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체제 (Wiener System, 1815 ~ 1848)

빈 체제 (Wiener System)는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빈 회의(Congress of Vienna, 1814~1815) 이후 30여 년 동안 지속된 유럽의 국제 정치 체제로 절대왕정을 유지하기 위해 각국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반동 복고적 성격을 지녔다. 그 반동적인 성격이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당시 처음으로 나타난 국민전이라는 전쟁 형태의 잔혹성 때문이기도 했고 또 당시 많은 나라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움트면서 평화의 가치가 엄청나게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록 보수적 · 반동적인 상호 협조의 기치를 내걸었다고는 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이 체제의 성격으로 일관되었던 것은 상호 견제의 세력 균형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815

 

빈 체제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신성동맹(Holy Alliance)과 4국동맹(Quadruple Alliance, 신성동맹 + 영국)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오스트리아의 재상이었던 메테르니히(Klemens, Furst von Metternich)가 주도했기 때문에 ‘메테르니히 체제’라고도 한다. 크게 보면 영국 헤게모니의 도구로 작동한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빈 체제의 기간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장기 19세기(The long 19th century)’의 첫 번째 기간인 1789년 ~ 1848년의 ‘혁명의 시대(The Age of Revolution)’와 칼 폴라니가 말한 1815년에서 1914년에 걸친 유럽의 ‘100년 평화’와 겹친다. 폴라니에 따르면, ‘100년 평화’의 거의 3분의 1세기 동안인 빈 체제 시기의 적극적인 평화 정책에 이념적 원동력과 강제력 모두를 제공한 것이 바로 “혈연과 신의 은총의 계서제”로 형성된 신성동맹이었다. 신성동맹의 군대는 유럽 전역을 어슬렁거리면서 소수자들을 짓밟아버리고 다수자들을 억눌렀던 것이다.

폴 슈뢰더(Paul W. Schroeder)에 따르면, 당시 유럽의 지배 세력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또 다른 혁명이 아니라 또 다른 전쟁의 발발이었다. 혁명을 막기 위해 평화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해 평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모두 평화를 원했기에 모두 오스트리아를 도왔다고 했다.

 

빈 체제는 1848년 유럽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1848년 혁명 : http://yellow.kr/blog/?p=2535 )

프랑스에서는 2월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3월 혁명으로 메테르니히가 실각하였고,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중부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입헌정부가 수립되었다. 독일의 영방 국가 대표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통일 문제와 헌법 제정을 협의하였고, 이탈리아에서도 통일운동이 일어났다. 이로써 옛 질서를 유지하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하기 위한 빈 체제는 막을 내렸다.

 

미국의 독립선언에서 나폴레옹 전쟁까지, 국가 간 투쟁과 국가 내 투쟁의 과정에서 베스트팔렌 체계의 원칙, 규범, 규칙이 광범위하게 침해당했다. 특히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아래로부터 반역을 도발하고 위로부터 제국적 지배력을 부과함으로써 유럽 통치자들의 절대적 지배권들을 짓밟았다. 동시에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유럽 대륙 대부분에 걸쳐서 몰수, 봉쇄, 지령경제를 통해 비(非)전투자들의 소유권과 상업의 자유를 침해하였다.

영국은 절대적 지배권들의 침식에 저항하고 베스트팔렌 체계를 복구시키려는 싸움에서 주로 왕조 세력들의 거대한 동맹을 이끌면서 처음으로 헤게모니적이 되었다. 베스트팔렌 체계는 1815년 빈 회의와 뒤이은 1818년 엑스라-샤펠 회의(Congress of Aix-la-Chapelle)와 더불어 성공적으로 복구되었다. 이 시점까지 영국 헤게모니는 네덜란드 헤게모니의 복제판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이 제국을 자임하려는 합스부르크 에스파냐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막 태어나려 하던 국가간 체계를 성공적으로 이끈 것과 마찬가지로, 영국인들은 제국을 자임하려는 나폴레옹 프랑스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막 소멸하려 하던 국가간체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달리 영국은 계속해서 국가간체계를 지배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계속되는 혁명적 격변이 열어 놓은 새로운 권력 현실에 적합하게 그 국가간체계를 크게 재편하는 일을 맡았다. 그렇게 등장한 체계는 존 갤러거와 로널드 로빈슨이 자유무역 제국주의 – 베스트팔렌 체계를 확장하고 지양한 통치의 체계 – 라 부른 것이었다.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100년 평화’를 가능하게 했던 배경으로 ‘오트 피낭스(high finance)’를 꼽았다. 오트 피낭스는 원래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글로벌 거대 금융자본을 의미하는데, 로스차일드가는 탐욕스러운 자본가였지만 자신의 탐욕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막고 평화체제를 지켜냈다는 것이다. 주로 ‘100년 평화’의 후반기에 나타난 상황이지만 신성동맹 또한 로스차일드의 도움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신성동맹의 특등 동맹국”이라는 당시의 쓴소리도 있었다.

