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국 총인구 2억 8천만 명의 2.2%에 해당하는 600여만 명(530만~680만)의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따라서 그들은 미국 내에서 소수민족이라는 범주에 속하기는커녕 오히려 다수 세력을 형성하고, 그것도 각계각층의 최고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유대인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 전반에 걸쳐서 월등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확고한 위치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내 유대인 인구는 뉴욕에 집중되어 있다. 뉴욕 시민 인구 850만 명의 약 12%가 유대인이거나 유대계다. 뉴욕시 지역은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최대의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뉴욕의 유대인 인구가 이스라엘 텔아비브보다 많다. 뉴욕시의 핵심이자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맨해튼 인구는 150만 명. 이 중 유대인 인구는 20.5%로 대락 31만 명이다.
오늘날 전 세계 인구 69억명 중 유대인은 크게 잡아도 1700만 명(1440만~1750만) 정도이다. 얼마 되지 않은 숫자의 유대인이 미국과 세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한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600여만 명의 미국 유대사회가 미국 나아가서는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다. 금융위기, 곡물파동, 외환시세, 중동문제 등 세계 주요 사건의 이면에는 유대인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유대인의 파워가 결집한 곳, 세계를 움직이는 곳이 맨해튼이다.
재미있는 것은 유대인이 이동한 경로가 전세계 부의 이동경로와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해양의 시대에서부터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이어지고 있는 강대국의 변천과 부의 이동이 유대인의 이동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아 보았다.
중복되기는 하지만 우선 다음의 관련글에서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 알람브라 칙령 – 1492년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령 : http://yellow.kr/blog/?p=1457
부의 역사
– 권홍우 / 인물과사상사 / 2008.06.09
바로 이 대목을 살펴보면 뚜렷한 흐름 하나를 읽을 수 있다. 유대인의 방랑과 부의 이동 경로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에스파냐를 떠나 머물렀던 포루투갈 · 네덜란드 · 영국이 하나같이 경제적인 번영을 맛봤다는 사실을 우연으로 보기에는 또 하나의 예가 남아 있다. 미국의 유대인이다. 미국의 유대인의 주류는 에스파냐에서 가지가 갈라져 나간 네덜란드나 영국의 유대인과 달리 독일과 러시아, 동유럽의 박해를 피해 19세기 말 대규모 이주한 사람들이어서 이동의 동기와 경로를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박해를 받아 자유롭게 생각하고 믿으며 일하기 위해 이동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이다.
……
유대인의 이동이 풍요를 가져온 게 아니라 풍요로운 지역을 따라 유대인이 이동한 것이라는 견해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아무것도 없는 브라질 땅에서 하얀 황금으로 불렸던 설탕산업을 일으켜 귀족의 전유물이던 설탕을 일반인들에게도 확산시킨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이다. 브라질 식민지에서도 쫓겨난 유대인들은 서인도제도에 사탕수수밭을 만들었다. 미국과 유럽,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삼각무역을 개척한 사람들도 유대인이다.
1492년 이후 유대인의 이동과 풍요의 상관관계가 말해주는 것은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경제는 크게 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오늘날 유대인의 모습은 예전과 다르다. 압제에 항거해 경제적 풍요와 종교의 자유를 갈망했던 1492년의 자신들의 처지를 이제는 오히려 다른 민족에게 강제하며 압박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 이원복 / 김영사 / 2004.07.10
유대인들이 금융업으로 가장 먼저 확실하게 자리잡은 곳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었어.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본고장으로 탄압받던 신교도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유대인에게도 너그러운 편이어서 에스파냐에서 쫓겨온 세파라딤 유대인들도 이곳으로 많이 옮겨왔거든
유대인들은 영국의 청교도 혁명 때 왕당파와 싸우던 올리버 크롬웰에게 엄청난 전쟁자금을 지원함으로써 청교도혁명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고 이를 계기로 유대인들이 대거 영국에 진출할 수 있었던 거야.
1688년,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2세가 쫓겨나고 네덜란드의 오렌지공이 월리엄3세로 영국 왕위에 오르는데, 제임스2세의 왕위 회복을 노리는 것이 두려웠던 그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고, 이 문제를 유대인 상인들과 의논하였지. 화폐발행권을 허락받은 유대인들은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했고 이 잉글랜드 은행은 1946년 국유화 될 때까지 사설은행으로 남았다. 이를 계기로 유대인들은 영국 내의 금융권을 장악하였어.
