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철도 – 1903년

바그다드 철도는 영국과 독일의 지정학적 갈등과 관련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었다는 논쟁이 있다.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뒤 독일은 제국주의적 팽창에 몰두하지만 유럽 한 가운데에 둘러싸여 해운 수송에 접근할 수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독일은 오스만제국과 합의하여 이미 부설되어 있던 베를린-이스탄불의 철로를 바그다드로 연결하는 협약을 맺고 철도 부설권을 얻어낸다. 이 철도를 바스라 항까지 연결하면 독일은 영국이 제패하고 있는 대서양을 거치지 않고도 바로 페르시아 만을 통해 인도양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계획은 중근동 지역에 지배력을 뻗치고 있던 영국과 카프카스 지역의 세력 변동으로 위협을 느낀 러시아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전략적으로 바그다드 철도의 목표는 오스만제국과 독일을 하나로 묶고 수에즈를 위협하고 독일에게 바스라를 통해 동쪽으로가는 지름길을 제공함으로써 영국과 인도의 연결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영국의 3C정책과 독일의 3B정책의 충돌이다.

 

당시에 Morris Jastrow Jr.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영국에서는, 과거에 나폴레옹이 앤트워프(벨기에 안트베르펜)가 대륙 세력의 손아귀에 있는 것은 영국의 심장부를 겨누는 권총과 다름없다고 발언했듯이 독일의 바그다드,페르시아만 지배는 인도를 겨냥한 대포에 다름아니다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위의 세계 지도를 흘깃 보기만 해도 일련의 나라들이 베를린에서 바그다드까지 어떻게 뻗어 있는지 알게 된다.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불가리아, 터키 이런 식으로 늘어서 있다. 오로지 한 곳의 작은 땅덩어리, 슬라브계 세르비아가 문제였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한 세르비아는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 대립의 장소였다. 따라서 독일의 베를린-바그다드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 세르비아의 적절한 통제는 필수적이었다.

 

세르비아는 정말로 우리 동쪽 소유지를 방어하는 최전선이다. 만일 세르비아가 격파되거나 ‘베를린-바그다드’ 체제로 편입된다면 광활하면서도 방어가 견고하지 못한 우리 제국은 곧 동진하는 독일의 충격파를 느끼게 될 것이다.

– 세르비아 군대에 소속되어 있던 영국인 고위 군사고문이었던 라판

 

언젠가 세르비아는 유럽의 두 귀를 부여잡고 온 대륙을 전면전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 작은 나라가 러시아의 사주를 받고 끊임없이 불안을 조성하는 행태에 오스트리아 국민은 분개하고 있다. 유럽은 운이 좋아야만 지금의 위기를 전기로 삼아 전쟁을 모면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 주오스트리아 대사 페어팩스 카트라이트 경이 영국 외무부에 제출한 보고서(1913-01-31)

 

1914년 이전 10년 동안 터키 전쟁, 불가리아 전쟁과 끊임없는 지역 정세 불안을 비롯하여 발칸 반도 전역에서 커다란 소요와 전쟁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한 갈등과 전쟁은 영국 측에 다분히 유리하게 베를린-바그다드 동맹을 약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고,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연결이 완성되는 데 특히 걸림돌이 되었다.

 

쿠웨이트는 1899년 영국의 압력으로 영국-쿠웨이트 조약을 체결하고 영국의 식민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1900년 독일이 사절단을 파견, 쿠웨이트를 바그다드 철도의 종착점으로 하려고 하자, 이에 대항하여 영국은 1904년에 정부 대표를 주재시키는 동시에 1907년에는 영국-쿠웨이트 조약을 개정하여 쿠웨이트를 영국의 보호하에 두었다. 영국은 쿠웨이트를 손에 넣음으로써 베를린-바그다드 철도가 성공적으로 완성될 경우 독일이 궁극적으로는 페르시아 만의 바다와 그 너머까지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다.

