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보라(Tambora) 산은 인도네시아 숨바와(Sumbawa) 섬에 있는 화산으로, 1815년의 화산 폭발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화산 폭발 중 하나였다. 화산 폭발 지수인 VEI(Volcanic Explosivity Index) 7 규모의 분출로 160–213 입방 킬로미터의 물질을 대기로 방출했으며, 역사상 가장 최근에 확인된 VEI-7 분출이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815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의 일부였던 탐보라 화산 폭발과 관련 직접 피해로 숨진 주민만 7만여 명에 달하고, 화산 폭발로 산의 윗부분 1,450m가 날아가 탐보라 산의 높이가 4,300m에서 2,850m로 낮아졌다. 화산전문가들은 탐보라 화산 폭발의 위력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던 원자폭탄 17만 개가 동시에 폭발한 것과 맞먹는다고 추정했다.
탐보라 산은 인도네시아 군도의 순다(Sunda) 화산호(火山弧)를 따라 형성된 두터운 화산 지대에 속해 있다. 순다 화산호는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데, 이는 훨씬 거대한 불의 고리(Ring of Fire, 환태평양조산대)의 일부다.
탐보라 산은 1812년부터 화산 활동의 징조가 보였고, 1815년 4월 5일의 분화를 시작으로 1815년 4월 10일에 격렬한 분화의 절정에 이르렀다. 열대지역의 화산에서 폭발로 퍼져나온 재는 전체 위도 상공으로 퍼져갔고 지구 기상시스템이 서서히 마비되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폭발이었으나 당시 지리학계에도 보고되지 않았고 나폴레옹 전쟁 등 격변의 시대사에 묻혀 세간의 관심에선 방치돼 있던 사건이다. 세계사 책에 서술되는 대신 날씨 이야기로, 그것도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로 남겨졌다. “여름을 잃어버린 해(Year Without a Summer)”라는 바로 그 이야기이다.
-1816년 근처 여름 온도가 낮다.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98-017-07969-0/figures/1)
화산이 폭발할 때 공기 중으로 엄청난 양의 입자들과 가스들이 방출된다. 대형 화산분출은 이산화황 가스를 상층대기(성층권)에 주입하여 그것이 물과 반응해 황산구름을 형성함으로써 기후에 영향을 준다. 이 구름은 태양광선을 차단하여 우주로 돌려보내기 때문에 에너지가 지표에 도달하지 못해 하층대기와 지표가 냉각된다.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폭발의 경우, 이산화황이 연직 44km까지 도달되어 성층권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로 인해 1815년 전 세계 연평균 온도가 5℃ 하강하고, 여름철(6월) 북미지역에 50cm 폭설 등 이상기후가 발생하였으며, 1816년에는 평균 지구 온도를 0.4–0.7 °C(0.7–1 °F) 낮추는 심각한 기후 이상으로 인해 여름이 없는 해로 알려져 있다. 1816년 유럽의 여름 기온은 1766년에서 2000년 사이의 기록상 가장 추웠다. 이로 인해 북반구 전역에서 농업의 실패로 심각한 식량 부족이 발생했다. 역사학자 John D. Post는 이것을 “서구 세계의 마지막 생존 위기(The Last Great Subsistence Crisis in the Western World)”라고 불렀다. 1816년의 기후 이상은 대부분의 뉴잉글랜드, 대서양 캐나다 및 서유럽 일부 지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탐보라가 전 세계적 기후 패턴에 과격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부분적으로는 탐보라 폭발 당시 이미 불안정했던 기후 조건의 탓도 없지 않았다. 1808년 남태평양(?) 열대지방의 큰 화산이 폭발한 적이 있다. 이 폭발에서 비롯된 기온 저하가 1815년 탐보라의 거대한 폭발로 더욱 극대화되었고, 이로써 1810년대를 통틀어 극단적인 화산 기후가 확정되어버렸다.
