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 –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

아시아의 저력이 부상하고 있지만, 현재 서구西歐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G7 국가를 보면 일본을 제외하면 모두 서구이니… 그럼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을까?  논란이 많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1492년 콜럼버스의 대서양횡단 항해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친 인도양 항해를 변곡점으로 보고있다. 실제로도 그 두 사건은 대단히 중요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그 두 항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여부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인다. 유럽중심적 해석은 두 항해를 필연적인 서구의 부상에서 핵심적인 단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1500년대 세계의 부와 권력의 실제적인 구조라는 광범위한 세계적인 맥락에서 그것을 중요한 발견이라 규정한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대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500

 

우선 주요 항해를 나열해 보면;

– 정화(鄭和)의 남해 원정 : 1405년 ~ 1433년의 7회 원정

– 엔히크(Henrique O Navegador) : 엔히크를 필두로 한 포르투갈인들의 아프리카 서해안 항해. 1446년 북위 8도의 기니에 이르렀다.

–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 : 1488년 희망봉 발견

–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 1492년 ~ 1504년까지 아메리카 대륙으로 4회 항해

–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 1497년~99년, 1502년~03년, 1524년 3차례에 걸쳐 인도로 항해했다.

– 카브랄(Cabral) : 1500년 브라질 표착

– 발보아(Balboa) : 1513년 태평양 발견

– 마젤란(Ferdinand Magellan) : 1519년 ~ 1521년 세계일주

– 카르티에(Jacques Cartier) : 1534년 캐나다 지역 탐험

–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 1497년 첫 탐험에 나섰다. 아메리카라는 이름은 그의 이름 ‘아메리고’에서 딴 것이라 한다.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옮김 / 코나투스 / 2007.04.13

 

애덤 스미스는 1492년과 1498년에 일어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해를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국부론』에서 ‘아메리카의 발견과 희망봉을 거쳐 동인도 제도에 이르는 항로의 개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가지 사건이다’ 라고 적었다. 마르크스도 이 두사건을 세계사에서 결정적인 사건으로 간주했고 20세기 일부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유럽의 식민지정책, 노예제도,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 착취를 서구의 부상을 설명하기 위한 기본적인 배경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수많은 비非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유럽의 부상이 식민지의 착취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스페인의 신세계 정복을 기점으로 시작된 식민지정책보다 앞서 언급한 유럽 문화의 잔인한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서구의 부상이 자칫 서구의 고유한 장점에 의한 것이 아닌 식민지 정책으로 귀착되는 오류를 피하기 위해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학자들은 서구 부상의 기원을 과거 유럽의 역사에서 찾기 위해 노력했다.

……

14세기 구舊세계-유라시아와 아프리카-는 3개의 거대한 체제 안에서 서로 연결된 8개의 무역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동아시아체제는 중국과 적도에 인접한 동남아시아의 향료군도를 인도와 연결했고, 중동-몽고체제는 지중해 동부에서 중앙아시아와 인도까지 유라시아대륙을 연결했다. 그리고 프랑스 샹파뉴의 거대한 시장과 제노바와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무역로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체제는 유럽에서부터 중동과 인도양을 연결했다. 이런 체제들은 부분적으로 중복되었는데, 아프리카 북부와 서부는 유럽과 중동체제에 연결되었고 아프리카 동부는 인도양체제에 연결되었다.

……

역사학자들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대서양횡단 항해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친 인도양 항해가 근대세계의 부상에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다는 것에 동의한다. 실제로도 그 두 사건은 대단히 중요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그 두 항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여부에 대해서는-그것이 새로운 시대를 의미했던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그토록 많은 변화를 가져왔던 것인지에 대해서는-이견을 보인다. 유럽중심적 해석은 두 항해를 필연적인 서구의 부상에서 핵심적인 단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1500년대 세계의 부와 권력의 실제적인 구조라는 광범위한 세계적인 맥락에서 그것을 중요한 발견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관점에서 인도양은 그 당시의 세계적인 교류에서 가장 중요한 교차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중국을 비롯해 인도와 중동의 이슬람국가들과 그 주변 국가들이 활발히 교역을 펼쳤고 유럽은 아시아에서 생산되는 부의 원천에 접근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 주위를 맴돌았다.