 

1898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오스만제국을 직접 방문하고, 이듬해 코니아-모술-바그다드-바스라를 연결하는 철도부설권을 얻었다. 1903년 바그다드 철도회사를 설립하여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건설은 재정적, 기술적 측면에서의 이유로 반복적으로 지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철도는 계획보다 960km가 미완성이었다. 바그다드로 향하는 마지막 구간은 1930년대 후반에 지어졌으며 이스탄불에서 바그다드로가는 첫 번째 기차는 1940년에 출발하였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03

 

현재의 미국-중국 패권 싸움과 비교하면 중국의 ‘일대일로’가 독일의 바그다드 철도와 비슷할까?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거대한 전환

–  칼 폴라니 / 홍기빈 역 / 길 / 2009.06.30

 

또 독일의 동방에 대한 야심을 예로 들어보자. 여기에서도 정치와 금융이 혼합되어 있었지만, 더 큰 중요성을 갖는 것은 정치 쪽이었다. 4반세기에 걸친 위태위태한 언쟁 끝에 독일과 영국은 1914년 6월 바그다드 철도에 대한 포괄적 협정을 체결했다. 어떤 이들은 이 협정이 체결된 시점이 너무 늦어버렸기에 제1차 세계대전으로 몰려가는 흐름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또 어떤 이들은 반대로 이 협정이 체결되었는데도 결국 영국과 독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던 것을 보면 이는 결국 전쟁의 원인이 결코 경제적 팽창주의의 충돌이 아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의 사실 관계는 어느 쪽 주장도 지지해주지 않는다. 이 협정 자체가 사실상 가장 중요한 문제를 빼먹은 채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독일 측 철도는 협정 이후에도 영국 정부의 동의 없이는 바스라(Basra) 항을 넘어서 뻗어나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결국 이 조약으로 양쪽의 경제 구역들이 형성되었지만 그 둘이 팽창함에 따라 서로 정면충돌로 이어지는 사태는 필연적이었고 시간 문제였던 셈이다. 이 와중에 두 강대국은 계속해서 결전의 그날 준비에 매진했고, 그날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빨리 오게 된 것뿐이다.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윌리엄 엥달 / 서미석 옮김 / 길 / 2007.10.25

 

20년이 넘는 동안 유럽 대륙과 바그다드를 잇는 근대적인 철도 건설 문제는 독일-영국 관계에 알력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요인이었다. 당시 바그다드 철도 프로젝트 협상을 책임지고 있던 인물인 카를 헬페리히 도이치은행 총재의 판단으로는 독일의 증강하는 전함 문제를 제외하면 1914년 이전 15년 동안 런던과 베를린 사이에 긴장을 최고조로 불러일으킨 사안이 바로 그 문제였다.

……

8년 동안의 공사 끝에 1896년에는, 경제적으로 황무지에 불과하던 지역에 총연장 1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베를린에서 터키 내륙 깊숙한 아나톨리아 고원의 코니아까지 철길이 뚫렸다. 그것은 토목공학과 건설의 진정한 업적이었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풍요로운 고대 계곡이 현대 운송 인프라의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까지 중동에 건설된 유일한 철도 인프라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것으로서, 모두 시리아나 기타 지역의 중요 항구 도시들을 연결하는 매우 짧은 구간에 불과하여, 내륙의 광대한 지역을 근대 산업화에 개방시키지는 못하였다.

철도 덕분에 콘스탄티노플과 오스만제국은 사상 최초로 근대적인 의미에서 자국의 아시아 내륙 전역과 결정적인 경제적 연결을 이룰 수 있었다. 일단 바그다드와 조금 더 나아가 쿠웨이트까지 연결되기만 한다면 유럽과 인도 아대륙 전체를 가장 저렴하고도 빠르게 연결하는 세계 일류급의 철도망이 될 것이었다.

영국 측에서 보면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당시 세르비아 군대에 소속되어 있던 영국인 고위 군사고문이었던 라판은 이렇게 경고했다. “만일 ‘베를린-바그다드 노선’이 완성된다면 해군력으로 공격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경제적 부를 창출하는 거대한 지역 블록이 독일의 권위하에 결속될 것이다. 이러한 장벽으로 러시아는 서쪽의 우방국인 대영제국과 프랑스로부터 단절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독일과 터키 군대는 이집트의 우리 이권 범위 안에 들어올 것이고 페르시아 만에서부터 쉽사리 접근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인도제국도 위협하게 될 것이다. 알렉산드레타 항구와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면 독일은 곧 지중해에서 막대한 제해력을 쥐게 될 것이다.

라판은 베를린-바그다드 노선을 방해하기 위한 영국의 전략을 넌지시 제안했다.