유대인들은 영국의 수상자리까지 차지 하기도 했는데 디즈레일리나 글래드 스톤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야.
영국뿐 아니라 전 유럽에서 유대인들의 세력은 금력을 바탕으로 막강해지기 시작했지. 그 대표적인 경우로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금융왕조 ‘로스차일드’ 가문을 들 수 있어.
부의 탄생
– 윌리엄 번스타인 / 김현구 역 / 시아출판사 / 2005.03.30
네덜란드인들의 해외투자욕은 게걸스럽다고도 할 정도였다. 경제사가 얀 드 브리스(Jan de Vries)는 1800년도 네덜란드의 해외투자가 네덜란드의 연 GDP의 두 배인 약 15억 길더에 달했다고 추산했다. 비교를 위해 말하자면, 오늘날 미국의 해외투자는 미국 GDP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어떤 시대든 자본은 경제가 성숙하고 과잉의 부가 존재하는 나라에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나라로 흐른다. 17세기에 잉글랜드가 정치적 · 경제적 후진국에서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하는 동안, 대규모 자본이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흘러 들어갔다. 19세기에는 고도로 발전된 영국 경제가 당시 발전도상국이었던 미국에 자본을 공급했다. 또한 20세기에는 미국이 발전도상 세계를 위한 자본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계속된다.
……
1688년의 명예혁명으로 거의 1세기를 끌어온 내전이 종식되고, 영국은 스타드호우데르 빌렘 3세를 초대해 오렌지공 윌리엄이라는 이름으로 영국 왕위를 차지하게 했다. (스타드호우데르란 15~18 세기에 북해 연안의 저지대를 다스린 행정관을 일컫는 네덜란드의 독특한 제도로, 지명되거나 계승된다)
빌렘/윌리엄은 혼자서 잉글랜드에 오지 않았다. 세계의 금융 중심지로서 암스테르담의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감지한 베어링 가문과 호프가(家)를 포함한 네덜란드 금융 엘리트들이 그를 따라 북해를 건너왔다. 종교재판을 피해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했던 암스테르담의 포르투갈계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런던에 정착했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의 아버지인 에이브러햄 리카도(Abraham Ricardo)는 포르투갈계 유대인 이민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들과 더불어 네덜란드의 사상도 들어왔다. 영국인들은 열광적으로 ‘네덜란드 금융’을 모방했고, 17세기의 파괴적인 내란 이후 몇 십 년 만에 영국의 자본 시장은 네덜란드의 자본시장을 압도할 정도로 성장했다.
성서 이후의 유대인
– 최영순 / 매일경제신문사 / 2005.05.10
17세기 네덜란드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유대인의 전체적인 면모는 유대인을 사회적으로 크게 구별하지 않았기에 불투명하다. 이미 이곳에는 중세 후반부터 위장 기독교도이거나 정말로 개종한 기독교인 소수의 세파르딤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
안트웨르펜이 스페인에 귀속되는 1585년에 대다수의 이곳 유대인은 새로운 교역의 중심지로 떠오른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갔다. 16세기 중반부터 쇠퇴의 길을 걸으며 스페인 지배에 들어간 안트웨르펜의 짧은 번영기와 유대인 거주시기가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그저 우연으로 보아야 할까?
안트웨르펜 유대인의 이주와 함께 암스테르담은 1585년 이후 안트웨르펜이 가졌던 통상의 특권을 계승하여 경제적 번영의 길로 들어섰다. 이러한 흐름은 아쉬케나짐 유대인에게도 영향을 주어 독일에서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포르투갈과 안트웨르펜에서 이주해온 세파르딤 유대인과 1590년대를 전후로 독일에서 건너간 아쉬케나짐 유대인은 서로 구별된 삶을 살았다.