……

1500년부터 1800년까지 신세계에서 생산된 은 가운데 약 4분의 3 가량은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생산성이 높은 경제를 유지했던 중국은 신세계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은을 기반으로 초창기 근대경제의 대부분을 주도하던 중추세력이었다. 따라서 중국이 없었다면 포토시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 결코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포토시가 없었다면 스페인은 결코 유럽에 제국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어느 역사학자의 말처럼 “은은 세계를 돌면서 세계를 돌아가게 만들었다.”

……

유럽이 신세계의 엄청난 부를 확보했음에도 18세기에 이를 때까지 세계경제에서 아시아에 뒤쳐졌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실제로 그 당시 세계적인 상황을 바라보는 한 가지 방식은 유럽이 아시아보다 상대적으로 빈곤했고 산업의 생산성도 열악했기 때문에 유럽이 내부적으로 아시아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요컨대 유럽의 주변적인 상황은 유럽 내부의 치열한 경쟁을 유발하여 아시아가 장악한 세계에서 부와 권력을 축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만들었다.

……

서구의 부상은 일부 국가들과 그 국민들이 역사적 사건들과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어느 시점에 이르러 다른 국가들과 그 국민들을 지배하고 부와 권력을 축적했던 과정에 대한 내용이다. 만약 부와 권력, 서구의 특권과 관련된 우연들의 본질에 대해 이해한다면 이제 더 이상의 미스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그 행운의 근원을 깨닫고 겸손해야 하고, 그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미래에는 새로운 행운이 그들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비록 지난 세기의 유럽중심적 이데올로기가 신화로 굳혀진다고 할지라도 서구유럽은 영원히 세계를 지배하거나 그 운명의 혜택을 누릴 수는 없다.

 


지연문명

–  르우안웨이 / 최형록,김혜준 역 / 심산 / 2011.05.10

 

아시아가 주도한 이러한 세계경제 체제의 확장은 유럽에 지대한 지연 경제적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이른바 콜럼버스 교류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유럽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귀금속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마침내 아시아가 선두 주자로 있었던 세계경제에 더욱 깊숙하게 참여할 수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유럽인이 아시아 경제에 참여했던 방식에도 도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수탈과 착취였고 영락없는 해적 행위였고, 야만적인 수탈과 살인 및 강도 짓이었다( 근대 초기 포르투갈인이 인도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항로에서 자행한 모든 행위들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서기 16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수탈한 총 가치는 10억 파운드에 달했다. 그중 1750년에서 1800년 사이에만 영국은 인도에서 무려 1억~1억 5000만 파운드에 이르는 금화를 수탈했다. 이러한 종류의 거대한 자본 유입으로 영국 신산업혁명을 뒷받침한 모든 자본이 형성되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최소한 영국의 신산업혁명에 대한 투자를 촉진했고, 특히 증기기계와 방직기술 방면에서 투자를 촉진했다고는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만약 아시아 각 지역과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경제적 착취와 수탈이 없었다면, 근대 자본주의가 그렇게 순조롭게 형성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산업혁명 또한 그렇게 시기적절하게 유럽에서 발생할 수 있었는지는 모두 의문스럽다.

……

세계체제 이론가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냈다. 이전에 성행한 서양중심론은 이치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황당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기 1500년 이전의 서양은 중심으로 간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단지 중심에 종속된 하나의 주변 지역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 출신인 세계체제론 학자 사미르 아민(Samir Amin)은 많은 역사적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이러한 결론을 도출했다. 서기 1500년까지, 상품 잉여의 규모와 수립에 근거해 무역 규모를 계산해보면, 세계 역사에서는 단지 하나의 중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 개의 주요 중심이 있었다. 즉 중국 · 인도 · 지중해 서아시아 지역(로마와 비잔틴 제국 시기부터 이란 사산 왕조 시기까지, 또한 아랍 칼리프 제국 시기까지)이다. 그리고 유럽과 일본은 동남아시아 · 중앙아시아 ·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주변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서기 1000년 이전에 유럽은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주변으로 간주할 만하다. 하지만 서기 1500년부터 유럽인은 모든 아메리카 대륙을 자신의 경제체제로 포함시키면서 지속적인 발전 시기로 진입했다. 설령 그렇더라도 늦게는 1800년까지 세계 각 주요 지역의 발전 수준의 차이는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다. 1800년에서 1950년 사이에 비로소 확연한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애덤 스미스는 그에 뒤이은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희망봉을 돌아 동인도로 가는 항로의 “발견”에서 세계사의 결정적 전환점을 찾아냈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사건들이 인류에게 궁극적으로 어떤 혜택을 가져다줄지에 관해서는 마르크스보다 덜 낙관적이었다.

