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연기(緣起)

불교가 물질과 정신 현상의 근원을 해석하기 위해 사용하는 학설은 연기(緣起)이다. 원시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인도 · 중국 · 한국 · 일본 등의 모든 불교국가에서는 이 연기설을 그 중심사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연기설이 충분히 이해되면 불교 자체가 이해되는 것이다. 연기설이야말로 불교의 중심사상인 동시에 불교가 다른 종교와 철학과는 상위(相違)되는 불교특유의 특징이다.

 

연기(緣起)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 프라티트야 삼무파다(pratītya-samutpāda)를 뜻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 인과 연에 의지하여 생겨남, 인연따라 생겨남)의 준말이다. 프라티트야(산스크리트어: pratītya)의 사전적인 뜻은 ‘의존하다’이고 삼무파다(samutpāda)의 사전적인 뜻은 ‘생겨나다 · 발생하다’이다. 영어로는 ‘dependent origination’ 나 ‘dependent arising’로 일반적으로 번역된다.

 

연기는 후대에 와서 인연(因緣)이라는 말로도 쓰여지고 인과(因果)라는 말로도 혼용되고 있다. 이리하여 불교에서는 연기, 인연, 인과 이것이 진리의 기본이다.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이 연기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우주 간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모두 여러 인연이 화합해서 생겨난 것이고, 또 다양한 조건들의 변화와 소실로 인해서 우주만물은 변화하고 사라진다. 이른바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기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생겨야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어져야 저것도 없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유에 따르면 모든 사물과 현상에는 자성(自性)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모두 없어진다. 따라서 모든 것은 허상이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어떤 이들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나 원리로서 이 세계를 설명하려고 하는 반면에 불교의 우주관 내지 인간관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직접적인 요인과 간접적인 요인들이 서로 의존하여 생겨난다고 한다. 따라서 사물의 생성에 관여한 조건들, 혹은 구성 요소들 외에 어떠한 절대자나 근본 원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불교의 연기론적 우주관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유일신의 창조설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붓다는 우주를 창조한 근원자로서의 신이라는 영원한 존재가 있다는 주장을 상견(常見)이라고 비판하였다.

 

불교 초기 경전에 나오는 연기에 대한 주요 내용을 모아 보았다.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 것이요, 진리를 보면 바로 연기를 본 것이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곧 나 부처를 본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하던지 안하던지 항상 존재한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해탈을 성취해서 중생을 위해 분별 연설하며 깨우치나니라.”

 

“나는 그대들에게 인연법을 말하겠다. 무엇을 인연법이라 하는가? 그것은 곧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오늘날 우리는 현대의 성숙한 과학이라는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과학이란 이 세계, 이 우주, 이 인간에 대한 앎,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앎의 방식이다. 과학은 지식이요, 지식은 앎이요, 앎은 깨달음이다. 과학적 세계관의 특징이란 바로 인과적으로 사물을 파악한다는데 있다. 과학은 사물을 아무렇게나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모든 현상의 운동 · 활동체계가 반드시 어떠한 원인에 의하여 연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결정지우는 보편적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 보편적 법칙을 우리는 과학적 법칙(scientific law)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연기적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세계관과 과학의 세계관 사이의 유사성을 얘기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미래의 종교는 우주적인 종교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하느님을 초월하고, 교리나 신학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의 세계와 정신적인 세계를 모두 포함하면서, 자연과 정신 모두의 경험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감각에 기초를 둔 것이어야 한다. 불교가 이런 요구를 만족시키는 대답이다. 만일 현대 과학의 요구에 부합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곧 불교가 될 것이다.

 

붓다가 12인연(十二因緣) 또는 12연기(十二緣起)의 연기설을 가르친 이래 불교 역사에는 여러 가지의 연기설이 출현하였다. 부파불교의 업감연기(業感緣起), 중관파의 공 사상(空思想), 유식유가행파의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대승기신론》의 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화엄종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진언종의 6대연기(六大緣起) 등이 있다.