……
네덜란드는 신대륙에 거주하던 유대인에게도 좋은 안식처였다. 종교 탄압을 피해 브라질에 와 있던 포르투갈 출신의 유대인은 신대륙까지 이어지는 종교재판을 피해 유대인에게 우호적인 네덜란드령으로 옮겨갔다. 이들은 17세기 중남미 식민지(브라질, 수리남)를 중심으로 설탕과 향료를 거래하는 서인도 교역에서 중요한 역활을 수행하며 네덜란드의 국제적 상업망 확장에 기여했다. 후에 네덜란드가 퇴각할 때 암스테르담으로 따라오거나 일부는 자메이카의 바르바도스섬에 정착하여 설탕산업을 주도했다.
17세기에 암스테르담은 동인도와 서인도회사 주식을 거래하면서 근대 증권투기의 시작을 예고했다. 이 업종에서도 유대인은 증권거래인이라는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내면서 선물거래기술을 발전시켰음은 물론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주식을 유대인이 많이 소유했을 뿐 더러, 그곳의 총독이나 지배인 중에는 유대인일 가능성이 높은 콘(Cohn; 코엔Coen)이라는 이름도 눈에 띤다. 물론 후추와 계피, 티크, 다이아몬드 등을 거래하며 동인도무역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영국과 경쟁관계에 있는 네덜란드에게서 재해권을 빼앗아 오고자 크롬웰이 항해조례를 내렸다면, 무역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는 1290년 이후 유대인이 거주할 수 없던 영국에 유대인 정착을 주도한 것이리라. 크롬웰이 자국 상인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게 눈독을 드린 것을 보면 당시 국제 무역상으로 활동하던 유대인들의 가치를 충분히 감지하게 된다.
경제사 오디세이
– 최영순 / 부키 / 2002.09.25
21세기를 맞아 화두가 되는 질문은 과연 경제의 중심이 어디로 옮겨 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미국이 지금의 호황을 유지하며 21세기에도 여전히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구가할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과 함께 일본, 한국을 잇는 환태평양 지역으로 경제의 중심이 이동할 것인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지나간 역사 속에서 수없이 쫓겨 다녀야만 했던 유대인이 떠올랐다. 16세기 이후 세계사의 중심이었던 국가들과 도시들의 배후에는 유대인과 경제적 이해관계로 얽힌 에피소드가 많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앞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주어지리라고 믿는다.
세계 최강성공집단 유대인
– 맥스 디몬트 / 이희영 역 / 동서문화사 / 2002.02.02
그동안 주목받지 못하던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았던 네덜란드에서 이상한 우연이 일어났다. 독립한 지 20년밖에 안 된 이 나라가 모든 유럽을 상대로 상업국으로서의 지배권을 다투게 된 것이다. 1602년에는 이미 네덜란드 제국주의의 주요한 무기로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1650년 네덜란드는 유럽의 상업 중심지가 되었고 수도 암스테르담은 세계 재정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네덜란드의 발전은 네덜란드에 유대인이 다시 들어와 그들이 무역과 재정 분야에서 활동한 것과 때를 같이하고 있다. 1593년 처음으로 스페인에서 네덜란드에 온 유대인들은 1492년 유대인 추방 때에 스페인을 떠나기보다는 그리스도교도가 되어 마라노라고 불리게 된 사람들의 자손이었다.
자본주의의 매력
– 제리 멀러 / 서찬주 외 역 / 휴먼 & 북스 / 2006.04.03
런던의 유대인 중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계가 많았는데, 이들은 15세기 말 박해를 피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떠나서 당시 스페인령이었던 암스테르담을 거쳐 영국으로 온 유대인이었다. 다국적인 배경을 지닌 런던의 유대상인들은 국제 무역과 주식 거래에 뛰어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그들은 외국 증권 매매를 특기로 했다. 외국환어음은 한 국가의 수입업자가 다른 국가의 수출업자에게 대금을 지불하는 수단의 하나로, 국제 무역상 돈의 흐름을 원활히 했다. 조셉 애디슨은 “유대 상인은 거대한 빌딩의 나사못과 같다. 작은 존재지만 전체 구조물을 버티게 하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다.”라고 말했다.
