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라는 용어에 대한 구체적 실체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 질서의 구조적 위기와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정책이자 이데올로기를 지칭한다.
※ 미국체제 위기 (1968년 ~ 1973년) : http://yellow.kr/blog/?p=582
– 두산백과 : 신자유주의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비판하고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이론. 1970년대부터 케인스 이론을 도입한 수정자본주의의 실패를 지적하고 경제적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미국의 패권 수립과 관련된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의 일차적인 의미는 대형 금융의 민간의 통제에서 공공의 통제로의 대체였다. 즉 세계 유동성에 대한 통제권을 사적 수중에서 공적 수중으로, 런던과 월스트리트에서 워싱턴으로 이전시킨 것이다. 미국 재무부장관 헨리 모건소(Henry Morgenthau, Jr.) 스스로가 나중에 자랑했듯이, 그와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화폐 자본을 런던과 월스트리트에서 워싱턴으로 옮겼고, 그래서 ‘대은행가들은’ 그 때문에 우리를 미워했다.”고 했다.
세계 유동성에 대한 공공의 통제는 이어서 전개된 전지구적 케인스주의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으며, 이 전지구적 케인스주의를 통해서 미국 정부는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체계의 카오스를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미소 공동의 질서 잡힌 세계권력 지배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미국 법인자본이 이런 변환을 통해 개방된 새로운 경계들을 점령하는 데로 나아가자, 세계 유동성에 대한 통제권은 다시 공적 수중에서 사적 수중으로, 워싱턴에서 런던과 뉴욕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1978년이 되면, 미국 정부는 느슨한 화폐정책을 지속하여 유로통화 시장을 통제하는 글로벌 대형 금융 공동체와의 대립을 파국으로 몰아갈지, 아니면 그 대신 건전화폐의 원리 및 실천을 더 엄격히 고수함으로써 그 공동체와 화해를 추구할지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다. 결국,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우위를 차지했다. 카터 대통령 재임기의 마지막 해에 시작하여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재임기(1981~1989)에 더욱 단호하게, 미국 정부는 두번째 행동 노선을 택했다. 그리고 국가권력과 자본권력 사이의 새로운 “기억할 만한 동맹”이 형성되어, 전체 냉전 시기의 특징이던 미국의 느슨한 화폐 정책이 전례 없는 긴축적인 화폐 정책에 길을 내주었다. 그 결과는 레이건 시대의 벨에포크였고, 1980년대 자본주의의 승리였다.
미국 정부와 사적인 글로벌 대형 금융 공동체와의 동맹은 장미빛 예상을 넘어서는 최고의 수익을 가져왔다. 구매력을 미국 수중에 재집중시키자, 미국 군사력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을 것을 거의 즉각적으로 달성해 냈다. 미국의 긴축 화폐 정책, 높은 실질 이자율, 그리고 탈규제가 제3세계 국가들에 파괴적 효과를 미치자, 이들 국가들은 신속히 무릎을 꿇었다. 자본이 다시 희소해지자, 소련 블록 전체가 갑자기 경쟁의 찬바람이 불어닥침을 느끼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발목잡히고, 미국과의 새로운 군비경쟁 고조에 도전을 받자, 경화된 소련 국가구조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제3세계와 제2세계를 위한 파티는 끝난 반면, 서구의 부르주아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80년 전 유럽 부르주아지의 “경이적 순간”을 연상시키는 벨에포크를 즐기게 되었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80
– 브레튼우즈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간단 비교
브레튼우즈 체제 | 신자유주의 | ||
세계 유동성의 공적 통제 (자본 이동 통제) | 세계 유동성의 사적 통제 (자본 이동 자유화) | ||
워싱턴 중심 | 월스트리트, 런던 중심 | ||
큰 정부, 정치 > 시장 | 작은 정부, 정치 < 시장 | ||
금태환 본위제(금-달러 본위제) | 신용화폐(달러 본위제), 석유-달러 본위제 | ||
고정환율제 | 변동환율제 | ||
케인스 | 밀턴 프리드먼, 하이에크 | ||
수정자본주의 | 신자유주의 | ||
미국 우위의 냉전 체제 | 미국 주도의 세계화 |
– 브레튼우즈체제 시기의 ‘자본주의 황금기(POST-War boom)’과 신자유주의 체제 시기의 ‘레이건 시대(Reagan era)’ 의 미국 S&P 주가지수의 상승
※ 자본주의 황금기 (1950년 ~ 1973년) : http://yellow.kr/blog/?p=984
1971년 미국의 금태환 중지 선언을 계기로 브레튼우즈 체제의 근간인 금태환 본위제와 자본이동 통제가 종말을 고하고, 변동환율제와 자본이동의 자유화가 새로운 지구 정치경제 질서를 규정하게 되었다. 금태환 없이도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공인받고 세계 자본주의가 급속히 투기화되는 동시에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금융자본의 힘이 강해졌다. 또한 케인스주의에 대적하여 국가개입의 철회 및 자본이동과 금융의 자유화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정치경제 패러다임으로 대두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금융적 축적이 증가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지구적 질서가 탄생했다.
※ 닉슨, 달러-금 태환 정지 선언 – 1971년 : http://yellow.kr/blog/?p=1106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은 전후 시대 케인스식 정책의 한계를 드러냈다. 따라서 전후의 재건과 영광의 30년 동안 높은 성장률을 구가하던 시기가 끝나면서, 정부의 역활 그리고 국가 전체 생산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한정 확장되는 데 의문을 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과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은 끊임없이 확장하던 국가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켰고 1979~1980년 보수혁명을 가능케 한 학문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핵심은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여 재산권을 근간으로 한 개인 자유를 극대화하고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자원 배분을 효율화하는 것이다. 1974년에 하이에크가, 1976년에는 밀턴 프리드먼이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79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보수혁명’ 이래 20여 년간 서방 세계는 보수우파가 승승장구하던 시대였다.
신자유주의는 영국의 대처나 미국 레이건 정부의 신보수주의적 정책이나 이데올로기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제3세계 외채위기에 해법으로 제안된 신흥시장 육성전략과 그 속에서 활동하는 다국적 법인자본의 금융세계화라는 현상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신흥시장, 즉 새롭게 형성된 주식 및 증권시장을 육성시키는 일련의 정책개혁을 내포하고 있다. 금융시장 개방, 금융자유화, 기업지배구조조정, 저금리 정책 등은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시장의 원리’가 금융의 원리임을 시사한다.