 

빈 체제에서 유럽의 강대국들이 정기적으로 회동해 국제정치 문제를 토의한다고 합의한 것은 유럽 외교사에 있어서 최초의 일이며 획기적인 일이다. 더 나아가 정기적인 회의가 개최되지 않는 시점에서도 서로 유럽의 문제를 상의한다고 약속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이 규정은 국제사회의 조직화를 위한 첫 시도였으며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국제정치의 강대국 중심을 명백히 규정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를 이미 예고한 것이다.

 

– 1815년 유럽 지도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거대한 전환

–  칼 폴라니 / 홍기빈 역 / 길 / 2009.06.30

 

1815년 이후 급작스럽고도 완벽한 변화가 나타났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동과 그 당시 막 일어나고 있던 산업혁명의 물결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평화로운 영리 활동을 전 세계적인 보편적 이익으로 확립하려는 강력한 흐름이 나타났다. 메테르니히는 유럽인들이 원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평화라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폰 겐츠(Friedrich von Gentz)는 조국을 위한 전쟁을 불사하는 애국자들이야말로 새로운 종류의 야만인들이라고 불렀다. 교권과 속권 모두가 유럽의 탈민족화에 착수했다. 이들의 주장이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당시 처음으로 나타난 국민전이라는 전쟁 형태의 잔혹성 때문이기도 했고 또 당시 많은 나라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움트면서 평화의 가치가 엄청나게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새로운 “평화의 이해”의 담지자들은 보통 그것으로 가장 큰 혜택을 받게 되어 있는 이들, 즉 세습 왕조의 군주들과 봉건 권력자들의 담합체였으니, 이들은 당시 유럽 대륙을 휩쓸고 있었던 호전적 애국주의의 혁명적 물결로 인해 왕실 재산의 위치마저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거의 3분의 1세기 동안 적극적인 평화 정책에 이념적 원동력과 강제력 모두를 제공한 것이 바로 신성동맹이었다. 신성동맹의 군대는 유럽 전역을 어슬렁거리면서 소수자들은 짓밟아버리고 다수자들은 억눌렀던 것이다. 그런데 1846년에서 1871년의 기간-“유럽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웠던 4반세기의 하나”-에 들어오면 그러한 반동 세력은 사그라들었고 산업주의의 힘이 증가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평화의 확립은 좀 더 불안정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보불전쟁이 끝난 뒤의 4반세기 동안 우리는 평화에 대한 이해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보았는데, 이를 표상하는 것이 바로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라는 강력한 실체였다.

……

신성동맹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했으며 결국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여러 도구의 도움을 빌리기로 했다. 유럽의 왕들과 귀족들은 국제차원에서 일종의 친족 연대를 형성했고, 로마 교회는 남유럽과 중유럽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에서 가장 천한 신분에 걸쳐(펼쳐진 자신들의 거대한 교회 조직을 통해) 신성동맹을 위해 자발적으로 복무하는 공무원 조직을 제공했다. 혈통과 신의 은총으로 구성된 사회적 위계 서열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전 유럽의 작은 마을에까지 촘촘히 효력을 미치는 지배 도구를 형성한 것이다. 이제 여기에다 물리력만 갖추어 보충한다면 대륙 전체에 평화를 보장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

