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1929년~1939년)과 세계 혁명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에 대한 많은 의견과 주장이 있다. 혁명적인 1930년대 국제 체제의 관점에서 아래의 책 등을 발췌하여 나름의 공부를 정리한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29


대공황이 일어난 지 거의 한 세기가 지났지만, 발생 원리는 기본적으로 2008년 금융 위기와 다르지 않았다. 지난 1세기 동안 미국은 두 번의 장기 부채 위기를 겪었다. 첫 번째는 1920년대 호황에 이어 발생한 1930년대 대공황이었고, 두 번째는 2000년대 초 호황에 이어 2008년에 시작된 금융 위기였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1930년대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파급 효과로 민간 주도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이 크게 흔들렸다. 1929년 10월 월가의 추락으로 촉발된 ‘대공황’이 선진국을 강타했는데, 그 엄청난 충격은 역사상 최대였다.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에서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되는 노동인구가 일자리를 잃었다. 모든 나라가 19세기에 그리고 대체로 1930년대 초까지 정부가 경제에 간섭하지 않는 ‘자유방임주의’를 고수했는데, 이 전통적인 교리는 영구적으로 신뢰를 잃었다. 많은 나라가 더 높은 수준의 국가 개입주의를 선택했다. 당연하게도 정부와 일반 대중은 세계를 재앙으로 이끌면서도 스스로는 더 부유해진 금융 및 재계 엘리트들의 지혜에 의문을 제기했고, 다른 유형의 ‘혼합’경제에 관해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통적인 형태의 사유재산과 더불어 기업에 대한 다양한 수준의 공공 소유를 허용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금융시스템과 더 전반적으로 민간 주도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해 강력한 규제와 감독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19세기가 영국의 세기였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시장경제 · 자유무역 · 금본위제는 모두 영국적 발명품들이었다. 이러한 제도들은 20세기가 들어오면 세계 도처에서 붕괴된다. 파시즘 체제로 귀결된 독일 ·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등은 그저 그 붕괴가 좀 더 정치적이었고 좀 더 극적이었을 뿐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 경제는 해체되었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 문명 전체가 전환을 겪게 된바, 이 둘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고리는 바로 국제 금본위제의 붕괴였다. 이 요인의 결정적 중요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한다면 유럽이라는 기차를 파멸로 가는 철로 위에 올려놓은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1931년에 영국이 금본위제를 정지하고 1933년 미국까지도 금태환을 정지함으로써 영국 헤게모니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금본위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 1931년 영국, 1933년 미국의 금본위제 폐지 : http://yellow.kr/blog/?p=1090


금본위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사반세기 이상 동안 국내 및 국제적 통화 관계의 틀을 형성했다. 각국의 통화는 요구에 따라 금으로 태환될 수 있었으며 고정환율을 통해 국제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금의 운반이 국제수지 결제의 최종 수단이었다.

1929년의 대공황이 세계 무역의 큰 부분을 휩쓸어버리지만, 그래도 시장경제라는 방법 자체에 큰 변화가 생겨난 것도 아니었고, 지배적인 사상에 변화가 생겨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금본위제의 최종적인 실패는 바로 시장경제의 최종적인 붕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금본위제가 사라지자 평화의 이해를 대변하는 두 조직, 즉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과 그것의 주요 집행 도구들-로스차일드 집안과 모건 집안-이 정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전 세계를 묶어놓은 황금줄이 끊어졌다는 것은 곧 모종의 세계 혁명이 시작될 것이라는 신호였다.

※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대 (1866 ~ 1931) : http://yellow.kr/blog/?p=3214


세계혁명, 그 주된 지표들은 세계정치에서 고도금융(국제금융그룹)의 소실, 국제연맹의 붕괴와 자력갱생 제국들에 대한 선호, 독일에서 나치주의의 등장, 소련의 5개년 계획, 그리고 미국에서 뉴딜의 개시 등이었다. “대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19세기의 이상은 드높았고, 그 영향력은 뒤이은 10년간 계속되었지만, 1940년이 되면 국제체계의 모든 흔적이 사라졌고, 몇몇 고립지를 제외하면 각 국가는 완전히 새로운 국제 조건 속에서 살고 있었다”(Polanyi 1957:23,27).


모든 앞선 세계화폐체계-영국의 것을 포함해-에서, 국제금융그룹의 회로와 망은 이윤 획득을 위해 그것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사적 은행가와 금융가들의 수중에 확고히 장악되어 있었다. 세계화폐는 이렇듯 이윤 추구 활동의 부산물이었다.

대공황이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연준(Fed)이 통화 공급을 줄였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한 프리드먼(Milton Friedman)과 슈워츠(Anna J. Schwartz)는 미국 통화 정책의 주도권이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옮겨간 것이 대공황에서 아주 큰 역활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모겐소(Henry Morgenthau Jr.)가 자랑한 적이 있듯이,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와 모겐소는 실로 세계 유동성에 대한 통제권을 사적 수중에서 공적 수중으로, 런던과 월스트리트에서 워싱턴으로 이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브레턴우즈는 국제금융그룹에 대한 루스벨트의 결별을 다른 수단을 통해 지속시킨 것이었다. 뉴딜에 대한 루스벨트의 주된 추동력은 민족경제 회복을 목표로 한 미국 정책들을 런던과 뉴욕이 주장하는 건전화폐 원칙에서 자유롭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대통령으로서 그의 첫 결정 중 하나는 달러의 금 태환을 중지시킨 것이었는데, 이는 국제 금 본위의 잔재를 파괴하였다. 그는 이어서 그의 정부를 동원하여 민족 경제 회복을 촉진하고 관리하였고, 미국 은행제도를 정밀 점검하였다. 가장 중요한 개혁 중 하나인 1933년 글래스-스티걸 법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여, 모건 가의 미국 금융시장 지배에 최종 일격을 가했다(Frieden 1987 : 54~5).

고도금융(국제금융그룹)과의 결별이 거의 마무리된 것은 1933년 7월 루스벨트가 “이른바 국제 금융가라는 낡은 숭배물들”을 맹비난하고, 세계화폐 규제에 다소의 질서를 복원하려 시도하는 런던 경제회의를 사보타주했을 때였다. 월가는 경악하였고, 제임스 워버그(James Warburg) 같이 영향력 있는 은행가이자 국무부 자문역이었던 인물은 사직했다.


소위 ‘헤게모니 안정론(theory of hegemonic stability)’을 적용하여 안정에 필요한 영향력은 그것을 제공할 자세와 능력을 가진 압도적인 경제 강대국, 즉 헤게모니 국가가 존재할 때만 적절히 제공된다고 주장한 찰스 P. 킨들버거는 세계경제의 리더십이 영국 런던의 화이트홀(Whitehall)에서 미국 워싱턴의 화이트하우스(White House)로 옮겨가면서 대공황이 한층 더 격렬해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두 개의 중심을 가진 금융 시스템이나 리더십이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교체되는 과정에 있을 때 금융 시스템이 불안정성을 내재하게 된다는 생각은 에드워드 네빈(Edward Nevin)이 1931년 금본위제의 붕괴를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


1940년의 국제 조건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전례 없는 규모와 광포함과 파괴성을 제외하면, 국가간체계의 열강들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반복적 양상을 재생산하는 또 하나의 군사적 대치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대치는 곧 미국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새로운 세계질서의 수립으로 귀결되었는데, 이 세계질서는 기능을 상실한 영국 세계질서와는 핵심적인 측면에서 달랐고, 새로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확대재생산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질서의 주된 윤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이미 드러났다.