세계 지도를 흘깃 보기만 해도 일련의 나라들이 베를린에서 바그다드까지 어떻게 뻗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불가리아, 터키 이런 식으로 늘어서 있다. 오로지 한 곳의 작은 땅덩어리만이 길을 차단하고 연속된 국가의 양극단이 서로 연결되는 것을 막고 있다. 그 작은 땅덩어리는 바로 세르비아다. 세르비아는 작은 나라지만 동쪽으로의 관문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독일이 콘스탄티노플 및 살로니카의 큰 항구들과 연결되지 못하게 버티고 있다. …… 세르비아는 정말로 우리 동쪽 소유지를 방어하는 최전선이다. 만일 세르비아가 격파되거나 ‘베를린-바그다드’ 체제로 편입된다면 광활하면서도 방어가 견고하지 못한 우리 제국은 곧 동진하는 독일의 충격파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1914년 이전 10년 동안 터키 전쟁, 불가리아 전쟁과 끊임없는 지역 정세 불안을 비롯하여 발칸 반도 전역에서 커다란 소요와 전쟁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한 갈등과 전쟁은 영국 측에 다분히 유리하게 베를린-바그다드 동맹을 약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고, 라판이 촉구했던 그대로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연결이 완성되는 데 특히 걸림돌이 되었다.

……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1899년 11월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데 이어 영국이 바그다드 프로젝트에 비중 있게 참여하도록 직접 주선하려고 원저성에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만났다. 독일은 알려진 대로 영국이 인도 항로를 지키려고 페르시아 만과 수에즈 운하의 이권을 주장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영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다면 그 프로젝트는 특히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커다란 난관에 봉착할 것이 분명했다. 철도의 마지막 구간은 투입될 예산 규모가 막대하여 설령 도이치은행처럼 큰 은행이라 하더라도 단독으로 재원을 마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 후 15년 동안 영국 측에서는 언제나 독일 측이 쩔쩔매게 최종적인 협정이 성사될 희망의 여지를 남겨두면서 내부적으로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철도 프로젝트를 지연시키고 방해할 궁리를 했다. 이러한 책략은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바그다드 철도를 둘러싼 협상의 마지막 단계에서 영국 여왕이 뽑아 든 비장의 카드는 쿠웨이트 토후와의 동맹이었다. 1901년 쿠웨이트 만으로 향하던 영국 전함들은 토후 무라바크 알사바의 아나사 족이 통제하는 샤트알아랍 수로 바로 아래에 위치한 걸프 항구를 이제부터는 ‘영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하라고 터키 정부에 명령했다.

당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너무 쇠약해져 있던 터키는 영국이 오스만제국의 이 먼 지방을 사실상 점령한 일에 약하게 항의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영국은 쿠웨이트를 손에 넣음으로써 베를린-바그다드 철도가 성공적으로 완성될 경우 독일이 궁극적으로는 페르시아 만의 바다와 그 너머까지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다.

……

1912년, 독일 산업계와 정부는 석유가 육상 운송은 물론 해군 함선을 위해서도 자국의 경제 미래를 책임질 연료임을 깨달았다. \그 당시 독일은 미국의 거대기업 록펠러 스탠더드석유회사의 트러스트에 묶여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스탠더드석유회사의 독일 석유 판매회사가 독일 총 석유 판매량의 91퍼센트를 장악하고 있었다. 도이치은행은 독일 석유 판매회사의 9퍼센트에 해당하는 소액 지분만을 보유하여 결정권이 거의 없었다. 1912년 당시 독일은 독립적이고 안정적인 석유 공급원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지리학자들은 오늘날 이라크로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안에 있는 모술과 바그다드 사이에서 석유를 발견했다.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연결의 마지막 구간으로 계획된 노선은 막대한 석유자원이 매장되어 있다고 추산되는 그 지역을 관통할 것이었다.

