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체제 위기 (1968년 ~ 1973년)

미국이 초강대국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은 달러, 석유, 식량 등에 대한 패권과 이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군사력이다. 특히 기축통화인 달러에 대한 패권은 그 중 핵심이라 할 수 있고 달러의 가치가 계속 하락하여 어려움을 겪으면 금융위기. 국제적인 혼란이나 전쟁을 통해 이를 완화하고 있는 것을 역사적인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장기 20세기』에서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는 1968년과 1973년 사이 세 개의 영역에서 미국체제의 위기 발생을 말했다.

 

미국체제의 위기가 도래했음을 알린 것은 1968년과 1973년 사이 서로 구분되면서도 밀접하게 연관된 세 개의 영역이었다. 군사적으로, 미국은 베트남에서 훨씬 더 심각한 곤경에 처했다. 금융적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브레턴우즈에서 수립된 세계화폐의 생산 및 조절 양식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나아가 그 유지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미국 정부의 반공십자군은 국내와 해외 모두에게 정당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위기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1973년에는 모든 전선에서 미국 정부가 퇴각하였다.

 

헤게모니 교체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아리기는 헤게모니의 부침을 ‘실물적 팽창’과 ‘금융적 팽창’ 두 국면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새로운 헤게모니의 경합국은 새로운 축적체제의 우위를 바탕으로 세계자본주의의 새로운 축적의 중심으로 부각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처럼 생산의 새로운 집적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가치생산이 늘어나는 실물적 팽창 국면이 개시되고 이것이 세계경제의 새로운 팽창을 주도한다. 국가간체계 또한 헤게모니 국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질서로 재편되면서 적어도 중심부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안정적 구도가 유지된다. 그러나 일정 시기가 지난 후 실물적 팽창은 한계에 부딪히고 이윤율은 하락하게 된다. 헤게모니 체계의 정치·사회적 유지비용이 증가하고 후발 헤게모니 경합 국가들이 저비용의 우위를 기반으로 헤게모니 국가의 축적체제를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헤게모니 국가의 생산비용 우위의 토대는 약화된다. 이윤율이 하락하여 이윤율과 이자율의 역전이 발생하는 지점에 도달하면 방향은 역전되어 물질적 팽창은 중단되고 금융적 팽창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미국이 실물적 팽창에서 금융적 팽창으로의 교체가 발생한 것은 결정적 시기인 1968~1973년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이른바 유로달러 또는 유로통화시장의 예치금이 급격히 늘어나, 그 후 20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6년의 시기에, 실물적 팽창 국면 전체에 힘을 발휘한 바 있던 주요 국가 통화들과 미국 달러 사이의, 그리고 미국 달러와 금 사이의 고정비율체계가 폐기되고 신축적 환율체계 또는 변동환율체계 – 1971년 8월 15일 닉슨쇼크라 불리는 금과 달러의 교환을 정지 – 가 등장하였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막을 내린 것이다.

 

우리는 1970년대에 화폐 위기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결국 미국 정부는 사적 고도금융과 대립하는 뉴딜의 전통을 포기하고, 대신 전지구적 권력투쟁에서 상석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가용한 수단을 활용해 사적 고도금융의 지원을 획득하려 노력할 시기가 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후 발생하는 세계사적인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약소국, 저개발국가에서 성공한 국가는 한국과 대만 정도이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참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 관련글

– 베트남전쟁 (1946년 ~ 1975년) – 동아시아 30년 전쟁 : http://yellow.kr/blog/?p=1035
– 자본주의 황금기 (1950년 ~ 1973년) : http://yellow.kr/blog/?p=984
– 닉슨, 달러-금 태환 정지 선언 – 1971년 : http://yellow.kr/blog/?p=1106

 

당시의 관련된 연표도 정리해 보았다.

– 1968년 혁명 : 월러스틴은 1968년 혁명을 1848년 혁명(http://yellow.kr/blog/?p=2535) 이후 다시 나타난 세계혁명으로 규정했다.

– 1969년 7월 25일 : 닉슨 독트린 발표, 베트남에서 미군 철수 시작

– 1970년 8월 12일 : 모스크바 조약(유럽의 데탕트 시작)

– 1971년 8월 15일 : 닉슨쇼크

– 1971년 10월 25일 : 중국 유엔 가입

– 1971년 12월 6일 : 한국 국가비상사태 선언, 한국군 베트남에서 철수 시작

– 1972년 2월 21일 : 미국-중국 정상회담

– 1972년 4월 : 유럽공동체의 중앙은행들의 공동변동환율제

– 1972년 7월 4일 : 7.4 남북정상회담

– 1972년 8월 3일 : 한국 긴급재정명령

– 1972년 9월 29일 : 중국-일본 국교 수립

– 1972년 10월 17일 : 한국 10월 유신 단행

–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시작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70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매코믹에 따르면(McCormick), 한국전쟁에서 출발해 베트남전쟁을 종식시킨 1973년 초 파리 평화조약에 이르기까지의 23년은 “세계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수익성 있는 경제성장의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는 다른 누구보다 스티븐 마그린과 줄리엣 쇼가 “자본주의 황금기”라고 부른 시기이다(Magrlin and Schor 1991).

……

어쨌건 본 연구가 채택한 시각에서 보자면, 1950년대와 1960년대는 1850년대와 1860년대처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또 하나의 실물적 팽창 국면이 된다. 즉 이 시기에는 잉여자본이 충분히 거대한 규모로 상품 교역과 생산에 다시 되돌아와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개별 정부 조직 및 기업 조직들 사이에 새로운 협력과 분업의 조건들을 만들어 낸다. 확실히 잉여자본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속도, 규모, 범위는 앞선 순환보다 미국 순환에서 더 거대했다. 그럼에도,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실물적 팽창 국면은 하나의 결정적 측면에서 앞선 실물적 팽창들과 유사했는데, 바로 그런 실물적 팽창의 전개 자체가 각 개별 정부 조직 및 기업 조직에 두드러지게 경쟁 압력을 격화시켜, 그 결과 화폐자본이 대규모로 교역과 생산에서 철수하였다는 점이다.

교체가 발생한 것은 결정적 시기인 1968~1973년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이른바 유로달러 또는 유로통화시장의 예치금이 급격히 늘어나, 그 후 20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6년의 시기에, 실물적 팽창 국면 전체에 힘을 발휘한 바 있던 주요 국가 통화들과 미국 달러 사이의, 그리고 미국 달러와 금 사이의 고정비율체계가 폐기되고 신축적 환율체계 또는 변동환율체계가 등장하였다. 이렇게 등장한 체계를 어떤이들은 체계로 보지 않고, 앞서 존재하던 체계의 위기 때문에 채택된 형태로 간주한다(예를 들어 Aglietta).

