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혁명

1848년 혁명은 프랑스 2월 혁명을 비롯하여 빈 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와 전 유럽적인 반항운동을 모두 일컫는 ‘유럽 혁명’의 표현이다. 민족의 봄, 민중의 봄, 국민들의 봄(the Spring of Nations, People’s Spring, Springtime of the Peoples) 등으로 불린다. 사회주의자 – 아니 그보다는 공산주의자라 함이 타당할 듯한데 – 가 전면에 나선, 인류 역사상 세계 혁명에 가장 근접했지만 실패한 혁명인 1848년 혁명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848

 

장기 19세기(The long 19th century)란,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창안한 개념으로 1789년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홉스봄은 장기 19세기를 다루는 세 권의 책을 발표하였는데 첫 번째는 혁명의 시대(The Age of Revolution)로, 1789년부터 1848년까지를 포괄한다. 두 번째는 자본의 시대(The Age of Capital)로, 1848년부터 1875년까지를 포괄한다. 마지막은 제국의 시대(The Age of Empire)로, 1875년부터 1914년까지를 포괄한다. 홉스봄(Eric Hobsbawm)은 1848년 혁명을 그의 역저『혁명의 시대』의 종점으로 삼고, 아울러 『자본의 시대』에서의 시작으로 삼고있다.

 

아리기(Giovanni Arrighi)는 영국이 당시의 체계의 카오스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킴으로써 세계헤게모니가 되었다 보았다.

체계 전체에 걸친 반란의 새로운 물결은 대서양을 차지하려는 투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투쟁이 일단 폭발하자, 반란은 영국-프랑스의 경합이 전적으로 새로운 지반들 위에서 재생될 조건들을 만들어 냈으며, 이런 새로운 경합이 끝난 후 반란은 3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1776 ~ 1848년 시기 전체를 놓고 볼때, 두번째 반란의 물결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와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통치자-피지배자 관계를 완전히 변형시켰고, 두번째로 그 변형에 적절하도록 국가간 체계를 완전히 재편한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세계헤게모니(영국의 자유무역 제국주의)를 수립시켰다.

 

우선 주로 홉스봄의 『자본의 시대』를 중심으로 1848년 혁명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 정리해 보았다.

 

‘공산주의라는 망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극적인 문장으로 시작되어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속박의 사슬밖에 없다. 그들은 세계를 얻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로 끝나는 『공산당선언』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1848년 2월 24일경에 간행된다. 그리고 그것이 나온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들 예언자들의 희망과 공포는 모두가 당장에라도 실현될 듯이 보였다. 반란으로 프랑스에서 군주제가 무너졌고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국민들의 봄'(springtime of people)이라 불리는 1848년의 유럽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1848년 혁명의 원인은 1846년부터 계속된 경제위기와 일부 연관된다. 뿌리가 마르는 감자병이 유행하여 감자 수확은 전무하였고 극심한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죽는 사태가 빈발해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긴장과 불안이 감돌았다. 산업 부문도 농업의 영향을 받아 사업 실패의 급증, 실업, 임금하락 등 불안정이 지속되었다.

 

1848년 혁명이 그 전과 그 후에 발생했던 다른 혁명들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퍼져나간 속도의 급속함과 지리적 범위의 광대함이다. 전 유럽이 1848년 혁명에 휩쓸려 들어갔고 혁명은 남미로도 퍼져나갔다. 잠재적으로 최초의 전 세계적 혁명이었다.

 

사실 그와 같은 전 대륙적 또는 전 세계적 규모의 폭발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1848년의 혁명은 유럽 대륙의 선진지역과 후진지역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쳤던 유일한 혁명이다. 그것은 가장 광범위하게 파급된 혁명이었으나, 또 가장 성공하지 못한 혁명이었다. 유럽에서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구체제는 다시 복귀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공화국의 경우에도, 새로운 체제는 그 체제 자체를 발생시킨 봉기(蜂起)와는 최대한의 거리를 두려고 애쓰고 있었다.

 

1848년 혁명과 더불어 옛 ‘혁명의 시대’의 정치혁명과 산업혁명의 균제성은 깨어지고 그 모습도 변한다. 정치혁명은 후퇴하고, 산업혁명이 앞으로 나선다.

 

1848년을 ‘유럽이 전환에 실패한 전환점’의 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과 거리가 멀다. 유럽은 (전환은 했으되) 혁명적으로 전환하지는 않았던 것 뿐이다. 유럽이 혁명적으로 전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의 해만이 홀로 덩그렇게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혁명의 해는 하나의 전주곡이기는 해도 오페라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대문(大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문을 통과하는 사람이 다음에 부딪히게 될 풍경의 성격을 짐작할 수있게 해주는 그런 건축양식으로 된 대문이 아니었다.

 

1848년의 ‘세계혁명’은 이데올로기의 파노라마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전까지는 양대 이데올로기(보수주의 대 자유주의)간의 경쟁이었지만, 바야흐로 오른쪽에는 보수주의자가, 중간에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리고 왼쪽에는 급진주의자들이 자리잡게 됨으로써, 3대 이데올로기 사이의 투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1848년의 혁명은 구체제와 진보적 세력들의 연합군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아니라 ‘질서’와 ‘사회혁명’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베른슈타인(Bernstein)은 1848년 혁명의 감동적인 내용보다는 그것의 결과에 주목하였다. 1848년 혁명은 영웅적인 것이긴 하였지만 그것이 가져다준 결과는 전혀 영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혁명을 유발하였고 보수반동의 강화에 기여하였을 뿐이었다. 혁명은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혁명적 노력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혁명이 신화에 불과하며 현실을 이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그것은 혁명의 신앙에 대한 그의 경고였다.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들로 하여금 영구히 혁명세력이 아니게 만들어버렸다.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했지만, 정작 부르주아들은 혁명에서 물러났다. 이와 같은 사태의 발전으로, 이후 유럽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와 반동으로 귀결되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혁명은 자유주의 시대를 만들어냈다고 홉스봄은 분석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을 수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한편으로 혁명이란 위험스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계급적 요구가 혁명 없이도 실현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가 확대되었지만, 정치체제 자체는 보수화되어가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1848년 혁명이 유럽에서의 전반적 혁명으로서는 마지막이 되어버린 상황, 혁명은 패배했고 기존의 지배세력들이 그대로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이 사회를 변화시켰던 이러한 상황, 부르주아들이 결코 지배자로서 등장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질서가 점점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확대로 나아갔던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에 대해 홉스봄은 객관적인 토대의 발전양상, 즉 1850년대의 대호황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1850년대에 들어서서 영국의 면제품 수출물량은 2배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프로이센에서는 신설 주식회사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저렴한 자본과 가격상승에 힘입은 자본주의의 발전은 1853년에 나타났던 곡물가격 상승을 상쇄할 정도로 팽창했다. 유럽은 호황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호황이 야기한 정치적 결과는, 혁명에 흔들리던 정부에게는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었고 혁명가들에게서는 희망을 앗아가버렸다.