※ 브레턴우즈 체제(Bretton Woods) : http://yellow.kr/blog/?p=1093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차이점은 명백하다. 전자는 여전히 19세기 유형에 충실한 것으로서, 단순히 세력 균형 체제가 작동을 멈추는 바람에 터져나오게 된 강대국들 간의 갈등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이미 전 지구적인 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대격변의 한 부분인 것이다.

레이 달리오(Ray Dalio)도 1945년 이전의 끔찍했던 기간은 빅 사이클 말기의 과도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획기적인 변화와 구조 조정을 거쳐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았다.


현재의 상황도 엄중하다. 1930년대와 같은 경제 위기와 새로운 질서를 목격하는 날이 점차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미국의 해외 대부 및 투자의 중단은 월스트리트 붐의 붕괴와 그에 뒤이은 미국경제의 불경기 때문에 항구적이 되었다. 급격한 단기 자본 회수 또는 도피에 직면하여 한 나라씩 자신의 통화를 보호해야 했으며, 그 방식은 평가절하거나 외환 관리였다. 1931년 9월 영국 파운드화의 금 태환 중지는 런던 시티의 재운이 달려 있는 세계 상업 · 금융 거래망의 최종적 파괴로 이어졌다. 보호주의가 창궐하였고, 안정 통화의 추구는 포기되었으며, “세계자본주의는 그 민족국가 경제들의 이글루와 그와 연결된 제국들로 후퇴하였다”(Hobsbawm 1991: 132).

이는 칼 폴라니가 “금실을 끊어 낸” 것이라고 추적한 “세계혁명”이다. 그 주된 지표들은 세계정치에서 고도금융의 소실, 국제연맹의 붕괴와 자력갱생 제국들에 대한 선호, 독일에서 나치주의의 등장, 소련의 5개년 계획, 그리고 미국에서 뉴딜의 개시 등이었다. “대전쟁이 끝날 무렵 19세기의 이상은 더 높았고, 그 영향력은 뒤이은 10년간 계속되었지만, 1940년이 되면 국제체계의 모든 흔적이 사라졌고, 몇몇 고립지를 제외하면 각 국가는 완전히 새로운 국제 조건 속에서 살고 있었다”(Polanyi 1957: 23,27).

사실, 1940년의 국제 조건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전례 없는 규모와 광포함과 파괴성을 제외하면, 국가간체계의 열강들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반복적 양상을 재생산하는 또 하나의 군사적 대치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대치는 곧 미국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새로운 세계질서의 수립으로 귀결되었는데, 이 세계질서는 기능을 상실한 영국 세계질서와는 핵심적인 측면에서 달랐고, 새로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확대재생산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질서의 주된 윤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이미 드러났다. 브레턴우즈에서 새로운 세계화폐체계의 기반이 수립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새로운 폭력 수단이 등장하여, 향후 새로운 세계질서의 군사적 버팀목이 무엇이 될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국가형성과 전쟁형성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규범과 규칙이 국제연합 헌장 속에 제시되었다.

……

모든 앞선 세계화폐체계-영국의 것을 포함해-에서, 고도금융의 회로와 망은 이윤 획득을 위해 그것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사적 은행가와 금융가들의 수중에 확고히 장악되어 있었다. 세계화폐는 이렇듯 이윤 추구 활동의 부산물이었다.

……

모겐소가 자랑한 적이 있듯이, 루스벨트와 모겐소는 실로 세계 유동성에 대한 통제권을 사적 수중에서 공적 수중으로, 런던과 월스트리트에서 워싱턴으로 이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브레턴우즈는 고도금융에 대한 루스벨트의 결별을 다른 수단을 통해 지속시킨 것이었다. 윌슨 행정부에서의 복무와 국제연맹에 대한 지지를 포함해 그의 국제주의적 경력에도 불구하고, 뉴딜에 대한 루스벨트의 주된 추동력은 민족경제 회복을 목표로 한 미국 정책들을 런던과 뉴욕이 주장하는 건전화폐 원칙에서 자유롭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대통령으로서 그의 첫 결정 중 하나는 달러의 금 태환을 중지시킨 것이었는데, 이는 국제 금 본위의 잔재를 파괴하였다. 그는 이어서 그의 정부를 동원하여 민족 경제 회복을 촉진하고 관리하였고, 미국 은행제도를 정밀 점검하였다. 가장 중요한 개혁 중 하나인 1933년 글래스-스티걸 법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여, 모건 가의 미국 금융시장 지배에 최종 일격을 가했다(Frieden 1987 : 54~5).

고도금융과의 결별이 거의 마무리된 것은 1933년 7월 루스벨트가 “이른바 국제 금융가라는 낡은 숭배물들”을 맹비난하고, 세계화폐 규제에 다소의 질서를 복원하려 시도하는 런던 경제회의를 사보타주했을 때였다. 월가는 경악하였고, 제임스 워버그 같이 영향력 있는 은행가이자 국무부 자문역이었던 인물은 사직했다.

……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미국 금융자본은 이렇듯 무너져 가는 영국 세계시장체계를 끝까지 옹호했고, 결코 힐퍼딩이 제기했듯 그 체계를 지양하는 행위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것을 지양한 선도적이고 지배적인 행위자는 어떤 금융자본주의도 아니라, 수직적으로 통합되고, 관료제적으로 관리되는 다단위 기업체의 형성을 통해 미국에서 등장한 법인자본주의였다. 일단 이런 기업들이 미국 국가가 에워싼, 거대하고, 다각화하고, 자급자족적이고, 역동적이고, 잘 보호된 경제 공간 내에서 공고화되자, 이 기업들은 세계경제 전반에서 영국 스타일의 시장경제나 독일 스타일의 법인자본주의 모두에 비해 결정적인 경쟁우위를 누리게 되었다.

……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미국 정부가 미국의 보호주의 전통을 반전시키려는 뉴욕 금융계의 요구에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은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해체되고 있는 세계시장 안에서 민족들이 “함께 일하기를” 꺼려한다는 것이 이 나라들이 곧 “각각 썩어 갈” 것임을 뜻한다고 예견했을 때, 물론 노먼 데이비스와 월가의 다른 대변인들은 매우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진단의 귀결이 19세기 세계시장체계의 최종적 쇠락을 반전시키고 세계의 민족들이 각기 썩어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미국의 힘이 되거나 실로 미국의 이익이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시장체계는 자신의 모순의 무게 – 금 본위제에 대한 런던과 뉴욕 금융계의 한결같은 지지를 포함해 – 에 눌려 붕괴해 가고 있었다. 미국이나 어떤 다른 정부가 이 체계를 자기 파괴로부터 구원할 수 있었을지 매우 의문스럽다. 그러나 미국이 무언가 할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보더라도, 낡은 축적체제가 지속되었을 때, 실제 그 축적체제의 최종적 붕괴에 이어 일어난 정도로 미국의 부와 힘의 대약진을 낳을 수 있었을지 훨씬 더 의문스럽다.

이렇듯 미국 법인자본주의는 영국 시장자본주의의 축적구조를 파괴하는 강력한 행위자이자, 세계경제의 유동성 · 구매력 · 생산성을 미국으로 집중시키는 강력한 행위자였고, 또 계속 그런 상태로 남았다.



거대한 전환

– 칼 폴라니 / 홍기빈 역 / 길 / 2009.06.30


…… 사실상 1920년대의 세계에 지배적 영향력을 가진 것이 국제적 은행가들이었다는 것도, 또 1930년대에 들어 그들의 영향력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는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20년대에는 아직 금본위제가 안정과 번영의 회복에 최고의 전제 조건이라고 믿었고, 그 결과 직업적인 수호자들이었던 은행가들이 내놓는 요구는 무엇이든 그를 통해 분명히 환율이 안정될 것이라는 약속만 있다면 아무도 그것을 너무 부담스럽다고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29년 이후 이러한 목표의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자 최고의 지상 과제는 국내 통화의 안정으로 바뀌었고, 이를 달성할 자격 요건으로 보자면 은행가들은 그 누구보다도 뒤처지는 존재였던 것이다.

