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온난기 (로마 기후최적기) – 기원 전후 200년

로마 온난기(Roman Warm Period, Roman Climatic Optimum)는 유럽과 북대서양에서의 이전보다 특별히 따뜻했던 시기를 말한다. 그 시기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대략 기원 전후 200년 정도로 판단된다. “Roman Warm Period”라는 문구는 1995년 박사 학위 논문에 처음 나왔고, 1999년에 spdlcj(Nature)에 출판된 기사(1999Natur.397..515B)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

 

로마 온난기는 특히 북반구에서의 퇴적물, 나이테, 아이스 코어 및 꽃가루에 대한 수많은 분석으로 충분하게 증명되었다. 또한 중국, 북아메리카, 베네수엘라, 남아프리카,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및 사르가소 해에서의 연구는 로마 온난기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음을 보여준다. 고대 작가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책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 2003년의 갈리시아(Galicia)에서의 꽃가루 분석은 로마 온난기가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서 기원전 250년부터 450년까지 지속되었다고 결론 지었다.

– 알파인(Alpine) 빙하에 대한 1986년 분석에 따르면 100-400년 기간은 직전과 직후의 기간보다 상당히 더 따뜻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후퇴하는 Schnidejoch 빙하에서 회수된 유물은 청동기 시대, 로마 온난기, 중세 온난기의 증거로 여겨져왔다.

– 심해 퇴적물을 기반으로 한 1999년 해류 패턴의 재구성은 150년경에 고점으로 로마의 온난기가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 아이슬란드 포구의 연체 동물 껍질에서 발견된 산소동위원소에 대한 2010년의 분석은 아이슬란드가 기원전 230년에서 40년 사이에 매우 따뜻한시기를 경험했다고 결론지었다.

 

 

– 지난 2000년동안의 북반구 온대지방의 온도변화(Liungqvist et al. 2010). 로마온난기(200 BC – AD 200)와 중세온난기(AD 1000 – 1200), 그리고 AD 400 – 700의 한랭 건조기와 소빙하기(AD 1600 – 1900)를 잘 보여주고 있다.

 

 

로마 온난기와 관련하여 유럽 쪽의 기후대의 변화를 살펴보자. 고고학자 크럼리(Carole Crumley)는 지난 3천 년간 이 추이대의 이동을 추적했다. 그 결과 기온이 낮았던 시대에 그 경계는 지금보다 훨씬 남쪽으로 북위 36도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 해안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온이 올라가면 그 경계는 북해와 발트 해 연안까지 북상한다. 그 거리는 약 880km로, 위도 차이가 12도나 된다. 크럼리는 이러한 기후 지대의 북-남 이동이 유럽의 역사에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극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아래는 유럽의 추이대 변동(Carole L. Crumley 엮음, Historical Ecology)을 보여 준다. 로마 제국의 번영과 쇠퇴가 기후의 변동이 상당한 변수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프랑스 중남부에 추이대가 존재한단다)

<기원전 1200~기원전 300년 기단의 상대적 위치>              <기원전 300~300년 기단의 상대적 위치 – 로마 온난기>

 

<500~900년 기단의 상대적 위치>                                  <홀로세 후기 온대 지중해 추이대의 위치- 아래 위를 이동>

 

온난한 기후 조건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 내내 지속되었다. 지중해성 기후대의 북방 경계는 상당히 북쪽으로 올라갔다. 지중해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는 삶의 내용에 상당한 차이를 가져온다. 온난기를 맞아 지중해성 기후가 확대되면서 유럽 대륙은 농산물이 풍족해졌다. 이 시기에 로마는 융성했고 유럽 전역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었다. 반면 5세기에는 날씨가 추워지면서 게르만의 남하가 시작됐고 로마는 재앙을 맞는다.