※ https://en.wikipedia.org/wiki/1808_mystery_eruption
많은 세계사적 사건들에 크게든 작게든 탐보라 화산 폭발 사건과 관련된 1810년대의 극단적인 기후가 영향을 미쳤다. 길런 다시 우드(Gillen Wood)는 <세계사를 바꾼 화산 탐보라>에서 19세기 초 아일랜드를 휩쓸어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대기근과 전염병, 1830년대 전 세계를 대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콜레라 발생, 중국 운남성이 20세기 초 세계 마약의 80%를 공급한 중국의 핵심적인 아편 산지로 부상한 이유, 영국 근대문학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공중보건과 복지국가 이념의 탄생 등, 이 책에서는 전 지구를 휩쓸었던 하나의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 패배도 탐보라가 초래한 폭우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https://www.imperial.ac.uk/news/187828/napoleons-defeat-waterloo-caused-part-indonesian/)
조선에서는 순조 16년(1816) 흉작의 기록이 보인다. 순조 14년(1814)의 호구 조사는 790만명이었으나 순조 16년에는 659만명으로 격감했다. 130만명이 줄어든 것이다. 이 모두가 아사했을 리는 없지만 흉년과 기근으로 인해 화전민이나 도적이 되는 등으로 호구 조사에서 이탈한 듯하다. 걷혀야 할 조세도 쌀은 25,000석이 모자라고 목면도 300동이 부족했다. 세입은 부족했지만 경상도에 구호미 8,000섬을 긴급 방출하는 등 이유로 세출은 오히려 늘어나 조선 후기 재정 붕괴를 가속화했다
화산 폭발 지수(VEI) 7의 역사상 사례는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1465년 미확인(쿠와에? / 1452~1453 ?), 1257년 인도네시아 사말라스(Samalas) 화산, 946년 백두산, 120-150년 즈음 뉴질랜드의 타우포 화산, 기원전 1610년 즈음 에게해 미노스(테라) 화산의 분화가 있다.
※ 화산 폭발 지수(VEI) 6 이상 조회 : http://yellow.kr/vei.jsp
세계사를 바꾼 화산 탐보라
– 길런 다시 우드 / 류형식 역 / 소와당 / 2017.04.25
탐보라로 인한 기후 변동은 가혹했던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시대적 분쟁이라는 그늘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사실 탐보라는 19세기 초 세계를 강타한 화산의 스텔스 폭격이었다. 캘커타(Calcutta)에서는 구역질나는 콜레라를 일으켰고, 중국의 운남(雲南)이나 영국의 티론(Tyrone)에서는 농부의 아이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희망을 찾는 탐험가들은 북극해 북서항로를 따라갔고, 미국 볼티모어의 부동산 투자자들은 파산에 이르렀다. 전 세계의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화산이 이끄는 대로 운명의 길을 따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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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보라 화산 폭발 이후 3년 동안,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곧 배고픔을 의미했다. 뉴잉글랜드에서는 1816년을 “여름을 잃어버린 해” 혹은 “1800년대 얼어 죽을 뻔했던 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독일에서는 1817년을 “거지의 해”라고 했다. 전 세계에서 가뭄과 서리 때문에 수확을 망쳐버렸고, 아니면 홍수가 농작물을 휩쓸어버렸다. 미국의 버몬트 주에서는 고슴도치를 잡아먹고 쐐기풀을 삶아 먹었으며, 중국 운남성에서는 흙을 핥아 먹었다. 여름에 프랑스를 여행하던 어느 여행자는 거지 떼가 운집해 있는 모습을 보고 군대가 행군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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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유럽 대륙에서 수만 명의 제대 군인들은 식구를 먹여 살릴 능력이 없었다. 그들의 절망은 광장에서 폭동으로 표출되었고,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화로 이어졌다. 유럽 각국의 정부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혁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비극이란 누군가에는 축복이기 마련이다. 지긋지긋한 기근은 1818년 풍년이 든 후에야 끝났다. 그 3년 동안 러시아와 미국 서부의 농부들은 전례 없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들은 대서양 무역에서 절망에 빠진 구매자들에게 천정부지로 치솟은 가격에 곡물을 팔아치웠다. 그들을 제외하고 지구상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그때가 “최악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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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보라가 전 세계적 기후 패턴에 과격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부분적으로는 탐보라 폭발 당시 이미 불안정했던 기후 조건의 탓도 없지 않았다. 6년 전인 1809년 열대지방의 주요 화산이 폭발한 적이 있다. 