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는 “인류가 겉으로 또는 진짜로 공통의 맥박을 치는 듯이 보이는 시대가 이따금 있기는 했다.”라고 말하면서, 그 예로 기원전 500년 전후의 종교적, 철학적 운동을 언급했다.
현재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원전 5세기 전후의 중요한 사상가에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중국의 공자, 인도의 부처, 아테네의 소크라테스가 있다. 또한 아직도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교와 대표적인 정치체제인 민주주의, 공화국의 탄생도 이 무렵이다.
야스퍼스(Karl Jaspers)는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의 시대가 인류의 역사에 기축을 형성했다고 평가하고 1949년 <역사의 기원과 목표The Origin and Goal of History>에서 ‘기축시대의 문명(Axial-Age Civiliza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에 일어난 영적 과정이 그와 같은 축을 형성하는 듯하다. 그 시기는 오늘날의 인간과 같은 인간이 출현한 시기였다. 이 시기를 ‘기축시대(차축시대, 축의 시대)’라고 부르도록 하자. 비범한 사건들이 이 시대에 몰려 있다.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가 살았다. 중국 철학의 모든 경향이 이 시기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시기는 또한 맹자와 장자, 그 밖의 많은 철학자들의 시대였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와 부처의 시대였다.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회의주의, 물질주의, 궤변법, 허무주의 등을 비롯하여 온갖 철학의 시류가 이 시기에 태어났다. 이란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우주의 작용이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도발적 주장을 펴나갔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제2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이 활약했다.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와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등의 철학자, 비극시인 투키디데스, 아르키메데스 등이 나타났다. 고작 몇 세기에 걸쳐서 이 모든 이름들이 뜻하는 거대한 변혁이 중국, 인도, 서양에서 독립적으로, 그리고 거의 동시에 일어났던 것이다.
이 시대의 새로운 점은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존재 전체와 자신과 자신의 한계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의 공포와 자신의 무력함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급진적 질문을 던지게 되었고 해방과 구원을 추구해나가는 길에서 깊은 심연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의식적으로 이해하면서 스스로 지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또한 자아의 깊이와 초월의 명료함에서 절대성을 경험하게 되었다.
야스퍼스에게 ‘축의 시대’는 그리스-중동-인도-중앙아시아-중국에 분포한 사회들이 비슷한 경험을 한 괄목할 만한 시기이자, 인간 역사의 등대 같은 시대였다.
비교종교사학자인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교수는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유교, 도교, 고대 그리스 철학, 초기 유대교에서 발전한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기원전 6세기에 출현한 정신문명이 지금까지도 줄곧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간주하고 있다.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를 인류 역사상 가장 창의적이고 경이로운 시대(축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참고로 마르크스는 세계사의 진행과정을 “원시공동사회 -> 노예사회 -> 봉건사회 -> 자본주의 사회 -> (프롤레타리아 독재) -> 사회주의 · 공산주의 사회”로 구별하며, 야스퍼스는 “선사시대 -> 고대 고도문화 -> 차축시대 -> 과학기술시대 -> 제2의 차축시대”로 나누고 있다.
이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차축시대라는 아이디어가 과연 실증적 증거에 충분히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의심한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인 디아메이드 맥클로흐(Diarmaid MacCulloch)는 야스퍼스의 ‘차축시대’를, 서로 다른 4개 문명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다양성을 묶어버리는 ‘헐렁한 괴물 baggy monster’이라고 불렀다. 또한 Iain Provan은 2013년 그의 저서 『Convenient Myths: The Axial Age, Dark Green Religion, and the World That Never Was』에서 포괄적인 비판을 가했다.
이언 모리스(Ian Morris)는 ‘축의 시대’에 실제로 관찰 가능한 유일한 통일성은 동양과 서양 사상의 다양성뿐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그는 사회가 발전하면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문화를 얻었으며 축의 사상은 사람들이 중앙집권적 국가를 탄생시키고 세계에서 마법을 제거할 때 발생하는 여러 결과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고 했다.
마틴 버낼(Martin Bernal)은 어떤 점에서 차축시대라는 전체 도식은 유럽 중심주의인 아리안모델의 재강화만이 아니라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즉, 거대한 청동기시대 문명의 과학적 · 철학적 · 종교적 중요성을 부정함으로써 차축시대라는 개념은 그리스 문명의 근원으로서 따라서 유럽 문명의 근원으로서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이집트를 배제한다. 그것은 또한 상고기 및 고전기 그리스를 선봉에, ‘진정한 문명’의 중심에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오다 마코토(小田実)도 야스퍼스의 ‘차축시대’라는 아이디어는 그리스를 노출시키려는 ‘숨겨진 의도’이며 이는 ‘유럽인’이 문명 세계의 출발선에 동참했다는 주장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야스퍼스 자신이 상정한 ‘논지’, 즉 차축시대에 중국, 인도, 서양에서 공통적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겉보기만의 것이 아닌지, 차축시대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 판단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러한 평행 관계에 역사적 성격은 인정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나 비판은 여전히 활보할 것이다.