 

기록, 고고학적, 자연과학적 증거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와 마지막 위기 기간 동안 기후가 변했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트라야누스 황제(98~117년)의 로마 제국 최대 영역의 시기는 로마 기후최적기와 일치했다. 기후 변화는 로마 제국 초기 느린 속도의 변화에서 제국의 후기 급격한 변동에 이르기까지 다른 속도로 발생했다.

 

로마 온난기는 유럽에서 중동을 거쳐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왕국의 형성을 가능케했다. 정치가 안정되면서 원거리무역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유라시아 동서 양편의 첨단 제국들인 로마와 한나라는 사회발전을 할 수 있는만큼 계속해서 끌어올리고 있었다.

 

로마 온난기에는 대제국의 번영뿐만 아니라 북방민족의 준동을 일깨웠다. 새로운 주거지의 개척으로 전체인구에서 북방민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으며, 이와 함께 이들의 세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로마 제국의 대규모 요새와 방벽, 중국의 만리장성은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지고 보강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중세 온난기에서도 볼 수 있다.

※ 중세 온난기 : http://yellow.kr/blog/?p=619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에 대한 걱정이 많다. 홀로세(현세) 기후변화의 추세를 깨고 계속 상승한다면 심각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학자들 간의 논란이 존재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기후가 온난 다습한 시절(로마 온난기, 중세 온난기)에는 안정된 정치체제가 장기간 유지되고 장거리 교역이 번성했다. 반면 기후가 한랭했던 시절(기원전 2천500∼500년, 기원후 400∼700년, 소빙하기) 대규모 사회적 혼란과 외부세력 침입, 민족 대이동 등 격변이 발생했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  이언 모리스 / 최파일 역 / 글항아리 / 2013.05.27

 

두 가지 다소 유사한 힘이 동양과 서양의 경제성장 뒤에 버티고 있었는데, 하나는 경제를 위에서 견인하는 힘이고, 또 하나는 밑에서 경제를 추진하는 힘이다. 견인 요인은 국가의 성장이었다. 로마와 한나라의 정복자들은 방대한 지역에서 세금을 거둬들였고 세수 대부분을 변경을 따라 배치한 군대(로마에는 35만 명, 중국에는 적어도 20만 명의 군인이 있었던 것 같다)와 거대한 수도(로마 시에는 약 100만 명이, 한나라의 장안에는 약 50만 명이 거주했던 것 같다)에 사용했다. 양쪽 모두 식량과 상품, 돈을 부유하고 세금을 내는 지방에서 굶주리고 세수를 집어삼키는 인구가 집중된 지역으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었다.

……

두 번째 힘, 경제를 위로 추진하는 힘은 기후변화라는 익숙한 힘이었다. 기원전 800년 이후 지구냉각화는 저가 국가를 대혼돈 속에 내던졌고 수 세기에 걸친 팽창을 촉발했다. 기원전 200년이 되자 계속되는 궤도 변화는 기후학자들이 로마 온난기라고 부르는 시대를 알렸다. 이것은 겨울 바람을 약화시켰지만 – 지중해의 농부와 중국의 대하 유역의 농부에게는 안 좋은 소식이었다 – 부분적으로는 앞선 지구냉각화에 대한 대응으로 생성된 고가 제국은 이제 동양과 서양 사회에 기후변화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끈질긴 생명력도 안겨주었다. 힘든 시절은 다양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유인을 증가시켰다. 사람들은 물레방아와 석탄을 가지고 실험을 했고 상품을 이동시킴으로써 지역적 이점을 활용했다. 고가 국가들은 주민들이 부유해질수록 세금도 더 많이 낼 수 있다는 매우 합리적인 가정 아래 이러한 활동을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도로와 항구를 제공했고 군대와 법전은 수익의 안정성을 보장했다.

