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 (1840년 ~ 1860년) – Opium Wars

아편전쟁에 대해 알아본다. 우선 백과사전의 내용을 살펴보자.

 

* NAVER 백과사전 – 제1차 중영전쟁 / 난징조약 / 제2차 중영전쟁 / 텐진조약 / 베이징조약

* 위키백과 – 아편전쟁 / 제1차 아편 전쟁 / 제2차 아편 전쟁

 

그리고 당시의 세계사 연대표를 찾아본다.

 

* yellow의 세계사 연대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840

 

아편전쟁의 주요 역사적 의의를 찾아보면 중복되는 것들도 있지만 다음과 같다:

– 서구 문명과 동아시아 문명 간의 충돌

– 중국과 서구관계에서의 주도권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사건

– 중국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이자 중국 근대사의 시작

– 중국이 독립된 봉건국가에서 반식민지 반봉건 국가로 변모

–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질서가 붕괴되는 시발점

– 단일한 지구국제사회가 형성되어가는 최종단계

– 동아시아가 세계체제로 흡수·편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 영국의 금본위제와 중국의 은본위제 사이의 주도권 싸움

 

아래 그림은 그 당시 중국과 영국 간의 무역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은’의 흐름을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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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혹은 광범위하게 말해서 서구)은 아메리카에서 약탈한 은을 다 쓰게 되자 동아시아 무역에서 정상적인 지불 수단을 상실하게 된다. 이 때문에 부득이하게 아편을 지불 수단으로 바꾸어 사용해 대중국 무역의 적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도전 앞에서 중국 정부는 아편 금지 정책을 실시했다.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중국은 패배한다. 또한 영국과 기타 서양 국가들과 체결한 일련의 불평등조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무역항을 개방하게 된다. 대략 동일한 시기에 일본 또한 미국의 무력 위협으로 쇄국 상태를 끝내고 무역항을 개방한다. 이때부터 근대 자본주의가 대대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글로벌 불균형’이 지적된다. 그러한 면에서 영국과 중국의 아편전쟁도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즉, 대 중국 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인도산 아편을 수출한 영국은 자국 내 아편을 금지한 중국과 전면전을 치뤘다. 아편전쟁도 결국은 무역의 이익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글로벌 불균형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요즘 ‘화폐전쟁’ 이라는 단어도 흔히 듣는다. 아편전쟁도 일종의 화폐전쟁이란다. 매드허 교수는 “19세기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전쟁은 일종의 통화전쟁”이라며 “지금과 달리 무력 대결로 이어졌을 뿐”이라고 소개했다.

현재와 비교하면 차 · 도자기 · 비단 등은 중국에서 생산되는 제조품이고 은은 달러에 비유할 수 있겠다. 영국이 아편을 이용해 은을 회수했다면 앞으로 미국은 무엇을 통해 달러를 회수할 수 있을까?  에너지, 곡물 같은 것일까? 아니면 달러 가치 하락, 중국발 금융위기, 새로운 화폐? …. 무력 충돌이라는 카오스적인 상황?

 

자세히 살펴본다.

 


문명과 바다

–   주경철 / 산처럼 / 2009.03.05

 

금·은·구리로부터 카우리 조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화폐들이 대륙 간 이동을 하면서 근대 세계경제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이때 화폐는 단순히 유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강제로 다른 문명권의 문호를 열고 그곳의 부를 유출시키는 일까지 맡아서 했다. 아메리카에서 산출된 은이 여러 경로를 통해 중국에 유입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럽은 중국의 비단 · 도자기 · 차와 같은 물품들을 대량 구매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수출품이 부족했으므로 그 차액을 결제해야 하는 문제가 생겨났다. 유럽은 아메리카에서 산출된 은을 중국에 송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와 비슷하게 장기간 중국의 부를 유출시키는 화폐 역할을 한 또 다른 사례로 아편을 들 수 있다. 물론 아편을 두고 화폐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 지역의 생산물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 계속 부를 얻었다는 점에서 아편은 은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아편은 중국으로 수입되어 앵속(罌粟)이라는 이름으로 진통제로 쓰였다. 청나라 때에는 강희연간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매년 200상자 정도의 아편을 들여왔는데, 이때만 해도 아편은 고가의 진통제로서 부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약품이었다. 그러나 1781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대중국무역을 독점하고 인도의 벵골 산 아편을 대량으로 수출하면서 일반인의 아편 흡연이 확산되었다.

 

영국이 이처럼 아편을 대량 수출하게 된 것은 중국 차 수입과 관련이 있다. 유럽에서 18세기에 차 수요가 급증하였고 따라서 차 수입 대금으로 거액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지불수단으로 필수적이었던 은을 확보하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유럽 각국에서 아메리카의 사탕수수, 담배 같은 상품들을 많이 수입하게 되어서 이제 이 지역으로도 대금 지불을 해야 했으므로 이전처럼 아메리카의 은을 대량 얻을 수는 없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유럽 상인들은 심각한 결제수단 부족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을 해결해 준 것이 다름 아닌 아편무역이었다.

