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에포크 (1896년 ~ 1914년)

1815에서 1914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상대적인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유럽이 갑자기 세계대전에 빠져들고 그 다음엔 경제적 붕괴가 이어진다. 이 시기의 후반부인 벨 에포크(Belle Epoque)는 프랑스어로 ‘좋은 시대’, ‘아름다운 시대’라는 의미인데, 엄격한 정의는 없지만 19세기 말에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벨 에포크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말・에드워드 시대(Edwardian era)와, 독일의 빌헬름 시대와 대응하는 프랑스의 시대를 의미하나, 대부분의 유럽 국가의 이 무렵 시절을 말할 때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유럽 문명권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겠다. 이 시기는 영국 자유무역 제국주의의 정점을 보여 줬다. 영국뿐 아니라 전체 서구 세계 자산계급의 부와 권력은 전례 없는 고점에 이르렀다.

 

벨 에포크 시대가 특별히 기억되는 것은 전례 없는 물질 진보와 문화예술의 성취, 자유를 값지게 여기던 풍조 덕도 있었지만 전쟁의 반사효과, 착시효과 때문이기도 했다. 1914년 세계대전은 벨 에포크 주역들의 시공간마저 뒤집어 놓았다.

 

벨 에포크 시대는 고전적 전통과 기존의 권위주의를 깨뜨리며 새로운 세계 인식과 현대적 전망을 열고 있었다. 다윈과 프로이트에 의해 인간의 존재와 존엄은 붕괴되고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세계관을 바꾸었으며 이를 예고하듯 인상파 화가들은 미학의 목표를 전달에서 표현으로 바꾸고 위고와 졸라는 문학의 정치적 도전을 감행했으며 조이스와 프루스트는 소설을 ‘모험의 언어’로부터 ‘언어의 모험’으로 전복했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00

 

현재도 기술혁신의 속도가 빨라 현기증이 날 정도이지만, 그때도 더했으면 더했다. 벨 에포크 이전부터 소위 제2차 산업 혁명(Second Industrial Revolution, 1870~1914)이라는 이름으로 화학, 전기, 석유 및 철강 분야에서 기술 혁신이 진행되었다. 할아버지는 나폴레옹 시대에 말을 타고 전쟁을 했는데 그 손주는 자동차를 타고 전화를 하며 심지어 비행기까지 탔다. 한 세대가 채 지나가기도 전, 철도가 깔리고 마차 대신 차가 다니며 수세식 화장실이 보급되는 등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한 시대였다.

 

소비재를 대량 생산하는 구조적 측면의 발전도 있었고, 식료품 및 음료, 의류 등의 제조 기계와 더불어 가공, 운송 수단의 혁신, 심지어 오락 분야에서도 영화, 라디오와 축음기가 개발되어 대중의 요구에 부응했을 뿐만 아니라 고용의 측면에서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생산 확대는 오래 지속되었던 대불황(1873~1896년)과 이른바 신제국주의로 연결되는 요소이기도 하였다.

 

1873~1896년 대불황이 ‘과도한’ 경쟁과 ‘비합리적으로’ 낮은 이윤 때문에 풀이 죽은, 무엇보다 사업가들의 병이었다면, 1896~1914년의 벨에포크는 무엇보다 이런 병에서 회복되어 기업 간 경쟁을 누르고, 결국 수익성을 상승시켰다. 그러나 교역, 생산, 그리고 노동계급 소득의 팽창에 관해서 상승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순간은 소수에게만 화려했고, 그 소수에게조차 이는 단명했다. 몇 년 안에 “군사적 분란”이 파국으로 전환되었고, 19세기 자본주의는 결코 그로부터 회복되지 못했다.

※ 대불황 (1873년 ~ 1896년) : http://yellow.kr/blog/?p=2927

 

유럽 문명권의 세계분할이 종료된 1900년의 세계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강력한 유럽 열강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들은 유럽 내에서는 주권국가간 관계, 곧 ‘국제’의 모습을 띠고 있었지만, 지구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비서구지역에서는 ‘제국’의 모습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처럼 ‘제국주의의 활극장’이 되어버린 세계는 바야흐르 인류사의 가장 비극적인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 1900년의 역사지도 : http://yellow.kr/maps.jsp?y=1900

 

표면적으로는 벨 에포크가 미래에 대한 낙관, 평화, 희망으로 넘치는 시기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민족주의, 제국주의 및 세력 균형 체제가 작동을 멈추가는 시기로 평온한 표면 아래에 상당한 긴장이 숨겨져 있었다.

 

19세기를 지배했던 철학은 평화주의와 국제주의였다. 하지만 1870년대 이후로 들어서면 정서의 변화가 시작됨을 감지할 수 있다. 세계는 여전히 국제주의와 상호 의존을 신봉하고 있었지만 실제 행동은 이미 민족주의와 경제적 자급자족의 원리에 기반을 두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보호주의와 제국주의의 경향을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독점주의적 보수주의의 경향을 뚜렷이 띠고 있었다.

 

영국은 19세기 패권 국가로서 세계정부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1870년대부터 영국은 유럽의 세력균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곧이어 전지구적 세력균형에 대한 통제력 또한 상실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세계권력에 대한 독일과 미국의 도전은 서로를 강화하였고, 영국의 국가간체계 통치 능력을 손상시켰으며, 결국 전례 없는 폭력과 광포함이 난무한 상태에서 세계적 우세를 둘러싼 새로운 투쟁이 벌어졌다.