고가 제국은 옛 심장부 너머의 지역으로도 진출했는데 온난기 덕분에 농업 생산성이 높아진 이 지역은 서양의 경우, 프랑스와 루마니아, 비가 많이 내리는 잉글랜드 같은 지역이었고 동양의 경우는 만주와 한국, 중앙아시아였다. 제국들은 의식하지 못한 채 실질적으로 분산 투자를 통한 위험 감소를 시도한 셈이었는데, 온난한 지역에는 불리한 기후변화가 한랭한 지역에는 유리했기 때문이다. 지중해 덕분에 무역상이 지역 간에 상품을 이동시키기가 쉬웠던 로마에서는 기후변화의 혜택이 확실히 컸다. 커다란 강들이 이용에 덜 편리한 중국에서는 혜택이 분명 더 작았을 테지만 여전히 실질적 혜택이 존재했다.

온갖 전쟁과 노예화, 학살의 결과는 이 장을 연 팡글로스풍의 열광을 낳은 풍요의 시기였다. 풍요의 산물은 불균등하게 분배되었지만 – 철학자나 왕보다는 농민이 훨씬 많았다 – 이전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은 사람이 생존했고 더 큰 도시에 살았으며 전반적으로 더 오래 살고 더 잘 먹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

 


기후의 문화사

– 볼프강 베링어 / 안병옥,이은선 역 / 공감 / 2010.09.10

 

서늘한 여름과 온화하고 비가 많은 겨울로 대변되는 서브애틀랜틱기의 습하고 서늘한 기후는, 예수가 탄생할 때까지, 다시 말해서 로마 도시왕국과 로마공화국을 아우르는 시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 지하수위는 오늘날보다 높았을 것이며, 북아프리카의 오아시스들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생활기반을 제공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북아프리카가 왜 로마제국의 곡식창고가 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로마공화국의 문화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의 도시국가들과 함께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유리했던 기후 덕분이었다.

짐작컨대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63~기원후 14, 재위 기원전 20~기원후 14)의 통치기에는 기후가 꽤 따뜻한 편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기온은 오늘날과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알프스 북부는 지금보다 더 따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근동과 북아프리카에서는 습한 기후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서기 120년경 기후일기를 썼던 인물은 이집트의 대표적인 학자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os, 100~160년경)이다. 그가 쓴 일기는 8월을 제외한 모든 달에 내린 비에 관한 정보와 함께, 당시의 기후가 오늘날의 기후와는 확연하게 달랐음을 보여준다. 4세기에 들어와 북아프리카는 메마른 땅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많은 주거지들은 훗날 시리아와 요르단의 사막에 의해 잠식되었다. 예수의 탄생 시기에 세계 인구는 3억명가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절반가량은 아시아의 양대 고대문명에서 살고 있었다. 중국과 인도의 인구는 각각 8천만 명과 7천5백만 명에 달했던 반면, 서아시아와 유럽에서는 3천5백만 명가량이 살았고 북아프리카의 인구는 1천5백만 명 수준이었다. 이로써 로마의 기후최적기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구상에 살게되었다. 이렇듯 인류의 생활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해주었던 기후는, 1000년이 흐른 뒤 중세중기의 온난기에 나타나게 된다.

 