 

18~20세기 중에 중국의 아편 수입은 실로 엄청난 규모로 증가했다. 1729~1800년 동안 아편 수입량은 20배 정도 증가했고, 19세기 초에 이르면 중독자가 1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런 정도라면 당시 인구가 3억에 달했던 중국의 사회와 국가를 붕괴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1818년에 값이 싸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내는 파트나(Patna) 아편이 개발되면서 문제가 달라졌다. 파트나는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 상품의 한 브랜드로서 캘커타·싱가포르·홍콩·광동을 비롯해서 아시아 전역을 석권하여 150년 동안 아편무역과 동의어로 간주될 정도의 대표적인 상품이 되었다. 1839년 중국의 수입량은 이미 천만 명의 중독자가 사용할 양이었으며, 20세기 초에는 중국에 4천만 명의 중독자가 생겼다.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폐인으로 전락하는 사회문제가 제기된데다가, 막대한 양의 은이 중국 밖으로 유출되어서 심각한 경제문제가 야기되었다.
이미 옹정제(1678~1735) 때 아편의 폐해를 인식하고 일반인의 아편 흡연을 금했었고 그 후 가경연간에는 수차례 아편 수입 금지령을 내린 바 있었지만 밀무역을 통해 아편 유입이 그치지 않았다. 유럽 상인들은 아편을 실은 배를 바다에 정박시키고 중국 상인들이 쾌속선으로 실어 나르는 편법을 썼다. 급기야 도광제는 임칙서(林則徐)를 광동으로 보내 몰수한 아편 상자들을 불태우는 식의 강력한 금지 조치를 취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두 차례의 아편전쟁(1840~42, 1856~60)이 일어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영국인들은 이 전쟁이 ‘아편’ 전쟁이 아니라 무역의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고 강변했다. 자신들은 아편을 다만 중국 해안까지 수송했을 뿐이고 중국 선박이 상품을 인수한 다음부터는 자신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가증스러운 주장으로 도덕적 책임을 회피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처럼 뻔뻔스러운 영국의 주장에 동조하는 견해가 의외로 많았다. 미국의 6대 대통령을 지낸 존 퀸시 애덤스는 그 동안 중국이 외국인을 깔보았으며, 서양인들이 황제를 접견할 때 노예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는 고두(叩頭)를 강요하는 중국의 무례함에 대해 영국이 무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전적으로 올바른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모두 사건의 실제를 가리는 거짓에 불과하다. 아편전쟁은 무엇보다도 서구가 주도하는 국제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저해하는 지불수단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아편무역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유해한 상품을 수출하는 대가로 중국의 은을 빨아들인 다음 이를 영국으로 송출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였다. 이 점은 당시의 통계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1836년 인도의 아편 수출은 이 나라의 전체 수출액 가운데 1/3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같은 해에 중국의 아편 수입 액수는 1800만 달러(4백만 파운드)로서 아편무역 연구자인 트로키(Trocki)에 의하면 이는 “단일 품목의 교역 중 19세기에 가장 큰 것”이었다. 그 결과 거액의 은화가 중국에서 외국으로 빠져나갔다. 1814~1850년 사이 1억 5천만 멕시코 탈러(근대에 전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던 은화 종류)가 유출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전체 화폐공급량의 11%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이 현상은 20세기 초까지도 지속되었다. 1910년 영국은 대서양 방면에서 1억2천만 파운드의 무역적자를 기록하였으나 이 중 많은 부분을 아시아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인도는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와의 교역에서 4500만 파운드라는 거액의 흑자를 기록하였고, 영국에 대해서 6천만 파운드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도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돈을 끌어온 다음 여기에 자신의 돈까지 더해서 영국에 바치는 일을 한 셈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상품 중 하나가 바로 아편이었다.

 

아편무역 하나만으로 영국 제국주의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존립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분명 과장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위기에서 벗어나서 점차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데에 아편이라는 ‘유사 세계화폐’가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하다.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  문정인 외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6.11.10

 

아편전쟁의 문명사적 의의는 이 전쟁이 동아시아문명과 서구문명 간의 첫 무력충돌이자 동아시아 근대사의 기점이라는 데 있다. 제2장에서 권선홍 박사는 아편전쟁을 다원적 국가관과 국가주권원칙을 근간으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고 열국의 쟁탈을 당연시한 서구문명과 단원적 천하관과 화이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상하차등적이고 위계적인 주종관계를 당연시한 동아시아, 즉 중국 문명 간의 충돌로 파악하고 있다.

권 박사는 아편전쟁의 원인을 일차적으로 경제적 이유에서 찾고 있다. 청대의 중국은 명대의 해금정책을 이어받아 폐쇄적이고 통제적인 대외정책을 통하여 자신들의 통치기반을 굳건히 유지하려했다. 무역의 개방을 광주항구 한 곳으로 제한하고 외국상인들은 관허(官許) 상인조합인 ‘공행(公行)’을 통해서만 무역을 할 수 있는 광동무역제도를 시행하였는 바, 이는 아시아의 무역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영국에게 큰 장애물로 작용했다. 영국은 외교적 노력을 통하여 광동무역제도를 타파하고 광주 이외의 항구에 대한 개항 요구, 그리고 서구식 대외관계수립을 요구하는 등, 무역확대를 꾀했으나 중국의 거부로 실패하게 되면서 중국에 대한 강경책을 고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편 문제는 하나의 도화선을 제공했던 것이다. 청조에 의한 아편수입의 금지와 영국 상인이 보유하고 있던 아편의 압수, 소각은 무역확대를 위하여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영국에게 아주 좋은 구실을 제공하게 되었다.

청조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1842년 8월에 남경조약을 체결하게되고, 그 다음 해에는 영국에 대해 영사재판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동년 10월에는 최혜국대우 조항이 포함된 호문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권 박사는 당시 중국이 영국의 치밀한 계획하에 발발한 아편전쟁에 대하여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일종의 소요사태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여전히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체결한 불평등 조약에 대해서도 단순히 영국인들을 달래주는 유인책으로 생각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반면에 영국인들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 측의 조약 이행태도와 대중국 무역에 대하여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중국 시장의 완전개방과 자국공사의 북경상주 등 더 많은 권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조약을 개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조약개정 요구가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구 열강들은 전쟁을 일으킬 구실을 찾다가 마침내 1856년 애로우(Arrow)호 사건을 계기로 영불 연합군은 1856년 12월에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급기야는 불평등 조약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있는 텐진조약이 1858년 6월에 체결되었다. 텐진조약의 이행을 둘러 싼 마찰은 결국 영 · 불 연합군의 북경 점령으로 이어졌으며 북경조약의 체결을 통해 타결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권 박사는 중국이 20년이란 기간 동안 두 차례 전쟁에서의 패배와 수도의 함락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고서야 비로소 서구문명기준을 수용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한 아편전쟁은 중국과 서구관계에서의 주도권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대사건으로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질서가 붕괴되는 시발점이었으며, 동시에 단일한 지구국제사회가 형성되어가는 가시적 징표로 작용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아편전쟁은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 근대사의 기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명칭에서는 ‘아편전쟁’ 또는 ‘중(청) · 영 전쟁’ 등으로 논란이 있으며, 성격에서도 대체로 서양학자들은 ‘무역전쟁’으로 간주하는데 반하여 중국학자들은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원인이나 책임귀속 문제 등에서도 적지 않은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

