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종교의 몰락과 초기 그리스도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집트 종교는 기원후 130~230년에 급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이교 신앙의 심장부가 어찌하여 로마의 다른 어떤 속주보다도 더욱 일찍 그리고 더욱 열렬하게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을까? 그리스도교인 입장에서는 당연한 사건이겠지만, 일반 역사가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현상을 설명하기가 수월하지 않다.

 

보다 넓은 차원에서 보면, 헬레니즘 제국과 로마 제국 안에서 전통적인 지역 구조가 와해되어 가치 혼란이 야기됨에 따라, 일신교를 지향하는 자연스런 경향이 나타났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는 우선 기원전 300년 이후에 주로 전도를 통해 지중해 전역으로 유대교가 엄청나게 확산되었다는 점에 의해 입증될 수 있다. 게다가 기원후 1세기 중반에 이르면, 유대인은 로마 제국 인구의 5~10퍼센트를 형성한다. 어쨌든 115~117년 키토스 전쟁(Kitos War, 디아스포라 폭동)이라 불리는 2차 유대-로마 전쟁이 있었다.

키토스 전쟁은 키프로스와 키레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렉산드리아의 민족 말살적 억압으로 이어졌고, 그리하여 그리스화된 유대 민족의 문화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따라서 유대인의 제거는, 기원후 2세기의 나머지 기간 동안과 그 이후까지 그리스도교에 견줄 만한 강력한 전도 경쟁자가 없음을 의미했다.

 

파라오 체제의 국가와 이집트의 민족성이 붕괴됨에 따라 이집트 종교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는 가정이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강점뿐만 아니라 문제점도 안고 있다. 이집트는 기원전 700년부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외국인이 통치했다. 특히 헬레니즘 제국 이후 이집트 종교는 계속해서 번창하며 널리 확산되었고, 외관상으로는 기원후 2세기 전반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만약 외국의 박해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면, 이집트 종교는 로마 제국의 총애를 받은 기원후 2세기가 아니라 페르시아 치하였던 기원전 6세기나 4세기에 붕괴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이집트 사제들은, 비록 객관적으로는 새로운 외국 통치자와 협력했지만, 이전 통치자를 상대할 때에도 그러했듯이 개인적으로는 그들과 거리를 두려 했으며 어느 정도까지는 이집트 ‘민족주의’를 지속적으로 대변했다. 그러나 그리스인 치하의 400년이 지나고 기원후 2세기에 이르렀을 때, 로마 통치자들과 마케도니아 및 이집트의 상류 계급(사제 계층을 포함하여)은 이집트 종교를 보편적인 헬레네스 문명에 융합시켰다. 이집트의 수호자라는 사제들의 위치를 약화시킨 것은 바로 이집트 종교를 향한 그리고 ‘국제화’를 향한 로마 황제들의 열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교는 이집트-이교적 종교를 지닌 세계주의적이고 그리스화된 상류 계급에 맞서 빈민층과 중간 계급을 대변하였다.

 

그리스 로마 문명은 분명 추축시대적 의미에서 심오한 철학 · 과학 · 문학 · 예술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후 기독교 성분이 되는 많은 문화 요소들이 지중해 인류 집단들에게 오랫동안 유행하였고, 또한 이 집단들 속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완전한 윤리 종교가 출현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윤리 종교의 근본적 성격은 공리주의이지만, 그리스 문명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의 정치적 통일기에도 이러한 종류의 개인주의적 정신 자질은 근본적으로 약화되지 않았다. 발전 추세로 보면 후기 스토아철학과 신플라톤주의가 모두 일종의 윤리 종교적이고 공리주의적 문화적 품격을 앞세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상류 계층에 유행하는 수준 높은 사상을 수많은 군중에게 보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 문명이 지속하지 못한 혹은 그 쇠망의 운명을 되돌릴 수 없었던 한 중요한 원인으로, 시기적절하게 윤리 종교의 문화적 품격이 그리스 문명에 확산되고 형성되지 못했다는 이러한 사실을 거론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스 문명이 더욱 공리주의적인 윤리 종교 형태인 시리아 문명으로 대체된 것은 역사적 필연이고, 또한 고대 개인주의의 실패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고대의 개인주의적 문명이 신형의 공리주의적 문명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 민족적 요인이 이집트 종교를 파괴하는 데 주된 역활을 담당했음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요인은 갑작스레 등장한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천천히 불거져온 장기간의 긴장이나 갈등으로 보인다. 그리고 새로운 두 양상이 기원후 2세기에 나타나고 있었다. 첫째, 그리스도교의 유용성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일신교인 동시에 어떤 면에서 볼 때 유대교로서는 결코 획득할 수 없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조직을 키워나가는 열정과 능력도 비상했다. 둘째 옛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이제 곧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일반적인 믿음이었다.

