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불황 (1873년 ~ 1896년)

1929년 10월 월가의 주식 대폭락으로 시작된 1930년대 경기 침체를 현재 ‘대공황(Great Depression)’이라고 하지만 원조는 따로 있다. 1873년의 공황이 바로 그것이다. 1930년대를 강타한 대공황 이전까지 ‘대공황’이라고 하면 1873년 공황을 의미했다. 1873년의 공황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장기불황(Long Depression)’ 또는 ‘대불황’이다.

 

1873년 대불황은 인류가 본격적으로 경험한 전 지구적인 장기불황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최초의 장기적이고 세계적인 전쟁을 낳았다. 불황의 타개책을 대외팽창에서 찾은 유럽과 미국은 식민지 경쟁을 펼쳐 새로운 시장을 열고 경제 회생에도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으나 결국은 전쟁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떠오르던 독일과 지는 해인 영국 간 식민지 쟁탈전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폴라니(Polanyi)는 제1차 세계대전을 19세기 유형, 즉 세력 균형 체제가 작동을 멈추는 바람에 터져나오게 된 강대국들 간의 갈등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글로벌 철도 투자 열풍과 1860년대 중반의 글로벌적으로 과잉된 생산 지표가 악화되자 악명 높은 ‘1873년의 공황’은 20여년간의 생산성 저하, 물가의 하락 및 글로벌 포퓰리즘과 보호주의의 등장을 예고했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873

 

1873~1896년 대공황이 ‘과도한’ 경쟁과 ‘비합리적으로’ 낮은 이윤 때문에 풀이 죽은, 무엇보다 사업가들의 병이었다면, 1896~1914년의 ‘좋은 시절(벨에포크)’은 무엇보다 이런 병에서 회복되어 기업 간 경쟁을 누르고, 결국 수익성을 상승시켰다. 그러나 교역, 생산, 그리고 노동계급 소득의 팽창에 관해서 상승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순간은 소수에게만 화려했고, 그 소수에게조차 이는 단명했다. 몇 년 안에 “군사적 분란”이 파국으로 전환되었고, 19세기 자본주의는 결코 그로부터 회복되지 못했다.

 

1873년 대불황, 장기불황의 성격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대공황보다 심각했다”는 평가 반대편에 “생산과 소비가 성장했기에 공황에 끼지도 못한다”는 시각이 상존한다.

대불황의 정도를 단순히 거시경제 지표상의 여러 추정치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그것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불황을 어떻게 느끼고 인식하였는가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대불황(Great Depression)’이라는 말은 그 시대에 쓰여졌던 표현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불황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홉스봄(Eric Hobsbawm)이 말한 ‘자본의 시대(1848~1875)’가 끝나고 ‘제국의 시대(1875~1914)’로의 시작 즈음에 1873년의 대불황이 있다. 그런데 어떤 이점이 중심부 국가로 하여금 제국주의적 팽창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여기서 홉스봄은 식민지 확장에 대한 보다 설득력있는 일반적인 동기는 시장의 확보일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대공황의 ‘과잉생산’은 수출을 지향함으로써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제국주의는 주로 유럽 강대국들이 정치적 보호 장치가 없는 시장으로 자신들의 무역을 확장할 특권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이러한 수출의 압력 뿐만 아니라 열띤 제조업 경쟁이 시작되면서 이들 강대국들 사이에 원자재 공급을 둘러싼 식민지 쟁탈전까지도 포함한다.

 

1873년 이래 20여 년간 지속된 ‘대불황’은 이전의 불황에 비해 몇 가지 새로운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그것은 종래의 경기 순환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오랫동안 진행되었으며 영국 · 프랑스 · 독일 · 미국 등 선진 산업 국가들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그뿐만 아니라 대불황은 화학, 전기, 석유 및 철강 분야의 기술 혁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2차 산업혁명과 비슷한 시기에 맞물려 전개되었다.

 

대불황은 2차 산업혁명기에 나타난 부문간 불균형을 해소하는 일종의 구조조정의 시기였으며, 그 과정에서 자본 집중과 기업 합동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낸 소수의 거대 기업들이 시장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주로 독일이나 미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영국에서는 오히려 그 양상이 뒤쳐진 것처럼 보인다.

 

영국은 19세기 말까지 세계정부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1870년대부터 영국은 유럽의 세력균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곧이어 전지구적 세력균형에 대한 통제력 또한 상실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세계권력에 대한 독일과 미국의 도전은 서로를 강화하였고, 영국의 국가간체계 통치 능력을 손상시켰으며, 결국 전례 없는 폭력과 광포함이 난무한 상태에서 세계적 우세를 둘러싼 새로운 투쟁이 벌어졌다.

 

아래의 그림은 브로델(Fernand Braudel)의 장기순환을 보여준다. 대불황의 시기 즈음에 영국 체제의 실물적 팽창 단계에서 금융적 팽창 단계로의 변화로 보고 있다.

 

루빈스타인(William D. Rubinstein)은 영국의 19세기 후반 이래 공업의 비중이 그 이전보다 더 떨어진 것에 대해서, 산업 쇠퇴를 경제 쇠퇴와 동일시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19세기 후반에 영국의 산업은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런던 시티를 중심으로 하는 상업-금융 부문은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의 구조적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 경기침체와 소득불평등 심화로 세계 경제가 만성적 수요부진에 빠진 상태)와 가장 비슷한 역사적 사례로 1873년 ~ 1896년의 ‘대불황’이 대표된다. 당시 영국체제에 독일과 미국의 부상이 현재의 미국체제에 중국의 부상이 비슷하기도 하다.

 

2008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2010년에 현재의 경제 상황을 역사상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위기라고 강조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경기침체는 흔하지만, 불황은 드물다.”면서 “지금까지 불황이라고 할 만한 역사적 사례는 1873년 공황 이후의 장기 불황과 1929~1931년 금융위기 이후 이어진 대공황뿐”이라고 밝혔다. 이어 “두 불황 모두 경기가 지속적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중간에 나타난 경기회복세가 불황의 타격을 극복할 정도로 충분하지 않아 결국 더블딥에 빠지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2010년 당시의 경제 상황을 세 번째 불황의 초기 단계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1929년의 대공황보다는 1873년과 닮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각국 정부는 대규모 지출을 기반으로 한 정책을 내세워 지난해 여름 경기침체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면서 “그러나 훗날 역사학자들은 지금의 경기회복기가 제3의 불황의 끝이라고 기록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2010년 당시 일본의 경제 관료 출신인 ‘미스터 엔’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사카키바라 야오야마 카쿠인대 교수도 “글로벌 경제, 1873년식 대공황 진입 중”이라며 같은 견해를 언급했다.

