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신라 사이에 벌어진 관산성(管山城)전투는 두 나라 미래의 명운을 결정짓는 한판의 승부였다. 이 전투의 중요성을 보면 작지가 않은데, 백제는 중흥의 기틀을 빼앗기고 신라는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그런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이를 전문적으로 다룬 논문이 적지 않게 나왔음은 그를 방증한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聖王)이 사망한 후 그 설욕을 위해 부심했다. 6세기 중엽까지 성왕을 추모하면서 군사력을 재정비하고, 567년부터 대외적인 외교ㆍ군사 활동을 다시 벌이기 시작했다. 북조(北朝)와 교섭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신라의 상주(上州) 지역을 공격했다.
무왕(武王)이 즉위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 한다. 하주(下州)와 신주(新州)를 번갈아 공략하여 신라와의 전선을 확대했고, 624년에는 드디어 소백산맥을 돌파하여 그 동쪽으로 진격했다. 무왕 말년부터는 하주(下州)에 공격을 집중하여, 신라의 방어선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642년에 대야성(大耶城)을 점령했다.
대야성이 있는 합천 지역은 하주의 치소가 설치되어 대가야의 故地를 다스리던 정치ㆍ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군은 김춘추 사위인 성주(城主) 김품석(金品釋)과 그 부인을 처단하여 관산성 패전의 치욕을 철저히 씻었다. 신라로서는 대야성의 함락으로 경주까지 위험에 처했으며, 이를 수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외교 활동을 벌이고 군사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백제의 방어는 견고했으며, 백제 멸망 후인 661년에야 대야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대야성 전투의 결과, 일시적으로 백제가 신라를 압도했지만, 이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신라가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몰리게 된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과정에서 군권(軍權)을 장악한 김유신과 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가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이후 양자가 연합해 새로운 중대(中代) 왕실의 핵심세력을 형성했으며, 바로 이들의 주도 하에 삼국통일(三國統一)이 성취된 것이다.
관산성전투의 결과 패전의 당사자는 백제뿐만 아니라 백제편을 들었던 대가야(大加耶)도 마찬가지였다. 대가야는 관산성전투 당시 약 1만명의 병력을 참가시켰었는데 백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을 병력을 잃게 되었다. 그 충격이 너무도 엄청나서 백제와는 달리 가야는 회복을 못하고 8년뒤 신라의 보복 공격을 받고 망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왜왕 ‘흠명천황(킨메이 천황)’이 절규하던 내용이 일본서기에 적나라하게 전하고 있다.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와 더불어 가야와 함게 동맹을 형성하고 약 1천여명의 병력을 파병했던 고대일본 ‘왜’였다. 이런 ‘왜’이다 보니 신라에 대한 감정이 좋을리가 없었다. 대가야 멸망 소식을 들은 ‘킨메이(欽明)천황’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한마디로 뼈에 사무친 원한의 절규 그 자체이다.
신라는 6세기 중반 이전에 소백산맥 서쪽 지역에 쌓은 산성을 중심으로 서북지역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는데, 그것의 중심은 삼년산성(보은군 보은읍)에서 사벌지역(상주시)에 이르는 루트와 관산성(옥천군 옥천읍)에서 감문지역(김천시 개령면)에 이르는 루트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다.
근래 학계의 대세는 관산성이 삼성산이며 성왕이 사망한 구천(拘川)은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군전마을을 싸고 도는 협곡을 가리킨다는 설이 세를 얻어가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또 삼성산의 위치는 어디를 말하는가. <동국여지승람>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옥천군 산천 조에는 “삼성산 재군서오리 유고성유지(三城山 在郡西五里 有古城遺址)”라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삼성산은 옥천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속칭 재건산이 될 것이다. 삼성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해발 303m).
554년의 관산성 전투와 관련한 기록 가운데 풀리지 않은 채 궁금증은 싸움이 마무리될 즈음에 일어난 백제 성왕(聖王)의 마지막 처형 장면이다. 거기에는 사로잡은 성왕의 목을 치려는 신라의 전사(戰士)가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성왕(聖王)과 나누는 대화 속에 신라의 국법(國法)을 운위(云謂)하고 있다. 이제 전사(戰士)는 성왕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로서 신라의 국법을 어겼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전사가 포로로 잡은 백제 성왕의 목을 베려 하면서 굳이 신라의 국법을 어겼다는 이유를 명분으로 내세우는가, 이것은 지금까지 풀지 못하고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대상이다.