 

그러나 넓게 본다면 아편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동아시아 · 서유럽문명 간의 충돌에서 찾을 수 있으며, 더 본질적인 원인은 무엇보다 영국(서유럽 열강)의 상업자본주의적 팽창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아편전쟁에 관하여 동·서 문명권 간의 충돌이란 시각에서 국제관계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제2차 아편전쟁(애로우 전쟁, 영불 연합군 전쟁)은 아편전쟁의 연장으로 볼 수 있기에, 여기서는 같이 다루고자 한다.

중국과 서유럽관계는 대체로 아편전쟁 이전까지는 중국의 주도 시기, 양차 아편전쟁 기간(1840 ~ 1860)은 과도기, 그 이후는 서유럽의 주도 시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과도기의 중국과 서유럽 간의 국제관계를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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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확대를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려는 영국에게 마침내 그 구실을 제공한 것이 아편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즉 아편문제는 전쟁의 직접적 원인으로 보이지만, 실은 전쟁의 촉매 내지 도화선이었다고 하겠다.

……

 

아편전쟁은 동아시아 · 서구문명권 간의 첫 무력충돌이자 동아시아 근대사의 기점이었다. 우선, 양대문명권은 국제관계의 기본적인 전제에도 차이가 있었으며, 외교와 무역 관념이나 제도 역시 뚜렷한 대조를 보여 주었다. 예컨대 무역을 하나의 기본적 권리라고 주장하는 서구와, 이를 시혜(施惠)차원에서 인식하는 중국과는 쉽게 봉합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중국과 영국은 양대 문명권의 최정상에 있던 나라로서, 각기 자국 문명에 대한 자부심 역시 매우 컸기에 외교적 타협은 거의 불가능하였다고 하겠다.

둘째, 아편전쟁 이전은 중국 주도시기이며,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광동무역제도였다. 그러나 시일이 흐르면서 서구는 이에 도전하기 시작하였고, 외교적 방법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점차 무력사용이라는 강경한 정책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셋째,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였음에도 이를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전통적 관념과 제도를 고수하려 하였다. 결국 중국의 태도를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더 많은 권익을 얻어내려는 서구와 또 한 차례의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당시 외국공사의 북경상주 문제를 둘러싼 양측 간의 대립은 외교 관념과 제도 나아가 문명기준 간의 충돌이란 성격을 갖는다고 하겠다.

넷째, 중국은 20년이란 시일이 소요되고 두 차례 전쟁에서의 패배 특히 수도가 함락되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서야 비로소 서구문명기준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즉 1860년 이후 중국은 서구국제사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서구 주도 시기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양차 아편전쟁은 중국(동아시아)과 서구관계에서의 주도권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대사건으로,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질서가 붕괴되는 시발점이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단일한 지구국제사회가 형성되어가는 최종단계이기도 하였다. 즉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 서구적 국제관계의 제반 관념과 규범 · 제도 등이 기존의 것들을 대체하여감으로써 점차 오늘날과 같은 국제사회가 등장하게 된것이다. 이와 같이 아편전쟁은 동아시아는 물론 전세계 국제관계사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라 하겠다.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세계화와 생태학적 관점에서)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역 / 코나투스 / 2007.04.13

 

마침내 영국과 중국은 아편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모든면에서 대단히 흥미로웠는데 특히 두 가지 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영국이 중국과 전쟁을 벌이며 새로운 형태의 전함을 사용한 것과 관계가 있다.

선체를 전부 강철로 만든 최초의 전함 네메시스는 아시아의 강에서 벌일 전투에 대비하여 특별히 설계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포함은 영국 해군이 아닌 동인도회사가 제작했다. 영국 해군은 주력함정으로 목재전함-일부는 증기기관을 사용했다-을 선호했다. 영국이 대서양과 인도양을 장악하면서 그 목재전함은 바다를 지배했다. 영국의 제독들은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작은 강철전함이 다른 유럽국가들과 벌일 전투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동인도회사는 새로운 전함을 제작하기 위해 은밀히 리버풀의 버큰헤드 아이언 워크사와 계약했다. 그 전함은 다른 전함들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길이 184피트에 폭 29피트였고 홀수는 고작 5피트에 불과했다. 120마력의 증기기관을 사용한 이 전함의 새로운 특징은 목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전부 강철로 제작했다는 것이다.

