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대기근 (1845년 ~ 1849년)

가장 유명한 대기근인 아일랜드 대기근(Great Famine)은 1845년에서 1849년까지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기근, 역병과 해외 이민의 시기였다.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이라고도 한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845

 

기근은 전쟁, 인플레이션, 흉작(凶作), 인구 불균형 또는 정부 정책을 비롯한 여러 요인에 의해 야기된 광범위한 식량부족 상황을 말한다. 기근이 발생했을 때의 많은 죽음을 특정 사건이나 특정 대상을 비난하는 단순한 해석은 적절치 않다. 여기에는 문화, 정치, 경제, 작물과 병균, 기후의 역사 뿐만 아니라 지질학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요소가 있다.

 

1800년대 초 아일랜드의 가난하면서도 급격히 증가하는 농촌 인구는 거의 하나의 농작물에 의존하게되었다. 감자만이 아일랜드 소작농들이 영국 지주들에게 수탈당하면서도 가족을 부양할 수있는 식량이 되었다. 저급하게 여겨졌던 감자는 농업에서 놀라운 작물이었지만 전체 인구의 삶을 흔들 정도로 아주 위험한 작물이기도 했다. 때때로 일어나는 감자의 흉작은 1700년대와 1800년대 초 아일랜드를 괴롭혔다. 그리고 1840년대 중반에 곰팡이에 의한 마름병이 아일랜드 전역의 감자를 덮쳤다. 몇 년 동안의 감자 흉작은 전례없는 재앙을 불러왔다. 그리고 아일랜드와 미국 사회는 엄청나게 바뀌었다.

 

좀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기근의 규모를 한 축으로 하고, 빈도수를 한 축으로 하면 기근은 멱함수를 따른다고 볼 수도 있다.(http://yellow.kr/blog/?p=2824 참조) 이 말은 대기근이든 작은 기근이든 비슷한 구조에 의해 발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역사적으로 가장 잉여 농산물이 많은 현재에도 아프리카 등에서 기근은 계속 발생하고 있는데 그 원인을 아일랜드 대기근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아래의 자료들을 가지고 정리해 보았다.

 

(1) 대기근의 배경

◎ 기후와 토양 그리고 감자

아일랜드의 조그만 국토엔 늪지대와 얕은 호수가 많다. 토양이 산성이라서 나무나 곡식이 잘 자라지 않아 늘 가난 속에서 살아왔다. 기후는 북위 50도나 되는 고위도 지방이지만 멕시코 만류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그러나 비가 자주 내리고 매우 습한 기후를 보인다. 이러한 기후로 인해 토지는 항상 녹색을 띄고있어 아일랜드를 ‘녹색의 나라’라고도 부른다.

영국의 식민지로 가난에 찌들어 있던 아일랜드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감자가 전파되면서부터다. 감자는 1600년 전후 남아메리카에서 도입되어 아일랜드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상당한 규모로 재배되었다. 감자는 심어보니 기가 막힌 식품이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아일랜드에서도 엄청난 수확을 거뒀다.

감자는 곧 아일랜드의 주 식량이 되었다. 전 국토가 감자밭으로 개간되기 시작했다. 감자는 1690년대에 스코틀랜드인들이 당했던 극심한 기근을 아일랜드인들이 모면하게 해준 귀중한 주식이 되었다. 아일랜드의 감자 재배는 그 뒤 반세기 동안 20배로 늘어났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곡식 가격의 상승은 경작지의 확장과 감자 재배의 절정기였다. 아일랜드 인구의 절반을 넘는 수가 필요한 열량의 4분의 3 이상을 감자에서 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 식민지

사람들이 흔히 잊어버리지만 아일랜드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식민지였다. 아일랜드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곳이 될 수 있었지만 800여년의 식민 지배를 겪는 바람에 망해버렸다. 아일랜드의 지위는 식민지 시대의 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그리고 인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중상주의 이론에 따르면 식민지의 목적은 원료와 시장을 공급하고 대도시의 권력자를 영원히 부유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따라서 아일랜드는 영국의 권력자를 부자로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세계에서 대부분의 식민지처럼 저개발되었을 뿐 아니라 인구가 감소한 몇 안되는 곳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오늘날의 아일랜드는 19세기 초의 인구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아일랜드에는 전례 없는 잔혹한 사건이 잇달았다. 1641-53년과 1689-91년 두 차례에 걸친 잉글랜드 내전에서 아일랜드는 철저하게 짓밟혔다. 이러한 상황에 농토마저 남아나지 않았다. 더욱 척박해진 환경과 소작의 대가로 얻은 땅 한 뙈기에 심을 작물로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들이 수탈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감자를 심을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 초 아일랜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빈곤함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것은 정치적 동요, 종교정책의 실수, 인구 증가, 가혹한 지주들과 영국의 그릇된 지배 때문이었다.

1841년 아일랜드인의 2/3 이상이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나머지 1/3의 상태는 형편없었다.