세계사 연표도 같이 보면서… 참, 그러고 보니 공통의 맥박이 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와도 무언가 상관이 있을 것도 같다.
– 청동기 시대의 붕괴 : http://yellow.kr/blog/?p=3567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500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중국 고대 사상의 세계
– 벤자민 슈워츠 / 나성 역 / 살림 / 2004.02.28
이 책의 시기가 이어지는 중국 사상사 전체에 미치는 중요성을 떠나, 나는 마땅히 칼 야스퍼스의 책, 『역사의 기원과 목표 The Origin and End of History』의 “기축(基軸) 시대(axial age)”에 관한 장에 보이는 그의 “세계 · 역사적” 관측의 유형도 중국 고대 사상에 관한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는 점을 고백해야 한다. 이 작은 책에서 야스퍼스는 근동, 그리스, 인도, 중국 등 고대의 고등 문명권에 속하는 많은 나라들에서 시간적으로 기원전 천년에 걸친 기간 동안 출현한 “창조적 소수들”이 반성적, 비판적, 심지어 초월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방법들을 통해 자신들을 그들의 모태 문명들에 연결시켰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
대부분의 역사적 변화가 그렇듯이, 물론 이러한 “돌파breakthroughs”에는 절대적 시발점이 없다. “문명에 대한 불만”은 매우 일찍 시작했음이 분명하다. 소르킬드 제이콥슨(Thorkild Jakobsen)은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문헌들에서 초월적인 종교적 태도들이 시작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집트에는 지혜의 문서가 존재한다. 중국 『시경詩經』에 보이는 의문을 가진 채 피안을 희구하는 태도들은 아마 훨씬 이른 시기에서 유래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특정 개인들과 결합된 이러한 경향들은 우리가 이 책에서 검토하려는 수세기 동안 비로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
공자가 “차안적(此岸的)”이며 “인본주의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두 주장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공자의 사상을 당시 다른 고등 문명에 속했던 다수의 주도적 인물들의 사상과 구별하지 못한다. “차안적”과 “종교적”은 결코 대립 범주가 아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아리안족의 인도, 그리스, 중국의 종교들은 모두 현저하게 차안적이다. 이집트인들은 이 세상을 다음 세상으로 옮기는 일에 열정을 바쳤지만, 나는 바로 그 열정 때문에 이집트를 여기에 포함시킨다. 이러한 모든 문명의 신과 영령들은 차안적 관심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자연과 문명의 위력을 구현하며, 주재한다. 중국에서 상(商)나라의 종교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모든 문명에서 기축 시대(axial age)가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상 직전 세기들의 종교에서 보이는 세계와의 절대적 연루를 거부하는 일종의 초월적인 윤리적 반응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 반응은 반드시 극도의 피안적 형식을 갖지는 않는다. 성경의 신은 초월적이다. 그러나 그가 모세에게 보이는 것은 분명한 차안적 율법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피안적 잠재성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은 차안의 임무에 열성의 정도를 달리해 가며 전념했다. 인도에서조차, 우파니샤드의 브라흐만 종교에는 개인 금욕주의자들이 번성했음에도, 그들은 가장의 현세적 의무에 변함없는 열과 성의를 다했다. 오직 원시불교만이 승려에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 극단적 포기를 요구했던 것 같다.
블랙 아테나 2
– 마틴 버낼 / 오흥식 역 / 소나무 / 2012.03.25
『서경』과 『죽서기년』의 연대에 관한 회의론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우리가 더 잘 안다’의 관점에서, 그리고 독일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가 가장 명백히 표현한 ‘기축시대Axial Age’라는 널리 퍼진 개념의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 도식에 따르면, 기원전 1천년기 중반에 불가사의한 삼투현상에 의해 동시적인 문화적 약진이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이란에서는 조로아스터에 의해, 인도에서는 부처에 의해, 중국에서는 공자와 도교의 창시자 노자에 의해 약진이 이루어졌다.