이는 서로 구분되지만 상호 강제하는 발전들이었다. 한편에서 점점 더 많은 세계 유동성이 어떤 정부도 통제하지 않는 예금으로 축적되자, 정부들은 국내경제의 결핍이나 범람에 대처해 역외시장의 유동성을 끌어 들이거나 배출할 수 있도록 자국 통화와 이자율을 조종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다른 한편 주요 국가 통화들 사이에서 환율이 계속 변동하고 이자율 격차가 지속적으로 변동하자, 통화 거래와 투기를 통해 역외 화폐시장의 자본이 팽창할 수 있는 기회가 증폭되었다.

이렇게 상호 강제하는 발전들의 결과, 1970년대 중반이 되면 역외 화폐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순 화폐 거래의 총량이 이미 세계무역액을 여러 배 초과하였다. 그 후 금융적 팽창은 중단시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

이렇게 우리는 1970년경부터 세계자본주의에 의해 추진된 혁명적으로 보이는 변환으로 돌아왔다. 본 연구가 채택한 관점에 따르자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금융적 팽창은 세계적 규모에서 자본축적과정의 실로 지배적인 경향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결코 “혁명적” 경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종류의 금융적 팽창은 14세기 이래 모든 주요한 세계적 무역과 생산의 팽창들이 다양하게 수반한 경쟁 압력의 첨예화에 대한 자본의 특징적 대응으로서 되풀이되어 왔다.

……

미국체제의 위기가 도래했음을 알린 것은 1968년과 1973년 사이 서로 구분되면서도 밀접하게 연관된 세 개의 영역이었다. 군사적으로, 미국은 베트남에서 훨씬 더 심각한 곤경에 처했다. 금융적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브레턴우즈에서 수립된 세계화폐의 생산 및 조절 양식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나아가 그 유지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미국 정부의 반공십자군은 국내와 해외 모두에게 정당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위기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1973년에는 모든 전선에서 미국 정부가 퇴각하였다.

1970년대의 나머지 시기에 미국 국가 전략의 특징은 세계정부 기능을 기본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되었다. 마치 미국 내 통치집단들이 세계가 미국에 의해 지배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관리되도록 내버려 두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 그 결과 이란혁명과 1980년 인질 위기를 겪으면서, 전후 세계질서를 통해 형성된 상태가 불안정화되었고, 미국의 권력과 위신이 급속히 쇠퇴하였다.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현 국면에서 금융적 팽창의 이륙을 한 것은 이런 위기의 필수적이자 초기적 측면이었다. 그 이륙은 1968년 시작되었는데, 이는 런던 중심의 유로달러시장에 확보된 유동성 기금이 급격히 폭발적인 가속도를 붙이며 성장을 경험한 때였다. 이런 폭발적 성장의 결과, 1971년이 되면 미국 정부는 금-달러 교환 본위의 신화를 포기해야 했고, 1973년이 되면,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실물적 팽창 국면 중에 고도금융을 지배해 온 고정환율제 체제에 대항해 고조되고 있던 투기 물결을 억제하는 싸움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 및 그와 연합한 중앙은행들이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시장-즉 주로 유로달러시장-이 각국 통화 간의 그리고 각국 통화와 금 사이의 가격을 고정시키는 과정의 집행자가 되었다.

……

앞서 살펴보았듯이, 미국 법인자본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실물적 팽창의 전후 국면을 이끌어 가지 않았다. 그것을 이끈 것은 미국 정부의 전지구적 군사 케인스주의였다. 그렇지만 미국 법인자본의 초민족적 팽창은 미국 정부의 세계권력 추구에서 결정적 수단이자 매우 중요한 산물이기도 했다.

……

세계 유동성에 대한 통제권을 사적 수중에서 공적 수중으로 이전한 것, 그리고 그 통제권을 런던과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이전한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과 헨리 모겐소 하에서 실현되었는데, 이는 이어서 전개된 전지구적 케인스주의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으며, 이 전지구적 케인스주의를 통해서 미국 정부는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체계의 카오스를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미소 공동의 질서 잡힌 세계권력 지배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미국 미국 법인자본이 이런 변환을 통해 개방된 새로운 경계들을 점령하는 데로 나아가자, 세계 유동성에 대한 통제권은 다시 공적 수중에서 사적 수중으로, 워싱턴에서 런던과 뉴욕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세계화폐의 생산과 조절에서 사적 고도금융이 부흥한 데 대한 미국 정부의 즉각적 반응은 세계 유동성의 공급에서 워싱턴의 중심성을 대대적으로 재확인한 것이었다. 주요 국제 보유통화이자 교환의 매개로서 달러를 대체할 가용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금-달러 본위제의 폐기는 순수한 달러 본위제의 수립으로 귀결되었다. 세계화폐로서 미국 달러의 중요성은 줄어들기보다 늘어났고, 예전에 비공식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이제는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Cohen 1977:232~8).

……

환율의 휘발성은 초국적기업의 금융뿐 아니라 정부 -특히 매우 외향적 국내 경제를 통치하는 정부- 의 금융에도 위험과 불확실성을 늘렸다. 다른 어느 정부보다 제3세계 정부들이 새로운 화폐체제 때문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

사실, 1970년대 초 이래 이런 환율 변동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부가가치 계서제에서 제3세계 나라들의 위상을 결정하는 단일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분석

–  이매뉴얼 월러스틴 / 이광근 역 / 당대 / 2005.03.17

 

세계체제의 작동방식에 대해 오랫동안 품어오던 반감에다, 세계를 바꾸기에는 역량이 부족한 반체제운동에 대한 실망이 덧붙여지면서, 마침내 이것은 1968년의 세계혁명으로 귀결되었다. 1968년의 폭발은 그 지역적 상황과 관계없이 거의 모든 곳에서 반복되어 나타난 두 가지 테마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미국 헤게모니 패권에 대한 거부였다. 또 이것은 동시에 미국에 대한 적대자라고 생각되어 온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소련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서 실제로는 미국과 공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테마는 전통적인 반체제운동들이 일단 권력을 잡게 되면 약속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중적 불만이 결합되어 여러 곳에서 광범위하게 되풀이되어 분출하면서 일대 문화적 지진을 일으켰다. 마치 불사조처럼 한곳에서 수그러들면 또 다른 곳에서 분출하는 식으로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이렇게 수많은 봉기가 여러 곳에서 일어났지만, 1968년의 혁명세력들은 권력을 잡지 못하였으며, 설령 권력을 잡았다 하더라도 단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 반체제운동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 운동들이 만들어낸 기존의 국가질서에 대한 환멸감을 정당화시켰고, 강화시켰다. 오랫동안 확신해 마지않던, 점점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이제 이 세계체제에서 변화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계적인 감수성의 변화는 실제로 기존 상태를 다시 강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떠받치고 있던 정치적 · 문화적 버팀목들을 무너뜨리는 역활을 하였다. 마침내 억압받는 민중들은 더 이상 역사가 자신들의 편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

한마디로 이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다양한 생산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공헌해 온 요소, 곧 억압받는 자들의 낙관주의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같은 상실은 최악의 순간, 이윤에 대한 압박을 심각하게 체감하는 시점에서 나타났다.