※ 백제 왕 계보는 여기를 참조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44&contents_id=6980
※ 관산성 전투 전후의 관련된 연표를 다음과 같이 작성해 보았다:
552년 5월 : 백제, 왜에 원병을 요청하며 고구려와 신라의 화친을 언급함
552년 후반 : 백제, 한성과 평양 포기 -> 신라가 한성을 차지
553년 7월 : 신라, 신주(新州, 경기도 광주)) 설치
553년 10월 : 백제-고구려 백합야 전투 / 백제 성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감
554년 5월 : 왜, 백제에 파병
554년 7월 : 백제-신라의 관산성 전투 시작, 초반 신라의 고전
554년 9월 : 백제, 신라의 진성(珍城, 충남 금산?) 공격
554년 겨울 : 고구려, 백제 웅천 공격
554년 12월 : 관산성 전투, 성왕 사망, 백제 · 대가야 · 왜 연합군 신라에 궤멸
555년 2월 : 백제, 성왕의 사망을 천황에게 보고
그리고 당시의 대외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혼란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의 충돌은 무관하지 않다.
– 534년 북위의 분열
– 548년 남조의 양, 후경의 반란
– 550년 북제의 성립
– 551년 남조의 양, 후경이 황제에 오르지만 552년에 전투 중 사망
– 551년 돌궐의 독립
– 556년 북주의 성립
* yellow의 세계사 연대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550
※ 관련글
– 백제 성왕, 한강 유역 재점령 – 551년 : http://yellow.kr/blog/?p=2395
–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다 – 553년 : http://yellow.kr/blog/?p=2400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 보았다. 아래에 언급한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되었으며 <동북아 역사재단>의 번역본을 참조하였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완성되었으며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를 참조하였다.
554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15년(서기 554)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1을 보수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明穠, 성왕)이 가량(加良)2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3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4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9천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穠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飡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 명활성(1) :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다.
– 가량(2) : 가야(伽倻)의 다른 이름.
– 김무력(3) : 김유신(金庾信)의 조부이고 금관가야(金官伽倻)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셋째 아들로 532년(법흥왕 19)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부왕과 왕모 및 형 김노종(金奴宗), 김무덕(金武德) 등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였다. 553년(진흥왕 14)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으로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이어 백제의 영토까지 점령하여 한성(漢城)을 중심으로 신주(新州)를 설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아찬(阿湌)의 관등으로 신라의 경기도 지역을 통치하는 신주(新州: 廣州)의 책임자인 군주(軍主)가 되었다.
– 삼년산군(4) : 신라의 상주(尙州) 삼년군(三年郡)이다. 현재 충북 보은군 보은읍 대야리(大也里)와 어암리(漁岩里) 사이에 있다.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10년(서기 554) 겨울, 백제의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12월 그믐날, 일식이 있었다. 물이 얼지 않았다.
十年 冬 攻百濟熊川城 不克 十二月晦 日有食之 無氷
※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 성왕
32년(서기 554) 가을 7월, 임금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혼전 중에 임금이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15년 봄 정월 무자삭 갑오(7일)에 황자 정중창태주부존(渟中倉太珠敷尊 ; 누나쿠라노후토타마시키노미코토)을 황태자로 삼았다.
병신(9일)에 백제가 중부 목리 시덕 문차(木刕施德文次)1와 전부 시덕 왈좌 분옥(施德曰佐分屋)2 등을 축자(筑紫 ; 츠쿠시)에 보내 내신(內臣)3과 좌백련(佐伯連 ; 사에키노무라지) 등에게 “덕술 차주와 간솔 색돈 등이 지난해 윤달 4일에 와서 ‘신(臣) 등[신 등은 내신을 말한다.]은 내년 정월에 도착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은 하였지만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또한 군대의 수는 얼마입니까. 대강이나마 듣고 미리 군영의 성벽을 쌓고자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별도로 “이제 듣자니 황공하신 천황의 조서를 받들어 축자에 가서 보내 줄 군대를 환송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올해의 싸움은 전에 없이 매우 위태로우니 보내주실 군사를 정월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내신이 명령을 받들어 “바로 구원군 1천, 말 1백 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라고 대답하였다.