 

아래의 그림처럼 콘드라티예프(Kondratiev) 파동으로도 대불황의 시기를 관찰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 1873년에서 1896년의 시기는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놀라울 마치 이탈한 것처럼 보였다. 위기와 붐을 거치면서, 가격은 불균등하고 산발적이지만 무시무시하게 하락하였는데, 평균 모든 상품 가격의 1/3 가량이 하락했다. 이는 인간이 기억하는 가장 격심한 디플레이션이었다. 이자율 또한 하락했는데, 그 수준이 너무나 떨어져서 경제학자들은 자본이 자유재 수준으로 넘쳐 날 가능성을 고려해보아야 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윤은 위축되었고, 당시 주기적 경기침체라고 인식된 것이 무한히 연장된 듯 보였다. 경제체계는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았다.(Landes 1969: 231)

사실, 경제체계는 “무너지고” 있지 않았고, 대공황은 당대 사람들의 생각처럼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놀라울 만치 이탈하지도 않았다. 생산과 투자는 당시 새롭게 산업화하는 나라들(가장 두드러진 것은 독일과 미국)에서뿐 아니라 영국에서도 계속해서 성장하였다. 그 성장의 정도가 대단했기 때문에 이후 한 역사가는 1873~1896년 대공황이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할 정도였다(Saul 1969). 그렇지만 생산과 투자가 계속 팽창하는 시기에 대공황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반대로, 대공황은 신화가 아니었는데, 바로 영국과 세계경제 전체에서 생산과 무역이 너무나 빠르게 팽창하였고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어서, 이윤이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 특정화해서 말하자면, 19세기 중엽 세계무역의 대팽창은 앞선 체계적 축적 순환의 모든 실물적 팽창 단계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축적 행위자들에 대한 체계 전반에 걸친 경쟁 압력의 격화로 이어졌다. 영국 중심의 세계경제를 가로질러 점점 더 많은 장소에서 점점 더 많은 기업들이 투입물의 획득과 산출물의 처분에서 서로의 길에 끼어들었고, 그 결과 서로서로 이전의 ‘독점들’ – 즉 특정 시장 틈새에 대한 그들의 다소 배타적인 통제 – 을 파괴하였다.

 

독점에서 경쟁으로의 전환이 아마도 유럽 산업 · 상업 기업들의 분위기를 규정한 단일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경제 성장은 이제 경제 투쟁이기도 했는데, 이 투쟁은 강자를 약자와 분리시키고, 일부를 낙담시키는 대신 다른 일부의 힘이 넘쳐나게 만들고, 구 민족들의 희생의 대가로 …… 신 민족들에 우호적 조건을 만들어 내는 데 기여했다. 무한한 진보의 미래라는 낙관주의는 불확실성과 고통감에 길을 내주었다.(Landes 1969: 240)

이런 점에서 보면, 1873~1896년 대공황은 결코 역사적 경험으로부터의 이탈은 아니었다. 우리가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앞선 모든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실물적 팽창은 경쟁적 투쟁의 격화로 끝맺었다. 확실히, 19세기 중엽 세계무역 팽창의 종료점을 알린 30여 년간의 경쟁적 투쟁의 격화는, 앞선 경우의 시기에 그랬듯이, 공공연한 국가 간 전쟁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이런 지체는 세번째(영국) 체계적 축적 순환을 앞선 두 번의 체계적 축적 순환과 구분하는 두 가지 중요한 상황과 연관된다. 하나는 영국 통치체제 및 축적체제의 “제국주의”와 연관되고, 다른 하나는 “자유무역주의”와 연관된다.

……

더욱이, 앞선 모든 체계적 축적 순환에서와 마찬가지로, 실물적 팽창국면이 초래한 경쟁 압력의 첨예화와 결합하여, 영국 자본가계급 측에서는 처음부터 교역과 생산으로부터 금융으로 주요한 교체가 진행되었다.

……

간단히 말하자면, 1873~1896년 대공황이 “과도한” 경쟁과 “비합리적으로” 낮은 이윤 때문에 풀이 죽은, 무엇보다 사업가들의 병이었다면, 1896~1914년의 “좋은 시절”은 무엇보다 이런 병에서 회복되어 기업 간 경쟁을 누르고, 결국 수익성을 상승시켰다. 그러나 교역, 생산, 그리고 노동계급 소득의 팽창에 관해서 상승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앞선 축적 순환의 종료 국면을 특징짓는 모든 경이적 순간과 마찬가지로, 이 순간은 소수에게만 화려했고, 그 소수에게조차 이는 단명했다. 몇 년 안에 “군사적 분란”이 파국으로 전환되었고, 19세기 자본주의는 결코 그로부터 회복되지 못했다.

……

영국체제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근원적 문제는 자본가 간 경쟁의 격화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1890년대 중반의 가격 상승은 앞선 사반세기 이윤압박을 반전시킴으로써 유럽 부르주아지의 병을 치료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병보다 약이 더 문제임이 드러났다. 왜냐하면 상승기는 주로 유럽 열강들 사이의 군비 경쟁의 대대적 증폭에 기반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상승기는 1873~1896년 대공황의 첨예한 자본가 간 경쟁이 지양되었음을 보여 준 것이 아니라, 그 주요한 장소가 기업 간 관계의 영역에서 국가 간 영역으로 바뀌었음을 보여 주었다.

……

법인자본주의의 독일식 변종처럼 미국식 변종은 이런 영국 중심 세계시장경제의 전면적 팽창이 초래한 전세계적 경쟁 압력 격화에 대한 대응으로 전개되었다. 두 가지 변종이 모두 1873~1896년 대공황 과정에서 동시에 등장한 것은 역사적 우연이 아니다. 독일에서처럼 미국에서도 경쟁 압력이 격화되자 사업가, 정치가, 지식인들은 원자화한 단위들 사이의 무한 경쟁이 결코 사회적 안정도 그리고 실로 시장 효율도 가져오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

–  지오바니 아리기, 비벌리 J. 실버 / 최홍주 역 / 모티브북 / 2008.10.17

 

“증기선과 철도에 투입된 거액의 투자가 결실을 맺자 모든 대륙들이 열렸고, 곡물이 눈사태처럼 불만에 찬 유럽 위로 쏟아져 내렸다.”(칼 폴라니. 1957. 거대한 전환) 결과는 1873~1896년의 대공황이었고, 이것은 데이비드 란데스(David Landes)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기억하는 가장 맹렬한 디플레이션”이었다. 상품 가격의 폭락은 자본 수익률을 하락시켰다. 수익은 줄었고, 이자율은 경제학자들이 “자본이 자유재일 정도로 풍부할 가능성을 중요하게 다룰” 정도로 하락했다. 세기의 말엽에야 비로소 물가가 상승하고 그와 함께 수익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경기가 호전되자, 지난 시절의 침울함은 걷히고 사람들은 도취감에 사로잡혔다. “(덜컹거리는 무기 소리와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를 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다시 정상을 찾은 듯 보였다. 서유럽 전역에서 이 기간은 좋았던 옛 시절, 즉 에드워드 왕 시대, 아름다운 시대(벨에포크,La belle époque)로 여전히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이 운명의 변전의 밑바닥에는 열강의 새로운 대립 격화가 놓여 있었다. “덜컹거리는 무기 소리”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를 알리는 예고는 아니었지만, 영국의 패권 아래 조직된 세계 자본주의가 종말에 가까웠음을 보여주는 신호이기는 했다. 홉스봄의 말대로, “인플레이션이라는 경제적 태양이 만연한 경제적 안개 사이로 다시 한 번 나타났을 때, 그것이 비친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무엇보다 두 가지가 바뀐 상태였다. 영국 패권의 산업적 기반과 제국적 기반이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영국은 더 이상 세계의 공장이 아니었고, 유럽 국가들의 경쟁적인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해외 제국의 방어에 드는 비용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

약 반세기 동안 영국 자본재 산업의 독자성 증가는 영국 기업에 대한 경쟁 압력을 강화시키기는커녕 완화시켰다. 영국의 자본재는 전 세계의 정부와 기업체 사이에서 항상 수요가 많았다. 그리고 이 정부와 기업체는 자본재의 대금을 지불할 수단을 조달하거나 자본재를 구입하면서 진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영국에서 판매되는 일차 투입물의 생산을 증가시켰다.(Mathias, Peter. 1969. The first Industrial Nation, 298, 326~328) 이 두 경향의 결합은 세기 중반에 이르러 세계 무역과 산업의 대호황을 조성했는데, 대호황 동안에는 일차 투입물의 공급 팽창과 영국 제품에 대한 수요 팽창의 이익이 영국의 기술과 자본재의 전 세계적인 확산이 발생시켰던 유명무실한 경쟁자들의 증가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일시적인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채워지지 않은 수요가 점진적으로 충족되자 자본주의 기업들은 결국 차가운 경쟁의 바람에 완전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홉스붐의 표현처럼, “가격 경쟁이라는 윗돌과 점점 더 비싸고 기계화된 생산 시설이라는 아랫돌 사이에서 압착되어”) 이윤이 감소하자, 1850년대와 1860년대의 크게 흥청거리던 시절은 가고 1873~1896년의 대공황이 찾아왔다.