 

기원전 50년과 기원후 150년 사이의 메시아 신앙과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고 있다는 생각은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며, 또 다른 요소는 양자리 시대에서 물고기자리 시대로 넘어가는 점성학적 변화였다. 기원전 50년에 그것이 이미 폭넓게 알려져 있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 별자리와 문명 : http://yellow.kr/blog/?p=522

 

이러한 정치 · 경제 · 사회 · 점성학적 변화의 연쇄 안에서 비로소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Virgil)의 네 번째 <목가(Eclogue)>를 이해할 수 있다. 기원전 40년에 씌어진 이 작품은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Now is come the last age of the Cumaean prophecy:

The great cycle of periods is born anew.

Now returns the Maid, returns the reign of Saturn:

Now from high heaven a new generation comes down.

Yet do thou at that boy’s birth,

In whom the iron race shall begin to cease,

And the golden to arise over all the world,

 

Holy Lucina, be gracious; now thine own Apollo reigns.”

 

Eclogue 4 (ll. 4–11), as translated by John William Mackail; this section illustrates the poem’s references to the Cumaean Sibyl, the birth of a savior child, and the dawning of the Golden Age.

 

이제 … 위대한 세기들의 행렬이 새롭게 시작되나니 … 사랑스런 루키나Lucina여, 오로지 당신만이 한 아이의 탄생에 미소짓고 있도다. 그 아이의 통치하에 철 종족의 시대가 끝나고 황금 종족이 세계 도처에서 솟아오르리니! 아폴론이여, 이제 바로 당신이 왕이로다!

여기에는 폴리오의 아이가 태어난 일과 베르길리우스와 폴리오의 후원자인 아우구스투스 치세에서 평화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서로 다른 의미가 중첩되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또한 새로운 젊은 신의 도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분명히 천체 혹은 별의 시대 변화, 즉 새로이 등장하는 물고기자리 시대를 가리킨다.

※ https://en.wikipedia.org/wiki/Eclogue_4

 

흥미롭게도, 그리스도를 물고기로 표현한 최초의 사례는 2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에서 나타난다. 대체로 볼 때, 예수를 둘러싼 숫양(어린 양)이라는 양자리 관련 상징 체계가 마찬가지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 물고기, 혹은 특히 12궁에서 나타나는 두 마리 물고기라는 상징을 사용한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도가 자타 모두에 의해 새로운 물고기자리 시대의 새로운 종교를 추종하는 자들로 여겨졌음을 나타냄에 틀림없다.

※ 그리스도교와 물고기자리 : http://yellow.kr/blog/?p=2253

 

이집트 종교가 비록 몰락했지만, 초기 그리스도교 아래에서 변형된 형태로 잔존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일반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고대 그리스 저자들이 이집트인의 속성으로 생각한 일반인의 열정적인 신앙심과 사제들의 섬세한 철학 및 신학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더욱이 교회 조직과 교의의 차원에서 볼 때에도, 이집트의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이집트 종교가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죽임을 당하고 애도되고 승리자로서 부활한 생장의 신들인 예수와 오시리스(Osiris),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탐무즈(Tammuz) 사이의 놀랄 만한 유사성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종교적 자취가 그리스도교에 명확히 잔존한다.

 

이집트 종교가 몰락한 이후 이집트 종교의 파편에서 나타난 세 사상 유파는 헤르메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영지주의였다. 헤르메스주의자는 대담하게도 여전히 이집트적이었고, 신플라톤주의자는 보다 그리스화되어 ‘신성한 플라톤’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영지주의자는 스스로를 그리스도교도로 여겼다.