 

다음은 법륜스님의 강의에 나오는 12연기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무아 : 유무를 떠난 세계, 서로 연관 맺고 있다.

무상 : 시간의 연관성 – 존재는 늘 변화한다.

존재의 참 모습 : 삼법인 –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해 가는 인식론적 접근 : 십이연기법

노사(老死) – 생(生) – 유(有) – 취(取) – 애(愛) – 수(受) – 촉(觸) – 육입(六入,六處) – 명색(名色) – 식(識) – 행(行) – 무명(無明)

 

노사(老死) : 늙고 병들고 죽음 (괴로움)

생(生, 태어남)으로 노사가 있다.

 

유(有) : 습관이 남아있는 것 (씨앗)

취(取) : 의지 · 말 · 행동(행)

애(愛) : ‘~하고 싶다’는 애착

수(受) : 외부와의 접촉에서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느낌

촉(觸) : 명색과 육입의 만남

육입(六入) : 인식하는 6가지 감각 기관(육근六根)

명색(名色) : 인식하는 바깥 세계, 인식대상(육경六境)

식(識) : 현재 가지고 있는 습관. 업식(씨앗)

 

행(行) : 애, 취, 의지 작용

무명(無明) : 습관이 전혀 없을 때 근본 원인, 무지, 전도 몽상(顚倒夢想)

 

취에서 멈추는 것이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수(受 : 마음, feeling)를 잘 관찰하여 놓아 버려야 한다.

 

연기고리의 종착역은 무명(無明)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윤리적 과제 상황은 “무지”에 있다는 것이다. 즉 인생이나 사물의 진상에 관하여 밝은 앎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 모든 인간의 고뇌상황의 근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  김용옥(도올) / 통나무 / 2002.08.01

 

연기는 불교의 알파요 오메가다. 연기는 붓다의 처음이요 끝이다. 연기는 두 밀레니엄 이상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인류에게 끊임없는 지혜를 제공한 샘물이다. 연기는 45년간의 불타의 설법의 모든 구절에 배어있다. 불타의 모든 언어는 결국 연기 이 하나의 깨달음의 다양한 표현일 뿐인 것이다. 연기를 빼놓고는 한치도 불타를 말할 수 없다. 팔만대장경이 연기, 이 한 글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불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연기하면 곧 12지연기론(十二支緣起論)이니, 12지연기설이니, 12인연이니 하여 12개의 고리를 좌악 늘어놓는 것을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①노사(老死)–> ②생(生)–> ③유(有)–> ④취(取)–> ⑤애(愛)–> ⑥수(受)–> ⑦촉(觸)–> ⑧육처(六處)–> ⑨명색(名色)–> ⑩식(識)–> ⑪행(行)–> ⑫무명(無明) 운운… 그리고 삼세양중(三世兩重)의 인과(因果)니, 태생학설(胎生學說)이니 운운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12지연기론이야말로 근본불교의 요체며, 모든 현상이 일어나는 원리요 도리요 이법이다 운운!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을 들으면 당장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지고, 도무지 불교는 알 수 없는 먼나라의 이야기가 되고 말아지는 것이다. 연기론이라는 것이 또 하나의 원리적인 실체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붓다의 말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팔리장경 『중니까야』(中尼柯耶) 제28, 『상적유대경』(象跡喩大經)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있다.

연기를 보는 자는 곧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곧 나 부처를 본다.

이러한 말들은 우리에게 연기가 얼마나 부처의 사상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설파해주고 있지만, 이러한 말 때문에 또 연기가 곧 지고한 법, 무상의 원리라는 생각을 해서도 아니되는 것이다. 여기서 법(dhamma)이라고 하는 것은 도(道, Tao)와도 같은 지고한 원리가 아니라, 그냥 단순한 유위.무위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체의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는 자는 부처를 보는 것이라고 한 말은, 연기 그 자체가 지고의 법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의 방식으로 사물을 볼 줄 알아야만 곧 깨달음에 도달케 된다는 매우 단순한 뜻이다.