……

20세기의 법인 경제는 1873~1896년의 대공황의 자식이다. 백 년 전에 아담 스미스가 예견했던 대로, 무역 자유화의 과정에 내재하는 경쟁 압력의 증대는 이윤을 겨우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결과가 예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이윤을 위해, 그리고 이윤으로 사는 기업가들에게는 별로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경쟁이 격렬할수록 그들은 더 기를 쓰고 그것을 통제하려고 애썼다.

 


거대한 전환

–  칼 폴라니 / 홍기빈 역 / 길 / 2009.06.30

 

…… 비록 당시로서는 거의 인식되지 못했지만, 19세기를 지배했던 철학은 평화주의와 국제주의였다. …… 하지만 1870년대 이후로 들어서면 정서의 변화가 시작됨을 감지할 수 있다. 세계는 여전히 국제주의와 상호 의존을 신봉하고 있었지만 실제 행동은 이미 민족주의와 경제적 자급자족의 원리에 기반을 두게 되었다.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는 이제 민족주의적 자유주의로 발전하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보호주의와 제국주의의 경향을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독점주의적 보수주의의 경향을 뚜렷이 띠고 있었다.

……

그런데 급작스런 변화가 나타났고, 그것도 이번에는 모든 지도적 서양 국가들에 동시에 나타났다. 비록 독일이 영국의 국내적 발전을 되풀이하는 데에는 반세기의 시차가 있었지만 세계적 규모에서 벌어지는 국가 외부의 사건들이란 모든 무역 국가들에 똑같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외부적 사건들이란 국제무역의 양과 리듬이 증가한다든지 곡물 및 농업 원자재가 지구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운반되는 비용이 극도로 줄어들어 결국 토지가 전 지구적으로 유동화된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지각 변동은 유럽 농업 지대 수천만 명의 삶을 혼란으로 밀어넣었다. 그 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자유무역이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시장경제를 그 이상으로 팽창시키는 작업은 완전히 새로운 조건 속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이 새로운 조건을 규정한 것이 바로 ‘이중적 운동’이었다. 국제무역이라는 패턴은 이제 갈수록 빠른 속도로 전 지구로 확산되었지만, 동시에 시장의 전면적 활동을 가로막기 위해 계획된 각종의 보호주의적 제도들의 도입이 또한 전 지구에서 그 국제무역의 확산과 엇갈려 벌어지고 있었다. 1873~1886년의 농업 공황과 대불황은 경제의 자기 치유 능력이라는 것에 대한 신뢰를 근본부터 흔들어놓은 바 있다. 그 이후로 전형적인 시장경제 제도들의 도입은 그에 수반되는 각종 보호주의 조치들도 함께 도입될 때에만 벌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흐름을 더욱 강화시켰던 요인이 있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초 이후로 여러 민족들은 저마다 국민국가라는 정치적 단위로서 조직되었는데, 이 새로운 단위는 대외무역이나 통화 환율이 급작스럽게 변할 때마다 거기에 적응하기 위하여 지독한 혼란을 겪어야만 하는 성격의 조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경제의 확장에서 주된 도구의 역활을 했던 금본위제가 어떤 나라에서 채택되는 경우에는 동시에 사회 입법이라든가 수입 관세와 같은 당대의 전형적인 보호주의적 정책들이 항상 함께 도입되는 일이 생겨났다.

……

…… 이러한 보호주의적 제도들의 확산을 촉진했던 것은 바로 금본위제 자체였다. 금본위제가 요구하는 고정 환율제의 부담이 커질수록 이러한 보호주의적 제도들이 더욱 환영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로 관세, 공장법, 저극적인 식민지 정책 등은 안정된 통화 가치의 전제 조건이 되어버렸다.(영국은 월등한 산업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런 것이 필요 없었다. 이는 바로 이러한 원리가 사실임을 반증해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조치들이 전제 조건으로서 주어져 있지 않는 한 안심하고 시장경제라는 방법을 도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다 멀리 식민지 · 반식민지 지역에서처럼 보호주의적 조치들을 도입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러한 시장경제의 방법이 강제로 밀려들어올 경우에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었다.

……

1873~1886년의 공황과 1870년대의 농업의 어려움은 이러한 시장과 보호 장치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항구적으로 증가시켰다. 공황이 시작되던 무렵의 유럽은 자유무역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새로 성립된 독일 제국은 프랑스에 양국 사이의 최혜국 대우를 강제로 받아들이게 했고, 선철(銑鐵)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기로 약속했으며, 금본위제를 또한 도입했다. 하지만 공황이 끝날 무렵에는 독일도 보호 관세의 유혹에 굴복했고, 전반적인 카르텔 조직을 확립했으며, 전방위적 사회 보험 체제를 설립했고, 고강도의 식민 정책들을 추진하게 되었다. …… 미국은 독일제국보다 훨씬 더 높은 관세를 매기고 있었으며, 또 그 나름의 방식으로 독일 만큼이나 ‘집단주의적’이었다. 미국도 장거리 철도 건설에 대해 거액의 보조금을 주었으며 코끼리처럼 거대한 트러스트들이 형성되도록 발전시켰던 것이다.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역 / 코나투스 / 2007.04.13

 

……생물학적 구제도와 그 역학관계의 한계를 벗어난 새로운 산업경제는 유럽의 산업화보다 훨씬 더 불확실한 미지의 영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따라서 19세기 산업세계는 경제활동에 관한 새로운 원칙을경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호황과 그에 이은 불황이었다. 여러 국가들에서 똑같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더 많은 공장을 건설할수록 그 제품에 대한 세계적인 수요는 대폭적으로 감소했고, 결국 엄청난 재고를 처분하기 위해 가격은 하락하게 되었다. 경쟁자들이 임금의 절감을 통해 가격을 인하하면 수요는 더욱 감소했고, 그로 인해 ‘경기침체’가 발생하고 그 기간에 따라 ‘경제공황’으로까지 이어졌다. 첫 번째 경기침체는 1857년에 일어났지만 곧바로 경기가 회복되면서 1870년대 초반까지 호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1873년에 시작된 두 번째 경기침체는 1896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20년 동안 영국의 물가는 무려 40퍼센트까지 하락했다.