동인도회사는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다른 지역에 식민지를 확장하기 위해 강에서 활약할 수 있는 전함의 개발에 큰 관심을 가졌다. 1844년에 출간된 네메시스의 자료에 의하면, 중국과의 전쟁은 그저 평범한 강철증기선에 불과했을 이 새로운 전함의 장점을 시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로 여겨졌다. 중국 해안을 따라 흐르는 수많은 강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사실상 거의 측량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전함을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희망봉을 거쳐 영국까지 물자와 사람들과 편지를 운송하면서 강철증기선의 속도를 입증하는 데도 관심을 보였다. 더불어 아이언 워크사의 소유주도 영국 해군과 계약을 성사시키려는 목적으로 강철전함의 성능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네메시스는 불과 3개월 만에 건조되어 1840년 후반 중국해안에 도착했다. 이윽고 네메시스는 주장강의 거친 급류와 거센 바람에도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며 중국의 정크선 몇 척을 격침시켰다. 더욱이 1842년에는 중국 중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상업의 젖줄이던 양쯔강과 대운하의 교차점을 봉쇄하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담당했고 중국 남부의 수도인 난징을 위협하는 데도 크게 공헌했다. 이처럼 철저히 완패를 당한 중국의 통치자들은 영국에게 평화를 요청했다. 1842년 중국과 영국이 체결한 난징조약으로 아편전쟁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구가 중국을 공략하는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난징조약은 서구의 열강들-미국 포함-이 중국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향후 60년 동안 중국 정부의 주권을 박탈하고 관세를 올리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불평등조약’이었다. 중국은 영국에게 홍콩을 양도했고 아편상인들의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멕시코은화 2100만원을 지불했으며 더 많은 항구를 서구의 열강들에게 개방했다. 1차 아편전쟁으로 아편거래는 합법화되지 않았지만 2차 아편전쟁이 일어나면서 결국 합법화되고 말았다.

비록 1차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중국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유일한 원동력은 아니었지만 네메시스는 1793년 매카트니 경이 중국에서 쫓겨난 이후 불과 40년 사이에 영국에서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상징했다. 네메시스는 산업혁명의 수단-강철과 증기기관-이 전쟁의 수단으로 활용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강철전함은 특히 유럽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 건설에 크게 공헌했다. 실제로 19세기 유럽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진출에 대한 역사는 대부분 이런 주제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한편 영국의 강철 제조업자들은 단지 중국과의 전쟁에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영국의 인도 식민지정부와 동인도회사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아편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또 유럽국가들의 정부는 전쟁기술을 개발하고 실험하는 데 주력했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아편전쟁이었다. 영국의 면직물 제조업자들은 중국 시장의 개방을 기대하며 적극적으로 전쟁을 촉구했다. 이제 증기기관을 활용하여 기계화에 완전히 성공한 맨체스터의 면직물 제조업자들은 세계의 어떤 국가들보다 싼 가격에 수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자유무역’을 주장하고 나섰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인도식민지정부는 전쟁을 통한 수입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아편전쟁에 투입된 영국군의 3분의 2는 마드라스와 벵골 출신의 인도인들로서 영국이 식민지의 국민들을 전쟁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실제로 프랑스의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언급했다. “마치 영국은 그저 중국과의 전쟁에 활용할 목적으로 인도를 점령한 듯 했다.”

……

 

이 책에서 설명하는 근대세계의 기원에 대한 내용은 중국 경제에서 은 수요가 증가하고 중국과 인도가 초창기 근대세계에서 부와 산업생산의 주요한 근원으로 활약하던 1400년대 초반에서 시작했다. 중국의 은 수요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지금까지 다루었던 여러가지 중대한 사건들을 유발했다. 만약 중국에서 은 수요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세계경제에서 유럽의 역활은 현저히 감소했을 것이라고 말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다. 중국의 은 수요와 신세계의 은 공급이 적절히 맞물리면서 유럽은 아시아의 막대한 물자와 무역망을 확보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19세기 중국은 또 다른 물자의 수요가 발생하면서 세계경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다. 이번에는 중독성이 강한 마약인 아편이었다. 그러나 4세기 전, 은의 경우와 달리 아편의 수입과 소비는 중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더욱이 아편의 수요는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중국 정부가 아닌 무려 4,000만 명에 달하는 중독자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1800년대 중국의 아편 수요는 전 세계적으로 활발한 경제활동을 자극했다.

비록 1차 아편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영국은 중국에서 아편의 공급과 판매를 합법화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은 식민지로 확보한 홍콩을 중국의 견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운영할 수 있는 전초기지로 활용했다. 그 후 20년 동안 홍콩은 영국 아편무역의 중심지였다. 영국의 무역회사들은 중국의 수많은 중독자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해마다 무려 5만 상자(650만 파운드)에 달하는 아편을 수입했다.

아편이 중국으로 유입되고 중국의 은이 유출되면서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의 상선들은 곧장 아시아의 해안으로 진출하여 영국의 상인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1784년 미국에서 출발한 첫 번째 상선이 중국에 도착했는데, 그 시기는 미국이 독립한 지 불과 1년 후였다. 1800년대 초반 미국도 러셀컴퍼니를 필두로 하여 적극적으로 아편무역에 참여했다. 미국은 주로 터키에서 아편을 생산했고 영국은 인도에서 생산하는 아편을 독점했다. 미국이 아편무역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거두면서 동부해안의 유명한 대학들은 상당한 기부금을 확보했고 보스턴의 피바디 가문과 뉴욕의 루즈벨트 가문은 더 많은 재산을 축적했으며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전화를 발명할 수 있는 자본을 확보했다.

2차 아편전쟁-1858~1860, 이 전쟁의 원인이 된 영국 선박의 이름을 따서 애로호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이후 영국은 중국에게 아편판매를 합법화하도록 강요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마약을 판매할 수 있는 더 많은 시장이 개방되었지만 그동안 마약무역의 중심지였던 홍콩은 영국과 미국의 상선들이 곧바로 중국의 항구들로 직행했기 때문에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새로운 아편생산지가 확보되고 시장까지 개방되면서 페르시아, 인도, 중국의 상인들마저 마약무역에 가담했다. 1870년대 중국도 마약거래로 한창 열기를 뿜던 해안의 무역지대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양귀비를 재배하고 아편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수입대체’ 현상은 과거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농민들이 목화를 재배했던 바로 그 지역들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지역들에서 중요한 환금작물이던 양귀비가 더 많은 농지에서 재배되었고 결국 다른 작물들을 재배할 토지가 현저히 감소했다. 그 지역의 농민들은 더 많은 수입을 거두었지만 그만큼 식량공급에 차질이 생길 경우에 발생할 위험부담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1800년대 후반 중국으로 유입되거나 중국 내부에서 생산되는 아편의 양이 엄청난 규모로 증가하면서 중국 인구의 10퍼센트에 달하는 무려 4,000만 명이 아편을 흡연하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 중 절반이 ‘심각한 아편중독자’ 라는 사실이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은 세계에서 생산되는 아편의 95퍼센트를 소비했기 때문에 그 사회적 · 경제적 · 정치적 영향은 불을 보듯 훤한 것이었다. 거의 모든 도시들에는 아편소굴이 있었고 아편의 판매와 사용은 중국인들에게 일상생활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 아편흡연은 상류층의 취미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국민적인 소비품이 되었다. 실제로 20세기 양귀비재배와 아편제조를 통해 중국 정부는 세금을 확보했고 농민들은 현금을 벌어들였다.