이 도식은 이란 · 인도 · 중국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확립되었을 때 유행했던 다른 개념들보다 덜 유럽중심적이다. 흥미롭게도, 놀라운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약진의 본질은 다소 불명확하다. 중국학 학자 벤자민 슈워츠는 기축시대라는 주제로 열린 두 학회에서 연구를 위한 ‘기축’의 정의를 성공적으로 제시하였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기축’운동에서 공동으로 깔린 자극이 있다면, 그것은 초월을 향한 긴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내가 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은 그 단어의 어원적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뒤로 물러나 그 너머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한 새로운 조망을 말한다. … 이러한 초월적 약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모으면서, 우리는 예언자, 철학자, 현인의 작은 무리가 지닌 의식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이 직접 접촉하고 있는 주변에 매우 작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 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원전 3천년기와 2천년기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사제들에게 정확히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 변형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일까? 어떤 점에서 기축시대라는 전체 도식은 아리안모델의 재강화만이 아니라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거대한 청동기시대 문명의 과학적 · 철학적 · 종교적 중요성을 부정함으로써 기축시대라는 개념은 그리스 문명의 근원으로서 따라서 유럽 문명의 근원으로서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이집트를 배제한다. 그것은 또한 상고기 및 고전기 그리스를 선봉에, ‘진정한 문명’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제1권에서 나는 기축시대라는 개념에 반대하는 견해를 제기했다(그 생각이 그리스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축시대라는 개념에 근거한 이란에 대한 언급은 매우 의심스럽다. 위대한 종교개혁가 조로아스터가 기원전 2천년기에 살았다는 강력한 주장이 나왔다. 공자는 그가 고대 문화의 전달자라고 주장했고, 기원전 550년경 자신이 출생하기 1,000년 전에 매우 ‘공자적인’ 방법으로 행동하는 엘리트 계층의 존재를 마음 속에 그리는 데 별다른 어려움도 없었던 것 같다. 『서경』의 고대성을 역설하는 주장에 대한 신뢰성이 점증하는 것으로 보건대, 기원전 2천년기 후반에 그리고 아마도 더 이르게는 중반에도 완전히 ‘공자적인’ 세계관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기축시대’의 중국이라는 ‘버팀대’는 이제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기로에 선 그리스도교 신앙
– 로이드 기링 / 이세형 역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5.03.15
문명화된 세계는 비교적 소수의 독립적인 문명의 유형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각각 특정한 종교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고, 또한 그 종교에 의해 구별될 수 있는 유형들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의 서구(the Christian West), 이슬람의 중동(the Islamic Middle East), 힌두교의 인도(Hindu India), 불교의 동양(the Buddhist Orient) 등이다. 중국은 토착종교인 유교와 도교가 평화롭게 공존했던 보다 다원적 상황을 견지해왔다. 물론 이들 토착종교들은 때로 외국으로부터 유입된 불교와의 쉽지않은 공존을 경험해야 했다. 종교적 전통들에 대한 이런 넓은 구분 속에는, 유대교인, 자이나교도(Jains), 파시교도(Parsis), 시크교도(Sikhs)와 같은 소 종교들뿐 아니라 여러 하부 변용(變容)들이 있었다.
……
대략 6세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구 세계는 나사렛 예수가 탄생했다는 해를 기점으로 년 수를 계수하여 왔다. 이로써 예수가 탄생한 해를 기점으로 역사를 둘로 나누었다. 이런 맥락에서 헤겔조차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로부터 와서 그리스도에게로 향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역사의 축(軸 axis)은 그리스도교적인 전제에서만 타당하기 때문에, 야스퍼스는 소위 문명세계라 일컬어지는 전체 세계에 맞는 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역사의 축은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에 일어났던 인류의 정신적인 발전 과정 가운데 기원전 500년을 전후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분명한 역사의 구분을 만나게 된다. 이때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식하는 인간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기간을 일컬어 우리는 ‘차축시대(Axial Period)’라 할 수 있다.”