경제 묵시록
– 윌리엄 번스타인 / 김현구 역 / 시아출판사 / 2005.03.30
베어링 가문은 1717년 영국으로 이주했는데, 이 무렵 런던은 어느새 네덜란드에서 이주해온 유대 금융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네덜란드 국왕이던 오렌지공 빌럼이 영국에서 발생한 명예혁명으로 부인과 함께 영국의 공동 왕으로 추대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1688년 잉글랜드 의회는 오렌지 공 빌럼과 그의 아내 메리 스튜어트에게 잉글랜드를 다스리도록 초청하면서 그들을 각각 윌리엄 3세(William III, 재위 1689 ~ 1702)와 메리 2세(Mary II, 재위 1689 ~ 1694)로 칭했다. 빌럼이 영국 왕으로 추대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요 주주였던 유대 금융가들이 대거 영국으로 이주한 것이다.
유대인의 역사
– 폴 존슨 / 김한성 역 / 살림 / 2005.03.30
역사적으로 유럽의 유대인들은 직업 선택의 가능성을 제한받아왔다. 기독교인들에게만 유리한 법률이 존재하던 곳에서 유대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직업은 고리대금업이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금융업 분야에서 걸출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박해의 산물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유럽 역사를 보면 유대인이 모인 곳은 어김없이 발전했다. 그러나 이런 유대 사회의 번성은 또 다른 박해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유대인은 결국 그 지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거주하던 지역의 경제가 몰락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8~11세기 동안스페인만큼 유대인 정착지가 성공한 경우는 없지만 12세기 초엽부터 시작된 유대인 박해정책은 스페인의 경제 침체에 큰 요인을 제공했다.
유럽에서는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미국이 유대인 사회가 아무런 박해 없이 일반 시민으로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는 지역이 된다.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을 두고 저자는 이런 평가를 내리고 있다.
“유대인들은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고 활동폭 또한 확장시켜나갔다 . 이제 더 이상 유대인들은 사업상의 안전을 위해 보석처럼 쉽게 숨길 수 있고, 이곳저곳으로 신속하게 운반할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작고, 높은 가치를 지닌 물품을 선호할 필요가 없어졌다 .”
4000년의 유대 역사와 유대인의 현주소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는 이만한 책이 없을 정도로 탁월한 작품이다.
–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장 서평
…… 경험에 비추어 보면 방랑 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은 동요를 불러일으킬 만한 사상들을 가져올 수도있었고 또한 국가의 부를 증진시킬 수 있는 새롭고 효율적인 부의 창출 방식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역사는 이주가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 준다. 기원전 8 ~ 7세기에 가난한 그리스 목동들과 올리브 재배자들은 자신들의 경작지를 버리고 지중해 전역으로 이주한 후에 상인-식민주의자로 성공했다. 19세기에는 스코틀랜드 북부 고지의 굶주렸던 부족들, 클래어(Clare)와 케리의 비참한 습지 출신의 아일랜드인들, 폴란드 출신의 준농노, 메조기오르노 출신의 땅을 잃은 농민들이 온타리오와 뉴질랜드, 보스턴, 뉴욕, 시카고, 미국 중서부, 아르헨티나, 뉴사우스 웨일스로 이주한 후 모험적인 시민들로 변모하여 나갔다. 오늘날도 대만과 홍콩에 정착한 중국 본토인들, 캘리포니아와 호주로 이민 온 베트남인들 그리고 플로리다로 온 쿠바인들과 같이 이주가 낳은 기적과 같은 효과들이 목격되고 있다.