이제 인도의 상황과 유럽의 산업화과정을 살펴본 후에 다시 한 번 19세기 중국의 아편소비가 세계경제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는 중국이 스스로 마약의 폐해를 자초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자기 책임이 있다는 사실과 영국이 대포를 앞세워 개방을 강요했고 그 후 중국과 인도가 아편의 소비자와 생산자로서 세계경제에서의 특별한 역활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여기서는 중국의 아편수요와 더불어 인도의 산업구조의 파괴가 영국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막대한 이익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편무역은 세계무역의 전체구조를 역전시킬만큼 엄청난 수익을 창출했다. 15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유럽은 신세계의 은을 기반으로 아시아무역에 접근했고 그 결과 엄청난 양의 은이 인도와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아편은 그 흐름을 역전시키면서 엄청난 양의 은이 영국으로 유입되었다. 역사학자 칼 트로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만약 아편이 없었다면, 아마도 대영제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첫 번째 경기침체는 1857년에 일어났지만 곧바로 경기가 회복되면서 1870년대 초반까지 호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1873년에 시작된 두 번째 경기침체는 1896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20년 동안 영국의 물가는 무려 40퍼센트까지 하락했다.

1870년대까지 대부분의 산업국가들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자유무역을 선호했고 저마다 그 혜택을 충분히 누렸다. 그러나 1873년의 경기침체는 그런 상황을 변화시켰다. 먼저 독일과 이탈리아가 자국의 면직물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올렸고 1890년대에는 프랑스, 미국, 러시아도 차례로 관세장벽을 구축했다. 오직 일본만이 서구와 맺은 불평등 조약 때문에 관세를 올리지 못했다. 새로운 관세장벽의 여파로 영국은 미국과 유럽의 다른 산업국가들에 수출하던 물량이 감소했고, 그로 인해 상당한 국제수지 악화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영국 내부에서도 보호관세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만약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한창 산업화를 시도하던 당시의 세계는 아마도 1930년대 대공황과 잇따른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발생한 배타적인 무역장벽과 같은 심각한 위축기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세계자본주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숨 막혀 죽을 뻔했던 것이다.

오직 영국만이 아시아, 특히 인도와 중국에서의 아편거래로 엄청난 무역흑자를 올리면서 체제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이런 엄청난 무역흑자를 바탕으로 영국은 부채-특히 미국과 독일에 대한 부채-를 안정시키면서 자본주의 발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실질적인 측면에서 중국의 아편수요와 영국의 아편무역은 1873년부터 1896년까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침체를 헤쳐나갈 수 있었던 한 가지 요인이었다.

 


금융대국 중국의 탄생

–    전병서 / 밸류앤북스 / 2010.05.03

 

아편전쟁의 원인을 금융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모두 중국정부의 통화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정부는 과도한 은의 집중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중국정부는 과도한 유동성을 해외로 배출해 투자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이를 국가 내부의 전비로 사용해 인플레이션을 자초했다. 치솟는 무역흑자를 그대로 방치하여 과도한 은을 보유함으로써 무역 불균형 시정을 위한 서구열강의 침략을 불러온 것이다. 국제금융시장의 환경을 이해하지 못했고 폐쇄적인 시장과 과도한 유동성의 집중이 결국 서구열강들의 먹잇감이 되는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비관적으로 본다면 현재 중국은 청나라 말기와 상황이 비슷하다.

중국산 제품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선진국 자본주의다. 중국 차를 마실수록 그 맛에 중독되는 것처럼 중국산 공산품에 전 세계가 중독되었다. 18세기에는 비단과 차였던 것이 이제 생활용품으로 바뀌었다. 또 18세기에 영국이 차와 비단 값으로 전 세계에서 모아들여 중국에 준 것이 은이었다면, 지금은 미국이 지불하는 ‘종이 달러’가 은의 역활을 하고 있다.

18세기 아편전쟁의 아픈 기억을 가진 중국으로서는 고민이 많다. ‘은의 덫’에 걸려 나라를 서방에 내준 것 처럼 ‘달러의 덫’에 걸려 국가안전이 다시 위험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2조 4000억 달러의 세계 최대 외환보유고를 안고 고민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돈 많은 중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금융위기다. 중국은 시장이 열려 외부로 자금이 유출되기 시작하면 금융위기가 올 만큼의 돈이 화끈하게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중국과 일본이 국채를 매각하겠다고 해도 미국이 겉으로는 걱정하는 체하지만 끄떡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달러로 묶어놓은 전 세계의 금융망 때문이다. 만약 일본과 중국이 미국 국채를 팔아치운다고 할 때 혹시라도 미국이 같이 죽자고 달러가치를 폭락시켜버리면 세계 최대 달러표시 자산 보유국인 중국과 일본이 가장 크게 타격을 받는다. 달러 기축통화의 지위를 이용해 채권국들을 함부로 도망갈 수 없게 묶어놓은 것이다.

