 피라미드가 되었다는 식의, 일련의 흐름으로만 피라미드를 파악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한 번쯤 선입관을 버리고 허심탄회하게 각각의 건축물을 검증해 볼 필요가 있는 건 아닐까 쉽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하는 게 좋을까? 마스타바가 무덤이었던 것은 일단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많은 마스타바에서 유해인 미라와 부장품이 발견된 걸 보면 분명하다. 다음 계단 피라미드의 경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세르의 계단 피라미드에서는 미라, 아니 미라의 일부분이 발견되었다. 사실 이것이 피라미드 왕묘설의 최대 증거이다. 방사성 탄소법으로 연대 측정한 결과, 이것은 피라미드 건축과 거의 같은 시대의 것임이 밝혀졌다. 도굴범이 미라를 들고 와 다리만 던져 놓고 갔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아마도 장식품이 붙은 윗부분은 훔치고 다리만 놔뒀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앞서 서술했듯이 그 이후의 피라미드에서는 어디서도 미라를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은 제세르의 피라미드만 마스타바의 연장으로서 분묘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에는 목적이 바뀌어 더 이상 무덤이 아니라는 것이다. 혹은 계단 피라미드까지도 무덤이었는데 도굴범에 의해 미라가 도난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진짜 피라미드도 원래는 미라가 있었지만 도난당하고 말았다는 설도 물론 성립한다. 허나 일찍이 미라가 존재했다면 그 흔적 정도는 당연히 남아 있을 터이다. 따라서 그 흔적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까.

초기 왕조까지의 역사를 보면 분묘에 사자死者의 유해와 함께 다수의 부장품을 매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어디에 매장했는고 하니 바로 지하다. 초기 왕조 시대의 마스타바도 상자 모양의 외형은 지상에 만들어져 있지만 유해와 부장품을 매장한 것은 지하실이었다. 물론 투탄카멘의 무덤도 그렇다. 적어도 오늘날까지 확실히 분묘라고 확인된 것 중에서 지상에서 매장실이 발견된 예는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대피라미드의 왕실이나 여왕실이 지상에서 수십 미터 높이에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확실히 왕실에는 석관이 놓여져 있다. 헌데 이 석관이란 말이 또 수상하다. 놓여 있었던 것은 단순한 석제 상자일 뿐, 그것이 관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대피라미드 근처에서 쿠푸의 어머니였던 헤테페레스 1세의 분묘가 발견되었는데 이 또한 지하이다. 입구는 아무도 모르게 몰래 감춰져 있었다.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눈에 띄는 입구를 만들었다면 “여기 보물창고가 있습니다.”고 가르쳐 주는 셈이니까. 도굴범으로부터 무덤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감춰 두었음에 틀림없다.

왕비의 무덤을 감추는 데 그만큼 신경을 썼다면 훨씬 많은 부장품이 있었을 왕의 분묘는 그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결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곳에 숨기는 게 당연하다. 구태여 피라미드 안에, 그것도 지상 수십 미터 높이에 분묘를 만들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하물며 그토록 정밀한 대피라미드를 건설한 쿠푸가 그런 우를 범했을 리 없다.

또한 비문에 보면 사람이 죽어서 내세에 가는 것을 “땅에서 나온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의 혼 ‘바’가 땅 속에 있는 유체에서 나온다는 것이니, 분묘는 땅 속에 파묻혀 있다는 뜻이다. 더욱이 스네푸르 혼자 적어도 다섯 기의 피라미드를 건축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왕 하나의 시신을 다섯 곳에 매장하는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으니, 한 왕이 여러 개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면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피라미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문제가 된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진짜 피라미드는 원래 무덤이 아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럼 무엇을 위해 피라미드를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이 나올 텐데 솔직히 나 자신도 확답을 할 수는 없다. 답을 내놓기 위해 몇 개의 피라미드를 조사 연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헤로도토스 이래 2500년 이상이나 모르던 문제를 그렇게 간단히 결론짓기는 어려운 일이다.