2월에 백제가 하부 간솔 장군 삼귀(杆率將軍三貴)와 상부 나솔 물부오(奈率物部烏)4 등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덕솔(德率) 동성자막고(東城子莫古)를 바치면서 이전의 번(番)인 나솔(奈率) 동성자언(東城子言)과 교대시키고, 오경박사 왕류귀(王柳貴)를 고덕(固德) 마정안(馬丁安)과 교대하도록 하였다. 승려 담혜(曇慧) 등 9인은 승려 도침(道深) 등 7인과 교대시켰다. 그리고 따로 칙을 받들어 역박사(易博士) 시덕(施德) 왕도량(王道良), 역박사(曆博士) 고덕(固德) 왕보손(王保孫), 의박사(醫博士) 나솔(奈率) 왕유릉타(王有㥄陀), 채약사(採藥師) 시덕(施德) 반량풍(潘量豊), 고덕(固德) 정유타(丁有陀), 악인(樂人) 시덕(施德) 삼근(三斤), 계덕(季德) 기마차(己麻次), 계덕 진노(進奴), 대덕(對德) 진타(進陀)를 바쳤다. 모두 요청에 따라 교대시켰다.
3월 정해삭(1일)에 백제의 사신 중부 목리 시덕 문차(木刕施德文次) 등이 돌아갔다.
여름 5월 병술삭 무자(3일)에 내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로 갔다.
겨울 12월에 백제가 하부 간솔(杆率) 문사간노(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臣) 명(明)과 안라의 여러 왜신들, 임나의 여러 나라의 한기들이 아룁니다. 사라(斯羅)5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박(狛)6과 마음을 같이하여 바다 북쪽의 미이거(彌爾居)7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유지신(有至臣 ; 우치노오미)8 등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신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천황이 보낸 유지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도착하였습니다. 신들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12월 9일에 신라를 공격하도록 보냈습니다. 신이 먼저 동방령(東方領) 물부막가무련(物部莫哥武連 ; 모모노베노마카루노무라지야)을 보내 그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을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유지신이 거느리고 온 죽사물부막기위사기(竹斯物部莫奇委沙奇)는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위령(威靈)으로 이 달 9일 유시(酉時)에 성을 빼앗아 불태워버렸습니다. 단촐한 사신을 배로 급히 파견하여 아룁니다.”라고 말하였다. 별도로 “만약 신라 뿐이라면 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박(狛)과 신라가 함께 힘을 합하였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죽사도(竹斯島 ; 츠쿠시노시마)9 근처에 있는 여러 군사들을 보내 신의 나라를 도와주시기를 엎드려 청합니다. 또한 임나를 도울 수 있다면 일은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주상하였다. 그리고 “신이 따로 군사 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은 정말 급해서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는 것입니다. 좋은 비단[錦] 2필, 탑등() 1령, 도끼 3백 구, 사로잡은 성의 백성 남자 2명과 여자 5명을 바칩니다. 변변치 않아서 죄송할 따름입니다.”라고 주상하였다.