 


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 (전쟁편)

–   류펑 / 김문주 역 / 시그마북스 / 2009.11.05

 

영국에는 1825년과 1837년, 2차례에 걸쳐 경제공황이 발생했다. 그러자 영국은 이 무거운 짐을 벗기 위해 해외에 상품을 투매하거나 해외국가의 자원을 쟁탈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러한 조치는 경제공황의 책임을 다른 곳에 전가시키는 한편 아편전쟁을 촉발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혹자는 “전쟁을 통해 신속히 경제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 주장한다. 하지만 영국은 아편전쟁 이후에도 수차례 경제공황에 시달렸으며, 전쟁은 결코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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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825년 이전, 영국에는 일시적으로 공업생산량이 급상승한 적이 있었다. 1825년의 공업생산량은 1820년에 비해 3분의 1가량이나 급증했으며 생철 생산량과 면화 소비량 역시 각각 58%, 39% 가량이나 성장했다. 그러나 국내외 시장의 수요는 아직 공업발전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막 나폴레옹 전쟁에서 벗어난 유럽 대륙은 처참히 파괴된 후로 아직 시장소비량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게다가 흉작까지 드는 바람에 유럽 국가들이 영국 상품을 사들일 여력은 거의 없었다. 영국의 상품수출액(유럽)은 1814년의 2690파운드에서 1825년에 이르러 1460파운드로 급감했다. 미국과 중남미 쪽의 수출액 역시 1815년의 1580파운드에서 1340파운드로 줄어들었다.

때마침 영국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하락하면서 국내시장도 큰 타격을 입었다. 1824년~1825년의 실질임금은 1792년의 고작 5분의 4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커져가면서 드디어 경제는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특히 공업생산과 대외무역 부문의 타격이 가장 커서 약 3,549개 기업이 파산하고 80여 개의 은행이 지급을 중단했다. 잉글랜드은행의 황금비축량은 1824년 3월의 1,390만 파운드에서 1825년 12월에 이르러 120만 파운드로 줄어버렸다. 면화, 양모, 생사 등의 소비량은 기존의 3분의 1로 줄어들었고 석탄소비량 역시 대폭 급감했다.

이렇게 대량생산되는 물건을 소비할 수 없게 되자 영국 지도자들은 소비를 진작시킬 여러 방안을 생각해냈다. 이 중 가장 주요한 대책으로 극동의 중국 등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방법이 논의되었다.

……

 

중국사회는 아편전쟁의 패배, ‘남경조약’을 비롯한 일련의 불평등 조약 체결 등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정치적인 독립을 유지했던 정치체제는 아편전쟁 후에 영토주권마저 빼앗겼고,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경제체제는 서서히 세계자본주의 국가의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로 전락해갔다. 중국은 점차 반식민 반봉건사회가 되었다.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  강재언 / 하우봉 역 / 한길사 / 2003.06.20

 

19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 삼국은 ‘서양의 충격'(western impact)에 크게 흔들렸다.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는냐는 각 나라의 존망을 건 중대 문제였다. 물론 동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충격이 19세기에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19세기의 특징은 유럽의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 대포와 군함, 말하자면 노골적인 무력으로 쇄국체제를 억지로 열고 포교와 무역을 강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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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이전 청나라는 광둥(광저우)을 서양무역의 유일한 창구로 지정했는데, 그 무역을 거의 독점한 것이 영국의 동인도회사였다.

그런데 1820년대 영국에서는 이제까지 귀족들의 취미였던 차 마시기 풍습이 대중화되어, 막대한 중국차를 수입했다. 영국에는 그것에 상대할 만한 수출품이 없어 수입이 초과됨에 따라 지불해야 할 은이 부족해졌다. 동인도회사는 인도산(産) 아편에 눈을 돌려 사상(私商)을 통해 중국으로 밀수하도록 했다. 그 결과 막대한 양의 중국 은이 유출되었다. 은 유출에 의한 은 가격의 상승이 중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민중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동전의 가치가 떨어졌는데도, 세금은 원칙적으로 은으로 납부해야만 했다. 은 가격의 상승은 그것이 오른 만큼의 세금이 는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흠차대신 임칙서(林則徐, 1785~1850)가 아편을 금지한 것은 중국의 자위권 행사라고 할 수 있지만, 영국의 무력 앞에 그러한 정의는 통하지 않았다. 실은 이 아편전쟁이야말로 청조 붕괴의 전초전이었는데도, 베이징 중추부의 위기의식은 매우 이완되어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먼 남쪽 변경 오랑캐와의 분쟁이 생긴 것 정도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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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광저우에서 일어난 애로호 사건(Arrow Incident)이 처음으로 청조의 중추부를 직격했다.

……

이 시기 중국에는 옛날의 강희제(재위 1661~1722) · 옹정제(재위 1723~1735) · 건륭제(재위 1735~1795)와 같은 강력한 군주가 없고, 19세기에 들어와 아편전쟁 · 제2차 아편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어리고 약한 황제가 계속 되었던 점은 같은 시기의 조선과 흡사하다.

……

일본도 중국보다 10년 정도 늦게 1854년에 미일화친 조약(美日和親條約)에 따라 개국했다. 그 전년에 에도 바쿠후에게 개국을 권유했던 미국의 필모어(Millard Fillmore) 대통령의 국서를 전달하기 위해 페리(Matthew C. Perry) 준장이 이끈 미국 군함 4척이 미우라 반도의 우라가항에 입항해 무력적인 압력을 가하고 개국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상조약은 그로부터 4년 후인 1858년에 체결되었고, 같은해 미국에 이어 네덜란드 · 영국 · 러시아 · 프랑스와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른바 안세이 5개국 조약(安政五個國條約)이다. 물론 영사재판권을 포함하는 불평등조약이지만, 다만 무력전쟁에서 패배해서 맺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국과 다르다. 따라서 통상조약의 체결을 4년 동안이나 연장해가면서 교섭 상대인 서양을 연구하고 대서양 외교의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일본으로서는 행운이었다.