이 폭발에서 비롯된 기온 저하가 1815년 탐보라의 거대한 폭발로 더욱 극대화되었고, 이로써 1810년대를 통틀어 극단적인 화산 기후가 확정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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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7년 벵골 지역에서 풍토병이 유례없이 창궐했던 이유는 새로운 변종 콜레라가 생겨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변종에 대해서는 원주민들의 기존 면역 체계가 소용이 없었다. 신종 콜레라는 일단 벵골 지역에서 창궐한 뒤 온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염되며 점점 강화되던 콜레라균은 어느 순간 전염성이 극도로 강화된 초강력 전염병이 되었다. 따라서 기본적인 전염의 통로는 빈번하게 왕래하는 사람들이었다. 군인, 순례자, 이동을 해야 하는 상인 등이 콜레라에 감염된 채로 인도 전역으로 흩어져 다니면서 항체가 전혀 없는 공동체로 들어간 때가 1817년이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이 사람들은 인도뿐만 아니라 글로벌 무역망으로도 들어갔다. 남동쪽으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동아시아, 또한 북서쪽으로는 무역로를 따라 아라비아를 거쳐 러시아와 유럽,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까지 콜레라가 전파되었다. 결국 19세기에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전 세계에서 수천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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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가 기본적으로 미스터리였고, 19세기 수준에서는 치료를 시도할수록 병만 키울 뿐이었다.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은 수많은 가설, 수많은 명령, 수많은 권위 있는 이론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콜레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례 보고가 이루어진 질병이 되었고, 전문 의학적인 글들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연구의 규모나 대중적 관심사로 보자면 20세기에 그에 비견할 만한 질병은 오직 에이즈(AIDS)뿐이었다. 콜레라와 에이즈는 문화적으로 비슷한 양상을 띠었지만, 콜레라는 근대적 공중 보건 체계에서 접근한 최초의 질병으로, 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보건 행정 체계가 구축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햄린(Christopher Hamlin)이 말했던 것처럼, 콜레라는 “19세기의 양심을 움직였다.” 왜냐하면 당시 유럽에서 새롭게 발달한 도시 빈민층에 처음으로 주목한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과 같은 전문화된 공중 보건 개념이 그때 처음 나타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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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탐보라 기후변화가 만들어낸 괴물 전염병 콜레라가 19세기 역사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콜레라는 그 자체로 “인류 진보에 대한 모욕”이었다. 콜레라는 당시 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을 주도하던 부르주아에 대한 신뢰를 깨버렸다. 새로운 세계시장의 약점이 질병에 노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콜레라가 창궐한 슬럼 지역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1831~1832년, 1848년, 1871년 등 주요 혁명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시기를 보면 콜레라와 계급투쟁의 연관성을 짐작할 수 있다. 1800년대 중반부터 탐보라가 주도했던 콜레라는 14세기 흑사병에 버금가는 재앙을 몰고 왔다. 흑사병 당시에도 민중 봉기와 반란이 빈번했었다. 콜레라는 빅토리아 시대 최악의 악몽이었다. 콜레라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굴욕적인 방식으로 배설기관이 작동하며, 주로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기 때문에, 근대사회가 번영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비롭지 못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노예제도 폐지 논쟁으로 인종 문제가 정치적 주제로 부각시켰다. 그래서 노예뿐만 아니라 보건 문제가 19세기의 가장 주요한 사회정의 문제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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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중국의 해남도(海南島, 하이난 섬)는 위도상 열대지방에 속하지만, 그럼에도 1815년 여름에 눈이 내렸고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 때문에 숲의 식물 절반이 죽어버렸다. 