아놀드 토인비(Anold Toynbee)가 고등종교(higher religions)라 일컫는 문명화된 세계의 종교들은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유교, 도교와 같이 차축시대에 그 기원을 갖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시크교와 같이 차축시대에 등장한 종교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야스퍼스가 정한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의 한정된 기간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너무 엄격하게 적용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마하비라(Mahavira, 기원전 6세기 인도인으로서 자이나교의 창시자), 고타마 붓다, 공자, 노자, 장자, 그리고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이 시기의 인물들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초기 문명들에 나타난 고대종교의 특성을 기술하지 않겠다. 이제 간략하게 검토하게 될 원시종교들의 특성들은 또한 초기 도시사회의 종교들에도 상당부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도시사회의 종교들은 보다 세련된 형태로 일어났기 때문에 도시사회의 종교들과 차축시대 이후의 종교들 사이의 차이는, 원시종교들과 차축시대 이후의 종교들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만큼 그렇게 현저한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우리가 고대종교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두 번째 이유와 연결된다. 즉 초기 문명에 나타난 고대종교들은 차축시대의 도래를 경험하면서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고대종교들은 차축시대 이후의 종교의 초석이 되었고, 그런 점에서 차축시대 이후에 남겨졌거나, 혹은 대체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아즈텍 문명과 잉카 문명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대세계가 도래한 시점에서 고대종교의 순수한 형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미개한 세계의 원시종교와 문명화된 세계의 차축시대 이후 종교 사이의 대조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
유대교와 힌두교, 그리고 유교는, 앞서 말한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처럼 분명하게 차축시대 이후의 특징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들은 성격상 보다 인종적인 특징을 가지며, 세계관에 있어서는 보다 일원론적 특징을 지니고, 보다 실용적이며 비선교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유대교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출현에 모체가 된 반면, 힌두교는 불교의 모체가 되었다. 그럼에도 유대교와 힌두교, 그리고 유교를 차축시대 이후의 범주에 놓는 이유는 이들이 여전히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고, 또한 이들을 모체로 해서 나온 종교들이 이들 종교들을 대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축시대 이후 종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들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전에 만났던 차축시대 이전의 종교들을 대치하던지, 아니면 앞지르던지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대교는 그리스도교 국가와 이슬람 세계에서 견고하게 그 정체성을 견지했다. 불교는 그 발원지에서 힌두교를 대치하기보다는 오히려 힌두교에게 먹혀버리고 말았다. 불교는 중국의 유교와 도교를 결코 대치할 수 없었고, 이들 종교와 함께 공존하게 되었다.
일단 차축시대 이후의 종교들이 탄생하게 되면, 환경이 허락하는 한, 이들은 자신들의 시원지에서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차축시대 이후의 종교들은 특정한 인종적 혹은 지리적 단체의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조건의 필요에 응답함으로써 보편적인 종교가 되었다. 예를 들면, 불교와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지구적 종교가 되고자 무척 노력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최종적으로 만났던 지리적 경계선까지만 최대치의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들은 서로를 대치하지 못했고, 대신에 그리스도교의 서구, 이슬람의 중동, 불교의 동양을 만들어 내었다.
지연문명
– 르우안웨이 / 최형록,김혜준 역 / 심산 / 2011.05.10
공간적 각도에서 볼 때 이 4대 종교(기독교, 동방정교, 이슬람교, 유대교)와 이에 대응되는 문명은 모두 동일한 하나의 지연(地緣) 세계, 즉 서아시아 일대인 지중해 세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기원전 약 3000년쯤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 유역과 이와 인접한 나일 강 유역에서 문명이 탄생했다. 기원전 15세기 초기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 3세는 서아시아에서 자주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때부터 가장 오래된 두 문명들은 밀접한 상호 작용을 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6세기 초기 페르시아인은 지리적으로 세 개의 대륙을 통합하는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여 이 두 지역을 더욱 긴밀하게 하나로 연결시켰다. 이때부터 두 지역은 심도있고 풍부한 문화적 융합 과정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말 변방지역에 위치하던 반 그리스화된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 세계를 정복했고, 이후 다시 이집트와 모든 서아시아를 정복하여 방대한 그리스 제국을 건설했다. 이는 곧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 유역과 나일 강 유역의 문화 일체화 과정을 빠르게 진행시켰고, 마지막에는 시리아와 그리스 문명의 통합 위에 세운 3개의 새로운 문명인 기독교와 이슬람교 및 동방정교 문명이 형성될 수 있었다.