 

◎ 인구

1770년대에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공업화되면서, 또 1800년대에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아일랜드는 엄청나게 많은 감자를 수출할 수 있었다. 곡물가격이 상승하자 감자 경작지 확장이 계속되었다. 일손이 필요해짐에 따라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이 당시 아일랜드 사람들은 유럽 대륙보다 영양상태가 좋았다. 성인이 감자를 하루에 7kg, 여자와 아이들도 5kg 정도를 먹었기 때문이다. 풍부한 식량으로 인해 1700년대에 200만 명이던 인구는 1800년대에는 500만 명으로 늘어났고, 1821년에는 700만 명이 되었다. 대기근 발생 직전인 1845년에는 850만 명에 이르러 인구밀도가 유럽에서 가장 높았다.

아래의 아일랜드 인구 수치는 정확성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영국 정부의 10년 주기 인구 센서스 통계이다.

1821년 – 6,801,827 명

1831년 – 7,767,401 명

1841년 – 8,175,124 명

1851년 – 6,552,385 명

 

 

(2) 대기근의 원인

◎ 감자 마름병

감자 전염병이 아일랜드에서만 발생한 것도 아니다. 미국 농가의 감자밭을 휩쓴 ‘감자 잎마름병’이라는 전염병에 대해 영국 최초의 보도가 나온 시점은 1845년8월16일이다. 첫 보도 이후 각지에서 무수히 많은 보도가 쏟아졌다. 벨기에와 네덜란드, 북부 프랑스와 영국 남동부 지역이 전염지역으로 입에 오르내렸다. 얼마 안 지나 감자 잎 마름병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이 균이 아일랜드를 덮친 것은 1845년 10월이었으며 가을에 수확해 저장해 놓았던 감자들이 썩기 시작하면서 재앙이 닥쳐오고 있음을 알렸다. 밭에 남아 있던 감자들과 저장해 놓았던 감자들이 다 썩어갔다.

감자잎마름병이 다시 발생한 것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온난하고 다습한 서쪽 끝 지방에서였다. 1846년 이른 여름이 되자 서풍을 타고 1주일에 80km의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8월 초에는 아일랜드 전역을 휩쓸어 무성했던 감자밭이 하룻밤 사이에 썩어 버렸다. 1846년에 감자 수확량이 4분의 3 이상, 심한 곳은 90%나 감소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이 매우 좁은 땅에서 감자 농사에 전념했기에, 감자 생산이 준다는 것은 식량이 소진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 유럽이 공유한 전염병에서 왜 아일랜드만 극심한 피해를 받았을까.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여건. 덥고 습기가 많은 기후로 전염 속도가 빨랐다. 두 번째로 감자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밀과 귀리 같은 작물은 대부분 영국으로 반출되고 아일랜드 주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감자 재배에 매달렸다.  세 번째는 영국 식민당국의 뒷북 행정과 식민지에 대한 차별. 번번이 대응 방향을 잘못 잡고 시기를 놓치면서도 문제를 중시하지 않았다.

 

◎ 영국의 정책

감자를 못 쓰게 만든 것은 감자 역병균이었지만 수확 실패를 대기근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아일랜드의 영국 통치자들이 행한 독단적인 자유방임 정책이었다. 1845년 당시 영국은 온통 자유방임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 아일랜드인들이 게으르고 자립심이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원조를 외면하다시피 했다. 대기근 동안 지원한 구제사업비는 고작 810만 파운드. 몇 년 뒤 크림전쟁에서 지출한 전비의 20%도 안 되는 액수였다. 이런 처사에 아일랜드인은 분노했고 지금까지도 영국인을 증오하고 있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 나가는 마당에서도 곡물 수출을 강행한 계층은 부재 지주. 영국인이나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인 땅 소유주들은 구제보다 자기 몫 챙기기에만 눈을 돌렸다. 심지어 대기근의 틈을 타 소작인들을 쫓아내는 악행도 유행처럼 번졌다.

아일랜드 정치인들이 농민과 주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도 대기근의 화를 키웠다. 아일랜드는 1801년 영국과 통합 이후 105명을 영국 의회 하원에, 28명을 상원에 보냈으나 따로 놀았다. 1832년부터 1859년 동안 의원의 70%가 지주 또는 지주의 아들이어서 아일랜드 주민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

그리고 철옹성 같던 영국의 곡물법은 끊임없는 반곡물법 운동과 참정권 요구,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무너졌다. 반곡물법 운동이 선거법 개정 요구와 맞물려 사회 불만 요소로 자리 잡고 아일랜드의 대기근이 발생, 수십만 아사자가 나오는 상황에 봉착한 로버트 필 수상은 1845년 말부터 생각을 바꿨다. 곡물법을 없애지 않는 한 영국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판단한 그는 폐지론자로 돌아섰다.