 

순수한 종족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순수한 문명도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종교도 마찬가지다. 지정학적 시각에서 볼 때 4대 종교(기독교, 동방정교, 이슬람교, 유대교)와 이에 대응되는 문명은 모두 동일한 하나의 지정학 세계, 즉 서아시아 일대인 지중해 세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기원전 약 3000년쯤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 유역과 이와 인접한 나일 강 유역에서 문명이 탄생했다. 그 이후 언제부터인가(?) 가장 오래된 두 문명들은 밀접한 상호 작용을 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6세기 초기 페르시아인은 지리적으로 세 개의 대륙을 통합하는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여 이 두 지역을 더욱 긴밀하게 하나로 연결시켰다. 이때부터 두 지역은 심도있고 풍부한 문화적 융합 과정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말 변방지역에 위치하던 반 그리스화된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 세계를 정복했고, 이후 다시 이집트와 모든 서아시아를 정복하여 방대한 그리스 제국을 건설했다. 이는 곧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 유역과 나일 강 유역의 문화 일체화 과정을 빠르게 진행시켰고, 기원후 약 200~300년경에는 하나의 새로운 문명으로 혼합되었다. 이 문명이 많은 그리스 문명의 요소들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그 핵심적인 성분은 시리아적 형태의 그리스도교이다. 이 문명이 곧 훗날의 서양 문명이다.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블랙 아테나

–  마틴 버낼 / 오흥식 역 / 소나무 / 2006.01.10

 

급진적인 프리메이슨주의가 절정에 달하고 그것이 그리스도교적 질서를 가장 날카롭게 위협한 시기는 프랑스 혁명기였다. 정치·군사적 위협과 더불어, 반성직자적이고 친혁명적인 샤를 프랑수아 뒤퓌의 지적 도전이 뒤따랐다. 헤로도토스를 따라 이집트 신화와 그리스 신화가 같다고 본 이 위대한 프랑스 학자는, 이집트 신화는 본질적으로 별자리의 움직임을 재구성한 것이며, 그리스도교는 이 웅대한 전승의 잘못 이해한 파편을 모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

기원후 2세기에 나타난 양자리에서 물고기자리로의 변화와 시리우스 역법 주기와 365일 역법 주기의 완결 시점이 놀랍게 일치한다는 사실은, 이집트 종교에 가해진 장기간의 사회적 · 경제적 · 민족적 압박과 더불어 이집트 천문학의 심장부에 강력한 자기 파괴적 힘을 창출해냈다. 더욱이 이집트 종교는 심원한 주기적 의미를 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개념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는 비록 신들이 오래 살기는 하지만 불사의 존재는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

이러한 주기성의 개념, 즉 탄생과 죽음에 뒤이은 부활이라는 개념은, 르네상스와 계몽 시대에 자칭 이집트 종교의 복원자들이 나타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집트 종교가 초기 그리스도교 아래에서 변형된 형태로 잔존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일반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 저자들이 이집트인의 속성으로 생각한 일반인의 열정적인 신앙심과 사제들의 섬세한 철학 및 신학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더욱이 교회 조직과 교의의 차원에서 볼 때에도, 이집트의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이집트 종교가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지연문명

–  르우안웨이 / 최형록,김혜준 역 / 심산 / 2011.05.10

 

공간적 각도에서 볼 때 이 4대 종교(기독교, 동방정교, 이슬람교, 유대교)와 이에 대응되는 문명은 모두 동일한 하나의 지연(地緣) 세계, 즉 서아시아 일대인 지중해 세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기원전 약 3000년쯤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 유역과 이와 인접한 나일 강 유역에서 문명이 탄생했다. 기원전 15세기 초기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 3세는 서아시아에서 자주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때부터 가장 오래된 두 문명들은 밀접한 상호 작용을 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6세기 초기 페르시아인은 지리적으로 세 개의 대륙을 통합하는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여 이 두 지역을 더욱 긴밀하게 하나로 연결시켰다. 이때부터 두 지역은 심도있고 풍부한 문화적 융합 과정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말 변방지역에 위치하던 반 그리스화된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 세계를 정복했고, 이후 다시 이집트와 모든 서아시아를 정복하여 방대한 그리스 제국을 건설했다. 이는 곧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 유역과 나일 강 유역의 문화 일체화 과정을 빠르게 진행시켰고, 마지막에는 시리아와 그리스 문명의 통합 위에 세운 3개의 새로운 문명인 기독교와 이슬람교 및 동방정교 문명이 형성될 수 있었다.