시장경제의 파괴가 가장 급작스럽게 나타난 곳이 바로 화폐 영역이었다. 물론 농업 진흥 관세도 외국 농산물의 수입을 방해하여 자유무역을 깨버렸다. 또 노동 시장의 협소화와 규제 또한 고용 계약 당사자들이 임의로 협상할 수 있는 여지를 크게 줄여버렸다. 하지만 화폐 영역에서만큼 공식적으로 시장 메커니즘이 급작스럽고도 완벽하게 균열을 일으켜버린 사례는 노동의 경우에서도 토지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어떤 시장에서도 1931년 9월 21일에 일어난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는 물론이고, 그로 촉발된 1933년 6월 미국의 마찬가지 조치에 비견할 만한 대사건은 생겨난 적이 없었다. 비록 이때가 되면 1929년의 대공황이 세계 무역의 큰 부분을 휩쓸어버리지만, 그래도 시장경제라는 방법 자체에 큰 변화가 생겨난 것도 아니었고, 지배적인 사상에 변화가 생겨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금본위제의 최종적인 실패는 바로 시장경제의 최종적인 붕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경제적 자유주의가 시작된 지 100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그 동안 시장경제는 보호주의의 반작용에 부닥치게 되었고, 이제 그것이 시장경제의 마지막 보루에까지 밀고 들어온 것이다. 자기조정 시장의 세계는 이제 사라지고 새로운 사상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자급자족의 고립주의를 내세운 정치 세력이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은 채 곳곳에서 폭발적으로 터져나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앞세워 사회를 전혀 새로운 형태로 주조해나갔으며, 당대의 사람들의 압도적 다수는 이러한 사태 앞에서 넋을 놓고 망연자실한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공황의 세계 1929-1939

– 찰스 P. 킨들버거 / 박정태 역 / 굿모닝북스 / 2018.01.30


14. 1929년 대공황에 관한 하나의 설명

안정자 역활을 해줄 나라의 부재

…가령 대공황의 원인을 미국 통화 정책(프리드먼), 금본위제의 잘못된 적용(로빈스), 디플레이션 실책(케인스), 장기간의 침체(한센), 구조적 불균형(스베닐손)에서 찾는 주장들도 무시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 마지막 장의 제목을 1929년 대공황에 관한 “설명(The Explanation)”이 아니라 “하나의 설명(An Explanation)”이라고 붙인 것이다.

이 책의 설명은 이렇다.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이 그토록 광범위했고 심각했으며 오랫동안 지속됐던 이유는, 어느 나라든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역활을 수행함으로써 국제 경제 시스템을 안정시킬 책무를 짊어져야 했는데, 영국은 그럴 능력이 없어서, 미국은 그럴 의사가 없어서 결국 국제 경제 시스템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1) 불황에 빠진 상품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개방된 시장을 유지할 것

(2) 경기 사이클을 중화中和하는, 혹은 적어도 안정적인 장기 대부를 공급할 것

(3)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환율 시스템을 지켜나갈 것

(4) 각국의 거시경제 정책은 서로 보조를 맞춰나갈 것

(5) 금융 위기 시 채권 매입 혹은 유동성 공급을 통해 최후의 대부자 역활을 할 것

내가 생각하기에 이 같은 역활은 국제 경제 시스템에 책임을 지는 단일 국가가 한데 모아 일괄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이뤄졌다면, 그리고 특히 그 나라가 금융 위기 시 최후의 대부자로서 제 역활을 다했다면 경제 시스템은 시장 메커니즘이라는 수단을 통해 구조적 혼란 양상을 조정해 나갔을 것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

나의 논점은 이렇다. 문제는 국제 경제 시스템에 뿌리깊게 잠복해 있는 불안정성과 안정자 역활을 해줄 나라의 부재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영국은 앞서 열거했던 다섯 가지 역활들을 있는 힘껏 수행했고, 금본위제의 신화, 즉 안정적인 환율과 매끄러운 거시경제 정책의 보장이라는 막강한 우군의 도움에 힘입어 세계경제를 안정시켰다. …… 그러나 1929년과 1930년, 1931년에 영국은 국제 경제 시스템의 안정자로서 그 역활을 할 수 없었고, 미국은 그 역활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모든 나라가 자국의 이익만 보호하려는 노선을 추구하자 세계 공동의 이익은 바닥을 드러냈고, 이와 함께 모든 나라의 개별적인 이익마저 말라버렸던 것이다.


불황에 빠진 상품들의 시장을 유지하는 것

…… 영국은 1846년부터(혹은 그보다 좀더 지난, 정부 재정을 위한 관세를 제외한 모든 관세를 철폐한 1860년부터) 1916년까지 자유 무역을 고수했다. 1873년 이후 영국은 비록 고속 성장 국가는 아니었지만 자유 무역을 계속 견지해나갔는데, 그것은 자국의 사양 산업이 수입품과 경쟁을 하는 부문이 아니라 수출 부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이 불황기에도 자유 무역을 고집스럽게 견지했던 것은 사실 세계경제에 공헌한다는 의식 때문이라기 보다는 영국 특유의 문화적 지체와 아담 스미스 이래의 자유 무역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바로 1930년의 스무트-홀리 관세법이다. …… 그것이 미국의 국제수지에 미친 영향 때문도 아니고 채권국에 걸맞지 않는 행동이어서도 아니다. 그것이 결정적이었던 이유는 미국의 무책임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메이저 국가들 가운데 어느 나라도 불황에 빠진 상품들에 대해 시장을 제공하지 않았고, 자국의 통화 가치가 평가절상되는 것을 감내할 용의도 없었다. 대외 지불상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에 장기 자본 대출이나 유가증권 매수 등으로 자금을 제공할 의사는 더더구나 없다 보니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적다고 하는 합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에 의해 디플레이션이 계속 진행됐던 것이다.


경기 사이클을 중화하는 대부

…… 할 래리(Hal Lary)는 1943년에 쓴 저서 《미국과 세계경제(The United States and the World Economy)》에서 미국이 수입을 줄인 것과 동시에 해외 대부도 줄였다는 기본적인 팩트를 적어두었다. 해외 대부의 감소는 실제로 주식시장 대폭락에 앞서 나타난 것이다. 투자자들이 도스 차관에 뒤이어 불어 닥쳤던 해외 채권 붐에서 눈을 돌려 1928년 봄부터 일었던 국내 주식 붐으로 선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영국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1929년에는 1928년보다 해외 대부를 더 큰 폭으로 줄였다.


안정적인 환율 시스템의 유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이후 환율이 다시 회복하기도 하고 조정을 거치기도 했을 때 신속하게 균형 수준에 맞춰 안정시키는게 중요했다. 하지만 너무 신중했던 게 문제였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제학자들은 구매력 평가 지수를 계산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영국이 입은 해외 자산 손실이나 1926년 당시 국내로 복귀할 적절한 시점을 기다리며 해외에서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의 대규모 자본처럼 구조적인 변수는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경우 순전히 겉멋에 취해 환율을 결정하기도 했다. 이런 식의 환율 결정 패턴이 시스템에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곧이어 공황이 닥쳐왔고, 주변부에 있던 많은 나라들이 해외 대부의 급감과 상품 수출 가격의 폭락, 수출액의 급감에 직면해 통화 가치의 평가절하에 나섰다. 어느 정도의 평가절하 경쟁은 불가피했다.