 

◎ 영국 지주와 아일랜드 소작농

1846년 서부 밸린그래스에서 한 부재 지주가 군 병력을 동원해 소작농 76가구가 사는 마을을 불 태우는 사건이 일어난 뒤에는 강제 퇴거가 줄을 이었다. 강제 퇴거 이유는 감자 흉작으로 소작료를 내지 못했기 때문. 연간 수입 4파운드 이하인 소작농을 거느린 지주들이 구빈세를 부담해야 한다는 법규 또한 강제 퇴거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세금을 내느니 소작농들을 몰아내 고소득 작물을 재배하는 대농장을 만들겠다는 지주들의 선택으로 약 30만명이 고향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영국인 부재지주 중에서 소작인들을 축출하지 않은 사람은 극소수뿐이었다. 강제 퇴거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처벌하는 법까지 만들 정도로 영국인들은 아일랜드를 괴롭혔다. 지주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만든 밑바닥에는 민족적 우월감과 맬서스주의가 깔려 있었다.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빈민가를 더 좁고 더럽게 만들어 전염병이 돌도록 유인해야 한다’던 경제학자 맬서스식 사고로 영국인들은 ‘열등민족 아일랜드의 불행’을 당연한 귀결로 여겼다.

 

 

(3) 대기근의 결과

1921년, 아일랜드가 독립을 쟁취했을 때 인구가 대기근 이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 백만 명 이상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는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는데, 거기에는 영양 미달의 사람들이 매서운 겨울 추위에 노출되고, 죽 급식소(soup kitchen)와 작업장에서 전염되며, 위험한 공공작업을 수행하는 등 수많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 미국으로의 이주

아일랜드인들은 1700년대부터 노동자, 일꾼, 하인 등으로 미국으로 이주해 왔으나 매우 수가 적었다. 초기 아일랜드 정착민들은 주로 동북부의 대도시에 거주했다. 1820년대부터 ‘이리 운하’를 비롯한 대규모 토목 공사에 많은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동원되기 시작했고 이들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아일랜드 이민자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40년대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을 계기로 수 백만의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이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기근이 끝난 이후에도 많은 수의 아일랜드인들이 가족을 찾아 미국으로 이주해 온다.

아일랜드인들은 주류 사회의 차별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힘겹게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아일랜드인들은 뉴욕과 보스턴, 시카고 등의 대도시에 거주하여 도시 빈민층을 이루었다. 대부분 영세 소매업과 육체 노동직에 종사한 아일랜드인들은 차별에 맞써 강한 단합력을 자랑했으나 이는 역차별로 작용하여 흑인과 중국계 이민자들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낳기도 했다.

단합력으로 이름이 높았던 아일랜드인들은 사회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사회적인 힘을 키워 나갔다. 아일랜드인들의 노력으로 19세기 후반 이후 많은 카톨릭계 학교, 대학교, 자선단체, 공공단체들이 창설되었고 이는 오늘날 미국 카톨릭 교회의 기반이 되고 있다. 또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정치적으로도 단합하여 민주당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보였고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2015 American Community Survey’에 따르면 아일랜드계 미국인 인구는 약 3350만 명이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
–  헨리 홉하우스 / 운후남 옮김 / 세종서적 / 1997.06.01

 

사람들은 ‘감자’를 아일랜드 역사, 특히 1845년 ~ 1846년 사이에 발생했던 대기근과 연관짓곤 한다. 그러나 감자에 관해서 얘기할 때 늘 제기되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의문점들이 있다. 예컨대 다른 서유럽 국가들을 제쳐두고 왜 유독 아일랜드만 감자 재배에 적합했는가? 그리고 실제로 아일랜드가 감자를 경작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는가? 아일랜드는 왜 많은 작물 중에서 감자를 선택했는가? 또 인구는 왜 그렇게 갑자기 증가해서 기근으로 치닫는 상황까지 초래했는가? 영국은 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왜 자유 무역을 채택했는가? 집단 이주 이후 미국의 특수 지역이 아일랜드화(‘미국의 녹색화’라고 일컬어지는) 된 이유는 무엇인가? 아일랜드 대기근의 영향은 영국, 아일랜드, 그리고 미국의 혼란스런 상호 관계에 아직도 남아 있는 형편이다.

……

아일랜드의 지위는 식민지 시대의 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그리고 인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중상주의 이론에 따르면 식민지의 목적은 원료와 시장을 공급하고 대도시의 권력자를 영원히 부유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따라서 아일랜드는 영국의 권력자를 부자로 만들어야 했다.