여창이 신라를 정벌할 것을 모의하니 기로(耆老)10가 하늘이 아직 우리와 함께하고 있지 않습니다.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언하였다. 여창이 “늙었구려, 무엇을 겁내는가. 우리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는데 어찌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11에 성책을 쌓았다. 그 아버지 명왕은 여창이 계속된 전쟁에 오랫동안 쉬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고생하는 것을 걱정하였다.어버이의 자애로움도 펼치지 못하고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도 효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몸소 가서 그 노고를 위로하고자 하였다. 신라는 몀왕이 친히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징발하여 길을 차단하고 격파하였다. 또한 이때 신라에서는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12[다른 이름은 곡지(谷智)이다.]에게 “고도는 천한 놈”이다. 명왕은 유명한 군주이다. 이제 비천한 노비에게 유명한 군주를 죽이게 하자.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명왕은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건네줄 수 없다.”고 말하였다. 고도는 “우리나라 법에는 맹약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할지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말하였다[어떤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에 허리를 기대고 앉아 곡지(谷智)에게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주며 베도록 하였다.”고 한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까지 사무쳤다. 돌이켜 헤아려 보아도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고 하면서 머리를 내밀어 베도록 하였다. 고도는 목을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서 묻었다[어떤 책에는 “신라는 명왕의 두골을 남겨 매장하고 나머지 뼈는 예를 갖춰 백제에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다. 이름하여 그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한다.”고 한다.]. 여창은 마침내 포위당하여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사졸들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축자국조(筑紫國造 ;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13라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 활시위를 당겨 신라의 기병 중 가장 용감한 자를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은 예리하여 말안장 앞의 전륜(前輪)과 후륜(後輪)을 관통하여 갑옷의 옷깃까지 다다랐다. 계속해서 쏜 화살은 비 오듯이 줄기차게 이어져 포위한 군대를 퇴각시켰다. 여창과 여러 장수들은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갈 수 있었다. 여창은 국조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며 안교군(鞍橋君 ; 쿠라지노키미)이라 높여 불렀다[안교는 여기서는 구라니(矩羅膩 ; 쿠라지)라고 한다.]. 이때 신라 장수들은 백제가 피로하고 지쳤음을 알고 드디어 전멸시키고자 하였다. 그러자 한 장수가 “안 된다. 일본 천황이 임나 문제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 관가를 멸망시킨다면 반드시 후환이 따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만 중지하였다.
– 시덕문차(1) : 중부 목리 시덕 문차(木刕施德文次), 목리는 백제의 복성이고 문차가 이름이다. 『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543) 3월에 귀국한다. 『일본서기』에서는 ‘부+성+관등+이름’의 표기와 ‘부+관등+성+이름’의 두 계열의 백제인명 표기를 확인할 수 있다.
– 전부 시덕 왈좌 분옥(前部施德曰佐分屋) (2) : 왈좌를 백제의 성으로 보고 前部施德曰佐分屋을 백제인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으나, 왈좌씨는 도래계 씨족으로서 왜국에도 있었으므로 그는 왜계 백제관료였을 가능성이 높다.
– 내신(3) : 『일본서기』에서는주로 왕의 측근으로 집정관적인 성격을 가진 자에게 붙는 직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 나솔물부오(4) : 물부씨계 왜계 백제관료로 이름은 烏이다.
– 5 : 사라(斯羅)란 신라의 비칭이다. 『양직공도』백제국사조에서는 백제사신이 양(梁)나라에 가서 백제 주변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열거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기록에서도 신라를 斯羅라 칭하고 있다.
– 6 : 박(狛)은 고구려를 뜻한다.
– 7 : 미이거(彌爾居)는 관가(官家, 궁궐)를 뜻한다.
– 8 : 내신(內臣)과 동일인물
– 9 : 현재 일본 규슈(九州)를 가리킨다.
– 10 : 기로(耆老)는 당시 백제 조정의 원로 대신들을 가리킨다.
– 11 : 구타모라(久陀牟羅)는 현재 충북 옥천군 군서면의 한 촌으로 추정된다. 牟羅는 村의 의미이다.
– 12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군 裨將인 삼년산군의 고간도도(高干都刀)의 습격으로 백제성왕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苦都는 都刀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高干은 신라 외위 11등 가운데 제3등에 해당하는 高干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에 천민인 사마노(飼馬奴)와 신분상 큰 차이를 보인다.
– 13 : 축자국조(筑紫國造)는『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 5월조에 內臣이 이끌고 온 수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 진흥왕
문무왕 8년 (668년)
제24대 진흥왕은 왕위에 올랐을 당시 나이가 15세였으므로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태후는 곧 법흥왕(法興王)의 딸이자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왕비였다. 왕은 임종할 때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돌아가셨다.