그것들의 성과는 이미 너무나 큰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발견 이래 아직 2~3세기밖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것들의 성과의 모든 크기가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떠한 인간 지혜도 장차 이 위대한 사건들로부터 인류에게 어떠한 이익 · 불행이 생길지를 예견할 수는 없다. 세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들을 어느 정도 결합시키고, 서로의 부족분을 경감시킬 수 있게 하며, 서로의 즐거움을 증대시킬 수 있게 하고, 서로의 산업을 북돋우게 함으로써 그 발견들의 일반적 경향은 이로운 것 같다. 그러나 동 · 서인도의 원주민들에게는, 그 발견들로부터 생길 수 있었던 모든 상업적 이익들이 무서운 불행 속에서 상실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불행은 그 발견들 자체의 속성에 있는 어떤 것들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긴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발견들이 이루어졌던 특정시점에서 우연히 유럽인 쪽이 힘이 월등해 멀리 떨어진 나라들에서 온갖 불의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장차, 그 나라들의 주민이 더 강하게 되거나 유럽 주민들이 더 약하게 되어, 세계 모든 지역의 주민들이 용기 · 힘의 균형상태에 도달해 상호의 공포심을 고무시킴으로써 독립국들이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서로서로의 권리를 존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힘의 균형을 확립하는 방법으로서는, 나라들 사이의 광범한 교역이 자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가져오게 될 지식 · 온갖 종류의 개량들의 상호교류가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 같다.(Smith 1961: II, 141/스미스 2007:770~1)

이 구절이 묘사하는 과정은 자본주의 세계경제 형성에 관한 브로델의 견해와 다소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정복자 서구의 행운과 피정복자 비서구의 불행이 단일 역사과정의 결합된 결과로서 나타난다는 점, 이런 단일 역사과정의 결과를 서술하고 평가하기 위해서 장기적 지평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현재 우리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시장경제 참여자들 사이에서 비용과 이득의 배분을 결정할 때 “힘”이 중심적이라는 점.

물론 스미스는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 용어가 사회과학에 도입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였다. 그러나 정복자 서구가 이른바 대발견의 결과 수립된 더 광범한 시장경제의 이득 대부분을 얻을 수 – 그리고 피정복자 비서구에 그 대부분의 비용을 부과할 수 – 있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이 “힘의 우위”였다는 스미스의 평가는 시장경제의 층위 위에서 그리고 시장경제 층위에 대한 반명제로서 뚜렷한 자본주의 층위가 출현하는 데 불가결한 구성요소가 국가와 자본의 융합이었다는 브로델의 평가와 일치한다.

……

14세기 후반과 15세기에 제노바의 추세와 사건들은 이런 제노바의 원거리 교역망에 대한 압박에 의해서, 그리고 이와 동시에 지중해 세계경제와 이탈리아 도시국가체계에서 제노바의 권력지위의 하락에 의해서 심대하게 영향을 받았다. 중국으로 가는 제노바의 중앙아시아 통로의 급속한 폐쇄, 오스만 투르크, 베네치아, 카탈로니아-아라곤 권력이 제노바의 지중해 교역으로 쇄도한 것, 제노바의 대도시 영역을 둘러싼 모든 강력한 도시국가들의 부상, 이러한 상황 형세가 제노바인들에게는 매우 희망 없어 보였을 것이다.

