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과 한나라 쇠락의 시작 – 안토니우스 역병

165년부터 180년까지 지속된 안토니우스 역병(Antonine Plague)은, 그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그리스 의사의 이름을 따 갈레노스 역병(Plague of Galen)이라고도 부른다. 안토니우스 역병은 파르티아를 상대로 한 원정에서 돌아온 군대에 의해 로마 제국으로 전파된 전염병의 대유행이었다. 학자들은 그 고대의 질병을 천연두 또는 홍역으로 의심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역병은 169년에 로마 황제 루시우스 베루스(Lucius Verus)의 목숨과 180년에 베루스와 공동 황제였고 5현제이며 이 역병의 이름과 관련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의 목숨을 앗았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65

 

중국의 문헌은 161~162년 서북부 변경에서 유목민과 싸우는 군대에 정체 모를 역병이 터져 병사 3분의 1이 죽었다고 기록한다. 역병은 171년과 185년 사이에 다섯 차례 더 중국을 찾아오며 그 기간 동안 로마 제국도 그만큼 자주 역병에 시달린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이집트에서는 유행성 전염병이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죽였던 것 같다.

 

로마제국 멸망에 대한 논의는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의 《로마제국 쇠망사》로 시작된다. 기번은 역사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정확성과 엄밀성을 갖고 책을 저술했음을 보여 주었고, 이것이 현재에도 《로마제국 쇠망사》가 세계인들이 선호하는 고전으로 손꼽히는 이유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 이유로 전염병 발생의 영향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안토니우스 역병에 대해서는 주요한 요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아서 에드워드 로밀리 보크(Author. E. R. Boak, 1888-1962)과 같은 연구자, 역사가들은 안토니우스 역병이, 계속되는 일련의 역병 발발과 같이, 로마제국 쇠퇴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Manpower Shortage and the Fall of the Roman Empire》에서 보크는 166년의 역병의 발발로 인구가 감소하여 모자라는 군인을 농부와 지역 공무원으로 충당하였기 때문에 식량 생산량이 떨어지고 도시와 촌락 행정의 지원이 부족해져 전체적으로 야만인 침략을 막는 로마제국의 역량을 약화시켰다고 말한다.

 

《The Route to Crisis: Cities, Trade and Epidemics of the Roman Empire》에서 Eriny Hanna는 “로마 문화, 도시화  및 도시와 지방의 상호 의존성”이 전염병의 확산을 촉진하여 제국 붕괴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Hanna, 1). 인구 밀집 도시, 부족한 식량으로 인한 영양 실조, 공중 위생의 조치 부족으로 로마의 도시들은 질병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염병은 도시를 중심으로 연결된 육로와 해상 무역로를 통해 외곽 지역으로 쉽게 전파되었다.

 

최근에 카일 하퍼(Kyle Harper, 1979- )는 “사회 발전의 역설과 자연의 예측 불가능성이 로마의 붕괴를 위해 같이 작동했다”고 제안한다 (Harper, 2). 다시 말해, 기후변화가 새롭고 치명적인 질병의 발생에 대한 환경적 맥락을 제공했는데, 안토니우스 역병은 로마 기후최적기의 끝 무렵에 나타나 세계에 천연두를 소개하였다. 하퍼는 치명적인 세계적 전염병, 즉 안토니우스 역병을 시작으로 키프리아누스 역병(249-262), 유스티니아누스 역병(541-542)이 높은 사망률로 로마제국의 토대를 크게 흔들었다고 주장한다. 로마제국의 강점으로 많이 인용되는 강력한 로마 군대, 넓은 제국의 영역,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 로마 도시의 수와 규모가 오히려 궁극적으로 로마제국의 몰락으로 이끄는 치명적인 질병 전파의 기초를 제공했다.

 

갈홍(Ge Hong, 284~363)이 중국에서 천연두의 증상을 정확하게 묘사한 최초의 사람이었지만, 역사학자 Rafe de Crespigny는 후한 황제 환제(146-168)와 영제(168-189)의 통치 기간 동안 중국을 괴롭히는 재앙, 즉 151, 161, 171, 173, 179, 182 및 185 년에 발생한 역병이 아마도 안토니우스 역병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며, 이 재앙이 장각(Jian Jue, 184)가 이끄는 신앙인 태평도를 일으켰으며, 황건의 난(184-205)을 촉발시켰다고 말했다.