유기적인 거시경제 정책

금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미국과 프랑스가 불태환 정책을 펼쳤던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금본위제는 그 근간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통화 정책은 대체로 자국의 국내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됐는데, 1927년의 예외적인 사례도 있었지만 이때의 통화 정책은 훗날 실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독일은 1923년에 겪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그 뒤로 인플레이션에 대해서는 정신병적으로 반응했다. 적극적인 재정 정책은 실제로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스웨덴조차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통화 정책은 전혀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발 빠른 놈만 살아남는다(devil take the hindmost)”며 모두가 제 살길만 찾아 달려가는 형국이었다.


최후의 대부자

최후의 대부자가 하는 역활은 두 가지 영역이 있는데, 하나는 국내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국제적인 것이다. 국내 영역에서 최후의 대부자는 경계해야 할 시점을 제때 알아차렸다.

……

그러나 국제 영역에서 최후의 대부자는 그야말로 실종 상태나 다름없었다.


영국의 리더십 상실

1931년이 되자 영국이 더 이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 1933년 세계경제회의에서 영국이 세계의 리더로서의 역활에서 물러났음이 분명해졌다. 영국은 이제 영연방을 키워가면서 파운드 화를 자유로이 관리해나갈 수 있게 됐고, 세계적인 프로그램을 구상하는 역활은 대부분 미국으로 넘어가게 됐다.


미국의 리더십 결여

…… E.H.카(E.H. Carr) 같은 역사가의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1918년에 거의 모든 나라의 동의로 미국에게 세계를 이끌어갈 리더십이 주어졌으나…… 미국이 이를 사양했다.”…… 미국은 자신의 국제적인 역활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


국가간 협력과 책임의 문제

…… 1927년 세계경제회의 때는 아이디어가 없었지만 1933년 세계경제회의 때는 아이디어가 없었던 게 아니다. 그러나 리더십을 발휘할 역량을 가졌던 그 한 나라가 국내 문제에 넋이 나간 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 E.H. 카는 분명하게 말한다. 영국의 지배에 의한 평화를 기대하는 건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었겠지만, 미국의 지배에 의한 평화는 “정말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일 것”이라고 말이다. 밴시터트(Vansittart)는 1936년의 지불연장 협정과 독일의 라인란트 점령을 언급하면서 1933년 세계경제회의에 대해 이렇게 썼다. “행동이 필요했을 때는 그 2년 전이었는데, 당시 두 나라 (영국과 미국) 정부는 서로 책임을 미루었듯이 말이다.” 이두제가 됐든, 트로이카 체제가 됐든, 아니면 7개국 정상회담이나 주요 10개국 모임처럼 좀더 많은 형태의 집단 책임제가 됐든, 그런 체제에서는 책임을 지는 나라가 없는 것이다.


리더 국가의 교체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미국 통화 정책의 주도권이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옮겨간 것이 대공황에서 아주 큰 역활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두 사람은 “대단한 사건은 그 기원 역시 대단하다는 전통적인 일반원칙”을 감안하면 이것이 억지처럼 들릴 수 있다면서도, 때로는 작은 사건들이 연쇄 반응과 누적 효과를 통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이 내세운 원칙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지만 주도권을 가진 곳이 옮겨감으로써 불안정을 야기했다는 두 사람의 시각에는 의구심이 들지 않는다. 만일 프리드먼과 슈워츠가 논의의 초점을 미국의 통화 정책 상황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더라면, 후버에서 루스벨트로 대통령직이 이양되면서(통화 공급이 대폭 확대된 이후에 이뤄졌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내가 판단하기에) 세계경제의 리더십이 화이트홀(Whitehall)에서 화이트하우스(White House)로 옮겨가면서 대공황이 한층 더 격렬해졌다는 점을 지적했을 것이다.

이 같은 견해, 그러니까 두 개의 중심을 가진 금융 시스템이나 리더십이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교체되는 과정에 있을 때 금융 시스템이 불안정성을 내재하게 된다는 생각은 에드워드 네빈(Edward Nevin)이 1931년 금본위제의 붕괴를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


군소 국가들과 프랑스의 역활

양차 세계대전 사이 프랑스의 위상은 억지로 책임을 떠안아야 할 만큼 그렇게 크지도 않았고, 또한 전혀 책임을 지지 않고 한가하게 있어도 될 만큼 그렇게 작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 부러워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안정을 뒤흔들어버릴 만한 힘은 갖고 있었지만 안정을가져올 만한 힘은 갖지 못했다.


공공의 이익 대 개별의 이익

냉소주의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리더십은 그에 따르는 고통을 나름의 명성을 높임으로써 충분히 보상받으며, 리더십을 통해 공공의 복지에 헌신하고 있다고 제아무리 주장하더라도 결국 그 기본 관심사는 개별적인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자유 무역이란 경제적으로 선두에 있는 나라가 다른 나라들이 자신의 길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막는 무기일 뿐이라고 말이다. …… 영국은 책임을 받아들였다. 물론 5000만 실링 차관 건에서 여실히 드러났듯이 영국에게는 책임을 짊어질 능력이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은 세계경제의 안정을 담보할 의사가 없었다.

……

공공의 이익을 제대로 도모할 수 없었던 영국은 점점 더 자국의 에너지를 개별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쪽에 쏟았다. 관세에 대한 케인스의 지지라든가 1931년 이후 환율 안정화를 검토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 좋은 예다.

……

세계경제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안정을 책임지는 나라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 나라는 하나라야 한다는 점이다.



황금 족쇄 (금본위제와 대공황, 1919~1939년)

– 배리 아이켄그린 / 박복영 역 / 미지북스 / 2016.12.10


금본위제와 대공황은 완전히 별개의 책 두 권이 필요할 만큼 아주 다른 주제로 보일 수도 있다. 여기서 이 두 주제를 결합하려고 하는 것은 금본위제가 대공황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나의 믿음 때문이다. 1920년대의 금본위제는 국제금융시스템의 취약성을 심화함으로써 1930년대 대공황이 발생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었다. 금본위제는 미국에서 발생한 불안정 요인을 세계 여타 지역으로 전파하는 메커니즘이었다. 금본위제는 미국에서 처음 발생한 불안정을 증폭시키는 역활을 하였다. 그런 충격을 상쇄할 수 있는 조치를 가로막은 일차적 장애물이 바로 금본위제였다. 금본위제는 정책 담당자들이 은행 파산과 금융 패닉의 확산을 막지 못하게 하는 제약 조건이었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국제 금본위제는 세계 대공황의 핵심적 원인이었다. 같은 이유로 금본위제를 포기한 후에야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이 가능했다.

물론, 금본위제는 19세기에는 이런 불안정화 효과를 발휘하지 않고도 유지되었다. 이런 대조적 결과를 낳은 것은 전전(戰前, 1차 세계대전 이전) 금본위제의 정치적 기초와 경제적 토대가 1차 세계대전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전전 체제의 두 가지 기초는 정부의 금본위제 유지 의지에 대한 신뢰와 국제 협력이었다. 신뢰성은 금융 자본이 안정적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유도했으며 그럼으로써 경제 안정을 뒷받침했다. 협력은 위기 시기에 한 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보다 많은 자원으로 금본위제를 방어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1차 대전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 때문에 신뢰와 협력, 두 가지 모두가 허물어졌다. 신뢰성의 약화 때문에 협력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자, 경제 위기는 불가피했다.

