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역대 최악의 인명피해를 낸 지진은 중국의 산시 대지진(陝西大地震) 또는 섬서성지진(陝西省地震)이다. 1556년 1월 23일 발생한 산시 대지진은 중국 명나라 때 산시성(陝西省)에서 발생한 규모 8.0 이상으로 추정되는 지진으로 사망자가 83만 명으로 세계 역사상 최악의 지진으로 기록되고 있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556
– 현재의 산시성(섬서성, 빨간색)과 지진의 피해 지역(노란색)
중국의 등주지(鄧州志)에는 “서북쪽에서 비바람이 치고 맹수와 새가 울부짖더니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다”고 적혀 있다. 명나라 제11대 황제(재위 1521~1566) 가정제(嘉靖帝) 34년에 일어난 일이라 ‘가정(嘉靖)대지진’으로도 불린다. 진앙지는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산시성(陝西省) 화산(華山) 인근 화현(華縣)이었다.
중국 전역이 흔들렸다. 산시(陝西), 산시(山西), 허난(河南), 간쑤(甘肅),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후광(湖廣), 강소(江蘇), 안후이(安徽) 등 97개 주가 영향을 받았다. 여진은 6개월 동안 한 달에 3 ~ 4회씩 발생했으며 5년 동안 지속되었다.
지진은 자연과 생태계마저 변화시켰다. 지진 지대를 살펴 본 한 왕족은 ‘로서(露書)’라는 저술을 통해 “강줄기가 변하고 수위가 하락했으며 한겨울에 풀이 돋아났다”는 기록을 남겼다.
인명피해가 큰 이유는 탄광도 많았고, 이 지역의 거주방식이 야오동(Yaodong)이라고 하여 산의 사면에 굴을 파서 생활했기 때문에 굴의 붕괴로 매몰되어 이와 같은 큰 재난이 발생한 것이다. 범람한 강물이 할퀴고 간 자리에는 겨울이라 동사자가 속출하고 전염병까지 돌았다.
산시성과 성도 시안(장안)은 고대부터 중국 문명의 요람 중의 하나였다. 주(周)부터 당(唐)에 이르기까지 1,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13개의 왕조들이 이 지역에서 발흥하여 수도를 이 곳에 두었다. 산시성은 유럽, 아라비아, 아프리카로 이어졌던 비단길의 시점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힌 지진은 대부분 인구가 많은 거대 도시에서 발생했다. 산시성은 세계 4대 문명인 황하문명의 발상지다. 춘추시대 5패국 중 하나인 진이 있던 자리이고, 전국시대 조나라와 위나라가 세력을 키운 곳이기도 하다. 16세기 명나라 때에는 산시성에 부자들이 모여 살았다.
당시 명나라는 부패와 북로남왜에 시달리며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진 후 명나라는 재해 구호를 위해 국고에서 많은 자금을 배분하여 2년 연속 재정적자를 낳았으며 세금 감면 등으로 명나라의 국력과 재정 상태은 계속 악화되었다. 또한 이 때의 악화된 민심은 1590년 만력제 때 영하에서 발생한 보바이의 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1556년 광저우를 방문한 포르투갈의 도미니크회 선교사 가스파르 다 크루스(Gaspar da Cruz)는 1556년에 나타났던 혜성을 산시 대지진과 연관시켰다. 1569년 그의 책에서 혜성이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재난의 징조인지 궁금해했는데, 심지어 적그리스도 탄생의 신호일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산시 대지진과 관련된 내용이 보인다.(아래글 참조)
1880년 지진계가 발명된 이후로 지진의 강도를 계측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1960년 5월 22일 남아메리카 칠레의 항구도시 발디비아(Valdivia)에서 발생한 지진은 지진관측 기록사상 가장 규모가 큰 지진이다. 리히터Richter 규모 9.5~10.0도로 칠레 남부, 하와이 제도, 일본, 필리핀, 알래스카의 알류샨 열도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진앙은 칠레 발디비아 근처인 니에블라(Niebla) 서쪽 10km 지점으로 산티아고에서 700km 남쪽이었다. 이 지진으로 25m의 지진 해일이 일어나 칠레 해안을 강타하였다. 진앙에서 1만km 떨어진 곳에서도 10.7m의 파고를 보인 이 지진 해일은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의 힐로Hilo까지 황폐화시켰다. 1,655명이 사망하였고 하와이와 일본을 덮친 쓰나미로 200여명이 더 숨졌다.
2위는 1964년 알래스카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9.2였으며, 3위는 2004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9.1이었다.
조선왕조실록
– 명종실록 20권, 명종 11년 5월 18일 을해 1번째기사 1556년 명 가정(嘉靖) 35년
○ 영경연사 윤개가 호조에서 평안도의 곡식을 전용함이 불가함을 아뢰다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영경연사 윤개(尹漑)가 아뢰기를,
“신이 통보(通報)를 보니, 중국에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지고 평지에 산이 솟는 등의 변괴가 있었다고 하니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고사(古史)를 상고해 보니, 원 순제(元順帝) 때 산이 옮겨진 변괴가 있었습니다. 재변(災變)이 이와 같은데 어찌 사변이 없을 것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중국에 홍건적(紅巾賊)의 난과 같은 병란(兵亂)이 생긴다면 한 줄기 압록강(鴨綠江)만을 믿고서 견고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근래 평안도가 무사하다고 하여 호조에서 본도의 곡식을 전용(轉用)하고 있는데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이 무사한 뒤에야 우리 나라가 안전할 수가 있다. 평안도가 무사하다고 여기지 말고 본도로 하여금 견고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관련 사진>
– 동굴 주택 야오동(Yaodong)
시안(장안)의 소안탑(小雁塔)은 707년 고종의 아들 예종이 아버지를 공양하기 위해 세운 천복사(薦福寺) 경내에 있는 탑으로 원래 높이는 15층이었으나 1556년 산시 대지진 때 훼손돼 현재는 13층 높이의 탑으로 남아 있다.
또 다른 일화에 의하면 산시 대지진으로 탑의 가운데가 균열되어 탑이 두 부분으로 갈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1563년 다시 지진이 나 갈라진 부분이 원래의 모습으로 합쳐지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소안탑은 이처럼 지진으로 인해 갈라졌다 합쳐지는 일이 세 번이나 있었다고 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소안탑의 삼열삼합(三裂三合)이라고 부른다.
– 중국에서 피해가 컸던 지진들
<관련자료 및 참고자료>
위키백과 : 산시 대지진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Comet_of_1556
http://sillok.history.go.kr/id/kma_11105018_001
2019-01-11 조선 시대 황새와 개구리, 두꺼비의 패싸움
2007-01-22 [오늘의 경제소사/1월23일] 산시대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