 


피라미드

–  미로슬라프 베르너 / 김희상 역 / 심산 / 2004.11.10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간단명료하고도 만족스러운 답을 기대한 독자들은 지금까지의 설명에 실망하실지도 모르겠다. 이집트학은 벌써 200년 넘게 연구되어 왔지만 아직 정확한 답을 줄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문제의 실체에 접근할 수가 없거나, 다른 비전통적이고도 비과학적인 견해에 발목이 잡혀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언뜻 보기와는 달리 문제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천 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 장소도 곳곳에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축조 과정에 들어간 재료도 제각각이며, 그 크기도 정말 다양하다. 그만큼 우리는 모든 피라미드들을 한꺼번에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피라미드, 상상 그 너머의 세계

–  케빈 잭슨 / 정주현 역 / 샘터 / 2006.03.27

 

이집트의 기나긴 이집트 역사에서 피라미드 건축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덧없이 사라졌다. 신비에 휩싸인 거대한 피라미드는 스네프루, 쿠푸, 카프레로 이어지는 오직 세 왕의 통치기에 건설되었을 뿐이다.

나머지 85개의 피라미드를 모아봤자 이 시기에 지은 피라미드 부피의 41% 밖에 안 된다.

……

이집트인들에게 피라미드는 유해를 안장하는 곳 외에 더 큰 무언가가 있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즉, 피라미드는 별이 되기 위한 출발지였던 것이다.

 


고대 문명의 이해

–  브라이언 페이건, 크리스토퍼 스카레 / 이청규 역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5.03.16

 

갓 출범한 국가에 당면한 문제가 있음에도 파라오가 갑자기 피라미드 건설이라는 호화스런 축제를 시작한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아는 바가 없다. 이집트의 다른 주요 공공사업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는 것은 식량과 건축자재를 수송하고 석재를 채굴하고 현장으로 운반하는 숙련된 기술자와 노동자를 운용하는 행정조직이 제대로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에 대한 연간 노동 공역을 이행하고자 단기간에 몰려온 수천 명의 주민을 컴퓨터 없이 배치하고 지원하는 총괄관리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

파라오는 거대한 노동 집약적 공공사업을 국가의 성장 원동력으로 삼아 시행하였다. 국가가 거대한 공급자였던 것이다. 쿠르트 멘델스존(Kurt Mendelssohn)이 주장한 대로, 피라미드는 인간을 그들의 수호자인 왕과 태양신에 연결하는 수단으로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태양신은 인간의 생명과 풍요로운 수확의 원천이었다. 왕과 신하의 관계는 호혜적이며 정신적인 것이었다. 파라오는 신성한 왕이며 실체적인 신성함 그 자체로, 측근들은 매년 노동력을 제공받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피라미드의 건축은 공공사업이었고, 통치자의 권한을 공고히 하고 신하들을 왕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였다.

 


크리스티앙 자크와 함께 하는 이집트 여행

–  크리스티앙 자크 / 김병욱 역 / 문학세계사 / 2006.11.10

 

기자를 백 번째 방문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경이로움에 젖을 것이다. 이집트어로 ‘아크헤트(akhet)’, 즉 <빛의 고장>으로 불리는 대(大)피라미드가 그 일대를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높은 곳’ 가까이 있는 자>를 뜻하는 고원은 아닌게 아니라 왕의 영혼이 자신을 탄생시킨 그 천상의 원천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장소이다.

……

이집트인들이 돌들을 운송한 방법은 이제 알려졌으나 과연 그 돌들을 어떻게 들어 올렸는지는 여전히 조사 중이며, 피라미드 건설에 사용된 그 모든 기술을 알아낸다는 것은 아직도 요원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건설에 참여한 어떤 건설자도 그가 속한 사회 계급상의 서열이 어떠했건 결코 노예는 아니었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이는 피라미드 바로 옆에 있었던 마을을 발견한 이집트 연구가 자히 하와스(Zihi Hawass)가 최근에 다시 한 번 예증한 사실이기도 하다. 피라미드들은 채찍질 당하며 뜨거운 태양 아래 목말라 죽어가던 피억압자들 무리의 작품이 아니라, 돌들을 추출해내고 마침내 안착시키는 데 이르기까지 놀라운 노동 조직력을 지녔던, 재능의 절정에 있던 한 문명, 한 엘리트 집단의 작품이다. 피라미드 건설은 왕의 영혼의 영생을 보장하는, 나아가서 한 국민의 영생을 보장하는 주요 의식 행위였다.