1차 대전 및 그 이후에 나타난 신뢰와 협력의 약화는 정치적, 경제적, 지적 변화를 모두 반영하고 있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소득 분배와 국가의 적절한 역활을 둘러싼 논란이 점점 격해졌다. 국제 정치 분야에서는 전시 부채와 전쟁 배상금을 둘러싼 싸움이 협력의 전망을 어둡게 만들었다. 경제적 이유와 정치적 이유로 금본위제의 전통적인 수호자인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위협받게 되었고 결국은 훼손되었다. 각국은 원칙에 대한 의견 불일치 때문에 각자의 경제 문제를 서로 다르게 진단했으며, 그 결과로 공동의 처방을 위한 각자의 노력은 장벽에 부딪혔다. 광범위한 경제적 변화로 국내 금융 기관 및 국제 금융 기관들의 취약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국제 협력이야말로 재앙을 피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

1928~1929년 연준의 통화 긴축은 국제금본위제 작동을 통해 다른 나라의 더욱 극적인 통화 긴축을 유발했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

…… 자신들의 금 평가를 유지해야 했던 외국 중앙은행들은 국제수지 적자와 준비금 상실로 인해 금본위제에서 이탈해야 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미국의 이자율 상승에 보조를 같이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들 중 많은 나라는 이미 상품 무역에서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대외적 안정을 위해 미국으로부터의 자본 수입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해외 대부 감소는 이들의 대외 포지션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국내 지출의 대폭 감소만이 금본위제의 지속적 유지를 위한 유일한 선택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전 세계 경기 위축이 극심했던 원인 중 적어도 일부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불안정 요인이 그렇게 강력했던 이유는 단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적으로 정책이 긴축으로 선회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선회의 근저에는 국제금본위제가 있었으며, 이것은 여러 나라의 경제정책을 서로 묶어 놓는 역활을 했다.

나아가 미국의 초기 경기 하락이 심각했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런 연결 때문이었다. 1929년 3분기에 미국 경제가 위축되기 시작했을 때 해외 경제가 이미 침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경기 하락 속도도 매우 빨랐다. 미국의 긴축적 통화정책은 이미 취약한 상태에 있던 외국의 국제수지에 압박을 가중시켰고, 그 결과로 외국 중앙은행들은 긴축적 통화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 생산자들은 국내시장 매출을 해외시장 매출로 전환시켜 생산과 고용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때 행동의 여지가 상당히 넓었던 중앙은행은 연준과 프랑스중앙은행뿐이었다. 두 은행 모두 경제 활동의 위축을 상쇄하기 위한 확장적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의 사건들이 두 기관의 최고 책임자들의 시야와 행동을 옥죄고 있었다. 연준은 1920~1921년 침체기 동안 추구한 청산 전략의 효과가 비교적 양호했다는 기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조건이 변한 지가 한참 된 1930~1931년에도 그 정책을 고수했다. 마찬가지로 인플레이션 정책의 정치적 비용을 기억하고 있던 프랑스중앙은행 역시 디플레이션이 현실적이고 실재하는 위험이 되었을 때도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

금본위제 작동의 문제점과 유례없는 실업률 상승은 1930년대 경제 위기의 두 가지 주요 측면 이상이었다. 두 가지는 서로 얽혀 서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이 이 책의 핵심 주제이다. 금본위제의 문제점은 1929년에 시작된 생산 급감과 실업 증가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생산과 고용의 연쇄적 하강은 금본위제의 작동을 더욱 어렵게 만들면서 경기를 더욱 위축시켰다. 하지만 독감을 앓고 있는 환자의 고열처럼, 증세의 심각성이 임박한 회복을 알리는 시점이 다가왔다. 생산과 고용 급감이 극도로 심해지면서 금본위제가 더 이상 유지 불가능하게 되었다. 국제 무대에서 금본위제 장치가 사라지자 경기 회복이 시작되었다.

전간기 금본위제가 가진 문제들은 금본위제의 작동 환경을 1차 대전 이전 상황과 비교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차 대전 이전의 국제통화체계의 작동은 금 태환성 유지 의지에 대한 신뢰와 국제 협력에 달려 있었다. 이 신뢰는 중앙은행가나 다른 정부 관리들이 정책을 잠재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목표들에 맞추라는 압력에서 자유로웠기에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 독립성은 통화정책과 실업 간의 관계가 명확히 이해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국제통화정책이 국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아직은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했다. 전간기에 통화정책 결정자들에게 조율된 그리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대응을 요구하며 금본위제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재정적 혼란은 1차 대전 이전에는 흔치 않았다.

전쟁 이전의 금본위제 유지 의지에 대한 신뢰는 당시의 독특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 덕분이었다. 하지만 금본위제의 지속은 한편으로는 국제 협력에 달려 있었다. 비상 시기가 아닐 때에도 금본위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중앙은행들의 정책 조율이 필요했다. 위기시에는 약세 통화 지지를 위해 집단적 지원이 필요했다. 집단적 지원을 통해 가장 취약한 상황에 빠진 나라를 지원함으로써, 위기가 불안정한 구조물 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위험을 최소화했다. 종종 안정화 개입에 필요한 재원이 금본위제를 유지하는 어느 한 나라가 보유한 재원을 초과했기 때문에 집단적 지원이 필요했다. 사실, 대부분의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공격 목표가 된 것은 정상 시기에 최강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잉글랜드 은행이었다.

이런 설명은 고전적 금본위제가 최근 문헌들이 전형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사실은 더 다극적인 체제였음을 의미한다. …… 따라서 1913년 이전에 금본위제 작동에서 영국과 잉글랜드은행이 독특한 역활을 했다고 가장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필요한 상황이 있을 때마다 국제 협력이 자동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오랜 기간의 학습과 적응을 거친 후인 1차 대전 직전의 수십 년 동안에만 국제협력이 빈번히 이루어졌다. 1920년대와 달리, 전쟁 채무와 배상금의 실타래처럼 국제적 분열을 유발하는 논란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국제 협력이 가능했다.

……

1차 대전은 이런 환경을 바꿔 버렸다. 정치적 압력으로부터의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되면서 금본위제 유지 의지의 신뢰성도 훼손되었다. 전후 유럽의 인플레이션 및 안정화 경험을 거치면서 긴축적 통화정책과 실업 사이의 연결고리에 대한 명시적 분석이 정립되어 널리 알려졌다. 이런 분석의 구체적 내용은 나라마다 달랐지만, 이런 분석이 이루어진 모든 곳에서 통화정책이 국내 경제 상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고금리와 신용 수축으로 피해를 입는 개인과 집단들은 그런 정책의 실행에 점점 더 강력히 저항했다.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영향력 증가로 인해 통화정책의 목표를 고용에 맞추어야 한다는 압력이 높아졌다. 재정 불균형과 분배상의 갈등은 통화정책 결정자들의 중압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금본위제 유지 의지의 신뢰성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민간 자본이 1차 대전 이전처럼 안정화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시장이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책 당국이 표명한 의지를 성급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시험했다.

그런 시험들 때문에 국제 협력이 한층 더 필요해졌다. 하지만 과거에 이런 협력을 가능하게 했던 결정적 전제조건들이 전쟁으로 모두 와해되었다. 전쟁 채무와 배상금을 둘러싼 국가 간 정치적 대립이 온갖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전쟁 경험에서 촉발된 정치 개혁으로 정부의 지위가 약화되었다.