중국 동부 지역에서는 탐보라 시기 지속적 저온으로 흉년이 들어 고통을 겪었다. 산서(山西, 산시) 지역에서는 1817년 여름에 서리가 내려 곡물이 죽었고, 이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해야 했다. 이는 같은 시기 유럽과 뉴잉글랜드에서 발생했던 대규모 난민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지역은 아마 운남(雲南, 윈난)일 것이다. 기록적인 저온 상태가 지속되면서 내리 3년에 걸쳐 농사를 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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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의 탐보라 이야기에서는 중국 아편의 역사가 훨씬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 제국 아편 생산의 독보적인 중심지가 된 곳은 바로 남서부 국경 지방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오래전부터 영국인의 손을 거쳐 들어오는 인도의 아편에 대해서 관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편 무역을 남부 지방의 항구로 제한하려고 했다. 그러나 탐보라가 휩쓸고 간 뒤의 기근이 끝나고 불과 2년이 지난 1820년부터, 갑자기 멀리 운남 지방에서 아편 생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보고가 북경의 궁정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해에 운남에서 양귀비 재배 금지가 제도화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남서부 마약 산업을 억제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연이어 집행되었지만 그리 강력하지는 못했다. 아편 거래량은 상당히 늘어났고, 홍수(紅水) 강을 따라 남쪽 베트남까지 아편을 운송하는 상인들이 무수히 많았다. 이곳을 거쳐 아편은 다시 바다를 통해 홍콩과 광동 혹은 동쪽의 중국 내륙으로 유입되었다. 어느 누구도 이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1840년 당시 제1차 아편전쟁의 와중에 운남 지역은 중국 내 아편 생산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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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1815~1818년 탐보라 시기 몇 년에 걸쳐 식량 부족을 겪은 운남의 농부들은 쌀을 간절히 필요로 했지만 벼를 기르지도 못하고 돈을 주고 쌀을 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환경 요인 때문에 그들은 일시적 식량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편 생산을 시작했고, 이후 1810년대 말 운남 지방에서 양귀비 재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콩과 보리를 재배하던 산간의 밭이 먼저 양귀비 재배지로 바뀌었다.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계곡 안 논에서도 양귀비를 재배했고, 그 지방에서 경작 가능한 땅은 온통 양귀비로 뒤덮였다. 한 세기가 지난 뒤 운남에서는 양귀비 말고는 농작물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쌀은 대부분 동남아시아로부터 수입을 했다. 당시 몽족 같은 운남 지방의 고산족이 남쪽의 메콩 델타 지역으로 이주했고, 오늘날 버마, 태국, 라오스의 산간 지방으로도 들어갔다. 예전에 재배 경험이 있는 농민의 후손으로서 그들은 양귀비 씨앗과 재배 기술을 가지고 이동했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골든 트라이앵글” 고산지대에서 새로운 양귀비 재배의 세계적 중심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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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그리고 때때로 찾아오던 기근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아일랜드 역사에서 그리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1815~1818년의 절대 빈곤은 특히 엄청난 충격으로 느껴졌다. 그 직전 나폴레옹 전쟁 시기 아일랜드는 상대적으로 번영했고 인구도 불어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18세기 후기에 생필품 가격이 전반적으로 오름세를 기록했고, 영국의 산업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아일랜드 생산 물품에 대한 수요도 그만큼 증가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벌어지자 영국은 무역 제한이 불가피했고, 아일랜드산 곡물이나 리넨 천이 높은 가격에 낙찰되었다. 아일랜드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고 인구도 꾸준히 늘어났다. 