종교개혁, 반-종교개혁 그리고 종교전쟁들은 유럽의 인구 밀집지역을 짓밟고, 유대인 공동체들을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게 했다. 그들은 괴로움과 박해를 피해 여러 차례 이주를 해야 했다. 하지만 거의 예외 없이 마지막 정착지에서 그들은 번영을 이루어냈다. 막스 베버(Max Weber)와 토니(R. H. Tawney)에 의해 주장되었던 ‘프로테스탄트 윤리’나 칼빈주의자의 ‘구원의 공포’와 같이 종교적인 개념이 번영의 모태였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많은 반론들이 제기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이보다는 장소의 이동이 번영의 모태였다는 주장이 보다 설득력을 지녀가고 있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그리고 후에 북아메리카와 독일에서 국가경제에 주어졌던 역동적인 자극은 칼빈주의자뿐만 아니라 북부 이탈리아 출신의 루터파와 가톨릭 신자들 그리고 유대인들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주에 있어 전문가들이었다. 기원에서부터 이방인으로 떠돌아다니던 그들은 수많은 세대에 걸친 다양한 상황들의 끝없는 변화를 통해 많은 이민 기술들을 완성시켰으며, 특히 부에 집중하는 기술을 습득했는데, 그 결과 위험한 시점에 이를 때마다 신속하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재정착하는 데에 능숙했다. 그들의 무역과 기술, 민속문화는 법과 함께 그들의 창조적인 이동성에 힘을 더해 주었다.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유대인들이 어떠한 불행에 처하더라도 항상 새로운 유동자산을 얻을 수 있었고 어디서나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에 대해 17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유대인 변증가 므낫세 벤 이스라엘(Manasseh ben Israel)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점이 확인된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박해할 때면 다른 이들이 우리를 정중하고 친절하게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즉, 한 제후가 우리를 학대하면 또 다른 제후가 우리를 환대해 주었다. 몇몇 이탈리아 제후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가장 유명한 덴마크 왕, 그리고 니사(Nissa)의 강력한 사보이(Savoy) 왕가의 군주도 그 같이 행동했다. 어떤 통치자가 우리를 자기의 영역에서 추방하면 다른 이는 수많은 특권을 제공하며 우리를 초대하였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정해 준 국가는 번영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며, 그들의 무역 또한 주목할 만하게 성장하고 있음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
18세기에 유대인들이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무역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일부 경제사학계에서 그들을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탄생시킨 주요한 동인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
이 모든 이유들로 인해 유대인들은 현대 자본주의의 창설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물론 자본주의는 그들 없이도 발생하곤 했다. 몇몇 지역에서는 그들의 세력이 미약했거나 전무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산업혁명 초기 단계에서 그들이 직접적으로 담당했던 부분은 매우 적었다. 몇몇 분야에서만 – 거대한 규모의 자본을 형성하는 – 두드러진 강세를 보였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18세기 경제체제에 보다 낫고, 보다 용이하며, 보다 저렴하고, 보다 신속한 방식들을 추구하는 ‘합리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상업에 관한 한 유대인들은 신비스럽거나 부정직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이성적이었을 뿐이었다.
……
이처럼 유대인들이 게토로부터 해방되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실질적인 권리회복은 상당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당시에 그토록 많은 유대인들이 세례를 통해 유럽 사회로 들어가는 표를 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유대인들에게는 로트실트 가가 보여준 또 다른 해결책이 있었다. 그들은 18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경제현상, 곧 사설 은행 부분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들이었다. 사설 은행을 가진 가문들 중 많은 경우가 유대인 가문이었는데, 특히 주로 왕실 유대인들의 자손들이 사설 은행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로트실트(Rothschild, 로스차일드) 가만이 세례를 통한 개종과 금전적인 파산을 동시에 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남다른 가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어렵고도 양립하기 어려운 네 가지 사항들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많은 재산을 신속하고 정직하게 축적하는 것, 정부의 전폭적인 신용을 얻어가면서 그 부를 널리 분배하는 것, 많은 이윤을 계속 내되 대중들의 적개심을 유발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 법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유대인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 어떤 유대인들도 그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했으며, 그것을 자신 마음대로 사용하지도 못했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도 못했다.
홍익희의 유대인 경제사
– 교보문고 북모닝CEO / 2017년5월
1492년은 스페인으로서 뜻 깊은 해다. 이베리아 반도의 통일을 이뤘고, 신대륙 발견의 위업을 동시에 이룬 해이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반도 통일과 함께 스페인은 급작스럽게 유대인 추방령을 내린다. 추방령에 따라 유대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화폐와 금, 은 등의 귀중품을 놓고 4개월 안에 스페인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재산은 놔두고 몸만 빠져나가라는 소리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대부터 항상 신변의 위험을 안고 사는 유대인에게는 모든 재산을 평상시에도 현찰과 귀중품, 채권으로 나누어놓는 습관이 있었다. 안정적인 재산관리 방식인 포트폴리오는 여기서 유래했다. 이 추방령으로 인해 총 26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짧은 시간 동안 스페인을 벗어났다. 당시 인구 3만 명이 넘는 도시가 흔치 않은 유럽에서 이는 대단한 숫자였다. 추방된 유대인들은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고급인력들이었다. 참혹한 유대인 추방 결과 스페인은 주요 상업도시가 무너졌고, 은행들이 대거 파산했다. 또 내수부진과 더불어 국제교역 감소로 경제가 피폐해졌고 이는 국고수입 감소로 직결되었다.