 

아리기는 ‘공산당선언’ 이후 지금까지 140년 가량의 자본주의 역사를 경제적 호황국면과 불황국면을 고려하면서 1848년에서 1896년, 1896년에서 1948년, 그리고 1948년에서 현재까지 대략 비슷한 기간의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 1848년 유럽의 혁명. 프랑스에서는 2월 24일에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3월 2일에는 남서 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났고, 3월 6일에는 바이에른, 3월 11일 베를린, 3월 12일 빈, 그 직후에 헝가리, 3월 18일에는 밀라노, 즉 이탈리아(이탈리아에서는 이미 이것과 별개의 반란이 시칠리아 섬을 장악하고 있었다)에서 잇달아 혁명이 일어났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자본의 시대

–  에릭 홉스봄 / 정도영 옮김 / 한길사 / 1998.09.15 (1975)

 

1789년부터 1848년에 이르는 시대는 이중혁명에 지배된 시대였다. 즉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주로 영국에 한정되었던 산업의 일대 변혁, 그리고 프랑스가 관련되고 프랑스 국내에 한정되었던 정치적 변혁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혁명(산업혁명과 정치혁명)은 새로운 사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과연 승리하여 득의양양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사회, 프랑스 역사가들이 말하는 이른바 ‘제패하는 부르주아'(conquering bourgeois)의 사회가 될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 당시의 사람들은 오늘의 우리에 비해 한결 더 불확실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부르주아적 정치사상가들의 등 뒤에는 온건한 자유주의 혁명을 사회적 혁명으로 전화(轉化)시키려는 대중들이 채비를 갖추어 버티고 있었다. 자본주의 기업가의 아래와 주변에는 불만을 안고 자리에서 밀려난 ‘노동빈민’들이 성난 물결같이 들끓고 있었다. 1830년대와 1840년대는 위기의 시대였다. 낙천주의자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그 위기가 몰고올 결과가 꼭 어떤 것이라고 감히 예언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도 1789~1848년의 기간에는 혁명의 그러한 이중성이 이 시기의 역사에 통일성과 균제성(均齊性)을 부여하고 있다. 그 시기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선 쓰기도 쉽고 읽기도 쉽다. 그 까닭은 그 시대의 뚜렷한 테마와 뚜렷한 형태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또 그 연대적 범위도 우리가 인간사에서 그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뚜렷하고 명확하니 말이다.

이 책의 출발점이 되는 1848년의 혁명과 더불어 옛 균제성은 깨어지고 그 모습도 변한다. 정치혁명은 후퇴하고, 산업혁명이 앞으로 나선다. ‘국민들의 봄'(springtime of people)이라 불리는 저 유명한 1848년은 (거의) 문자 그대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럽 혁명이었다. 그것은 좌익에게는 꿈의 순식간의 실현이었고 우익에게는 악몽이었으니, 코펜하겐에서 팔레르모, 브라쇼브에서 바르셀로나에 이르는 러시아 및 터키 두 제국 서쪽의 유럽 대륙 대부분의 곳에서 낡은 체제들이 거의 때를 같이하여 무너졌다. 이것은 예상도 되었고 예언도 되었던 일이었으니, 그것은 이중혁명의 완성이자 그 논리적 소산이기도 한 듯했다.

혁명은 전 세계에서 빠르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도 – 정치 망명가들은 수년 동안 그렇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 아주 최종적인 실패였다. 이후로 세계의 ‘앞선’ 나라들에서는 1848년 이전에 구상되었던 그런 유의 전반적인 사회혁명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한 사회혁명운동의 중심, 따라서 20세기에 나타날 사회주의 체제 및 공산주의 체제를 위한 사회혁명운동의 중심은 주변적 · 후진적 지역에 자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이 다루는 시기에는 그러한 종류의 혁명운동까지도 일화적(逸話的) · 고대적(古代的), 그리고 그 자체가 ‘미개발적’인 것에 머물렀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급격하고도 광범위한, 언뜻 보아 끝이 없는 확장이 ‘선진국’들에게 정치적으로 (혁명 아닌)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주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프랑스의) 정치혁명을 삼켜버리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역사는 한쪽으로 기운 일방적인 시대의 역사이다. 그것은 첫째로 그리고 주로 산업자본주의적인 세계경제의 거대한 진전의 역사이며, 산업자본주의의 진전이 나타내는 사회질서의 역사,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정당화하고 승인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이념과 신조들, 즉 이성과 과학, 진보와 자유주의를 믿는 이념과 신조의 역사였다. 유럽의 부르주아지들은 그 제도, 공적(公的)인 정치적 지배에 나서는 것을 망설이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시대는 부르주아지의 승리의 시대였다. 이 정도 – 아마도 이 정도에 한하는 것이지만 – 까지는 혁명의 시대가 아주 숨을 거둔 것이 아니었다. 유럽의 중류계급들은 민중에게서 겁을 집어먹었고 계속 그 겁먹은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즉 ‘민주주의’란 여전히 그들에게는 ‘사회주의’에 이르는 확실하고도 신속한 서곡(序曲)이라고밖엔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승리하던 때 승자인 부르주아 계급의 일들을 공식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지극히 반동적인 프로이센 출신의 한 시골 귀족, 프랑스에서는 사이비 황제, 그리고 영국에서는 대대로 내려오는 귀족적 지주들이었다. 혁명의 공포는 현실적이었고, 그것은 뿌리 깊은 근본적인 불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형성과 전개 – 『자본의 시대』 해제

–  김동택 / 한길사 / 1998.09.15

 

1948년 혁명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이 발생한 해이자 『공산당선언』이 집필된 해였다. 1848년 혁명이 그 전과 그 후에 발생했던 다른 혁명들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퍼져나간 속도의 급속함과 지리적 범위의 광대함이다. 전 유럽이 1848년 혁명에 휩쓸려 들어갔고 혁명은 남미로도 퍼져나갔다.

하지만 1848년 혁명은 가장 확실하게 패배한 혁명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구체제는 다시 복귀되었다. 홉스봄은 그러나, 혁명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이 일방적으로 패배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혁명은 분명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장했던 요구사항들은 비혁명적인 방식으로 이후 유럽 사회를 변형시켜나갔던 것이다.

