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성열의 세계 – 문화재 : http://yellow.kr/nt.jsp
※ 국보 제86호 /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開城 敬天寺址 十層石塔) / 1962년 12월 20일 지정 /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 작품이다.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경천사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있던 절로, 고려시대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에 세워져 있었던 이 탑은 일제 시대에 일본으로 무단으로 반출되었던 것을 되돌려 받아 1960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3단으로 된 기단(基壇)은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고, 그 위로 올려진 10층의 높은 탑신(基壇) 역시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이었다가, 4층에 이르러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기단과 탑신에는 화려한 조각이 가득 차 있는데, 부처, 보살, 풀꽃무늬 등이 뛰어난 조각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4층부터는 각 몸돌마다 난간을 돌리고, 지붕돌은 옆에서 보아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골을 표현해 놓는 등 목조건축을 연상케 하는 풍부한 조각들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탑의 1층 몸돌에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새로운 양식의 석탑이 많이 출현했던 고려시대에서도 특수한 형태를 자랑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특이하다. 전체적인 균형과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태로 눈길을 끌며, 지붕돌의 처마가 목조건축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양식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훼손되었던 원래의 탑 형태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복원작업을 거쳐 현재 새로 개관한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95년 해체 이후 2005년 복원 완료까지 10년을 소비했으며, 그 모든 과정은 디지털화되었고 그 과정을 담은 종합보고서도 나왔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대리석은 이전에 탑의 재료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우리나라 탑 가운데 매우 이례적인 구조적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몽골, 티베트 불교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석탑 건립의 주도자들도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친원세력들이었다.
석탑의 1층 탑신 이맛돌에는 진령부원군(晋寧府院君) 강융(姜融)과 원사(院使) 고룡봉(高龍鳳)이 시주하여 탑을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고 있는데,
“세상에 전하는 말로 원나라 탈탈승상(脫脫丞相)이 원찰을 만들고, 진령군 강융이 원나라에서 장인(匠人)을 뽑아다가 이 탑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탈탈승상과 강융의 화상이 남아 있다”
라고 씌어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탑이 3, 5, 7, 9 등 홀수 층으로 조성되는데 이것은 경천사지 십층석탑과 마찬가지로 10층으로 조성되었다. 어떤 이는 이 같은 탑들도 아랫부분 3층과 윗부분 7층을 구분해 꾸민 점에서 홀수를 바탕으로 조성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사료에는 13층이라 기록되어 있다며 기단 3단을 합쳐 13층 석탑이라고도 한다.
경천사 석탑의 정교한 조각 표현이 가능했던 이유는 경천사 석탑이 전통적인 불상이나 석탑의 재질인 화강암이 아니라 조형 작업이 쉬운 무른 재질의 대리석이기 때문이다.
원각사지 십층 석탑(http://yellow.kr/blog/?p=35). 조각적으로는 차이를 보이지만 탑의 전체적인 형태로 보면 거의 쌍둥이 탑이라 할 만하다. 동일한 시대도 아니고 한 세기를 지나서 거의 같은 형태의 탑이 재현된 정확한 이유는 현재로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찹고자료 및 관련자료>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92&contents_id=4518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개성경천사지십층석탑
네이버 지식백과(한국 미의 재발견 – 탑) : 개성경천사지십층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