 


제국

–  닐 퍼거슨 / 김종원 역 / 민음사 / 2006.11.30

 

터키는 독일 세계 전략의 중심에 서 있었는데, 특히 수도 이스탄불(당시는 콘스탄티노플)이 지중해와 흑해를 가르고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좁은 해협인 보스포루스 양쪽에 걸쳐 있기 때문이었다. 해군력의 시대에 이곳은 세계 전략의 병목 구간 가운데 하나였는데, 특히 러시아의 무역 가운데 많은 양이 흑해 해협을 통해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전시에 적대적인 터키는 러시아에 군수품이 유입되는 것뿐 아니라 인도에 이르는 영국의 제국 통신 노선도 위협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독일군은 1914년 이전에 터키를 동맹국으로 확보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1889년과 1898년 두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다. 1888년 이래 도이치 은행은 이른바 베를린-바그다드 철도에 자금을 조달하는 데 주도적인 역활을 했다. 독일인들은 또한 전문 군사 기술을 제공했다.1883년에서 1896년 사이에 오토만 육군을 정비하기 위해 독일 장군 콜마르 폰 데어 골츠를 채용했다. 1913년에는 또 한 사람의 독일인 오토 리만 폰 산더스가 육군의 감찰감으로 임명되었다.

터키 인들이 마침내 독일 편에서 싸우기로 약속하기 이전인 1914년 7월 30일에도 독일 황제는 이미 특유의 난폭한 언어로 다음 행동을 계획했다.

터키와 인도에 있는 우리 관리들은 …… 전 이슬람 세계를 자극하여 혐오스럽고 거짓말이나 하고 파렴치한 상인 근성의 국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 어쨌든 우리가 피를 흘리고 죽게 된다면 잉글랜드는 인도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1914년 11월 이슬람 수니파의 정신적 지도자인 터키의 술탄은 영국과 동맹국에 대해 성전을 선언함으로써 독일의 선동에 응답했다. 세계적으로 2억 7000만 이슬람교도 가운데 절반이 조금 못되는 수가 영국, 프랑스 또는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이것은 독일의 훌륭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독일군이 원했던 대로, 영국군은 인원과 장비를 서부 전선에서 차출하여 메소포타미아와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전환함으로써 터키의 위협에 대응했다.

 


세계정치론

–  존 베일리스, 스티브 스미스 / 을유문화사 / 2006.03.10

 

통일된 독일의 영토 야심은 곧 분명해졌다. 독일 팽창주의의 확대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계자들은 주변의 시선에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들은 강대국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해외 제국의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여타 강대국들과의 격차를 좁히려 했다. 따라서 제국 논쟁은 1914년 전쟁발발의 중요한 요인이었으며, 전쟁의 기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에 따르면 으뜸의 요인이었다. 물론 영국은 세계 최강의 무역국가라는 자국의 지위가 독일에 의해 위협받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이제 독일과 치열한 해군 경쟁에 몰입하게 되었다. 프랑스 역시 독일의 팽창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20세기 초반, 영토와 시장을 획득하려는 독일의 확고부동한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제정러시아 사이에 예기치 못한 동맹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자신을 침략자로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제국주의 체제의 피해자로 인식했다.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고, 중국에서는 러시아와 일본, 영국이 경쟁하고 있었으며, 라틴아메리카는 미국이 장악했다. 세계시장은 이들 국가 사이에서 그들만의 배타적인 만족을 위해 분할되어 있었다. 따라서 식민지를 획득한다는 것은 독일로서는 위신이나 지위의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적 사활의 문제였다. 다투어야 할 주된 무대는 1906년과 1911년 영국과 프랑스가 모로코를 놓고 충돌했던 북아프리카와, 독일이 베를린과 바그다드 간의 철도를 건설하려 했던 중동아시아였다.

 


이스탄불

–  이희철 / 리수 / 2005.04.07

 

오스만 제국은 어떤 이유로 독일과 동맹 관계를 맺게 되는가? 19세기에 강대국은 중동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이 당시 중동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프랑스는 이미 중동 지역에서 무역 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 지역에 기독교 영향력을 확산시키기 위해 주도권을 발휘하고 있었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후에 인도까지 연결되는 통행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중동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찾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중동을 넘보고 있었다. 중동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강대국 간 경쟁이 과열되자 세력 균형을 위해 우방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하였다. 때마침 19세기 후반에 독일도 강대국 대열에 들어서고, 비스마르크에 의한 동방 정책으로 중동 지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압둘하미드 2세는 중동 지역에 대한 강대국 간 경쟁 무대에 독일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끌어들이려 하였다. 압둘하미드는 독일의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분할하려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맞서 제국을 지켜나가려 하였다. 결국 독일은 오스만 제국을 지지해주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바그다드까지 연결하는 철도 부설권을 따낼 수 있었다.