브로델에 따르면, 상품 형태를 벗어던지고 화폐 형태를 취함으로써 유동성을 되찾으려는 자본의 되풀이되는 경향은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오늘날의 서양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어떤 통일성을 증명한다.”
아래의 그림은 브로델(Fernand Braudel)의 장기순환을 보여준다. 1970년 즈음에 미국 체제의 실물적 팽창 단계에서 금융적 팽창 단계로의 변화로 보고 있다.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금융적 팽창의 이륙을 한 것은 1968년 시작되었는데, 이는 런던 중심의 유로달러시장에 확보된 유동성 기금이 급격히 폭발적인 가속도를 붙이며 성장을 경험한 때였다. 이런 폭발적 성장의 결과, 1971년이 되면 미국 정부는 금-달러 교환 본위의 신화를 포기해야 했고, 1973년이 되면,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실물적 팽창 국면 중에 고도금융을 지배해 온 고정환율제 체제에 대항해 고조되고 있던 투기 물결을 억제하는 싸움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 및 그와 연합한 중앙은행들이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시장-즉 주로 유로달러시장-이 각국 통화 간의 그리고 각국 통화와 금 사이의 가격을 고정시키는 과정의 집행자가 되었다.
케빈 필립스(Kevin Phillips)는 1980년대의 미국 금융의 누적적 영향력에 대해, 에드워드 시기의 영국, 가발 시기의 네덜란드, 그리고 제노바 시대의 에스파냐 사이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유사성을 강조했다(Phillips 1993: 8장). “금융에 대한 과도한 몰입과 부채에 대한 관용은 거대 경제 열강들의 최종 단계에 아주 전형적이다. 이는 경제적 쇠퇴의 전조이다”(Phillips 1993: 194).
1970년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그에 뒤따른 금융적 팽창은 종종 19세기말의 상황과 비교되곤 한다. 왜냐하면 19세기말에 전세계 자본주의의 토대를 구성했던 영국의 자본 축적체계가 위기에 직면했고, 그 후 런던의 금융가를 중심으로 금융적 팽창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의 자본주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이윤율의 저하 속에서 산업적 팽창의 한계에 부딪혔고, 이는 자본수출과 같은 금융적 팽창으로 자본을 이동시켰다. 역사의 유사성을 본다면 현재 진행 중인 미국 체계의 금융 팽창은 대공황과 체계의 카오스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국가를 초월하는 자본가계급과 엘리트의 정보 · 정책 네트워크도 달러-월스트리트 체제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지구 정치경제를 뒷받침한다. 대표적으로 빌더버그 클럽(Bilderberg Club), 삼각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미국 외교협회(CFR) 등이 있는데, 이들은 회합을 통해 사회 · 경제적 동향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새로운 지구적 정치경제 질서를 모색한다. 이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와 금융정책은 각국의 기업과 정부로 전파된다. 이들 단체들은 음모론에 자주 등장한다.
(카터 행정부의 내각은 삼각위원회 내각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 삼각위원회 (The Trilateral Commission) – 1973년 : http://yellow.kr/blog/?p=782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1970년대의 나머지 시기에 미국 국가 전략의 특징은 세계정부 기능을 기본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되었다. 마치 미국 내 통치집단들이 세계가 미국에 의해 지배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관리되도록 내버려 두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 그 결과 이란혁명과 1980년 인질 위기를 겪으면서, 전후 세계질서를 통해 형성된 상태가 불안정화되었고, 미국의 권력과 위신이 급속히 쇠퇴하였다.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현 국면에서 금융적 팽창의 이륙을 한 것은 이런 위기의 필수적이자 초기적 측면이었다. 그 이륙은 1968년 시작되었는데, 이는 런던 중심의 유로달러시장에 확보된 유동성 기금이 급격히 폭발적인 가속도를 붙이며 성장을 경험한 때였다. 이런 폭발적 성장의 결과, 1971년이 되면 미국 정부는 금-달러 교환 본위의 신화를 포기해야 했고, 1973년이 되면,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실물적 팽창 국면 중에 고도금융을 지배해 온 고정환율제 체제에 대항해 고조되고 있던 투기 물결을 억제하는 싸움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 및 그와 연합한 중앙은행들이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시장-즉 주로 유로달러시장-이 각국 통화 간의 그리고 각국 통화와 금 사이의 가격을 고정시키는 과정의 집행자가 되었다.
……
1978년이 되면, 미국 정부는 느슨한 화폐정책을 지속하여 유로통화 시장을 통제하는 세계시민주의적 금융 공동체와의 대립을 파국으로 몰아갈지, 아니면 그 대신 건전화폐의 원리 및 실천을 더 엄격히 고수함으로써 그 공동체와 화해를 추구할지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다. 결국,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우위를 차지했다. 카터 대통령 재임기의 마지막 해에 시작하여 레이건 재임기에 더욱 단호하게, 미국 정부는 두번째 행동 노선을 택했다. 그리고 국가권력과 자본권력 사이의 새로운 “기억할 만한 동맹”이 형성되어, 전체 냉전 시기의 특징이던 미국의 느슨한 화폐 정책이 전례 없는 긴축적인 화폐 정책에 길을 내주었다.
그 결과는 레이건 시대의 벨에포크였다. 케빈 필립스는 브로델(Braudel 1984), 홉스봄(Hobsbawm 1968), 그리고 우리의 연구가 기반한 다른 출처들에 준거해, 금융의 누적적 영향력이 1980년대의 미국에 대해, 에드워드 시기의 영국에 대해, 가발 시기의 네덜란드에 대해, 그리고 제노바 시대의 에스파냐에 대해 끼친 영향력 사이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유사성을 강조했다(Phillips 1993: 8장). “금융에 대한 과도한 몰입과 부채에 대한 관용은 거대 경제 열강들의 최종 단계에 아주 전형적이다. 이는 경제적 쇠퇴의 전조이다“(Phillips 1993: 194).
……
그러나 우리의 조사가 또한 보여 주는 것은, 금융적 팽창 중에 전개된 국내의 사회적 양극화는 공통의 하나의 중심지로 모인다는 의미와 또한 힘, 밀도, 또는 강도가 증가한다는 이중의 의미에서,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 중인 자본의 집적과정의 필수적 측면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3장에서 강조했듯이, 모든 앞선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금융적 팽창 국면에서는 두 가지 상이한 종류의 자본집적이 동시에 일어났다. 한 종류는 종료로 치닫고 있던 축적 순환의 조직적 구조 내에서 발생하였고, 다른 한 종류는 새로운 축적체제와 축적 순환의 출현을 미리 그려 보여 주었다.