기하학자들과 측량사들은 2백 미터가 넘는 네모난 받침돌들을 재단하고 각 층마다 그 돌들이 완벽한 수평이 되게 쌓고 정확한 방위를 계산하기 위해 매우 까다로운 문제들을 풀어야 했으며, 내실들이 납작하게 찌부러지는 일이 없도록 전체를 잘 접합시켜야 하는 골치 아픈 숙제를 풀어야 했다. 돌 재단사들의 수훈은 특히, 2톤이 넘는 돌들이 접합부에 바늘 하나 밀어 넣을 수 없을 만큼 잘 맞춰진 그런 석조 내장 공사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

고(古)왕국의 피라미드는 무덤일까? 대부분의 이집트 연구가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피라미드가 자연의 대재앙이나 전쟁, 전염병 등을 예고하는 예언적 건축물이었으리라는 그릇된 견해에 여전히 미련을 가지면서도 말이다. <피라미드>라는 말은 삼각형의 <밀 케이크>를 뜻하는 그리스어 <푸라미스(puramis)>에서 유래하지만, 그보다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어로 ‘메르(mer)’라고 하며, 이 말은 <괭이>,<운하>,<사랑>과 동의어이다. 토대 구덩이를 파는 데 쓰이는 괭이와 피라미드는 둘 다 건설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연관성이 있다. 그리고 피라미드는 천상의 에너지가 순환하는 운하이며, 또 이 운하는 신의 사랑을 붙잡기 위한 것으로 이것이 없으면 어떤 건설도 불가능할 것이다.

……

미라 한 구에 피라미드 세 개…… 피라미드가 단순히 무덤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이보다 더 명백한 증거가 필요할까? 스네프루의 미라는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그가 휴식을 취하고 싶어한 곳이 어디였는지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예 덕분에 피라미드가 죽음의 장소로 간주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곳은 오히려 천상의 에너지를 지상의 조화로 탈바꿈시키는 데 꼭 필요한 기념물이며, 태초의 창조가 살아 있는 모든 종(種)들에 동화될 수 있도록 걸러지는 운하이다.

 


피라미드 에너지

–  빌케렐 / 김태윤 역 / 물병자리 / 1997.08.30

 

폴 브런튼은 『이집트의 신비』라는 그의 책에서 대피라미드가 무덤의 장소가 아니라며 다섯 가지 강력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1. 아마도 결정적인 증거로서 간주될 만한 것은 여기의 이교도 왕의 무덤이 비어 있고, 관의 뚜껑도 없으며,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상자가 왕의 방이 있는 층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왕의 석관이라고 당신의 이집트학자들은 말할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간주할 것이다. 하지만 이 관의 면들로는 보통의 상투적인 본문이나 종교적인 해석을 할 수 없다. 왜 거기에는 단 하나의 단어도 상형문자적인 비명의 한 일종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실제적으로 다른 모든 관들은 그것의 용도를 나타내기 위해 글이 씌어 있거나 기념할 만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만일 이것이 가장 축하하여야 할 이집트 왕의 무덤 중의 하나가 확실하다면 왜 여기에는 없는 것일까?

 

2. 이 관의 천정으로는 200피트 이상의 구멍이 나 있는데 이는 외부의 공기를 접촉하려는 공기 통로로 보인다. 이러한 공기 통로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미이라에게는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지 않고, 반면에 노동자들도 그것에 뚜껑을 덮고 나면 다시 그곳에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왕족의 묘로 만들어진 이집트의 어떠한 건축물에서 이런 공기 구멍을 가지고 있는 방을 본 적이 없다.