 

고대의 기후최적기는 유럽에서 중동을 거쳐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왕국의 형성을 가능케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비슷한 시기에 쇠락하기 시작했다.

※ 로마 온난기(로마 기후최적기) : http://yellow.kr/blog/?p=3970

 

이언 모리스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는, 기원전 1년과 서기 1년 부근에서 정점을 찍은 뒤 사회발전지수가 동양과 서양에서 모두 떨어진다고 한다.

 

Figure 6.1. An Old World–wide depression: the peak, decline, and fall of the ancient empires, 100 BCE–500 CE

 

이번 하락은 완전히 새로운 규모의 붕괴였다. 유라시아 양단에 영향을 미치며 이전 어느 때보다 폭넓을 뿐만 아니라 더 길게 지속되었고 더 심각하기도 했다. 몇 세기가 지나도록 사회발전지수 그래프 선은 바닥을 기면서 400년까지 동양의 사회발전지수는 10퍼센트, 500년까지 서양의 사회발전지수는 20퍼센트 감소시킨다.

 

정주 사회가 출현한 이후 최초의 도시가 발달하는 것과 함께 인구 규모가 커지고 인구밀도도 높아지면서 인간은 동물에게서 오는 질병에 더욱 대규모로 노출되기 시작했다. 또한 교역과 여행의 증가로 질병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좀 더 빨리 전파될 수 있게 되었다. 초기 문명들도 상호 간 교역을 했지만,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후 200년 사이의 기간에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지중해와 중국을 연결하는 두 개의 주요 노선, 즉 비단길(실크로드) 및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해상무역로가 확립되면서 질병은 대륙 전체로 퍼졌다. 한 지역에 국한하지 않은 ‘국제화된 전염병’의 첫 사례가 안토니우스 역병이었다.

 

로마온난기 이후의 진행이 중세온난기가 끝날 무렵인 13~14세기에 찾아온 흑사병의 대유행, 그리고 17세기 소빙하기로의 진행과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 14세기의 위기 – 기근과 흑사병 : http://yellow.kr/blog/?p=1376

※ 17세기 위기 – 소빙하기 절정 : http://yellow.kr/blog/?p=939

 

한랭화가 시작되는 200년 전후의 세계를 살펴보면 로마제국과 한나라의 쇠락 뿐만 아니라 중동의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인도의 사타바하나 왕조의 멸망, 쿠샨제국의 쇠락, 그리고 마야 문명의 단절(전 고전기 마야문명과 고전기 마야문명) 등이 눈에 띈다. 186년(?)의 화산폭발지수(VEI) 7인 하테페 화산 폭발(233년이라는 설도 있다)이 있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  이언 모리스 / 최파일 역 / 글항아리 / 2013.05.27

 

유사하지만 더 균형 잡힌 ‘구세계 교환’이 서기 2세기에 일어났던 것 같다. 서양과 남아시아, 동양 핵심부는 수천 년 전 농경이 시작된 이래로 각자 독자적인 치명적 질병 조합을 진화시켜왔고 기원전 200년이 되자 이 질병들은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나 갈수록 많은 상인과 유목민이 핵심부를 연결하는 사슬을 따라 이동하면서 질병 풀도 서로 합쳐지면서 모두에게 참혹한 결과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중국의 문헌은 161~162년 서북부 변경에서 유목민과 싸우는 군대에 정체 모를 역병이 터져 병사 3분의 1이 죽었다고 기록한다. 165년에 고대 문헌은 다시금 병영에서의 발병을 언급하지만, 이번에는 로마 쪽 기록이며 파르티아를 상대로 한 원정중, 중국의 발생지로부터 6500킬로미터 떨어진 시리아에 있는 군사 기지에서의 역병을 묘사하고 있다. 역병은 171년과 185년 사이에 다섯 차례 더 중국을 찾아오며 그 기간 동안 로마 제국도 그만큼 자주 역병에 시달린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이집트에서는 유행성 전염병이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죽였던 것 같다.

이 고대의 질병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기는 어려운데, 지난 2000년에 걸쳐 바이러스가 계속 진화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대의 저자들이 전염병을 답답할 정도로 모호하게 묘사한 이유가 크다.