그러나 1815년 중반에 이르러 서로 얽힐 만한 관계가 전혀 없는 별개의 두 사건, 즉 4월의 탐보라 화산 폭발과 뒤이어 5월에 닥친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쟁 패배가 겹치면서 취약한 아일랜드의 성장 기반을 파괴해버렸다. 기근의 역사를 연구하는 어떤 역사학자의 말처럼, “1815년 이후 곡물 가격의 하락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허약하기 짝이 없던 아일랜드 경제에 마침표를 찍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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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기억 속에서도, 학술적인 논의에서도 현대 아일랜드 역사의 시작은 1845~1849년의 기근이다. 당시 아일랜드 전체적으로 막대한 인구 감소의 충격을 겪었고, 지금도 완전히 회복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감자마름병이 해마다 이어져서 100만 명이 죽었고, 또 100만 명은 이민을 갔다.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이 역사 때문에 1840년대 이전의 사건들은 “기근 이전의 아일랜드”라고 하는 어렴풋한 안개 속에 묻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탐보라 시기 기록들이 증언하듯이, 그때의 재난도 못지않았다. 기간은 비록 상대적으로 짧았지만, 1816~1818년 아일랜드의 많은 지역에서 처음으로 주식인 감자 흉년을 겪었다. 대규모의 기근, 사회적 붕괴, 이후 이어지는 참혹한 상황으로 보자면 탐보라 시기는 한 세대가 채 지나지 않아서 곧 들이닥칠 재앙, 이후 아일랜드를 완전히 바꾸어놓게 될 악몽의 전주곡, 곧 “검은 예언자”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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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보라 폭발은 이처럼 단순히 뉴잉글랜드에서 여름 한 철이 사라지는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대서양 지역에서 곡물 가격이 짧은 시간 동안 급격하게 요동치는 바람에, 1815~1818년 탐보라 기후는 미국의 주요 경기 침체를 초래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818년 유럽 시장에서 미국산 상품의 수요가 무너진 데다 통화위기까지 겹치자, 미국 경제의 모든 부문이 마비되어버렸고, 영국과의 독립전쟁 이후 이른바 호감의 시대(era of good feeling)도 갑작스레 막을 내렸다. 1819~1822년 무너진 금융 부문의 규모가 1930년대 대공황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는 공화국이 성립된 뒤 처음으로 겪는 경제공황이었고, 여러 측면에서 19세기 가장 어려웠던 국가적 경제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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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탐보라 화산 폭발은 용의 꼬리처럼 기나긴 여파를 낳았다. 탐보라는 전 지구적 기상 체계를 파괴했던 지질학적 현상으로서, 셰익스피어 비극에 버금가는 수많은 비극을 초래했다. 예를 들면 대륙을 휩쓴 기근, 콜레라의 세계적 전염, 중국 아편 무역의 기하급수적 증대, 미국 최초의 경제공황 등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탐보라 덕분에 인류의 발전을 가져온 이야기도 많이 있다. 그중에서 무엇보다 빙하기 이론의 본격적 성립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도 언급했던 바이다. 북극 연구와 항해의 전성기(수많은 희생자에도 불구하고), 농학과 기상학의 비약적 발전(최초의 기상도 출현), 근대적 자유주의 국가 이념의 맹아 출현(위기가 닥쳤을 때 국가가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 등이다.
기후의 문화사
– 볼프강 베링어 / 안병옥,이은선 역 / 공감IN / 2010.09.10
지난 1만년 동안 가장 강력했던 화산폭발로 간주되는 탐보라 화산의 분출은 화산폭발에 의한 지구냉각화의 가장 흥미로운 사례에 속할 것이다. 1815년 4월 10/11일에 있었던 탐보라 화산폭발은 몇 년동안 전 세계의 온도를 3~4℃가량 떨어뜨렸다. 그 결과 초래된 지구냉각화를 우리는 탐보라-한파라고 부른다. 강력한 폭발에 따라 대량의 재와 에어로졸이 성층권에 도달했고, 화산분출물은 몇 달에 걸쳐 지구의 다양한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1816년은 북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여름이 사라졌던 해로 알려져 있다. 탐보라 화산이 폭발하면서 하늘에서는 이상 기후현상이 관찰되고 아이슬란드에서는 태양이 빛을 잃었다. 대다수 유럽국가에서는 기근이 들어 대규모 이주를 촉발했으며, 미국에서는 흉작이 들고 인도에서는 흉작과 전염병이 동시에 발생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가뭄이 지속되고, 샤카(Shaka, 1789~1828)가 지배했던 줄루왕국과 아프리카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극단적인 마녀 사냥이 횡행했다. 유럽과 미국의 위기대응방식은 오늘날 서양문화의 전형이랄 수 있는 기술관료적이고 행정적인 것이었다. 독일 영토의 정부와 관청들은 굶주린 대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들은 1819년 반유대 소요사태였던 헵-헵-폭동의 예에서처럼 소요와 위법행위를 군대의 힘으로 진압했다.