……

이런 변화 때문에 금본위제가 대공황으로 난타를 당했을 때 그 충격을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공황은 금본위제 작동과 관계없이 단순히 1929년에 불쑥 나타난 불운이 아니었다. 그 이전의 금본위제 작동이 대공황의 발발에서 중요한 역활을 했다. 문제의 근본 원인은 1차 대전에 있었다. 이 전쟁이 1920년대 전 시기를 관통한 국제 결제 패턴의 불균형을 낳았다. 이 불균형이 국제통화체제의 압박을 크게 가중시켰다. 전쟁으로 미국의 경쟁력이 강화되었으며 미국은 순 대외 채무국에서 순 대외 채권국으로 변모했다. 전쟁의 결과로 배상금과 전쟁 채무 상환 자금이 서쪽으로 흘러가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전쟁은 미국의 국제수지 포지션을 근본적으로 강화한 반면에 세계 다른 지역의 국제수지는 약화시켰다. 따라서 국제 결제 패턴과 전간기 금본위제의 안정성은 미국이 자국의 국제수지 흑자를 재환류하려는 의지가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1928년에 연준이 통화 긴축을 하고 미국의 해외 대부가 감축되었을 때 국제통화금융시스템이 압박을 받았다. 미국에서 유럽 및 중남미로의 자본 유입이 사라지자, 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확대되었다. 준비금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앙은행들은 긴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미 국제수지 포지션이 취약해진 나라들에서는 가장 급격한 조치가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은 미국보다 더 취약한 국제수지 상황에 있었다. 연준의 통화 긴축은 이미 취약해진 외국의 국제수지 상황에 추가 압박을 가했으며, 그 결과로 다른 나라에서는 훨씬 더 심각한 통화 긴축이 촉발되었다. 단순히 미국의 통화정책 변화만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들이 결합되면서 1929년 경기 하강의 토대가 형성 되었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면 지금까지 잘못 이해된 대공황의 여러 측면들이 꼭 맞아떨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기 하강이 가시화되기 전부터 이미 자본 수입국에서 경기가 둔화되고 있었던 이유는, 미국 정책과 국제 결제 패턴의 불균형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다른 나라도 1928년에 훨씬 더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채택하고 연준보다 훨씬 더 급격히 정책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미국의 경기 하강은 시작 단계에서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먼저 시작된 다른 나라의 침체가 미국 수출의 때이른 감소로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금본위제라는 제약이 한 역활을 이해하면, 대공황이 진행된 이후에 통화 및 재정 당국이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도 이제 알 수 있게 된다. 일방적으로 공공 지출을 확대하고 통화 및 신용을 추가로 공급하는 조치는, 국제수지 적자 상태에 있지 않은 국가에서는 국제수지 적자를 초래하고 이미 적자 상태에 있어 중앙은행이 대응 노력을 하고 하고 있던 나라에서는 적자를 더욱 확대시킬 것이 분명했다. 어느 경우든 금 태환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어려움에 빠진 은행시스템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조차 정부의 금본위제 유지 의지를 의심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의심은 은행 예금의 유출을 유발해 국내 금융 불안정 문제를 한층 악화시켰을 것이다. 막대한 금 준비금을 보유하고 있던 연준과 프랑스중앙은행은 다른 중앙은행들만큼 즉각적으로 위협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운신의 폭 역시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이 지점에서 국제 협력이 작동했어야 했다. 확장적 조치들을 국제적으로 조율했다면 각국 정부는 경기 부양과 금 태환 유지 사이의 진퇴양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국제적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곤경에 빠진 은행시스템에 대한 유동성 공급을 원활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 간의 정치적 대립, 국내 정치의 제약, 상호 모순된 인식 틀 등이 협력을 가로막는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 되었다. 협력에 실패한 상황에서 금본위제의 포기가 경기 회복에 필요한 전제조건이 되었다.

……

하지만 대공황의 심도와 지속성을 정책 결정자들의 근시안적 사고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설명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사실과도 다르다. 이 나라들의 정책 담당자들이 금본위제 포기를 거부한 것은, 포기할 경우에 인플레이션이 재발할 수도 있다는 합당한 우려 때문이었다. 1920년대의 오랜 인플레이션은 소득 분배와 세금 부담을 둘러싼 치열한 대립의 부산물로서 사회를 병들게 했다. 선거제도의 구조 때문에 약체 정부가 연이어 들어선 나라에서는 이런 소모적 분배 전쟁을 평화롭게 끝내기가 특히 어려웠다. 인플레이션 비용이 인내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러서야 휴전이 선언되었다.

금본위제의 재건으로 분배를 둘러싼 이해관계 집단 간의 협약이 확정되었다. 금본위제는 예산정책에 대한 암묵적인 행동 준칙을 동반했다.

……

시간이 가면 경제정책처럼 정치제도도 환경 변화에 대응해 바뀔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제도를 형성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따랐으며, 이 비용이 변화의 장애로 작용했다. 그리고 정치제도의 변화는 정치적 합의를 필요로 했다. 정치제도 자체가 합의의 장애물이 된 경우에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 고착될 수도 있었다. 그 결과로 1930년대에 여러 나라의 정책 담당자들은 금본위제라는 구속복을 벗으려고 발버둥쳤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런 무능의 결과로 이 나라들은 대공황의 손안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1세기 자본

– 토마 피케티 / 장경덕 역 / 글항아리 / 2014.09.12


……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1930년대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파급 효과로 민간 주도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이 크게 흔들렸다. 1929년 10월 월가의 추락으로 촉발된 ‘대공황’이 선진국을 강타했는데, 그 엄청난 충격은 역사상 최대였다.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에서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되는 노동인구가 일자리를 잃었다. 모든 나라가 19세기에 그리고 대체로 1930년대 초까지 정부가 경제에 간섭하지 않는 ‘자유방임주의’를 고수했는데, 이 전통적인 교리는 영구적으로 신뢰를 잃었다. 많은 나라가 더 높은 수준의 국가 개입주의를 선택했다. 당연하게도 정부와 일반 대중은 세계를 재앙으로 이끌면서도 스스로는 더 부유해진 금융 및 재계 엘리트들의 지혜에 의문을 제기했고, 다른 유형의 ‘혼합’경제에 관해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통적인 형태의 사유재산과 더불어 기업에 대한 다양한 수준의 공공 소유를 허용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금융시스템과 더 전반적으로 민간 주도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해 강력한 규제와 감독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은 볼셰비키가 확립한 국가주의 경제 시스템의 위상을 강화했다.

……

…… 각국 정부는 때로 해외에서 직접 돈을 빌리기도 했다. 미국의 순해외자산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마이너스 포지션이었지만 이렇게 다른 국가들이 돈을 빌려가는 바람에 1950년대에는 플러스 포지션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국부는 변하지 않았다.

결국 1913~1950년 자본/소득 비율의 하락은 유럽의 자살과도 같은 역사였으며, 특히 유럽 자본가들에게는 안락사나 다름없었다.

……

2008년의 금융위기가 대공황만큼 심각한 붕괴를 초래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는 부유한 국가들의 정부와 중앙은행이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허용하지 않았고 1930년대에 전 세계를 대혼란의 나락에 빠뜨렸던 은행의 줄도산을 막기 위해 필수적인 유동성 공급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1929년 주가 대폭락 이후 거의 모든 곳에서 횡행한 “청산주의자”의 통설과는 상반된 이러한 실용주의적 통화정책과 금융정책은 최악의 상황을 피하도록 해주었다.(1929년 후버 미 대통령은 휘청거리는 기업은 청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는 실제로 그렇게 청산이 진행되었다.) 이번 금융위기에 대응했던 실용주의적 개입 정책은 또한 중앙은행이 가만히 앉아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인플레이션만 억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전 세계에 상기시켜주었다. 총체적인 금융공황 상태에서는 정부와 중앙은행이 긴급 자금을 공급하는 최종대부자로서 필수적인 역활을 한다. 사실상 이 두 기관은 비상시에 경제 및 사회체제의 총체적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공공기관이다.