 

영국체제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근원적 문제는 자본가 간 경쟁의 격화였다. 1890년대 중반의 가격 상승은 앞선 대불황 시기의 이윤압박을 반전시킴으로써 유럽 부르주아지의 병을 치료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병보다 약이 더 문제임이 드러났다. 왜냐하면 상승기는 주로 유럽 열강들 사이의 군비 경쟁의 대대적 증폭에 기반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상승기는 1873~1896년 대불황의 첨예한 자본가 간 경쟁이 지양되었음을 보여 준 것이 아니라, 그 주요한 장소가 기업 간 관계의 영역에서 국가 간 관계의 영역으로 바뀌었음을 보여 주었다.

 

아래의 그림은 브로델(Fernand Braudel)의 장기순환을 보여준다. 대불황의 시기 즈음에 영국 체제의 실물적 팽창 단계에서 금융적 팽창 단계로의 변화로 보고 있다.

 

 

금융적 팽창은 광범한 탈산업화 과정 및 노동계급 소득 감소와 결합되었다. 교역에서 철수하여 신용 형태로 가용해지고 있던 이동자본을 얻기 위해 국가들은 격심한 경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부터 시작해 유럽 강국들의 군사비 지출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잉여자본이 산업에서 금융으로 대대적으로 재배치되자, 부르주아지는 부분적으로 노동계급을 희생시켜 전례 없는 번영을 구가했다.

 

루빈스타인(William D. Rubinstein)은 영국의 19세기 후반 이래 공업의 비중이 그 이전보다 더 떨어진 것에 대해서, 산업 쇠퇴를 경제 쇠퇴와 동일시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19세기 후반에 영국의 산업은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런던 시티를 중심으로 하는 상업-금융 부문은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1899년에서 1913년 사이에 실질임금의 ‘하락’이 현실화되기에 이르렀다. 무거운 사회적 긴장과 1914년 이전의 마지막 몇 년간 나타났던 폭발은 부분적으로 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벨 에포크 시절에 부(특히 상속된 부)가 정치적인 방향성을 만들어내고 경제 구조를 형성한다는 생각은 매우 지배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시대에 상대적 소득 격차는 물론이고 상대적 부의 격차도 매우 격심한 수준이었다.

 

사실 벨 에포크 시대는 역사적으로 가장 불평등한 사회 중 하나였다. 유럽의 상위 10%가 90%의 부를, 상위 1%가 60% 이상의 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1914년 이전의 수십 년 동안, 노동계급의 신화는 절대로 아름다운 시대라 일컬어질 수 없는 것이었으며, 아름다운 시대란 유럽의 부유한 자들에 보다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들 상층계급들에서도 ‘아름다운 시대’란 1914년 이후에는 상실될 운명에 처하게 될 일시적인 천국일 뿐이었다.

 

자본축적이 몇 세대에 걸친 장기적인 과정임을 인식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벨 에포크 시대 유럽에서 진행된 부의 집중은 수십 년 혹은 심지어 수백 년에 걸쳐 누적된 과정의 결과였다.

 

벨 에포크 시대는 돈 있는 부자들만의 ‘좋은 시절’이기도 했다. 제국주의가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로, 이주 노동자나 식민 지배를 받는 국가들의 고통은 심화되었고, 지배 국가 내부에서도 노동자 계급에 대한 심각한 노동착취가 이루어졌다. 이때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대변하고 빈부격차 해소를 외치는 사회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좋은 시절’에 ‘좋은 시절’을 끝내려 하는 세력이 성장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브로델(Fernand Braudel)의 장기순환 모델에서 장기 20세기인 미국 체제와 비교해서 장기 19세기 영국체제에서의 벨 에포크와 비슷한 시기가 있었는가 보면, 1980년대 레이건 시대를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미국 체제의 금융적 팽창 시기를 이때로 보고 있다.

※ 1980년대 자본주의의 승리 – 신자유주의 : http://yellow.kr/blog/?p=4216

 

피케티 교수는 1980년대 이후 현대자본주의가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시기이던 프랑스의 ‘벨에포크 시대’ 또는 미국의 ‘도금시대’로 귀환하기 시작했다고 봤다. 벨에포크 시대와 도금시대는 불평등이 극에 달했을 때인데, 여러 수치로 볼 때 1980년대 이후 분석 대상 국가들이 그 시기의 불평등도와 비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 미국의 소득 불평등 비교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미국과 독일의 갈등과 지금의 미국과 중국의 갈등, 자산 인플레이션, 양극화 등 분위기가 그때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19세기 마지막 사반세기의 끔찍한 가격 경쟁은 실로 이윤을 “비합리적으로” 낮은 수준으로 끌어 내렸고, 낙관론은 불확실성과 고통감에 길을 내주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1873~1896년의 대공황이 신화는 아니었다. 에릭 홉스봄이 지적하듯이(Hobsbawm 1968: 104), “만일 ‘불황'(depression)이 영국 경제의 전망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 그리고 1850년 이후 세대에게는 새로운 – 불편하고 우울한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 단어는 옳다.” 그러나 그 다음에 갑자기, 그리고 마치 마술처럼,

상황이 반전되었다. 세기말 몇 년 사이에 가격이 다시 상승하고 이윤도 함께 상승하기 시작했다. 사업이 나아지자 신뢰도 회복되었다. 이 신뢰는 앞선 수십 년의 우울한 시기에 간혹 짧은 붐과 더불어 이따금씩 나타나는 덧없는 신뢰가 아니라, 1870년대 초 …… 이래로 두드러지지 않던 일반적 도취감이었다. 모든 일이 다시 좋아진 것 같았다. – 비록 군사적 분란과 자본주의 “최후 단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훈계적인 언급이 있었지만, 유럽 모든 곳에서 이 시기에는 좋았던 옛 시절이라는 기억을 가지고 지냈다. 바로 에드워드 시기, 벨에포크(la belle epoque)였다. (Landes 1969: 231)