지금까지 본 것처럼 ‘백년 평화’의 배경을 제공했던 것은 새로운 경제생활의 조직이었다. 처음 기간에는 나폴레옹 시대의 대격변에서 본 바 있듯이 당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중간 계급이 오히려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혁명 세력이었고, 이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동요(動搖)의 요인과 싸우면서 신성동맹이 그 반동적인 평화를 조직했다. …… 신성동맹 체제 아래에서는 봉건제와 크고 작은 군주들이 가톨릭 교회의 영적 · 물질적 권력의 지원을 얻어 그러한 사회 기관의 역활을 했고, 유럽 협조 체제의 기간 동안에는 국제 금융 그리고 그것과 동맹을 맺은 각국 내의 은행 체제들이 그 역활을 맡았다. 물론 이러한 시대 구분을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는 없다. 1816 ~ 1846년의 30년 평화의 기간에도 이미 영국은 평화로운 영리 활동의 이익을 관철시키려 노력했고, 신성동맹 또한 로스차일드의 도움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베스트팔렌 체계의 본래적 핵을 구성한 바 있는 왕국들과 과두제 국가들의 집단에 새로운 일군의 국가들이 결합하였다. 이 새로운 집단은 주로 신구 제국들로부터 독립하는 데 성공한 재산 소유자들의 민족 공동체가 통치하는 국가들로 구성되었다. 국가 간 관계는 이렇게 해서 군주들의 개인적 이익 · 야심 · 감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민족 공동체들의 집단적 이익 · 야심 · 감정에 좌우되었다.

이런 민족주의의 “민주화”와 더불어 단일 국가, 즉 영국에 전례 없이 세계권력이 집중되었다. 1776 ~ 1848년의 혁명적 격동에서 출현한 확대된 국가간체계 내에서 영국만이 세계 모든 지역의 정치에 관여된 동시에, 더욱 중요하게는 이 대부분 지역에서 지배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전지구적 세력균형의 종복이 아니라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앞선 자본주의 국가들의 목표가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그 시대의 주도적 자본주의 국가에 의해 완전히 실현되었다.

전지구적 세력균형을 더욱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영국은 베스트팔렌 조약 때부터 작동해 온 유럽 강국 사이의 느슨한 협상체계를 팽팽하게 만들어 내는 일을 주도했다. 그 결과 출현한 것이 유럽협조체제였는데, 이는 처음부터 주로 대륙의 세력균형을 지배하는 영국의 도구였다. 빈 협약 체결 이후 30여 년간 유럽협조체제는 신성동맹을 형성한 “피와 은총의 계서제”에 비해 유럽 대륙 정치에서 부차적인 역활을 맡았다. 그러나 민주적 민족주의의 압력이 거세져서 신성동맹이 해체되자, 유럽 협조는 곧바로 유럽의 국가 간 관계를 조절하는 주요 도구로 등장했다.

 


세계외교사

–  김용구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6.05.25

 

신성동맹(Holy Alliance, Sainte Alliance)의 기본 구상은 유럽 공법을 기독교의 원칙에 따라 재건하고 기독교의 모든 종파를 통합해 그 위에 국제평화를 이룩하려는 데에 있다. 이런 기본취지만을 본다면 신성동맹은 특이한 조약은 아니다.

그로티우스(H. Grotius)의 핵심 사상도 교파를 초월한 세계 교회주의로 국제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이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은 소박한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해 세계질서를 개편하려고 한 것이며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도 전승국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성동맹은 러시아의 사상과 국제정치적 입장을 대변했기 때문에 유럽 사회에서 문제가 된 것뿐이다.

워털루 전투를 끝으로 나폴레옹 전쟁은 종식됐으나 전후의 국제정치 질서를 어떤 원칙으로 재건하느냐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국은 4국 동맹을 형성해 프랑스를 억제한다는 매우 현실정치적인 구상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의 개편안이나 평화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러시아뿐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 평화를 다시 찾아 준 구세주로 간주됐으며 방대한 군대가 서유럽에 주둔하고 있어서 절대적인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알렉산드르는 군주 중의 군주로 추앙되었고 그가 그의 군대와 더불어 귀국하게 되면 서유럽에는 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이 유럽 정가에 팽배하였다.