연기(緣起)란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 반드시 연(緣)하여 기(起)한다는 것이다. “연(緣)한다”는 것은 “원인으로 한다”는 뜻이요, “기(起)한다”는 것은 “생겨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연기란, “A로 연하여 B가 기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A를 원인으로 하여 B라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뜻이다. 요새 말로 하며는 “연기”란 원인과 결과를 뜻하는 것이며 그것을 축약하여 인과(因果, causation) 또는 인과관계(causational relation)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연(緣)은 원인이요, 기(起)는 결과라 말해도 대차가 없다. 보통 인연(因緣)이라 말할때, 그것은 인(因)과 연(緣)의 합성어인데, 보통 인(hetu)은 직접적 원인을 지칭하고 연(pratyaya)은 그 직접적 원인을 형성하는 주변의 조건들이나, 보조적인 간접원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초기불전에 있어서 대부분 인과연의 그러한 엄격한 구분은 존재치 않는다. 결국 인과 연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것은 요새말로 인과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과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을 것이요, 결과가 없으면 원인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인과를 원시경전은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규정하고 있다. 『잡아함경』권12에 이르기를:

나는 그대들에게 인연법을 말하겠다. 무엇을 인연법이라 하는가? 그것은 곧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권15에 또 말하기를: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아니, 결국 연기라는 게 이렇게 시시한 것인가? 우리가 어떤 사태를 말할 때,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다, 이따위 정도의 말이 싯달타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 무시무시한 무상정등정각의 전부란 말인가? 그렇다! 바로 그게 싯달타의 교설의 전부요, 불교(佛敎는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의 전부다. 불교는 이 한마디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다! 이 한마디를 벗어나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요, 사기요 이단이다!

 

연기·인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 매우 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연기(인과)라는 말이 우리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대각의 케리그마로 들리지 않고 진부한 속언처럼 시시하게 들리는 데는 크나큰 원인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연기적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금 말하는 “우리”는 역사적 우리다. 그 우리는 항상 시간성 속에 있는 우리다. 그것은 연기된 우리인 것이다. 이 역사적 우리를 특징지우는 것은 근대적 시민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근대적 시민으로서의 우리에게는 암암리 교육을 통해서 받은 공통된 세계관이 있다. 그 세계관이란 우리 주변의 사물을 인식하는 인식방법에 관한 것이다. 그 인식방법을 우리는 과학(Science)이라고 부른다. 과학은 스키엔티아(scientia)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지식(Knowledge)이란 뜻이다. 즉 과학이란 이 세계, 이 우주, 이 인간에 대한 앎,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앎의 방식이다. 과학은 지식이요, 지식은 앎이요, 앎은 깨달음이다. 이 과학이라는 깨달음이 보편화된 사회를 우리는 근대사회라고 부르고 있고 그 근대사회에 사는 사람을 근대시민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근대시민들이 교육을 통하여 공통적으로 형성한 과학적 세계관의 특징이란 바로 인과적으로 사물을 파악한다는데 있다. 과학은 사물을 아무렇게나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모든 현상의 운동·활동체계가 반드시 어떠한 원인에 의하여 연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결정지우는 보편적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 보편적 법칙을 우리는 과학적 법칙(scientific law)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법칙을 떠난 이 세계 이해방식을 미신이라든가, 초험적인 것으로 괄호에 넣거나 배척하거나 한다.

 

싯달타의 연기론을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진리체계로서 받아들이는 한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다. 최소한 이러한 모든 연기고리의 종착역은 반드시 무명(無明)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고통과 번뇌의 근원은 바로 이 무명(無明)이었다는 데 싯달타라는 대 사상가의 궁극적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다. “무명”이라는 한역술어는『초사』(楚辭)에 그 용례가 있지만, 그것은 분명 “명”(밝음)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앎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설정된 무지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윤리적 과제 상황은 “무지”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인생이나 사물의 진상에 관하여 밝은 앎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 모든 인간의 고뇌상황의 근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불교를 알기 쉽게