……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하자 영국의 통치에서 벗어난 아일랜드는 더욱 더 분열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1620년경 감자의 중요성이 차츰 사람들에게 인지되기 시작했을 때, 아일랜드에는 감자가 들어올 수밖에 모든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즉 열악한 행정, 봉건제도의 부재, 페일 지역 밖에서는 실질적인 곡물 재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점, 가축을 근간으로 한 경제, 토지 소유권이나 지역 분할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던 점, 그리고 사소한 말다툼 · 살인 · 방화 · 폭동에서부터 피비린내나는 반란에 이르는 내전 등이 모두 관련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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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봉건 제도는 그 자체 내에 이미 인구 조절 기능을 갖고 있었다. 노예가 아닌 농노가 토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곧, 부양해야할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한정된 토지 안에서 해결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일랜드에는 그런 자동 인구 조절 제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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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아일랜드 사회의 불안정성은 진정한 봉건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세 시대 전반에 걸쳐 유럽 전역의 봉건 국가에서는 토지, 토지에 사는 사람, 그리고 사람을 부양할 수 있는 토지의 부양력 사이에 나름대로 타당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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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년 ~ 1660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아일랜드인이 죽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들은 드로이다(아일랜드 동부 라우스 주의 항구 도시. 크롬웰에 의해 대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에서 크롬웰에 의해 직접, 계획적으로 떼죽음을 당했다. 그들은 물이 새는 배-미국이나 서인도로 수송되는 범죄자들을 익사시키려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에 탔다가 그대로 익사 당했으며, 일부는 고국에서 굶주려 죽거나 외국에서 열대병으로 죽었다. 유일한 재산인 가축이 몰사되어 죽는 경우도 있었다. 인구는 어느새 절반 가량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도 연장이며 가축, 토지, 등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어쨌든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감자가 없었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돈이나 다른 생계 수단도 없고 빵을 만들 곡물도 키울 수 없는, 황폐하디 황폐한 늪지대와 산간 지역으로 쫓겨난 이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감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감자를 재배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레이지베드(lazybed)라는 모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레이지베드는 원래 크롬웰이 아일랜드에서 저지른 대학살의 부산물이었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후에 크롬웰이 저지른 그 어떤 파괴보다도 더 큰 피해를 미쳤다. 크롬웰은 눈에 보이는 적이었던 반면, 레이지베드는 믿을 수 없는 친구와 같았다. 그리고 결국 크롬웰이 죽인 수보다 더 많은 아일랜드인을 죽음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레이지베드는 토양에 관계없이 어디서나 만들 수 있다. 땅을 고르게 할 필요도 없고 다른 밭에서는 방해가 되는 돌멩이가 있어도 감자 재배에는 하등 지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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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지베드에는 많은 장점이 있었다. 2분의 1 에이커 정도면 ‘정상적인’ 한 가족이 한 해 동안 ‘정상적으로’ 먹고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담을 치지 않아도 가축이 돌아다니며 레이지베드에 피해를 주는 일은 없었다. 군인이나 이웃, 적대적인 다른 부족이나 씨족 등 약탈자들도 레이지베드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감자는 서리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았고 배수도 잘 되었으며 비료 또한 듬뿍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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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당시만 해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조직적인 곡물 무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유럽 전역이 악천후와 질병에 시달릴 때에도 그들은 캐나다, 라틴 아메리카, 남아프리카, 러시아, 오스트레일리아에 의지할 수가 없었다. 운이 좋을 때-신생국인 미국에 가끔씩 잉여 농산물이 남아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개 지역적인 기근을 완화해줄 수 있는 국제 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760년 ~ 1840년 사이에 아일랜드(영국 자치령인 노드 아일랜드를 포함한 아일랜드 섬 전체) 인구는 1백50만 명에서 9백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이는 80년 동안 무려 600%가 증가한 꼴이다. 1801년 ~ 1841년 사이에 지금의 에이레(영국 자치령을 제외한 에이레 공화국만을 의미) 인구는 5배로 증가했다. 인구 증가는 영국과는 무관했지만 감자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감자가 없었다면 아일랜드 전역에서 빵으로 끼니를 이을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5백만 명 안팎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은 빵의 원료가 되는 곡물이 전세계적으로 부족한 시기였다. 덕분에 아일랜드는 비싼 가격에 곡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1760년 ~ 1840년 사이에 유럽의 곡물 가격(임금 대비)은 전체적으로 2배 가량 치솟았으며, 그 결과 아일랜드는 평상시에도 1백만 ~ 2백만 에이커에서 생산되는 평균 1백만 톤의 곡물을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곡물 수출이 늘어남에 따라 아일랜드 자국 내의 기아 현상이 점점 심화되었다. 불평이 쏟아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국에 식량 부족을 야기시킨 기후가 불가피하게 아일랜드에도 식량 부족을 초래했으며 동시에 가격이 폭등, 수출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아일랜드 통치자들을 과격하게 비판하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국민이 굶주리고 있는데 곡물을 계속 수출한 것은 치욕스런 일’이라고 목청을 돋우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시장이 잉글랜드 · 아일랜드 · 스코틀랜드 · 웨일스 가운데 한 나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시장을 공동으로 이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굶주리고 있던 사람들은 애초에 곡물을 살 돈이 없었다는 점이다.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다음 두 가지로 모아진다. 즉, 흉년이 들었을 때 감자가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현금이 없다는 것도 큰 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모든 자급 경제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아일랜드는 서유럽에서 감자를 주식으로 한 최후의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오늘날 아프리카의 상황이 상상력이 거의 제한되어 있는 제 1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당시 영국인들로서는 현금이 통용되지 않은 아일랜드 사회가 너무나 낯설고 놀라웠다.