……

…… 대공황 초기에 선진국의 중앙은행들은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금본위제를 뒤늦게 폐지했고 중앙은행들은 위기에 빠진 은행을 구제하기 위한 유동성을 만들어내기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은행들의 파산이 계속되었고 위기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세계는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이 비참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일 이후 모두가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주요 기능이며, 따라서 중앙은행이 ‘최종대부자’의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

이는 1963년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과 애나 슈워츠(Anna Schwartz)의 기념비적인 저서 『미국 통화사(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에서 특히 극명하게 드러난다. 화폐 경제학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인 프리드먼은 이 중요한 연구에서 방대한 기록들에 근거해 1857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 통화정책의 변화를 상세히 관찰한다. 물론 이 책의 주안점은 세계 대공황이다. 프리드먼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식시장 폭락으로 신용위기를 야기하고 경제를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에 빠뜨려 결국 역사상 유례없는 정도의 침체로 몰고 간 것은 연방준비제도의 과도한 긴축정책이었다. 대공황은 주로 화폐적인 문제였고 따라서 해결책 또한 화폐였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프리드먼은 다음과 같은 명확한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냈다. 자본주의 경제의 일정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으로 화폐의 공급을 늘릴 수 있는 통화정책이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통화주의자들은 공무원 수를 늘리고 사회적 이전지출 프로그램을 마련했던 뉴딜정책은 비용이 많이 들고 쓸모없는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를 구해내기 위해서는 복지국가나 정부의 문어발식 정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연방준비제도만 잘 운영하면 된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세계질서

– 레이 달리오 / 송이루,조용빈 역 / 한빛비즈 / 2022.06.01


…… 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통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1918년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자 (특히 미국에서) 광란의 1920년대로 알려진 경기 호황이 시작되었다. 다른 모든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는 그 뒤의 부채 증가, 자산 버블, 그리고 심각한 빈부 격차로 이어진다.

1930년대에는 여러 국가에서 동일한 사태가 발생했다. 1930년과 1933년 사이에는 전 세계적 부채 위기로 인해 경제가 위축되어 사실상 모든 국가가 통화를 대량 발생하고 경쟁적으로 평가절하를 실시했다. 이는 통화 가치를 하락시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부를 차지하기 위한 국내의 갈등은 더욱 격해졌다.

…… 1929년 대공황에 이은 전 세계적인 불황은 거의 모든 국가의 국내 상황을 혼란으로 이끌었다. 절박한 국민은 대중적이면서 전체적이고 국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지도자와 정책에 열광했다. 각 국가의 상황이나 민주화 진행 정고 등에 따라 좌파 또는 우파 어느 한쪽으로 쏠렸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경제 상황이 최악인데다 민주주의 기반이 취약했으므로 내부적으로 극심한 갈등을 겪은 후 우파 출신의 전체적이면서 대중적인 지도자(즉 파시스트 지도자)가 출현했다. 한편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소비에트연방과 중국에서는 좌파 중심의 지도자(즉 공산주의 지도자)가 권력을 잡았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비교적 경제 상황이 양호했고 민주주의 경험이 풍부했으므로 다른 나라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이전의 지도자보다 더 권위주의적이고 대중적인 지도자가 나타났다.

……

1929년 대공황으로 부실 부채가 문제가 되자 미국의 은행들은 여신 한도를 축소했고 이로 인해 해외의 차입국들은 돈을 빌리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이와 동시에 불황의 여파로 수요가 감소하여 미국의 수입이 큰 폭으로 줄었다. 소득이 줄어들자 수요도 감소하여 신용 문제가 점점 심각해져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미국 정부는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주의 정책을 도입해서 1930년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통과시켜 관세를 인상했고, 이로 인해 다른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관세를 인상해서 국내 산업과 일자리를 보호하는 정책은 많이 채택되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생산이 감소하기 때문에 효율적인 방식은 아니다.관세 전쟁을 벌이는 국가는 수출이 감소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불황을 초래한다. 그러나 관세로 인해 보호받는 집단에게는 이익이며, 이를 부과하는 지도자에 대한 지지도가 올라간다.

소비에트연방은 여전히 1917년부터 1922년 사이에 발생한 혁명과 내전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폴란드와의 전쟁에 많은 자금이 소요되었으며 1921년에는 기근이 덮쳤다. 1930년대 내내 정치적 숙청과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중국도 1928년과 1930년 사이에 내전과 빈곤 그리고 기근으로 고통을 겪었다. 결국 1930년대 경제 상황이 약화되고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하자 이들 국가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설상가상으로 미국과 소련에 가뭄이 발생해 상황이 더욱 안 좋아졌다. 경제 상황이 최악일 때 가뭄, 홍수, 질병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조직 구성원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다. 소련에서는 정부의 극단적인 정책과 맞물려 수백만 명이 아사했다. 독일에서는 내부적인 권력 다툼과 나치 독일의 공포심 때문에 수십만 명을 간첩으로 몰아 재판 없이 처형했다.

디플레이션형 불황은 채무자에게 충분한 자금이 없어 이자를 제대로 갚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부채 위기다. 따라서 통화량을 늘리고 부채를 재조정하고 정부의 대규모 재정 지출 프로그램으로 화폐와 신용의 공급을 증가시켜 가치를 하락시키는 정책을 도입하는데 문제는 얼마나 빨리 이런 조치를 취하느냐다.

미국은 1929년 10월 대공황이 발생한 지 3년 반이 지난 1933년 3월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조치를 취했다. 취임 100일 만에 그는 대형 정부 지출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재원은 큰 폭의 세금 인상과 연준의 통화 발행이었다. …… 1933년부터 1936년 사이 주가지수는 200퍼센트 이상 상승했고 실질 경제 성장률은 무려 9퍼센트에 달했다.

1936년이 되자 연준은 돈줄과 신용 한도를 조여 인플레이션에 대처하고 과열 양상을 띠던 경제 성장 속도를 둔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기반이 약했던 미국 경제는 다시 불황에 빠졌고,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안 좋은 상황이 닥쳐 국내 및 국제적 갈등이 점점 고도되었다.



레이 달리오의 금융 위기 템플릿

– 레이 달리오 / 송이루,이종호,임경은 역 / 한빛비즈 / 2020.02.24


규모 면에서 훨씬 극단적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장기 부채 사이클은 단기 부채 사이클과 비슷한 면이 많다. 둘 다 부채 부담이 높고 부채 문제를 해결할 통화 정책의 효과가 떨어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기 부채 사이클은 주로 작은 호황과 침체를 불러오는 데 반해, 장기 부채 사이클은 대규모 호황과 불황을 불러온다. 지난 1세기 동안 미국은 두 번의 장기 부채 위기를 겪었다. 첫 번째는 1920년대 호황에 이어 발생한 1930년대 대공황이었고, 두 번째는 2000년대 초 호황에 이어 2008년에 시작된 금융 위기였다.

……

버블 시기에 벌어진 빈부 격차는 불황기에 힘들어하는 소외 계층의 분노를 일으키기 쉽다. 부자와 빈자가 정부 예산을 공유해야 하는 상황에서 불경기를 맞게 되면 경제적 · 정치적으로 갈등이 빚어진다. 이러한 시기에는 좌우 가릴 것 없이 포퓰리즘(Populism)이 득세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 경제와 사회가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려면 무엇보다도 국민과 정치체계가 포퓰리즘에 대응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다음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날 미국에는 불평등과 포퓰리즘이 떠오르고 있는데, 이는 1930년대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두 시기를 살펴보면 상위 0.1%의 순자산은 하위 90%의 자산을 모두 합친 금액과 거의 같았다.

……

이 장에서는 1930년대 미국의 부채와 경제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당시 경제와 지정학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때문에 미국 내에서든 미국과 다른 국가와의 관계(특히 독일과 일본)에서든 경제적 · 정치적 상황의 상호 작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독일과 일본은 유산자(우파)와 무산자(좌파) 사이에 내분이 있었다. 때문에 자신들의 민주주의 방식으로 독재 권력을 획득한 포퓰리즘, 독재, 국수주의, 군국주의 성향의 지도자들은 경제 파탄에서 자국을 구해내겠다고 주장하며 더욱 득세하게 되었다. 또한 이 두 나라는 기존의 강국들과 필적할 만큼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게 되면서 외국과 경제 및 군사 갈등에 직면했다.