……

사실 인류 역사 진행 과정에 깊은 영향을 미친 위대한 생명 형태인 시리아 문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종교성에 있다. 그리고 이 종교성에 내재된 가장 중요한 의미는 유일신 신앙이다. 기원전 6세기 이후 고대 시리아 세계에서 엄격하고 윤리적인 유일신 신앙은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먼저 형성되었다. 일신론은 이후 유대인과 무슬림의 신앙이 되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한때 아주 왕성했던 기독교 네스토리우스파와 현재도 여전히 활약하고 있는 기독교 단성론파의 신앙이 되었다. 기독교 단성론은 현재 아르메니아 · 이집트 · 에티오피아 · 레바논 · 시리아 등의 국가에 분포하며, 아르메니아의 국교이기도 하다. 또 단성론은 길게는 1천여 년의 시간 동안 서양 문명과 동방정교 문명의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를 담당했다.

……

여기서 기독교의 신에 대한 관념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기원 원년 초, 나사렛 예수를 구세주로 하는 소수파가 그리스 세계에 전파될 때, 이 교파는 일종의 다신교 문화의 자생지와 만나게 된다. 여기서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 이 소수파는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발휘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이후 기독교라 불리는 종교 속에서 우리는 다신교의 흔적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예수의 아버지가 신일 뿐 아니라, 신의 아들인 예수 또한 신이고(비록 동시에 또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심지어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 또한 성모로 추앙되며 광범위한 숭배를 받고 있다. 더욱이 많은 순교자와 교부들도 성도로 추앙되며 숭배를 받기도 한다.

특히 중요한 점은 삼위일체의 신 관념은 일신론이 다소 약화된 상황에서 신의 절대성을 지키기 위해 제기된 것이고, 신의 메시지를 육화하여 만들어낸 예수가 인간 세계로 와서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한다는 기본 교의를 수립하기 위해 제기되었던 사실이다. 이로 인해 원형 형태의 일신론은 그 의미가 한층 더 줄어든다. 이러한 새로운 교의 속에서 신은 여전히 유일신이긴 하지만 성부 · 성자 · 성령이란 세 지위와 품격으로 분화되었다(비록 이 세 가지가 모두 특정한 지위와 위엄을 가지되, 하나의 동일한 본체를 가진 유일무이한 신이지만). 논리적 사유가 발달한 그리스 문명에서 이러한 다신론적 색채를 지닌 유일신 관념이 얼마나 이질적이었는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

시리아 문명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일찍이 유일신 신앙이 형성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선민의식이다. 이는 《구약성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 비록 현대 기독교 신자 중에 많은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나 현재에도 기독교 신자에게서 이 선민의식이 사라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신약》에서 가난한 자, 어리석은 자, 약한 자, 남에게 버림받은 자가 신의 구원을 받는다는 표현들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최소한 이론적인 면에서 기독교는 가난한 자의 종교, 약자의 종교가 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격정으로 가득한 “오직 너희(기독교도)만이 선택받은 자들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신성한 민족이요, 그의 백성이니”라는 구절들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가 비록 유대교보다는 한층 더 진보했고, 이론적으로는 더 이상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긋고 있지는 않자만, 교리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여전히 경계를 긋고 있는 사실을 의미한다. 오직 기독교도만이 신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이다.

 

특수한 지연-자연환경에서 유래한 선민의식은 유일신 관념에 기반을 둔 시리아형 문명의 절대주의와 결합되면서, 다른 견해를 용납하지 않는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문화적 심리 상태를 형성했다. 또 중도에서 벗어난 흑백논리의 심리 상태와 행위 양식도 형성했다. 이러한 심리 상태와 행위 양식 아래에서는 서로 다른 신앙 및 다른 의견과의 대화는 대단히 어려워진다. 또 이러한 심리 상태와 행위 양식 아래에서는 타협은 늘 나약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심지어 원칙과 신앙에 대한 배반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

각 주요 문명들은 기원 원년을 전후해 독자적으로 변화 발전하면서 각자 지역 밖으로 공간 확장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공간 확장은 아마도 문화적 전파의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 문화가 한국 · 일본 · 베트남에 전파되고, 그리스 문화가 이탈리아 반도 · 서유럽 · 서아시아 · 북아프리카로 전파된 것 또한 종교적 확장의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 이러한 의미에서 오랫동안 독자적으로 변화 발전해오던 각각의 대문명들이 기원원년을 전후해 시작한 확장은 일종의 전형적인 공간운동일 뿐 아니라, 나아가 일종의 지역적이고 규모가 비교적 작은 전 지구화 혹은 일종의 준 전 지구화로 볼 수 있는 이유가 된다.