1845년 ~ 1846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기근이 시작된 아일랜드의 상황은 여러 면에서 매우 독특했다. 지역 주민들이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충분히 외부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여건이라 할지라도, 닥쳐오는 재난을 미리 인식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도저히 기근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아일랜드 기근의 초기 단계에는 대중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외부에 원조를 청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때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서 재난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기근은 1845년 6월~7월 사이의 감자 흉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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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 ~ 1849년에 이르는 25년간, 그 가운데 14년 동안은 경기 불황이 있었고 최소한 8년 동안은 지역별로 기근이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는 1845년 ~ 1846년으로 이어진 대기근이 발생한 때이기도 하다.

……

객관적으로 볼 때 아일랜드의 기근 사태는 그 후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아일랜드 인구의 절반을 넘는 수가 필요한 열량의 4분의 3 이상을 감자에서 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확이 정상적인 해조차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아일랜드는 확실히 인구가 과밀한 지역이었다.아일랜드가 살아남으려면 기존의 인구가 절반 이상 감소해야 했다. 또한 그렇게 된다 해도 감자 농사가 풍작을 이루고, 기후가 온화하며, 만연해 있는 질병을 퇴치했을 때에만 아일랜드의 생존이 보장될 수 있었다.

……

곡물 조령 반대 운동이 면화 제조업자인 리차드 코브던과 존 브라이트의 지휘하에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1839년 그들은 반곡물법 동맹을 조직, 지주들을 매섭게 비난했다. 지주들은 대부분 충실한 토리당원들이었다. 1845년 당시 아일랜드는 감자 기근이 한창이었으며 영국도 수확량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토리당의 수상인 로버트 필 경은 반곡물법 동맹의 압력을 받아 법령을 보호하던 입장에서 폐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결국 1846년 6월에 밀 관세를 낮추기 시작, 1849년부터는 관세를 완전히 폐지했다.

그러나 코브던과 브라이트의 설득력있는 주장과 필 경의 정치적 방향 전환에도 불구하고 자유 무역만으로는 아일랜드를 도울 수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곡물의 절대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곳이나 잉여 농산물이 없었기 때문에 곡물 조령을 폐지한다 해도 난데없이 곡물 1자루가 더 생긴다거나, 아일랜드 영세 농민들이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돈을 갑자기 갖게 되는 일은 생길 리 없었다.

그 다음, 반곡물법 동맹원들은 운동을 진행하는 동안 아일랜드를 언급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아일랜드 문제는 과격하게 동맹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비참한 상황이 영국의 곡물 조령을 철폐하는 데 이용되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게 돌아갔다. 1845년 가을은 ‘곡물 조령을 씻어내려가게 한 비’로 흠뻑 젖어들었다. 조령의 폐지는 웨일스나 스코틀랜드에서는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 아일랜드에서는 전혀 효력을 미치지 못했다.

……

1845년 당시 일부 영국인들은 이기적이고 편협했으며, 아일랜드 상황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우둔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 말이 옳다면 거기에서는 영국의 수학자인 토마스 로버트 맬서스(1766~1834)의 이론이 성공을 거둔 데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만들어진 역사
–  조셉 커민스 / 김수진,송설희 옮김 / 말글빛냄 / 2008.05.07

아일랜드의 역사에서 소위 대기근 또는 대기아라고 불리는 이 재앙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과대평가가 아니다. 다음의 통계가 이 재앙이 미친 영향을 잘 보여준다. 1845년 아일랜드의 인구는 약 8백만 명이었다. 6년이 지난 후 그 인구는 55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약 100만 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150만 명이 주로 영국, 호주,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

아일랜드만큼 기근에 취약한 나라는 없었다. 아일랜드는 남아메리카 페루의 고지대에서 재배되는 이 훌륭한 덩이줄기 작물이 수입된 1590년대부터 감자 하나에 의존하여 살아왔다. 시원하고 습기가 많은 아일랜드의 날씨는 이 작물이 자라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사실 감자는 그곳에서 매우 적은 노동력을 가지고도 매우 쉽게 자라 소위 ‘게으른 침대(lazy bed)’에 심겨진다고 말할 정도였다.

……

아일랜드 사람들은 운이 없게도 오직 한 가지 식량 자원을 재배했을 뿐만 아니라 럼퍼라고 불리는 오직 한 종류의 감자만 재배했다. 이 감자는 생산량이 많았지만 마름병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종은 유전학적으로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일 마름병에 의해 소멸되어버릴 수 있었다.