1968년의 문화적 충격은 지난 1848년 세계혁명 이후 세계체제 내에서 팽배해 온 중도자유주의의 자동적 지배에 심각한 균열을 만들었다. 우파와 좌파 모두 중도자유주의의 아바타 노릇으로부터 해방되어 제각각 보다 급진적인 가치를 천명, 재천명하게 되었다.

 


세계체제 동북아 한반도

–  이수훈 / 아르케 / 2004.02.28

 

이런 각도에서 볼 때 냉전은 이중적 기능을 담당했다. 첫째, 미국을 비롯한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내에서의 기능인데, 노동에 대한 자본과 국가의 안정된 지배의 확립을 담보하는 데 일조함으로써 순조로운 축적활동 보장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제로서의 기능을 했다. 둘째, 미국의 탈식민화정책에 따라 대거 등장한 신생독립국의 민족해방 열기를 잠재우고 그들을 계속 중심-주변이라는 세계자본주의 계서제(hierarchy) 속에 묶어두는 데도 일조했다(Hopkins et al., 1996). 1989년 냉전의 공식적 종말 시점까지 소련은 미국과 더불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한 기둥 역활을 해왔던 것이다. 소련은 미국 헤게모니의 주니어 파트너에 불과했지 미국의 실질적 위협이 된 적이 없었다. 소련의 위협은 미국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사실과 달리 부풀려지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했다(서재정·정용욱, 1996).

이런 점은 냉전구조의 공고화와 동북아 지역으로의 확산에 결정적 계기가 된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특히 그랬다. 당시 미국 헤게모니사업 추진세력이었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 내 ‘전쟁공포’를 일으키고 소련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제파 대 국내파 사이의 제도정치 위기를 타개하고 헤게모니사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재무장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진척시킨 바 있다(Lee,H.J., 1999).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군사적 케인스주의 노선 채택에 성공하고 광범위한 개입을 내용으로 하는 외교노선 확립에 성공하였다. 따라서 냉전구조를 단순한 국제 정치군사적 동서대립으로 보는 것에서 나아가 전후 미국 헤게모니체제의 형성과 그 성공적 전개의 일부로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이수훈, 2001).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관통하는 위대한 세계경제 팽창기 동안에는 자본축적의 중심부가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서독과 일본의 부흥, 그들의 활발한 기술발전과 조직혁신에 기초한 가파른 경제적 상승은 미국 헤게모니체제를 심각하게 동요시켰다. 따라서 이전의 중심부 협력관계도 점차 첨예한 경쟁관계로 바뀌었다. 즉 1970년대 초기부터 본격화된 세계경제의 축적위기와 더불어 미국은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떨어지고, 대신 일본과 서독 등 옛 중심국들의 약진이 두드러진 결과 1980년대에는 미국에 의한 단일 헤게모니체제가 다중심체제로 전환되는 조짐이 역력했다. 미국 산업생산품들의 국제경쟁력은 일본과 서독 제품들에 비해 격차가 났고, 특히 일본 제품의 광범위한 미국시장 잠식으로 미국은 대규모 국제수지 적자와 함께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기축통화로서의 달러화 가치하락 압박과 금의 부족 등에 따라 닉슨 대통령은 1971년 브레튼우즈체제의 종식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73년에 발생한 오일쇼크로 세계경제는 다시 큰 타격을 입고 1974/75년 공황을 겪게 되는데, 이는 미국 헤게모니체제의 동요로 직결되었다.

……

미국 헤게모니체제는 1973년경부터 3중심체제(미국과 유럽, 동아시아)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그 질서는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일본의 장기간에 걸친 불황과 이른바 ‘아시아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중국의 약진에 의해 축적된 동아시아 지역의 부를 감안할 때, 동아시아가 여전히 3중심체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현실이다.

 


세계정치론

– 존 베일리스 스티브 스미스 / 하영선 역 / 을유문화사 / 2006.03.10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된 후 10여 년간에 걸쳐서, 선도 학자들은 이러한 변화가 미국 패권의 상실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오히려 미국 패권의 실력행사였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어떤 학자들에게는 이 체제의 붕괴가 미국 지도력의 발휘였다. “미국이라는 패권국가는 그 자신의 경제적 · 정치적 행동에서의 자유를 제고하기 위하여 브레턴우즈 체제를 박살낸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미국이 이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짐이 패권국가 없이도 유지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논쟁의 핵심은 국제정치경제에서의 협력이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강제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국가, 그리고 이러한 규칙을 파기하고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국가에 의존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협력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논쟁은 국제제도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 내에서도 현재 계속되고 있다.

 


아날학파의 역사세계

–  김응종 / 아르케 / 2001.04.28

 

이러한 불평등의 역사에서 산업혁명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브로델은 폴 베르크의 1인당 국민총생산 비교 연구에 의거해서, 유럽과 비유럽 국가들의 소득수준이 산업혁명 이후에야 크게 벌어진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러한 점에서 산업혁명을 단순히 영국 내에서의 산업기술혁신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너무 일면적이다. “영국은 세계-경제의 중심에 위치함으로써, 더 나아가 세계의 중심이 됨으로써 혁명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럽 내의 복지수준은 향상되었나? 브로델은 실질임금의 하락을 말한다. 산업혁명 이전의 절대적인 빈곤과 산업혁명 이후의 상대적인 빈곤이라는 일반적인 주장에 대해서도 브로델은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실질임금의 감소라는 면에서는 산업혁명 이전이나 이후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산업혁명이란 맬서스(Malthus)적인 ‘가능성의 한계’를 높여준 것에 불과하다. 인구와 식량의 관계에서 식량이 부족해지면 잉여인구를 줄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온 슬픈 순환의 역사는 산업혁명에 의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 천정은 어느날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면 그 날이 언제인가? 서양의 역사는 14세기에 가장 비극적인 파국을 경험한 바 있다. 기근 · 질병(페스트) · 전쟁 등과 같은 묵시록의 기사들이 이 하강기에 출몰하였다. 그런데 산업혁명으로 단지 유예되었을 뿐인 그 파국의 시작이 바로 1972~1974년의 위기가 아닐까? 유예와 응축으로 인해 자연의 보복은 더 가혹하지 않을까? 현재 진행중인 위기에 대한 역사가의 전망은 그만큼 비관적이었다.

……

이제 이 글을 마치면서 다시 한번 대역사가(페르낭 브로델)의 심각한 메시지를 경청하고 싶다.