두번째 종류의 집적이 현 정세에서 발견될 수 있을까라는 쟁점을 일단 미루어 두면, 첫번째 종류의 집적은 실로 레이건 시대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카터 행정부 후기에 폴 볼커가 맡고 있던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극히 느슨한 화폐 정책에서 극히 긴축적인 화폐 정책으로 급속한 전환을 주도하였는데, 이는 미국 달러에 대한 신뢰성을 회복시킬 목적뿐 아니라, 사적으로 통제되는 세계화폐를 미국 내로 재집중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전체 조치들의 전문(前文)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미국 화폐 공급의 긴축은 네 가지 다른 조치들과 결합해 추진되었다.
첫째, 미국 정부는 현행 인플레이션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으로 이자율을 인상하여, 세계적으로 이동자본을 둘러싼 공세적 경쟁을 개시하였다. 아래의 그림이 보여 주듯이, 미국의 장기 명목 이자율은 1960년대 중후반부터 상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970년대 전체에 걸쳐 인플레이션 때문에 실질 이자율은 매우 일정하게 아주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었고, 1970년대 중반에는 심지어 제로(0) 이하로까지 억제되었다. 이에 비해 1980년대 초에는 긴축 화폐 정책이 낳은 디플레이션 경향 때문에 높은 명목 이자율이 형성되었고, 이는 새롭게 실질 이자율을 대폭 상승 도약시켰다.
– 미국의 명목 이자율과 실질 이자율 (Source: Mishkin, S.F. and Eakins, S.G. (2018). Financial Markets and Institutions, Global Edition (9e). Pearson Higher Ed USA)
둘째, 미국에 이동자본을 재집중시키려는 금전적 유인책을 보완한 것은 주요한 “탈규제”의 대세였는데, 이는 미국 및 비미국 법인기업들과 금융기관들에게 미국 내에서 사실상 무제약의 행동자유를 부여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특히 의미심장한 것은 미국에서 은행업의 탈규제화였다. 뉴욕 금융엘리트의 사업 활동은 1960년대에 뉴욕에서 런던으로 “이주”했고, 1970년대에는 거기서 전세계의 “진정한” 역외 화폐시장으로 이주한 바 있었는데, 1980년대에는 최종적으로 고향으로 다시 집중될 수 있었으며, 더욱이 다른 어떤 지역도 제공할 수 없는 결정적 우위 – 세계권력의 중심지로 아직 가장 두드러지게 남아 있는 곳과 사회적 · 정치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점 -를 향유하게 되었다.
셋째, 균형예산을 내걸고 선거에 승리한 레이건 행정부는 세계역사상 가장 놀라운 국가 부채의 팽창을 추동하였다. 1981년 레이건이 백악관에 들어섰을 때, 연방 예산적자가 740억 달러, 국가 총부채가 1조 달러였다. 1991년이 되면, 예산적자는 네 배로 증가해 연간 3천억 달러 이상이 되었고, 국가 부채도 네 배 증가하여 거의 4조 달러가 되었다. 그 결과 1992년에 연방 순 이자지급액은 연간 1,950억 달러로 전체 예산의 15%를 차지했는데, 1973년에 그 수준은 170억 달러로 예산의 7% 수준에 불과했다(Phillips 1993: 210: Kennedy 1993: 297). “앞서 세계의 선도적 채권자인 미국은 이제 세계의 선도적 채무자가 될 만큼의 돈을 해외에서 차입 – 1914~45년의 영국의 망령-하였다”(Phillips 1993: 220).
넷째, 이런 미국 국가 부채의 놀라운 증가는 소련과의 냉전의 격화(전적이지는 않더라도 주로 전략방위계획SDI을 통해서)와 일련의 선별된 비우호적 제3세계 정권들에게 징벌적으로 군사적 완력을 보여 주는 것(1983년 그레나다, 1986년 리비아, 1989년 파나마, 1990~91년 이라크)과 결합되었다. 모든 앞선 금융적 팽창에서와 마찬가지로, 생산 수행과 뗄 수 없는 난관이나 위험성에 노출될 필요 없이 불모의 화폐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을 준 그 “마법사의 지팡이”의 동원은, 마르크스가 국채를 통한 “국가의 양도”를 묘사한 것처럼, 이렇듯 또다시 국가 간 권력투쟁의 증폭과 결합되었다. 그리고 베버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자면, 서구 자본주의가 또 한번의 전례 없는 부와 권력의 “경이적 순간”을 향유토록 거대한 기회를 또다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이동자본을 둘러싼 경쟁이었으며, 이는 이런 최근의 국가 간 권력투쟁의 증폭 때문에 야기된 것이었다.
우리가 에필로그에서 보게 되듯이, 1980년대 자본주의의 승리에 대한 비판자들은 그 한계와 모순에 주목한다. 그렇지만, 이런 한계와 모순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 승리 자체의 속성과 정도를 우선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사전적 평가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의 반격을 촉발시킨 곤경 상태를 인식해야만 한다.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
– 지오바니 아리기, 비벌리 J. 실버 / 최홍주 역 / 모티브북 / 2008.10.17
충성의 의무도 없고 어떤 국가도 본국으로 여기지 않는 다국적 기업 체계의 등장으로 “국민 국가”는 “경제 단위로서의 역활이 대충 끝났다.”는 찰스 킨들버거(Charles P. Kindleberger, 1910~2003)의 주장은 국가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논쟁의 재개를 알리는 시작이었다. 그러나 초국가적 경제세력에 의한 국가의 포괄적 무력화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널리 통용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 40년 후였다. 그 기간 동안에 다국적 기업의 해외 사업 팽창은 세계적 규모의 금융 팽창과 통합 과정을 유발했으며, 그것 특유의 탄력을 갖게 되었는데 이 사실은 세계화의 옹호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프레드 버그스텐(Fred Bergsten)에 따르면, 1995년의 G7 핼리팩스 회의(Halifax meeting)까지는 “관리들이 엄청난 민간 자본의 흐름에 주눅이 들어 다국적 기업에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에릭 피터슨(Erik Peterson)은 버그스텐을 인용한 다음, 도대체 이 흐름을 저지하는 게 가능한가에 의문을 나타내면서 “다가오는 세계 시장의 패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세계 자본을 얻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영토적 제약을 벗어던진 시장 세력들이 미국을 포함하여 강대국들의 경제 정책에까지 점점 더 강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시장 세력은 미국이 외국에서 효과적으로 안보와 외교정책을 수행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며, 워싱턴이 세계 지도자의 역활을 유지할 수 있는 범위도 결정하게 될 것이다.”