……

그러나 깊이 들여다 보면, 이 위기에 대응하여 제노바의 교역 및 축적망은 근본적으로 구조조정되어, 장기적으로 보면 제노바 상인 은행가들을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자본가계급으로 바꾸어 놓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

간단히 말해서 15세기 제노바 자본가계급은 근본적 난관에 빠져 있었다고 묘사될 수 있다. 한편에서, 앞선 시대의 원거리 무역 기회를 상실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이윤에 손상을 주는 경쟁, 싸움과 끝없는 분란이 일어났고, 또한 세계경제 전역에 흩어져 사용되지 않고 사용될 수 없는 사업망은 소실되어 같다. 다른 한편, 이런 경향들을 반전시키기에 충분한 규모의 새로운 원거리 무역의 기회를 개방하려면, 그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계산불가능하기도 한 위험, 따라서 합리적인 자본주의 사업의 지평을 넘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달리 말하자면, 이윤형성의 논리 그 자체가 제노바 자본의 자기 팽창을 제약했고, 이로써 자기 파괴의 위협을 불러왔다.

이런 난관에서 벗어나는 가장 분명한 길은 이베리아인 같은 영토주의적 통치자들과 정치적 교환관계에 들어서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계산 가능한 이윤 이외의 동기에서 새로운 상업적 공간을 개척하려 추동되었고, 이들은 또한 제노바 자본가계급이 가장 잘 제공해 줄 수 있는 종류의 서비스, 즉 적절한 통화 및 상품 거래를 자유롭게 조직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공인되지 않은 해역으로 이베리아가 팽창할 때 십자군정신은 금전적 비용과 이득에 대한 끊임없는 합리적 계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전진할 수 있게 해주는 탁월한 보증이었다. 그리고 르네상스정신에 대한 집착은, 그 팽창의 추진자이자 조직자들이 그 당시 가장 크고 가장 자금이 풍부하고 가장 연결고리가 많던 상인계급-더욱이 이 계급은 이미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자리를 잘 틀었다-과 연합하는 이점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게 해줄, 마찬가지로 훌륭한 보증이었다. 이 연합이 형성되고 이른바 신대륙 발견이 이를 공고화하자, 제노바 자본주의는 마침내 그 장기 위기에서 구원받아 새로운 대팽창의 계기를 향해 진격하였다.

 


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  제임스 M. 블로트 / 박광식 역 / 푸른숲 / 2008.08.14

 

나는 유럽의 부와 군사력이 하루아침에 다른 문명들을 앞지르게 된 이른바 유럽의 발흥은 1492년 이전에는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유럽이 그 전에 이미 갖고 있던 고유한 내적 속성들 따위가 아니라 순전히 신세계의 자원을 손에 넣는 데 다른 구세계 문명들에 견주어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유럽의 지리적 위치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

근세적 의미의 유럽 중심주의가 실제로 시작된 것은 1492년이었다. 첫 아메리카 항해에서 돌아와, 콜럼버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종족, 거기다 그가 보기에는 쉽게 정복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종족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더구나 이 종족이 사는 땅을 점령하면 유럽인들은 황금을 비롯해 다른 자원들까지 얻게 될 것 같았다. 유럽인들은 확실히 이 아메리카인들보다 우월한 것 같았고 이 우월성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점 역시 분명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아메리카 정복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그 결과 얻게 된 이익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다. 이제 유럽인들은 의미가 있을 만큼 큰 규모로는 처음으로 자신들과 비유럽인들을 구분하게, 그것도 자기들이 정말로 상대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면서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6세기에 등장한 유럽 중심주의에는 두 가지 핵심적인 특징이 있었으니, 하나는 유럽의 우월성이 식민 지배의 성공으로 확인된 것 같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의 우월성이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

나는 유럽의 시장 경제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쪽과 어느 정도 비슷한 방식으로, 또 대체로 같은 속도로 발달했다고 믿는다. 이들 사이에 차이가 나타난 것은 1492년 이후, 그러니까 아메리카 정복에 따라 유럽의 초기 자본가 집단들로 부가 흘러들어서는, 이들이 경쟁 관계에 있던 아프리카나 아시아 쪽 상인 집단들을 제압하는 과정을 시작할 만한 우위와 힘을 얻게 되는 무렵부터였다. 유럽 중세 경제는 어떻게 봐도 독특하지 않았으며 경이로운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