……

당시 유럽 사회에는 기독교 부흥에 관한 과격한 이론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런 이론들의 핵심은 자비에 대한 강조, 광범한 국제조직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 세상에 낙원을 수립해야 된다는 천년 평화설에 대한 집념이었다.

……

빈 회의 결정은 반(反)민족주의적이며 반동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그 결정들은 당시의 정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반민족주의적인 것은 19세기 초 유럽 사회가 ‘왕위와 제단(祭壇)의 단결’로 형성됐기 때문이다. 유럽 사회에서 정치운동으로서의 민족주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848년 2월 혁명 이후의 일이다. 또 빈 회의 당시 유럽 사회는 기본적으로 농업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 빈 회의의 결정은 경제 문제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대부분의 결정들은 거의 국경선에 관련된 것으로 근대국가의 초기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유럽 제국(帝國)을 건설하면서 ‘법 앞의 평등’이라는 근대적인 사상을 전파시켰다. 빈 회의의 결정들은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유럽사회 저변에 파급된 중세질서 저항의식을 도외시하였다. 자유주의 헌법을 요구하는 변혁을 수용할 수 없는 경직된 결정들이었다. 따라서 이미 혁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

유럽협조라고 지칭되는 국제정치현실은 특히 나폴레옹 전쟁 말기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유럽 문제는 유럽 열강의 합의로 해결해야 된다는 국제정치적인 관행이 확고히 성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행을 메테르니히는 ‘동맹’, ‘유럽’의 용어로, 그리고 카슬레이는 ‘연방’(confederacy), ‘대동맹’ 등의 용어로 표현하곤 하였다.

유럽 열강의 협조라는 정치적인 관행은 1815년 11월 20일 4국 동맹 조약 제6조의 규정으로 국제법적인 제도가 되었다. 소위 ‘회의외교’를 정착시킨 이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 조약의 집행을 원활하게 하고 보장하기 위하여, 그리고 현재 세계의 행복을 위하여 4군주들을 이처럼 밀접히 단합시키고 있는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체약국들은 군주 자신들이 직접 주최하거나 또는 그들 대신들에 의해서, 정기적으로 모임(meetings)을 소집하여 그들의 공동이해를 협의하고 그리고 [이런 정기적인] 모임과 모임 사이에 모든 국가들의 번영을 위하여 또 유럽의 평화유지를 위하여, 가장 유익하다고 간주된 조치들을 고려하는 데 합의한다.

유럽의 강대국들이 정기적으로 회동해 국제정치 문제를 토의한다고 합의한 것은 유럽 외교사에 있어서 최초의 일이며 획기적인 일이다. 더 나아가 정기적인 회의가 개최되지 않는 시점에서도 서로 유럽의 문제를 상의한다고 약속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이 규정은 국제사회의 조직화를 위한 첫 시도였으며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국제정치의 강대국 중심을 명백히 규정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를 이미 예고한 것이다.

 


국제정치학 방법론의 다원성

–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 사회평론 / 2014.04.18

 

세력 균형에서 협조 체제로 – 폴 슈뢰더(Paul W. Schroeder)의 근대 유럽 외교사

– 안두환 /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요약하자면,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은 “짧은 시간에 전쟁과 평화의 끝없는 반복을 초래하며 한 세대의 지도자 집단으로 하여금 학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당연히 역으로 “만약 이러한 학습의 과정이 1814년 이전에 동맹국의 승리로 중단되었다면 어떠한 안정된 평화 체제도 불가능했을 것이며, 이전의 자기파괴적인 국제정치의 법칙과 형태는 지속되었을 것이다.” “알맞은 시간과 계속된 실패에 운이 따랐고”, 이 덕분에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의 네 열강은 이전 세력 균형 체제의 문제를 “간파했고 지혜를 터득했다.” 특히 러시아와 영국은 7년 전쟁 이후 급속히 파괴되었던 매개 정치를 되살리기 위해 각기 자제했고 개입했다. 중동부 유럽을 정치적 평형에 맞추어 되살려 놓은 빈 회의의 결정은 이러한 패권의 선량한 사용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이러한 변화로부터 가장 덕을 많이 본 나라는 오스트리아였지만, 다른 나라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였기에 유럽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Schroeder 1990e, 15-21; 1994a, 527, 578, 580-581; 2000, 245-246).