인간의 역사는 일반적인 논리를 가지고는 설명하기 힘든 권위적인 전체적 리듬에 복종하는가? 나는 분명히 그렇다고 믿는다. 비록 그것이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마치 기후 사이클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으나 학자들도 그 기원에 대해서는 추측 이상을 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세계의 물질의 역사와 경제의 역사에 리듬을 부여하는 조수와 같은 이 운동들을 믿는다. 비록 그 운동들을 만드는 유리하거나 불리한 문턱점들-수많은 관계의 산물-이 아직 불가사의한 채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리하여 1972~74년부터 우리가 겪고 있는 세계의 곤경이 시작된 이래 나는 종종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해보았다. 우리는 콘드라티에프 사이클의 하강국면에 들어선 것이 아닐까? 혹은 그보다도 더 긴 장기추세의 하강국면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사실 모든 장기적인 동향의 국면 변화는 구조적인 위기로 그것은 단지 구조적인 파괴와 재건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복잡계 워크샵 – 복잡계 이론의 사회과학적 적용

–  복잡계 네트워크 / 삼성경제연구소 / 2006.06.30

 

복잡계 이론이 동적 메커니즘을 구현하는 데 강점을 지닌 이론틀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국제정치 분야에서 냉전의 종식이나 9.11사태와 같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모델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다. 앞에서도 논의했지만, 기존의 국제정치 이론들이 이처럼 중요한 격변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복잡계 이론의 ‘임계성(criticality)’ 관념은 시스템 다이내믹스의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협력의 현상뿐 아니라 전쟁이나 폭력과 같은 갈등 현상들의 급격한 발발이 국제정치에서 더 많은 관심을 끌고 있으므로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유도해내는 꼭짓점인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의 관념은 앞으로 활용 분야가 넓을 것으로 전망된다(글래드웰, 2000).

……

지금까지 국제정치 이론에서 이와 같은 임계성의 관념과 밀접하게 연관된 연구들이 드물지만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헤게모니의 붕괴에 따른 다자간 협조체제의 등장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셸링(Schelling)의 k-group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 이러한 연구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지탱해오던 헤게모니 체제가 붕괴된 이후에도 어떤 방식으로 세계경제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있다. 여기에서는 현실주의 이론에서 강조하는 강력한 리더십, 즉 헤게모니가 세계의 관리를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한다 하더라도, 체제가 붕괴될 경우 헤게모니와 더불어 손실을 더 크게 입게 될 여타 강대국들이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여 헤게모니를 떠받치는 원리를 모델로 구현하고 있다(Snidal, 1985). 아마도 1970년대 초반 미국의 금태환 중지 선언 이후 헤게모니 국가의 지위가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음에도 유럽과 일본 등 기타 국가들이 미국의 경제를 지지해주는 보조적인 역활을 담당해오고 있는데, 오늘날의 G8과 같은 선진국 연합이 이러한 그룹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셸링이 말한 ‘k’란 결국 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협조체제에 동참하는 국가들의 수를 일컫는 것으로, 복잡계 이론에서 제기하는 ‘임계성’ 또는 ‘임계값’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Schelling, 1978, pp. 213~243).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윌리엄 엥달 / 서미석 역 / 길 / 2007.10.25

 

1971년 8월 15일 닉슨은 자신의 예산최고정책보좌관 조지 슐츠와 나중에 엑슨사 이사가 된 잭 베넷과 폴 볼커를 비롯한 재무부의 정책 그룹이 포함된 측근 핵심 보좌관 집단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화창하고 고요한 8월 그날, 미국 대통령은 달러의 금 태환을 공식적으로 중단하는 조치를 발표함으로써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사실상 세계를 금이 뒷받침되지 않는 달러화 본위로 몰아넣어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의 핵심 조건을 일방적으로 무너뜨렸다. 해외의 미국 달러화 보유자들은 이제 달러를 미국의 금 준비금으로 바꿀 수 없었다.

……

1930년대 이후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세계 통화 문제에 영구적인 불안정이 시작되었지만 이번에는 뉴욕 · 워싱턴 · 런던의 전략가들이 주도권을 되찾고 자신들 체제를 떠받치는 통화라는 기둥의 치명적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1971년 8월 15일 발표한 닉슨의 달러화 전략 뒤에 숨어 있는 의도는 2년이 훨씬 지난 1973년 10월이 되어서야 나타났는데, 심지어 그때까지도 소수의 내부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 전후관계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71년 8월 달러화의 본위 화폐 사용 폐지는 런던-뉴욕의 금융계가 귀중한 시간을 벌기 위해 이용한 것이었으나 정책 내부자들은 대담하고도 새로운 통화주의적 구상을 준비했는데 이는 일부 사람들이 명명했듯이 ‘패러다임의 변환’이었다. 막강한 영-미 금융계 특정 인사들은 결정적인 참패에 빠진 것처럼 보인 바로 그때 다시 한 번 강력한 달러를 만들어 내고, 다시 한 번 이 세계에 대한 그들의 상대적인 정치권력을 증강하기 위한 전략을 구상했다.

1973년 5월 달러화의 급격한 하락세가 여전히 뚜렷한 가운데 세계 최고의 금융 및 정치계 내부자들 84명으로 구성된 단체가 스웨덴의 발렌베리 은행 가문의 한적한 섬 휴양지인 살트셰바덴에서 만났다. 베른하르트 왕자의 빌데르베르크 그룹이 주선한 이 모임에서 미국 측 참가자 월터 레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석유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곧 400퍼센트 증가할 것이라는 ‘시나리오’의 개요를 발표했다. 비밀스러운 살트셰바덴 모임의 목적은 예상된 유가 충격을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곧 만들어질 석유달러 홍수를 어떻게 관리할지 계획하는 것이었는데, 미 국무장관 키신저는 후에 이 과정을 일종의 ‘석유달러 흐름의 재순환’이라고 불렀다.

빌데르베르크 모임에서 대서양-일본 에너지 정책에 대해 발표한 미국 측 주장은 너무나 분명했다. 중동의 소수 산유국들이 향후 세계의 석유 수요량을 공급하리라는 전망을 언급한 후 연사는 예언적으로 선언했다. “이러한 석유 수입 비용은 엄청나게 상승하여 석유 소비국들의 국제수지에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부다비 같은 나라들의 전례 없는 외환 축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덧붙이고 있다. “산유국 · 석유수입국 · 국제 석유기업들의 본국과 산유국 · 석유수입국의 국내 석유기업들 사이의 정치관계, 전략관계, 힘의 관계에서 완전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 다음 그는 석유수출국기구의 중동 석유 수입 증가를 예측했는데, 이는 키신저가 곧 이란 국왕에게 요구하게 된 것과 동일한 수준인 400퍼센트남짓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해 5월 살트셰바덴에 참가한 인사들로는 다른 누구보다도 애틀랜틱 리치필드사의 로버트 앤더슨, 브리티시석유회사의 회장 그린힐 경, 유로채권 발행사 워버그사의 에릭 롤 경, 10여 년 전에 국무차관으로서 은행가 친구인 지그문트 워버그에게 런던의 유로달러 시장을 개발하라고 했던 장본인 리만브러더스 투자은행의 조지 볼,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데이비드 록펠러, 곧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 특별보좌관이 될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이탈리아의 지안니 아넬리와 독일의 오토 볼프 폰 아메롱겐을 들 수 있다. 키신저는 발데르베르크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

빌데르베르크 주변에 모인 권력자들은 세력균형을 영-미 금융세력과 달러화에 유리하게 되돌리기 위해 그해 5월 세계의 산업 성장에 대한 어마어마한 공격을 시작하기로 확고히 결정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세계 석유 흐름 통제라는 가장 귀한 무기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발데르베르크 정책은 세계 유가를 극적으로 인상시키기 위해 세계적으로 석유 수출 공급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1945년 이후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전후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국제 관행상 세계의 석유는 달러화로 값이 매겨졌다. 그러므로 세계 유가가 급격하고도 가파르게 상승하면 그 필요한 석유값을 지불하기 위해 미국 달러화 수요도 그만큼 극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이었다.