산업시대 이전의 빈곤에 대해서는 기후사의 관점에서 다시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비농업 하위시민계층의 형성은, 전통적이고 기후종속적인 흉작의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과 온갖 혁명전쟁의 경험을 잊지 않은 유럽의 정치인들은 소요사태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영국의 의회주의와 인권선언,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미국의 독립, 프랑스 대혁명, 1814년 프랑스 헌법 제정 등을 거치면서, 중부 유럽의 시민계급은 절대군주제로의 복고를 거부했다. 탐보라 한파의 결과, 기근이 촉발했던 소요사태들은 바덴, 바이에른, 뷔어템베르크와 같은 소국(小國) 내각정부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반대파 개혁세력들에게 추진력을 불어넣었다. 따라서 1818년과 1820년 사이에 의회의 동의를 얻어 헌법을 제정했던 이른바 초기 입헌주의의 개혁노력은 탐보라 한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1330년대와 1440년대의 기근기에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대흑사병이 발생했듯이 탐보라 한파 역시 전염병을 동반했다. 그것은 콜레라였다. 이 전염병은 비브리오 콜레라 박테리아에 의해 유발되며, 탈수와 함께 심한 설사를 일으킨다. 콜레라는 인도대륙에서도 창궐했는데, 콜레라는 인더스강의 삼각주에서는 이미 풍토병으로 알려진지 오래였다. 탐보라 한파가 불어 닥친 후 콜레라는 러시아를 거쳐 당시까지 이 전염병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유럽까지 확산되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콜레라 창궐에 기여했던 것은 빠른 도시화와 인도의 대도시들처럼 나빴던 하층민들의 위생조전이었다. 콜레라 병원체는 장내 균총(腸內 菌叢)에 자리 잡기 때문에 특히 위생적인 환경의 유지가 중요하다. 식수공급과 폐수처리에서의 위생부족, 그리고 빈곤상태와 부실한 영양상태도 콜레라 발병의 원인이 된다.
콜레라 세계적 유행
– History of cholera – Wikipedia
세계적인 대유행은 1817년에 시작된다. 이 해 캘커타에 생긴 유행성 콜레라는 아시아 전체로 확산되었으며, 아프리카에도 퍼져서 1823년까지 계속되었다. 일부는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1826년부터 1837년까지 크게 유행하여 아시아,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유럽과 남북 아메리카에 확산된 전 세계적인 규모였다.
역사적으로 콜레라 대유행은 7번 있었고 그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세 번째였으며 그 결과 영국에서만 23,000명이 사망했습니다. 1차와 2차 팬데믹의 확산이 더 단계적이었지만, 3차 팬데믹의 심각성은 지역 재발과 새로운 수입의 결과로 더 많은 소강과 재발을 초래했습니다.
◎ 1차 (1817–1824) : 1817–1824 cholera pandemic – Wikipedia
◎ 2차 (1826–1837) : 1826–1837 cholera pandemic – Wikipedia
◎ 3차 (1846–1860) : 1846–1860 cholera pandemic – Wikipedia
3차 콜레라 전염병은 19세기 인도에서 시작한 콜레라의 세번째 주요 발병으로, 국경을 넘어서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다. 러시아에서는 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콜레라로 사망했다. 이 전염병은 19세기 전염병 중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인식된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및 북미 지역에서 높은 사망률을 보였다. 최악의 해로 여겨지는 1854년에 23,000명이 영국에서 사망했다.
1854년 런던의 가난한 지역에서 의사로 일하는 존 스노(John Snow)는 오염된 물이 질병의 전염 수단임을 확인했다. 1854년 브로드 스트리트 콜레라가 발생한 후, 그는 런던의 소호 지역에서 콜레라 사태를 연구했다. 한 지역의 수도 펌프 근처의 사례를 지속적으로 기록했다. 자신의 주장을 확신하기 위해서 공무원들에게 물 펌프의 손잡이를 제거하도록 설득해서 오염된 물을 마시지 않도록 조정하였고, 콜레라는 즉시 줄어들었다. 그의 이론은 전염병 통제에 큰 도움을 주었다. 존 스노는 1849년 콜레라 발생을 방지하기 위한 런던 역학 협회의 창립인이었으며, 역학의 아버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역사저널 그날 8: 순조에서 순종까지
–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 민음사 / 2017.01.13
그날: 그래서 성군은 하늘이 내린다고 하잖아요. 이 당시면 자연재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을 텐데 말이죠. 이런 날씨가 과연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김문기 교수님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순조 때 수재와 한재 가 특별히 심했었나요?
김문기: 1810년대는 지난 600년을 통틀어서 여름이 가장 서늘했던 시기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옛 기후에 관한 최근의 연구에서도 19세기 초반의 조선에서 이상 저온 현상이 현저했음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순조 때는 모내기해야 할 봄에 가뭄이 들거나, 농작물이 한참 자라야 할 시기에 홍수가 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토지를 벗어난 굶주린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면서 전국적으로 불안이 야기되었습니다. 기근의 영향이 보여 주는 극단적인 형태는 민란입니다. 순조가 재위했던 기간은 이른바 민란의 시대로 접어드는 시작점이었고, 그 배경에는 기근이 있었습니다.