승성(承聖) 3년(서기 554) 9월에 백제의 병사가 진성(珍城)1에 쳐들어와서 남녀 3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이에 앞서 백제는 신라와 군사를 합쳐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지만, 진흥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랄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였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서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서 이렇게 침범한 것이다.
第二十四 眞興王卽位 時年十五歲 太后攝政 太后乃法興王之女子 立宗葛文王之妃 終時削髮 被法衣而逝
承聖三年九月 百濟兵來侵於珍城 掠取人男女三萬九千 馬八千匹而去 先是 百濟欲與新羅合兵 謀伐高麗 眞興曰 國之興亡在天 若天未厭高麗 則我何敢望焉 乃以此言通高麗 高麗感其言 與羅通好 而百濟怨之 故來爾
진성(1) : 충남 금산?
※ 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三國史記 卷第四十三 列傳 第三) – 김유신
문무왕 8년 (668년)
문무대왕이 영공과 함께 평양(平壤)을 격파한 다음 남한주(南漢州)에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옛날 백제의 명농왕(明穠王, 백제 성왕)이 고리산(古利山)1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했을 때 유신의 조부 각간 무력(武力)이 장수가 되어 그들을 맞받아쳐 이겼으며, 승세를 타고 그 왕과 재상 네 명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세력을 꺾었다. 또한 유신의 부친 서현(舒玄)은 양주(良州) 총관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와 싸워서 예봉을 꺾음으로써 그들이 우리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와 양잠에 종사하였고, 임금과 신하는 나라에 돌보는 데1) 근심이 없게 되었다. 지금은 유신이 조부와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여 나라의 안위를 맡은 중신이 되었다. 그는 나가서는 장수의 일을 하였고, 들어오면 정승의 일을 하였으니 그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공의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직위와 상을 어떻게 하여야 옳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말했다.
“저희들의 생각이 참으로 대왕의 뜻과 같습니다.”
이에 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직위를 제수하고, 식읍을 5백 호로 하였다. 또한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대전에 오를 때도 추창(趨蹌, 예법에 맞게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걷는 것)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를 보좌하는 이들에게도 각각 직위를 한 급씩 올려 주었다.
文武大王旣與英公 破平壤 還到南漢州 謂群臣曰 昔者 百濟明穠王在古利山 謀侵我國 庾信之祖武力角干 爲將逆擊之 乘勝俘其王及宰相四人與士卒 以折其衝 又其父舒玄 爲良州摠管 屢與百濟戰 挫其銳 使不得犯境 故邊民安農桑之業 君臣無宵旰之憂 今 庾信承祖考之業 爲社稷之臣 出將入相 功績茂焉 若不倚賴公之一門 國之興亡 未可知也 其於職賞 宜如何也 群臣曰 誠如王旨 於是 授太大舒發翰之職 食邑五百戶 仍賜輿杖 上殿不趨 其諸寮佐 各賜位一級
1 : 고리산은 환산(環山)이므로 『일본서기』의 함산성(函山城)이 있던 곳과 같을 듯
한국 고대사 1
– 송호정, 여호규, 임기환, 김창석, 김종복 / 푸른역사 / 2016.11.15
신라는 관산성 전투(554) 이후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미 법흥왕 때 금관가야를 복속시켰지만, 오히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대가야를 맹주로 하여 백제의 세력권으로 들어가 독자적인 생존 방식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비화가야, 아라가야들을 차례로 굴복시키면서 대가야를 압박했다. 559년 진흥왕은 사방 군주를 창녕 지역으로 불러 모아 한차례 무력시위를 하고, 이듬해에 결국 가야 연맹의 본거지인 대가야를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이로써 신라는 가야 연맹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면서 세력을 확장했고, 반대로 백제는 한강 하류 지역을 상실한 데다가, 그동안 주도권을 행사해왔던 가야 지역마저 신라에 빼앗기게 되는 열세를 면치 못했다.