1848년에 발생했던 혁명들은 여러 측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 모두 성공했으나 또 모두 재빨리 실패했다는 점이며, 둘째 사회혁명을 예상케 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혁명의 특성은 이후 유럽에 두 가지 결정적인 사태발전을 낳게 했다. 전자의 경우 유럽에서는 정치혁명이 후퇴하고 산업혁명이 모든 변화의 동인이 되게끔 한 원인이기도 했는데, 후자의 경우는 부분적으로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게끔 한 원인이기도 했는데,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노동빈민 계급의 급진화가 사회혁명을 야기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구체제의 지배계급들만큼이나 겁을 먹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들은 그 시점부터 혁명에 대한 반대자로 돌아서게 되었고, 구체제의 지배계급들과 타협하여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따라서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들로 하여금 영구히 혁명세력이 아니게 만들어버렸다.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했지만, 정작 부르주아들은 혁명에서 물러났다. 이와 같은 사태의 발전으로, 이후 유럽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와 반동으로 귀결되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혁명은 자유주의 시대를 만들어냈다고 홉스봄은 분석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을 수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한편으로 혁명이란 위험스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계급적 요구가 혁명 없이도 실현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가 확대되었지만, 정치체제 자체는 보수화되어가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

홉스봄이 서술하고 있는 『자본의 시대』는 모순투성이의 사회인 것처럼 보인다. 1848년 혁명이 유럽에서의 전반적 혁명으로서는 마지막이 되어버린 상황, 혁명은 패배했고 기존의 지배세력들이 그대로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이 사회를 변화시켰던 이러한 상황, 부르주아들이 결코 지배자로서 등장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질서가 점점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확대로 나아갔던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에 대해 홉스봄은 객관적인 토대의 발전양상, 즉 1850년대의 대호황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1850년대에 들어서서 영국의 면제품 수출물량은 2배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프로이센에서는 신설 주식회사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저렴한 자본과 가격상승에 힘입은 자본주의의 발전은 1853년에 나타났던 곡물가격 상승을 상쇄할 정도로 팽창했다. 유럽은 호황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호황이 야기한 정치적 결과는, 혁명에 흔들리던 정부에게는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었고 혁명가들에게서는 희망을 앗아가버렸다.

 


윌러스틴의 세계체제분석

–  이매뉴얼 윌러스틴 / 당대 / 2005.03.17 (1982)

 

1848년의 ‘세계혁명’은 이 이데올로기의 파노라마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전까지는 양대 이데올로기(보수주의 대 자유주의)간의 경쟁이었지만, 바야흐로 오른쪽에는 보수주의자가, 중간에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리고 왼쪽에는 급진주의자들이 자리잡게 됨으로써, 3대 이데올로기 사이의 투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1848년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두 가지 사건의 발생이 무엇보다도 핵심적이었다. 한편으로 근대시대 최초의 진정한 ‘사회혁명’이 발생하였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도시노동자들이 지지하는 하나의 운동이 프랑스에서 일정 권력을 획득하였고 이 운동은 메아리가 되어 다른 나라들로 퍼져나갔다. 이 집단의 정치적 지배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음에도, 이 사건은 그동안 권력과 특권을 누리던 집단들을 경악시켰다. 동시에 또 다른 혁명 혹은 일련의 혁명이 발생하였다. 역사가들은 이를 ‘민족들의 봄'(the springtime of the nations)이라고 불렀다. 상당수 국가에서 민족봉기, 민족주의적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들 역시 성공적이지는 못했음에도, 마찬가지로 그동안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들을 경악케 하였다. 이 두 종류의 혁명의 조합은 세계체제가 그 다음 세기와 그 이후까지 겪어야 하는 하나의 패턴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바로 반체제운동이 핵심적인 정치적 행위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1848년 세계혁명의 불길은 갑작스럽게 타올랐지만, 그후 몇 년 동안 강력한 탄압이 뒤따르면서 결국은 진화되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전략, 곧 이데올로기에 관한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하였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분명한 교훈을 끌어낼 수 있었는데, 그들은 40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국무재상(실제로는 외무부장관 격이다)으로 있으면서 유럽의 모든 혁명운동을 질식시키기 위해 고안해 낸 신성동맹(the Holy Alliance)의 배후를 조종하여 왔던 메테르니히와 그와 입장을 같이한 사람들이 추진한 맹목적인 반동전술이 실제로는 생산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볼 때, 메테르니히 일파의 전술은 전통을 보존하거나 질서를 수호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노여움과 분노를 자극하였고 반정부세력들을 조직화시켰으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기존질서를 약화시켰다. 영국은 1848년 이전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급진적 운동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1848년 혁명을 피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국가였다. 보수주의자들은 이에 주목하였고, 마침내 이들은 영국의 이 비밀을 1820~50년에 로버트 필(Sir Robert Peel)이 설파하고 실행한 보수주의 양식으로부터 찾아내었다. 이 보수주의는 급진주의가 장기적으로 발호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시의적절한(하지만 제한된) 양보전술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그후 20여 년 동안 유럽에서는 필의 전술이 ‘계몽된 보수주의’의 형태로 뿌리를 내렸고, 이 ‘계몽된 보수주의’는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번성하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 급진주의자들 역시 1848년 혁명들의 실패로부터 전략적 교훈을 도출해 내고 있었다. 이들은 더 이상 자유주의 세력에 빌붙어 있는 존재로서의 역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1848년 이전까지 급진주의의 주요 원천이었던 자연발생성은 이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연발생적 폭력은 그저 타오르는 불에 종이뭉치를 던지는 행위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 불은 좀더 타오르는 듯하다가 이내 곧 수그러들 따름이었다. 이런 식은 폭력은 결코 오래 가는 연료가 될 수 없었다. …… 급진주의자들은 좀더 효과적인 대안전략을 추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마침내 이 대안을 조직에서 찾아내었다. 곧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조직만이 근본적인 사회변동을 위한 정치적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자들 역시 1848년 혁명들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전문가집단에게 의지하는 것의 장점을 설파하는 것만으로는 합리적이고 시의적절한 사회변동을 이끌어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실제로 전문가들의 손에 해결해야 할 사안이 넘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 영역에서 훨씬 더 능동적으로 활동하여야 했다.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오랜 경쟁자였던 보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새로이 등장한 급진주의적 경쟁자에 대해서도 동시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만약 자유주의자들 스스로가 정치적 중심으로 표상하기를 바란다면 이는 이들이 내세우는 요구를 ‘중도파적인’ 프로그램을 통해서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으며, 이에 따라 이들의 일련의 전술 또한 일체의 변화에 대해서 반대하는 보수주의와 급진적인 변동을 주장하는 급진주의 사이의 중간쯤에 설정되어야 했다.

 


21세기 자본

–  토마 피케티 / 장경덕 외 역 / 글항아리 / 2014.09.12 (2013)

 

어찌되었든 간에, 1840년대에는 노동소득이 정체되는 가운데 자본은 융성했고 산업 이윤은 늘어났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에 당시 어느 누구도 국가 전체를 보는 통계자료를 활용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 사실을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최초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들의 핵심적인 질문은 단순한 것이었다. 반세기 동안의 산업적 성장을 이룬 다음에도 대중의 상황이 여전히 그전처럼 비참하다면, 그리고 8세 미만 어린이들의 공장노동을 금지하는 것이 입법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면, 산업 발전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이 모든 기술 혁신과 이 모든 노역과 인구 이동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기존 경제와 정치 체제의 파산은 명백해 보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장기적인 체제 변화에 관해 알고 싶어했다.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스스로 설정한 과제였다. 그는 1848년 ‘민중의 봄 spring of nations'(그해 봄 전 유럽에 걸쳐 터져나온 혁명들) 직전에 『공산당선언』을 발표했는데, 이 짧고 강력한 텍스트는 그 유명한 “한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선언은 혁명을 예언하는 서두만큼 유명한 말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현대의 산업 발전은 부르주아지가 생산을 하고 그 생산물을 전유하는 바로 그 기반을 발밑에서부터 무너뜨린다. 따라서 부르주아지가 생산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들이다. 그들의 파멸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똑같이 필연적인 것이다.