1870년대까지 대부분의 산업국가들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자유무역을 선호했고 저마다 그 혜택을 충분히 누렸다. 그러나 1873년의 경기침체는 그런 상황을 변화시켰다. 먼저 독일과 이탈리아가 자국의 면직물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올렸고 1890년대에는 프랑스, 미국, 러시아도 차례로 관세장벽을 구축했다. 오직 일본만이 서구와 맺은 불평등조약 때문에 관세를 올리지 못했다. 새로운 관세장벽의 여파로 영국은 미국과 유럽의 다른 산업국가들에 수출하던 물량이 감소했고, 그로 인해 상당한 국제수지 악화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영국 내부에서도 보호관세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만약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한창 산업화를 시도하던 당시의 세계는 아마도 1930년대 대공황과 잇따른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발생한 배타적인 무역장벽과 같은 심각한 위축기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세계자본주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숨 막혀 죽을 뻔했던 것이다.

오직 영국만이 아시아, 특히 인도와 중국에서의 아편거래로 엄청난 무역흑자를 올리면서 체제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이런 엄청난 무역흑자를 바탕으로 영국은 부채 – 특히 미국과 독일에 대한 부채 -를 안정시키면서 자본주의 발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실질적인 측면에서 중국의 아편수요와 영국의 아편무역은 1873년부터 1896년까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침체를 헤쳐나갈 수 있었던 한 가지 요인이었다.

비록 산업화를 시도하던 세계가 배타적인 무역장벽에 빠져들지는 않았지만 경기침체는 19세기 후반 그들 간의 경쟁과 긴장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 장의 후반부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런 상황은 ‘신제국주의’의 탄생을 이끌었고, 그 시기에 유럽국가들과 미국은 식민지제국의 확장에 필요한 세계의 더 많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가자 고전의 숲으로

–  한길사 편집부 / 한길사 / 2008.05.10

 

경제성장과 제국주의의 팽창

 

불황은 1890년대 중반부터 호황으로 전환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번영기가 도래했다. 당시는 오늘날까지 유럽 대륙에서 ‘아름다운 시대’라 불릴 정도로 풍요를 구가했다고 한다. 당시 경제학의 핵심적인 문제는 세계 경제력과 지도력의 재배치, 그리고 경기변동에 관한 것이었다. 즉 영국의 상대적인 하락과 미국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일의 약진에 관한 문제는 매우 중요했으며 이와 더불어 장기 그리고 단기의 변동에 관한 문제 또한 첨예한 관심사였다.

……

그렇다면 제국의 시대가 보여주는 세계경제를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홉스봄은 일곱가지로 이를 정리하고 있다. 첫째, 그것은 지리적으로 이전보다 아주 넓어진 기반을 가진 경제였다. 둘째, 세계경제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다원주의적이 되어갔다. 영국은 이제 유일하게 완전히 산업화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유일한 산업경제는 아니게 되었다. 미국, 독일, 프랑스가 급속한 산업화를 통해 영국의 위치에 도전하여, 국가경쟁의 시대를 열었다. 또 발전된 세계와 저발전된 세계 간의 관계는 1860년대의 그것보다 훨씬 다양했고 복잡했고 또 구조적이었다.

셋째, 앞선 시대들이 단순한 기술적 개량에 의해 산업적 발전을 이루었다면, 이 시대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술혁명의 시대라는 점이다. 그 시대는 진공청소기와 아스피린, 의약품의 과학화와 첨단기술의 가정화가 이루어진 시대였으며, 전화와 무선전신, 영화와 영상, 자동차와 비행기 등이 근대생활의 한 장면이 되어버린 시대였다. 이 가운데서도 자전거의 발명은 인간해방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넷째, 자본주의 기업들이 구조 면에서 그리고 작동 양식 면에서 이중적으로 전환했다는 점이다.즉 트러스트의 형성과 과학적 경영이 최초로 도입되었다. 다섯째, 소비제품 시장의 엄청난 변화였다. 대량소비가 등장했던 것이다. 여섯째, 경제의 제3부분 즉 공적이고 사적인 사무실, 가게 그리고 다른 서비스 부분에서의 노동의 절대적인 그리고 상대적인 성장으로 기록될 수 있다. 그리고 홉스봄이 특별히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뒤에 상세히 설명되겠지만, 제국의 시대 경제의 마지막 특성은 정치와 경제의 점증하는 수렴이었다.

당시 활황은 생산혁명에 의해 성장하는 세계의 산업부문과 새롭게 특화된 지역으로 성장했던 세계의 농업부문 간의 관계, 즉 국제적인 분업관계를 점차 구조화시켰다. 즉 세계는 점차 분명 ‘진보된’ 자들이 ‘후진적인’ 자들을 지배하는 그러한 세상, 요약하면 제국의 세계로 나아갔다.

……

홉스봄이 보기에 제국의 시대는 근대 세계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스스로를 황제로 불렀던 지배자들의 수가 최고에 도달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이 시대는 새로운 유형의 제국, 즉 식민지 제국의 시대였다. 자본주의 나라들의 경제적 · 군사적 우위를 공식적인 정복으로 전환시키려는 체계적인 시도는 주로 18세기 말과 19세기의 마지막 4분기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완전히 분할되었다. 1876년과 1915년 사이에 지구 땅의 약 4분의 1이 약 6개의 국가에 의해 식민지로 분배되고 재분배되었던 것이다.

홉스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나타난 제국주의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마르크스와 레닌이 강조했던 경제적 차원의 문제를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군사적 정복과 같은 오래된 유형의 특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지구적인 분화의 본질은 분명히 경제적 차원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주의의 경제적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홉스봄은 종속국의 입장에서 볼 때, 19세기 말에 시작된 제국의 시대는 1929~1933년 대공황까지 즉 1929년의 대공황 이후로 기초재의 가격이 수직적으로 하락하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제국주의에 일단 편입된 주변부의 경제는 전체적인 종속성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로부터 상당한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1914년까지 무역의 조건은 기초재 생산자들에게 훨씬 유리했다. 금융자본의 수출의 경우 주변부에 대한 투자보다는 중심부간의 투자가 훨씬 컸고 또 유리했다고 할 수 있다. 즉 홉스봄은 제국주의를 설명하는 데 무역에서의 이점, 금융자본의 중심부 투자라는 전통적인 분석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다른 어떤 이점이 중심부 국가로 하여금 제국주의적 팽창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여기서 홉스봄은 식민지 확장에 대한 보다 설득력있는 일반적인 동기는 시장의 확보일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대공황의 ‘과잉생산’은 수출을 지향함으로써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돌아본 자본의 시대

–  이영석 / 소나무 / 1999.12.22

 

1873년 이래 20여 년간 지속된 ‘대불황’은 이전의 불황에 비해 몇 가지 새로운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그것은 종래의 경기 순환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오랫동안 진행되었으며 영국 · 프랑스 · 독일 · 미국 등 선진 산업 국가들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그뿐만 아니라 대불황은 제강 · 전기 · 화학 분야의 기술 혁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2차 산업혁명과 비슷한 시기에 맞물려 전개되었다.