……

이러한 불확실성의 안개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중국의 문헌은 2세기에 역병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인도의 문헌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역병에 대한 언급의 부재는 그저 수백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처럼 일상적인 사건에 대한 교양 계급의 관심 부재를 반영할지도 모르지만, 역병이 실제로 인도를 비켜갔을 가능성이 더 크며, 이는 구세계 교환이 인도양 교역로보다는 주로 비단길과 초원길을 따라 퍼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확실히 전염병이 중국과 로마에서 시작된 정황, 즉 변경 지대 병영에서 발생한 정황과도 일치한다.

미생물 교환의 메커니즘이 어떤 식이었든 끔찍한 전염병은 180년대 이후 계속해서 세대마다 재발했다. 서양에서 최악의 시기는 한동안 로마 시에서 매일 5000명이 죽어나간 251~266년이다. 동양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는 310년과 322년 사이인데 이번에도 서북부에서 시작되었고 (보고에 따르면) 서북부 주민 거의 모두가 사망했다. 살아남은 의사의 묘사를 보면 이 역병은 홍역이나 천연두처럼 보인다.

최근에 머리와 얼굴, 몸통에 부스럼이 나는 역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부스럼은 단기간에 온몸으로 퍼진다. 하얀 고름 같은 것이 들어 있는 종기처럼 생겼다. 이 고름 물집이 사라지면서 다시 새 종기가 생기기도 한다. 초기에 치료하지 않으면 환자는 보통 죽는다. 회복된 사람에게는 자줏빛 흉터가 남는다.

구세계 교환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도시가 축소되고 교역은 쇠퇴하고 세수가 감소하고 땅은 버려졌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듯 각종 증거는 -토탄 늪지, 호수 퇴적물, 얼음 코어, 나무 나이테, 산호초 내 스트론튬 대 칼슘 비율, 심지어 조류의 화학적 성질까지- 로마 온난기가 끝나면서 기후마저 인류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평균기온은 200년과 500년 사이에 섭씨 1.1도만큼 떨어졌고, 기후학자들이 중세 한랭기라고 부르는 서늘해진 여름이 대양에서 수증기 증발을 감소시켜 몬순 계절풍을 약화시키면서 강우량도 덩달아 감소했다.

다른 상황에서라면 번영하던 동양과 서양 핵심부는 기원전 2세기 로마 온난기가 시작되었을 때처럼 기후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질병과 기후변화 -제4장에서 그렇게 두드러지게 등장한 묵시록의 다섯 기수 가운데 둘- 가 함께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기아와 이민, 국가실패라는 다른 세 기수가 두 기수에 합류하게 될지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로마는 여전히 튼튼했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열정의 대상, 즉 철학을 추구할 앞날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 대신 구세계 교환에 맞닥뜨렸다. 최초의 심각한 전염병은 그가 제위에 오른 해에 중국 서북쪽 변경 지대의 병영에서 발생했고, 바로 그해 파르티아가 시리아를 침공해 아우렐리우스는 군대를 그곳에 집결해야 했다. 병사들이 북적이는 병영은 질병이 퍼져나가기 안성맞춤이어서 165년 역병(천연두? 홍역? 문헌의 기록은 언제나처럼 막연하다)이 그곳을 휩쓸었다. 역병은 167년, 멀리 북쪽과 동쪽의 인구가 도나우 강 너머로 밀고 들어오면서 새롭고 강력한 게르만 연맹을 형성하던 바로 그 시점에 로마에 도달했다. 아우렐리우스는 나머지 인생-13년-을 그들과 싸우며 보냈다.

중국과 달리 로마는 2세기 변경 전쟁에서 승리했다. 만약 패배했다면 로마도 -한나라처럼- 180년대에 위기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렇긴해도 아우렐리우스의 승리는 변화의 결과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이며, 결국 군대만으로는 붕괴를 저지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전염병의 무지막지한 사망률은 경제를 대혼란에 빠트렸다. 식량 가격과 농업 임금이 급등했고 덕분에 전염병은 살아남은 농부들, 생산성이 떨어지는 경지를 버리고 옥토에 집중할 수 있는 농부들에게는 이득을 가져왔다. 그러나 농경이 축소되고 세금과 임대 수입이 감소하자 더 큰 차원에서 경제 지표는 폭락하기 시작했다.