……
헨리 모건소(Henry Morgenthau)가 브레턴우즈 협정 때 주장한 대로, 안보 제도와 통화 제도는 가위의 양날처럼 상호 보완적이기 때문에 유엔에 대한 지지는 IMF에 대한 지지를 의미했다. 사실 미국의 패권 수립과 관련하여 브레턴우즈의 일차적인 의미는 협정이 계획하고 있는 금달러본위제도도, 협정에 의해 설립될 국제 통화 기구들도 아닌, 대형 금융에서의 공공의 통제에 의한 민간의 통제의 대체였다. 모건소 스스로가 나중에 자랑했듯이, 그와 루즈벨트는 “화폐 자본을 런던과 월스트리트에서 워싱턴으로 옮겼고, 그래서 “대은행가들은” 그 때문에 우리를 미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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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에 따르면, 상품 형태를 벗어던지고 화폐 형태를 취함으로써 유동성을 되찾으려는 자본의 되풀이되는 경향은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오늘날의 서양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어떤 통일성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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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미국에서는 과거의 패권 위기들에서와 같이 열강의 대립 격화가, 과잉 축적된 자본을 금융 팽창으로 변환시키는 데 필수적인 중개 조건의 역활을 했다. 2장에서 보겠지만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앞장서서 역외 금융 시장에 잉여 자본을 축적했는데, 이는 미국이 지배하는 브레턴우즈 통화제도의 위기를 촉진했다. 그러나 1970년대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기업들의 이런 경향이 자본 수익률의 하락을 반전시키지 못했다. 자본에게나 미국에게나 전기는 프레드 할리데이(Fred Halliday)가 제2차 냉전이라고 부른 기간 동안에 열강의 대립이 격화되었을 때 비로소 이루어졌다. 미국 정부가 소련과의 군비 경쟁의 확대와 동시에 국내 감세 정책을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적극적으로 유동 자본을 얻기 위한 경쟁을 시작하자, 자본 수익률은 전 세계에 걸쳐 가파르게 증가했고, 금융 팽창은 탄력을 얻었으며, 미국의 세계적인 영향력은 다시 한 번 크게 팽창했다.
……
1장과 2장에서 본 것처럼 1970년 무렵, 패권 위기의 징후가 많이 나타나는 가운데 이전 20년 동안의 세계 무역과 생산의 대 팽창(이른바 자본주의의 황금기)이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에는 산업과 무역에서 금융과 투기 활동으로의 자본 전환이 탄력을 얻으면서 새로운, 체계 전체에 걸친 금융 팽창을 야기했다. 네덜란드가 주도한 18세기 중반의 금융 팽창과 영국이 주도한 19세기 말의 금융 팽창에서 처럼, 급속하고 꼴사나운 부의 양극화가 엘리트들이 확대되는 “중산층”을 패권 블록에 편입시키는 노력을 져버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었다. 양극화는 사회 정치적 안정의 기초가 무너지고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표지였다.
……
초기의 패권 위기를 알린 표지는 제3세계의 내전(베트남)에서 미국이 당한 패전과 미국 내와 전 세계에서 타오른 반전 운동이었다. 전쟁과 반전 운동은 이미 고조된 흑인 민권 운동과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를 요구하는 제3세계의 점증하는 독단성과 서로 얽혔다. 이 반란을 진정시키려는 초기의 노력은 단지 미국의 재정 위기를 심화시켰을 뿐이었다. 미국의 힘과 국위의 쇠퇴는 1979년 이란 혁명과 1980년의 인질 위기에서 정점에 달했다.
미국의 엘리트가 전략을 전환한 것은 이 광범위한 내외의 사회 정치적 도전의 맥락에서였다. 미국 내와 세계에서의 뉴딜 정책은 폐기되고 미국은 군사적 국위를 재건하려고 했다. 제2차 냉전의 군사력 증강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미국은 금리를 올렸고 국제 유동 자본을 얻기 위한 적극적인 경쟁에 나섰다. 세계의 잉여 자본은 1980년대에 미국으로 몰렸는데, 이는 “외채 위기”를 조장했고 “개발”이라는 패권의 약속이 폐기되었음을 알리는 표지가 되었다. 아메리칸 드림의 보편화라는 패권의 약속을 폐기함은 미국의 지배 엘리트가 그 약속이 사기였음을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월러스틴의 말대로, 현재 성립되어 있는 식의 세계 자본주의는 “(1인당 몫은 비교적 적지만 많은 사람에게 달라는) 제3세계와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이지만 1인당 몫은 상당히 많이 달라는) 서양 노동 계급의 결합된 요구”를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
최근 약 20년 동안의 세계적인 금융 팽창은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도 “세계 시장의 다음 패권”의 선발대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패권의 위기가 현재 한창 진행 중임을 나타내는 가장 분명한 표지이다. 그러므로 이 팽창은 쇠퇴하는 패권이 이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큰 파멸 또는 작은 파멸로 끝날 일시적인 현상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윌리엄 엥달 / 서미석 역 / 길 / 2007.10.25
카터는 삼각 위원회 구성원들이었던 특별보좌관들을 하도 많이 데려와 그의 대통령직이 ‘삼각 대통령직’이라 불릴 정도였다. 카터 자신처럼 은밀한 삼각위원회 조직의 고위 구성원이었던 월터 먼데일 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 특별보좌관,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마이클 블루멘탈 재무장관,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 앤드루 영 유엔대사, 국무부 고위관리 리처드 쿠퍼와 워런 크리스토퍼는 모두 배타적인 삼각위원회의 일원이었다.
……
1979년 10월에는, 그해의 제2차 석유 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파괴적인 새로운 영-미 금융 쇼크가 시작되었다. 그해 8월 록펠러를 비롯한 월스트리트 금융 기득권 세력 중요 인물들의 충고에 따라 카터 대통령은 1971년 8월 달러화를 금본위제와 분리하는 정책을 기안한 핵심 인물이었던 볼커를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으로 임명했다. 록펠러의 체이스맨해튼은행의 전 임원이었으며 그로 인해 당연히 록펠러의 삼각 위원회 구성원이었던 볼커는 그가 임명될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은행이 된 뉴욕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맡게 되었다.