런던과 뉴욕에 집중된 그토록 작은 세력집단이 전 세계의 경제적 운명을 상당 부분 그렇게 좌지우지한 적은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 영-미 금융체제는 그 누구도 가능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자신들의 석유권력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틀림없이 매우 그럴싸한 그 계획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생각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욤키푸르 전쟁으로 알려지게 된 사건에 불을 붙였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욤키푸르’ 전쟁은 오판이나 큰 실수 또는 이스라엘 국가를 상대로 군사 공격을 개시하기로 아랍이 결정한 데서 비롯된 단순한 결과가 아니었다. 10월 전쟁의 발발을 둘러싼 사건들의 전체 정황은 닉슨의 국가안보 특별보좌관 키신저가 개발한 강력하고도 은밀한 외교 채널을 이용하여 미 정부와 영 정부가 비밀리에 기획한 것이었다. 키신저는 워싱턴 주재 이스라엘 대사 심차 디니츠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의 정책반응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게다가 키신저는 이집트와 시리아 측과의 외교 통로도 텄다. 그의 방법은 그저 양측에게 각각 상대의 민감한 사안을 거짓 설명해주어 전쟁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아랍의 석유 금수 조처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

석유수출국기구 유가가 지속적으로 400퍼센트나 인상되면서 빚어진 엄청난 결과의 하나는 브리티시석유회사, 로열더치셸과 다른 영-미 석유회사들이 위험스러운 북해의 해저 유전에 쏟아부은 수십억 달러의 투자가 이익을 남기며 석유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들 새로운 북해 유전의 수익성은 석유수출기구의 유가 인상이 있기 전 까지만 해도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기묘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

의미심장하게도 석유 위기는 1973년 말 절정에 달했는데, 그때는 바로 미국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직접 연루되어 결국 키신저가 사실상의 대통령으로 석유 위기 동안 미국의 정책을 지휘하던 시기였다.

……

닉슨의 1971년 8월 치명적인 달러화 정책 추진을 보좌한 인물인 베넷의 지휘 아래 미 재무부는 사우디아라비아 통화국(SAMA)과 비밀협정을 체결했는바, 그 최종 내용은 1975년 베넷 재무장관이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비망록 속에 담겨 있다. 그 협정의 조건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가 횡재한 막대한 석유 수입의 상당 부분은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를 조달하는 데 투자될 것이었다.

……

이미 미국의 정보 평가를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는 전능한 국가안보 특별보좌관으로서 키신저는 또한 미국의 대외정책까지 확실히 장악하여 10월 욤키푸르 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몇 주 전에는 닉슨을 설득하여 국무장관에 임명되었다. 그 일련의 사건에서 그가 한 중심적인 역활을 보여주듯이 키신저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의장이자 국무장관이라는 두 직함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닉슨의 대통령  재임 마지막 몇 달 동안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닉슨의 대통령 재임 마지막 몇 달 동안 어느 누구도 키신저처럼 그렇게 막강한 절대 권력을 휘두른 C��다. 록펠러 재단과 포드 재단은 기꺼이 지갑을 열어 삼각위원회의 운영을 위한 재정을 지원했다.

삼각위원회의 주요 회원은 모두 북아메리카 및 서유럽과 일본의 은행가, 대기업 사주와 저명한 정계 인사들이었다. 뉴욕, 파리, 도쿄에 세 개의 본부를 각각 설치했으며 이 세 지역에서 회장을 각각 맡았다. 뉴욕 본부의 회장은 당연히 데이비드 록펠러가 맡았고, 브레진스키는 이 본부의 일상 업무 집행을 담당했다.

브레진스키는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당시 조지아의 주지사 카터를 삼각위원회 회원으로 추천했다. 카터는 데이비드 록펠러가 친히 지명해서 파격적으로 삼각위원회에 가입했다. 이 일은 그로부터 5년 후 카터가 백악관의 계단을 오르는 중요한 첫걸음이자, 그와 브레진스키의 남다른 인연을 맺어준 시발점이 되었다.

젊은 시절의 클린턴 또한 은사 퀴글리의 지도로 삼각위원회와 외교협회의 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대통령을 향한 꿈을 끝내 현실로 만들었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 헨리 키신저

–  중앙 SUNDAY 제212호 / 2011.04.03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1191

 

키신저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모교의 교수로 재직하다 당시 공화당 거물인 넬슨 록펠러의 추천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인 69년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닉슨은 록펠러와 라이벌 관계였다. 아울러 닉슨은 유대인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키신저의 안보보좌관 기용을 거북하게 여겼다는 얘기다.

닉슨으로선 미국을 움직이는 실세인 록펠러가(家)의 요청을 거부하지 못한 채 키신저의 등용에 마지 못해 동의했다. 그러나 안보보좌관 자리에 앉은 키신저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판독해내고 국제무대의 새 판을 짜는 데 있어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몰고 온 워터게이트 사건의 와중에서도 국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닉슨의 후임인 제럴드 포드 대통령 시절까지 약 10년간 미국 외교를 거의 혼자 요리했다.

 


화폐전쟁

– 쑹훙빙 / 차혜정 옮김 / 랜덤하우스 / 2008.07.21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삼각위원회의 핵심 인물이자 데이비드 록펠러의 브레인이었다. 록펠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를 모아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이 아이디어는 1972년 초에 처음으로 제기되었으며, 1972년 빌더버그 연례회의에서 집단적으로 광범위한 토론을 거쳐 수용되었다.

브레진스키는 1970년 유명한 《두 시대 사이(Between Two Ages)》를 발표하고 새로운 국제 화폐 체계와 세계정부의 수립을 호소했다. 이 책은 삼각위원회의 ‘성경’으로 일컬어진다. 록펠러 재단과 포드 재단은 기꺼이 지갑을 열어 삼각위원회의 운영을 위한 재정을 지원했다.

삼각위원회의 주요 회원은 모두 북아메리카 및 서유럽과 일본의 은행가, 대기업 사주와 저명한 정계 인사들이었다. 뉴욕, 파리, 도쿄에 세 개의 본부를 각각 설치했으며 이 세 지역에서 회장을 각각 맡았다. 뉴욕 본부의 회장은 당연히 데이비드 록펠러가 맡았고, 브레진스키는 이 본부의 일상 업무 집행을 담당했다.

브레진스키는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당시 조지아의 주지사 카터를 삼각위원회 회원으로 추천했다. 카터는 데이비드 록펠러가 친히 지명해서 파격적으로 삼각위원회에 가입했다. 이 일은 그로부터 5년 후 카터가 백악관의 계단을 오르는 중요한 첫걸음이자, 그와 브레진스키의 남다른 인연을 맺어준 시발점이 되었다.