관산성 전투의 패배 이후 이 전쟁을 주도했던 백제 왕권은 패전으로 인해 상당히 위축되었으며 대성팔족大姓八族으로 대표되는 유력 가문의 귀족들이 정국 운영을 주도했다. 그러다가 무왕武王대(600~641)에 이르러 다시 왕권의 위상을 회복하여 국왕 중심의 정치 체제를 운영하게 되었다. 웅진 천도(475) 이후 등장한 대성팔족 세력은 좌평佐平이라는 최고위 관직을 독점하면서 정국을 주도했는데, 무왕은 제2위의 관등인 달솔達率을 널리 등용하여 이들을 견제했다. 이러한 무왕대의 왕권 강화는 왕실이 주도해 대규모 사찰인 익산 미륵사를 조영하고 이 일대를 부도副都로 운영한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麗羅戰爭史의 再檢討
– 박경철 / 한국사학보 제26호 / 2007.02
나제동맹의 파탄은 5세기 중반 한강 유역 지배권을 신라가 독점함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여라통호론(麗羅通好論)이 당시 삼국이 처한 상황을 감안하여 매우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논자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나지만, 이 논의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담보물 삼아 신라와 제휴함으로써 나제동맹을 결렬시켰다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시기 고구려가 처한 객관적 상황의 절박성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견해가 아닐 수 없다. 당시 고구려 승려인 혜량법사의 “今 我國政亂 滅亡無日”라는 시국 인식은 이를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는 셈이다.
한편 이 문제와 관련, 고구려와 당과의 전운이 감도는 시점인 642년에도 도움을 청하는 신라에 대해 “竹嶺西北之地”의 반환을 강변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고구려가 자기 영토를 매개로 신라와 외교적 뒷거래를 하였다는 인식에 대한 보다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그러나 필자는 사료상 고구려-신라 밀약 내지 고구려-신라 연합의 가능성이 명시적으로 간취될 수 있음이 인정된다면, 한강 유역을 둘러싼 관련국들 사이의 일시적이며 한정적인 담합과 제휴는 충분히 상정될 수 있다고 본다.
551년 나제동맹의 파괴력을 절감한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 방면에서 가해오는 신라=백제의 군사적 압력을 완화시킬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백제의 한성기의 구영역 수복이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을 두려워하였다. 또한 신라는 가야 문제 등 나제 간의 현안을 감안할 때 나제동맹의 실효성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신라는 한강 하류 지역을 영유함을 통하여 독자적 대중교통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신라 측 복안의 실현을 담보할 제휴 상대는 고구려 밖에 없었다. 이러한 고구려-신라 간의 전술적 제휴는 551년 9월에서 552년 5월 사이에 맺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麗羅通好’의 효과는 553년 여나의 공동 출병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고구려는 평양 지역을, 신라는 한성 지역을 점유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백제의 반격은 553년 10월 고구려와의 ‘百合野 전투’로 시작된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554년 겨울 웅천성(熊川城) 공위전(攻圍戰)으로 응수하게 된다. 한편 나제 간의 대결은 553년 12월 函山城戰과 잇따른 554년 7~9월의 久陀牟羅~관산성(管山城) 전투로 치닫게 된다.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 장창은 / 학술논문 : 진단학보 제111호 / 2011.04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 유역은 553년 7월에 신라에게 귀속되었지만 이에 대한 백제의 대응은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551년 후반~552년 전반에 고구려와 신라 간에 맺어진 “麗·羅密約“이 백제로 하여금 고구려의 군사개입을 우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聖王(523~554)은 신라에 반격을 가할 시간을 벌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나제동맹을 유지하면서 은밀하게 倭에 사신을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로 보내는 위장전술을 사용해 신라의 경계심을 느슨하게 하면서 관산성 전투를 준비하였다. 554년 5월에 이르러 倭로부터 군사 1천 명 등을 지원받은 백제는 가야군까지 규합하여 554년 7월에 신라로 쳐들어갔다. 전투는 餘昌이 총책임을 맡아 주도하였다. 백제는 먼저 사비에서 관산성으로 나아가는 요충지에 있었던 珍城[금산군 진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백제의 승세는 관산성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12월 9일에 관산성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성왕이 여창을 위로하고자 군사 50명만을 거느리고 관산성으로 나아갔다. 