……
볼커는 자신의 두 가지 목표를 전부 달성했다. 유로달러 시장에서의 미국 이자율은 10퍼센트에서 16퍼센트로 치솟았고, 깜짝 놀란 세계가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가운데 불과 몇 주 만에 20퍼센트 수준까지 올라갔다. 세계 경제가 1930년대 이후로 가장 심각한 불황에 빠지면서 인플레이션은 정말로 ‘뿌리 뽑히고’ 있었다. 그리고 달러화는 이례적인 5년 동안의 상승기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영-미 석유에 대한 의존을 대체할 전 세계적인 핵에너지 자원 개발이라는 놀라운 추세를 결정적으로 끝장내기 위해서 ‘핵장미의 꽃을 완전히 꺽어 내리기로’ 기득권 세력들이 결정함으로써 석유 위기와 볼커의 충격요법은 더욱 강화되었다.
……
1979년 말 영-미 금융 기득권 세력의 세계 경제와 산업 잠재력에 대한 지배권은 전에는 상상조차 못했을 정도로 다시금 확고해졌다. 세계 석유 흐름에 대한 통제권은 다시 한 번 그들 특유의 맬서스식 정책의 핵심 무기가 되었다. 호메이니의 이란의 혼란과 볼커의 달러화 충격으로 이러한 중요한 정책 조정자들은 사실상 올림포스 산의 신들처럼 행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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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의 ‘경제개혁’은 그릇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릇된 약을 처방했다. 그러나 영국의 전략적 ‘세력균형’ 계산이 그랬듯이 런던 시티의 국제금융계와 셀, 브리티시석유회사와 그들의 협력자들을 중심으로 뭉친 강력한 석유기업들을 이러한 정책의 진정한 수혜자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대처는 그녀를 후원하는 냉소적인 세력이 자기들의 좀더 원대한 지정학적 계획을 수행하도록 도구로 내세운, 식료품상의 딸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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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커의 통화 충격과 그로 인한 미국의 경기 후퇴는 1980년 11월 지미 카터가 선거에서 패배한 주 요인이었다. 신 ‘보수주의’ 공화당 대통령으로서 옛 할리우드 영화배우 로널드 레이건은 볼커의 충격요법을 후원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 통화주의자 스승인 밀턴 프리드먼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밀턴은 몽페를랑협회(하이에크가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지주로서 1949년에 창립한 모임)파 경제학자였다. 영국의 대처는 의도적으로 레이건과 자칭 ‘특별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대처는 볼커의 충격요법과 정부 긴축뿐 아니라 반노동조합 정책의 성향을 레이건이 지지하도록 부추겼다. 이 기간 동안 정책에 대해 단합된 영-미 공세를 공고히 하기 위해 레이건과 대처는 칼 브루너, 프리드먼, 앨런 월터스와 그 외의 사람들이 포진한 교조적인 몽페를랑파 경제학자 집단에서 데려온 인물을 똑같이 경제정책 특별보좌관에 기용하기도 했다.
……
…… 레이건은 프리드먼을 비공식적인 경제정책 특별보좌관으로 곁에 두었다. 카터 행정부가 데이비드 록펠러의 삼각 위원회 옹호자들로 채워졌던 것 못지않게 레이건 행정부는 프리드먼의 급진적 통화주의 제자들로 채워졌다.
……
런던 시티와 뉴욕의 강력한 자유주의 기득권 세력은 피노체트 군사 독재 치하의 칠레 경제를 파괴하기 위해 프리드먼이 전에 강요했던 것과 같은 급진책을 이번에는 전 세계 경제의 장기간의 산업과 투자에 두 번째의 치명타를 가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영-미 금융계의 상대적 힘이 다시 한 번 주도권을 잡으리라고 판단했다. 1980년대에 뒤이어 일어난 일들은 1970년대의 쇼크로 충격은 받았지만 아직 분별력은 유지하고 있던 세계가 보기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대처와 볼커의 급진적인 통화 충격 정책만 아니었다면 1980년대에 제3세계 외채 위기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해도 전혀 과장은 아닐 것이다.
……
제3세계 채무국들은 악화하는 상품 수출 교역 조건, 수출입의 감소, 채무 상환 비율의 급등이라는 무서운 가위의 양날에 눌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것이 바로 워싱턴과 런던에서 ‘제3세계 외채 위기’라 즐겨 불렀던 사건이다. 그러나 위기는 멕시코시티 · 브라질리아 · 부에노스아이레스 · 라고스나 바르샤바에서가 아니라 런던 · 뉴욕 · 워싱턴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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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과 런던의 막강한 은행들은 너무도 자신감에 넘쳤으므로 이 무렵에는 제3세계 채무 불이행에 대비해 긴급 대손 충당금을 늘리는 것조차 거부했다. 시티코프은행과 체이스맨해튼은 1980년대 초반에 마치 아무런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사상 최대의 순익’이라고 공공연히 선언하며 주주들에게 상당한 배당금을 지급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채무 회수를 감독하는 책임을 미국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에 완전히 전가했다. 그보다 안전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
한스 라스무센의 이 연구는 1980년대 초 자본에 굶주린 제3세계로부터 주로 미국의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그리고 그보다 적지만 영국의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부의 이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라스무센은 1980년대 동안 개발도상 지역의 전 국가들이 미국 한 나라에만 4천억 달러를 이전한 것으로 추산했다. 이 덕분에 레이건 행정부는 세계 역사에서 평화시 최대의 재정 적자를 해소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긴 평화시 회복”에 대한 신뢰라고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했다.