……

…… 사실 그의 주요 결론은 ‘무한 축적의 원리 principle of infinite accumulation’라고 일컬을 만한 것이다. 즉 자본은 계속 축적되면서 갈수록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움직일 수 없는 경향이 있으며, 그 과정에 아무런 자연적 제약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파멸을 예언한 근거다. 자본의 수익률이 끊임없이 감소하거나(그래서 자본축적의 엔진을 꺼뜨리고 자본가들 사이에 격렬한 투쟁을 부르거나) 국민소득 가운데 자본가의 몫이 무한히 증가해(그래서 조만간 노동자들이 단결해 폭동을 일으켜) 결국 자본주의는 최후를 맞는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안정된 사회경제적, 정치적 균형은 불가능하다.

……

이 책의 서장에서 간단히 논한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관찰된 가장 중요한 점은 의심의 여지 없이 1800년에서 1860년에 걸친 산업혁명 초기에 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이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가장 완전하고 이용 가능한 영국의 역사적 연구 자료, 특히 로버트 앨런(장기간의 임금 정체를 ‘엥겔스의 정체 Engels’ pause’라고 이름 붙였던)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35~40퍼센트에서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완성하고 『자본』을 쓰기 시작할 때인 19세기 중반에는 약 45~50퍼센트로 10퍼센트가량 증가했다. …… 그러나 19세기 전반에 국민소득의 10퍼센트가 자본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기간에 경제성장의 가장 많은 몫이 자본가의 이윤으로 돌아간 반면, (객관적으로 형편없었던) 임금은 정체되었기 때문이다. 앨런은 그 원인을 주로 기술 변화로 인한 (생산함수의 구조적 변화를 반영하는) 자본생산성의 증가와 농촌에서 도시로의 노동력의 대이동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영국이 7년전쟁(1756~1763)에서 승리하였을 때 세계우위를 놓고 프랑스와 벌인 투쟁은 끝이 났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국이 세계헤게모니가 된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세계우위를 놓고 벌인 투쟁이 끝나자, 갈등은 세번째 국면에 돌입했는데, 그 특징은 점점 더 커진 체계의 카오스였다. 17세기 초 연합주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이런 체계의 카오스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킴으로써 헤게모니가 되었다.

……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확실히 체계 전체에 걸친 반란의 새로운 물결은 대서양을 차지하려는 투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투쟁이 일단 폭발하자, 반란은 영국-프랑스의 경합이 전적으로 새로운 지반들 위에서 재생될 조건들을 만들어 냈으며, 이런 새로운 경합이 끝난 후 반란은 3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1776 ~ 1848년 시기 전체를 놓고 볼때, 두번째 반란의 물결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와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통치자-피지배자 관계를 완전히 변형시켰고, 두번째로 그 변형에 적절하도록 국가간 체계를 완전히 재편한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세계헤게모니(영국의 자유무역 제국주의)를 수립시켰다.

이런 반란 물결의 깊은 뿌리는 대서양을 차지하려는 앞선 시기의 투쟁으로 소급되는데, 왜냐하면 그 행위자들이 이 투쟁을 통해 등장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정착자, 대농장 노예들, 그리고 대도시 중간계급이 그들이었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과 함께 식민지에서 반란이 시작되어, 맨 처음 영국을 타격하였다. 프랑스 통치자들은 즉각 이 기회를 이용해 실지회복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는 곧바로 1789년 프랑스혁명의 역습으로 되돌아 왔다. 프랑스혁명으로 터져 나온 에너지는 나폴레옹 하에서 프랑스의 실지회복 노력을 배가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정착자, 노예, 그리고 중간계급의 반란을 일반화시켰다.(cf. Hobsbawm 1962; Wallerstein 1988; Blackburn 1988; Schama 1989)

 


이야기 세계사 2

–  구학서 / 청아출판사 / 2002.12.20

 

1848년은 흔히 ‘혁명의 1년’으로 불린다. 전 유럽에서 정치적인 자유를 쟁취하고 민족 감정을 고양시키기 위해 소요와 혁명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는데, 그 원인은 1846년부터 계속된 경제위기와 일부 연관된다. 뿌리가 마르는 감자병이 유행하여 감자 수확은 전무하였고 극심한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죽는 사태가 빈발해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긴장과 불안이 감돌았다. 산업 부문도 농업의 영향을 받아 사업 실패의 급증, 실업, 임금하락 등 불안정이 지속되었다.

일반 민중은 자연히 자신들이 처한 비참함과 곤궁을 정부가 제대로 배려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경제적 위기가 나타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역사가 자크 들로주는 1848년의 이런 현상을 이렇게 결론 지었다.

“경제 위기가 고조되면서 민중은 기존 지배층에 대한 불만을 넘어서 적개심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인이 본질적으로 증오를 품고 무기를 들어 봉기하도록 한 요인은 역시 자유의 결핍이었다.”

 


원치 않은 혁명 1848

–  볼프강 J. 몸젠 / 최호근 옮김 / 푸른역사 / 2006.12.29

 

※  한겨레 서평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83535.html
그런데 ‘원치 않은 혁명, 1848’이라니? 이 표현을 이해하려면 그 이전, 그러니까 1830년 7월 혁명까지 거슬러올라가는 18년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7월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이 보수적 왕조들로부터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쟁취한 것이었지만, 그 성공은 하층민중의 광범위한 지지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급속한 농업해체와 산업화의 물결은 무산자 계급의 열악한 처지를 극한으로 몰아넣었고, 이들의 전방위적 개혁 요구는 이미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부르주아는 급격한 변혁보다는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원했고,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 사태를 두려워했다. ‘신분제 의회’를 고수하려는 부르주아의 태도는 하층계급의 분노를 샀다.