이 무렵 신라는 관산성 전투의 패전을 만회하고자 新州 軍主 金武力을 필두로 전군을 동원하였다. 신라는 성왕이 관산성으로 온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여 관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였다. 성왕은 결국 신라의 복병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성왕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인해 관산성 전투의 전세는 급속히 신라에게 기울어 갔다. 마침내 신라는 관산성을 포위하였고, 여창은 이에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와 퇴각하였다. 결국 관산성 전투는 성왕과 좌평 4명을 잃고 백제군 3만 여 명이 전사하는 백제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552년 백제의 한강유역 포기[棄]와 신라ㆍ고구려의 밀약설(密約說)
– 강민식 / 학술논문 : 선사와 고대 2014 40호 / 한국고대학회 2014년
백제 성왕은 고구려의 공세를 막아내고, 가야세력의 이탈을 막아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안고있었다. 이러한위기를극복하기위해성왕은공동의적을 구체화하여신라혹은가야와왜세력을끌어들여연합전선을형성해나갔던것이다. 이탈과배반을 막고전쟁을통해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성왕은 541년 신라와의 동맹 이후 가야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대가야를 영향력 아래에 둘 수 있었고, 신라와 함께 고구려에 대한 적극적인공세에 나서게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내부에 사정을 적극 활용한 것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신라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러한 백제의 한계를 간파한 신라는 백제에게 참전에 따른대가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백제는 550~551년 전역(戰役)의 결과로 얻은 상당 부분의 영토를 할양하게 된 것이다. 한편 544년 이래 성왕이 끊임없이 고구려와 신라의 공모를 언급한 것은 가야와 왜 세력을영향권 아래 두려는 시도였다. 실제 551년까지 대고구려전에신라가 포함된 연합군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후 관산성 전투에도 가야와 왜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강유역회복 후 백제가 한성 평양지역을 포기하고 왕녀를 시집보낸 일 등이 단순히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에 따른 후퇴라기보다는 동맹의 실체였던 것이다. 결국 관산성 전투는 주변 정세에 따라 신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공략하고 가야지역에대한 우위를 차지한 후 신라에 대해 공세로 전환한 사건이었다. 그동안의 외교활동을 통해대가야와 왜 연합군을 이루어 마침내 신라에 대한 총공세를 단행한 것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한국인
– 김병훈 / 반디출판사 / 2006.05.20
유랴쿠천황 23년(479)에는 일본에서 귀국해 즉위하는 곤지의 아들 동성왕을 5백 명의 군사로 호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같은 해 5백 명의 수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내용도 있는데 동성왕을 호위한 군사들의 활약을 기록한 듯하다.
일본에 머물던 동성왕의 즉위는 백제의 친왜노선에 따른 선택이라는 평가다. 왜의 군사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한편 왜는 중국 남조와의 교류가 끊어져 선진문물의 수입 창구로 백제와의 관계를 중요시 했다. 지방세력들을 거느리며 권력집중을 꾀하기 위해서는 생산력의 발전에 필요한 선진문물의 입수가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백제 무령왕은 504년 왕자 사아군(斯我君)을 파견한다. 이때 백제는 고구려와 전쟁상태에 있었고, 신라와는 가야지역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다시 왜와의 외교가 절실한 시점이다. 말 많은 칠지도(七支刀)와 거울 등을 보낸 것도 이 즈음이다. 일본에서는 512년 게이타이천황이 말 40필을 보낸 기록이 있다. 백제는 513, 516년 오경박사 단양이와 고안무를 파견하는 등 왜와의 교류에 열을 올린다.
신라와 손잡고 고구려를 압박하던 백제 성왕(재위 523~554)대에는 왜와의 군사외교가 더욱 활발해진다. 백제가 547년 군사를 요청하고 548년에도 고구려와의 마진성(馬津城)전투에 지원병을 요청하자, 왜국은 370명의 축성인부를 보낸다. 550년에는 화살과 배 3척을 보내고, 551년 백제요청에 따라 1천 석의 종자벼를, 553년 병마와 함선, 활과 화살 등을 보낸다.
백제는 의(醫)박사, 역(易)박사 등 학자들과 복서(卜書), 역본(歷本) 등 책과 다양한 약물을 왜국에 보내고, 554년에도 병사 1천 명, 말 1백 필, 배 30척에 대한 답례로 승려와 여러 박사를 파견한다.