로마가 이탈리아 도시국가 중 하나에서 세계권력으로 등장한 세계사적인 사건은 당연히 기후변화의 결과만은 아니다. 로마의 부흥을 기후변화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기후변화는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둘째 로마부흥에 영향을 미친 많은 다른 요인들이 있으며, 셋째 로마의 발전은 실질적으로 같은 기후조건에서 살았던 에트루리아인, 그리스인, 페니키아인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마와 카르타고의 비교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지중해 이남에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던 카르타고는 상대적으로 추운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반면 로마는 유럽 정치의 중심이 지중해의 북쪽으로 이동했던 온난기 이후에야 번영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는 서기 146년 카르타고가 멸망한 후에도 수백 년 동안 로마제국의 경제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활을 했던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처음에는 로마제국의 영토가 남쪽으로 확장되었지만, 기후가 점차 따뜻해지면서 그 방향을 북쪽으로 선회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아우구스투스 황제(Caesar Augustus)로 등극하면서 로마는 군주제를 실현하게 되었다. 이는 권력구조의 광범위한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로마는 통일법률을 제정함으로서 정복국가들을 통치시스템에 체계적으로 편입시키고 계획적인 대외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로마는 트라이아누스 황제(Traianus 53~117, wodnl 98~117) 시대에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할 수 있었다. 당시 로마제국의 영토는 스코틀랜드의 국경에서 카스피해와 페르시아만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이렇듯 로마제국의 영토확장이 온난하면서도 너무 건조하지 않았던 기후조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후사에서는 이 시기를 로마의 기후최적기(Roman Climate Optimum)라 부른다. 기원후 1세기에서 400년경까지 빙하의 해빙과 해수면의 상승을 야기했던 온난화는, 지중해북부의 대제국 로마를 결속시키고 북쪽으로 진행되는 영토 확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알프스의 횡단이 일 년 내내 가능하게 되면서 갈리아(Gallia)와 벨기카(Belgica), 게르마니아(Germania), 라이티아(Raetia), 노리쿰(Noricum)의 정복과 통치가 용이해졌다.

로마시대 알프스 고산지대에서는 수많은 광산이 운영되었다. 이 곳은 먼 훗날인 20세기 말에는 영구동토층으로 덮여있던 지역이다.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가 남겼던 문헌으로 보면, 포도와 올리브는 이탈리아를 기준으로 이전보다 훨씬 북쪽에서 재배되었을 것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Domitianus 51~96, 재위 81~96)는 알프스 북부에서 포도재배를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은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는 당시의 기후조건이 알프스보다 훨씬 북쪽에서도 포도재배가 가능했으리만큼 따뜻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포도재배의 금지는 서기 280년에 내려진 프로부스 황제(Probus 232~282, 재위 276~282)의 칙명으로 철회되었다. 이후 독일과 영국에서의 포도재배는 서기 300년경부터 남쪽에서 와인을 수입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성공적인 것이었다.

 

고대의 기후최적기는 유럽에서 중동을 거쳐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왕국의 형성을 가능케했다. 정치가 안정되면서 원거리무역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대제국이 건설되었던 것은 전제군주 진시황제(재위 기원전 246~210)의 시대였다. 진시황제는 무덤에서 실물 크기의 수많은 호위병 모형이 발굴된 병마용갱(兵馬俑坑)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진시황제의 제국은 얼마 안가 백성들의 봉기에 의해 무너졌다. 중국은 이후 들어선 새 왕조가 실용적인 정책을 펴나가면서부터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한(漢) 왕조(기원전 202~서기 220)의 중국과 로마제국이 거의 같은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대문명기 중국은 서양처럼 제국을 형성해가는 과정에 있었다. 오늘날에도 중국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漢族)은 중국민족을 대표하고 있다. 한 왕조의 중국은 과다한 군비지출로 초래된 재정위기에도 불구하고 유례없는 경제적 융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서기 2년경 중국 인구는 약 6천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후는 대제국의 번영뿐만 아니라 북방민족의 준동을 일깨웠다. 새로운 주거지의 개척으로 전체인구에서 북방민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으며, 이와 함께 이들의 세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기원후 2세기와 3세기에는 카르파티아(Carpathian) 지역과 러시아 남부를 침입했던 고트족, 게피다이족, 반달족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이로서 북부 유럽은 격변기를 맞게 되었다. 게르마니아의 리메스(Limes)와 브리타니아의 하드리아누스 성벽(Hadrian’s Wall)에서 확인되듯이, 로마제국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대규모 요새 건설로 막으려 했다.

