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 국보 제18호

※ 황성열의 세계 – 문화재 : http://yellow.kr/nt.jsp

※ 국보 제18호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 1962년 12월 20일 지정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고려시대 작품이다.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는데,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무량수전을 포함하여 부석사는 참 멋있는 곳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우선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일부분을 인용한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 건물이다. 이름이 무량수전이니 당연히 아미타불이 안에 모셔져 있다.

※ 참조 :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 국보 제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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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흘림의 세 가지 가설

1. 광학적 교정

가장 오래된 가설로, 저 멀리 알렉산드리아의 헤론(AD 10~70)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통형 기둥은 바라볼 때 가운데가 좁아 보이므로, 그(건축가)는 기둥의 그 부분을 더 두껍게 만든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리스의 건축가들은 건물이 휘어져 보이는 것을 피하려고 다양한 종류의 환영효과를 사용했다. 배흘림도 그런 ‘광학적 교정’의 기법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2. 미학적 효과

배흘림이 직선의 딱딱함을 피해 기둥에 생기를 주는 ‘미학적 효과’를 위한 기법이라는 가설은 19세기 말에 처음 등장했다. 건축가 펜로즈(1817~1903)에 따르면 배흘림은 “동물의 사지에 늘 곡선의 윤곽을 부여하는 자연의 습관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건축가 조지 트레벨리언 경은 도리스 기둥의 배흘림이 (팔뚝의 알통처럼) 긴장된 근육의 부풀어 오른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주장한다. 유홍준이 인용한 곰브리치의 견해도 이와 다르지 않다.

3. 공학적 기능

배흘림이 ‘공학적 기능’을 갖고 있다는 마지막 가설은 멀리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태생으로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 활동했던 수학자 라그랑주(1736~1813)에 따르면, 배흘림은 기둥을 구조적으로 강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와 배흘림기둥이 여러 기둥 형식 중에서 하중을 지탱하는 데에 공학적으로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약 4/3 : 1의 비율로 배흘림기둥이 원통형기둥보다 더 튼튼하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보면 3번이 가장 실체에 가까울 것 같은데…
 

중앙SUNDAY 기사 중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43> 서현의 『배흘림기둥의 고백』을 부분 인용하면:

서현의 『배흘림기둥의 고백』은 『사라진 건축의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처음 세상에 나왔다가, 수정을 거쳐서 대중서적으로 다시 발간됐다. 새 제목은 ‘고백’이라는 도발적인 단어를 품고 있다. 누구의 ‘고백’인가? 배흘림기둥 자신이다. 거기에 기대어 감동한 사람들이 아니다. 책의 태도를 구호로 정리하면 이렇다. 구라 금지! 감상 금지!

“배경의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우아한 용마루와 처마 곡선”을 “백자의 허리, 흰 버선코”에 비유하는 기존의 설명은 “메시지 없는 수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백자와 버선은 아무리 잘못 만들어도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지만 “건물은 잘못 만들면 붕괴”해버리는 위험한 작업이다. 아름다움은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얻게 된 우아한 결과물”일 뿐이지 집을 짓는 목수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을 거라는 말이다.

전통 건축사가의 입장이 아니라 현대건축가인 저자는 기꺼이 목수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는 ‘최적화’와 ‘양식화’라는 두 개념으로 전통건축의 발달사를 추적해 나간다. 숲 속의 나무가 건물이 되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형태로 진화하는 최적화 과정을 거치고 나면 하나의 형식이 완성된다. 완성된 형식이 “이유가 생략된 채 형태가 반복되어 전승하는” 과정이 양식화다.

저자가 주로 주목하는 것은 ‘최적화’ 과정이다. 양식화 과정을 겪으면서도 건물에 남아 있는 여러 ‘흔적기관’들에 대한 분석은 이런 진화론적 추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유물로 남아 있지 않은 진화의 과정을 추론하는 것은 “합리적 상상력, 선입견 없는 관찰의 경험”인데, 그 기초가 되는 것은 나무라는 재료에 대한 이해다. 민가의 단출한 구조는 대략 열 번 찍어 넘어간 목재의 굵기와 크기에 적응한 형식이지만 사찰이나 궁전처럼 큰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이 제한된 재료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술이 창안되어야 한다. 여기서부터 그의 논의가 본격화된다.