백제 성왕이 554년 신라와의 관산성전투에서 사망하자 왕자 혜가 왜에 건너가 지원을 요청한다. 왜는 557년 병사 1천 명과 많은 말과 무기를 보낸다. 백제와 왜의 관계는 선진문물과 군사지원을 교환하는 물적, 인적교류가 축적되면서 왕실 간의 혼인관계로까지 발전해 나간 듯하다.
……
긴메이(欽明)천황 16년(555) 봄 2월 백제의 왕자 여창(餘昌:위덕왕)이 왕자 혜(惠:위덕왕의 아우로 혜왕이 됨)를 보내 주상하여 “성명왕(『삼국사기』에는 성왕)이 적에게 살해되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이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곧 사자를 나루에 보내 마중하여 위문하였다. 이에 고세노오미(許勢臣)가 왕자 혜에게 “여기에 머무를 것인가, 또는 본국으로 갈 것인가.”라고 물었다. 혜가 대답하여 “천황의 덕에 의하여 부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합니다. 만일 가련하게 여기시어 많은 병기를 주시면 설치보구(雪恥報仇:치욕을 씻고 복수함)하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신의 가고 머무르는 것은 오로지 명에 따를 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성명왕(성왕)의 사망소식에 ‘천황이 듣고 아파하고 한탄했다’고 적었다. 일본 대신은 백제 왕자에게 ‘머물 것인가, 돌아갈 것인가’ 묻는다. 『삼국사기』에서 전지 태자 등을 인질로 기록한 것과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백제 왕자가 일본에 와서 살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니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 것이다.
긴메이(欽明)천황 17년 봄 정월 백제의 왕자 혜가 돌아가려고 청하였다. 그래서 무기와 양마를 많이 하사하였다. 또 여러 가지 물건을 주어서, 여러 사람이 부러워하고 감탄하였다. 아베노오미(阿部臣) 사에키노무라지(佐伯連) 하리마노아타히를 보내 쓰쿠시국의 수군 1천 명을 거느리고, 호송하여 나라에 돌아가게 하였다.
<관련 그림>
– 구세관음상.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그리며 만든 불상으로 성왕의 형상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녹나무를 깎아 조각한 뒤 금박을 입혀 만든 구세관음상의 키는 178.8cm, 사람의 신체와 같은 크기로 만든 등신상이다.
<일본 법룡사 몽전>
– http://tayler.tistory.com/227 참조 link
– http://tayler.tistory.com/227 참조 link (대단하시네요 ^^)
– 삼년산성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은 불패의 철옹성이다. 삼국시대부터 후삼국시대까지 벌어진 150여회의 전투에서 신라군은 단 한번도 이 성을 빼앗긴 적이 없다. 백제 성왕은 삼년산성으로 진격했으나 오히려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에서 삼년산성을 거점으로 삼은 신라 매복군에게 기습을 당해 패퇴했고, 후삼국 시대 고려 왕건도 이 산성에서 분루를 삼켜야 했다.
–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4/02/20/20140220005127.html?OutUrl=naver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소현숙 원광대학교 교수는”백제금동대향로는 출토지점이 사찰이어서 종교법기로 사용됐을 수 있지만 성왕(聖王) 제사유적이 공존하고 있어 제기로서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성왕(백제)
위키백과 : 관산성 전투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관산성전투
네이버 지식백과(신라화랑) : 관산성 전투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전덕재 / 신라문화 제34집 (2009년 8월))
KBS 역사스페셜 : http://blog.daum.net/santaclausly/11581345
Tayler’s Story : http://tayler.tistory.com/227
2007-07-04 백제 성왕이 싸우다 죽은 관산성은 어디일까?
2004-07-06 [우리고장의 산성 탐방기] 관산성(管山城)
2013-11-09 新羅는 나쁘게 百濟는 좋게 배우는 日本人
2014-11-20 돌 틈마다 서린 오랜 전쟁의 기억들… 三國 마주한 요충지, 충북 보은 ‘삼년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