이는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s Trap)의 대표적인 예이다. 다시 말해 부상하는 신흥 강국과 기존 강국이 서로 기선을 제압하려다 무력 충돌을 일으킨 후, 하나 혹은 복수의 승전국이 패권을 쥐게 되면 한동안 평화의 시기가 찾아온다. 그리고 다시 도전장을 내미는 국가가 나타나면 이 모든 과정이 처음부터 반복된다.

1930년대 전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1930년부터 유럽에서 공식적으로 전쟁이 발발한 1939년, 그리고 진주만 폭격이 일어난 1941년까지의 지정학적 주요 사건을 간단히 살펴보자. 1939년과 1941년이 각각 유럽과 태평양에서 공식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해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에는 경제적 성격을 띠던 갈등이 심화되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점차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그보다 10년 전에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갈수록 경제적 · 군사적 팽창주의 노선을 강화하게 된 독일과 일본은 자원과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영국과 미국, 프랑스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전쟁으로 번졌으며, 이 전쟁은 어느 나라(미국)가 새로운 세계 질서를 정립할 힘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따라, 같은 과정이 다시 일어날 때까지는 평화기는 무사히 유지된다.



화폐 전쟁

– 쑹홍빙 / 차혜정 역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07.28


우리 공화국의 진정한 위협은 보이지 않는 그림자 정부다. 그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문어처럼 끈적거리는 무수한 촉수로 우리의 도시와 주, 국가를 단단히 휘감고 있다. 이 거대한 문어의 머리는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 그룹 및 국제 금융재벌들과 결탁한 금융의 거두들이다. 그들은 사실상 미국 정부를 조종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다.

통화 공급량을 장악함으로써 정부를 통제하면 국민의 재물과 자원을 수탈하는 것이 더욱 쉬워진다. 금융재벌이 이 나라에서 탄생하던 초기에 그렇게도 모든 권력과 재산에 집중하면서 열을 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제 금융재벌들과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 그룹은 이 나라의 신문과 잡지 대부분을 통제했다. 그들은 신문의 전문 칼럼을 이용해 정부 관리들을 비난했으며, 자기들의 입맛에 안 맞는 관리는 여론으로 압박해 정부에서 쫓아냈다.

은행가는 사실상 공화당과 민주당을 통제하고, 양당의 정치 강령을 작성하며, 정치 지도자를 통제했다. 사유 기업의 리더를 임용하고, 갖은 수단으로 정부 고위층을 자기들의 부패한 장사에 동원했다.

– 존 하일란(John Hylan), 뉴욕 시장, 1927년

레닌은 화폐 가치를 인하하는 것이 자본주의 제도를 전복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연속되는 인플레이션 과정에서 정부는 비밀리에 국민의 재산 일부를 몰수할 수 있다. 이 방법을 통해 마음대로 국민의 재산을 뺏어올 수 있다. 다수가 가난해지는 과정에서 소수는 벼락부자가 된다. 어떤 수단도 통화 팽창만큼 은밀하고 확실하게 현 정권을 전복할 수는 없다. 이 과정은 잠재적으로 각종 경제 규칙의 파괴 요소를 누적하게 된다. 100만 명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문제의 근원을 발견해내기 어렵다.

– 케인스, 1919년


1933년 3월 4일,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미국 3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루스벨트는 취임하자마자 월가와의 대립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는 취임 당일 전국 은행들에 3월 6일부터 영업을 중지하라고 선포하고, 장부에 대한 감사가 끝난 후에 영업을 재개하도록 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전국의 은행이 처음으로 문을 닫는 조치로, 미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세계 최대의 경제주체인 미국에서 은행 영업이 거의 중단된 초유의 사태는 적어도 열흘간 지속되었다.

곧이어 루스벨트는 후버 시대에 이미 시작된 월가에 대한 조사 작업도 늦추지 않고 공격의 방향을 모건 가 쪽으로 돌렸다. 일련의 청문회에서 잭 모건과 회사 대표는 미국의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크게 체면을 구겼다.

루스벨트는 월가 은행가들에게 가하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933년 6월 16일에는 ‘글래스-스티걸 법’에 서명함으로써 모건사를 모건은행과 모건스탠리로 분리시켰다. 모건은행은 상업은행의 전통적 영역에만 종사하고, 모건스탠리는 투자은행 업무만 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뉴욕 증권거래소에도 철퇴를 가해 ‘1933년 증권법’과 ‘1934년 증권거래법’을 통과시키고 증권거래위원회(SEC)를 설립해 증권시장에 대한 감독을 맡도록 했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은 대수술 요법으로 여론의 호평을 받았다. 이 조치는 국민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억눌려온 월가 은행재벌들에 대한 불만을 해소시켰다. 모건 가문조차 이렇게 인정했을 정도다. “나라 전체가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한 숭배의 분위기로 충만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불과 1주일 만의 성과만도 대단하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다.”

1933년 뉴욕 증권시장이 개장하면서 54%라는 놀라운 수익을 기록했다.

영웅이 된 루스벨트는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금융 투자가들은 문명 성전의 보좌에서 달아났다. 우리는 마침내 이 신성한 전당의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문제는 역사의 진상과 매스컴이 만들어낸 이미지 사이에는 언제나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 관련 자료

◎ 브로델의 장기순환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대공황이 실제로는 영국의 헤게모니가 무너지는 전환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브레턴우즈에서 미국이 영국의 패권을 계승한다.


◎ 1930년대 위기의 주요국 대응


◎ 레이 달리오의 제국들의 상대적 위치


◎ 레이 달리오의 제국 흥망 사이클


◎ 1931년 주요국 자본 흐름

– 1931년의 주요국 외채 네트워크 (출처: De Broeck and others, forthcoming)


◎ 대공황 당시의 다우지수

– 대공황 당시의 다우지수는 1929년의 고점에서 1932년 저점까지 -81%의 하락을 보인다. (회색 구간은 경기침체를 의미)


◎ 대공황 당시의 미국 실업률

– 대공황 당시의 실업률


◎ 1928년 FRB는 통화 긴축 정책에 돌입하여, 2월에서 7월 사이 금리를 5%로 1.5% 올렸다. FRB는 경제성장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투기성 신용의 확대를 막고자 했다. 이듬해인 1929년 8월에 다시 6%로 인상했다. 단기 금리가 상승하여 수익률 곡선이 완만해지거나 장단기 금리가 역전되면 유동성이 부족해진다. 결국 버블을 터뜨린 것은 긴축이었다.

– 단기 채권(미국 국채 3개월물) – 수익률 곡선(10년물과 3개월물 금리 차)


◎ 미국의 M1, M2 통화(1926~1942년)


◎ 미국의 소득불평등

– 미국의 소득불평등, 1910~2010년

미국 국민소득 중 상위 10퍼센트의 몫은 1910년대와 1920년대에 40~50퍼센트에서 1950년대에 35퍼센트 미만으로 줄었다.(이는 쿠즈네츠가 기록한 것이다.)


◎ 미국 연준의 기준금리


◎ 1929~41년 미국의 국민총생산(GNP) 추이



#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Great Depression – Wikipedia

[쟁점:현재의 이슈들] 1930년대의 대불황과 미국의 뉴딜 | 마르크스21 (marx21.or.kr)

1929년의 경제공황은 무엇인가? (pressian.com)

1929 대공황①…뉴욕증시 폭락, 재앙의 신호탄 – 아틀라스뉴스 (atlasnews.co.kr)

1929 대공황②…전쟁 후유증에 커지는 기형아 – 아틀라스뉴스 (atlasnews.co.kr)

우리역사넷 (history.go.kr)

대공황(1929년~1939년)과 세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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