1815년 이후를 다루는 책의 나머지는 빈 체제의 작동을 유럽과 근동 지역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 우선 유럽과 관련되어 슈뢰더는 메테르니히 체제외 빈 체제의 관계 설정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여기서 슈뢰더의 주된 비판 대상은 키신저의 『복원된 세계』로 대표되는 근래 수정주의 해석이다. 후자는, 앞서 정리한 바와 같이, 빈 체제를 프랑스 혁명에 따른 변화의 요구를 무참히 짓밟고 구 체제의 영속을 꾀한 반동으로 규정하고 메테르니히 체제에 종속시킨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하며 등장했다. 이에 따르면 빈 체제는 “자유와 정의 그리고 진보를 희생했지만 질서와 평화를 복구했기에” 긍정적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대해 슈뢰더는 1815년 이후 대륙의 열강의 지배 세력이 “혁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평화를 추구했다”라는 일반적인 이해는 “사실과 매우 가깝기에 오히려 근저에 있는 진실과 통찰을 가리고 연구자로 하여금 더 깊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에 뻔한 거짓말이나 말도 안되는 왜곡보다 종종 더 해로운 역사의 일보직전의 성과(near miss)중 하나”라고 비판한다. 1815년 이후 유럽의 질서에 대한 모든 논의의 초점은 메테르니히 체제가 아니라 빈 체제에 있어야 한다(Schroeder 1994a, 575-576, 666, 802; 1994c, 148, n. 84).

슈뢰더의 논지를 시기순으로 보자면, 첫째, 빈 회의 당시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은 민중의 요구는 매우 미약했다. 왕정 복고를 위해 혁명 정신을 억누를 필요조차 없었다. 둘째, 빈 회의 다음 5년은 “복고의 시대”가 아니라 “회복의 시대”였다. 빈 체제는 모든 유럽의 나라로 하여금 외치가 아니라 내치에 힘을 쏟을 수 있도록 했다. 셋째, 1820년 이래 유럽 전역에서 터진 크고 작은 내란은 빈 체제의 억압이 아니라 개혁의 실패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다. 넷째, “빈 회의 이후 시대의 눈에 띄는 특징은 민중 반란을 근절할 목적으로 연합한 보수주의 정부의 열정과 의지 그리고 냉혹이 아니라”, “대부분의 정부가 보여준 방종과 비효율성이다.” “모든 유럽의 군주는 자신의 국민은 물론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물리력을 사용하기를 극도로 꺼려했다”. 1848년 혁명의 시작도 이와 같았다. 다섯째, 메테르니히 체제가 실용주의에서 반동주의로 본격적으로 이행된 기점은 1848년 혁명의 충격 속에서였다(Schroeder 1994a, 577, 586-628, 666-726; 1962a, 237-266).

정리하자면, 슈뢰더에 따르면, 당시 유럽의 지배 세력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또 다른 혁명이 아니라 또 다른 전쟁의 발발이었다. 혁명을 막기 위해 평화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해 평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모두 평화를 원했기에 모두 오스트리아를 도왔다. 프랑스는 1820년대 초반 스페인에서, 러시아는 1820년대 중반 이탈리아와 그리스, 그리고 1830년대 초반 독일에서 혁명의 방지가 아니라 평화의 유지를 위해 오스트리아와 협력했다. 유럽에서 오스트리아의 지위와 역활은 의문시되지 않았으며, 이에 슈뢰더는 유럽은 오랫동안 안정될 수 있었다고 결론 내린다(Schroeder 1994a, 606-628, 637-664, 691-709, 712-716).

 


세계사 사전

–  황보종우 / 청아출판사 / 2003.09.01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빈 회의를 중심으로 전쟁처리와 복구를 위한 19세기 전반의 유럽 국제관리 체제. 그 중심은 1814년 쇼몽 조약을 통한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4국 동맹과 1815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세 군주가 체결한 신성동맹이다. 이 체제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이 유럽에 끼친 혼란을 정리하고 군주제를 유지하며 강대국의 세력균형을 통한 안정을 추구하는 복고적 정통주의를 표방하였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수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하여 자유주의 사상과 이탈리아, 독일의 통일운동에 탄압을 가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라틴 아메리카 각국이 독립하고 1830년 7월 혁명, 그리스와 벨기에 독립으로 빈 체제는 약화되었다. 결국 1848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빈 체제는 무너졌다.