대불황기의 저물가 현상은 본질적으로는 기술 혁신에 따른 생산비 절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와 아울러 이 시기에 자본주의 국가들의 식민지와 반주변부에서 공산품 원료 및 식량 생산이 급증한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경제 공황이 대체로 기술혁신과 함께 진행되는 자본재 생산 부문과 소비재 부문 사이의 불균형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1873년 공황 이후 불황 국면이 오랫동안 이어진 것은 무엇보다도 2차 산업혁명기에 중공업에 대한 급속한 투자 확대가 두 부문 사이의 불균형을 심화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대불황은 2차 산업혁명기에 나타난 부문간 불균형을 해소하는 일종의 구조조정의 시기였으며, 그 과정에서 자본 집중과 기업 합동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낸 소수의 거대 기업들이 시장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주로 독일이나 미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영국에서는 오히려 그 양상이 뒤쳐진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대불황의 정도를 단순히 거시경제 지표상의 여러 추정치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그것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불황을 어떻게 느끼고 인식하였는가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대불황(Great Depression)’이라는 말은 그 시대에 쓰여졌던 표현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불황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

영국에서 대불황의 두드러진 특징은 저물가 현상이었다. …… 대불황기에 영국의 저물가 현상이 경쟁국인 독일이나 미국에 비해서 더 심했던 것은 값싼 외국산 농산물 및 단순 소비재의 수입이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국 정부는 자유 무역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내 산업을 보호하려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연구자들은 이 저물가 현상이야말로 영국 산업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그것이 영국 산업의 자본 수익률을 저하시켰다고 단정하였다. 대불황기에 영국의 자본 수출이 크게 늘어난 것도 이러한 저물가 현상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으며 그만큼 국내 산업의 기반은 약화되기 마련이었다.

……

이와 같이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대불황의 심각성을 이전보다는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대불황’이라는 표현을 빨리 폐기할수록 좋다는 것이다.

……

사실 상업-금융 자본 우세론은 산업 혁명의 단절성을 부정하는 근래의 수정론적 연구를 전제로 하면서도, 또 그것과 상호 보완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 해석은 19세기 후반에 산업 자본이 상업-금융 자본에 사실상 종속되어 있었음을 입증함으로써 산업 혁명에 관한 수정론적 연구에 설득력을 더하는 한편, 그것과 더불어 근대 영국 경제사의 전 체계에 대해서 재해석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상업-금융 자본 우세론은 특히 루빈스타인(Rubinstein)의 계량적 연구들에 크게 힘입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주로 그의 연구를 개략하려고 한다.

……

루빈스타인의 주장에 따르면, 19세기에 산업 자본 대 상업-금융 자본, 즉 중간 계급의 2분 구조와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자료의 모든 결과들은 부의 측면에서 상업-금융 자본(런던)이 산업 자본(북부)을 압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세기 중엽 영국 경제의 두드러진 특징은 ‘세계의 공장’이 아니라 ‘세계의 어음 교환소(clearing house of the world)’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경제사가들은 19세기에 공업이 번창한 지역에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영국 경제사가 공업과 산업 자본가들에 의해 움직였다고 하는, 무의식적이라고 할 만큼 뿌리 깊은 통념”이 퍼져 있다. 이러한 오해는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루빈스타인은 조심스럽게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상업-금융 자본 우세론에 입각할 경우 지난 200여 년 동안 영국 경제사의 흐름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우선 루빈스타인은 영국이 농업 경제에서 곧바로 상업 경제로 이행하였다는 가정을 내세운다. 18세기 중엽에 영국은 이미 3분제에 기초를 둔 효율적인 농업 부문과 광범한 해외 제국을 겸비한, 번영하는 상업 경제로 진입하였다. 18세기 후반 이래의 인구 증가기에 공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졌지만, 그럼에도 경제의 무게 중심은 여전히 상업-금융 부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공장제와 산업 자본주의는 ‘산업 혁명’ 또는 ‘세계의 공장’이라는 언어적 외피를 통하여 과대 포장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루빈스타인은 19세기 후반 이래 공업의 비중이 그 이전보다 더 떨어진 것에 대해서 기업가 쇠퇴론이나 문화적 해석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그는 산업 쇠퇴를 경제 쇠퇴와 동일시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19세기 후반에 영국의 산업은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시티를 중심으로 하는 상업-금융 부문은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국제 금융 중심지로서 영국의 위상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그 위상에 변화가 있었으나, 그것은 오히려 전쟁이라는 외부 요인 때문이었다. 루빈스타인에 따르면 이 시기에 영국의 기업가들이 공업의 비중을 떨어뜨리고 상업-금융에 더욱 더 치중한 것은 새로운 기회에 현명하게 대응했음을 뜻한다.

……

영국 경제의 쇠퇴에 관한 여러 해석들은 근대 영국 경제사에서 특히, 자본의 역활과 그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다. 그러나 기업가 실패설, 제도론적 관점, 문화적 해석, 상업·금융 자본 우세론 등을 둘러싸고 광범한 학문적 논의가 있었음에도, 영국 경제의 쇠퇴 문제는 아직도 미해결된 채로 남아 있다.

 


지식역사 – 피터 드러커의 역사관

–  이재규 / 한국경제신문사 / 2009.11.20

 

1873년의 공황은 그해 6월 증권시장의 붕괴와 9월의 뉴욕 금융공황으로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시작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20년까지 50년간은 대표적인 콘드라티예프의 장기침체 기간이었다.

하지만 1873년의 공황은 국가마다 사정이 달랐다. 1873년 비엔나 증권시장의 치명적 붕괴로 인해 당시의 오스트리아 정권은 영원히 종말을 맞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장기침체기를 맞았지만, 미국과 독일에서는 장기간의 산업침체는 일어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 기간 동안 새로 등장한 기술산업들, 즉 철강, 화학, 전기, 전화, 그리고 자동차 기술이 철도건설, 석탄채굴, 섬유산업과 같은 오래된 산업의 침체를 상쇄할 만큼 충분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장기간의 산업 침체기에 돌입해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미국과 독일에서 실제로 일어난 현상은 콘드라티예프 주기와 일치하지 않으며 영국과 프랑스와는 패턴이 다르다는 사실을 1939년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 1883~1950)가 밝혀냈다. 미국과 독일도 불황의 초기에는 그 충격이 매우 컸다. 그러나 5년 후에는 불황으로부터 벗어났고, 다시 빠르게 성장을 했다.

 


슈퍼 자본주의

–  로버트 라이시 / 형선호 역 / 김영사 / 2008.05.06

 

그에 따라 생산성은 급증했다. 1800년대 초반에 전형적인 미국인 근로자는 (주로 농사를 짓고, 벌채를 하고, 고기를 잡고, 수공예품을 만들면서) 기껏해야 1년에 0.3퍼센트밖에 생산을 늘리지 못했다. 그것이 같은 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에는 6배의 비율로 높아졌다. 생산량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철 생산은 몇 년만에 2배로 늘었고 철강 생산은 20배나 급증했다. 철도와 전신의 네트워크도 비슷한 속도로 확대되었다. 빠르고 정기적이고 신뢰성이 있는 통신과 운송이 미국의 구석구석에서 원자재를 실어다 공장에 내려놓았고, 공장들은 도매상과 소매상을 통해 완제품을 전국에 풀어놓았다.

이 같은 규모의 경제적 혁명은 필연적으로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 변화를 초래했다.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면서 1873년 미국과 유럽을 뒤흔든 경기 불황을 유발했다. 불황은 1893년 여름에 다시 또 수많은 농부들을 괴롭히고, 은행들의 문을 닫게 만들고, 미국의 비숙련 도시 근로자 가운데 4분의 1 이상을 실직자로 만들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점점 더 사회주의 선풍이 일어나며 자본주의의 임박한 몰락을 예고했다. 동부의 은행가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던 서부의 점증하는 대중 정치인들은 통화를 금에서 은으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금보다 은이 훨씬 더 많은 상황에서, 그것은 통화 가치를 부풀리고 그럼으로써 채무를 줄일 것이었다. 대서양 양쪽의 제조업자들은 외제품의 수입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더 높은 관세를 요구했다. (다만 제조업의 앞선 기술로 자유무역의 최대 수혜자였던 영국 만이 관세 인상을 거부했는데, 그 결과 영국인들은 스스로 말하는 독일과 미국의 ‘경제적 침략’을 당했다.)