 

1848년 2월22일, 프랑스의 반체제 지식인들은 보통선거권과 공화정을 요구하는 대중집회를 계획했다. 그러나 집회는 금지됐고, 대규모 항의시위가 겉잡을 수 없을만큼 폭발적 사태로 치달았다. 군대마저 시위대열에 합류하자 결국 ‘국민왕’ 루이 필립은 퇴위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의 승리였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도 바로 이 즈음 발표됐다. 일련의 장밋빛 개혁조치들도 가시화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새 공화정에서도 다수 대표자는 ‘혁명적 변화를 원하지 않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  주간한국 서평 : http://weekly.hankooki.com/lpage/culture/200701/wk2007012914253237730.htm

제목처럼 저자는 1848 혁명을 ‘원치 않은 혁명’으로 규정한다. 기존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자는, 지극히 목적 지향적이자 의지적 행위를, 원치도 않으면서 수행했다? 이 아이러니의 주체로 지목되는 계급은 중상류 부르주아지. 저자가 ‘(온건) 자유주의자’로 통칭하는 이들은 유산(有産) 계급이나 자유주의적 귀족으로 구성돼 있다. 왕정 복고와 함께 득세한 전통 귀족 세력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이들은 혁명 파트너였던 ‘급진 민주주의자’들을 가까이할 수도, 혁명 대상이었던 보수주의 세력을 멀리할 수도 없었다. 폭발적 변혁을 저어하며 타협을 도모했던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기회주의적 처신은 1848 혁명이 외양상 실패로 저문 원인이 됐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급진 민주주의자들을 진정한 혁명정신의 담지자로 여기는 건 아니다. 하층 부르주아, 소규모 제조업자, 학생 등 지식인 일부를 아우른 이 급진 세력은 무장투쟁까지 불사하는 실천력을 지녔지만 이들이 꾀하던 ‘민주주의’란 전통적 사회의 전복이라기보단 재생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실 당시 급진전하던 산업화에서 새로운 사회 질서를 전망했던 무리는 마르크스를 비롯한 소수 사회주의자에 지나지 않았다. 수공업자·제조업자 등 급진파의 주요 세력에게 산업사회는 그들의 처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디스토피아였다. 이들이 바라던 것은 모든 직업종사자에게 전통에 상응하는 보수가 지급되도록 국가가 신경 써주는 ‘도덕 경제’로의 회귀였다.

 


뉴레프트리뷰

–  프레드릭 제임스 외 지음 / 김철효 외 옮김 / 길

 

※  위클리경향 861호 서평 :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001281109431

1853년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 남작에게 파리를 개조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책임지게 했다. 오스만은 파리의 도시 기반시설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쳐 파리를 소비·관광·쾌락이 지배하는 ‘모더니티 수도’로 탈바꿈시켰다.

 

이 시기의 전면적 파리 개조에는 정치 · 경제적 배경이 강하게 작용했다. 185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48년 혁명을 통해 불거진 혁명의 기운을 해소하기 위해 거대한 토목 공사에 매진했다. 왜 토목공사였나. 1848년 혁명은 유휴 상태의 잉여자본과 잉여노동력이 불러온 위기였기 때문이다. 파리 재건은 “엄청난 양의 노동력과 자본을 흡수하는 한편 파리 노동계급의 열망을 잠재우면서 사회를 안정시키는 주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영국의 마르크시스트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에 따르면 도시화는 “자본가들이 이윤을 추구하며 지속적으로 쏟아내는 잉여생산품을 흡수하는 데 군비지출 같은 현상과 더불어 특히 적극적인 역할”을 해 왔다. 하비가 보기에 19세기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도시화는 이처럼 자본주의가 체제 위기를 돌파하는 수단이다. 도시 재개발은 “언제나 계급적인 차원을 지닌다”. 재개발의 이익은 소수에게 돌아가는 대신 고통은 모두 정치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가난한 자들에게 지워진 몫이기 때문이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  데이비드 하비 / 김병화 옮김 / 생각의 나무 / 2005.02.26

 

신용 시스템의 재편은 파리의 산업과 상업, 노동 과정과 소비 양식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어쨌든 모든 사람이 신용거래에 의존했으니까. 유일한 질문은 누가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조건으로 빌려주느냐 하는 점이었다. 계절 실업으로 인해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거기에 생계를 의존했다. 소규모 장인과 점포주는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주문을 처리하려면 신용 거래를 해야 했다. 이같은 연쇄는 끝없이 이어진다. 채무상태는 모든 계급과 모든 활동 영역이 당하는 만성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1840년대의 신용 시스템은 자의적이고 변덕스러웠으며 불안정했다(진정한 안정감을 주는 것은 토지와 부동산뿐이었디). 1848년 무렵 신용 시스템을 개혁하자는 제안이 무성하게 제기되었다. 수공업자, 소장인, 기술노동자들은 지역적이고 민주적으로 통솔되는 일종의 상호 신용 시스템을 만들려고 했다. 프루동이 실험적으로 세운 인민은행은 “돈의 장사꾼이여, 너희의 지배는 끝났다!”는 기치 아래 자유 신용을 제공했지만, 그가 1849년에 체포되자 그것 역시 몰락했다.

……

1848년 6월의 노동자 운동은 300개 이상의 지방 중심지에서 징집된 국민방위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파리의 상업 궤도 안에서 움직이는 부르주아는 “강력한 지역적 연대감은 가졌지만 지역적이나 국가적 행동 능력은 거의 없는 노동계급에 비해 장거리 통신을 하기에 훨씬 유리했다.” 부르주아들은 경제적 · 정치적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광범위한 상업적 연줄의 공간적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이 사건 배후에는 상당히 중요한 원칙과 문제가 놓여 있다. “공동체”가 공간적 응집성을 수반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공동체의 경계는 어떻게 확정되는가? 혹은 “공동체”란 단순히 공간적이기만 한 특정 구역과는 상관없는 이익 공동체를 의미하는가? 실상 우리가 보는 것은 공간적으로 펼쳐져 있는 계급 이익의 공동체에 대한 부르주아적 규정이다. 예를 들면, 로스차일드가 성공한 비밀이 바로 이것이었다(여러 다른 국가의 수도에 있는 가문의 광범위한 통신원 네트워크를 활용한). 하지만 1848년의 교훈으로 무장하고, 자신들의 계급 이익을 좇아 사업과 행정에 가담한 상층 부르주아(페레르 형제, 티에르, 오스만 같은 이들)는 점점 더 그러한 노선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했다. 티에르는 1848년에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의 동원령을 내려 코뮌을 진압했다. 부르주아들은 특정한 장소에서의 지역적 연대가 제아무리 강하다 한들 자신들이 갖고 있는 보다 우월한 공간 지배권을 행사하여 계급 운동을 분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가자 고전의 숲으로

–  한길사 편집부 / 한길사 / 2008.05.10

 

마르크스, 엥겔스에게서 1848년 혁명은 이전의 모든 정치적 혁명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혁명이었다. 그것은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 간의 대립에 기초한 최초의 계급 전쟁이었고 자본주의의 미래를 분명하게 예견해 주는 혁명으로서 사회주의 이행의 본질과 필연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주의 이행의 경제적 조건, 즉 자본주의의 발전이 아직 충분히 성숙하기 전에 발발한 혁명이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자본주의적 발전이 충분히 성숙하고 나면 필연적으로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는 혁명이었다. 말하자면 1848년 혁명은 마르크스, 엥겔스에게서 사회주의 혁명의 본원적인 전형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Bernstein)은 그 혁명의 감동적인 내용보다는 그것의 결과에 주목하였다. 1848년 혁명은 영웅적인 것이긴 하였지만 그것이 가져다준 결과는 전혀 영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혁명을 유발하였고 보수반동의 강화에 기여하였을 뿐이었다. 혁명은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혁명적 노력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혁명이 신화에 불과하며 현실을 이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그것은 혁명의 신앙에 대한 그의 경고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입장은 자신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당은 아직 그의 충고에 의아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유럽의 재발견