 

3. 다른 이집트인들은 실제적으로 매장을 위하여서는 지표면보다 낮은 곳에 돌을 잘라내고 둥근 매장용 구덩이를 팠다. 이러한 때에 이 관으로 추정되는 것은 왜 지표면으로부터 150피트나 올라온 공간 속에 있는 것일까? 사실상 죽은 자를 땅밑이나 땅위에 두는 것이 과거에나 지금도 전 세계적인 관습이다. ‘먼지가 되어서 돌아간다’는 자연의 메시지가 인간에게 있어왔다.

 

4. 왕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 왜 대회랑 같은 넓은 공간이 그렇게 높은 곳에 지어졌을까? 그리고 거의 삼십 피트의 높이로 만들어졌을까? 단지 4피트의 높이 위로 통하는 통로들만으로도 동일하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대회랑 자체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덜 복잡하고 노동력도 훨씬 덜 들이고 그 일을 끝마칠 수 있었는데.

 

5. 왜 두번째 방은, 소위 여왕의 방으로 불리는, 첫번째 방에 그렇게 가까이 있는 것일까? 파라오는 결코 자신의 곁에 여왕들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미이라에게는 두 개의 무덤이 필요하지 않다. 왕비의 방에는 이집트인 무덤으로서 대화하고 있는 벽그림들과 묘비가 있다. 그것의 존재로 곁방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하지만 이것은 텅 빈 것이고 왕의 방이라는 장식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왜 공기 구멍을 설치하였다가 그것이 발견되기도 전에 그것을 막아버렸을까? 왜 건축자들은 이 두 개의 무덤에 그 어려움을 겪으면서 환기구를 만들려고 했을까? 죽은 자는 숨을 쉬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반복할 필요가 있다.

 


사이버 문화와 예술의 유혹

–  이종관 / 문예출판사 / 2003.02.15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이 살아온 흔적을 살펴보면 인위적 터는 애초에 자연의 힘을 구체화하는 사물로서 지어졌다. 슐츠는 초기 서구 예술과 건축사를 돌이켜보면서 여기에 두 가지 방식이 있음을 확인한다. 즉 자연의 힘이 선이나 장식을 통해 직접적으로 표현되거나 아니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에서 표출되고 있다. 전자의 방식은 북유럽에서, 후자의 방식은 지중해 지방에서 발견된다.

슐츠는 여기서 지중해 지역의 건축 양식에 주목하고 있다. 지중해 지역 건축은 거석 건축이라는 점이 눈에 띄는데 이때 돌이란 재료는 하나의 벽돌처럼 건물을 지탱하는 도구적 요소로서 그저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돌을 통해 비로소 견고성과 항구성이라는 의미가 실현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항구성이란 죽을 운명의 인간에게 가장 시원적인 실존적 요구이며, 따라서 인간의 번식과 관계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돌의 존재는 다시 인간의 실존과 관련되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 예로는 선돌을 들 수 있다. 선돌은 자연 상태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돌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일으켜 세워져 삶의 항구적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남근을 상징하는 사물이 되었다.

이후 원초적인 힘은 추상화의 과정을 거쳐 수직과 수평(능동과 수동) 체계로 변형된다. 슐처에 따르면 이러한 발전은 이집트의 직교 구조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이 체계에 다른 자연적 의미도 연관지어진다. 예컨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단순히 시신을 매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시신을 매장하기에는 그것은 너무도 거대하다.