젊은 시절의 클린턴 또한 은사 퀴글리의 지도로 삼각위원회와 외교협회의 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대통령을 향한 꿈을 끝내 현실로 만들었다.

 


세계화의 두 얼굴

– 로버트 A. 아이작 / 강정민 옮김 / 이른아침 / 2006.02.16

 

1973년 OPEC은 중동전쟁을 이용하여 석유 가격을 4배 높였다. 그 이후 석유 산업은 두 개의 석유 카르텔, 즉 석유기업들과 OPEC에 의해 관리되어 오고 있다. 그 결과 수입 석유에 의존하는 선진 산업 국가의 공급 안정성이 확보되었다.

오일달러의 재순환은 자유 시장 체제에 의해 통제된다.
OPEC 산유국들은 1970년대 석유 가격 급등으로 횡재와도 같은 막대한 이익을 취하여 그것을 단기 해외(비과세) 은행 계좌에 예치했다. 이들 해외 은행들은 그 자금을 회전시켜 개발도상국들이 석유를 구입하거나 애초의 자금 출처인 선진국에 대출까지 할 수 있도록 높은 이율로 돈을 빌려주었다. 체이스 맨해튼 은행의 데이비드 록펠러가 이 상황을 간파했을 때 그는 이 게임이 계속되기를 너무도 원했다. 따라서 체이스 맨해튼 은행은 개발도상국, 특히 멕시코와 같이 미개발 석유매장량을 가진 개발도상국에 막대한 금액을 대출해 주기 시작했다. 채무국이 대출금 원금을 갚지 못한다 해도 대출해 준 은행은 높은 이자율로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였다. 석유 가격은 계속 오를 것이고, 따라서 대출 이면의 담보물은 안전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동시에 영국 경제학의 케임브리지 학파의 마르크스주의 지향 경제 조언자들은 은행들이 멕시코와 같은 국가에 최대한 많은 부채를 질 것을 조언했다. 대출금 상환이 불가능해질 때 멕시코는 부채로 은행을 소유할 것이고, 미국 정부가 개입하여 은행에 대한 채무를 면제해 주거나, 세계적 금융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결국 은행의 채무를 말소해야 할 것이라는게 그 이유였다.

1980년대 초에 이르러 이 이론을 받아들인 미국의 9개 거대 은행들은 개발도상국에게 자사의 순자산액으로 보유한 금액보다 3배에 달하는 대출을 해주었다. 그러나 석유 가격은 떨어졌다. 멕시코와 같은 빈곤국들은 대출 원금도 이자도 지불할 수 없었다. 이윽고 개발도상국의 ‘채무 위기’가 정점에 달했다. 충격적인 것은 데이비드 록펠러도, 급진적인 케임브리지 학파 경제학자들도, 개발도상국에 대한 이러한 대규모 대출에 동의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활용했던 규칙은 다음과 같다. 회사(예를 들어 은행)가 충분히 대규모이고 국가가 충분히 부유하면 기업 관리자와 투자자들은 투기적 위험이 잘못될 때 정부를 그들의 책임을 면제해 줄 최종적인 보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전문용어로, 이를 모럴 해저드(moral hazard, 도덕적 해이)라고 한다. 기업과 투자자들이 이 규칙을 이용하면 할수록 그들이 하는 고위험의 투기적 투자가 더 많아지고 세계 경제 체제의 안정성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빈곤국 입장에서는 더 이상 지불금을 감당할 수 없을 경우 쉽게 신규 자금을 빌릴 수 없기 때문에 채무 위기는 달갑지 않다. 빈곤국에 우선 채무를 질 것을 권유한 부유한 투자자, 기업, 국제 기관들은 대개 실패의 결과를 감당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세계 경제에서 충분히 거물급이기만 하다면 말이다.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 노암 촘스키 / 이종인 역 / 시대의 창 / 2005.12.16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다수의 권력자들이 닉슨을 잡으려고 나선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적들 리스트와 워터게이트 침입보다 더 심오한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1971년 여름의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당시 닉슨 행정부는 그 앞 25년 동안 존속해왔던 국제 경제 체제를 기본적으로 해체했습니다(이른바 “브레튼 우즈” 체제로서 1944년 뉴햄프셔 주의 브레튼 우즈에서 열린 유엔 화폐 · 재정 회의에서 구축된 체제를 말한다). 1971년에 이르러 베트남 전쟁은 다른 선진 공업국들과 비교하여 미국을 경제적으로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타개책의 하나로 닉슨 행정부는 브레튼 우즈 체제를 해체시켰습니다. 2차대전 이후 세계 경제를 조직해온 이 체제 하에서 미국은 세계의 은행 노릇을 했습니다. 이 체제는 미국 달러를 금과 연계된 글로벌 준비 통화로 만들었고, 수입 쿼터 철폐에 대한 조건을 부과했습니다. 그런데 닉슨은 이 체제를 실제로 와해시켰습니다. 금본위제를 철폐했고, 달러의 태환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관세를 올렸습니다. 다른 나라는 감히 이런 조치를 취할 힘이 없었지만 닉슨은 그것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많은 힘 있는 적들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다국적기업과 국제은행은 브레튼 우즈 체제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걸 해체해 버리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를 면밀히 연구해보면 닉슨이 그 당시에도 『월 스트리트 저널』 같은 신문에서 공격당하고 있었습니다. 내 생각에 바로 이때부터 힘 가진 사람들이 그를 손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워터게이트는 그 기회를 제공한 거죠.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 노암 촘스키 / 강주헌 역 / 시대의 창 / 2004.04.12

 

세계 경제에서 미국의 헤게모니가 1970년 초쯤에 상당히 줄어들고, 유럽과 일본이 중요한 경제,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의 비용도 미국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안겨주면서 경쟁국들에게 상대적인 혜택을 주었습니다. 바야흐로 세계 경제의 균형추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1970년대 초에 미국은 전통적인 역활, 즉 국제은행으로서의 역활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이런 역활은 2차 세계대전 후에 있었던 브레튼우즈협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각국의 통화는 국경을 중심으로 규제되었고, 실질적인 국제통화인 미국 달러는 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닉슨이 1970년 경에 브레튼우즈 시스템을 와해시켰습니다. 그 여파로 규제받지 않는 금융자본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게다가 원유와 같은 필수품의 가격이 단기적으로 급등하면서 오일 달러가 대거 국제시장으로 흘러들어가 투기자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여기에 텔레커뮤니케이션 혁명이 더해지면서 자본의 이동까지 한결 쉬워졌습니다.엄격하게 말하면 이제 자본의 이동이 아니라 전자화된 자본의 이동입니다.