또 하나 일본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개국 이전에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를 창구로 하는 네덜란드와의 통상을 통해 난학(蘭學)을 배웠고, 네덜란드 상관장(商館長)이 에도 바쿠후에 제출한 『화란풍설서』(和蘭風說書)로 유럽의 동향과 아편전쟁의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이 1842년 청나라는 영국과의 전쟁 그리고 그 전쟁에 패한 결과 난징 조약을, 일본도 미국의 무력적 압력에 굴복해 1854년에 가나가와(神奈川)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그리고 이 대외적인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대책을 세우게 되었다.

대외적 위기에 대한 반응은 중화주의의 완고한 틀에 빠져 있던 청나라에 비해 일본 쪽이 민감했다. 일반적으로 일본사에서 바쿠후 말기의 ‘지사'(志士)라고 하면 양이론자(攘夷論者)를 들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양이를 강행했을 경우에 결과는 어떠했을까. 1863년 사쓰에이 전쟁(薩英戰爭: 일본의 사쓰마 번과 영국의 전쟁), 1864년 영국 · 프랑스 · 미국 · 네덜란드의 연합 함대에 의한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은 그것이 일본의 자멸을 초래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대외 위기에 적절히 대응한 로주 수좌(老中首座)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1819 ~ 1857)야 말로, 한국에서 보면 부러울 정도로 진정한 ‘지사’였다.

그는 1843년 로주(老中 : 바쿠후 최고 관직으로 조선의 정승급에 해당함)가 된 이래 죽을 때까지 14년 동안 외교와 국방을 주재했다. 1844년에 가이보 가카리(海防掛)를 신설해 훌륭한 인재를 기용했고, 1855년에는 나가사키에 가이군 젠슈쇼(海軍傳習所), 1856년에는 반쇼 시라베쇼(蕃書調所, 나중에 도쿄 대학의 전신이 됨)를 만들어 양학 교육에 착수했다. 가이군 젠슈쇼에서 교수는 네덜란드 해군 장병이 담당했고 교련시에는 함선을 사용했으며, 반쇼 시라베쇼의 교수와 조교는 모두 일본인 난학자가 맡았다. 바쿠후 말기의 존왕양이 사상은 바쿠후 타도와 왕정복고의 원동력이 되기는 했지만 메이지 유신 후의 ‘문명개화’ 노선이 성공한 요인은 바쿠후 말기 양학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중국에서 1840년 아편전쟁에 비해, 1860년 영 · 불 연합군이 텐진에서 베이징으로 침입했던 제2차 아편전쟁(애로호 사건)은 조선의 위정자들에게도 대외적 위기의식을 증대시켰다. 대원군의 군주권 강화정책은 대외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쇄국양이책과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제국 (EMPIRE)

–  닐 퍼거슨 / 김종원 역 / 민음사 / 2006.11.30

 

영국 무역(특히 인도 아편 수출)에 중국 항구가 개방되길 원했을 때도, 영국인들은 다시 해군을 파견했다. 물론 1841년과 1856년 아편전쟁은 아편 그 이상의 것을 둘러싼 것이었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1841년 전쟁을 또 하나의 미개한 동방의 전제주의에 자유 무역의 이익을 전래하기 위한 십자군 운동으로 묘사했다. 한편 그 충돌을 끝낸 난징조약은 아편을 명백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제2차 아편전쟁(애로호 사건)은 부분적으로는 영국의 위신을 지키는 것 자체가 목적인 싸움이었다. 지브롤터 태생의 유대인이 영국 국민으로서 그의 권리가 그리스 당국에 침해당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리스 항구들이 봉쇄되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821년 이후 중국 당국이 금지한 아편 수출이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는 재정에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면 아편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믿기는 매우 어렵다. 1841년 전쟁의 결과로 홍콩을 획득함으로써 얻은 유일한 실질적인 이익은 그곳이 자딘 매디슨 같은 회사에 아편 밀무역 사업을 위한 기지를 제공했다는 점이었다. 노예 무역을 폐지하기 위해 배치되었던 바로 그 해군이 또한 마약 무역을 확장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은 실로 빅토리아 시대 가치관의 가장 터무니없는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다.

 


신 중화주의

–  윤휘탁 / 푸른역사 / 2006.06.17

 

원래 유가적(儒家的) 전통 문화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동아시아 사회에 침략해 오기까지 동아시아인들의 정신 세계를 지배해온 강력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군림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동 · 서양 간의 힘의 우열이 드러나면서 그 위상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당시 유가적 전통 문화는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한 중화주의 우월감과 사회 내적인 차별 질서를 그 근저에 깔고 있어서 주변 민족 혹은 이질적인 다른 사회에 대해 근원적인 경멸감을 배태하고 있었다. 그 결과 유가적 전통 문화 속에 침잠해 있던 중국인들(‘소小중화주의’를 자처하며 중국 문화 속에 매몰된 조선인들을 포함해서)은, 주변 민족이나 서양 사회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들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가적 전통 문화는 서양 세력의 침략에 직면해서도 서양의 본질과 그들의 객관적인 세계적 위상을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그에 대처할 수 있도록 효율적인 정신적 무기로써 작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격변하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양육강식의 논리가 위력을 떨치던 근대 사회에서 동아시아 종주국인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것을 계기로,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서양의 우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서양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하거나 범람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동아시아 침입과 주도권 장악은 서양인들에게 문화적 우월감을 심어주었고, 서구적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한 일본인들에게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무한한 긍지로 여길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당시 동아시아 사회의 근대화는 사실상 서구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서양에 대한 패배감과 열등감 · 분노를 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동 · 서양 간의 문화적 우열감은 급기야 양 지역의 종족적 우열을 고착화시키는 양상으로까지 비화되기 시작하였다.