……
고사 직전 단계에 있던 로마 제국 말기에, 그리스 문명은 기독교 형식의 시리아 문명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한 대문명이 다른 대문명 속으로 사라진 예로 볼 수 있지만, 단순하게 하나의 윤리 종교가 다른 윤리 종교를 대체했다고 간주할 수는 없다. 한 위대한 추축시대 문명이었던 그리스 로마 문명은 분명 추축시대적 의미에서 심오한 철학 · 과학 · 문학 · 예술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후 기독교 성분이 되는 많은 문화 요소들이 지중해 인류 집단들에게 오랫동안 유행하였고, 또한 이 집단들 속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완전한 윤리 종교가 출현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윤리 종교의 근본적 성격은 공리주의이지만, 그리스 문명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의 정치적 통일기에도 이러한 종류의 개인주의적 정신 자질은 근본적으로 약화되지 않았다. 발전 추세로 보면 후기 스토아철학과 신플라톤주의가 모두 일종의 윤리 종교적이고 공리주의적 문화적 품격을 앞세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상류 계층에 유행하는 수준 높은 사상을 수많은 군중에게 보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 문명이 지속하지 못한 혹은 그 쇠망의 운명을 되돌릴 수 없었던 한 중요한 원인으로, 시기적절하게 윤리 종교의 문화적 품격이 그리스 문명에 확산되고 형성되지 못했다는 이러한 사실을 거론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스 문명이 더욱 공리주의적인 윤리 종교 형태인 시리아 문명으로 대체된 것은 역사적 필연이고, 또한 고대 개인주의의 실패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고대의 개인주의적 문명이 신형의 공리주의적 문명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일종의 윤리 종교가 다른 일종의 윤리 종교로 치환되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
서양 문명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시리아 문명과 그리스 로마 문명이란 두 추축시대 문명의 통합에 있다. 야만족인 게르만의 고유 자질 또한 이 통합 속에 참여했다. 그렇다면 그리스와 시리아 문명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들은 또한 각자 여러 추축시대 문명, 예를 들면 이집트 · 수메르 · 바빌로니아 · 크레타 · 미케네 · 히타이트 문명이 혼합된 산물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서양 문명 혹은 어떠한 문명도 모두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앞서 제기한 것처럼 순수한 혈통을 가진 문명 혹은 민족은 있을 수 없다.
……
세계 차원에서 비록 전 지구화의 기세가 대단히 왕성하기는 하지만, 기원전 8세기~기원전 2세기 추축시대에 형성된 각 주요 문명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견고한 정신적 핵심들과 선명한 기호 상징들을 가지고 있다. 각 주요 문명들이 비록 사물과 제도 심지어 관념 측면에서도 이런저런 커다란 변화를 겪었지만, 본질적인 역사적 문화 규정성은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았다. 실제로 서양인에게 멸망한 두 라틴 문명을 제외하고는 근대 이후 각 주요 문명의 본질적 자질들에는 실질적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문명 간에 비록 대화를 할 수도 있고 대화 속에서 상호 양해와 이해를 추구할 수도 있지만, 상당히 큰 부분에서 문명 간의 차이는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각 주요 문명은 여전히 생명 형태에서는 나누어질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 이언 모리스 / 최파일 역 / 글항아리 / 2013.05.27
제2차 세계대전 말 자기 시대의 도덕적 위기를 해명하려고 애쓰던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기원전 500년 무렵의 시대를 “축의 시대”라고 불렀는데 역사가 전환하는 축을 형성한 시기란 뜻이다.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이 출현했다”고 거창하게 선언한다. 축의 시대에 쓰인 저작들 – 동양의 유교와 도교 경전, 남아시아의 불교와 자이나교 경전, 서양의 그리스 철학 문헌과 구약성서(그리고 구약성서의 후신인 신약성서와 코란도) – 은 고전, 즉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규정해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 되었다.
이것은 글을 전혀 혹은 거의 남기지 않은 부처나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위업이었다. 때로는 훨씬 후대 사람인 그들의 후계자들은 그들의 말을 기록하거나 윤색하거나 완전히 지어내기도 했다. 창시자들이 진짜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흔히 아무도 알지 못했으며 격렬하게 반목한 그들의 후계자들은 협의회를 열고 파문을 주고받으며 상대방을 더 먼 암흑의 세계로 내동댕이쳤다. 지금까지 현대 문헌학의 위대한 승리는, 이 후계자들이 갈라서고 싸우고 저주하고 서로 박해하는 틈틈이 성전을 그렇게나 여러 차례 쓰고 또 고쳐 썼기 때문에 교리의 원래 의미를 찾아 문헌을 낱낱이 걸러내는 작업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
언제나 이러한 과정은 신과 같은 왕에게 의존하지 않는, 심지어 그 문제라면 신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초월을 향한 개인적인 내면의 방향 전환, 자기 변화의 과정이었다. 사실, 초자연적인 힘이란 축의 사상에서는 흔히 핵심이 아니다. 공자와 부처는 신에 대해 논의하기를 거부했다. 소크라테스는 비록 신을 공경한다고 고백했지만 부분적으로는 아테네의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랍비는 유대인에게 신은 감히 형언할 수 없기에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를 과도하게 찬양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축의 사상에서 왕은 신보다 처지가 더 나빴다. 도가 사상가와 부처는 대체로 왕에게 무관심했지만 공자와 소크라테스, 예수는 왕의 윤리적 허물을 공공연하게 질타했다. 축의 비판은 사회 고위층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며 출생과 부, 성별, 인종, 사회계급에 대해 제기된 새로운 질문들은 적극적으로 반문화적인 의미를 띨 수도 있었다.