말할 필요도 없이, 이윤이 “합리적” 수준 이상으로 갑자기 회복되고, 심지어 그에 뒤이어 유럽 부르주아지가 19세기 말의 병에서 빠르게 회복된 데는 어떤 마법도 없었다. 앞선 모든 체계적 축적 순환과 마찬가지로, 교역에서 철수하여 신용 형태로 가용해지고 있던 이동자본을 얻기 위해 국가들은 격심한 경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부터 시작해 유럽 강국들의 군사비 지출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를 합친 지출 총액이 1880년의 1억 3천 2백만 파운드에서 1900년에 2억 5백만 파운드로, 1914년에는 3억 9천 7백만 파운드로 증가했다(Hobsbawm 1987: 350). 그리고 이동자본을 얻기 위한 국가 간 경쟁이 첨예해지자, 이윤은 회복되었다.

……

간단히 말하자면, 1873~1896년 대공황이 “과도한” 경쟁과 “비합리적으로” 낮은 이윤 때문에 풀이 죽은, 무엇보다 사업가들의 병이었다면, 1896~1914년의 “좋은 시절”은 무엇보다 이런 병에서 회복되어 기업 간 경쟁을 누르고, 결국 수익성을 상승시켰다. 그러나 교역, 생산, 그리고 노동계급 소득의 팽창에 관해서 상승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앞선 축적 순환의 종료 국면을 특징짓는 모든 경이적 순간과 마찬가지로, 이 순간은 소수에게만 화려했고, 그 소수에게조차 이는 단명했다. 몇 년 안에 “군사적 분란” – 그것이 이동자본을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을 격화시킴으로써 수익성을 부풀리는 한, 이는 유럽 부르주아지의 귀에는 음악으로 들렸다 -이 파국으로 전환되었고, 19세기 자본주의는 결코 그로부터 회복되지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에드워드 시기 영국은 유럽 세계경제의 첫번째 금융적 팽창 중에 이미 피렌체에서 작동한 바 있던 일부 경향들을, 근본적으로 상이한 세계 – 역사적 상황 하에서 매우 압축적 형태로 재생산하였다. 두 상황 모두, 잉여자본이 산업에서 금융으로 대대적으로 재배치되자, 부르주아지는 부분적으로 노동계급을 희생시켜 전례 없는 번영을 구가했다. 근대 초 피렌체에서는 그 경향이 결국 금융자본에 의한 정부 장악으로 귀결되었다. 20세기 영국에서는 그 경향이 결국 노동에 의한 정부 장악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두 상황 모두 부르주아지의 좋은 시절은 기존 자본주의가 지양되는 신호였다.

훨씬 더 긴밀한 유사성이 발견되는 것은 에드워드 시기와 네덜란드 역사에서 “가발 시대(periwig period)”라고 알려진 시기 사이에서다. 이 시기는 네덜란드 축적 순환의 금융적 팽창 국면에 넓게 조응하고, 특히 금융적 팽창이 끝나가는 마지막 20~30년에 조응한다. 4백 년 전 피렌체와 125년 후 영국에서처럼, 네덜란드에서 18세기 후반의 금융적 팽창은 광범한 “탈산업화”(조선업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과정 및 노동계급 소득 감소와 결합되었다. 찰스 박서(Boxer 1965: 293~4)가 지적하듯, “상인 은행가와 부유한 금리생활자로서는 ‘더 이상 좋을 수 없었’지만”, 그 시기의 종료기에 목격자들이 기록했듯이, “근로 생활을 주도한 사람들의 계급의 안녕은 줄곧 쇠락했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나 에드워드 시기 영국, 또는 같은 이유로 레이건 시기 미국처럼, 가발 시대에 네덜란드 자본가로부터 전환한 금리생활자들은 오직 초단기적인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1778년에 잡지 《데 보르헤르(De Borger)》가 썼듯이, “우리 (프랑스) 이웃의 격언처럼, 모든 사람들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 괜찮으면 되고, 그 다음에는 홍수가 나든지 말든지!’ 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를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받아들였다”(Boxer 1965: 291에서 재인용).

……

에드워드 시대의 벨에포크는 영국 자유무역 제국주의의 정점을 보여 줬다. 영국뿐 아니라 전체 서구 세계 자산계급의 부와 권력은 전례 없는 고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국 축적체제의 체계적 위기는 해결되지 못했고, 한 세대 내에 19세기 문명의 건물 전체를 붕괴시켜 버리기에 이르렀다.

영국체제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근원적 문제는 자본가 간 경쟁의 격화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1890년대 중반의 가격 상승은 앞선 사반세기 이윤압박을 반전시킴으로써 유럽 부르주아지의 병을 치료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병보다 약이 더 문제임이 드러났다. 왜냐하면 상승기는 주로 유럽 열강들 사이의 군비 경쟁의 대대적 증폭에 기반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상승기는 1873~1896년 대공황의 첨예한 자본가 간 경쟁이 지양되었음을 보여 준 것이 아니라, 그 주요한 장소가 기업 간 관계의 영역에서 국가 간 관계의 영역으로 바뀌었음을 보여 주었다.