–  종범(승려) / 밀알 / 1984.03.01

 

불교의 입장을 단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불교는 연기론(緣起論)이요, 중도론(中道論) 입니다. 불교에 있어서 연기와 중도는 불교의 모든 것입니다. 연기는 불교의 원리를 설명한 부분이고 중도는 불교의 실천을 설명한 부분입니다. 이 연기의 진리에 의한 중도적 실천이야 말로 불교에 있어서 그 이상 가는 것이 없이 그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는 바로 연기의 진리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또 평생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은 바로 중도의 실천을 평생동안에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은 팔만대장경 어느 곳을 막론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전개되는 내용입니다.

소승불교 경전이나 대승불교 경전을 총망라해서 보더라도 연기의 내용과 중도의 내용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논리적 전개의 형태와 여러 가지 조직적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내용에 있어서는 연기와 중도를 떠나서는 불교는 그 입장이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예를 본다면 중아함경(中阿含經) 제7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 것이요, 진리를 보면 바로 연기를 본 것이다.” 약견연기(若見緣起) 변견법(便見法) 약견법(若見法) 변견연기(便見緣起)라고 함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바로 연기법을 의미합니다.

이 연기법에 있어서는 또 다른 부분에서 여러 차례 걸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잡아함경(雜阿含經) 제12권에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하던지 안하던지 항상 존재한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해탈을 성취해서 중생을 위해 분별 연설하며 깨우치나니라.”

이렇게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연기의 내용을 어떻게 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신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연기법이라고 한다면 그 연기법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바로 이렇게 나옵니다. 연기법이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연기를 설명한 중요한 골자입니다. 한문으로는 차유고(此有故)로 피유(彼有)하고 차기고(此起故)로 피기(彼起)라, 독생(獨生)을 해서 독존(獨存)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무엇과 서로 말미암아 일어나서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서로 의존하여 발생해서 공존하다가 사라질 때는 다른 것에 의존해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연기입니다.

……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저것이 없어지면 이것도 없어진다 하는 것이 바로 연기의 기본 골격입니다. 이 연기는 후대에 와서 인연(因緣)이라는 말로도 쓰여지고 인과(因果)라는 말로도 혼용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불교에서는 연기, 인연, 인과 이것이 진리의 기본입니다.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서로 말미암아서, 서로 어울려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인과라는 것은 시간적인 입장에서 관찰한 것으로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는 바로 원인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있을 수가 없고 또 결과를 떠나서 원인을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인과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연기론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이라고 하더라도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고, 정신이라고 하더라도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천지 만물은 모두 이것 저것이 서로 어울려진 인연의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천지 만물이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하는 뜻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 입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재가 있는 것은 현재가 있을 수 있는 과거의 인연에 의해서 일어났고 그 과거는 또 그 과거의 인연에 의해서 일어났고 또 그 과거는 그 과거에 의해서 일어나서, 이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로 따져봐도 과거가 끝이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현재는 미래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그 미래는 또 그 미래의 결과를 만들어내서 미래로 따져봐도 연기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과거를 추적해 봐도 과거가 끝이 없고 미래를 추적해 봐도 미래가 끝이 없습니다. 이 인연의 연기법칙으로 볼 때 우주 현상은 사실에 있어서 시작도 없는 것이요, 끝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 합니다. 바로 시작도 끝도 초월한 것이 무시무종입니다.

그렇다면 무시무종에 있어서 무엇만이 존재하는 것이냐 할 때 바로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삼생연기(三生緣起)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에 의한 삼생 인연으로 계속해서 이 끝없는 연기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연기론입니다.