……
…… 진정한 원동력은 빙하기 말 이래로 그래왔던 것과 똑같았다. 게으름과 탐욕,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일을 하는 데 더 쉽고 더 이득이 되고 더 안전한 길을 찾았고 그 과정에서 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 더 먼 곳까지 가서 교역을 했으며 더 커다란 도시에 정착했다. 이어지는 다섯 장에서 수차례 반복될 패턴에서 사회발전지수가 올라가면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문화를 얻었다. 축의 사상은 사람들이 고가 국가(중앙집권적인)를 탄생시키고 세계에서 마법을 제거할 때 발생하는 여러 결과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기원 전후 천년사, 인간 문명의 방향을 설계하다
– 마이클 스콧 / 홍지영 역 / 사계절 / 2018.08.03
1949년에 독일 역사가 카를 야스퍼스의 유명한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가 출간된 이래 이 시대는 지구사(global history)의 존재 이유를 명백하게 뒷받침하는 중요한 시기로 크게 주목받았다. 야스퍼스는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를 ‘축의 시대(Axial Age)’로 정의했다. 지중해에서 중국에 걸친 고대 문화와 문명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옛 지혜를 거부하고 철학 · 과학 · 종교 · 정치 분야에서 새로운 이해와 설명을 추구했던 시대를 의미하는 용어다. 야스퍼스에게 축의 시대는 그리스-중동-인도-중앙아시아-중국에 분포한 사회들이 비슷한 경험을 한 괄목할 만한 시기이자, 인간 역사의 등대 같은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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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다른 세 사회(아테네, 로마, 춘추시대의 노나라)에서 나란히 출현한 사회 관계가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이다. 공자는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질 중국의 교육 · 철학 · 법 · 정의 · 통치를 규정한 독보적인 인물이다. 로마 공화국의 체제와 정치사상의 영향력은 미국 의회가 위치한 워싱턴 D.C.의 ‘캐피틀힐(Capitol Hill)’이나 1999년까지 현대 이탈리아 법관의 직위 가운데 로마 공화국의 ‘법무관’에서 이름을 따온 ‘프라이토르(praetor)’라는 직위가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대의제 형태인 현대 민주주의가 아테네 민회(에클레시아, ekklesia)의 직접 민주주의- 참여 자격이 제한적이었지만 -에 비해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1993년에 전 세계가 민주주의 탄생 250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고대 아테네에 진 빚과 데모크라티아(demokratia, 민중에 의한 통치)의 생명력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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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아테네-로마-노나라에서는 극도로 독재적인 통치 방식으로 인해 누적된 불만, 갈등과 사회불안으로 점철된 현실보다는 더 나은 이상 사회를 향한 갈망이 변화를 촉발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혁명은 공동체의 주도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로드맵도 없이 시작되었다. 반대로 중국에서는 국가 통치 방식의 변화를 정교하게 설계했다. 그는 새로운 사상을 도입한 혁신자라기보다 옛 사상의 ‘전수자’라는 입장을 취했지만, 아마도 자신의 사상과 신조가 무엇인지 뚜렷이 밝힌 중국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세 지역에서 변화를 촉발한 원인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각 사회의 전통과 당면한 문제의 차이는 서로 다른 결과를 도출했다. 한 사람의 덕망 높은 통치자가 권력을 장악한 중국, 사회계급별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자 한 로마의 ‘중도’. 그리고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사회계약과 관계 개념을 바탕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3개의 통치체제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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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 말이 한 국가의 고대사에서, 그리고 훨씬 더 넓은 지역의 고대사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시기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시기는 문명 발달의 전환점이자 인간이 어떤 사회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맺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의 공동체가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고 취해야 하는지 달리 보게 된 시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등장한 논의들이 현대 인간의 삶을 인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와도 공명한다는 사실이다. 월리엄 포크너의 명언처럼 “과거는 죽지 않는다. 실은 아직 지나가지도 않았다.” 인간 사회를 운영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고, 사회 관계를 수립하는 최선의 방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결코 멈춰서는 안된다.