피라미드는 무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산으로 지어졌다. 피라미드는 이렇게 산으로 지어짐으로써 하늘과 땅을 연결짓는 동시에 태양을 받아들이는 수직 축으로서 역활을 담당하며, 실제 산이라는 터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피라미드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최초의 산과 찬란한 태양신 ‘라’를 통일시키면서 왕을 그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피라미드는 오아시스와 사막에 위치함으로써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이집트의 공간적 구조를 가기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광활한 불모지 사이에 길게 뻗어 있는 비옥한 협곡 형태를 이루고 있는 이집트를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발명 이야기

–  헨드릭 빌렘 반 룬 / 조재선 역 / 서해문집 / 2005.01.17

 

아주 흥미진지한 유물들을 많이 손에 넣은 이들은 그동안 애써 경멸해왔던 빙하기의 선조들이 실제로는 예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무식하고 야만스런 짐승들이 아니었으며,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찬란한 문명은 피라미드가 세워지기 수천 년 전에 이미 그 흔적이 사라져버린 다른 어떤 민족이 수립한 문명을 계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그렇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 발생한 경우나 새로운 발명이 출현했을 경우, 더군다나 그 발명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경우라면, 중국인들이나 크레타인들 혹은 대서양 연안에 사는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그 발명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발명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 정보를 제대로 잘 활용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 점은 지금의 우리들과 마찬가지였다. 무관심과 무지, 그리고 무엇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합리적인 진보를 끈질기게 방해해왔다. 그러나 어떤 발명은(일단 모든 사람의 관심에 호소하는 바가 있으면) 놀라울 만큼 신속하게 퍼져 나가기도 했다는 사실을 여러 동굴들과 무덤들의 흔적이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하게 입증해주고 있다.

 


예술과 과학

–  엘리안 스트로스 / 김승윤 역 / 을유문화사 / 2002.05.15

 

피라미드의 돌들은 외피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는 반사 물질이 층을 이루며 덮고 있었다. 해가 뜰 때 피라미드들은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피라미드는 태양 에너지 발전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사이버네틱 조각품과 개념적으로 유사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피라미드는 기하학적인 미의 상징으로 보였다. 나중에 아랍인 여행가 이븐 바투타Ibn Batuta(1304~1377)는 이렇게 말했다. “토트Thoth 신은 별들의 모습에서 대홍수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망각과  훼손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과학책들과 기타 물건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피라미드를 지었다.”

 


세계의 모든 신화

–  케네스 C. 데이비스 / 이충호 역 / 푸른숲 / 2008.11.20

 

피라미드 시대에 들어 피라미드는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진 것 외에도 설계 면에서나 종교적 기능 면에서도 훨씬 세련되게 변했다. 초기 무덤의 단순한 매장실은 죽은 왕에게 공물을 바치는 신전과 여러 개의 방, 도굴꾼을 막기 위한(대개 실패로 돌아갔지만!) 화강암 문과 가짜 통로까지 갖추어진 큰 규모의 매장실로 변했다. 기자의 피라미드들을 왜 지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가장 단순한 대답은 파라오가 신성의 증표인 영원한 삶에 집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설계와 건축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피라미드는 이집트 신화와 상징적인 연관성을 지닌다. 완만하게 직선으로 상승하는 피라미드의 네 면은 비스듬히 비치는 햇빛을 모방한 것으로, 이집트 종교에서 태양(그리고 태양신)이 지닌 중심적 위치를 보여준다. 건축물 자체는 시간이 시작되던 때 물로 뒤덮인 혼돈 속에서 솟아오른 태초의 둔덕(최초의 신이 밟고 서서 이집트의 모든 신을 탄생시켰던 벤벤석)을 표현 또는 재현한 것이다.

피라미드와 그 지리적 배치는 이집트의 천문학과 관련이 있다는 가설도 많이 나왔다.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시대에는 ‘쿠푸의 지평선’이라 불렀는데, 땅과 하늘이 만나는 지점이란 뜻이다. ‘지평선’을 뜻하는 단어는 ‘범람’이란 단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오늘날 이집트 학자들은 피라미드가 단지 죽은 왕을 기리기 위한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부활에 대한 총체적인 믿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 이 기념비적인 건축물과 신전들과 그 주변의 땅에는 태양, 지평선, 법람, 태초의 둔덕, 왕의 부활이라는 개념이 모두 어우러져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  피터 A. 클레이턴 / 김훈 역 / 가람기획 / 2002.06.10