……

서양 문명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시리아 문명과 그리스 로마 문명이란 두 추축시대 문명의 통합에 있다. 야만족인 게르만의 고유 자질 또한 이 통합 속에 참여했다. 그렇다면 그리스와 시리아 문명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들은 또한 각자 여러 추축시대 문명, 예를 들면 이집트 · 수메르 · 바빌로니아 · 크레타 · 미케네 · 히타이트 문명이 혼합된 산물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서양 문명 혹은 어떠한 문명도 모두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앞서 제기한 것처럼 순수한 혈통을 가진 문명 혹은 민족은 있을 수 없다.

……

문명 간의 충돌과 융합은 종종 종교 간의 충돌과 융합으로도 나타난다. 서로 다른 지역의 신앙은 충돌과 융합의 상호 작용을 거치며 형성 규모도 더욱 커지고,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도 더욱 넓어지고, 신도도 더욱 많아지고, 보편성 또한 더욱 강해진 종교로 성장했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기독교이다. 수많은 연구 성과가 보여주듯이 기독교는 결코 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 기본적인 가치관이 이미 확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지역적 성격을 가진 가치관과 풍속 및 제도를 대량으로 통합한 이후에, 기독교는 비로소 최종적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유대교 혹은 히브리 종교로 불리는 시리아 형태의 유일신 종교가 기독교의 형식으로 지중해의 그리스 세계로 전파될 때, 그리스철학의 이성(Idea) 형성(Form) 개념과 로고스(Logos) 개념 및 로마 제국의 행정제도 요소들을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 종교는 당시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다신 숭배와 여러 가지 종류의 비밀 교리 및 신비주의 교리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삼위일체설, 성모 숭배, 성도 숭배 등의 방법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본래 지나치게 엄격한 유일신 관념이 경직되지 않을 수 있었다. 기독교의 부활설과 부활절 등의 중요한 요소들의 근원은 농경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지중해 서아시아의 부활신 숭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문제를 분명 짚어보아야만 한다. 시리아 형태의 종교가 지중해 지역에 전래되기 이전에 마치 흠 하나 없이 깨끗한 순수한 옥과 같은 형태였을까 하는 점이다. 분명 그렇지는 않았다. 사실 유대인 사회집단에서 대단한 발전을 이룬 유대교도 여러 지역의 종교 관념 및 행위들과 오랜 기간 교류, 통합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최종적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 바빌론 유수 이전의 유대교에서는 아브라함 종교 혹은 성서 종교(즉 유대교와 기독교 및 이슬람교)에서 보이는 최후의 심판, 천당, 지옥, 마귀, 천사 등과 같은 관념들은 보이질 않았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인이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정복하여 그곳에 포로로 구금되어 있던 유대인을 석방시킨 후에야, 이러한 관념들이 점차 유대교 유대교 교리의 중요한 구성 요소들이 될 수 있었다. 이것들은 이후에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기본 교리가 되었다. 그리고 일찍이 기원전 6세기 이전 그것들은 이란 지역 조로아스터교의 주요 요소들이기도 했다.

 


신화의 이미지

– 조지프 캠벨 / 홍윤희 역 / 살림 / 2006.02.15

 

옛 이교의 신화들 중 가장 사랑받는 테마들이 기독교 구세주에 관한 전설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은 초기 기독교에서 의도적으로 강조되었던 잘 알려진 특징이다. 예를 들어 구세주 탄생 장면에 등장하는 나귀와 황소의 의미는 4세기에는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었다. 그 시기에 나귀와 황소는 각각 세트와 오시리스라는 원수 형제를 상징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 The ox and donkey focusing on the manger, as a confession of faith on Stilicho’s sarcophagus (ca. 385) in Milan’s San Ambrogio Basilica

 

새로운 배치 속에서 나귀와 황소는 우선 예수 안에서 원수들의 화해라는 함의를 지닌다. “너에게 말하노니,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44) 둘째, 이교도 신들의 신화에서 나타났던 약속들은 새로운 구세주의 탄생과 죽음, 부활 속에서 역사적인 실제 사건으로 실현된다. 2세기에 쓰여진 <베드로의 두 번째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알려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강림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꾸며낸 신화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베드로의 두 번째 편지 1:16)

 

– A 4th-century sarcophagus, above with the ox and donkey, and below with the three magi. Arles, Musée de l’Arles et de la Provence Antique

 

마찬가지로 위 그림에서 동방박사들은 프리기아의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구세주 미트라(Mitra)를 연상시킨다. 이들은 기독교 교회에 가장 위협적인 적대적 전통의 추종자들까지도 새로 태어난 왕을 알아보고 경배했다는 점을 보여줘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태고의 모든 밀교에서 나온 약속과 열망은 역사적으로 화신한 단 한 명의 유일자와, 단 하나뿐인 진실한 신의 복음에서 성취되었다.