 


화폐전쟁 3

–  쑹훙빙 / 홍순도 역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07.25

 

그렇다면 청나라 정부의 중앙은행은 어떻게 몰락했는가? 주요 원인은 국제 은행가들이 중국의 본위화폐인 은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본위화폐가 흔들리면 금융 시스템은 바로 마비되고 경제 역시 침체된다. 또한 국가의 정치와 방위 시스템도 와해되며, 급기야 타국의 침략에 맞서 싸울 힘을 잃고 남에게 좌지우지되는 운명을 면치 못한다.

국제 은행가들이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중국의 화폐시스템을 정복해야 했다. 따라서 아편전쟁은 무역전쟁이라기보다 중국 화폐인 은을 독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아편전쟁이 인도, 미국, 아프리카 또는 일본, 한국, 동남아 등지에서 발생하지 않고 유독 중국에서만 발생한 이유도 모두 여기에 있었다.

아편무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중국의 본위화폐인 ‘은’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이 대중국 아편무역을 개시하기 전까지 중국은 국제무역에서 뚜렷한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다. 중국의 찻잎, 도자기, 비단 등 대표적인 3대 특산물은 세계 각지의 시장에 널리 수출돼 큰 인기를 얻었다.

……

중국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약400년 동안 시장화 수준과 화폐경제의 발전 속도에서 유럽을 한참 앞질렀다. 바로 이 때문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한 13만3000톤의 은 중 4만8000톤이 결국 중국으로 유입될 수밖에 없었다. 국제무역의 기본 구조를 살펴보면, 국제무역에서 거래되는 상품 대부분이 중국에서 생산된 반면 서구 국가들은 세계의 주요 자원 대부분을 약탈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상품이 물밀듯이 서구 시장에 수출되자 서구의 은은 끊임없이 중국으로 유입됐다.

이처럼 서구의 은이 끊임없이 동방에 흘러들면서 세계 금융 질서는 심각한 불균형에 직면했다.

유럽의 은이 장기간 일방적으로 중국에 유입되면서 급기야 17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유럽에 은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은 가치의 하락과 더불어 대외무역 역시 크게 활기를 잃었다. 1649~1694년까지 유럽의 연 평균 은 유통량은 1558~1649년의 연 평균 유통량보다 무려 50% 이상 감소세를 보였다. 반면 황금 유통량은 50% 가깝게 증가했다.

은의 감소세는 이해가 되는데 황금은 어떻게 유통량이 증가한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7세기 초 황금과 은의 가격 비율은 중국 광주에서 1:5.5~7, 영국에서 1:16이었다. 따라서 유럽의 은은 중국에서 고수익 벌크 화물 구매와 더불어 중국의 금과 바꾸는 데도 사용됐다. 황금과 은의 가격 비율이 2배 이상 나는 차이를 이용해 유럽의 은으로 중국, 일본 및 인도에서 황금을 바꾸면 폭리를 취할 수 있었다.

……

유럽의 은이 동방으로 유입되는 과정과 아시아의 금이 서구로 흘러드는 과정은 동시에 진행됐다. 그 결과 영국에는 황금, 중국에는 은이 대량으로 비축됐다. 이때 문제의 관건은 금과 은 가운데서 어느 것이 본위화폐의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동서양의 향후 수백 년간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대영제국의 국력이 크게 팽창하면서 1717년에 벌써 금본위제 시행을 위한 토대가 완벽하게 마련됐다. 영국이 법적으로 금본위제를 확립한 것은 1816년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100년 전부터 이미 금본위제를 시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영제국 은행가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런던을 세계 금융 중심지로 삼고 전 세계적으로 금본위제를 실시하여 대영제국이 잉글랜드 은행을 통해 전 세계에 파운드화 신용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구미 선진국들을 금본위제의 핵심 멤버로 삼고 기타 개발도상국들을 파운드화의 속국으로 만들어 전쟁과 폭력을 동원해 이 시스템을 수호하고, 파운드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이용해 전 세계 자원을 최대한 장악하고 지배하고자 했다. 최종적으로는 전 세계의 부와 전 인류를 지배하는 것이 목표였다.

영국이 전 세계에 금본위제를 보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다른 국가의 은본위제를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 그중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대적하기 가장 어려운 국가는 바로 중국이었다.

국제 은행가들은 다년간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중국의 은본위제에 치명적 일격을 가할 무기를 발견했으니, 그것은 바로 아편이었다. 그리고 이 전략을 구체적으로 추진한 주체는 바로 동인도회사였다.

 


<관련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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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동인도회사의 강철 증기선 네메시스호의 위력

 

http://en.wikipedia.org/wiki/Nemesis_(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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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파트나(Patna)에 있던 아편 상품을 보관하는 창고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안병직 교수의 5분 세계사] 중국, 170년 전 ‘아편전쟁’ 치욕 갚다

[역사는 살아있다/아편전쟁上]각국의 교과서를 비교하다

[역사는 살아있다/아편전쟁下]안토니 베스트 박사

[역사는 살아있다/아편전쟁下]기억을 만드는 것

[역사는 살아있다]제1장 아편 전쟁과 메이지 유신 (상)

[역사는 살아있다]제1장 아편 전쟁과 메이지 유신 (하)

[금주의 소사] 아편전쟁 일으킨 영국, 1841년 홍콩 점령

中경제 농락하는 서구자본… ‘아편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어제의 오늘]1839년 린쩌쉬, 영국 아편 120톤 소각

[다시 포효하는 중화제국]아편전쟁 굴욕 상징 임칙서…170년만에 굴기의 영웅으로

[영화 속 경제]황금과 소금의 공통점은

[O2/핫 이슈]경제 변동기에 살펴본 금과 은의 세계사

프랑스군이 외규장각 도서 탐낸 진짜 이유

지연문명 (르우안웨이 / 심산)

아편전쟁 (1840년 ~ 1860년) – Opium Wars

29 thoughts on “아편전쟁 (1840년 ~ 1860년) – Opium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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