막스 베버의 말을 바꾸어 말하자면, 처음에 이동자본의 공급을 통제하게 되자, 유럽 일반 그리고 특수하게는 영국의 자본가계급들은 경쟁하는 국가들이 권력투쟁에서 자기 자본가계급을 돕도록 지령할 역량을 얻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때문에 유럽 부르주아지는 대공황에서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20여 년간 휘황찬란한 계기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간 권력투쟁은 영국을 포함해 모든 개개 유럽 국가에 대해 그 수익 이상으로 보호비용을 올리는 경향이 있었고, 또한 동시에 대부분의 나라에서 투쟁의 부담을 외주화하는 부르주아지의 역량을 침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런 투쟁이 고개를 내밀었을 때, 영국 축적체계의 명운은 끝났다.

 


21세기 자본

–  토마 피케티 / 장경덕 역 / 글항아리 / 2014.09.12

 

…… 사실 벨 에포크 시대는 역사적으로 가장 불평등한 사회 중 하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당시의 불평등의 형태와 발생 방식은 오늘날에는 쉽사리 용인되지 않을 것이다.

……

…… 다행이 1791년 이후 부과된 상속세에 관한 자료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전개된 부의 분배 추이를 연구할 수 있도록 해주고, 따라서 우리는 1914~1945년의 충격이 수행했던 중요한 역활을 확인할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이 자료들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자본 소유의 집중이 자연적으로 감소될 징조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같은 자료들로부터 1900~1910년에 상위 1퍼센트의 소득에서 자본소득이 가장 큰 몫을 차지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

게다가 현재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미국이 유럽보다 항상 불평등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0세기 초 유럽은 소득불평등이 사실 매우 높았다. 모든 지표와 역사적 자료들에서 이 점이 확인된다. 특히 1900년에서 1910년 사이 국민소득에서 상위 1퍼센트가 차지하는 몫은 유럽의 모든 국가에서 20퍼센트를 넘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뿐 아니라 스웨덴, 덴마크도 마찬가지였고, 나아가 우리가 이 시기의 추정치를 보유하고 있는 모든 유럽 국가가 전반적으로 그런 모습을 보였다.

벨 에포크 시대에는 모든 유럽 국가에서 비슷한 수준으로 소득의 집중이 나타났다는 점도 분명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최상위 소득은 거의 전적으로 자본소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로 자본의 집중이라는 부문에서 설명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1900년부터 1910년까지 유럽에서 왜 그러한 자본의 집중 현상이 나타났을까?

……

유럽과 사회적, 문화적으로 다르지만 일본도 20세기 초에 이와 같은 높은 수준의 불평등이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당시 일본에서는 상위 1퍼센트가 국민소득의 약 20퍼센트를 차지했다.

……

벨 에포크 시대에 높은 자본 집중 현상이 나타났던 원인들과 20세기가 흘러가면서 여러 국가에서 발생했던 커다란 변화, 즉 자본 집중의 감소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볼 것이다. 특히 유럽과 일본에서 나타난 훨씬 더 높은 부의 불평등은 구세계에서 관찰되는 낮은 인구성장률로써 꽤 자연스럽게 설명된다는 점을 보일 것이다. 인구성장률이 낮으면 거의 자동으로 자본축적과 집중이 심화된다.

……

…… (프랑스) 혁명 전이나 후나 프랑스는 과도한 자본의 집중이라는 특징을 지닌 세습사회였고, 유산과 결혼이 중요한 역활을 했다. 큰 재산을 물려받거나 부자와 결혼하면 일이나 학업으로는 얻을 수 없는 수준의 안락함을 누리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벨 에포크 시대에는 보트랭이 라스티냐크에게 설교를 늘어놓던 무렵보다 부가 더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앙시앵레짐 시대부터 제3공화정까지 거대한 경제적,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프랑스는 내내 기본적으로 동일한 불평등 구조를 가진 동일한 사회였다.

……

불완전하긴 하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에 관해 이용할 수 있는 데이터는 18세기와 19세기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나타난 부의 극단적인 집중이 단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반의 현상임을 보여준다.

……

…… 영국의 자료는 불완전하며, 특히 19세기의 자료는 더 불충분하지만 부의 집중도는 상당히 명확히 드러난다. 19세기 영국에서는 부가 극도로 집중되어 있었고, 1914년 전까지 부의 집중이 완화되는 추세는 보이지 않았다. 제3공화정의 지도층은 프랑스가 영국해협 너머의 군주국에 비해 평등한 나라라고 말하길 좋아했지만, 실제로 벨 에포크 시대에 영국의 자본 소유의 불평등은 프랑스보다 약간 더 높았을 뿐이다. 이는 프랑스의 관점에서 가장 놀랄 만한 진상이다. 사실 정치체제의 형식적인 성격은 두 국가에서 부의 분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

뿐만 아니라 19세기 이전 대부분의 사회, 특히 중세와 고대뿐 아니라 근대의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극도로 높은 부의 집중 현상 – 상위 10퍼센트가 자본의 80~90퍼센트를, 상위 1퍼센트가 자본의 50~60퍼센트를 차지했다 – 이 발견된다는 데 주의하자. 현재 이용할 수있는 자료는 정확한 비교를 하거나 시간적 변화를 연구하기에 매우 불충분하지만, 전체 부(특히 전체 농지)에서 상위 10퍼센트와 1퍼센트가 차지하는 몫은 19세기와 벨 에포크 시대에 프랑스, 영국, 스웨덴에서 관찰된 수준과 대체로 비슷하다.