–  볼프강 슈말레 / 박용희 역 / 을유문화사 / 2006.02.10

 

프랑스의 대표적 극작가 빅토르 위고가 1849년 파리평화주의자대회에서 유럽합중국을 호소하기도 전에 독일 좌파들은 이와 유사한 일에 열성적이었다. 1832년 함바흐 축제에서 언론인 비르트는 “동맹을 이룬 공화주의적 유럽”을 삼창하며 호소하였고, 학생이었던 브뤼게만은 “자유국가 유럽”에 열광하였다. 그와 함께 계속해서 『유럽일보』나 『유럽신문』 같은 일회성의 정기간행물이 출간되었다. 프랑스에서 피에르 르루는 1827년 12월 24일 잡지 『세계』에 “유럽연합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기조나 쥘 미슐레, 이탈리아의 마치니 같은 다수의 저술가들은 유럽에 혼을 불어넣고 있었으며, 유럽을 하나의 복합적인 유기체로 이해하였다. 이 유기체란 개념은 “문화” 내지 문명이란 개념과 함께 근대 초기에 유럽을 인간의 몸에 비유한 전통 대신에 등장한 것이었다. 1789년과 1830년 혁명보다 더 유럽적이었던 1848년 혁명과 함께 유럽합중국이란 단어가 떠돌고 있었다.

앞에 언급한 대회에서 대단히 유토피아적이지만 1848년의 정신에 완전히 부합하는 연설을 한 빅토르 위고에게 1848년의 혁명은 1789년 혁명보다 더 ‘유럽혁명’이란 명칭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는 1849년에 유럽에 관해 지난 반세기 동안 유럽의 구석구석에서 제기되어온 모든 것을 어느 정도 요약하여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미래의 위대한 정치, 진정한 정치의 목적은 이런 것입니다. 모든 민족을 인정하고, 민족들의 역사적 통일체를 재수립해야 합니다. 또 이 통일체를 평화롭게 문명과 연결시키며 문명화된 민족집단을 부단히 확장시켜야 합니다. 아직도 야만적인 민족들에 좋은 선례를 제공해야 하며 전쟁을 중재재판소로 대체해야 합니다. 요약하면 구세계에서 폭력으로 주장되던 최후의 발언권을 법이 행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청중들의 큰 반응)

신사 여러분! 끝으로 우리를 고무할 수 있는 말을 하고자 합니다. 인류는 비로소 오늘에 이르러서야 이렇게 예견된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국이 우리 구유럽에서 첫걸음을 내디뎠고 지난 100년간의 예를 통해 다른 민족들에게 말해왔습니다. 당신들은 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두번째 걸음을 내디디며 민족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프랑스, 영국,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유럽, 아메리카, 우리 모두가 함께 세번째 걸음을 내디디며 민족들에게 말합시다. 우리는 형제다! (엄청난 환호)

1848년 혁명의 실패는 부분적으로 자주적 공동체로 민족이란 생각이 앞선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패는 이전에 자주 거론되었던 유럽국가들은 한가족이라는 원칙 혹은 유럽합중국의 원칙이 관철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화폐전쟁 2

–  쑹훙빙 / 홍순도 역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05.03

 

1830년 전후는 세계 근대사의 일대 전환점이 된 시기로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유럽 대륙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경제 발전은 이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산업화 진행 과정은 광산, 방직, 기계, 철도, 기선 분야 등의 산업을 폭발적으로 발전시켰다. 이에 따라 대량의 산업 자산 계급의 승자가 생겨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많은 수의 패자들 역시 양산해냈다. 그들은 바로 토지 상실로 인해 도시로 유입되었던 완전 빈털터리의 농민을 비롯해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야 했던 노동자, 실업에 직면한 수공업자 및 도시 빈민 계층들이었다. 이중 산업혁명의 승자들은 봉건 전제 역량이 날로 쇠약해지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이 날로 커져가는 경제적 권력에 상응하지 못하는 데에 불만이 높았다. 따라서 통치자들에게 보다 많은 권력을 요구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845년부터 1847년까지 3년 동안 유럽의 수많은 국가에서 자연재해마저 발생했다. 거의 전 유럽에서 대기근이 일어났다. 흉작은 식량의 급속한 가격 팽창으로 이어졌고 농산물 판매는 자연스럽게 떨어져 농업 신용 규모의 축소를 야기하고 취업 기회마저 박탈했다.

산업 분야 역시 1840년부터 정체에 빠졌고, 특히 철도 건설 분야는 성장 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산업 신용 역시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방면의 힘이 위축되면서 결국 1848년 유럽 대부분 지역은 경제 불황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이후 형성된 안정 국면은 경제 위축이라는 거대한 압력에 의해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게 되었다.

……

1848년 2월, 프랑스 파리의 주식시장이 대폭락하면서 그동안 무르익어가던 혁명의 기운이 드디어 폭발했다. 평민들의 원한과 자산 계급의 탈권(奪權)의 충동 역시 사회 곳곳에 쌓인 불만의 화산이 맹렬한 기세로 터지도록 자극했다.

 


유대인의 역사 2

–  폴 존슨 / 김한성 역 / 살림 / 2005.03.30

 

이처럼 유대인들이 게토로부터 해방되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실질적인 권리회복은 상당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당시에 그토록 많은 유대인들이 세례를 통해 유럽 사회로 들어가는 표를 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유대인들에게는 로트실트 가가 보여준 또 다른 해결책이 있었다. 그들은 18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경제현상, 곧 사설 은행 부분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들이었다. 사설 은행을 가진 가문들 중 많은 경우가 유대인 가문이었는데, 특히 주로 왕실 유대인들의 자손들이 사설 은행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로트실트(Rothschild, 로스차일드) 가만이 세례를 통한 개종과 금전적인 파산을 동시에 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남다른 가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어렵고도 양립하기 어려운 네 가지 사항들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많은 재산을 신속하고 정직하게 축적하는 것, 정부의 전폭적인 신용을 얻어가면서 그 부를 널리 분배하는 것, 많은 이윤을 계속 내되 대중들의 적개심을 유발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 법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유대인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 어떤 유대인들도 그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했으며, 그것을 자신 마음대로 사용하지도 못했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도 못했다.