같은 시간, 유럽은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후추 등 향신료는 경제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근대의 막을 연 항해시대와 식민지 획득 경쟁은 바로 향신료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은 바로 현재 벨기에의 도시인 (당시는 네덜란드) 브뤼헤와 앤트워프였다. 교역과 상업에 뛰어났던 유대인 덕분에 브뤼헤는 단숨에 유럽 최고의 무역과 금융 중심지로 떠올랐다. 하지만 강 하구에 퇴적물이 쌓이는 자연현상으로 항구의 기능을 잃으며 도시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고, 유대인들은 앤트워프로 모여 세력을 합치게 된다. 앤트워프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스페인에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아 들고 나올 수 있었던 보석 장사를 시작해 자리를 잡았고, 특히 다이아몬드 거래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이 시기 동방의 향신료를 실은 거대한 배들은 자연스럽게 금융과 무역, 유통에 뛰어난 유대인들이 몰려있던 앤트워프를 향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유대인들은 신대륙의 설탕, 소금 유통과 정제산업, 포경 산업 등을 통해 점점 더 자본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식민지개척에 나서자 힘을 키운 유대인들은 각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모을 수 있다는 ‘주식회사’형태에 대한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해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 설립에 앞장선다. 또, 동인도회사 주식이 거래가 잘 되자 새로운 주식을 발행해 대규모 자본을 끌어들일 구상을 모색한다. 그러려면 주식거래가 돌아갈 ‘상설’ 증권거래소가 필요했다. 이로써 근대적 의미의 증권거래소인 암스테르담 보르스가 1608년 설립된다. 본격적인 자본주의의 자금조달시장이 선을 보인 것이다. 신대륙에 대한 기대로 투자자가 줄을 이었고 당연히 주가는 올랐다.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시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린 만큼 각자 사용하는 돈도 제각각 이었는데 특히 위조화폐와 저질 주화의 범람이 심각했다는 것이다. 이에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 표준 통화를 만들었고 이를 관리할 ‘공적’은행을 설립한다. 바로 암스테르담 은행이었는데, 이후 영란은행의 모델이 되었고, 미국 연방은행제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무렵 영국은 국왕에게 이긴 의회군 지도자 크롬웰이 권력을 잡으며 스페인 함대를 무찌르는데 성공했고, 세계 무역에서의 네덜란드의 독주를 견제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한다. 유럽 다른 나라들이 영국 및 영국 식민지와 무역을 하려면 반드시 영국이나 영국 식민지 배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인자였던 네덜란드를 해상무역에서 배제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로 인해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네덜란드는 패한 뒤 해안을 봉쇄당한다.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은 어쩔 수 없이 살길을 찾아 입국이 금지되어 있었던 영국에 재입국이 가능하도록 접촉을 시도했고, 이에 크롬웰은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영국 이주를 허용한다. 자신의 권력을 지탱해줄 자금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후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크롬웰에게 대규모의 전쟁자금을 대주었고, 크롬웰은 유대인들에게 유리한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을 지원하고 세계로 전파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유대인이다. 당시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은 철도였다. 철도는 시간과 공간을 좁혀준 덕분에 장거리 이동이 가능했고, 물류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레일, 화차 제작과 석탄 채굴 등 철도 연관 산업도 덩달아 발전했다. 이 황금알을 낳는 산업을 유럽에서 선점한 게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유대 명문가인 로스차일드 가문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철도 건설을 선점하며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고, 이후 거대한 금융권력이 된다. 정보 통신 분야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1850년, 전신을 위한 해저 케이블이 영국 해협과 대서양에 각각 개설됐고 이듬해인 1851년 유대인 로이터는 런던증권거래소 주변에 로이터 통신사를 열었다. 