건물의 기본은 기둥과 지붕이다. 집안에 빗물이 새어서도 안 되고 밖에 노출된 나무 기둥이 빗물에 썩어서도 안 된다. 이게 지붕의 진화 방향을 결정짓는 기본이다. 빗물로부터 기둥을 보호하기 위해서 처마는 길어졌고, 햇빛이 드는 날에는 기둥이 빨리 건조될 수 있도록 그 끝은 들어올려 졌다. “흰 버선코” 같이 살짝 들어 올려진 우아한 처마 곡선은 이를 위해 최적화된 형태들이다. 더 긴 처마가 달린 지붕에 대한 요구는 지붕을 이고 있는 기둥과 기둥들을 연결하는 보(대들보)의 진화 방향을 결정했다.

마침내 고려시대에 “전통 건축사를 통틀어 최고의 발명”이라고 부를 만한 ‘포작’이 등장했다. 포작으로 기둥과 보는 보다 “합리적으로” 연결됐다. 무량수전의 길고 아름다운 처마선은 이런 포작의 탄생으로 가능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은 하나의 기둥 위에 하나의 포작을 얹는 초기 주심포 양식의 대표적 건물이다. 이후에는 여러 포작들을 일렬로 배치한 다포식 건물들이 등장하게 된다.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다포식 건물은 결국 건물의 생존을 위한 부단한 진화의 결과였다.

장식 없는 포작 아래 가운데 부분이 임산부처럼 볼록한 배흘림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 그 모양에 관해 교과서는 “기둥 중간 부분이 가늘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보정하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한다. 이에 반기를 들고 저자가 찾은 답은 주초다. 배흘림기둥은 조그만 동그라미 모양의 석재 주초 위에 올라서 있다. 기둥의 밑변이 작으면 작은 석재로도 충분하다. 건축을 지배하는 원리는 미의식이 이전에 합리적인 경제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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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으로 개경을 떠나 청량산성으로 피신하던 도중 영주 부석사에서 무량수전이라는 현판의 글씨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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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 http://yellow.kr/blog/?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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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보이는 기둥은 무량수전 네 귀퉁이의 추녀 밑을 받치고 있는 활주라는 것인데, 보통은 기단 바깥쪽에 세우는 경우가 많지만 무량수전에는 기단 끄트머리에 세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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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前面) 기둥 사이에는 중앙어간(中央御間)과 양협간(兩夾間)에 분합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고 단간(端間)에는 창문을 달았다. 화강석의 기단은 지대석 · 면석 · 갑석이 정연하게 갖추어졌고 중앙에 돌계단을 놓았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

일반적으로 건물 정면쪽으로 불상을 모시지만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국보 제45호)은 석굴암 부처와 마찬가지로 동쪽을 바라 본다. 좌우 협시보살이 없다. 또한 천장을 막지 않고 모든 부재를 노출시킴으로써 기둥, 대들보, 서까래의 조화를 한눈에 보여주며 따라서 별로 커보이지 않는 건물인데도 안에 들어서면 그 웅장한 공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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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마당에서 바라 본 소백산맥의 연봉(連峰)들. 부석사는 백두대간에서 소백산맥이 나누어지는 봉황산 중턱에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은 “태백산맥 전체가 무량수전의 앞마당”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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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팔작지붕
 

건물의 기본은 기둥과 지붕이다. 집안에 빗물이 새어서도 안 되고 밖에 노출된 나무 기둥이 빗물에 썩어서도 안 된다. 이게 지붕의 진화 방향을 결정짓는 기본이다. 빗물로부터 기둥을 보호하기 위해서 처마는 길어졌고, 햇빛이 드는 날에는 기둥이 빨리 건조될 수 있도록 그 끝은 들어올려 졌다. “흰 버선코” 같이 살짝 들어 올려진 우아한 처마 곡선은 이를 위해 최적화된 형태들이다. 더 긴 처마가 달린 지붕에 대한 요구는 지붕을 이고 있는 기둥과 기둥들을 연결하는 보(대들보)의 진화 방향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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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배치도
 

※ 영주 부석사의 국보들

– 무량수전 앞 석등 (국보 제17호) : http://yellow.kr/blog/?p=57

– 무량수전 (국보 제18호) : http://yellow.kr/blog/?p=66

– 조사당 (국보 제19호) : http://yellow.kr/blog/?p=78

– 소조여래좌상 (국보 제45호)

– 조사당 벽화 (국보 제46호)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문화재청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부석사 무량수전
네이버 지식백과(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부석사 무량수전
위키 백과 : 부석사 무량수전
2013-01-06  기둥 볼록하게 만든 게 정말 착시현상 때문일까
2012-06-22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http://gibumi.tistory.com/
http://cafe.naver.com/geochips/3430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 국보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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