이에, 있는 현상이나 없는 현상은, 없는 대로 무슨 실체가 있고 있는 대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모이면 있을 수도 있고 인연이 흩어지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있고 없는 것은 인연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건 부질없는 것이요 덧없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무상(無常)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부질없다는 것입니다. 왜 부질없는 것이냐? 모든 현상은 전부가 인연에 의해서 생겼다가 인연에 의해서 흩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인연의 현상은 무상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있는 것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없는 것에도 집착하지 아니 하는 것을 그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있고 없는 것은 인연에 따라서 항상 가변적이기 때문에 있는 것만을 실상으로 볼 수도 없고 없는 것만을 실상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있어서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모두 초월해서 자유자재하는 것이 중도(中道)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흔히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는 유신론이라 해도 연기법에서 어긋나는 것이요, 무신론이라고 해도 연기법에서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불교는 유신론도 아니고 무신론도 아닙니다. 바로 연기론이요 중도론입니다.

 

불교의 기본교의로는 삼법인(三法印)과 사성제(四聖諦)가 제일 중요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삼법인이나 사성제는 그대로 불교의 연기론과 중도론을 설명한 것입니다.

특히 이 삼법인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 있어서 우주관이며, 사성제라고 하는 것은 인생관에 해당합니다.

 


경전으로 본 세계종교

–  편집부 / 길희성 역 / 전통문화연구회 / 2001.09.10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연기론(緣起, pratītyasamutpāda)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연기론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조건지워져 있으며 상대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는 이론이다. 연기의 진리는 다음과 같은 짧은 문구로 표현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저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소멸할 때 저것이 소멸한다.” 초기 경전에는 이러한 연기의 원리를 12인연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브라흐마자라경》에서 부처님은 창조주와 주재자로서의 신의 개념을 부정하고, “여래는 이러한 신의 개념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다. 여래가 이 세상에 나타나든 출현하지 않든간에 현상의 본성, 현상의 규칙적인 형태나 조건성으로서의 연기법은 존재하며, 다만 여래는 이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드러내 보이셨다는 것이다.

……

불교는 우주를 비롯한 모든 사물의 궁극적인 시초를 상정하지 않는다. 붓다는 우주를 창조한 근원자로서의 신이라는 영원한 존재가 있다는 주장을 상견(常見)이라고 비판하였다. 불교에서 세계는 신이 만든 창조물도 신의 육신 그 자체도 아니라고 본다. 세계나 우주는 어떤 원인이 있으므로 관계가 일어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연기론적 우주관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유일신의 창조설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철학의 맥

–  한자경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 2008.08.06

 

인간 사회 내지 자연세계를 포함한 개체적 현상세계를 질서잡는 원리를 유교는 절대적인 원리인 리(理)로 간주하는 제 반해 불교는 그것을 현상세계에서만 타당한 윤회 연기의 원리, 즉 연기법이라고 본다. 유교에서 리는 형이하의 기(氣)를 운행하게 하는 형이상의 원리로서 기의 현상세계가 그에 따라 움직이며 그 현상을 통해 실현되어야 할 궁극적 가치로 간주된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의 연기법은 세간 형성의 원리일 뿐 그 이상이 아니다. 연기법은 업에 따라 유정 및 세간이 형성되는 원리로서, 그에 따라 인연 화합하여 형성된 제법은 자기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의 것, 가(假)일 뿐이다. 결국 불교에 따르면 리 내지 성은 세간을 넘어선 절대적 형이상의 원리가 아니고 단지 세간형성의 원리이며 그러한 원리적 규정들은 세간적 한계를 넘어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에 따라 현상세계를 이루는 각 개체는 자기 고유의 자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연화합(衆緣和合)해서 형성되는 무자성의 존재다. 무자성이므로 공(空)인 것이다. 공인 것을 모르고 그 각각을 고유한 존재로 생각하고 자성적 본질이 있다고 간주하여 그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을 불교는 경계한다. 각각이 무자성이고 따라서 공임을 알아 현상적 규정성에 고착하거나 집착하지 말 것을 권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는 리의 객관적 실재성을 확신한다. 그것이 인륜이 되고 천지만물의 생성 원리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불교는 그처럼 도덕법칙이나 자연법칙으로 고정화되고 절대화된 원리들이 실은 인간의 관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유교에서 기의 근원으로 간주되는 리와 같은 원리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관련 그림>