오늘날의 몽골지역에서는 흉노족이 중국을 넘보기 시작했다.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만리장성이 축조되기 시작했으며, 2세기에 들어서 흉노족은 결국 서방으로 진격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흉노족은 인도를 침입했으며 마침내 흑해지역까지 진출했다. 유럽에서 흉노족을 처음으로 언급한 이는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였다. 그는 흉노족을 ‘청뇌(Chunnoi)’로 불렀다.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  브라이언 페이건 / 남경태 역 / 예지 / 2007.08.25

 

켈트족은 이탈리아에 눌러앉을 심산이었지만 기후 변동의 가차없는 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기원전 300년경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 사이의 추이대가 이동하기 시작해 지금의 부르고뉴까지 북상했다. 그 결과 켈트 지역의 남쪽에 온난건조한 여름과 습한 겨울의 지중해성 기후가 자리를 잡았다. 많은 도시 인구를 위해 밀과 기장 같은 몇 가지 작물을 광범위하게 재배하는 로마식 농경은 건조한 남유럽 환경에 매우 적합했다. 추이대가 북상함에 따라 로마의 힘이 급격히 증대했다. 기원전 2세기에 로마는 그때까지 그리스 식민지들이 장악하고 있던 지중해 서부의 해로를 지배했다. 로마는 해운의 강적인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제국의 힘을 키웠다. 로마 본토와 남유럽의 우호적인 기후 조건은 이제 그들의 손 안에서 큰 역활을 하게 되었다. ‘로마의 평화’는 북상하는 추이대를 따라가며 꾸준히 켈트족의 땅을 잠식했다. 기원전 2세기 중반 현재 프랑스 남부에 해당하는 켈트족의 땅은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

온난한 기후 조건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 내내 지속되었다. 지중해성 기후대의 북방 경계는 상당히 북쪽으로 올라갔다. 곡식의 성장기가 길어지자 로마의 주둔군과 도시들의 사정이 나아졌고, 새로 제국에 편입된 지역도 혜택을 입었다. 갈리아 북부가 로마화된 결과는 무엇보다도 농경 방식이 단지 자급을 위한 것에 머물지 않고 군대와 도시를 위한 식량의 대량생산으로 변했다는 데 있었다. 또한 농부들은 할당된 세금을 내기 위해 자신에게 필요한 양 이상으로 많은 식량을 재배했다. 농업 생산물은 현금처럼 취급되었으며, 토지를 매년 재분배하던 예전 켈트 시대의 토지소유 제도 대신 사적 토지소유 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유라시아 농경사 3

–  ユーラシア農耕史〈3〉 砂漠・牧場の農耕と風土 . 佐藤 洋一郎 (監修), 鞍田 崇 (編集)

 

중앙 유라시아의 기후 · 수자원과 그 변천

– 쿠보타 쥰페이​

 

…… 게다가 약간 시대는 뒤이지만,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도 기온의 복원 결과와 오아시스의 유적조사로부터 오아시스의 형성 시기가 약 2200년 전 한나라 시대와 약 1400~1200년 전의 당나라 시대에 집중되며, 그것이 기온이 고온이었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 또한 16세기의 한랭으로 건조했던 시기에 오아시스 도시가 쇠퇴했다는 지적이 있다(Takamura 2005). 이와 같이 오아시스 도시의 성쇠와 수자원의 변동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앞으로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시그널

–  벤저민 리버만 / 은종환 역 / 진성북스 / 2018.12.05

 

로마 제국과 한나라는 최고 전성기에 인류가 자연환경을 이용하는 전반적인 방식에 있어 새로운 이정표를 보여주었다. 인류 역사상 그 전까지는 그렇게 대규모로 밭을 갈고, 그렇게 많은 양의 곡식을 재배하거나, 그렇게 많은 가축을 길러본 적이 없었다. 농경지 개간으로 산림이 차츰 황폐해지면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도 증가했다. 또한 2,000년 전부터 대기 중 메탄 농도의 상승이 관찰되는데, 벼농사를 위해 논에 물을 대기 시작한 것이 그 주된 이유라 할 수 있으며 가축의 증가 역시 메탄가스 배출을 증가시켰다.