……

미국과 그 밖의 다른 산업 국가들이 시장을 찾아 세계의 구석구석을 뒤질 때 ‘제국주의’라는 말이 등장했다. 테디 루스벨트(미국의 26대 대통령)는 중남미에 미국의 제국적 운명이 있다고 주장했다. 미 국무부의 어떤 관리는 1900년 “영토 확장은 상거래 확대의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영국과 독일은 자신들의 경제적인 힘을 자국의 세계적인 영향력과 동일시했다. 영국의 경제학자 홉슨(J. A. Hobson)은 그와 같은 경쟁이 초래할 논리적 귀결을 음울하게 예측했다. 그는 사업가들이 국내 시장을 모두 소진하면 전쟁을 선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래서 홉슨은 30년 후에 존 M. 케인스가 그랬듯이, 선진국들이 더 많은 시민들을 더 부자로 만들어 제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내수시장을 키우도록 촉구했다. “소득분배가 과잉 저축을 유발할 정도가 되지 않을 때는 자본과 노동의 상시적인 조달이 국내에서 이루어진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홉슨이 우려했던 전쟁은 충분히 많은 시민들이 상당한 정도의 자국 제품을 살 능력을 갖추기 전에 터지고 말았다.

 


세계화?

–  토머스 슈뢰터 / 유동환 역 / 푸른나무 / 2007.12.12

 

1873년 자본주의 최초의 세계 공황이 발생해 1890년대까지 ‘대불황’이 계속되었다. 영국의 모델을 따라 유럽 각국이 산업화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갖추었으나, 늘어난 생산량만큼 소비 수요가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자 독일 등 후발 산업국가를 시작으로 각국은 외국 상품의 침투를 막아 자국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인상하고 수입 금지 등의 무역 장벽을 구축했다. 새로운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독점자본이 형성되고 본격적인 식민지 진출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오토 바우어는 “(국가가) 자본 소유주라는 측면에서 계획 경제는 훨씬 빠르게 발전하며, 인플레이션 정책이나 보호 경제 정책 등을 써서 실업도 빨리 막을 수 있다. 또한 정부는 가차 없이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사회보장비용 같은) ‘사회적 비용’을 삭감하여 이윤을 회복할 수 있다. 게다가 실업자를 강제노동에 동원해서 공공사업을 추진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처럼 제국주의 경쟁 속에서 유럽 각국 정부가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 개입하면서, 사회의 자율성이 제한되어 온 유럽은 전체주의적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  황경식 / 삼성경제연구소 / 2001.09.29

 

스미스의 낙관과는 달리 현실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나타난 시장의 실패(자유방임 자본주의의 결함)는 빈곤만이 아니었다. 주기적 불황과 독점화도 나타났다. 영국에서 1825년에 최초로 불황이 나타난 이후 약 10년을 주기로 어김없이 불황이 나타났으며 회를 거듭할수록 불황의 정도가 심해져 1873년에 시작된 불황은 1896년까지 2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계속되었다. 이 대불황기를 계기로 자유방임주의는 퇴색하기 시작하고 개입주의 시대가 시작하였고, 또 보호무역주의가 다시 등장했으며 여기에 무력을 이용한 대외팽창정책이 결합하여 제국주의 시대가 열려 끝내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이어졌다.

이 불황기에 독점화가 크게 진행되었다. 스미스도 독점의 폐해를 중시하였으나 스미스가 보았던 독점(정확하게 말하면 독점과 과점)은 정부가 독점적 영업권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독점(정부에 의한 독점)이었지 자본의 집중으로 인하여 시장에서 저절로 형성된 독점(시장에 의한 독점)은 아니었다. 구미에서 정부에 의한 독점은 고전적 자유주의 등장과 함께 19세기에 대부분 소멸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시장에 의한 독점이 19세기 후반부터 각국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가격경쟁에서 유리한 대기업들에 의해 중소기업들이 시장에서 쫓겨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1873년부터 시작된 장기간의 불황기에 많은 중소기업들이 도산하면서 독점화가 크게 진행되었다.

 


화폐경제학

–  밀턴 프리드먼 / 김병주 역 / 한국경제신문사 / 2009.11.01

 

1873년의 화폐주조법에서 은본위 달러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 것이 미국의 복본위제도의 법적 지위를 종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만일 그 운명적 구절이 1873년의 법안에서 생략되지 않았더라면, 1879년 본위제도의 재개는 금이 아닌 은을 기준으로 되었을 것이 거의 틀림없다. 따라서 은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은 ‘1873년의 범죄’로 보였다.

……

‘1873년의 범죄’를 다루는 재판이 열렸다면, 유죄 판결이 적절하였을지 아닐지의 문제와는 별도로 역사라는 법정에서의 유죄 판결은 적절한 것이다. 그 운명의 글귀를 생략한 것이 그 이후 미국은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세계의 화폐 역사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표현이 다소 과장되었지만 이 문제의 중요성은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화폐본위제도, 즉 미국에서는 실제로 금본위제도와 은본위제도 사이에 오락가락 교체함을 의미했던 금 · 은 복본위제도에 있었다. 1873년의 법은 금본위제도에 주사위를 던졌기 때문에 중요성을 갖게 된다. 더구나 비록 종래의 지배적 견해는 “1873년의 법안은 타당한 일이었다”는 로린의 말을 따르지만(<1886>, 1895, p.93), 나의 견해는 그 반대로 이 법안이 매우 불행한 결과를 가져다준 실책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1896년이 아닌 1873년에 대한 판단이라고 덧붙이고자 한다. 1896년에는 그 폐해를 구제하기에는 너무 늦은 때였다. 브라이언은 말을 도둑 맞은 이후에 마구간을 고치려고 했던 것이다.

 


화폐전쟁 1

–  쑹훙빙 / 차혜정 역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07.28

 

1872년 겨울, 국제 금융재벌들은 어니스트 새드(Ernest Seyd)를 미국으로 파견했다. 그는 1873년 고위 관리들을 돈으로 매수해 ‘1873년의 악법’이라 불리는 ‘화폐주조법’이 통과되도록 힘썼으며, 이 법 전문의 초안을 직접 맡기도 했다. 미국은 이 법안에 따라 은화를 화폐유통에서 배제하고 금화를 유일한 기축 화폐로 삼았다.

……

은화를 폐지해 국제 화폐 유통 분야에 영향을 미치도록 한 것은 국제 금융재벌들이 세계의 화폐 공급량에 대한 절대적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점점 많아지는 은광의 발굴에 비해 금광의 채굴량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세계의 금광 채굴을 완전히 장악한 국제 금융재벌들은 당연히 통제하기 어려운 은화 때문에 세계 금융에서 차지한 자신들의 패권적 지위가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따라서 은은 1871년부터 독일,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폐지되어 각국 화폐 유통량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이로 말미암아 유럽에서는 20년이나 지속되는 심각한 경제 불황이 초래되었다.