마르크스주의자, 비마르크스주의자를 가리지 않고 꽤 많은 학자들이 내가 지금 막 정리한 것과 대강은 비슷한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러니까 봉건적 또는 공납적이라고 할 생산양식에서 출발해 자본주의라 할 생산 양식을 향해 나아가는 변화 과정들은 중세 말에는 – 꼭 잉글랜드나 북해 연안의 저지대들뿐만이 아니라 – 세계 많은 지역들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또 농촌 지역은 물론이고 도시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고들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안드레 군더 프랭크나 재닛 아부-루고드, 사미르 아민Samir Amin의 견해와도 많이 다르지 않은 내 관점을 밝히자면 이 이행은 1492년의 시점에서는 이 세 대륙 모두에서 대체로 같은 속도, 같은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봉건주의를 벗어나 자본주의로 (혹은 자본주의 비슷한 어떤 것으로) 나아가는 역사적인 흐름들이 중세 말 동반구 여러 지역에서 정말로 나타났고 북서유럽이 어떤 의미에서든 선도자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유럽은 일어서고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일어서지 못한, 게다가 북서유럽은 산업 자본주의와 제국까지 발전시켰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내가 이제 내놓을 설명에서는 다시 장소의 문제에, 곧 위치 또는 접근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먼저 아주 많은 상업-해운 중심지들을, 그것도 모두 계속 발전하고 있으며 모두 직간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업-해운 중심지들을 갖고 있는 그런 동반구를 머릿속에 그려놓고 시작한다. 그런데 이베리아 반도 쪽 중심지들이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어떤 중심지들보다 아메리카에 훨씬 가까웠고 또 훨씬 쉽게 갈 수 있었다. 이윽고, 아메리카의 금광과 은광, 플랜테이션에서 부가 흘러 들어오고, 이 과정에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유럽 노동력을 착취하고, 나머지 식민지 세계에서 부를 더 짜내고, 그 결과 유럽에서 축적이 일어난 덕에, 일부 유럽인들은 – 새로 형성되고 있던 도시와 농촌의 전기적 자본가 계급, 곧 초기 부르주아들은 – 이제 유럽에서는 봉건주의를 해체하고 유럽 밖에서는 자신들과 경쟁하던 전기적 자본가 집단을 박멸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확신하건대,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있는 이 초기 과정이 유럽에서 일련의 내적 변화들을 불러일으켰고, 이 변화들은 17세기의 정치적 전변으로 이어졌고, 다시 최종적으로 산업혁명과 산업 자본주의를 낳았다. 자본주의의 수립은 세계적 규모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부의 역사

–  권홍우 / 인물과사상사 / 2008.06.09

 

단재 신채호 선생이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라고 말한 것처럼 경제의 역사 또한 투쟁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경제사를 구성하는 투쟁은 각양각색이다. 종교적 편견에 의한 억압이나 피부색에 대한 차별, 보다 많이 차지하겠다는 탐욕이 어우러져 경제의 흐름이 이어져왔다. 이 책의 출발점을 1492년부터 잡은 것은 이 시기부터 분명하게 나타난 차별과 억압, 이에 대한 대응이 근대 이후 오늘날까지 각국의 흥망성쇠와 역사의 흐름을 결정했다는 판단에서다.

대항해 시대로부터 자원 전쟁까지를 시간적 공간으로 삼았다는 점은 다소 아쉬움이 남은 대목이다. 태고적부터 경제활동이 있었고 경제학자와 경제학설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본격 태동하기 이전인 중세 시대부터 오늘날의 수요공급이론은 물론 화폐금융이론과 비슷한 학설들이 존재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럼에도 굳이 1492년을 출발선으로 잡은 것은 동양과 서양의 경제력이 이때부터 역전되기 시작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역사교육과 역사인식

–  양호환 / 책과함께 / 2005.05.31

 

세계사 인식의 한 방법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른바 ‘초기 근대(early modern,近世)’라는 단계는 이슬람사회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는 견해도 이 점과 관련해 되새겨볼 만하다. 서아시아 문명과 유럽 문명의 상호 작용은 이슬람교의 흥기 이전부터 이뤄졌다. 이는 인도와 중국의 고부가가치 상품을 획득하고 그 무역 이득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졌는데, 평화적 교류보다는 주로 전쟁에 의존했다. 이 당시 페르시아는 로마와 인도 · 중국 사이의 유라시아 중계무역으로 10배의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자 기원전 25년 로마제국이 홍해와 페르시아를 거치는 인도항로의 무역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원정대를 보냈으며, 그 이후 십자군전쟁과 콜럼버스의 항해에 이르기까지 양측의 동서무역로 쟁탈전은 계속됐다.