 

기자 피라미드의 형상은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 숭배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창조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베누 새(불사조에 해당되는 고대 이집트의 신령스러운 새)가 내려앉을 만한 나지막한 오벨리스크를 세운다는 발상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그 피라미드는 지상에 내려꽂히는 태양 빛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금도 기상 조건만 맞으면 태양 빛이 지상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광경은 쉽게 볼 수 있다. 케오프스 왕이 기자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세우기 시작했을 때, 그의 마음속에서는 그 전부터 진행되어온 피라미드 축조의 긴 발전사와 아울러 종교적인 관념이 일종의 지침으로서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1974년. 멘델스존 교수는 두 가지의 흥미로운 이론을 발표했다. 하나는 메이둠 피라미드가 무너진 사건이 다슈르 피라미드를 짓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 다슈르 피라미드의 모양이 현격하게 달라지게 되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첫번째 이론과 긴밀하게 연관된 것으로, 고왕국 시대의 모든 피라미드가 하나같이 왕들의 등극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지어진 게 아니며, 따라서 둘 이상의 피라미드가 동시에 지어졌을 수도 있는데 메이둠과 다슈르의 피라미드들이 바로 그 경우에 해당된다는 설이다.

그 이론에서 자연스럽게 따라나오는 귀결로, 그는 또 다른 관찰 결과를 제시했다. 즉, 현존하는 고왕국시대의 피라미드의 숫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파라오의 숫자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그 피라미드들의 일부는 매장을 하는 데 사용되지 않은 듯하다. 예컨대, 메이둠 피라미드의 경우 매장실이 너무 비좁은데다 채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고, 또 그 안에 석관을 안치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스네페루 왕의 시신은 다슈르에 있는 두 기의 피라미드 중에서 어느 하나 속에만 안치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멘델스존 교수는 그런 파격적인 학설을 좀더 밀고나가, 고대 이집트 왕들이 종교적인 동기에서뿐만 아니라 또 다른 동기에서도 피라미드를 세웠다고 주장했다. 즉, 피라미드는 점차 성장해가는 이집트에 강한 응집력을 심어주자는 의도가 내포된 국가적인 노력의 소산이기도 하다고. 이집트 학을 연구하는 모든 학자가 다 그의 학설들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학설들은 많은 문제에 사람들의 흥미를 집중시키는 역활을 했으며, 따라서 간단히 물리쳐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피라미드, 상상 그 너머의 세계(케빈 잭슨,조너선 스탬프 / 정주현 옮김 / 샘터)

피라미드 (미로슬라프 베르너 / 김희상 옮김 / 심산)

신의 거울(그레이엄 핸콕 / 김정환 옮김 / 김영사)

네이버 백과사전(두산백과) : 헬리오폴리스

네이버 백과사전(두산백과) : 피닉스

https://en.wikipedia.org/wiki/Egyptian_pyramids

http://en.wikipedia.org/wiki/Ancient_Egyptian_religion

http://en.wikipedia.org/wiki/Benben

https://en.wikipedia.org/wiki/Bennu

http://hans.wyrdweb.eu/about-benben-stone/

http://en.wikipedia.org/wiki/Freemasonry

http://en.wikipedia.org/wiki/Orion_Correlation_Theory

http://robertbauval.co.uk/articles/articles/cciae.html

http://www.ytn.co.kr/_ln/0109_20100112092700509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065895

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4/20/2005042077035.html

http://www.touregypt.net/featurestories/egyptologists.htm

http://www.saqqara.nl/context/profiles

나폴레옹도 벌벌 떨었던 기자(Giza) 세 피라미드

`이집트 양대 피라미드 건축, 단일 사업’ 학설 대두

왕들의 무덤? 지구 형상화? 가상의 천국?

http://www.gizapyramid.com/

http://hercolano2.blogspot.kr/2012/05/great-pyramid-pyramids-and-geopolymers_22.html

 

이집트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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