 


아일랜드 대기근
–  피터 그레이 / 장동현 옮김 / 시공사 / 1998.01.15

12세기에 부분적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 아일랜드에서는 전쟁, 반란, 재산몰수가 잇따랐고, 16∼17세기에 영국의 지배력이 확대되면서 아일랜드 공동체의 발전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후 신교도 정복자들이 이주, 정착하게 되었는데, 19세기 초 아일랜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빈곤함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정책의 실수, 정치적 동요, 인구 증가, 가혹한 지주들과 영국의 그릇된 지배 때문이었다. 여기에 유일한 그들의 생계작물이었던 감자 농사의 완전한 실패는 1845∼1851년의 대기근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대기근은 근대 아일랜드의 형성에 주요한 요소로 작용했으며, 19세기 유럽사에서 특이한 인구 통계, 끈질긴 악몽에 시달린 나라라는 독특한 위치를 남겼다.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  노암 촘스키 / 이종인 역 / 시대의 창 / 2005.12.16

 

…… 또 아일랜드의 기근은 경제적 기근이었는데 그 까닭은 아일랜드가 실제로 대기근 중에도 농산물을 영국으로 수출했기 때문입니다. 정치경제의 신성한 원칙에 따라서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했던 것입니다. 만약 영국에 더 좋은 농산물 시장이 있다면 아일랜드 농산물은 마땅히 그곳으로 흘러가야 하는 겁니다. 이 경우 농산물을 아일랜드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은 적절치 못했는데, 그건 시장에 부당하게 개입하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일랜드에는 대규모 기근 사태가 발생했고, 미국으로 피난 온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필사적으로 일거리를 찾았으며, 사실상 푼돈을 받고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일랜드의 역사

–  테오 W. 무디, 프랭크 X. 마틴 / 박일우 역 / 한울아카데미 / 2009.09.30

 

20년 이상 지속된 프랑스와의 큰 전쟁으로 야기된 아일랜드 경제에 대한 왜곡을 제외하고도 위험스러운 신호들이 있었다. 곡식의 가격은 전쟁 동안 급속도로 상승했으며, 아일랜드의 초원은 점점 더 피폐해져갔다. 목초지에서 경작지 농업으로의 변화는 더욱 더 많은 노동력을 요구했다. 급속도로 증가하는 인구로 나라 안의 토지에 대한 필요성이 그토록 크지 않았더라면, 임대농민과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이용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

엄청나게 가난한 주민의 생존은 계속되는 감자 생산에 달려 있었다. 감자 역시 곡류처럼 썩기 쉬워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저장소에 보존할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감자의 수확에 어떤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재앙은 아일랜드가 통제할 수 없을 규모로 발생할 터인데, 이에 대해 영국 정부는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

부분적인 감자 수확의 실패는 아일랜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당국은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 다른 측면에서 필 경(Sir Robert Peel)의 구제조치는 즉각적이고 역량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는 성공적이었다.

……

필은 아일랜드의 식량 수출 금지조치를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훨씬 더 신중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영국 농부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수입된 곡물에 부과시키는 관세였다. 필은 그들이 일컫는 대로 곡물법(corn laws)을 폐기하기 위한 중대한 결정을 취했다. 농업보호책은 여러 해 동안 영국 정치사에서 뜨거운 논란이 되었으며, 토지를 지닌 계층과 사업가 간의 세력다툼의 상징이 되었다. …… 로드 존 러셀(Lord John Russel)이 이끄는 휘그당(the Whigs) 정부가 출현했다. 정치적 변화는 아일랜드에게는 흉조가 되었는데, 휘그당은 경제제도에 대해 현 시대의 신념들에 훨씬 더 융합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가 지적이고 현대적인 사람들의 신조가 되었던 시대로, 규제를 위한 경제법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익하다고 확신하던 때였다. 찰스 트리벨리언(Charles Trevelyan)은 재무부의 수장으로 구제사업을 통제하던 인물이었는데 이들의 생각에 크게 공감했고, 새로운 재무장관인 찰스 우드(Charles Wood) – 경제에 대한 불간섭을 확고한 신념으로 가진 – 와 뜻이 잘맞았다. 감자 수확이 또다시 실패하자 정부가 이번엔 어떤 것도 구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정을 즉시 내렸는데, 이는 식량의 공급이 사적인 사업으로 남겨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1846년에는 두 번째 감자 수확의 실패가 있었고, 이번에는 철저했다. 극심한 재앙의 전망이 있었지만 정부의 계획에는 어떠한 수정도 없었다. 구제는 공공사업으로 제한했다. 정부는 더 이상 가격을 어중간하게 충족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시세에 따라 정부가 완전히 부담을 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물론 아일랜드 지주들로 하여금 가격을 떠맡도록 강압하는 것이었다. 전체적인 작업의 부담은 아일랜드 직업위원회(the Irish board of works)에 맡겨졌다. 겨울이 시작되었는데, 아마도 삶의 기억 속에서 가장 고달프고 긴 겨울이었을 것이다.