……

 

기원전 400년경부터 서기 200년경까지 기후가 비교적 온난하고 안정적이었던 시기를 우리는 ‘로마 기후(Roman climate)’ 또는 ‘기후 최적기(climate optimum)’라고 표현해왔다. 이런 표현들은 복합사회들과 고전시기의 강력한 제국들이 그 시대의 기후로부터 혜택을 받았다는 생각에서 유래한다.

……

 

로마 기후 최적기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먼저 수목과 올리브, 포도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로마시대 저술가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기후 최적기 동안 밤나무류를 비롯한 수목들의 서식지와 올리브 및 포도 재배지의 범위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1세기의 작가 콜로멜라(Columella)는 “과거에 그 지역은 계속되는 혹독한 추위 때문에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를 키우기에 불안했으나, 지금은 추위가 가시고 기후가 온화해짐에 따라 올리브가 열리고 좋은 포도주가 풍부하게 생산된다”라고 적었다. 올리브는 새로운 지역에서도 재배되었다. 실제로 로마의 통치 하에 갈리아 혹은 현재의 프랑스 지역에서 올리브 재배가 확대되었다. 또한 로마는 포도 재배를 늘리기 위해 북쪽으로 땅을 넓혀나갔다. 정복한 지역으로 로마인이 이주하고 정복지의 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농작물에 대한 수요가 계속 창출되었는데, 다행히 기후 최적기는 그 농작물의 재배지 확대를 수월하게 해주었다.

 

기후 최적기 동안 로마의 인구와 경작지 또한 늘어났다. 로마의 인구에 대해서는 전 지역을 일제히 조사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추정하기가 어렵지만, 대체로 서기 2세기경까지 내내 증가해 최대 5,000만에서 7,000만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후에 관한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로마 공화정 말기에는 전반적인 온난화 추세가 지속되었다. 이런 온난화는 지중해성 기후를 북쪽으로 확장시켰다. 포강 삼각주(Po River Delta), 아드리아 해(Adriatic Sea), 알프스 산맥에서 수집된 증거들은 이탈리아의 기온이 상승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복수의 기후 표본을 통해, 당시는 비록 20세기와 21세기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따뜻한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따뜻한 시기는 농사짓기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고 인구 증가를 위한 다른 요인들도 강화해주었다.

……

 

로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시 기후 최적기의 안정적 기후 여건은 농업 생산량 증대에 도움이 되었다. 한나라시대의 농부들은 다양한 형태의 기구와 기술을 이용해 농업 생산성을 높였고, 국가는 관개(灌漑)사업을 지원했다. 농업 전문가들은 향상된 농업 기술에 관한 개괄적인 기록을 남겼다. 서기 1세기 초반 심각한 홍수가 발생해 인구가 급격히 줄어든 적은 있지만, 당시 인구는 2,000만 명대에서 한나라 중기까지 6,000만 명 정도로 늘어났다.

 

한나라의 경계를 결정짓는 데도 로마 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후가 영향을 미쳤다. 한무제와 같은 야심찬 통치자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며 중국의 경계를 서쪽으로 확장했다. 한나라는 중국의 농경지를 안정적으로 지배했지만, 서쪽과 북쪽의 건조하고 추운 지역에서는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했다. 한나라는 북부에 요새화된 도시를 건설했다. 북쪽 국경지대에서는 흉노족으로 알려진 유목민을 다스리는 데 특히 집중했다. 몽골과 독일 지역의 환경은 매우 달랐지만, 중국인들이 흉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은 로마인들이 독일에 대해 지녔던 인식과 같았다. 한무제에게 가혹한 벌을 받은 역사가 사마천은 흉노의 땅을 ‘굴종적인 황무지’로 묘사했다.