물론 생산의 국제화에서도 대단한 성장이 있었습니다. 하기는 미국에서 만든 물건을 해외로 번잡스럽게 수출하는 것보다 값싼 노동력이 있는 나라에 공장을 세우면 훨씬 이익이고 물건을 팔기도 훨씬 쉽지 않습니까!  따라서 코네티컷의 그리니치에 살면서 본사와 거래 은행은 뉴욕에 두고, 제3 세계의 어딘가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경영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은행 거래는 경치 좋은 해안지역에서 이루어집니다. 감독의 눈길을 피해서 검은 돈을 세탁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짓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곳에서 말입니다.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와해로 경제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게다가 1970년대 초부터 이익을 올리는데 혈안이 된 기업계의 압력으로, 전 세계의 민중이 한 세기 동안의 투쟁 끝에 일구어낸 사회계약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직후 뉴딜정책으로 유럽의 사회주의 복지국가들에서 어느 정도 골격을 갖추고 있던 사회계약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처음에는 미국과 영국이 공격을 주도했지만 이제는 유럽대륙 전체가 기업계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노동조합도 눈에 띄게 약화되었습니다. 노동조합의 힘이 약해지면서 임금이 하락하고, 노동자를 위한 다른 조건들도 악화되었습니다. 사회가 점점 양극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주로 미국과 영국에서만 목격되던 양극화 현상이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지구화와 정치변화

–  오기평 / 오름 / 2000.05.12

 

지구화(地球化)가 과대평가되어진 하나의 신화나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이 타당성을 견지함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학적 시각에서 보았을 때 지구화가 실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이 인정되고 있는 곳은 금융부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지구화의 주된 장(場)이 선진국이라면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금융적 지구화의 원인 내지 내용들 또한 그 틀 내에서 규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지구화를 바라볼 때 지구화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하여 성립된 브레턴우즈체제, 즉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질서를 정치적으로 조절하려던 제도적 장치가 1970년대 중반 이후 붕괴함으로써 금융영역이 실물경제로부터 자립화하여 급격히 형성된 국제금융시장의 완성된 통합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 금융시장의 자립화는 화폐의 (잠재적)자본으로서의 기능을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민족국가 중심의 정치와는 달리 국경을 초월하여 움직이는 그 속성으로 인하여 세계경제를 하나의 단일한 시장으로 통합시키며 오늘날 일국 중심의 정책을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완성된 금융시장의 지구화 과정은 미국의 헤게모니 위기와 연관시켜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지구화란 자본주의 경제 성장의 둔화와 함께 나타난 미국의 헤게모니 위기, 그리고 이에 따른 세계질서 재편성 속에서 부작용으로 나타난 금융부문의 실물경제로부터의 일탈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지구화란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특수한 형태에 불과하다(Zinn 1997, 253). 그리고 이로 인해 완성된 금융시장의 통합은 개별국가들의 헤게모니 주도권 장악 전쟁을 통화경쟁이라는 형태로 전환시켰으며 이것은 계속 진행 중인 것이다.

 


전쟁과 평화의 이해

–  황병무 / 오름 / 2001.05.25

 

1970년대 초 중국의 세계정세에 관한 기본인식은 “세계동란”(global upheaval)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난(亂)은 세계가 삼분된 상황하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등소평은 1974년 4월 유엔총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세계3분론”을 공식으로 선언하면서 사회제국주의의 등장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동안 존재했던 사회주의 진영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본주의의 불균형적인 발전 때문에 서방제국주의 진영도 분열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등(鄧)에 따르면 미국과 소련은 제1세계를 형성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개발도상국들은 제3세계를, 두 개의 세계 사이의 선진국가들은 제2 세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북경의 대외인식에 따르면 제1세계에 속하는 미국과 소련은 초강대국으로 세계패권을 추구하고 있다. 초강대국들은 제3세계의 국가들을 그들의 통제하에 놓으려 하고 있으며, 이들 민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일삼는 국가이다. 따라서 이러한 초강대국들이 추구하는 패권주의가 새로운 세계전쟁의 근원이다.

제2세계 국가들(일본, 동·서유럽 국가)은 아직도 3세계 국가들과 식민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모든 제2세계 국가들은 여러 면에서 어느 일방의 초강대국에 의해 통제와 위협을 받거나 들볶이고 있다. 그 중 일부 국가들은 하나의 초강대국의 종속적 지위에까지 전략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제2세계 국가들은 초강대국의 예속이나 통제를 벗어나 독립과 주권을 보호하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수많은 3세계 국가들은 오랫동안 식민지 지배와 제국주의의 억압과 착취를 받아왔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제3세계 국가들은 억압을 반대하고 해방과 발전을 추구하는 아주 강한 열망을 지니고 있으며 패권주의와 싸우는 주력군이 되고 있다.

 


황금의 지배

–  피터 L. 번스타인 / 김승욱 역 / 경영정신 / 2001.05.24

 

드골의 궁극적인 목적은 미국의 특별한 지위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이 특별한 지위 덕분에 미국인들은 외국인들에게 자국 화폐인 달러를 지불하는 것만으로도 국제거래상의 적자를 상쇄할 수 있었던 반면, 다른 모든 나라들은 다른 나라의 화폐나 금으로 결제를 해야 했다. 따라서 전세계가 다른 나라들과의 거래에서 흑자를 기록해야만 외환과 금을 얻을 수 있는 데 비해, 미국은 달러 지폐를 찍어내는 비용만으로도 해외에서 지출되는 돈을 마련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해 분개하고 있는 것은 드골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드골이 제시한 해결책은 어느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다른 경제대국의 당국자들은 그가 시험삼아 제시해본 의견에 냉담했다. 전세계 화폐의 기준을 2배로 올렸을 경우 발생할 인플레이션의 가능성은 제쳐두더라도, 금값을 올리는 경우 세계 최대의 금 생산국인 남아프리카와 소련이 가장 커다란 혜택을 입게 되리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이 두 나라 모두 당시 서구 국가들 사이에서 별로 평판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금값을 올리려는 노력은 드골의 마지막 힘겨운 호흡과도 같은 것이었다. 1968년 4월에 프랑스의 『르 몽드(Le Monde)』지는 “(프랑스의) 입장이 열세인 것은 미국과 미국의 유럽 동맹국들이 유지하고 있는 느슨하지만 조리 있는 체제에 대한 복합적인 대안이 없다는 데에서 유래한다.”고 보도했다. 이때까지 『르 몽드(Le Monde)』지는 달러를 열심히 비난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 신문이 그런 입장을 버렸다는 것은 드골의 노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드골에게 최후의 일격이 찾아온 것은 1968년 5월이었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폭동과 파업이 걷잡을 수 없이 발생했다. 이때의 격앙된 분위기는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격렬한 시위들과 맞먹을 정도였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시위에 나선 것은 베트남전쟁에 항의해서라기보다는 임금을 높여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파업은 프랑스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노동시간의 엄청난 손실이 발생했고, 노동비용이 급격하게 상승했으며, 이로 인해 프랑이 평가절하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졌다. 이때의 시위에서 나타난 충격적인 폭력성은 1920년대의 공황상태를 연상시키는 자본이탈 현상을 낳았으며, 그 결과 독일 마르크와 스위스 프랑이 가장 안전한 피난처로서 강력한 가치상승 압력을 받게 되었다. 사태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드골은 자신의 임기를 걸고 국민투표를 실시했다가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이 시장에서 프랑에 대한 한층 더 심각한 공황상태를 일으켰다.
달러를 옛날과 같은 금본위제에 강제로 예속시키려던 드골 장군의 노력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1968년의 사건들은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이 사건들이 금에 미친 영향은 정치 · 경제 · 사회 전반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의 일부에 불과하다.