 


Antonine Plague

–  위키백과 : https://en.wikipedia.org/wiki/Antonine_Plague

 

서기 165년부터 180년까지 지속된 안토니우스 역병은, 그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그리스 의사의 이름을 따 갈레노스 역병(Plague of Galen)이라고도 부른다. 안토니우스 역병은 서아시아 원정에서 돌아온 군대에 의해 로마 제국으로 전파된 고대 전염병의 대유행이었다. 학자들은 그 고대의 질병을 천연두 또는 홍역으로 의심하고 있지만, 확실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역병은 169년 로마 황제 루시우스 베루스(Lucius Verus)의 목숨과 180년에 베루스와 공동 황제였고 이 역병의 이름과 관련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의 목숨을 앗았다. 로마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155-235)에 따르면 이 역병은 9년 후인 189년에 다시 발병하여 로마에서 하루에 2,000명이 사망했으며, 약 25%의 사망률을 보였다. 총 사망자는 5백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죽였고 로마 군대를 쇠퇴시켰다.

 

고대의 기록은 165~166년 겨울에 있었던 로마의 셀레우키아(현재의 이라크 중부에 있었던 고대 도시) 공성전에서 역병이 최초로 나타났다고 전하고 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는 역병이 갈리아와 라인강을 따라 퍼졌다고 보고하고 있다. 에우트로피오(Eutropius)는 많은 사람들이 제국 전역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Rafe de Crespigny(Zhang Leifu, 張磊夫)는 중국 기록에 역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166년 전에 한나라에서 역병이 발병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역병은 로마의 문화와 문학에 영향을 미쳤으며, 인도양을 통한 인도-로마 무역 관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 역학 (Epidemiology)

전염병이 유행하던 166년, 그리스의 의사이자 작가인 갈레노스(Aelius Galenus)는 로마에서 소아시아(아나톨리아)의 집으로 여행했다. 갈레노스는 공동 황제였던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가 불러 168년에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168/69년의 겨울에 아드리아 해 북단에 있던 고대 로마의 도시 아퀼레이아(Aquileia)에 주둔한 부대들 사이에서 발생한 역병에 대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갈레노스의 관찰과 기록은 그의 논문 <Methodus Medendi>에 간략히 쓰였으며 관련된 다른 서술들도 그의 방대한 저작들에 분산되어 있다. 장기간에 걸칠 대역병으로 묘사한 그 병은 발열, 설사, 인두염과 더불어 발병 9일째 되는 날, 때로는 건조하고 때로는 고름이 나기도 하는 발진이 있었다 한다. 갈레노스가 제공한 정보로는 병의 성격을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천연두로 본다.

 

역사 학자 윌리엄 맥닐(William McNeill)은 안토니우스 역병과 이후에 발생한 키프리아누스 역병(249-262)이 순서와 관계없이 하나는 천연두, 하나는 홍역의 발병일 거라고 주장했다.  그 두 역병으로 인한 유럽 인구의 심각한 감소는, 사람들이 이전에 천연두와 홍역에 노출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면역력이 없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역사가들은 이 두 가지의 역병이 모두 천연두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분자 추정치로 본 홍역은 500년 이후에나 진화를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영향 (Impact)
1) Culture, literature, the arts

망연자실한 대중들은 마법과 주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2세기 그리스의 소도시 아보누타이쿠스의 신비종교의 예언자 알렉산더(Alexander of Abonoteichus)는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가 육체화한 뱀의 신 글리콘(Glycon)을 만들었다. 글리콘은 아폴론의 아들로 기적적인 출생과 함께 신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세상에 왔으며 글리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언과 방언,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준다 주장하며 자신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들이며 기적을 베푸는 의사 포달레이리오스(Podalirius)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역병의 기간동안 알렉산더의 신탁 한 구절이 부적으로 사용되어 집 문에 새겨졌다.

그리스 작가 루키아노스(Lucian of Samosata)는 자신의 작품 “거짓 예언자 알렉산더(Alexander the False Prophet)를 통해 이 사기꾼을 고발하고 있다. 그는 이 인물이 “거짓과 사기, 거짓말, 악의에 가득찬 인물로 (그는) 손쉽게 대담하고 무모하게 그리고 또 열심히 자신의 음모를 그럴듯하게, 납득할 만 하게, 선의로 위장하여 자신의 목적과는 정반대로 선전 선동하고 있다.”