미국에서는 ‘긴축법안’과 ‘화폐주조법’이 1873~1879년 경제 대불황을 직접 촉발했다. 3년 동안 미국의 실업률은 30%로 치솟았다. 미국인들은 링컨의 지폐와 은화를 연동하는 시대로 돌아가자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백은위원회(US Silver Commission)와 그린백당(Greenback Party)을 조직해, 전국적으로 은화와 금화를 병행하는 제도의 회복과 국민의 환영을 받는 링컨 지폐의 재발행을 요구했다.

……

미국에서 은이 합법적 화폐로 인정받은 것은 1792년에 ‘1792년 화폐주조법’을 제정해 달러의 법적 지위를 확정하면서부터다. 1달러는 순은 24.1그램을 포함하며 금과 은의 액면가는 1대15였다. 달러는 미국 화폐로서 가장 기본적인 도량형인 은을 본위로 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금 · 은 화폐 병행제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1873년 2월, ‘1873년 화폐주조법’이 제정되면서 유럽 로스차일드 가의 압박 아래 화폐로서 은의 지위를 폐지하고 단일 금본위제를 시행했다. 그래서 미국도 이에 따른 것이다.

 


모건과 록펠러 (미국 산업사는 재벌의 역사)

–  홍익희 / 홍익인간 / 2012.07.23

 

대륙횡단철도는 빠른 시간에 위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이 끝나자 산업이 번창했다. 특히 군수품 생산이 북부 산업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북부에 강한 경제력과 정치력이 형성되었다. 땅에 매장된 철, 석탄, 석유, 금, 은 등 방대한 천연자원 또한 활발히 채굴되었다. 1869년 대륙횡단철도 이후 1871년 대륙 내 전신이 실용화 되었다. 이로써 산업계는 원료 · 시장 · 통신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밀려드는 이주자들로 값싼 노동력이 계속 제공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뒤에는 명암이 있는 법이다. 남북전쟁 후 미국은 철도산업에서 첫 번째 버블을 경험한다. 1868년부터 1873년 사이에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자본이 대거 들어와 철도 건설에만 11억 달러가 투자되었다. 그 뒤 과잉건설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철도회사들의 수익성이 악화되었다. 더구나 유럽에서 1873년 초에 경기침체가 엄습하였다.

 

전시채권의 중개 수수료로 2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제이 쿡은 은행사업으로 번창하다가 대륙횡단철도인 ‘노던퍼시픽 철도’에 과다한 투자를 하여 1873년 파산하고 만다. 그 해 9월 18일 제이 쿡 은행의 파산은 유럽의 은행 부도와 맞물려 심각한 경제위기를 불러왔다. 제이 쿡과 같은 거부가 채권 이자를 지급치 못하고 디폴트를 선언하자 놀란 유럽 자본은 삽시간에 빠져나갔다. 19세기에 벌써 핫머니가 있었던 셈이다. 이를 계기로 세계는 대불황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를 1873년 공황이라 부른다.

연말까지 5천여 개의 기업이 문을 닫았다. 뉴욕 증권거래소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흘 동안 휴장한 가운데 증권사 57곳이 망했다. 유럽에도 영향을 미쳐 전 세계가 동시에 수렁에 빠져들었다. 붐(boom) 뒤에는 파열(burst)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때 영국을 도운 사람이 영국의 로스차일드였다. 로스차일드는 1874년 가을 뉴욕의 유대계 은행 가문인 요셉 셀리그먼과 손 잡고 5500만 달러의 미국 국채를 인수했다. 꽉 막힌 미국의 금융경색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이후 모건 그룹과 뉴욕 제1 국민은행과 함께 2500만 달러의 국채를 인수했다. 이렇게 로스차일드가는 뉴욕 월스트리트 은행 가문들과 함께 총 2억 6700만 달러의 미국 국채를 인수하여 미국 금융시장이 안정을 찾게 도와주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세계의 금은 로스차일드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로스차일드가 금 시세를 정할 때였다. 로스차일드는 금광 개발에 열을 올리며 금으로 많은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로스차일드는 미국 내 대리인 벨몬트와 셀리그먼을 앞세워 남북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그린 백 지폐를 폐지하고 금을 사용하는 금 본위제로 회귀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1866년 미국은 ‘긴축법안’을 통과시키고 유통 중인 모든 달러를 회수해 금화로 환전해 주고 금본위제를 부활하려고 시도했다. 이로써 통화 유통량은 1866년 18억 달러에서 10년 후 6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시중에 유동성이 크게 줄어든 게 기실 공황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이러한 그로서는 금 본위제를 시도하려는 미국이 유동성 부족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럼에도 19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미국 철도회사의 절반인 700개 사가 문을 닫았다. 극심한 공황에서도 미국 자본주의는 두 가지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렸다. 첫째는 체질 강화다. 한계기업이 정리되면서 기업들의 경쟁력이 강해졌다. 둘째는 산업자본의 자국화였다. 유럽 투자자들이 보유 주식을 헐값에 내던지는 바람에 주가가 더 빠졌지만 35%에 이르던 외국자본의 철도산업 평균 지분이 10%로 내려앉았다. 유럽인들은 수익을 한 푼도 못 건진 채 광대한 미국 철도망만 건설해준 꼴이 돼버렸다. 공황이 마무리되던 1880년대부터 유럽 자본은 다시 들어와 미국인들의 주머니를 불려줬다.

 


타이쿤 (신화가 된 기업가들)

–   찰스 R. 모리스 / 강대은 역 / 황금나침반 / 2007.06.21

 

제이 쿡 은행은 팔 수 없는 노던 퍼시픽 철도의 채권으로 포트폴리오가 채워지자 1873년 9월 18일에 도산했다. 이것은 금융 위기였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1870년대 대공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쿡의 파산으로 인한 충격은 그가 미국 굴지의 자산 관리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데다 그가 처해 있는 어려움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컸다.

……

월스트리트의 은행들이 쿡의 뒤를 따라 휘청거렸다. 증권거래소가 휴장에 들어갔고, 뉴욕 어음 교환 은행들이 일주일 이상 문을 닫았다. 언론은 처음에 이 나쁜 소식을 무시했다. 일반적으로 논평이 아주 예리한 <커머셜 앤 파이낸셜 크로니클>은 ‘현재의 제이 쿡 발 공황 상태’가 ‘남북전쟁의 종결 이후로 우리의 상업계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이었던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뭔가 중대하게 잘못되었음을 신호하고 있다.’는 견해를 비웃었다.

사실 미국은 심각한 금융 위기를 겪고 있었고, 그 위기는 1874년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1990년대 광섬유 통신망처럼 철도는 실제 수요를 훨씬 앞질러 건설되었다. 쿡의 노던 퍼시픽 철도가 특히 악명 높은 예였을 뿐이다. …… 1873년 말 89개 철도 회사가 채권에 대한 채무를 이행하지 못했고, 다음해에 채무 불이행 철도 회사는 108개사로 늘어났다. 철도 회사들이 주식 시장 자본 총액의 약 80%를 점유하고 있던 시기로 록펠러 같은 신진 거물들조차도 공개 주식 시장을 멀리하는 때였다. 그래서 철도업계의 위기는 월스트리트 전체를 황폐화시켰다.