1968년이라는 해는 과격한 시위와 1930년대 이래 최악의 사회적 불안으로 얼룩져 있었다. 게다가 이런 사건들이 미국과 프랑스에서만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1968년이 1956년 이래로 공화당이 선거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해이기도 했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의 승리를 헛되게 좇는 동안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로 절정에 이르렀던 전후 시대의 혁신적인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이 조용히 종말을 맞았다. 전세계의 지도자들은 이제 사회복지 대신 점점 가속화하고 있는 인플레이션의 위협과 혼란에 맞서 대규모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싸움은 그 후로 10년 이상 계속되면서 정부의 역활, 금융 시스템의 구조와 제도, 자본주의체제 자체의 기본적인 성격 등의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

1968년 이후에 인플레이션은 스스로 예언을 하고 스스로 그 예언을 실현시키는 존재가 되어 시스템 안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던 기본적인 인플레이션 요인들에 힘을 더해주었다. 1970년에 실업률이 전체 노동력의 3.5%에서 6% 이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미국의 실업수당은 1년 동안 7% 이상 증가했다. 노조들은 인플레이션보다 빠르게 지속적으로 임금을 인상시켜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경영자들은 노동비용의 증가를 감당하기 위해 계속해서 물가를 올려야만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상황은 스스로 힘을 얻어 저절로 굴러가고 있었다. 실업률, 이윤폭, 금리, 세율 등 다른 상황에서라면 이러한 사태진전을 막을 수 있었던 요인들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굽힐 줄 모르는 인플레이션 압박은 달러화의 문제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금 보유량에 긴장을 더해줄 뿐이었다.

 


골드(GOLD)

–  네이선 루이스 / 이은주 역 / 에버리치홀딩스 / 2009.04.17

 

역사가들은 사람들이 저축이나 투자보다는 즉각적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추구할 때 인류의 문명이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금융 관계의 악화는 개인적 관계의 악화로 이어졌다. 로마 제국의 멸망, 1920년대 초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 1970년대 미국 경제의 몰락에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영국은 1698년부터 1914년에 이르는 통화 안정기 시절에 빅토리아 시대의 견고하고 고고한 문명을 흠짐 없이 유지했다. 영국은행의 영구 채권은 결혼처럼 강력하고도 신뢰할 만한 약속이었다. 로마와 영국, 미국의 통화 자체가 금과 마찬가지의 가치가 있던 시절이 바로 이들 국가의 황금기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히든 파워

– 찰스 더버 / 김형주 역 / 두리미디어 / 2007.08.10

 

……

– 현대 미합중국의 체제 –

제1차 법인체 체제(1865~1901) – 금장시대

존 D. 록펠러와 J.P. 모건이 집을 짓다.

진보적 체제(1901~1921) – 진보적 시대

테디 루스벨트가 제1차 법인체 체제라는 집에서 융성했던 트러스트(독점체)들을 붕괴시키다.

제2차 법인체 체제(1921~1933) – 광란의 20년대

하딩과 후버가 이 집을 거대한 기업체로 되돌려놓다.

뉴딜 체제(1933~1980) – 뉴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국민의 집을 설계하다.

제3차 법인체 체제(1980~?) – 레이건 혁명

전 지구적 법인체가 자신들을 위한 현재의 집을 짓다.

……

국제관계의 변화시점을 1989년과 냉전의 최종적인 붕괴로 거슬러 올라가 잡는 것이 보통이지만, 아마도 현재의 전쟁상태의 개시를 나타내는 더 시사적인 날은 1972년 5월 26일, 즉 미국과 소련이(이 두 초강대국의 핵무기 생산을 규제하는)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에 조인한 날일 것이다.

……

실제로 그 때부터 핵미사일들은 진흙투성이 창고에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근대적 의미의 전쟁, 다시 말해 고강도의 무제한적 분쟁과 파괴를 수반하는 보편화된 전쟁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

즉, 전쟁은 응집된 거대위협에 맞선 방어에 방향을 맞추기 보다는 확산되는 작은 위협들에 더 촛점을 맞추고, 적의 전반적인 파괴에 집중하기보다는 적을 변형하고 심지어 생산하는 경향이 생겼다. 전쟁은 인위적으로 통제되는 것이 되었다. 거대 강대국들은 전면적인 대규모 전투보다는 오히려, 베트남이나 라틴아메리카에 미국이 개입하고 아프가니스탄에 소련이 개입하는 것처럼, 고강도의 치안행위들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물론 고강도의 치안행위는 종종 저강도 전쟁과 구분되지 않는다. 이 갈등들이 때로는 전쟁으로 변형될 때조차도, 그것들은 결코 20세기의 ‘거대한 전쟁들’의 총동원처럼 확장되지는 않았다. 요컨대, 1972년 5월 26일에 전쟁은 삶권력의 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전지구적 사회질서의 구축과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에 일어난 전쟁의 형식과 목적의 변화는 전지구적 경제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형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1971년 미국 달러가 금본위제와 고리를 끊은 때와 1973년 제1차 석유위기가 일어난 때의 중간쯤에 ABM협정이 조인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때는 화폐 및 경제위기의 시기였을뿐만 아니라, 복지국가가 파괴되기 시작하고 경제생산의 헤게모니가 공장에서 더욱 사회적이고 비물질적인 부문들로 이동해 간 시기였다. 이 다양한 변형들은 한 가지 공통적 현상의,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변형의 상이한 측면들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련 그림>

 

– 브레튼우즈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

 

 

1

– 브로델의 장기순환 (출처 : http://luxun.greenbee.co.kr/blog/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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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주식 역사상 가장 길었던 약세장은 1973년에 시작되었다. 고점에서 저점까지 437일간이나 하락하였다.

http://theirrelevantinvestor.com/2016/05/04/the-worst-bear-market-that-nobody-ever-talks-about/

 

 

dj-historical2

– 미국 다우지수는 이 시기부터 80년대 초까지 혼조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Bilderberg 1973 – Report (Not All) and List of Participants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 헨리 키신저

2003-03-06  “미국이 전쟁을 하려는 또하나의 진짜 이유” – ‘달러 헤게모니’ 고수, OPEC 원유가 통제 저지

2013-02-26  달러의 귀환

2012-10-11  신자유주의는 왜 민주정부 10년에 만개했나?

2012-09-19  자본주의는 더 이상 형식적으로도 합리적이지 않다

2012-09-18  [경제시평-김이석] 40년간의 불환화폐 실험

2011-09-05  탈패권 시대의 국제관계, 6자회담을 다시 생각한다

2011-08-09  달러 패권 이양에 최소 30년··혼란 장기화 우려

2011-03-04  로버트 라이시의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

2010-10-24  미국의 종이돈 장난과 파장

미국체제 위기 (1968년 ~ 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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