 


개설 철학사

–  中村雄二郞 등 / 백산서당 / 1983

 

1815년 나폴레옹이 결정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메테르니히가 주도하는 빈 회의가 매듭을 보아 다시 신성동맹이 체결되었다. 이에 유럽 대륙의 국가들은 프랑스 혁명 발발 이전의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의 재현을 지향하는 강력한 반동적 정치 체제로 재편되었다. 즉 세력 균형 정책 위에서 성립되었던 이른바 메테르니히 체제가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고, 독일도 옛날의 상태로 되돌아가 오스트리아를 장(長)으로 하는 독일 연방으로 되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철저히 탄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동 정책도 역사의 톱니 바퀴를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즉 부르주아의 성장, 발전이 기세등등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미 1770 ~ 1780년 대에 개시되었던 산업혁명이 착실히 진행 중이었으며 그 생산력은 급속한 상승선을 그리고 있었다. 지독한 반동체제 하에 있던 대륙에도 이 산업혁명의 파도가 점점 밀어 닥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830년에 7월 혁명이 일어나 ‘부르주아의 왕’인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메테르니히 체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7월 왕정 하의 프랑스에서는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부르주아의 자립적 성장이 현저히 억압받고 있던 독일도 40년 대에는 라인 하류지역이 산업혁명의 단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일어나 전 유럽에 파급되었던 이 산업혁명은 고도의 근대적인 공장 생산양식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이에 의해 근대자본주의 · 근대시민사회의 발전은 이른바 정점에 달하게 되었다. 독일 등의 경우에서는 봉건 구세력과의 타협적 색체가 농후했어도, 어쨌든 경제는 물론 정치, 사회전반에 걸쳐 산업 부르주아의 패권이 확립되었다. 사상면에서 이러한 산업 부르주아의 의향을 가장 잘 표명한 것이, 영국에서는 공리주의와 철학적 급진파였으며, 프랑스에서는 실증주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근대시민사회를 발전의 정점으로까지 끌어 올리는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부르주아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적대자를 정면으로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 낸 근대적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다수의 노동자, 프롤레타리아였다. 1832년 유혈혁명이 아닌 ‘합의의 혁명’에 의해 영국의 부르주아가 선거법 개정법안을 쟁취했을 때, 노동자 계급은 그것이 단지 부르주아만의 선거권에 불과한 것을 알고 이에 격분하여 1834년에는 제네스트로, 1836년 부터 1848년까지는 3차에 걸친 차티스트 운동으로 이에 반항했다. 프랑스에서는 1848년의 2월혁명으로, 또한 독일에서는 같은 해 3월 혁명으로 노동자 계급의 모습이 커다랗게 전면에 부각되었다. 물론 이러한 노동자의 제 운동은 조직이나 지도가 아직 미성숙했기 때문에 아무 성과도 거둘 수 없었지만, 거기에서 보여진 노동자의 대립 격화와 빈부의 격차와 확대는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하는 제모순이 현재화된 것으로, 산업혁명을 통해 비로소 명확해진 시대의 추세에 불과했다. 이리하여 이제 근대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회상의 설계가 진지한 시대적 과제로서 부상하게 되었다. 이것은 산업혁명이 얼마쯤 앞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영국에서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이상적 사회상의 구상을 만들어내면서 나타났으며, 다시 후진국 독일의 사상가에서 연결되어 보다 철저한 모습을 지닌 과학적 사회주의로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시민철학의 성과를 그대로 계승하여 다시금 발전시킨 산업 부르주아의 사상으로서 공리주의, 실증주의 철학이 번성하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현존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만과 비판으로부터 새로운 사회상의 설계로 나아가는 사회주의 사상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것이 19세기의 전반을 거의 점하고 있던 산업혁명기의 사상 상황을 개략한 약도이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 리오 휴버먼 / 장상환 옮김 / 책벌레 / 2000.04.15

 