……

유럽의 상황이 금융 경색을 더욱 악화시켰다. 1870~18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후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는 1872년과 1873년에 프랑스로부터 엄청난 배상금을 받아냈다. 황금으로 10억 달러에 달하는 총 배상액은 베르사유에서 제1차 세계대전 배상금으로 받아낸 것과 실질 가치로 똑같은 금액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프랑스는 사실상 전액을 한꺼번에 지불했고, 1919년에 독일보다 경제규모가 훨씬 작았다는 점이다. 이 배상금 조달은 19세기 은행계의 최대 역작이자 로스차일드 가문, 특히 프랑스 지점의 최고 업적이었다. 하지만 이 엄청난 자금 이동은 1873년 내내 유럽의 금융 시장, 심지어 독일 금융 시장까지 붕괴시켰고,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자금 유입을 급감시켰다. 유럽인들은 이리 철도(Erie Railroad) 쟁탈전 같은 불법 행위 때문에 오랫동안 미국의 철도 회사들을 싫어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돕고 싶어도 가진 돈이 없었다.

1년이 훨씬 지난 후 그랜트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기업과 산업이 지속적으로 쇠퇴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생생한 통계 수치를 보면 그랜트의 말은 크게 잘못되었다. 미국의 경제 성장 엔진은 유례없이 힘차게 움직이는 실제적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

자료에는 1870년대가 아주 할발한 성장을 보인 10년이었다는 사실이 일관적이고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

그런데 왜 불경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한 가지 이유는 1870년대와 그 이후 내내 지속된 가파르고 지속적인 물가 하락이었다. 1870년부터 1880년까지 도매 물가 지수는 25% 하락했는데, 1880년대 내내 그 비율의 절반으로 하락세가 지속되었다가 1890년대에 인플레이션 제로 상태에 이르렀다. 물가 하락은 화폐 소득의 감소를 초래했다.

 


지식역사 (피터 드러커의 역사관)

–   이재규 / 한국경제신문사 / 2009.11.20

 

1780년 이후 산업혁명이 본격화되자 경기는 크게 상승했고 영국은 장기간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생산력의 증가로 넘쳐나는 상품들이 제대로 소비되지 않자 차츰 경기가 둔화되었고, 1825년 영국은 경기침체를 맞게 되었다. 몇 년의 회복기를 거쳐 1829년에는 철도혁명으로 인한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영국 이외의 나라들에서는 과잉생산의 문제는 없었다.

산업혁명의 확산으로 인해 19세기 중엽 이후 자본주의가 구대륙과 신대륙으로 확산되자 선진국 경제는 복잡성과 불안정성이 증대되었다. 먼저 상업활동의 위기를 초래하고 뒤이어 소비재 및 자본재 생산 부문에까지 파급되었다. 금융공황은 위기의 서막인 경우가 많았다. 1857년 미국에서 일시적인 공황이 발생한 이유는 철도회사들이 발행한 회사채의 부도, 그로 인한 철도주식의 폭락, 철도투자에 대한 은행자산의 동결 등의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의 많은 은행들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급증했다.

1873년에는 세계적인 경제공황이 덮쳤다. 이때의 공황은 1857년 공황과는 달리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동시에 발생했으며 그 후 1890년대 중반까지 장기불황이 이어졌다. 공황직전에는 각국의 산업투자가 급증했고 임금도 상승했다. 그러나 곧이어 공황기에 접어들자 각국의 산업생산은 급속하게 감소하고 기업도산, 실업, 장기침체가 뒤를 이었다. 영국의 선철수출은 1871년 97만 9000톤에서 1878년 43만 9000톤으로 감소했고, 독일의 선철생산은 1873년 224만 1000톤에서 1876년 184만 6000톤으로 감소했다.

……

1873년의 공황은 그해 6월 증권시장의 붕괴와 9월의 뉴욕 금융공황으로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시작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20년까지 50년간은 대표적인 콘드라티예프의 장기침체 기간이었다.

하지만 1873년의 공황은 국가마다 사정이 달랐다. 1873년 비엔나 증권시장의 치명적 붕괴로 인해 당시의 오스트리아 정권은 영원히 종말을 맞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장기침체기를 맞았지만, 미국과 독일에서는 장기간의 산업침체는 일어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 기간 동안 새로 등장한 기술산업들, 즉 철강, 화학, 전기, 전화, 그리고 자동차 기술이 철도건설, 석탄채굴, 섬유산업과 같은 오래된 산업의 침체를 상쇄할 만큼 충분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장기간의 산업 침체기에 돌입해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미국과 독일에서 일어난 현상은 콘드라티예프 주기와 일치하지 않으며 영국과 프랑스와는 패턴이 다르다는 사실을 1939년 조지프 슘페트(Joseph Alois Schumpeter)가 밝혀냈다. 미국과 독일도 불황의 초기에는 그 충격이 매우 컸다. 그러나 5년 후에는 불황으로부터 벗어났고, 다시 빠르게 성장을 했다.

……

1873년 뉴욕과 비엔나 증권시장의 붕괴를 시작으로 전 세계로 확산된 공황은 1890년까지 이어졌다. 이것은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의 출판과 함께 시작된 자유방임의 한 세기를 마감하는 사건이었다. 1873년의 세계공황 속에서 현대 복지국가가 태어났다. 그로부터 10년 내에 프레더릭 테일러는 시간연구와 작업연구를 시작했고(1881), 칼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났으며(1883), 같은 해 20세기의 위대한 두 경제학자 케인스와 슘페트가 태어났다. 그리고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활동에 몰두했고 철도, 철강, 화학, 석유 등 각각의 산업에서 대기업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1881년을 기점으로 산업혁명의 초점은 ‘분업’과 ‘보이지 않는 손’과 ‘자본생산성 향상’으로부터 ‘대량생산’과 ‘보이는 손’과 ‘육체노동생산성 향상’으로 옮겨가게 된다.

 


<관련 그림>

 

– 영국에서 대불황의 두드러진 특징은 저물가 현상이었다. 이러한 물가 하락은 불황에 따른 수요 감퇴의 탓도 있지만, 그 밖에도 생산 및 유통 비용 감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황기의 영국에서 가격하락은 생산 비용의 절감폭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이것은 생산 이윤이 그만큼 감소하고 있음을 뜻한다.

 

 

– 영국의 자본 수출, 1820~1915(단위 : 백만 파운드)

 

 

– 미국 원자재 가격 추이

 

 

– 영국의 10년 이동평균 TFP(Total Factor Productivity) 증가율은 1870년대 초 1.7%에서 20년 동안 마이너스 수준으로 감소했다. 특히 노동 생산성은 대불황의 새벽에 새로운 기록에 도달한 후 20년 동안에 약 3분의 2 가량 줄어들었다. 영국의 실질 GDP 성장률은 1890년대까지 최저치에 도달했다.

 

 

– 미국 실업률 (1869년 ~ 2009년)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대불황 (1873년)

네이버 지식백과(경제학 주요개념) : 불황과 공황

네이버 지식백과(한경 경제용어사전) : 구조적장기침체

http://www.textbooksfree.org/Economics_9_The_Business_Cycle.htm

https://menghublog.wordpress.com/2015/05/03/the-great-depression-in-britain-1873-1896-the-myth-that-deflation-lowers-economic-growth/

https://analyseeconomique.wordpress.com/2012/09/21/the-1873-1879-great-depression-and-the-1879-1896-gold-standard-period-a-so-horrible-deflation/

2016-05-09  2008년 글로벌 위기의 데자뷔, 1873년 공황

2012-05-01  “세계 경기침체의 긴 터널 어디서 끝날 지 아무도 모른다”

대불황 (1873년 ~ 18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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