 

– 땅을 만지는 자세의 붓다 (항마촉지인)

마왕 파순(波旬)이 만약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으면 일체 중생이 구제되고자기의 위력은 당연히 감소될 것으로 생각하여 권속을 이끌고 여러 가지 방해 공작을하였다. 처음에는 미녀를 보내어 쾌락으로 석가모니를 유혹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못하자, 마왕은 마침내 모든 군세를 동원하여 힘으로 석가를 쫓아내려하였다. 마왕이 칼을 들이대면서 석가모니에게 물러나라고 위협하자, 석가모니는 ‘천상천하에 이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다. 지신(地神)은나와서 이를 증명하라’고 하면서 오른손을 풀어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땅에대었다. 그러자 대지의 어머니 여신인 지신(地神)이 홀연히 뛰쳐나와 이를 증명하였는데, 이때의 모습이 항마촉지인이다. 따라서 이 수인은 석가모니만이 취하는 인상이다.

그리고 그날 밤, 붓다는 첫 번째 응시에서 전생에 대한 앎을 얻었고, 두 번째 응시에서 신성한 눈을 얻었고, 마지막으로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얻었다. 그리고 동틀 무렵 완전한 앎(全知)을 얻었다.

 

 

 

– 육도윤회도(六道輪廻圖), 티베트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장자리 원에는 12연기(十二緣起)가 그려져 있다. 위 오른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

1. 무명(無明) – 인도되는 눈먼 여인

2. 행(行) – 도공

3. 식(識) – 원숭이들

4. 명색(名色) – 나룻배로 실어나르는 사람

5. 육처(육입六入) – 창문이 달린 집들

6. 촉(觸) – 연인들

7. 수(受) – 화살에 눈이 찔린 사람

8. 애(愛) – 술 마시는 사람

9. 취(取) – 틈새로 손을 뻗는 사람

10. 유(有) – 나무 옆에 있는 사람

11. 생(生) – 아이 낳는 여인

12. 노사(老死) – 들개와 독수리에게 뜯어먹히는 시체

 


<관련 동영상>

 

– 법륜 스님 근본 교리 1강 십이연기 1 : https://www.youtube.com/watch?v=9JUfam1Q9zI

– 법륜 스님 근본 교리 2강 십이연기 2 : https://www.youtube.com/watch?v=gkbCndjwGi8

– 법륜 스님 근본 교리 3강 십이연기 3 : https://www.youtube.com/watch?v=Yz1TZv1lVEs

– 도올 – 05 싯달타의 깨달음 연기 : https://youtu.be/sd3soczgH7g

 


<관련자료 및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연기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항마촉지인

2019-03-21  [기고]“불교 핵심은 윤회가 아니라 연기다”

2016-01-05  [전문] 조계종지의 현대적 구현 – 현응스님의 발제문을 읽고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받아든 진짜 이유는?

 

불교의 연기(緣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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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불교의 연기(緣起)

  • 2021년 11월 19일 at 11: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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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선생이 잘못 말하고 있네요. 인과 연은 인과 관계가 아니라 기대어 있는 관계입니다.
    A이기 때문에 B이다. 가 아닙니다.
    연기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A는 B를 기대어 A라고 한다.
    따라서 B가 없이는 A는 단독으로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입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신이 있다고 한다면 기독교처럼 하나님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신과 신자라는 믿는 존재가 함께 해야 비로서 신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든다면 시간과 공간을 예로 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어제가 있기때문에 오늘이 있는 것이고 저기가 있기 때문에 이곳이 있습니다. 오늘이 단독으로 있을 수 없고 이곳이 단독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부정이 되고 자아(나라고 할 만한 것)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그것이 연기법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사항입니다.
    따라서 연기법은 속박받는 모든 것들에 대한 실체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속박은 누군가에 의해서 또는 나의 내제된 것들에 의해서 연기되는 것이다. 그 것에 기대어 있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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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 11월 20일 at 10: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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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천천히 다시 곱씹어보겠습니다.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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