……

새해가 되자 정부는 실패를 시인해야 했는데 직업위원회는 하루에 거의 3만 파운드를 지출했으며, 관리들은 1만 15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1847년 1월 공공사업을 폐쇄하고 직접적인 구제를 확장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러한 결정이 영국 관리들에게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이었나를 깨달아야만 한다. 1834년 영제국의 구빈법 개혁(English poor-law reform)의 기본원칙은 구제가 오로지 작업장에서만 주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규칙으로부터 어떠한 이탈도 생계수단보다 훨씬 더 빠르게 증가하는 인구에 기인한다는 정통적인 신념이었다. 우선 급식소를 설립하여 죽을 무료로 배급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

1847년 2월 아일랜드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폭풍이 불었고 나라는 폭설로 뒤덮였다. 굶는 사람들이 마을에 군집해 있었고, 정부가 폐쇄하기로 한 공공작업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전염성 열병이 아일랜드 전역에 도깨비불처럼 번져나갔다.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는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는데, 거기에는 영양 미달의 사람들이 매서운 겨울 추위에 노출되고, 죽 급식소(soup kitchen)와 작업장에서 전염되며, 위험한 공공작업을 수행하는 등 수많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

1847년의 암담함은 전혀 기근의 끝처럼 보이지 않았다. 감자마름병은 그해 가을에 좀 누그러졌지만 재발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다음해인 1848년 완전한 독성을 지닌 채 돌아왔다. …… 발생한 재앙에 대해 책임을 일단 받아들여야 했던 영국의 장관들은 무정하고 인색하며 독선적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성질은 가령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가 너무나 혐오스럽게 생각했던 바로 그 특성들이며, 그들은 아일랜드 빈민층과 마찬가지로 영국 빈민층에게도 이러한 성질을 많이 드러내보였다.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 웅진싱크빅 / 1998.01.01

 

아일랜드는 대브리튼 섬 왼편에  있는 섬이다. 전통적으로 카톨릭계가 강한 이 지역은  이웃 강국인 영국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수세기 동안 공식적인 독립 왕국을 유지했다.

17세기 말엽 전체 인구의 10%에  불과한 영국 국교도 분파가 영국의 지원에 힘입어 정치 조직을 장악하고 아일랜드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면서, 아일랜드의 절대 다수  카톨릭계는 기본적인 시민권까지 박탈당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일랜드들은 카톨릭 교도들의  권익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화하는데, 그것은 영국의 무력 개입의 빌미가 된다.

영국은 아일랜드의 전국민적인  저항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하고, 1801년에는 통일  법안을 근거로 아일랜드를 합병한다. 그리하여 대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 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라는 국가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아일랜드 전체 지역이 영국의 영토였는데, 이 국호는 100년 이상 지속된다.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의 지배하에서  가혹한 박해와 차별을 당해야 했는데, 비극적인  사건 하나가 피지배 민족으로서 아일랜드에서는 1845년에서 51년까지 7년 연속 감자 농사가 흉작을 거듭했다. 주식량원인 감자가  바닥나면서 아일랜드인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극심한 대기근에 빠져들었다. 그기간 동안 전체 800만 명 중에서 100만 명 이상이 아사했고  300만 명 정도가 아메리카 등지로 떠나 버려 인구가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자였던 영국은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 더러는  아일랜드의 비극을 돈벌이 기회로 보고 곡물을 비싼 가격에 파는 데 몰두했다. 이러한  영국의 야속한 처사가 아일랜드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남겼음은 물론이다(영국 정부는 1997년 6월,  즉 150년 후에야 대기근을 방치했던 과거를 처음으로 공식 사과하였다).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 유시민 / 푸른나무 / 1992.06.30

 

토마스 로버트 맬더스의 <인구의 원리에 관한 에세이>, 즉 <인구론>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타났다. 이 책은 ‘고드윈과 콩도르세, 기타 저술가의 연구를 논평하면서 장래의 사회 개선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함’이라는 긴 부제를 달고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빈곤은 인구법칙이 내린 불가피한 운명이다

<인구론>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야말로 단순명백한 것이었다. 맬더스는 고드윈과 콩도르세의 고결하지만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사회개혁론을 비판하면서, 인간 사회는 언제나 필연적으로 부유한 소수와 빈곤한 대중으로 나뉠 수 밖에 없으며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구제하려는 모든 고매한 노력도 결국은 허사가 되거나 오히려 유해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구론>의 곳곳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다.

이기심이 아닌 박애정신이 삶의 동기이고, 강압이 아닌 이성에 의해 모든 사악한 성향이 바로잡혀지는…사회라 할지라도, 인간이 원래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적인 법칙 때문에 머지 않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세계와 본질적으로 같은 사회로 타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이것은 자산계급과 노동계급으로 구분되고 이기심이 거대한 기계의 동력인 그런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 재능의 모든 고상한 업적과 좀 더 섬세하고 세련된 감성, 야만과 문명을 구별해 주는 모든 것은 재산권의 확립과 엄격한 이기심의 원리 덕분이다…이 <인구론>의 의의가 오로지 유산계급과 노동계급의 필연성을 증명해 내는 데 있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맬더스는 이기심을 원동력으로 하는 스미드의 자유방임시장 원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노동의 분업화와 특수화에 의한 생산력 발전이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구제해 줄 것이라는 스미드의 희망을 그는 냉정하게 부정했다. 그래서 스미드의 경제학은 ‘희망의 과학’이었지만 맬더스의 경제학은 ‘음울한 과학’이 되었다. 그러나 맬더스가 아무 논리적,실증적 근거도 없이 계급적 불평등을 옹호하고 대중에게 가난이라는 숙명을 선고한 것은 아니다. 인류의 암울한 미래에 대한 그의 호언장담은 이른바 ‘인구법칙’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었다.
인구법칙은 중학교 수준의 사회교과서에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맬더스 자신의 설명은 이러했다.

