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 국보 제2호

※ 황성열의 세계 – 문화재 : http://yellow.kr/nt.jsp

※ 국보 제2호 /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 / 1962년 12월 20일 지정 / 서울 종로구 종로 99 (탑골공원)

조선시대 작품이다.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1924년 8월15일자 <동아일보>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납석탑(蠟石塔)’이라 호칭하며 유래를 보도했다. “명물명물 하니 서울 안 명물에 탑골공원 납석탑이야 뺄 수가 있습니까. 이 탑은 고려 충렬왕비 원나라 공주가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으나, 그 반대로 우리 조선에서 만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조선 세조 때 원각사를 창건하면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본래 원각사에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무악대사를 위해 창건한 흥복사(興福寺)가 있었다. 세종이 불교 종파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하면서 사찰 기능을 잃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악학도감(樂學都監)이 들어섰다.

1464년 5월 세조의 명에 의해 흥복사 터에 절을 세우는 데 그것이 바로 원각사이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는 탑골공원은 3·1운동의 발상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탑골공원을 파고다(pagoda) 공원이라고도 부른다. 이 명칭이 생기게 된 데 대하여는 두 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고종황제 때인 1897년 총세무사로 초빙되었던 영국인 브라운(J. M. Brown)의 건의에 의하여 탑공원(塔公園, Pagoda Park)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첫 번째 주장이다.

그런가 하면 이 공원에서 가장 소중한 역사 유물인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재질이 흰 대리석이어서 흔히 백탑(白塔)이라고 불렀는데, 이 백탑 즉 흰돌탑을 ‘파그탑(Pagtab)’이라 하기 때문에 그 음을 따라서 파고다가 되었다는 것이 두 번째 주장이다. 두 주장 모두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는 원각사지 10층석탑을 핵심적 주제로 삼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탑이 3, 5, 7, 9 등 홀수 층으로 조성되는데 이것은 경천사지 십층석탑과 마찬가지로 10층으로 조성되었다. 어떤 이는 이 같은 탑들도 아랫부분 3층과 윗부분 7층을 구분해 꾸민 점에서 홀수를 바탕으로 조성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사료에는 13층이라 기록되어 있다며 기단 3단을 합쳐 13층 석탑이라고도 한다.

 


1933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모습으로, 흔치 않은 대리석으로 만들어 백탑(白塔)이라고도 한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언제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정상부의 3층이 지상으로 내려진 상태로 광복을 맞이했다. 내려진 내력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1946년 2월 17일, 당시 한국에 주둔했던 미 24사단 공병대에 의하여 기중기로 올려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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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서울시는 문화재위원회의 승인 아래 유리 보호각을 만들어 탑을 완전히 덮어씌었다. 탑은 대리석으로 먼들어졌는데, 대리석은 화강암에 비해 약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정교한 조각이 가능하지만 그만큼 훼손도 쉽다. 이런 까닭에 더 이상 야외에 노출된 채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게다가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는 탑골공원의 경우, 비둘기들이 집단 서식하는 곳이어서 비둘기의 배설물이 적지 않게 발생한다. 비둘기 배설물이 석탑에 떨어지면서 표면의 훼손을 더욱 부채질했다.

유리 보호각을 씌우는 것을 놓고 찬반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대책이 없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었고, 결국 전문가들은 유리 보호각을 선택했다.

경천사지 십층석탑과 마찬가지로 박물관 실내로 이전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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亞자 모양의 기단은 세 겹인데, 아래에는 용과 연꽃 같은 무늬를 새겼고, 중간에는 삼장법사(三藏法師)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불법을 구해 오는 과정을 그려 새겼다. 위에는 부처님의 전생 설화와 일생을 조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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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경천사지 십층석탑 (국보 제 86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비슷한 크기, 비슷한 형태의 탑으로 무려 120여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같은 형태의 탑이 재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문화재청 : http://www.cha.go.kr/
손 안의 박물관 – 처음 만나는 문화재 책 (이광표 / 효형출판)
한양이야기 (이경재 / 가람기획)
부처 통곡하다 – 조선오백년불교탄압사 (정동주 / 이룸)
2016-04-18  한양 상징하는 랜드마크서 서양식 공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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