미국사 산책 11 – ‘성찰하는 미국’에서 ‘강력한 미국’으로
–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 2010.11.08
록펠러와 브레진스키의 구상
‘삼각위원회’는 ‘삼각주의(trilateralism)’을 내세웠다. 이는 미국-유럽-일본의 삼각 체제로 제2세계와 제3세계의 도전을 막고 세계적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정책이었다. 삼각위원회는 록펠러 등 재벌들의 자금 지원과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K. Brzezinski) 등의 이론 제시로 발족된 국제적 단체였다. 이 위원회는 북미-유럽-일본지역에서 활약하는 정치인들은 물론 대은행, 대기업, 언론 및 정보산업의 대표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록펠러의 체이스맨해튼(Chase Manhattan) 은행은 이미 1969년부터 국제적 팽창을 위한 전면적인 캠페인을 추진해왔는데, 삼각위원회의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다국적 기업이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게끔 세계의 정치 및 경제적 상황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1세계는 제3세계와 대결을 벌이기보다는 타협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Kowalewski 1983, Sivanandan 1980, Wolfe 1977)
삼각위원회의 탄생은 브레튼우즈(Bretton-Woods) 체제의 균열에 기인한 것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1971년 12월 체결된 ‘스미소니언 협정(Smithsonian Agreement)’에 따라 선진 각국은 1973년 3월 변동환율제로 이행했고 이는 훗날 외환시장이 투기장화 되는 글로벌 신자유주의 체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이병천(2001)은 “브레튼우즈 체제가 재구성이 아니라 붕괴의 방향으로 나아간 데는 적어도 초국적 자본과 초국적 세력의 압력, 글로벌 금융을 기반으로 패권을 만회하려는 미국의 국가적 이해관계, 자유 시장주의로의 이념적 지형의 변화라는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지키면서 해결사를 자임하고 나선 것이 바로 삼각위원회였다. 삼각위원회가 내린 위기 진단은 무엇이었던가? 이병천(2001)에 따르면 “첫째, 미국 헤게모니의 약화에서 비롯된 세계체제의 불안정을 미국의 후견 아래 독일과 일본이 비용을 분담하는 ‘집합적 관리’를 통해 해결할 것을 제안했다. 둘째, 초국적 자본이 위기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셋째, 전후 계급타협 체제는 민주주의의 과잉체제라고 규정하고 노동에 대한 공격과 국가-자본관계의 강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록펠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전반적인 인간의 행복은 자유 시장력이 국경을 초월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에서 가장 많이 보장되고 있다. …… 이제 다국적 기업들에 대한 장벽을 철폐하여 그들이 세계경제를 발전시키는네 못 다한 과업을 완수할 수 있게 해야 할 때이다.”(Frieden 1977) 경제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록펠러(Rockefeller 1980)는 후일 미국 외교정책의 최대 문제점으로 ‘일관성 결여’를 지적하면서 삼각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키신저의 변신
삼각주의는 근본적으로 세계경제가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낫다는 가정 위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제3세계정책도 그런 관점에서 보았다. 제3세계의 ‘신국제질서(A New International Economic Order)’ 요구에 대한 삼각위원회의 입장은 그 요구를 제1세계와 제3세계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회유한다는 것이었다.(Cooper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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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주의가 제시하는 세계경제 구도는 당연히 과거 닉슨-키신저가 주창했던 미국의 세계적 지도력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1975년경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가 그의 옛 제3세계정책을 버리고 삼각주의에 합류했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변신한 키신저의 지도하에 본격적인 남북대화(빈국과 부국의 대화)가 1975년 12월 파리에서 공식 출범했다.(Sklar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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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삼각주의가 미국 외교 노선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 ‘설명과 설득’에 좀 더 신경을 쓰자는 피상적인 변화였을 뿐이고, 그마저 ‘숨 고르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곧 드러난다. 카터 행정부를 거치면서 이 ‘숨 고르기’로 인한 변화는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이후 레이건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미국 외교는 이전보다 더욱 강하고 거친 모습을 드러낸다.
21세기 자본
– 토마 피케티 / 장경덕 역 / 글항아리 / 2014.09.12
…… 1980년대 전 세계 국가들에 영향을 미친 경제의 민영화는 상품과 서비스 시장의 자유화, 금융시장과 자본 흐름에 대한 규제완화를 포함하는데, 그 기원은 복잡하고 다양했다. 이미 대공황과 그에 따른 재앙들은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은 전후 시대 케인스식 정책의 한계를 드러냈다. 따라서 전후의 재건과 영광의 30년 동안 높은 성장률을 구가하던 시기가 끝나면서, 정부의 역활 그리고 국가 전체 생산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한정 확장되는 데 의문을 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규제완화 움직임은 1979~1980년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난 ‘보수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제2장에서 지적했듯이 신흥국의 선진국 따라잡기는 대체로 필연적인 과정인데도 불구하고, 당시 두 나라는 다른 나라들에게 추월당할까봐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한편 1970년대 소련과 중국의 국가주의 모델의 실패가 점점 더 분명해지자, 공산권의 두 거인은 1980년대에 기업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사유재산을 도입해 경제 시스템의 점진적인 자유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
이는 1963년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과 애나 슈워츠(Anna Schwartz)의 기념비적인 저서 『미국 통화사(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에서 특히 극명하게 드러난다. 화폐 경제학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인 프리드먼은 이 중요한 연구에서 방대한 기록들에 근거해 1857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 통화정책의 변화를 상세히 관찰한다. 물론 이 책의 주안점은 세계 대공황이다. 프리드먼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식시장 폭락으로 신용위기를 야기하고 경제를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에 빠뜨려 결국 역사상 유례없는 정도의 침체로 몰고 간 것은 연방준비제도의 과도한 긴축정책이었다. 대공황은 주로 화폐적인 문제였고 따라서 해결책 또한 화폐였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프리드먼은 다음과 같은 명확한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냈다. 자본주의 경제의 일정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으로 화폐의 공급을 늘릴 수 있는 통화정책이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통화주의자들은 공무원 수를 늘리고 사회적 이전지출 프로그램을 마련했던 뉴딜정책은 비용이 많이 들고 쓸모없는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를 구해내기 위해서는 복지국가나 정부의 문어발식 정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연방준비제도만 잘 운영하면 된다는 것이다. 1960~1970년, 많은 미국 민주당원이 여전히 뉴딜정책을 완성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미국 국민은 당시 여전히 빠른 성장 국면을 유지하고 있던 유럽에 비해 쇠퇴해가는 자국의 상황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프리드먼의 단순하지만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는 폭탄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프리드먼과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은 끊임없이 확장하던 국가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켰고 1979~1980년 보수혁명을 가능케 한 학문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세계화의 덫
– 한스 피터 마르틴 / 강수돌 역 / 영림카디널 / 1997.11.10
세계 경제가 범지구적으로 통합되는 ‘세계화’ 과정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이론 하나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라는 것이다. 그 기본적 주장은 모든 군소리를 다 뺀다면 다음과 같다. “시장은 좋은 것이고, 국가의 개입은 나쁘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노벨상 수장자인 밀턴 프리드먼이 이 이론을 내세운 뒤로, 1980년대부터 서구의 자유주의 정부들은 경제정책 등 여러 정책에서 이런 생각을 가장 기본적인 정책 기조로 삼고 있다. 국가에 의한 감독보다는 탈규제화, 무역과 자본이동의 자유화, 공공기업의 민영화 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정책 기조의 핵심이다.