 

신화적 모티프뿐만 아니라 그 당시 이교도의 축제일도 기독교 교부들에 의해 널리 수용되었다. 예컨대 4세기의 성자이며 성직자였던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약 315~402년경)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에서 매년 지켜지던 1월 6일 축제의 날짜는 예수 공현일, 즉 그리스도의 탄생일과 그리스도 세례일의 연원이다. 이교도의 이 축제는 한 해의 신인 아이온(Aion)의 탄생을 축하하는 가운데 이시스의 그리스식 변형인 처녀신 코레(Kore)에 바쳐진다. 코레의 신도들은 1월 6일 전날 밤 코레의 사원인 코레이온 안에서 회합을 갖고 밤새 피리 소리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고, 새벽이 되면 횃불을 들고 즐겁게 지하묘지로 내려가 코레가 앉혀져 있는 관대를 들어올린다. 벌거벗은 코레의 성상은 두 손과, 무릎과, 이마에 십자가와 황금빛 별의 표식이 박혀 있었다. 이들은 찬송가와 피리 소리에 맞춰 성당의 지하 묘지로 돌아올 때까지 사원 주위를 일곱 번 돌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어느 기독교 성자의 말을 빌면, “코레의 신도들은 성처녀가 그날 그 시간에 아이온을 출산했다고 선포한다.”

한편, 이와 유사한 행렬이 예루살렘의 기독교 지역으로부터 그리스도가 탄생한 베들레헴으로 동굴 속 경배의 밤을 기념하기 위해 행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행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새벽길에 동정녀의 출산을 축하하며 찬송가를 불렀을 것이다.

 

아기 구주의 어머니인 성모상은 가장 오래된 도상학적 형태인데, 이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이란의 동쪽보다 서쪽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메소포타미아 성모상은 후기 수메르 시기인 기원전 2000년경의 작품이고(사진 없음), 아래는 성스러운 모성과 함께 고뇌에 찬 이시스의 외로움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이집트의 성모상으로서 위와 비슷한 시기의 작품이다.

 

이렇게 근동 이교도의 위대한 어머니 여신 이미지들은 초기 기독교의 성모 유형을 형상화하는 데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하지만 최근에 소르본 대학의 앙드레 그라바르(Andre Grabar) 교수가 밝힌 것처럼, 기독교의 형상화를 책임지고 있던 예술가와 장인들에게는 2세기와 3세기에 성행한 로마의 장례 예술이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태복음>에 자세히 나와 있는, 헤롯 왕의 유아 학살을 피해 예수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하는 전설은 이집트 신화에서 이시스가 자신들을 죽이려는 세트를 피해 그녀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도망하는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이 두가지 전설은 세계의 민간 전승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알려진,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아기추방 모티프의 테마 중 두 가지 일화일 뿐이다.

……

……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결국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모든 철학, 신학, 신비주의와 과학이 사실은 다양하게 굴절되고 발전해온 하나의 위대한 문자화된 세계유산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그 역사, 해석, 적용방식, 주안점, 그리고 지역적 목적들은 달랐지만 어쨌거나 이들은 기원에 있어서 하나이며, 그 물려받은 상징들에 있어서도 하나이다.

 


세계 역사의 관찰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 안인희 역 / 휴머니스트 / 2008.06.02

 

그래서 기원전 50년에서 기원후 50년까지 유대교가 중동과 로마제국에 널리 퍼졌을 때, 바리새파 내세 이론도 함께 섞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나타난다. 아니면 전도가 없었는데도 그쪽에서 여기 합류한 것일까? 지상에서 메시아의 희망이 내세를 대신한 것일까?

……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는 전도하는 종교들과 완전히 반대된다. 특히 서양 세계에 자기 신들을 널리 퍼뜨린 로마 제국의 다신교는 다른 민족의 신들을 자기들의 판테온(만신전)에 불러들였다. 이 다신교는 민족종교였다가 제국의 종교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완전히 변했다.

……

세계종교는 이런 민족종교에 대립한다. 불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이 세계종교다. 이들은 훨씬 뒷날 나타났다. 가장 강한 수단은 대개의 경우 사회적 수단이다. 계급의 해체를 가져오고, 스스로 가난한 자들의 종교, 노예의 종교를 자처하고, 그렇기에 그 자체로는 반민족적이다. 이슬람만은 승리자들의 종교이지만.