 

안토니우스 역병은 로마 제국 전역에 엄청난 사회적,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니부어(Barthold Georg Niebuhr, 1776–1831)는 “이 시기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재임 중 많은 부문에서 전환점이 되었고, 이 위기가 그 역병의 재앙에 의해 초래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고대 세계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기간에 발생한 전염병에 의한 타격에서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마르코마니 전쟁(Marcomannic Wars) 중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썼다. 구절 9장 2절에서 주위의 역병조차도 거짓, 악한 행동, 진정한 이해의 부족보다 덜 치명적이라고 말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역병으로 죽어가면서 “나를 위해 울지마라. 역병과 수많은 다른 이들의 죽음을 생각하라”라고 말했다.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과 Michael Rostovtzeff(1870-1952)는 안토니우스 역병이 당시의 정치와 경제적 상황보다는 영향력이 적다고 지적하였다.

 

2) Military concerns

전염의 직접적인 영향이 두드러진다. 파르티아의 Vologases 4세가 아르메니아를 침략한 후 베루스 황제의 지휘 아래 로마제국의 군대가 동쪽으로 이동했을 때, 많은 병력이 병에 걸려 동부 지역의 방어에 문제가 생겼다. 5세기의 스페인 작가 파울루스 오로시우스(Paulus Orosius)에 따르면 이탈리아 반도와 유럽 지방의 많은 도시와 마을은 주민을 모두 잃었다. 이 병이 북쪽으로 라인 강을 따라 휩쓸면서 로마제국 국경 밖의 게르만인들과 갈리아인들도 감염되었다. 수년 간, 로마제국 밖의 북부지역 사람들은 인구증가로 인해 남쪽으로의 이주로 로마제국을 압박하였지만 역병으로 인한 로마제국 병력의 감소로 이들을 다시 뒤로 밀 수가 없었다. 16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뉴브 강을 건너는 게르만족의 전진을 통제하기 위하여 진두지휘를 하는 노력을 했지만 부분적인 성공만을 거두었을 뿐이다.

 

3) 인도양 무역과 중국 한나라

갈홍(Ge Hong, 284~363)이 중국에서 천연두의 증상을 정확하게 묘사한 최초의 사람이었지만, 역사학자 Rafe de Crespigny는 후한 황제 환제(146-168)와 영제(168-189)의 통치 기간 동안 중국을 괴롭히는 재앙, 즉 151, 161, 171, 173, 179, 182 및 185 년에 발생한 역병이 아마도 안토니우스 역병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며, 이 재앙이 장각(Jian Jue, 184)가 이끄는 신앙인 태평도를 일으켰으며, 황건의 난(184-205)을 촉발시켰다고 말했다. (태평도(太平道)에서는 병든 이가 찾아오면 부적을 태운 물로 치료하고 잘못을 뉘우치면서 절하도록 했다. 병이 낫는 경우가 생기자 장각의 명성이 점점 높아져 장각을 신처럼 여기며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윽고 장각의 명성이 중국 북부지역에 널리 퍼지자 당시의 정치에 실망해 있던 백성들 중에서 태평도에 귀의하는 사람이 많아져 신도 수가 수십만에 달했다.)

 

Raoul McLaughlin은 역병의 기원이 중앙아시아의 알려지지 않은 고립된 인구 집단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중국과 로마 세계로 퍼졌다고 가정한다. 이 역병은 로마 인구의 약 10%를 죽이고, McLaughlin에 의하면 로마의 인도양에서의 해양 무역을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주었다. 이집트에서 인도에 이르는 고고학적 기록에 의하면 동남아시아에서 로마의 상업적인 활동이 크게 감소되었다. 물론 3세기에 쓰인 작자 미상의 책 《에뤼드라해 주항기(The 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와 6세기 코스마( Cosmas Indicopleustes)의 《그리스도교적 지형학(Christian Topography)》은 로마의 인도양에서의 해양 무역, 특히 비단과 향신료 무역은 중단되지 않고 이슬람(Rashidun Caliphate)에 의해 이집트를 잃어버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기후의 문화사

–  볼프강 베링어 / 안병옥, 이은선 역 / 공감IN / 2010.09.10

 

외부의 침입, 병영화(兵營化) 압력, 증가하는 세금 등의 요인들이 없었더라면, 로마제국과 중국 한나라의 위기를 기후변화와의 연관 속에서 살펴보는 것은 매력적인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로마제국의 구조적 위기에서 발생했지만 나중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121~180, wpdnl 161~180)와 같은 유능한 통치자에 의해 극복되었던 위기요인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 콤모두스 황제(Commodus 161~192, 제위 180~192)의 통치기는 기근과 전염병, 폭동과 모반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콤모두스 황제는 189년 굶주림으로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이후 약 100년간 최소한 40명의 황제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병영(兵營)황제(Barracks emperor, 235~285)들이 집권했던 시기에 로마제국은 나락의 끝으로 빠져들었다.