……
모든 정치적 논리가 경제 논리에 지배되는 경우, 이미 오래 전에, 우리는 범지구적인 혼란이 불가피하게 들이닥친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것은 1929년에 터진 세계적 대공황인데, 그 1년 뒤인 1930년에 영국의 친親자본적인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하였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와 경제가 균형있게 발전하지 못하고, 경제적인 진행 과정이 정치적인 과정보다 훨씬 앞서간다는 사실이다. 경제적으로 세계는 이제 거의 통일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세계 각국은 갈가리 나뉘어져 있다. 이 두 영역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긴장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국제 사회는 동요하고 사람들의 조화로운 사회생활은 무너지고 있다.”
……
…… 왜냐하면 이번 멕시코 구제금융은 두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경제사적으로도 가장 대담한 위기돌파책이라는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부유한 소수를 위해 다수의 혈세납부자들이 치러야 했던 가장 뻔뻔스런 날강도 사건이라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점은 캉드쉬도 시인했다. 수백억 달러의 멕시코 구제금융은 대투기꾼들에게는 마치 기나긴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솔직히 고백하고 말았다. ” 이 세계는 유감스럽게도 이 소수의 몇몇 부자들의 손아귀에 놓여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바로 이렇게 해서 멕시코 위기 속에서 우리는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세계질서가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비교적 명백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여태껏 어느 누구도 현재 진행되는 범지구적 경제통합이 세계의 권력구조를 어느 정도로 변화시키고 있는지에 대해 명쾌히 이야기한 적이 없다. 요컨대 미국과 같은 슈퍼 권력체 정부는 물론이요 유럽의 중앙은행들, 그리고 전지전능한 것으로 통하던 IMF는 모두가 한 단계 위의 독재적 폭력 앞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폭력의 힘은 어느 누구도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국제금융시장이라는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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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차대전 후 약 30년 간에 걸쳐 엄청난 속도로 팽창해 온 기업들과 거대은행들은 각국 정부와 국제협약(브레턴우즈 협정)의 관료주의적 통제체제가 아주 부담스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음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 서독, 캐나다, 스위스 등에서는 이미 1970년부터 국제적 자본의 흐름을 더 이상 통제하지 않기로 했다. 굳건했던 댐이 이렇게 터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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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의 각 민족, 각 나라를 탄탄히 엮어매고 있는 것은 전자통신망으로 얽히고 설켜 지구촌을 농락하고 있는 다국적 은행, 보험회사, 그리고 투자기금회사들과 같은 ‘돈기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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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동안 선진산업국의 시민들은, 점증하는 경제적 결합 – 세계화 – 이 그들의 복지도 증대시킨다는 것을 현실적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에 서유럽 및 미국의 경제정책에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세계경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몰고 갔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선진산업국들은,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양차대전 사이의 경제파국 – 세계공황 – 에 대한 돌파구로써 개발한 새로운 경제 원리들을 따르고 있었다. 케인스는 국가를 국민경제의 핵심 투자자의 지위로 고양시켰으며, 시장이 과소고용과 디플레이션을 야기시킬 경우에 국가가 공공재정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개입, 이를 수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경기침체시에는 정부가 투자를 증대시킴으로써 추가수요를 창출하고, 이를 통하여 경제위기를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호경기시에 정부는 늘어난 조세수입을 가지고 그 전에 생겨난 공공재정 부채를 청산함으로써 경기폭발과 인플레이션을 예방해야 했다. 여기에 덧붙여 많은 국가들은 의도적으로 신속한 경제성장과 노동수요 – 일자리 – 창출을 기대할 수 있는 산업들을 육성하였다. 그러나 1973년과 1979년의 유류파동과 더불어 이러한 구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선진산업국 정부들은 국가부채와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통화의 안정적인 환율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79년 영국의 대처 및 1980년 미국의 레이건이 각기 선거에서 승리한 뒤, 보수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경제정책 교리를 자신들의 정치노선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그것은 레이건 대통령의 자문이었던 밀턴 프리드먼이나 대처 수상의 고문이었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예크(Friedrich August von Hayek)와 같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이른바 신자유주의인데, 화폐정책에 있어서는 또한 통화주의라고도 불리고 있다. 프리드먼과 하이예크는 단지 국가의 질서유지 역활만 인정했다. 그들은, 민간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에 있어서 자유로울수록 경제성장도 커지고, 이에 따라 만인의 복지도 늘어난다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전제에 따라 주로 자유경제주의 색채를 띠었던 정부들은 80년대에, 말하자면 “자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넓은 전선에 걸쳐서 국가통제와 국가개입 권한을 철폐했으며, 이를 원하지 않고 있던 교역상대국들에 대해서는 무역봉쇄 및 다른 압력수단을 동원하여 이 노선을 따르도록 강제했다.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 지주형 / 책세상 / 2011.11.25
브레턴우즈 체제와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는 1970년대 들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1971년 미국의 금태환 중지 선언을 계기로 브레턴우즈 체제의 근간인 금태환 본위제와 자본이동 통제가 종말을 고하고, 변동환율제와 자본이동의 자유화가 새로운 지구 정치경제 질서를 규정하게 되었다. 금태환 없이도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공인받고 세계 자본주의가 급속히 투기화되는 동시에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금융자본의 힘이 강해졌다. 또한 케인스주의에 대적하여 국가개입의 철회 및 자본이동과 금융의 자유화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정치경제 패러다임으로 대두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금융적 축적이 증가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지구적 질서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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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단순히 학술적 논박으로 끝나는 경제학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학이기 이전에 사회사상이자 정치적 실천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하이에크는 단순히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문제 때문에 사회주의 또는 중앙계획경제를 비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회주의를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노예의 길’로 이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Hayek 2000). 비슷한 맥락에서 하이에크의 영향을 받은 프리드먼도 ‘선택할 자유’, 즉 소비자 선택권을 근거로 국가의 경제 개입을 반대하고 시장을 옹호했다.