……

자본축적이 몇 세대에 걸친 장기적인 과정임을 인식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벨 에포크 시대 유럽에서 진행된 부의 집중은 수십 년 혹은 심지어 수백 년에 걸쳐 누적된 과정의 결과였다.

 


제국의 시대

–  에릭 홉스봄 / 김동택 역 / 한길사 / 1998.10.15

 

1890년대 중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세계경제의 오케스트라는 공황의 단조(短調)가 아니라 번영의 장조(長調)를 연주하였다. 활발히 움직였던 기업에 기반한 풍요는 오늘날에도 유럽대륙에서 ‘아름다운 시대'(Belle Epoque)라 알려진 시대의 배경을 형성했다. 우려에서 행복감으로의 변동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극적인 것이어서, 속류(俗流)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기계 속에 존재하는 신과 같이 어떤 외적인 힘을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남아프리카의 클론다이크(1898년)와 다른 여러 곳에서 엄청난 규모의 황금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서구에서 마지막 골드러시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경제사가들은 그러한 화폐주의적 테제에 대해 20세기 후반의 몇몇 정부들만큼 커다란 인상은 받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경기회복의 상승속도는 놀라운 것이었고, 특별히 예리한 눈을 가진 혁명가로 파르부스(Parvus)라는 필명으로 집필활동을 해온 헬판트(A. L. Helphand, 1869~1924)는 이 시기를 일시적인 자본주의적 진보의 새롭고 장기적인 기간을 향한 출발점이라고 즉각적으로 진단했다. 대공황과 이어지는 세계적인 활황 사이의 대조는 세계 자본주의 발전에서 나타날 ‘장기파동’에 대해 최초의 고찰이 나올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는데, 나중에 이것들은 러시아 경제학자 콘드라티예프(Kondratiev)의 이름과 결부되었다.

……

‘무역의 측면’은 농업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공업에 대해서는 비우호적인 방향으로 움직여가고 있었다.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혹은 절대적으로 산업에서 그들이 구입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은 비용을 치르고 있었으며, 산업은 상대적으로 혹은 절대적으로 농업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지불하고 있었다.

무역의 측면에서 나타난 이러한 변화는 1873년에서 1896년 사이의 놀랄만한 가격하락으로부터 1914년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이어지는 상당한 정도의 가격 상승으로 움직여왔다고 주장되어온 바 있다. 아마 그럴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무역의 측면에서 나타난 이 같은 변화는 산업의 생산비용과 그에 따른 이윤율의 상승폭에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이었다. ‘아름다운 시대’의 ‘아름다움’에서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경제가 이같은 압력을 이윤으로부터 노동자들에게로 옮아가게끔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대공황의 특성으로서 급속하게 상승하던 실질임금의 상승폭이 눈에 띄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1899년에서 1913년 사이에 실질임금의 ‘하락’이 현실화되기에 이르렀다. 무거운 사회적 긴장과 1914년 이전의 마지막 몇 년간 나타났던 폭발은 부분적으로 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세계경제를 그토록 역동적으로 만들었는가? 분명하게도 문제의 핵심은 온대 북반구를 둘러싸고 확대되어가는 산업화 도상에 있었던 나라들과 산업화된 국가들로 이어지는 중심적인 벨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산자이자 시장(市場)으로서, 지구적 성장의 원동기로 행위했기 때문이었다.

……

돌이켜보면 1914년 이전의 수십 년 동안, 노동계급의 신화는 절대로 황금시대라 일컬어질 수 없는 것이었으며, 황금시대란 유럽의 부유한 자들과 중간계급에 보다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들 상층계급들에서도 ‘아름다운 시대’란 1914년 이후에는 상실될 운명에 처하게 될 일시적인 천국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전후(戰後)의 기업가들이나 정부들에게는 1913년은 그들로 하여금 문제의 시대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영구한 준거점이 되어버렸다. 암울하고 문제가 많은 전후의 시대에서 바라볼 때, 이들 두 집단에게 역전의 분위기를 고무시켰던 순간이란 일시적으로 햇빛이 비쳐 ‘정상성’으로 간주되었던 전전(戰前)의 예외적인 마지막 붐이 나타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러한 시절이란 중산층들에게 황금의 시대로 간주되었던 1914년 이전의 경제와 연관되어 나타난 일시적 현상으로서, 이것은 오히려 세계전쟁 · 혁명 · 붕괴로 향하는 허무한 도정(道程)이자 궁극적으로 상실된 천국으로의 복귀를 가로막아버렸던 것이다.

 


거대한 전환

–  칼 폴라니 / 홍기빈 역 / 길 / 2009.06.30

 

국제적 영역에서 보자면, 나라마다 자국 통화가 차지하는 역활이 압도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 비록 당시로서는 거의 인식되지 못했지만, 19세기를 지배했던 철학은 평화주의와 국제주의였다 …… 하지만 1870년대 이후로 들어서면 정서의 변화가 시작됨을 감지할 수 있다 – 비록 그에 상응하는 단절이 지배적 사상 조류에도 따라온 것은 아니었지만, 세계는 여전히 국제주의와 상호 의존을 신봉하고 있었지만 실제 행동은 이미 민족주의와 경제적 자급자족의 원리에 기반을 두게 되었다.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는 이제 민족주의적 자유주의로 발전하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보호주의와 제국주의의 경향을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독점주의적 보수주의의 경향을 뚜렷이 띠고 있었다.