……

마치 새로 획득된 권리들이 아직까지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1819년에 반-유대주의적인 폭력사건들이 독일의 몇몇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헵 헵(Hep Hep)’이라고 불려진 (함성소리나 프랑코니아에서 염소를 몰고 가는 사람들이 외치던 소리를 붙인 것 같음) 폭도들이 프랑크푸르트의 로트실트 가에 대한 공격까지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1848년의 혁명은 로트실트 가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더 이상 그곳에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세상에 유통되었던 것은 증권이었다. 로트실트 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수 세기 동안 가다듬어 왔던 기술을 완성했다. 즉 약탈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는 방식 말이다. 그 이후 그들의 재산에는 폭도들과 탐욕스러운 군주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야기 프랑스사

–  윤선자 / 청아출판사 / 2006.07.25

 

1848년 4월 말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온건한 공화주의들이 대거 당선되었다. 당선이 확실했던 블랑키, 바르베스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낙선하였다. 그것은 급진적 사회주의에 대한 부르주아, 더 나아가 국민들의 불안이 반영된 결과였다. 사실 2월 혁명 직후 전국의 사회주의자들이 파리로 몰려들어 언론과 정치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부르주아와 국민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 보았고 그것이 선거의 결과로 드러난 것이다. 이후 정부의 구성에도 사회주의 지도자인 루이 블랑이 제외되면서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의 불만이 한층 커졌다.

 


개설 철학사

–  中村雄二郞 등 / 백산서당 / 1983

 

자본주의 그 자체에 포함된 내부 모순으로 인하여 자본주의 사회는 붕괴되고 착취 없는 사회주의 사회로 필연적으로 이행한다는 조감도이며, 그러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투 프로그램이었던 이 『공산당 선언』은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간행되었으며 다음 달에는 독일에서 3월 혁명이 일어났다. 이 3월 혁명에는 마르크스 자신도 참가하여 <신 라인 신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요구를 대변했지만 이 독일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실각한 메테르니히 대신 등장한 반혁명세력에 의해 혁명적 자유주의 운동은 압살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가 광범하게 보급되어 현실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그것도 7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였다.

 


뺑소니 정치와 3생 정치

–  박호성 / 오름 / 2000.01.15

 

와다 하루키와 유사하게 특히 지오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 역시 마르크스주의 이론사 및 실천적인 노동운동사의 토대에 서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국가사회주의의 몰락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공산당선언’에 등장하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상관관계에 관한 해명 속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분석의 개념틀을 발굴해 내고 있다. 그에 의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적 지배질서가 필연적으로 종언을 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서 부분적으로 서로 모순적인 두 개의 시나리오를 제시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대중적 궁핍화에 휩쓸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무기력이며, 다른 하나는 이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산업발전에서 의해 축적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결속적인 힘, 또는 사회적 권력이 그것이다.

아리기는 ‘공산당선언’ 이후 지금까지 140년 가량의 자본주의 역사를 경제적 호황국면과 불황국면을 고려하면서 1848년에서 1896년, 1896년에서 1948년, 그리고 1948년에서 현재까지 대략 비슷한 기간의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특히 두번째 단계에는 개량과 혁명으로 대별되는 베른슈타인과 레닌의 이념이 세계노동운동의 물줄기를 크게 갈라 놓았다. 요컨대 베른슈타인은 앵글로색슨과 스칸디나비아 세계에서 그러했듯이 노동자의 세속적인 사회권력이 강화되어간다는 쪽에 운을 걸었고, 반면에 레닌은 러시아와 중국 등지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이들의 궁핍화 또는 무기력화가 더욱 심화되어간다는 편에 심혈을 쏟았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  전국역사교사모임 / 휴머니스트 / 2005.10.31

 

1848년 2월, 프랑스 파리의 총리 집 앞은 분노한 시민들의 구호 소리로 요란하였다.

“무능한 정부는 물러나라!” “우리에게 빵을 달라!” “선거권을 확대하라!”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수립된 왕정은 소수 대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민중들을 억압하고 있었다. 흉년으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자 민중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고, 이 틈을 타 부르주아들도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고 나섰다.

……

그 동안 억눌려왔던 민중들의 분노가 다시 폭발하였다. 무능한 왕정은 불과 하루 만에 무너졌고, 새로운 혁명 정부가 구성되었다.

혁명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얼어붙었던 전 유럽으로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이미 석 달 전 스위스에서는 내전이 발생하였고, 1월에는 이탈리아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성공하자, 3월에는 전 유럽이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오스트리아에서도 3월에 국회와 왕궁이 습격당하였고, 결국 빈 회의를 주도하였던 메테르니히가 쫓겨났다. 독일도 베를린을 비롯한 곳곳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차티스트 운동이 재개되어 무려 500만 명이 선거법 개정 서명운동에 나섰다. ‘모든 국민의 봄’이 온 듯하였다.

 

2월 혁명의 화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6월, 파리에는 다시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 2월 혁명의 동지들이 이제는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2월 혁명으로 수립된 혁명 정부는 노동자들의 요구대로 노동 시간을 1시간 30분 줄이고, 실업자들을 위해 국영 작업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 선거를 통해 새롭게 구성된 정부는 이런 성과를 무효로 돌렸다. 선거로 권력을 잡은 사람은 부르주아들이었고, 이들은 교양과 재산을 가진 사람만이 제한적으로 참여하는 온건한 공화정을 주장하였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다시 무기를 들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였다.

정부는 ‘질서와 안정’을 내세우며 봉기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곳곳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체포되었으며, 체포된 사람들은 알제리 강제 노역소로 추방되었다. 특권 귀족에 맞서 자유와 혁명을 부르짖던 부르주아들이 이제는 민중의 요구를 억누르는 압제자가 되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민중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부르주아들에게도 공포 그 자체였다. 그래서 부르주아들은 차라리 왕이나 귀족과 손을 잡았다. 이런 사정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은 시작될 때만큼이나 순식간에 사그라졌고, 쫓겨났던 왕정이 다시 복귀하였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인류 이야기

–  헨드릭 빌렘 반 룬 / 이종훈 역 / 서해문집 / 2007.01.25

 

유럽에서 혁명의 조짐을 알려주는 풍향계나 다름없는 프랑스에서 또다시 민중 봉기의 징후가 보였다. 샤를 10세의 뒤를 이어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올랐다. 자코뱅 당원이었던 오를레앙 대공의 아들 루이 필리프는, 아버지가 로베스피에르에게 죽임을 당한 후 외국으로 도피하여 스위스와 미국 등지를 전전하다 나폴레옹이 사라지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제법 머리가 좋은 인물로 프랑스 정국에 밝았음에도, 군중들이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국왕을 몰아내고 1848년 2월 24일 아침 공화국을 선포하는 순간까지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주 후 오스트리아의 수도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메테르니히는 간신히 도망쳤고, 페르디난트 황제는 지난 33년 동안 탄압해 온 혁명 이념이 대부분 반영된 헌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 전체가 충격을 받았다. 로요슈 코슈트가 이끄는 헝가리 민중이 합스부르크 왕가에 맞서 1년 넘게 독립 투쟁을 벌였지만,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1세의 군대가 개입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이탈리아에서는 시칠리아 섬이 나폴리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부르봉 왕가를 축출했으며, 교황령에서 수상 로시가 암살당했다. 교황은 도피했다가 이듬해 프랑스 군대와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 프랑스 군대가 1870년까지 로마에 주둔하다가 프로이센의 공격을 막으려고 프랑스로 돌아간 후,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와 베니스가 오스트리아의 지배 세력에 맞서 싸웠다. 이를 지원한 사르데냐 공국의 카를로 알베르토는, 노바라 전투에서 라데츠키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대에게 패하였고, 카를로 알베르토는 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왕위를 물러줄 수밖에 없었다. 수 년 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이탈리아를 통일한 후 초대 국왕에 올랐다.