몽펠르랭협회(Mont Pelerin Society)는 이러한 사회사상을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창설된 단체이다. 1947년 스위스 자본의 후원으로 하이에크와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이 집단은 이후 프리드먼, 스티글러(George Stigler), 뷰캐넌(James Buchanan), 베커(Gary Becker) 같은 저명한 경제학자들을 주요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이 협회의 회원들은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의 칠레와 대처(Margaret Thatcher)가 집권한 영국에서 신자유주의 개혁22의 주요한 지적 원천이 되었다(van der Pijl 1997, 129쪽). 또한 시카고대학을 중심으로 한 통화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미국에 유학 온 제3세계 및 개발도상국의 지식인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Dezaley and Garth 200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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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국에서 대처의 집권은 그가 지적인 스승으로 여긴 하이에크의 케인스에 대한 승리를 의미했다(Yergin 1999). IMF 구제금융을 가져온 외환위기 이후 노동당의 임금인상 억제 정책에 반발해 1978∼1979년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24이라 불린 대규모 노동파업이 발생하고, 노조에 대한 사회적 혐오와 보수화 분위기를 틈타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이 집권했다. 대처내각은작은국가를표방하며통화주의적재정긴축, 감세, 규제완화, 공기업 사영화 등의 경제정책을 실행하고, 1984년 탄광노조를 분쇄하는 등 노동 억압 정책을 시행하여 고용과 임금을 유연화했다(장석준 2011, 4장 ; Hall 2007 참조).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는 공화당의 레이건Ronald Reagan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시카고학파의 주장을 대폭 수용한 이른바‘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실천했다. 이 또한 긴축, 감세, 규제 완화, 노조에 대한 공격을 주된 내용으로 했다(강상구2000, 103∼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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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턴우즈 체제의 종말로 금태환 본위 고정환율제는 변동환율제로 대체되고 케인스주의적 자본이동 통제는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이동 자유화로 바뀌었으며 IMF와 IBRD 같은 브레턴우즈 기관의 기능도 국제수지 적자 보전과 전후 재건에서 구조개혁으로 변화했다. 이에 따라 국가 간에 경쟁적 환율조정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자본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케인스적 재정 · 통화정책과 각종 사회적 규제를 무력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자본은 투자한 나라의 세율, 이자율, 인건비, 노동규제 등이 마음에 안 들면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로 지구적 자본주의의 질서, 특히 축적의 방식이 완전히 변모했다는 점이다. 자본이동에 대한 통제가 줄어들자, 신자유주의적 축적은 ‘카지노 자본주의’ 및 ‘경제전쟁’의 양상을 띤 금융과 생산의 지구화라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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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금융화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의 지구적 정치경제 구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에 대한 국가의 규제가 완화되면서 산업활동을 포함한 여러 다양한 것들이 금융상품이 된다. 그 결과 증권 · 금융투자를 통해 미래 이익을 현재로 당겨오는 금융적 축적이 지배적이 된다.
둘째, 이러한 금융화는 미국이 주도하는 달러-월스트리트 체제와 신자유주의 지배블록으로 뒷받침된다.
셋째, 국제회계제도, 학교와 미디어, 연방준비제도와 런던 금융시장, 신용평가회사 등은 새로운 축적 방식, 즉 자산가치 상승의 방식을 규정한다. 이러한 틀 안에서 지구적 자산시장은 미래수익, 기대가치, 금리, 리스크 등을 조정하여 자산가치를 높이고 자본을 축적한다.
넷째, 주주와 채권자로서 기관투자자들은 초국적 자본산업 및 투자활동을 통제한다. 금융화를 궁극적으로 지탱하는 것이 산업부문의 안정된 현재 소득흐름인 까닭이다.
다섯째, 초국적 자본은 달러-월스트리트 체제의 지원을 받고 신흥시장 및 새로운 금융상품에 대한 투자를 통해 수익을 확대한다.
여섯째, 주변부 산업생산에 대한 초국적 자본의 투자와 통제로 지구적 불균등 발전과 금융위기가 심화된다.
일곱째, IMF 등의 초국적 통치기구와 국가의 도움으로 지배적인 초국적 자본은 이러한 위기를 축적 기회로 사용할 수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지구 정치경제란 공정한 시장경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근본적으로 정치적이고 권력적인 과정이다.
물론 이러한 체제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달러-월스트리트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축적의 구조도 처음부터 일관된 마스터플랜을 따라 형성되기보다는 1970년대 이후 역사적 국면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대응을 통해 형성되었다. 동일한 역사적 조건에서 서유럽은 유럽연합(EU)의 출범과 단일통화 유로Euro 도입으로 응전했고, 일본은 동아시아로의 수출 생산체제 확산으로 대응했다.
히든 파워
– 찰스 더버 / 김형주 역 / 두리미디어 / 2007.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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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미합중국의 체제 –
◎ 제1차 법인체 체제(1865~1901) – 금장시대
존 D. 록펠러와 J.P. 모건이 집을 짓다.
◎ 진보적 체제(1901~1921) – 진보적 시대
테디 루스벨트가 제1차 법인체 체제라는 집에서 융성했던 트러스트(독점체)들을 붕괴시키다.
◎ 제2차 법인체 체제(1921~1933) – 광란의 20년대
하딩과 후버가 이 집을 거대한 기업체로 되돌려놓다.
◎ 뉴딜 체제(1933~1980) – 뉴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국민의 집을 설계하다.
◎ 제3차 법인체 체제(1980~?) – 레이건 혁명
전 지구적 법인체가 자신들을 위한 현재의 집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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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의 변화시점을 1989년과 냉전의 최종적인 붕괴로 거슬러 올라가 잡는 것이 보통이지만, 아마도 현재의 전쟁상태의 개시를 나타내는 더 시사적인 날은 1972년 5월 26일, 즉 미국과 소련이(이 두 초강대국의 핵무기 생산을 규제하는)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에 조인한 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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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 때부터 핵미사일들은 진흙투성이 창고에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근대적 의미의 전쟁, 다시 말해 고강도의 무제한적 분쟁과 파괴를 수반하는 보편화된 전쟁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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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에 일어난 전쟁의 형식과 목적의 변화는 전지구적 경제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형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1971년 미국 달러가 금본위제와 고리를 끊은 때와 1973년 제1차 석유위기가 일어난 때의 중간쯤에 ABM협정이 조인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때는 화폐 및 경제위기의 시기였을뿐만 아니라, 복지국가가 파괴되기 시작하고 경제생산의 헤게모니가 공장에서 더욱 사회적이고 비물질적인 부문들로 이동해 간 시기였다. 이 다양한 변형들은 한 가지 공통적 현상의,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변형의 상이한 측면들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련 그림>
– 미국의 소득 불평등은 1980년대부터 확대되고 있다.
– 공적, 사적의 권력 순환을 얘기하는 투자전문가도 있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Neoliberalism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신자유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