 


총,균,쇠

–  재레드 다이아몬드 / 김진준 역 / 문학사상 / 2005.12.19

 

이렇게 농경의 발생이 세균들에게 큰 행운이었다면 도시의 발생은 더 큰 행운이었다. 전보다 더욱 조밀한 인구가 전보다 더욱 열악한 위생 환경 속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도시인구는 20세기 초에 들어와서야 마침내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대중성 질병으로 끊임없이 죽어가는 도시 거주자들을 보충하기 위해 시골의 건강한 농부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어와야 했다. 세균들에게 또 하나의 행운은 세계 교역로의 발달이었다. 그로 인해 로마시대에는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가 효과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세균 번식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에 드디어 천연두가 ‘안토니우스 병’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도달했고, 그 결과 AD 165~180년에는 수백만 명의 로마 시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클라이브 폰팅의 녹색 세계사

–  클라이브 폰팅 / 이진아 역 / 인음사 / 2019.10.11

 

정주 사회가 출현한 이후 최초의 도시가 발달하는 것과 함께 인구 규모가 커지고 인구밀도도 높아지면서 인간은 동물에게서 오는 질병에 더욱 대규모로 노출되기 시작했다. 천연두와 홍역 등의 감염성 질병은 물이나 다른 숙주 없이도 전염될 수 있으며, 일정 수 이상의 인간 숙주가 있어야만 발호할 수 있다. 도서 지방을 대상으로 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인구가 25만 명 이하일 경우 홍역은 저절로 수그러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큰 도시들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이런 감염성 질병이 나타났다고 해도 단기적이거나 지역적으로만 나타났을 것이다. 기원전 500년 이전에는 이런 정도의 규모를 가진 도시가 없었고, 그로부터 500년이 지나야 로마, 그리고 중국의 수도 낙양(뤄양)이 이 규모에 도달했다. 천연두나 홍역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혹은 얼마나 많이 발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질병 발생에 관해 남아 있는 기록은 정확성이 떨어져 구체적으로 어떤 질병이었는지 알기 어렵고, 또한 일부 질병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특성이 변화해 왔기 때문이다. 질병들이 미치는 영향은 질병의 역사상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에 의해 변해 왔다. 교역과 여행의 증가로 질병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좀 더 빨리 전파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기 문명들도 상호 간 교역을 했지만,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후 200년 사이의 기간에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지중해와 중국을 연결하는 두 개의 주요 노선, 즉 비단길(실크로드) 및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해상무역로가 확립되면서 질병은 대륙 전체로 퍼졌다. 천연두는 유라시아 대륙 동부 어딘가에서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165년에 ‘안토니우스 병’이라는 이름으로 지중해 세계에 알려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안토니우스 병은 로마 제국이 경험한 두 개의 대질병 중 첫 번째였다. 메소포타미아에 출정했던 군대가 이 질병을 옮겨 왔는데, 그 후 15년 동안이나 천연두가 유행했다. 감염 지역 인구의 2분의 1에서 3분의 1이 사망할 정도로 치사율이 높았다. 161년에서 162년 사이의 중국에서도 천연두가 크게 유행했다.(로마 제국에 유행했던 천연두는 중국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310년에서 312년 사이에도 천연두가 다시 유행했는데, 이때는 치사율이 40퍼센트에 달하는 지역도 많았다. 251년에서 256년 사이에는 로마에서 처음으로 홍역이 발생했는데, 정점에 달했을 때는 하루에 로마의 시민 5000명이 죽기도 했다. 이때부터 천연두와 홍역은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서 풍토병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홍역이 북서유럽에 자리잡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는데, 이는 인구가 적고 인구밀도가 낮았기 때문이었다.