홍해 무역로 확보에 실패하고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인도항로를 개척한 후에야 유럽 각국은 16세기 초부터 인도 무역을 위해 동인도회사를 세울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상선은 동남아시아의 바타비아에서 처음 향료를 싣고 돌아가서 25배의 순익을 남김으로써 아시아 시장에 직접 개입해 대박을 터트리려는 오랜 숙원을 성취했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조잡한 제조품은 아시아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 유럽인은 확대일로에 있었던 아시아 시장에서 국지적 · 주변적으로만 참여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인도(남아시아)와 유럽을 비교하면 서아시아와 유럽보다 더 큰 격차를 발견하게 된다. 교과서에 나오는 인도나 동남아의 사회는 종교적이고 정적이며 낙후한 이미지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래서 16세기 말 유럽이 처음부터 경제 · 정치 · 군사적 우위를 갖고 이 지역을 지배한 것처럼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영국의 인도 사학자 스피어(P. Spear)에 따르면, 인도에 들어간 영국은 1700년까지 무굴제국의 신하와 같은 처지였고, 무굴제국은 유럽인을 자신의 정치적  · 상업적 게임에 고용된 졸(卒) 정도로 간주했다. 1750년 전후 왕위계승 전쟁으로 무굴제국의 국세가 급격히 약화되는 상황이 올 때까지는 유럽의 어느 나라도 정치 ·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다.

……

18세기까지 중국과 유럽의 관계를 보면, 중국 경제가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했고 산업혁명 직전의 영국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았다는 연구는 빈 윙보다 20여 년 앞서서 구미의 연구자들에게서 나왔다.

 


역사의 오류

–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 / 이지영 옮김 / 열음사 / 2008.04.10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1492년은 어쩌면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일 것이다. 2000년대가 시작되기 전부터 ‘세계화’는 21세기를 대표하는 개념이 되었다. ‘더 작은 세계’를 지향하는 이 개념은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행위의 결과가 점점 더 국제적인 파급력을 갖게 되면서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

서구적  세계화는 소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의 신대륙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 이루어졌던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무역이나 십자군전쟁 같은 타 문화권 침략전쟁 등이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1492년이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때를 기점으로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생화학자이며 노벨상 수상자인 알베르트 쇤트 죄르지(Albert Szent Gyorgyi, 1893~1986, 헝가리 출생 미국 생화학자)는 발견의 개념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발견이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보았던 것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해내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북미 대서양 연안에 발을 내디뎠을 때, 아직 모든 사람들이 아메리카를 보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가 최초로 그 대륙을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메리카 대륙은 콜럼버스 덕분에 세계사에 의미 있는 첫 등장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긍정적인 결과와 부정적인 결과들이 이어졌다.

이 1942년에 유럽역사는 현대로 향하는 첫발을 내디뎠고, 세계사에 결정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이탈리아의 항해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관련 그림>

 

1

 

– 대항해시대의 주요 항해 : 콜롬버스, 카보토, 카르티에, 카브랄, 바스코 다가마, 마젤란, 발보아의 탐험

 

 

2

– 세계 GDP에서 주요 경제 주체들이 차지하는 비율. 영국의 경제학자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

 

 

 

3

1세기 즈음의 세계 교역로. 대항해 시대 이전까지 이런 교역로가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다.

 


<참고자료>

 

위키백과 : Age of Discovery

아메리카의 발견?

유럽은 어떻게 아메리카를 정복했나?

유럽은 어떻게 아메리카를 착취했나?

[理知논술/역사에서 논술의 길 찾기]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바스코 다 가마

대항해시대 개막의 동기는 오스만 터어키의 중동지배가 원인 아니다.

 

대항해시대 –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
Tagged on: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