이중톈 제국을 말하다
– 이중톈 / 심규호 역 / 에버리치홀딩스 / 2008.05.15
세상에 공짜는 없다. 윤리치국 또는 독존유술(獨尊儒術)의 원칙으로 제국의 제도를 유지하고 보호하면서 중국은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제일 먼저 언급할 것은 사상의 부재이다. 중국은 일찍이 사상이 상당히 풍부한 민족이었다. 유가, 도가, 법가, 묵가 등은 물론이고 그밖에 여러 학파들도 나름의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사상은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인도 불교, 히브리인들의 종교 학설과 더불어 야스퍼스(Jaspers)가 말한 ‘축의 시대(Axial Era)’를 구성하는 찬란한 성과였다. 그러나 그것은 선진先秦 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선진’이란 진나라 이전을 말하는데, ‘제국 이전’이란 뜻이기도 하다. 제국 시대로 진입하자 중국은 더 이상 사상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상을 만들어낼 수도 없었다.
동중서는 사상가가 아니며, 왕충은 단지 ‘의견을 가진 사람’일 뿐이었다. 특히 동중서는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컴퓨터를 활용할줄 아는’ 무사巫師나 정객일 뿐이다. 그는 선진 제자의 사상(유가를 위주로 하고 도가와 음양가를 겸용했다)을 다운로드하여 복사하고 자르거나 붙이기를 하여 이리저리 섞어 어정쩡한 신학神學 체계를 갖춘 다음에 유학의 상표를 붙여 제국에 판매한 것에 불과하다. 그의 공헌은 유학을 민간 사상에서 관방의 이데올로기로 성공적으로 변환하여 제국을 위해 윤리치국이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설계한 것뿐이다.
이후 2천여 년 동안 봉황의 털이나 기린의 뿔처럼 드물고 귀한 몇명의 ‘사상가’들이 출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중량은 선진 제자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었으며, 선진 제자의 틀에서 벗어난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수준에 도달한 이들조차 한 사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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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諸子)들이 나름대로 학설을 세우고 백가(百家)가 쟁명하던 황금시절은 이미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제국 제도의 ‘무량공덕(無量功德)’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제국 제도의 본질은 수렴과 집권에 있다. 수렴하지 않으면 집권이 불가능하고, 집권하지 않으면 제국이 될 수 없다.
그리스 (유재원 교수의 그리스 그리스 신화)
– 유재원 / 리수 / 2007.03.28
그러나 위대한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100년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끝나고 극도의 혼란기가 시작된다. 몇몇 학자들은 몇 년에 걸친 큰 한발과 이에 따른 흉년으로 굶주리게 된 부족들의 약탈과 침략이 당시의 교통 통로를 마비시키고 이에 따라 청동기 제작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주석의 공급이 끊기면서 찬란했지만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던 청동기 문명이 일거에 무너졌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하여간 청동기 문명의 끝은 갑작스럽고도 폭력적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리스에는 발칸 반도 북쪽에서부터 새로운 그리스 부족인 도리아인들이 남하한다. 이 야만인들의 이주는 흔히 폭력적인 파괴와 약탈과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혼란스럽던 사회를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그전까지 힘겹게 일구어 놓았던 문명도 속절없이 붕괴되었다. 히타이트 제국을 지탱해 주던 ‘쐐기 문자’와 미케나이 시대에 그리스인들이 쓰던 ‘선형 문자B’를 비롯한 청동기 시대의 문자들이 잊혀졌다. 이제 문명은 사라지고 문자를 모르는 호전적인 야만인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리스와 동부 지중해, 그리고 그 주변의 지역은 깊은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왕을 중심으로 한 궁정 문명이 사라지고 몇몇 소수 귀족들이 다스리는 귀족정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흔히 이 시기를 ‘그리스의 중세’, 또는 ‘그리스의 암흑 시대’라고 부른다.
암흑 시대에 들어선 지 300년쯤 지난 기원전 800년쯤부터 그리스에는 알파벳을 사용하는 새로운 문명이 싹트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기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와 같은 작품들이 쓰여졌다. 이 시대 이후 그리스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에게 해를 비롯한 동부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그리스인들은 흑해에서 바르셀로나에 이르기까지 전 지중해에 걸쳐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또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게 되자 상인 계급들이 대두하게 되면서전통적 사회 구조에도 변화가 왔다. 귀족들이 차츰 세력을 잃고 상공인 계급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변화는 도시 국가의 출현이었다. 제한된 크기의 도시 국가는 그 자체가 완벽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었으며 그 지역 모든 주민들에게는 시민권이 주어졌다. 자유와 질서 사이에 가장 바람직스러운 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도시 국가는 개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그리스의 위대한 가치관과 문명을 이루는 데에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 그러나 반대로 다른 도시 국가에 대한 배타주의, 경쟁심과 시기심,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부정적 면도 있었다.