 


기후와 문명

–  노의근 / APEC기후센터 / 기후정책연구 2015-01

 

제6장. 200 BC € AD 200 : 로마온난기 (Roman Warming)

 

온난한 기후가 지속되었던 이 시기에 서양에는 로마제국, 동양에는 한(漢)제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번성을 누렸다. 온난한 기후 아래서의 장기간에 걸친 안정적인 농업생산량의 공급은 이 거대한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기독교가 탄생한 것도 이 시기이다.

 

로마정복의 전반기에는 카르타고와 싸운 포에니전쟁(264 € 113 BC)을 포함 지중해 남쪽으로 치우치던 제국의 확장이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케사르의 갈리아 원정(51 BC) 등 점점 지중해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로마시대 초기에는 북아프리카는 곡창지대였다. 이는 로마시대 초기에는 북아프리카가 온난다습한 기후를 유지해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기후가 조금씩 한랭건조해짐에 따라, 지중해남쪽보다는 지중해북쪽 유럽지역이 경제적으로 더 중요해지고, 따라서 로마인들에게는 북아프리카보다는 유럽의 땅이 더 탐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로마의 북방한계선은 대체로 겨울 평균온도 0℃와 일치한다. 아마도 따뜻한 햇살아래 살아오던 로마인들에게는 춥고, 음산한 북유럽의 게르만인의 영토는 그다지 끌리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장기간에 걸친 온난다습한 기후는 고대제국의 번영을 유지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풍성해진 문물과 여행의 용이함이 장거리 교역을 번성하게 하였다. 중국에서는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부터 서역(西域)의 경영에 관심이 많아, 후한에 들어와서 로마와 장안(長安)을 잇는 교역로를 정비했다. 교역로가 활발화된 것은 동서 양대국의 물자수송이 확대되었던 이유 이외에도, 배경으로 중앙아시아의 강수량이 증가하여, 유목민의 생활이 향상되고, 중계지점이었던 각지의 오아시스 도시가 발전된 점이 있다. 실크로드는 BC 150부터 AD 300까지 400년 이상을 번성하였다.

 


< 관련 그림 >

 

아래는 2012년 자연기후변화저널(Nature Climate Change)의 자료인데, 스칸디나비아 북부의 여름(6~8월) 데이터를 분석한 것이다. 로마 온난기, 중세 온난기 모두 현재 보다 높았던 것으로 나온다.

– Figure 1. The summer (June-July-August) temperature reconstruction of Esper et al. (2012), adapted from their paper.

http://www.co2science.org/articles/V15/N30/EDIT.php

 

 

– 영거 드라이아이스기 이후 홀로세(Holocene Epoch), 즉 현세(現世)는 기후최적기, 건조화기, 한랭건조기, 로마온난기, 다시 한랭건조기와 중세온난기, 소빙하기로 지구의 기후가 변화해왔다.

 

 

–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에 있는 로마시대 때의 다리. 지금은 모두 말라 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 튀니지의 마제리우스(Magerius) 모자이크에 등장하는 표범. 북아프리카 지역의 수많은 로마 모자이크는 현재 열대 아프리카에서만 발견되는 동물군을 묘사하지만 기후 변화가 그 원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관련자료 및 참고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Roman_Warm_Period

https://en.wikipedia.org/wiki/Climate_of_ancient_Rome

네이버 지식백과(지구과학산책) : 로마 문명과 기후

http://www.co2science.org/articles/V15/N30/EDIT.php

https://www.newscientist.com/article/dn22040-tree-rings-suggest-roman-world-was-warmer-than-thought/

https://wattsupwiththat.com/2016/07/31/a-warm-period-by-any-other-name-the-climatic-optimum/

http://blog.daum.net/stonehinge/8732244

2019-02-18  100년 동안 지구 평균기온은 0.74도 상승했죠…지구 온도 변화의 주범은 태양…늘 변해 왔어요

2018-10-19  http://slownews.kr/71299

로마 온난기 (로마 기후최적기) – 기원 전후 2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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