 


담론의 발견

–  고명섭 / 한길사 / 2006.06.26

 

빌리 하스의 책 《세기말과 세기 초》는 서구 사람들이 흔히 프랑스어로 ‘벨 에포크’라고 하는 1890년부터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의 유럽 문학 · 예술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 ‘아름다운 시절’은 유럽인의 처지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급속한 팽창으로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모든 면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황금기를 구가한 시절이었다. 이 시기를 물들인 세기말의 우울하고 감상적인 색조는 말하자면, 배부른 자의 권태같은 것이었다. 미국의 문화사학자 스티븐 컨(Stephen Kern, 1943~, 오하이오주립대 교수)이 쓴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0~1918》는 이 ‘벨 에포크’를 포함해 1880년대부터 1차대전 종결 때까지의 유럽 문화의 변동을 아주 색다른 관점에서 조망한 저작이다.

그 색다른 관점이란 ‘시간’과 ‘공간’이라는 철학적이고 물리학적인 좌표 위에 한 시대의 문화와 정신을 통째로 얹어놓고 보여준다는 점이다. 컨은 이 시기에 시간과 공간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으며, 그 변혁의 물결 속에서 유럽인의 시간관과 공간관이 거대한 혁명을 겪었다고 말한다. 그는 문학 · 미술 · 음악 · 철학 · 과학 같은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 외교 · 전쟁 같은 영역에서 수많은 자료를 찾아내 그 변혁의 실상을 풍성하게 보여준다.

요컨대, 이 세기의 변환기에 인간의 본질적 경험 구조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앞 시대에 발명된 기차가 이 시대에 이르러 유럽 전역을 하나로 엮었으며 전화와 전보가 생활 수단이 되기 시작했다. 곧이어 자동차가 등장하고 증기선이 대서양을 수시로 가로지르고 비행기가 하늘을 휘젓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들이 이 짧은 시기에 앞다투어 나타났다. 시간과 공간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축됐다. 아인슈타인이 시간과 공간을 별개의 개념이 아닌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하는 상대성 이론을 내놓은 것도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였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간의 기존 관념이 뒤바뀌었다.

 


리얼 진보

–  강수돌,손낙구,박노자,손호철,김상봉,목수정,정태인,홍기빈,하재근,박상훈,노회찬,오건.. / 레디앙 / 2010.02.18

 

우선 이런 물음을 던져 보자. ‘보수의 시대’ 전에 ‘진보의 시대’가 있었다면, 도대체 그 ‘진보의 시대’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노 전 대통령은 ‘진보의 시대’가 1929년 대공황에 대한 대응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럼 대공황 이전의 시대는 무엇인가? 그 시대는 또 다른 ‘보수의 시대’였는가? 역사는 그렇게 마치 시계추처럼 ‘보수의 시대’와 ‘진보의 시대’를 반복했던 것인가?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도식이다. 20세기 말에 세계사의 풍향이 바뀌었던 데 촛점을 맞추고 그 이전과 이후의 대비(보수/진보)에만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접근법을 그 이전 시대까지 소급하게 되면 논리가 억지스러워지고 실제 역사와 잘 안 맞게 된다.

관심을 좀 더 넓히고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20세기 역사 전체를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좀 더 정확하고 풍부하게 현 시대를 읽을 수 있다. 그렇게 눈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는 20세기 초가 인류 역사에서 전례 없는 위기의 시대였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1910년대에서 1940년대에 이르는 30여 년 동안은 인류 역사상 최대, 최악의 혼란기였다. 즉, ‘보수’/’진보’의 시계추 운동에 대한 노무현식 접근법 저 너머에 존재하는 과거는 ‘위기의 시대’다.

사실 지난 세기가 막 동터 올 무렵에만 해도, 상황이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의 낙관적이고 태평한 분위기였다. 서구 자본주의 문명이 인류의 복된 미래를 열고 있다는,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는 낙관이 지구 위를 지배했다. 적어도 서구의 유복한 시민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대한 백인의 사명’이니 ‘벨에포크’니 하는 말이 입에 오르내렸다.

……

도대체 왜 이러한 기나긴 혼란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것일까? 그 원인을 따져 보자면, 다시 그 이전 시대로 시야를 더욱 넓혀야 한다. 1차 대전 발발 전 ‘벨에포크’라 불리던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대혼란의 씨앗은 바로 이 시대에 처음으로 그 싹을 틔우며 자라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 시대는 우리 시대를 너무도 닮았었다. 그 시대도 우리 시대처럼 ‘지구화’의 시대였다. 다만 그 시대에는 ‘지구화’라는 말이 쓰이지는 않았다. 그 대신 ‘제국주의’가 더 익숙한 말이었다. 하지만 속내는 같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확장 운동이었고, ‘지구화’ 역시 그런 확장 운동을 뜻하는 말이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지난번 지구화와 20세기 말에 시작된 이번 지구화, 마치 역사가 100년의 간격을 두고 반복되기라도 하는 것 같다.