역사책을 읽어 보면 이런저런 왕들의 야망 · 정복 ·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장황하게 이어진다. 그런 책들의 강조점은 완전히 틀렸다. 국왕들의 이야기에 지면을 할애하기보다 왕권의 배후에 있는 진정한 힘, 즉 그 시대의 상인과 금융업자의 이야기에 지면을 할애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로스차일드 2

–  니얼 퍼거슨 / 박지니 역 / 21세기북스 / 2013.03.19

 

1820년대는 정치적으로 복고의 시기였을 뿐 아니라 국가 재정 복원의 시기이기도 했다. 유럽 대륙 전반에 걸쳐 폐위됐던 왕들이 (대부분) 왕좌를 되찾았다. 메테르니히의 지휘 아래 대륙의 열강들은 그 시발점이 어디든 새로운 혁명의 조짐이 보이기라도 하면 힘을 합쳐 완강히 저지했다. 로스차일드가는 물론 이 복고 과정에 돈을 댔다. 그들은 프랑스를 다시 지배하게 된 부르봉 왕가뿐만 아니라 신성동맹의 회원국인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가 과거에는 영국과 네덜란드만 누릴 수 있었던 금리로 채권을 발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덕분에 메테르니히는 수월하게 유럽의 ‘치안’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개입해 나폴리와 스페인에서도 부르봉 왕조를 부활시킨 예가 대표적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신성동맹의 특등 동맹국”이라는 쓴소리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로스차일드가 융자한 돈은 메테르니히를 비롯해 영국의 조지 4세와 후에 벨기에의 왕위에 오르는 그의 사위 작센코부르크의 레오폴드까지 당시의 많은 ‘고위 인사들’의 개인 자산을 살찌웠다. 루트비히 뵈르네의 독설처럼, 로스차일드는 “귀족에게 자유를 음해할 힘을 주고, 인민에게는 폭정에 맞서 싸울 용기를 박탈하는 자”요, “자유, 애국심, 명예 그리고 모든 시민적 미덕을 자신의 제단에 희생시키는 공포의 대사제”였다.

……

1930년대 초에는 벨기에, 폴란드 혹은 이탈리아를 두고 곧 전쟁이 터질 듯한 위기의 순간이 여러 차례 있었다. 로스차일드가는 그때마다 ‘평화 중개인’으로 활약할 만큼 유럽 전역을 탄탄히 잇고 있었다. 그들의 비할 데 없이 빠른 통신망 역시 유럽의 주요 정치가들을 위한 속달우편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

…… 당시 사람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그저 융자를 제한하겠다고 위협해서 유럽의 평화를 지켰다는 이야기에 미혹됐지만, 사실 1830년대에 전쟁이 터지지 않은 것은 다른 정황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로스차일드가가 경제적 수단으로 정치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시점도 분명 있었다. 메테르니히의 호전성은 1832년 잘로몬이 신규 채권 발행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을 때 완전히 꺾였다고는 할 수 없어도 최소한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와 벨기에라는 신생 국가의 탄생도 유럽 열강들이 보증하고 로스차일드가가 발행한 채권 형태로, 말 그대로 로스차일드의 재원으로 인수된 결과물이었다.

……

1861년 6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암셸의 오천 초대를 받아들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자신이 누구의 선례를 따르고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30년 전 메테르니히 역시 암셸과 “수프를 먹었”고, 그 일은 오스트리아 총리와 로스차일드 가문 사이의 오래 지속될, 상호 호혜적인 우정의 시작이었다. 로스차일드가는 메테르니히의 개인 자산을 (여러 차례 특별한 조건으로) 돌봐주었고, 신속하고 은밀한 외교 소통 채널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 보답으로 메테르니히는 민감한 정치 뉴스를 로스차일드에 건넸고, 가족들이 합스부르크제국의 재정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상류 사회에서도 특권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암셸은 분명 비스마르크와의 관계도 그런 수순을 밟기를 바랐을 것이다.