 


콜레라는 어떻게 문명을 구했나

–  존 퀘이조 / 황상익,최은경,최규진 역 / 메디치미디어 / 2012.10.15

 

두창(천연두)이 크게 유행한 것을 최초로 기록한 ‘안토니우스 역병’은 서기 165년부터 180년까지 지속되어 인류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안토니우스 역병’은 300만 명에서 70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로마 제국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몇 세기가 흘러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고 이슬람 세계가 팽창하자 바리올라 바이러스는 이와 더불어 세계를 향해 죽음의 행진을 이어나가 1500년대 무렵에는 전 세계 인류에게 위협을 가하게 된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정복자들에 의해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두창은 아스테카 원주민 35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아스테카 제국과 잉카 제국의 멸망을 이끌었다. 18세기에 이르면서 두창은 풍토병 또는 전염병으로써 주요 유럽 도시들에서 해마다 40만 명의 목숨을 앗았다. 당시 유럽을 통치하던 5명의 군주도 두창으로 인해 목숨을 거두었으며, 당시 모든 실명의 3분의 1이 두창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짐승이다 (동물,인간,질병)

–  E. 풀러 토리, 로버트 H. 욜켄 / 박종윤 역 / 이음 / 2010.07.23

 

…… 중국에서는 “한나라 시대의 기록에 유례 없는 질병의 발발에 대한 언급이 많다. 그중 일부는 전염병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홍역과 수두도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BC 200년에서 AD 200년 사이에는 새로운 역병으로 인해 중국 인구가 격감했다.” 310~312년에는 역병이 돌기 전에 “메뚜기 떼가 덮치고 기근이 들어 중국 북서부 지역에서는 100명 중 한두 사람이 목숨을 건졌을 정도였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322년, 또 다시 역병이 돌아 이전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열 명 중 두세 사람이 죽어나갔다.” 이러한 역병의 유행으로 인해 한나라는 “돌풍 앞의 썩은 나무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전염병과 몰락의 관계가 가장 분명하게 기록된 곳은 누가 뭐라 해도 로마 제국이다. 역사가 리비(Livy)는 “공화정 시대에만 최소 11건의 대규모 역병이 있었고, 최초로 발생한 해는 BC 387년이라는 이른 시기였다”고 기록했다. 그중 가장 심했던 것이 “안토니우스 역병”(plague of Antoninus)으로서 165년에 시작된 것이 180년까지도 기승을 부렸다. 시리아에서 로마로 귀환한 병사가 처음 퍼트렸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를 포함해 로마 인구의 1/4 ~ 1/3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부 역사가는 이 역병을 “로마 제국의 쇠퇴가 시작된 전환점”으로 꼽기도 한다.

 


모기 : 인류 역사를 결정지은 치명적인 살인자

–  티모시 C. 와인가드 / 서종민 역 / 커넥팅 / 2019.10.30

 

새천년에 접어들 무렵 활동했던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로마 공화정 기간 동안 유행했던 역병을 최소 열한 가지 이상 기록했다. 이제는 악명 높아진 역병 두 가지가 제국의 심장부를 강타했다. 기원후 165년부터 180년까지 유행했던 첫 번째 역병은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이들의 이름을 따 안토니우스 역병 또는 갈레노스 역병이라 부른다. 메소포타미아 원정에서 모기에 시달리다 패배한 로마군과 함께 유입된 이 역병은 우선 로마시를 강타한 뒤 이탈리아 전역에 들불처럼 번졌다. 역병의 발발과 관련있는 안토니누스(Antoninus) 왕조의 두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Lucius Verus)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도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역병은 계속해서 퍼져나가 북쪽으로 라인강, 서쪽으로 대서양 해안, 동쪽으로 인도와 중국에까지 이르렀다. 당대 기록을 보면 역병이 절정일 때 로마에서만 하루에 2,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의 기록들과 갈레노스의 글에는 치사율이 25퍼센트에 달했다고 쓰여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로마 제국 전역에 걸친 사망자 수를 최대 500만 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 피해 정도가 매우 극심한 것으로 보아 이전까지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던 병원체였던 듯하다. 갈레노스는 증상에 관한 글을 남기기는 했으나 그 묘사가 별다른 특징이 없고 모호하다. 역병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나 가장 유력한 후보는 천연두이며, 홍역이 그 다음 유력 후보로 꼽힌다.