물론 말의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확장의 양상이 다르기도 했다. 지금은 초국적 금융자본이 첨단 통신 수단을 통해 신흥 시장을 공략하지만, 그때에는 군함과 해병대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누비고 다녔다. 지금이야 국민국가의 외피들을 인정하면서도 지구 곳곳에서 대자본이 제 맘대로 이윤을 확보하지만, 100년 전에는 애써 무력을 써 식민지를 확대하면서 시장을 넓혀야 했다. 그 과정에서 열강들끼리 서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됐고, 그것이 결국에는 세계 전쟁으로 폭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구 자본주의의 외연 확대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게다가 두 시대 사이에는 또 다른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곧 ‘금융화’다. 지구화의 이면에는 금융화가 있었다. 두 시기 모두에 자본주의 확장 운동을 주도한 것은 금융화된 대자본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그 양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거대 자본이 전 지구적인 이동성을 확보해 세상을 새롭게 짜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당연히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100년 전의 지구화가 결국에는 전 지구적인 대혼란기를 열었다면, 우리 시대의 지구화 다음에는 그럼 무엇이 올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낙관적 색채를 띠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HI 마르크스 BYE 자본주의

–  강상구 / 레디앙 / 2009.07.13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새로운 시스템이, 평균 이윤율이 떨어지는 경향을 막는 데 천년만년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효과는 약해지고, 새롭다고 칭송받던 시스템은 이제 낡은 것이라고 비판을 받습니다. 다시 이윤율은 떨어지고 주도권을 잡았던 쪽의 영향력은 약해집니다. 그러자 너도나도 또 다른 새로운 시스템을 주장하면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경쟁합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과정, 즉 이윤율이 떨어지면서 새로운 돈벌이 시스템이 등장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주도권이 교체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을 최근에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관점으로 자본주의를 살펴본다.’고 합니다. 역사적 자본주의의 관점은 자본주의 역사가 첫 번째는 네덜란드, 두 번째는 영국, 세 번째는 미국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변해 왔다고 설명합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헤게모니 시기는 또 두 국면으로 나뉩니다. 처음에는 물질적 팽창이 일어나고, 그 시점이 끝나면 금융적 팽창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물질적 팽창 국면이란, 새로운 생산물을 많이 만들어 내고 그 물건이 잘 팔려 경제가 팍팍 돌아가서 사람들 일자리도 꽤 늘어나는 식의 호황 국면을 말합니다. 그런데 물질적 팽창 국면은 일정한 시점이 되면 위기가 옵니다. 이윤율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때 물질적 팽창 국면은 경제가 폭삭 망하는 데에까지 가지 않고 금융적 팽창 국면으로 변신합니다. 금융적 팽창 국면이란 경제가 잘 돌아가긴 하는데 새로운 생산물을 만들어 내고 그 물건이 잘 팔리는 식으로 경제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금융 쪽이 잘되는 식으로 호황을 누리는 걸 말합니다. 이때는 주식, 채권, 외국돈 등을 사고팔면서 이익을 남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런 직업이 각광받습니다. 국민들이 너도나도 주식 같은 것을 사고팔아서 이익 남기는 재미에 빠집니다. 금융적 팽창 시기는 땀 흘려 노동한 결과로 새로운 걸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돈 넣어 놓고 불어나길 기다리는 ‘돈 넣고 돈 먹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물질적 팽창 국면에서 금융적 팽창 국면으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일시적으로 사람들 씀씀이가 커지면서 흥청망청하게 되는데 이런 때를 프랑스 말로 ‘벨에포크(La belle epoque)’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좋은 시절’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경제가 앞으로도 영원히 잘되리라가 아니라 곧 망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금융적 팽창 국면에는 금융자본이 어마어마하게 커지는데 이렇게 커진 금융자본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큰 ‘도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커다란 금융 위기를 야기합니다. 또, 이 시기에는 기존에 주도권을 잡았던 국가 힘이 약해져서 새로운 주도권을 놓고 국가와 국가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다툽니다. 그동안 국가끼리 탈 없이 잘 지내던 시스템은 무너집니다. 때로는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자본주의는 아주 큰 혼란에 빠집니다.

 


바퀴와 속도의 문명사

–  임정택,문병호,김은중,이정희,김경희 외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8.12.15

 

아방가르드가 이룩한 예술적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적 변화를 다시 한 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아서 밀러는 “과학, 수학, 테크놀로지의 놀라운 발전이 ‘아방가르드’라는 말의 정의 자체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만큼아방가르드운동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1880년경부터 1차 대전 전까지 과학기술의 혁명적 발전은 사회, 문화, 경제 등 여러 분야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장미빛 환상을 안겨주었다. 이 시대를 벨에포크라고 칭한다. 벨에포크의 가장 중요한 시대적 키워드는 속도였다. 증기기관에 이어 자동차, 기차, 비행기와 같은 이동수단의 발달은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에 비하여 더욱 빠른 기계적 속도를 창출했으며, 19세기로부터 20세기로의 세기 전환기에 있어서 속도는 유럽 전역을 휩쓴 지배적 욕망이자 아이콘이었다. 당시의 유럽 사회에서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강도로 사람들에게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1913년 프랑스의 작가 샤를 페기(Charles Peguy)는 이에 대해 “세상은 예수가 탄생한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기간보다 지난 30년 동안에 훨씬 더 급격하게 변했다”고 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적 변화가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를 가늠케 해준다.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과학에서의 새로운 발견들과 문화예술운동 그리고 일상생활의 맞물림이 하나의 커다란 시대적 현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아서 밀러는 르네상스 이래 유례없는 천재의 시기였던 20세기 첫 10년간 생산되었던 작품들에 대해 “유럽을 쓸고 지나간 거센 변화의 물결에 대해 지리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졌던 개인들이 보여준 반응”이라고 진단한다.