……

…… 이렇게 이단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은 현재 지배하는 종교가 원래 그 종교의 기반이 된 형이상학적 욕구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표지가 된다.

 


우리 시대의 신앙

– 오이겐 드레버만 / 김현천 역 / 피피엔 / 2010.04.20

 

고대 이집트의 종교,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이 삶을 해석하는 틀은 기독교인 틀의 그것보다 낡은 것입니까?

고대 문명의 기본 사상은 자연의 힘을 인격적인 힘으로 이해하며, 인간과 자연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의 모습을 가진 자연의 힘으로 태어납니다. 이집트인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성서는 문화의 경계를 실제적으로 넘어섰고, 무언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세상에 가져왔습니다. 신을 자연의 힘과 동일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신은 자연의 배후에 있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최초로 자연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돼 나왔는데, 이것은 신화적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돌연 인간은 세계 무대에 올려졌고, 이제까지는 알지도 못했던 책임이 부여되었습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낯선 존재가 된 동시에, 하나님은 어떠한 자연과도 차별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더 이상 여러 신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오직 한 분의 신만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유일신 사상은 성서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1500년 이상의 오랜 시간에 걸친 신학적 터득을 통해 정착되었습니다. 좀더 정확하게는 기원전 5-6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 최종적인 틀을 갖추게 됩니다. 신은 오직 한 분이시며, 각 인간의 무력한 인격에 응답하시는 유일하고 전능하신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이야기, 신과 인간의 대화가 방대한 신앙의 내용이며 배경이고 주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면 그제서야 비로소, 어떻게 이런 창조신앙과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가 질문의 핵심입니다. 세상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아닙니다.

……

 

기독교의 창조신앙은 이집트 사상과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즉, 어느 날 갑자기 기독교 창조신앙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사람들은 갑자기 기독교 신앙만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기독교의 신만이 유일한 참 신이라고 믿기 시작한 것은 아니겠지요?

네, 그 반대입니다. 문화사적으로 봐서 서양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매우 다른 흐름이 중요합니다. 첫 번째의 종교적 흐름은 이미 말한 성서의 유산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근본으로 삼고 있는 지역에서도 기원전 4세기 말의 알렉산더 대제 이후로는 그리스의 영향을 같이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 신화가 따로 있을 정도로 그리스는 완전히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호머가 있고, 지중해 문화의 다양한 형태를 띤 신화 종교들이 있고, 그 중에는 오르페우스나 피타고라스의 신화 종교들도 포함됩니다. 또 시리아의 아도니스와 아티카 숭배, 고대 이집트의 유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늦어도 기원전 600년 이후로는 특히 터키 서부의 이오니아에서 완전히 독자적인 사상의 흐름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대단한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그것은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으로서, 이 철학은 자연에 어떤 특별한 현상을 일으키기 위해 신들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거부했습니다.

……

 


알렉산드리아

– 위키백과 :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는 1세기에는 세계 최대의 디아스포라를 맞아 ‘유대의 플라톤’ 철학자 필론 등이 활약하며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사이의 학문적 교류가 일어났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과 함께 유력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구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번역본인 셉츄아진트본도 바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왔다. 또한 크리스트교의 중요한 거점이 되어 고대 신학(神学)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어 크리스트교 교리와 신학의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알렉산드리아를 거점으로 활약한 신학자들을 아울러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부르며 안티오키아를 거점으로 하는 안티오키아 학파와 더불어 초기 크리스트교 연구에 중요한 중심축이 되었다. 초기 크리스트교의 유명한 아리우스와 그의 반대자 아타나시우스가 이 도시에서 활동했다. 로마 제국의 크리스트교 공인 이후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오키아, 예루살렘과 함께 알렉산드리아에는 로마 제국의 총주교좌(総主教座)가 설치되었고, 다섯 총대주교좌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멤피스 창세신화 – 발화를 통한 창조행위의 비교종교학적 의미

– 유성환 / 종교와 문화 (ISSN : 19767900) / 2016년 12월

 