축의 시대
– 카렌 암스트롱 / 정영목 역 / 교양인 / 2010.12.20
축의 시대의 영적 혁명은 혼란, 이주, 정복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하나의 제국이 망하고 다른 제국이 일어서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중국에서 축의 시대는 주 왕조의 붕괴와 더불어 마침내 시작되었으며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하면서 끝을 맺었다. 인도의 축의 시대는 하라파 문명(인더스 문명)이 해체된 후에 일어나 마우리아 제국과 더불어 끝을 맺었다. 그리스의 변화는 미케네 왕국과 마케도니아 제국 사이에 이루어졌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정박지에서 떨어져 나와 떠도는 사회에 살았다. …… 중동에서 제국의 모험 때문에 혹심한 고통을 겪었던 유대인마저 조국의 붕괴와 그에 뒤이은 추방이라는 트라우마로 인해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 시작해야만 하는 무시무시한 자유를 얻게 되면서 축의 시대로 밀려 들어갔다.
신의 역사 1
– 카렌 암스트롱 / 배국원 역 / 동연 / 1999.02.10
엘리야의 이야기는 유대교 문헌에서 마지막 신화적 기사를 담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고대 문명권 전체Oikumene를 통해 변화가 찾아왔다.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는 ‘기축시대Axial Age’라고 명명된 시대이다. 문명세계의 거의 모든 중요 지역에서 사람들은 앞으로 중요한 역활을 맡게 될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조했다. 새로운 종교 제도들은 달라진 경제, 사회 조건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여러 이유들에 의해, 모든 주요 문명은 전혀 상업적 접촉이 없었던 경우일지라도(가령 중국과 유럽 지역처럼) 평행을 이루며 발달했다. 새로운 번영이 구가되면서 상인 계급이 출현했다. 왕과 사제, 신전과 왕궁으로부터 시장으로 권력이 이동하고 있었다. 새로 형성된 부는 지성적, 문화적 융성으로 이어졌고 개인 양심의 발달로도 이어졌다. 도시에서 변화의 행보가 가속화됨에 따라 불평등과 착취가 더욱 두드러졌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미래 세대의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각 지역은 이러한 문제와 관심사를 해명하기 위해 독특한 사상과 가치 체계를 개발했다. 중국의 도교와 유교,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유럽의 철학적 합리주의가 그것이다. 중동 지역에서는 어떤 공통적 답안이 제시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란과 이스라엘에서 조로아스터교와 히브리 선지자들이 각각 나름대로의 유일신론을 전개시켰다.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신’이라는 개념은 당시의 다른 위대한 종교적 성찰들과 더불어 공격적 상업주의 정신의 시장경제 상황 아래에 발달된 것이었다.
세계의 유사신화
– J.F.비얼레인 / 현준만 역 / 세종서적 / 2000.10.20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축의 시대(axial period)’라 일컬었다. 그가 ‘축(軸)’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일생과 사역 활동이 그들 역사의 ‘축’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만, ‘축’이라는 개념은 유럽과 아시아의 다른 문화권 구석구석까지 뻗어나갔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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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퍼스는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을 한마디로 정신적 사유의 대대적인 진보라고 요약했다. 제사를 매개로 여러 신들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것에서 ‘보편적인 하나의 신’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사유가 ‘진화’했다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이와 함께 신화의 기능도 필연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평온하고 모든 것이 분명했던 신화의 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예언가들의 신관(神觀)이 비신화적으로 돌아섰듯이 그리스와 인도, 중국의 철학자들도 비신화적인 직관을 견지했다. 합리성과 합리적으로 규명된 경험이 신화를 상대로 투쟁에 돌입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투쟁은 유일신의 초월성 확보를 위한 실재하지 않는 악령들과의 싸움으로 발전되었고, 급기야는 신들의 거짓 형상에 반기를 든 윤리적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종교는 윤리적인 모습을 갖추었고, 이와 함께 신의 위엄이 한결 높아졌다.
신들이 말하기를 그칠 때, 사회가 신들을 버리게 된다고 한 피에르 자네의 말을 기억하는가? 축의 시대에 일어났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관련 그림>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http://en.wikipedia.org/wiki/Axial_Age
위키백과 : http://en.wikipedia.org/wiki/Late_Bronze_Age_collapse
2018-11-06 축의 사상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2014-12-19 기원전 5~4세기 도덕적 종교 탄생의 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