1848년 독일에서는 독일의 정치적 통일과 대의제를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바이에른에서는 호색에 빠져 돈과 시간을 허비한 왕이 대학생들의 봉기로 쫓겨났고, 프로이센 왕은 폭동 사태 희생자 추모제에 참석하지 못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입헌제 정부 수립을 약속했다. 550명의 지방 대표로 구성된 독일 의회는 1849년 3월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독일 연방의 황제에 즉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 후 상황이 반전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무능한 황제 페르디난트가 조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훈련이 잘된 오스트리아 군대는 계속 충성을 바쳤고, 동유럽 및 서유럽의 주인으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다진 합스부르크 왕가는 정치적 술수를 능란하게 발휘하여 프로이센 국왕이 황제에 즉위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말장난에 도취되어 있는 순간, 오스트리아는 군대를 파견하여 프랑크푸르트 의회를 해산하고 빈 체제가 보장한 방식대로 독일 연합국을 재건했다.

시골 지주 출신의 비스마르크도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참석했다. 그는 말보다 행동을 중시한 애국자였다. 비스마르크는 느슨한 형태의 독일 연합국이 훨씬 강력한 통일국가로 발전해야 하며, 새로운 독일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아니라 호엔촐레른 왕가가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된 반면, 독일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1848년 혁명이 실패하자, 대다수의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있는 식민지나 브라질 · 미국 등지로 이민을 떠나 버렸다. 이제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이 독일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프랑스 대통령 이야기

–  최연구 / 살림 / 2008.03.15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제1 제정은 나폴레옹의 유배로 끝이났고, 권력은 왕당파로 넘어가 입헌왕정의 형태를 띤다. 1848년 기조 내각이 물러나고 2월 혁명이 발발함으로써 루이 필립은 영국으로 망명하고 제2 공화국(1848~1852)이 성립된다. 시인 라마르틴과 사회주의 이론가 루이 블랑을 포함한 임시정부에 이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848년 12월 10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프랑스의 첫 보통선거였다. 대통령제는 제2 공화국 때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말하자면 루이 나폴레옹은 프랑스 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다. 이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은 좌파의 분열과 선거에 대한 정보 부족 덕분에 7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된다. 루이 나폴레옹에게 대거 투표했던 농민 유권자들 중에는 나폴레옹 1세에 대한 투표로 착각했던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광범한 지지로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켰고 공화파를 추방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해 나폴레옹 3세로 칭하며 제2 제정(1852~1871)을 열었다.

 


프랑스 혁명 열기 잠재운 ‘골드 러시’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060100751

 

프랑스인들이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몰려온 것은 1848~1849년 이후의 일이다. 1848년 북아메리카에서는 미국 영토가 폭발적으로 팽창했지만,구대륙 유럽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끓어넘치던 해였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분출된 시민의 자유와 민족의 권리를 다시 억압하려는 보수 체제에 저항하는 자유주의 혁명과 민족주의 혁명,산업화의 진전으로 생겨난 노동계급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회주의 혁명 등 여러 움직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해 말 이런 혁명 운동들은 거의 대부분 억압됐다. 많은 활동가들이 당분간 혁명의 꿈을 실현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바로 이 순간에 캘리포니아의 금광 발견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미국은 여러 의미에서 기회와 꿈의 땅으로 인식됐다. 1849년에 약 4만명의 프랑스인이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이 가운데 절반인 2만명 정도는 1848년 혁명에 참여했거나 그 이상을 추구하던 사람들이었다.

그해 초 봄부터 프랑스 전역에 캘리포니아 금 열기가 넘쳤다. 신문에는 “수백 마일의 땅에 금이 섞여 있어서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수 세기 동안 일해야 금을 다 채굴할 수 있다”거나 “1m만 땅을 파면 금이 나온다”는 식의 과장된 기사들이 사람들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극장에서는 ‘새크라멘토의 금 채굴업자’ 같은 연극이 공연됐다. 캘리포니아의 금광 지도가 나돌았고,분명 사기성 짙은 회사들이 이미 금광 지역 땅을 사두었다며 이민자들을 모집했다. 캘리포니아 이민을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도주의 단체들도 생겨났다. 이런 일들을 지켜보던 마르크스는 “파리의 프롤레타리아에게 금광의 꿈이 사회주의의 이상을 대체했다”고 탄식했다.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위키백과 :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California Gold Rush, 1848년 ~ 1855년)는 당시 캘리포니아 준주 콜로마의 슈터 밀에서 제임스 W. 마셜이 1848년 1월 24일 금을 발견함으로 촉발된 사건이다. 황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이내 확산되어 미국의 각지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남녀노소를 비롯한 약 30만 명의 인구가 캘리포니아에 유입되었다.

 


<관련 그림>

 

– 프랑스 6월 파리 Rue Soufflot 거리에서의 전투 / Horace Vernet (1789–1863)

 

 

– 1848년 독일 베를린

 

 

– 1848년 오스트리아

 

 

– 1848/1849년의 혁명 실패를 묘사한 캐리커처 (Ferdinand Schröder, 1849년)

 

 

– 공화국 / 오노레 도미에(1848)

화가 도미에는 혁명 기간 중에 본인이 생각하는 공화국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공화국을 상징하는 어머니는 마치 용사처럼 굳건히 손에 삼색 깃발을 들고 있다. 그러나 자애로움을 잊지 않고 새로 생겨난 혁명 정당을 상징하는 아이들을 안아 젖을 먹인다. 한 아이는 골몰해서 책을 읽고 있는데, 이것은 혁명에는 여전히 사상적 무장이 필요하며 새로 생겨난 공화국 앞에 닥친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성적 방법을 배워야 함을 암시한다.

 

 

– 골드 러시 초기에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배

 


<관련자료 및 참고자료>

위키백과 : http://en.wikipedia.org/wiki/Revolutions_of_1848

위키백과 : http://en.wikipedia.org/wiki/French_Revolution_of_1848

위키백과 : http://en.wikipedia.org/wiki/The_Revolutions_of_1848_in_the_Habsburg_areas

위키백과 :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네이버 지식인 : 1848년의 혁명들

http://www.age-of-the-sage.org/history/1848/revolution_of_1848.html

[정윤수의 풋볼 오딧세이] 프랑스 ‘아트 사커’를 뛰어넘는 그 무엇

프랑스왕정 타도 ‘1848 2월혁명’ 노동자 주체 계급혁명으로

1848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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