……
김문기: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이 행해졌던 것이 바로 기우제입니다. 순조 때도 가뭄이 심했던 1809년에는 아홉 차례, 1814년에는 열 차례, 그리고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1811년에는 무려 열네 차례나 행해졌습니다.
……
최태성: 기후변화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당시 다른 나라에는 또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요?
김문기: 세계적으로도 1815년에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이 폭발하면서 흐릿한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이 기간에 유럽과 아메리카에서는 한여름에 눈과 서리가 내렸고,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물가는 폭등하고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전염병이 유행했습니다. 이런 환경적 위기 속에서 유럽은 석탄이라는 새로운 에너지를 이용하여 전근대라는 터널을 헤쳐 나갈 수 있었는데, 동아시아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기후변화에 인간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때 기후는 결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역사에서 기후의 영향력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대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문명의 붕괴
– 제레드 다이아몬드 / 민음사 / 2017.01.13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요인은 기후 변화이다. 인간으로 인해 야기된 지구 온난화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기후는 점점 더워지거나 추워질 수 있고, 습해지거나 건조해질 수 있다. 하여간 인간의 행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연력의 변화 때문에 기후는 몇 달, 혹은 몇 년을 주기로 변덕을 부릴 수 있다. 태양열의 온도 변화, 화산재를 대기에 뿜어내는 화산 폭발, 지축과 궤도의 변화, 지구 표면을 덮은 육지와 바다의 분포 변화 등에 따라서도 기후는 변한다. 자연적인 기후 변화의 사례에서 흔히 언급되는 예는 200만 년 전에 시작된 빙하기, 정확히 말해서 기원후 1400년부터 1800년까지 계속된 소빙기(Little Ice Age)에 형성된 얼음판의 이동, 그리고 1815년 4월 5일 인도네시아의 탐보라 화산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 후에 찾아온 저온 현상이다. 탐보라 화산의 폭발로 엄청난 화산재가 상층 대기로 치솟아, 지표에 이르는 햇살의 양이 크게 줄어들면서 저온 현상이 닥쳤다. 그로 인해 1816년(‘여름을 잃은 해’)의 여름에 곡물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면서 북아메리카와 유럽까지 기아로 몸살을 앓았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짧았고, 오늘날처럼 문자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과거 사회에서 기후 변화는 훨씬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많은 지역에서 기후는 연간 단위가 아니라 수십 년의 주기로 변하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예컨대 강우량이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평균보다 많다가도 가뭄이 반세기 동안 계속되는 경우가 있었다. 선사 시대의 인간 사회에서, 부모의 출생에서 자식의 출생까지의 평균 햇수는 수십 년에 불과했다. 따라서 수십 년간 계속되던 습한 기후가 끝날 쯤에는 그 전에 닥친 건조한 기후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좋은 기후가 계속되는 수십 년 동안에 생산이 늘고 인구가 증가하는 경향을 띤다. 그런 기후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과거의 경험을 깨끗이 망각하고 사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시기가 끝나면 사회는 늘어난 인구로 몸살을 앓고, 새로운 기후에 적합하지 않은 습성을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 이런 모든 점들을 고려할 때 과거의 사회들은 기후 변화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관련 그림>
– 탐보라 화산의 위치
– 1815년 탐보라 폭발 전과 후
– 탐보라 화산재 두께
탐보라의 화산 구름이 떨어져 쌓인 화산재의 두께를 보여주는 지도.(플리니식 분출은 수직으로 솟아오르기 때문에 화산재가 쌓이는 점위가 상대적으로 더 좁다) 무역풍에 의해 화산재는 북쪽과 서쪽으로 술라웨시 섬과 보르네오 섬까지 1,300킬로미터나 퍼져 나갔다. 1815년 4월 10일의 폭발음은 멀리서도 두 차례나 들렸다.
– 에든버러 강풍 일수
그래프에서 알 수 있듯이, 에든버러에서 측정한 강풍 일수는 탐보라 폭발 이후 급증했다. 두 번째로 그래프가 치솟은 지점은 1883년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 이후 기상이 불안정할 때이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1815 eruption of Mount Tambora – Wikipedia
Year Without a Summer – Wikipedia
History of cholera – Wikipedia
https://earth.org/data_visualization/pandemic-map-chol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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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0 역사 기록 이래 최대 규모의 화산폭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