정보를 파는 것이야말로 돈이 된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뉴스통신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금융계와 산업계에 머물던 유대인들이 정치계에 진출한 것도 그 무렵이다. 유대인들은 영국에 들어와 자본력으로 산업혁명을 지원하고 규모의 경제로 성공시켰다. 그리고 그 자신도 역시 유럽의 거대 권력으로 성장하게 됐다. 이후 신대륙 발견과 함께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온 유대인들은 미국 경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뉴욕을 중심으로 동부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세계 각국의 유대인 커뮤니티를 파트너로 삼아 대규모 무역업을 하며 자본을 저축했다. 그 과정에서 유대계 금융강자였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물론 이 가문과 협력 관계인 JP모건이 미국 경제의 대부로 성장했고, JP모건은 다시 철강업의 카네기, 철도산업의 해리먼, 석유산업의 록펠러에게 자금을 대준다. 결국 미국의 주요산업들이 유대 자본으로부터 시작해 지원을 받은 것이다.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의 정책을 정하고 금리를 정하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도 주로 유대계 은행들이 참여해 입김을 내고 있고, 대주주도 그들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다. 따라서 미국의 중앙은행이라고 볼 수 있는 연준은 출범부터 지금까지도 월가의 대형 은행과 증개인들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대인도 뗄 수 없는 관계다.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경제 질서로 자리 잡으면서 금융자산의 증가 속도가 경제 성장률보다 훨씬 크고 빨라졌고, 이로 인해 전 세계인들이 소득불평등과 극심한 부의 편중에 시달릴 때 이 전후 모든 과정에 유대인들이 깊이 관여 했다고 볼 수 있다. 월가의 핵심 인물들 뿐 아니라 연준 의장, 미국 재무부 장관 자리를 대부분 유대인들이 맡아 신자유주의를 새로운 기치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유대 자본은 우리나라와도 관련이 있는데 IMF 당시 자본시장 자유화, 외환시장 개방, 관세 인하, 국가 기간산업 민영화, 외국 자본에 의한 국내 우량기업 합병 및 매수 허용, 규제 축소 등을 주도한 미국식 시장경제체제를 만든 게 유대자본이었고, 약해진 국내 기업들을 사냥하기 위해 국내 시장으로 들어왔던 해외 자본들 역시 유대계 헤지펀드와 투자기관 들이었다. 이렇게 과거 유럽을 떠돌아 다녔던 핍박과, 차별, 소외 속에서 쌓아 올린 유대인들의 경쟁력은 좋은 의미로든 안 좋은 의미로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현대의 거대 자본, 거대 권력이 되었다.
2007-04-11 [동아광장/신인석]고급 인력 떠나면 FTA도 힘 잃는다
– 신인석 객원논설위원·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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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도의 조상은 ‘세파르디’ 유대인으로 지칭되는 포르투갈 거주 유대인이었다. 가톨릭 국가이면서 민족주의가 강했던 포르투갈은 유대인 등 이민족 이교도를 심하게 박해했다. 리카도의 조상은 메수엔 조약이 체결될 무렵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한다. 금융과 상업의 귀재였던 세파르디 유대인의 네덜란드 이주는 16∼18세기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고급 인력의 이동이었다. 이들은 자유로운 네덜란드에서 다른 민족 상인들과 함께 장기를 발휘했고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를 만든다. 네덜란드가 국제금융과 상업의 허브가 된 중요한 배경이 이것이다.
18세기에 네덜란드의 유대인과 다민족 상인 일부는 자유주의적 정치 환경이 네덜란드와 비슷했던 영국으로 재이주하게 된다. 리카도의 아버지도 거기 끼여 있었다. 그는 아들을 암스테르담 거래소에 ‘실무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암스테르담의 ‘금융지식’과 ‘고급 인력’은 다시 런던으로 이동했다. 국제금융 허브의 이동이다. 분명한 것은 포르투갈 몰락의 원인은 ‘포르투갈의 리카도’를 불과 100여 년 만에 ‘영국의 리카도’로 내몬 편협한 폐쇄주의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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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자료 및 참고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유대인) : 미국의 유대인
https://en.wikipedia.org/wiki/Jews
2017-02-08 유대인의 아픈 역사와 영광의 발자취…맨해튼 유대인 박물관
2016-03-22 미국 유대인
2011-01 Magazine 세계를 지배하는 유대인 파워의 실체-권력의 길목에, 이면에 그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