 


빌헬름 시대 독일의 제국주의

–  정상수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독일학연구소 / 1997

 

독일은 1988/89년 터키의 소아시아 반도에서의 철도 수주권을 획득하였다. 당시 영국은 터키에서의 독일의 등장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환영하였다. 터키제국에서의 러시아의 팽창정책은 독일의 힘을 빌려 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1897년 그리스와의 전쟁 이후에 터키 측에서도 철도를 통한 교통, 통신 체제를 완비함으로써 제국의 와해를 막으려는 시도가 본격화되었고, 소아시아 반도에서의 철도를 페르시아만까지 연장시키려는 계획이 등장하였다. 이 거대한 계획을 추진함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국가는 당시에 독일이었다. 그러나 황제 빌헬름 2세가 1898년 11월 8일 다마스커스 방문에서 독일제국이 3억 이슬람교도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는 선언을 하였을 때, 런던 정부는 터키제국에서의 독일의 야심을 알게 되었고 즉각 경계에 들어갔다. 바그다드 철도 수주는 단순히 독일에게 경제적 측면만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세계 교역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역으로는 유럽과 인도, 나아가서는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항로였다. 물론 당시 해상강국 영국이 자신의 해군력을 바탕으로 이 항로의 (런던-지브롤터-수에즈-홍해-인도) 안정을 지키고 있었다. 1881/82년의 이집트의 합병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19세기말 20세기초 이 항로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강력한 라이벌인 러시아에 의해서였다. 터키제국과 페르시아로의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영국의 인도항로에 대한 커다란 위협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독일제국 역시 1895/97년 세계정책을 추진한 이래로 동아시아와의 무역로 확보를 고려하게 되었고, 1900년 의화단의 난과 연관해서 대규모 해군과 육군의 파견을 통해서 영국의 도움없이는 동아시아에 조속한 시일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이전의 영국의 인도항로가 아닌 새로운 육로를 (베를린-빈-비잔티움-페르시아만) 확보하려 하였다. 따라서 독일제국은 바그다드 철도 수주에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영국은 인도교역로는 영국에 의해서만 통제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바그다드 철도가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터키제국의 공고화에 기본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취했던 국가로 바그다드 계획을 초기부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유럽에서 독일의 강력한 적대국인 프랑스는 경제적 측면에 처음부터 소극적이기는 하였지만 독일과 협업에 들어갔다. 이러한 바그다드 철도 사업을 고찰해 보면 독일내에서도 정부차원에서의 정책과 기업, 은행 차원에서의 해외투자 사이에 협력이, 그러나 동시에 갈등이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정부의 정책인 바그다드 철도 수주에는 독일기업과 은행들도 동의하였지만 과대한 자본투자를 통한 위험을 제거하려 했던 – 물론 자본부족에서 유래하기도 하였지만 – 기업과 은행측은 대외적으로 적대국인 프랑스 자본과 협력하는 태도를 나타내었다.

 


독일제국과 제1차 세계대전의 기원

–  황수현 / 좋은땅 / 2016.06.10

 

독일의 세계정책이 가시화되면서 독일은 영국만이 아니라 러시아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독일은 뒤늦게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돌입하여 1898년 3월, 중국 칭다오(Qingdao)를 조차하면서 동북아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1899년 5월에는 러시아의 제안으로 헤이그(Hague)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서 러시아의 주장과 배치되는 군축 반대 입장을 밝힘으로써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독일과 러시아간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은 독일의 중동 진출이었다. 1898년 10월, 빌헬름 2세는 다마스쿠스(Damascus)와 예루살렘(Jerusalem)을 방문하여 술탄과 3억 명에 달하는 무슬림을 자신의 친구로 생각한다고 공공연히 발언하고, 1899년에는 베를린에서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바그다드(Bagdad)에 이르는 철도 부설권을 확보함으로써 극동에서 중동을 거쳐 동유럽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영토의 전 방향에서 러시아와 이해관계를 다투게 되었다. 독일의 이러한 팽창주의적 외교 행보에 대해 러시아는 물론 영국 정부와 국민들마저 점차 독일에 의구심을 가졌고 독일은 영국과 러시아 양국과 갈등의 골이 점차 깊어지게 되었다.