 


유대인의 역사

–  폴 존슨 / 김한성 역 / 포이에마 / 2014.08.04

 

제임스가 1811년부터 파리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네트워크가 넓어졌다는 뜻이다. 둘째 아들 살로몬 마이어는 1816년에 빈에 지점을 설립했고 넷째 아들 카를 마이어는 1821년에 나폴리에 지점을 세웠다. 1812년에 아버지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가 죽자 맏아들인 암셸 마이어가 프랑크푸르트 지점을 이어받았다. 이 네트워크는 1815년에 막이 오른 새로운 평화 시대의 금융에 안성맞춤이었다. 군대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마련하는 작업은 지폐와 신용 거래에 기초한 국제금융 체제를 만들었고, 이제 각국 정부는 그 체제를 어떤 목적으로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15년부터 1825년까지 10년 동안 이전 한 세기 동안 유통된 것보다 더 많은 유가증권이 유통되었고, 나탄 로스차일드는 런던 최고의 금융 권위자로서 옛 베어링 가문의 자리를 대체했다. 나탄은 라틴아메리카의 변덕스러운 정권과는 거래하지 않고 주로 믿을 수 있는 유럽 독재 국가, 즉 신성동맹으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러시아와 거래했다. 1822년에 나탄은 신성동맹 국가를 위해 막대한 재원을 마련했다. 1818년부터 1832년까지 런던에서 발행된 26개 외국 정부의 공채 중 7개를 나탄이 주관했고, 한번은 연합을 통해 2,100만 파운드, 즉 전체 자금의 39퍼센트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빈에서 로스차일드 가문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해 채권을 팔고,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메테르니히를 보좌하고 오스트리아 최초의 철도를 부설했다. 프랑스 최초의 열차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파리에 세운 은행 로스차일드 프레르가 부설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부르봉 왕가 사람, 오를레앙 왕가 지지자, 나폴레옹 지지자에게 자금을 조달했고 벨기에의 새 국왕에게도 자금을 대주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많은 독일 군주를 위해 어음을 유통시켰다. 나폴리에서는 사르데냐, 시칠리아, 교황령을 위해 재원을 마련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총 자산은 1818년에 177만 파운드에서 1828년에 430만 파운드로 늘었고, 1875년에는 3,435만 파운드로 증가했다.

 


화폐전쟁

–  쑹훙빙 / 차혜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07.21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한 후 메테르니히가 주도하는 빈 체계는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긴 평화를 구가했다.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가 점점 쇠락하고 강적으로 둘러싸인 불리한 상황에서도 교묘한 줄타기로 평형을 유지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에 잔존하는 황실의 정통이라는 점을 강하게 호소하며 이웃 나라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끌어들여 신성동맹을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재기를 막고 러시아의 확장을 견제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꿈틀거리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물결을 억제해 오스트리아 국내의 다민족 분열 세력이 힘을 쓰지 못하게 했다.

……

메테르니히와 겐츠(Gentz)의 적극적인 추천에다 로스차일드와 윌리엄 왕자와의 관계, 그리고 덴마크 왕실과의 긴밀한 비즈니스 관계에 힘입어 살로몬 로스차일드는 드디어 합스부르크의 높은 문턱을 넘었다. 왕실은 고정적으로 살로몬의 은행에서 융자를 받았으며, 살로몬은 빠르게 그들과 한울타리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822년 합스부르크 왕조는 네이선을 제외한 로스차일드 가의 4형제에게 남작의 칭호를 수여했다.

살로몬의 대규모 자금 지원을 등에 업은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여러 분쟁 지역에 ‘평화 수호’라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안 그래도 국력이 날로 쇠약해지는 오스트리아는 더 깊은 채무의 늪에 빠졌고, 살로몬의 금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1814 ~ 1848년의 유럽은 ‘메테르니히의 시대’로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메테르니히를 움직이는 막후에는 로스차일드은행이 있었다.

 


<관련자료 및 참고자료>

 

위키백과 : http://ko.wikipedia.org/wiki/%EB%B9%88_%EC%B2%B4%EC%A0%9C

위키백과 : http://en.wikipedia.org/wiki/Congress_of_Vienna

위키백과 : http://en.wikipedia.org/wiki/Age_of_Metternich

위키백과 : http://en.wikipedia.org/wiki/Revolutions_of_1848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빈체제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4국동맹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신성동맹

 

빈 체제 (Wiener System, 1815 ~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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