아방가르드 예술운동 역시 과학, 기계, 속도와 밀접한 상관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비릴리오는 움직임을 일으키는 기계의 상징으로 모터를 들며, 모더니즘 시대의 중요한 미학적 쟁점을 모터와 연관시켜 성찰한다. “모터가 등장하면서 다른 태양이 솟았고, 시야는 급격하게 변화되었다”고 한 것은 모터에서 발생하는 속도가 예술에서의 혁신적 변화의 중요한 동인이 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기계는 새로운 문명의 능력과 권위를 상징하며 새로운 시대적 종교로까지 여겨졌다. 특히 기계와 속도를 ‘새로운 종교-도덕’으로 여기며, 과학기술과 기계를 미래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었던 미래파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과학과 기술은 신이 지배하는 종교의 세계로부터 벗어난 인간 스스로가 이 세상을 기계를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었던 것이다. 기계는 새로운 종교였다. 기계생산 시대의 새로운 자본주의 축제였던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서 세워진 에펠탑은 현대 기계문명을 대표하는 상징물이었다. 그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서 교회에 비견할만한 종교적 권능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기계문명으로 대변되는 현대 도시에 대해 아폴리네르는 그리스도가 재림할 수 있는 도시로 묘사하기도 했다. 벨에포크는 기계에 매료된 시대로서 모든 것이 기계로 대체되고 기계가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였다.

 


지식사회 – 피터 드러커의 사회관

–  이재규 / 한국경제신문사 / 2009.11.20

 

빅토리아 여왕이 지배하던 세계를 산산조각 낸 ‘8월의 포화(The guns of August)’ 직전, 즉 1914년 7월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8월 4일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포격전을 벌이기 직전,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1783~1859)이 1820년에 발표한 소설 《스케치 북(The Sketch Book)》 속 인물인 립 반 윙클(Rip Van Winkle)과 같은 경제학자가 한 명 살고 있었다고 상상해 보자.

그 훌륭한 경제학자가 살고 있던 시대는, 번영을 구가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뒤이은 에드워드 7세(Edward VII, 1841~1910, 재위 1901~1910) 시대로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전환기였다. 19세기 말 지식인들은 희망찬 새로운 세기를 기다리는 한편 결정적인 종말을 예견하고 염세적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1900년 1월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고, 화려한 에드워드 7세 시대가 열렸다. 에드워드 7세 시대는 소위 벨 에포크(la belle epoque) 시대로서 백화점의 전성기였다. 전화, 타자기, 무전기, 축음기, 전기주전자 등은 모두 에드워드 시대에 훌륭하게 개발되었다.

1900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아르누보(Art Nouveau) 형식으로 디자인된 박람회장 정문으로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는데, 남자들은 프록코트를 입었으며 여자들은 몸에 꼭 끼는 재킷에 넓게 펼쳐진 스커트를 입고, 높게 틀어 올린 머리에는 꽃장식과 베일을 드리운 작은 모자를 쓰고 홀쭉한 우산을 들고 있었다. 새로운 패션이었다. 사람들은 찬란하게 빛나는 도시(Ville Lumiere)라는 개념을 만든 전기의 전당(Palais de l’Electricite)을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

20세기 초 10년간 위대한 과학의 진보가 이루어졌다. 철도가 확장되면서 급행열차가 1901년 7월 개통되었다. 1903년 영국에서는 자동차 등록제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1905년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물리학 분야에서 상대성이론과 질량과 에너지 관계식을 발표했다. 1907년 롤스로이스의 실버 고스트(Silver Ghost)가 처음으로 런던 거리에 등장했다. 에드워드 7세는 열광적인 자동차 애호가였고 왕실 자동차클럽을 승인하였다. 사람들은 점차 마차보다는 버스나 택시를 택했다. 사람들은 시골길을 달릴 때 말을 타기보다는 사육비가 안 드는 자전거를 이용했다. 비행기 여행은 다소 불안하게 여겼지만 새롭고 대담한 것이었다.

50년간의 긴 잠 끝에 지금 막 깨어난 립 반 윙클 경제학자는 최근의 경제보고서와 경제통계를 즉각 흝어본다. 그리고 이 경제학자는 틀림없이 매우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 경제 사정이 엄청나게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로 지난 50년간 어떤 경제학자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경제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련 그림>

 

– 영국의 자본 수출, 1820~1915(단위 : 백만 파운드)

 

 

– 프랑스의 소득불평등, 1910~2010

20세기 프랑스에서는 총소득(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의 불평등은 감소한 반면 임금불평등은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 프랑스 자본소득자들의 몰락, 1910~2010

1914년에서 1945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상위 1퍼센트(소득이 가장 높은 1퍼센트)가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몫이 감소한 것은 최상위 계층의 자본 소득의 감소 때문이다.

 

 

– 유럽과 미국의 부의 불평등 비교, 1810~2010

20세기 중반까지는 유럽이 미국보다 부의 불평등이 더 높았다.

 

 

– 프랑스 파리 시민들의 포트폴리오 구성, 1872~1912

 

 

– 1900년 만국 박람회 (프랑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https://en.wikipedia.org/wiki/Belle_%C3%89poque

https://en.wikipedia.org/wiki/Second_Industrial_Revolution

https://en.wikipedia.org/wiki/New_Imperialism

네이버 지식백과(파리-혁명과 예술의 도시) : 아름다운 시절 ‘벨에포크(Belle Epoque)’

2020-09-14  [기억할 오늘] ‘벨 에포크’의 상징적 종말

2020-05-25  그 때는 좋았던 시절일까, 좋아 보였던 시절일까

2020-04-02  [김병익 칼럼] ‘아름다운 시절’을 위하여

2020-01-20  가장 아름다운 파리는 언제였을까

https://www.mdc.edu/wolfson/academic/artsletters/art_philosophy/humanities/belleepoque.htm

https://www.aladin.co.kr/shop/ebook/wPreviewViewer.aspx?itemid=131919451

벨 에포크 (1896년 ~ 1914년)
Tagged on: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