키프리아누스 역병으로 알려진 두 번째 역병은 기원후 249년부터 266년까지 유행했으며, 에티오피아에서 발생한 뒤 북아프리카를 건너 로마 제국 동부를 거쳐 북쪽으로 스코틀랜드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퍼졌다. 역병의 이름은 카르타고의 가톨릭 주교이자 이 비극을 목격하고 해석하여 기록으로 남긴 성 키프리아누스(Saint Cyprian)에서 따왔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치사율은 25퍼센트에서 30퍼센트 정도였으며, 로마에서 발생한 사망자만 매일 5,000명에 달했다. 사망자 중에는 호스틸리아누스(Hostilian) 황제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 황제도 있었다. 총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략 500~600만 명, 혹은 제국 총 인구의 3분의 1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염병학자들은 안토니우스 역병과 키프리아누스 역병 모두 천연두와 홍역이 동물 숙주에서 인간에게 전염된 최초의 인수공통전염병 발병 사례였을 것으로 본다. 안토니우스 역병이 천연두 혹은 홍역이었거나 둘 다였을 것으로 보는 이도 있고, 키프리아누스 전염병이 황열과 유사한 모기 매개 출혈열 혹은 무시무시한 에볼라 바이러스(이 바이러스는 모기를 매개로 전염되지 않는다)와 유사한 출혈열 바이러스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도 있다.

말라리아와 더불어 역병들이 남긴 상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었다. 로마 제국이라는 초강대국은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으며 구원받을 수도 없었다. 광할한 제국이 허물어지는 가운데 살아남은 주민들은 몸을 옹송그렸으며, 농업에서는 물론 로마 군단에서도 인력이 부족했던 탓에 주민들에 대한 로마의 통제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한 데 더하여,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위기의 3세기(Crisis of the Third Century)’는 광범위한 폭동과 내전, 악한 군사령관이 사주한 황제 및 정치인 암살 그리고 기독교인 희생양에 대한 걷잡을 수 없고 가학적인 박해로 물들었다. 이처럼 아무도 말리지 않던 쾌락 본위의 폭력은 경제 침체, 지진과 자연재해 그리고 350년경 시작된 ‘이주 시대(Era of Migration)’에 제국 내 재배치된 민족들과 국경 너머 교전 집단 사이에 계속되는 긴장감 등이 더해지면서 한층 더 복잡해졌다.

 


<관련 사진>

 

– The angel of death striking a door during the plague of Rome; engraving by Levasseur after Jules-Elie Delaunay

 

 

– 납의 오염정도와 은화 생산량 사이의 상관 관계. 출처: DRI

 

 

 

 

[지도 6.3] 날씨를 최대한 활용하기 : 기후변화의 수혜를 입은 지역을 포함한 한나라(서기 100년경)와 로마제국(서기 117년경)의 최대 판도.

 


<관련자료 및 참고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Antonine_Plague

https://en.wikipedia.org/wiki/Crisis_of_the_Third_Century

https://de.wikipedia.org/wiki/Arthur_E._R._Boak

2018-05-24  로마 흥망성쇠, “그린란드 빙하에 기록돼 있어”

2018-05-15  로마 전성기에도 심각한 오염 있었다

2017-12-19  How Climate Change and Plague Helped Bring Down the Roman Empire

2017-11-04  6 ways climate change and disease helped topple the Roman Empire

2015-06-24  전쟁·기근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

2015-06-08  [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270> 세계를 휩쓴 전염병

2013-07-09  (2)역병이 적벽대전 승패 갈랐다

2009-05-06  [세계의 창]전염병, 그 흉흉한 역사

 

로마제국과 한나라 쇠락의 시작 – 안토니우스 역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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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로마제국과 한나라 쇠락의 시작 – 안토니우스 역병

  • 2020년 1월 20일 at 9: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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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옐로우님의 블로그를 늘 마음에 두면서 초등학생이 애들 책들 위주로 다시 세계사나 역사 등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연대표 뼈대를 잡으면서 아주 조금씩이나마 살을 붙여가려고 합니다. 등불과 같은 사이트 감사드리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사석에서라도 높은 식견과 고견을 나누어 들을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자료 수집과 정리하시는 작업 등 궁금한 점도 참 많습니다^^ 추운 날씨에 늘 건강 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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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1월 20일 at 9: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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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과찬의 말씀을 …. 역사에 관심 많은 IT개발자의 재능 기부 정도로 봐주시면 됩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데요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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