세계 인구의 총수를 1억이라고 가정할 때, 인구는 1, 2, 4, 8, 16, 32, 64, 128, 256의 비율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1,2, 3, 4, 5, 6, 7, 8, 9의 비율로 증가한다. 이렇게 될 경우 2백년 후 인구와 식량의 비율은 259:9, 3백년 후에는 4096:13, 그리고 2천년 후에는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커진다.

이것은 무서운 이론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식량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만약 어떤 시점, 어떤 사회에서 인구가 식량 생산에 비해 현저하게 증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물론 과잉인구가 줄어들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 일이 진행될 것인가? 맬더스의 대답은 명확하다. 전쟁과 살육, 자연재해와 기근, 전염병… 실로 끔찍하고 절망적인 과학이다. 맬더스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종족보존의 본능, 즉 성적욕망의 충족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풍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야 한다. 인간의 성욕이 포기될 수 없는 본능으로 남아 있는 한 대중의 빈곤과 비참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맬더스의 인구이론이 당시 영국 의회와 지식인들에게 폭탄 같은 충격을 안겨 준 것은, 이것이 막연한 예언이 아니라 과거에 여러 번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을 잘 설명해 주는 현실적인 이론이기 때문이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아프리카 내륙 국가 등에서 맬더스의 인구법칙은 아직도 위력을 떨치고 있다. TV를 통해 홍수나 가뭄, 전염병과 병충해의 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신음하고 죽어가는 이 지역의 어린이들 모습을 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맬더스의 음울한 과학을 떠올리게 된다.
맬더스 시대에 있었던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아일랜드 대기근’이다. 영연방의 일부인 아일랜드 인구는 1780년부터 급속하게 늘어나 1840년경에는 두 배에 가까운 8백만 명이 되었다. 이같은 인구 증가는 아일랜드 지역의 감자 생산량이 급속히 증가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1845년부터 내리 3년에 걸쳐 아일랜드의 감자밭이 폐허로 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발생한 역병균이 감자를 전멸시켜 버린 것이다. 맬더스가 예언한 최악의 사태는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듯 갑자기 아일랜드를 덮쳤다. 영국 정부로서는 아일랜드 사태가 하나의 골칫거리였다. 곡물 수입을 자유화했으나 가난한 아일랜드 농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구호양곡을 지급하는 것은 사기업의 이익을 침해하여 자유시장의 거래를 마비시킬 ‘위럼성’ 때문에 거부되었고, 공공 구제사업 역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취소되었다. 이렇게 되자 아일랜드의 과잉인구는 모두 굻어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아니면 최후의 탈출구인 아메리카로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넜다. 이리하여 아일랜드의 문제는 — 당시 재무차관이었던 트리벨리언의 표현을 빌면 —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므로 전능하신 하느님 스스로 손을 써,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또 짐작도 할 수 없었으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치료해 주셨다.”

 


<관련 그림>

 

– 감자 마름병에 걸린 감자

 

 

– 영국과 아일랜드의 인구 지수 비교. ‘The vanishing Irish: Ireland’s population from the Great Famine to the Great War’ by Timothy Guinnane (HI 5.2, Summer 1997, p. 33).

 

 

– 아일랜드 던가반(Dungarvan)에서의 폭동 (The Pictorial Times, 1846).

 

 

– ‘성 패트릭의 날’ 행진. 미국을 녹색으로 물들이다. 매년 3월 17일은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했던 성 패트릭을 기리는 날이다. 성스럽게 들리는 날이지만, 사실은 할로윈만큼 떠들썩한 축제의 날이다.

 


<관련 자료 및 참고 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Famine_(Ireland)

위키백과 : 감자 역병균

네이버 지식백과(지구과학산책) : 아일랜드 문명과 기후

https://en.wikipedia.org/wiki/Race_and_ethnicity_in_the_United_States#Ancestry

http://cafe.naver.com/booheong/19591

2016-08-16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2016-05-16  곡물법 폐지, 자유무역과 양당정치를 낳다

[이 주일의 역사] 감자 대기근(1845.9.9) 外 

2008-03-20  ‘흰 검둥이’들의 힘, 미국을 녹색으로 물들이다

 밸린그래스 사건

내가 아일랜드를 응원하는 이유

아일랜드 대기근 (1845년 ~ 18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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