『멤피스 창세신화』는 고대로부터 전승된 이집트의 종교 문서 중 가장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멤피스 창세신화』는 이집트의 종교를 다룬 여러 문서를 통해 단편적으로만 소개된 것이 사실이다. 이집트로부터 전승된 창세신화 중 『헤르모폴리스 창세신화』는 창조 이전의 상황에 초점을 두고 태초의 대양이 보유한 본질적인 속성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집트의 가장 기본적인 창세신화라 할 수 있는 『헬리오폴리스 창세신화』는 태초의 대양을 배경으로 창조주이자 원발자인 아툼이 자신의 몸을 발현하여 우주를 창조하는 창조과정을 기술하는데 여기서 아툼은 자위 혹은 체액 방출과 같은 물리적인 방법을 통해 우주의 구성요소를 이루는 신들과 다른 모든 대상을 창조한다. 한편, 앞서 언급한 두 창세신화보다 비교적 후대에 창작된 『멤피스 창세신화』는 기존 창세신화에 제시된 구조를 변형하는 방법으로 멤피스의 주신 프타의 창조행위를 설명하는데 이 창세신화에 따르면 프타는 태초의 대양과 동일한 신격을 보유한 창조주로서 아툼에 선행하며 창조과정 역시 심장을 통한 창조적 인식과 혀로 대표되는 조음기관을 통한 창조적 발화가 핵심을 이룬다.

 

『멤피스 창세신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원론적인 창조과정이다. 요컨대 창조주의 창조행위를 통해 현상계에 발현되는 모든 개별자에 대하여 그에 대응하는 “신성한 말씀” 혹은 “성각문자”가 동시에 창조되는데 따라서 창조행위를 통해 창조된 모든 개별자는 창조주가 원래 의도했던 창조적 인식의 형상, 즉 완벽한 이미지로서의 “성각문자”에 기인한다. 프타를 인식과 발화를 통해 모든 것을 창조한 창조주로 상정한 『멤피스 창세신화』는 향후 그리스 철학에 등장하는 신성한 데미우르고스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의 “말씀” = “로고스” 개념에도 영향을 미쳤다. 『멤피스 창세신화』에 따르면 “성각문자”는 그리스 철학의 에이도스와 조응하며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물과 완벽한 기호 간의 관계는 그리스의 이원론 개념이 독자적인 신화를 통해 표현된 탁월한 지적 성취로 평가 받을 만하다.

 


종교와 인간

– 서광선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 2009.09.10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이질적인 것이 각각 그 특성을 유지하면서 통합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말한다. 인간을 이렇게 보는 데는 대체로 두 가지 방향이 있다고 하겠다. 그 첫째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분리하는 생각이다. 인간은 외면에 나타나는 대로 육체적인 혹은 물질적인 존재이며 또한 내면적으로 초물질적이며 초육체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고 자명한 문제 같지만 가장 복잡하고 쉽게 풀리지 않는 철학적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어떻든 인간을 두 가지로 생각하게 된 것은 우주 자체가 두 개의 극(極)으로 형성되었다는 생각에서 온 것 같다. 물질을 벗어난 인간의 초월적인 차원을 가리켜 ‘영혼’이라고 한다. 인간의 이 초월적인 차원, 한마디로 영혼은 지적 능력이 있으며 의지와 도덕적 성품과 정신적이며 비물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종교적 경전으로서 ‘영혼’이라든지 이것과 상당한 뜻을 가진 말을 쓰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 가령 이집트 종교에서도 인간은 육체와 카 혹은 바, 즉 원동력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며, 이러한 영과 육의 분간은 그리스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며, 죽음에 이르러 영혼은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거나 수도(修道)를 통하여 육체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기독교는 그리스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육체를 ‘더럽고’ 천한 것으로 비하시켜 왔으며, 육체를 억누르고 정복하는 힘을 수양(修養)을 통하여 영혼 안에 길러야 한다고 가르쳤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금욕 생활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영혼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초월적인 능력을 희구하였다. 인간의 구원은 영혼만의 문제라고 하여 비현실적인 혹은 ‘타계주의적(他界主義)’인 극단에 흐르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인간을 영과 육으로 분리시키는 이원적 생각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관련 그림>

 

– Funerary stele of Licinia Amias on marble, in the National Roman Museum. One of the earliest Christian inscriptions found, it comes from the early 3rd century Vatican necropolis area in Rome. It contains the text ΙΧΘΥϹ ΖΩΝΤΩΝ (“fish of the living”), a predecessor of the Ichthys symbol.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고대 이집트 종교

2011-03-29  이집트인의 죽음이해1

2007-12-30  초기기독교는 이집트에서 대세를 형성했다

 

이집트 종교의 몰락과 초기 그리스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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