 


화폐전쟁 2

–  쑹훙빙 / 홍순도 역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05.03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 영국의 해상 봉쇄에 대항한 독일의 전략적 출구

 

1885년 독일의 엔지니어인 고틀리에프 다임러(Gottlieb Daimler)가 석유를 연료로 하는 자동차 엔진을 발명했다. 당시 석탄을 연료로 하는 무겁고 둔탁한 증기기관보다 훨씬 가볍고 효율적인 발명품이었다. 이 첨단 엔진 기술은 기선, 전함을 비롯해 이후에 출현한 항공기에도 이용되었다. 석유 엔진의 보급과 더불어 세계 각국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석유 자원으로 쏠렸다. 당시 영국 본토와 식민지에서는 석유가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고, 각국의 눈길은 모두 아랍 지역의 석유 자원을 향하고 있었다.

영국의 강력한 해상 전력을 당분간 추월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독일은 육지로 눈길을 돌려 새로운 발전 기회를 찾아 나섰다. 19세기 말부터 독일은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에 자금을 투자해 은행 기구를 설립했다. 아나톨리아 반도는 북쪽으로 흑해, 서쪽으로 에게 해, 남쪽으로는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유럽에서 중동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독일의 전략적 목표는 명확했다. 베를린에서 바그다드에 이르는 철도(이보다 앞서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운행하는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건설되었음)를 건설하여 독일의 강력한 산업 생산 능력과 중동 지역의 풍부한 원자재, 석유, 식량 및 잠재 시장을 연결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계획대로 된다면 독일은 경제적으로 중부 유럽, 발칸 및 중동 전 지역의 산업 생산과 원자재를 완벽하게 통합하고, 정치적으로는 서아시아와 남아시아까지 영향력을 확대해 페르시아 만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해상 통로를 개척하는 것이 가능했다.

베를린-바그다드 철도의 가장 중요한 점은 강력한 영국 해군력을 피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통제하는 수에즈 운하를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철도는 강력한 독일 육군의 보호 하에 국가 안전의 전략적 대동맥이 될 수 있었다. 1900년 독일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 은행과 도이체 방크는 공동으로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건설 공사를 위한 거액의 융자를 제공했다.

영국은 독일의 전략적 의도를 눈치 채고 크게 긴장했다. 이로써 양국의 팽팽한 신경전은 격화 일로로 치달았다.

1907년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 전 영국 수상은 미국 외교관 헨리 화이트에게 자신의 걱정거리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독일이 더 많은 운수 및 물류 시스템을 건설해 영국의 무역을 완전히 빼앗기 전에 선전포고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영국은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헨리 화이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독일과의 무역 경쟁에서 이기려면 수상을 비롯한 영국인들이 더 노력하면 될 것 아닙니까?”

아서 밸푸어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경쟁의 대가로 영국인의 생활수준은 지금보다 떨어지게 될 겁니다. 상대적으로 전쟁이 훨씬 더 간단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자질구레하게 시시비비를 가리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영국이 잡고 있는 패권이 걸린 문제입니다.”

영국과 비슷한 입장이었던 프랑스와 러시아도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건설에 극력 반대하며 철도 건설 저지를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영국은 “독일의 철도 건설은 터키를 통제하고 탈취하려는 음모가 분명하다.”라는 말을 퍼뜨려 오스만 제국까지 독일에 반대하도록 만들었다. 프랑스 정부는 25억 프랑의 투자 수익을 포기하면서까지 파리 증권거래소에서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채권을 거래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시켜 버렸다.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건설 계획은 독일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해상 봉쇄에 대항해 고안해낸 전략이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을 불러 일으킨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관련 그림>

 

– 3C정책과 3B정책

 

 

– 1896년에 총연장 1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베를린에서 터키 내륙 깊숙한 아나톨리아 고원의 코니아까지 철길이 뚫렸다. 다음의 목표는 바그다드였다.(빨간색)

 

 

– 1903년 발행된 바그다드 철도회사의 주식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Berlin%E2%80%93Baghdad_railway

The Bagdad Railway, 1899-1914. (mtholyoke.edu)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3B정책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쿠웨이트의 역사

2018-10-23  [김지석의 화·들·짝] ‘일대일로’라는 멀고 험한 길

 

바그다드 철도 – 19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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